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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들의 천국

놀잇감 2009. 3. 17. 16:00

역시나 오래 별렀던 퐁피두센터 특별전에 다녀온지 일주일이 다 됐나보다. 감동은 벌써 많이 식었지만 늦게라도 적어두지 않으면 연말에 2009 베스트 정리할 때 멍하니 까먹을지도 몰라서 조바심이 났다.
베스트 3에 드는 전시일 가능성이 높으니까. ^^
<퐁피두센터 특별전-화가들의 천국>은 기대를 크게 했는데도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드문 전시였다. 호앙 미로의 대작들은 비행기에 실을 수가 없을 만큼 크기 때문에 캔버스를 분해해서 다시 조립하는 예행연습을 파리에서 해본 뒤에 옮겨왔다는 둥, 이미 뉴스에서도 익히 선전을 했기 때문에 혹시나 과하게 기대하며 상상력을 부풀렸다가 펑 바람터진 풍선처럼 실망할까봐 걱정스러웠는데, 전혀 기우였다는 얘기다. 평일 오후임에도 사람들이 꽤 많아서 그림을 좀 오래 감상하려다 보면 간혹 누군가와 부딪치거나 발을 밟는 사태가 벌어지는 것이 아쉽기는 했다. <꽃보다 남자>에서 윤지후가 시립미술관 휴관일에 금잔디만 홀로 데려가서 구경시켜주던데, 젠장 나도 그러구 싶단 말이닷~!! 언제부턴가 나 같은 문화허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많아져 좀 유명하다 싶은 전시가 열리는 미술관은 언제나 도떼기 시장이다. 으휴...

과거 경험상 시립미술관의 도슨트는 덕수궁 미술관 도슨트들보다 워낙 성의 없이 설명을 하는 데다(늘 비싼 대규모 전시를 기획하기 때문에 관람객이 많아서 그러는 것일까?)  횟수도 몇번 없어 시간도 맞질 않아서 이번엔 거금 3천원을 들여 오디오 가이드를 빌렸다. 처음엔 매표소에 사람들이 없길래 도록을 사서 읽어보며 다닐 작정을 했는데 전시장에 들어가보니 그럴 여유는 없어 보였기 때문. 예상은 했지만 이번에도 오디오 가이드 내용은 너무 피상적인 이야기만 담겨 있어 큰 도움이 되지 않았던 것 같지만, 이어폰이 귀를 아프게 하는 끼우기 형태가 아니라 다행이었고 미리 그림 공부를 많이 안하고 갔으니 없는 것보다는 나았음.

미로, 마티스, 피카소, 샤갈, 브라크, 보나르, 칸딘스키, 파울 클레... 이런 것이야 말로 <거장전>이라는 이름에 걸맞지 않은가 싶은 멋진 작품들을 연이어 만날 수 있었으니 전시실을 옮길 때마다 가슴이 두근두근 했는데, 더욱 기뻤던 건 깜짝 선물처럼 장 뒤뷔페의 그림도 여러 작품 만날 수 있었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나 뉴욕에 가지 않는 한 다시는 뒤뷔페 그림을 보지 못할 거라 막연히 생각하고 있었다가, 동행이었던 정민공주랑 나랑 거의 폴짝폴짝 뛰며 신나했다.

장 뒤뷔페 [행복한 시골풍경]

물론 이 사진의 색감은 원작보다 훨씬 흐려 속상하지만 동심의 세계를 담아낸 듯한 뒤비페의 그림들이 연상되는  시기의 작품. 미로의 대작 옆에 걸려 있던 검은 바탕의 암호같은 선들이 어지러이 그려져 있는 농-리유 연작도 인상적이었지만, 난 역시 아기자기한 그림들이 좋다!

정말로 천국이 있는지 어쩐지, 아니 그런 건 없다고 거의 믿고 있지만, 정말로 천국이 있고 내가 거거 갈 수 있다면 나는 만날 멋진 화가들의 그림이나 휘휘 보러다니는 걸로도 충분할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 안 아프게 이왕이면 훨훨 날아 다니면서 ^^

앞에 서면 저도 모르게 흠칫 숨을 멈추게 되는 거장들의 대작이 많았고, 올리브 잎들을 모아 향기로 방을 꾸며놓은 페노네의 <그늘을 들이마시다> 같은 작품은 참으로 기발하고 놀랍고 싱그러워 절로 기분이 좋아졌다. 1999-2000년에 만든 작품이라는데 지금까지도 그윽한 올리브 잎 향기가 처음엔 얼마나 더 강렬하고 생명력 넘쳤을지!

