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덕궁'에 해당되는 글 1건

  1. 2008.11.07 궁궐 나들이 20

궁궐 나들이

놀잇감 2008. 11. 7. 01:25


원없이 한옥을 구경하고 너른 마당을 거닐고 싶다면 뭐니뭐니해도 궁궐 나들이가 최고다. 
덤으로 단풍구경에 낙엽길 산책까지 욕심을 낸다면 가을에 창덕궁을 찾으면 된다.
걷는 걸 즐기지 않는데도 이상스레 나는 궁궐 나들이가 좋다.
이젠 문화재 보호를 위해 도시락 까먹고 돌아다니는 소풍이나 사생대회가 금지됐다지만
나는 중학교 3년 내내 거의 주말마다 경복궁으로 그림을 그리러 다녔고
어른이 된 뒤엔 계절에 따라 눈부시게 변하는 창덕궁과 후원 구경 다니는 것이 낙이었다.
일제때 훼손된 건물들을 복원하느라 창덕궁엘 가보면 늘 한구석은 공사중이었고
궁궐 관련 책을 보면 제대로 다시 짓지 않아 어느 문은 길