좋은 작품들이 하도 많아서 우리는 다른 사람들의 동선과 상관없이 2, 3층을 여러번 오가며 특히 좋았던 작품을 보고 또 보고, 마음에 담아두려고 꽤나 노력을 하며 미술관을 나서기 전에 거의 언제나 습관적으로 하는 순위 매기기를 했다. 어느 그림이 제일 좋았는지, 누가 딱 하나만 가지라고 하면 어느 그림을 갖겠는지... ^^

사실 이번엔 좋아하는 화가들과 작품들이 많아서 선뜻 하나를 고르기가 쉽지 않았으나 추리고 보니 최종으로 남은 후보작이 둘 다 마티스였다.  

<폴리네시아-바다>와 연작이었던 이 <하늘>은 종이를 오려 붙인 단순한 콜라주 작품이지만 바라보고 있으면 어찌나 눈이 시원해지던지...
아 참..
<꽃보다 남자>를 꾸준히 본 사람이면서 눈썰미 있는 사람이라면 이 그림 카피가(사이즈가 훨씬 작음) 드라마 초반부에서 F4의 휴게실 벽에 걸려 있었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르겠다. ^^
나는 전시회에 빨리 못가보는 대신 퐁피두전시회 공식 홈페이지에 하도 들락거려서 알고 있었으므로, 언뜻 뒷배경에 이 그림이 스칠 때마다 속으로 어서 그림보러 가봐야 할 텐데, 라고 부르짖곤 했다. ㅋ (구준표네 집엔 보나르의 <미모사가 피어 있는 아틀리에>와 마티스의 <목련이 있는 정물>, 페르낭 레제의 <여가> 등도  걸려있다! ㅎㅎ)

퍼온 사진으로는 역시나 원작의 생생한 감동과 느낌을 전하기에 역부족임을 알면서도 이렇게 굳이 사진을 퍼다 붙여넣는 것은 순전히 기억력 나쁜 나를 위한 배려다. 도록이 있기는 하지만, 매일 들락거리는 블로그만큼 접근성과 유용성이 뛰어난 건 아니니까...

암튼 <붉은색 실내>는 눈부신 빨간색이 언제나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줄 것만 같은 느낌...

샤갈의 <무지개>도 좋기는 했지만 나의 새공포증 때문에 그의 그림에 빠지지 않는 닭머리가 무서워서 집에 걸어두면 밤에 으스스할 것 같다. ;-p

누가 정말로 주겠다는 것도 아닌데, 우리는 미술관 카페에 앉아서 정말 꽤나 진지하게 어느 그림을 가질 것인가 오래 고민을 하다가 나중엔 속으로 킬킬 웃었다. 누가 준댔냐고!!
그래도... 어쨌거나... 나의 최종적인 선택은 마티스의 <붉은색 실내>.
만약에 집이 갤러리만큼 공간 많고 벽이 넓다면 마티스의 <폴리네시아-하늘>을 갖겠지만, 지금 당장 그림을 하나 집어들고 나가라고 한다면 당장 걸어둘 곳이 마땅칠 않으니까... 라는 것이 나의 변명이었음.
남들이 비웃거나 말거나, 미술관에서 좋은 그림을 보다가 만일 작품을 하나만 가질 수 있으면 어떤 걸 가져갈까 고민하는 과정은 가슴아픈 갈망이면서 동시에 대단한 행복이다.

아참..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불만은, 한장에 무려 천원씩이나 하는 공식 엽서들의 인쇄 품질이 바닥이라는 것!
차라리 하나은행에서 입장할 때 공짜로 주는 엽서의 인쇄상태가 더 나은 느낌이니 오죽할까.
원래도 미술작품의 색감을 제대로 살려내기란 어려운 일이지만, 이렇게 형편없는 색감의 엽서들은 처음 보는 것 같다! 마티스의 붉은색을 완전 벽돌색으로 해놓질 않나, 보나르의 화사한 봄빛깔들을 칙칙한 갈색으로 해놓질 않나... 전시 관람 마치고 아트숍에서 엽서 몇장을 사는 것이 큰 낙이었던 나는 너무 실망한 나머지 한장도 살 수가 없었다. ㅠ.ㅠ 그나마 5천원짜리 소도록을 3천원에 할인판매하고 있어서 구입하고는 애써 위로를 했지만... 앞으론 부디 엽서 제작업체 선정에도 신경을 좀 써주면 좋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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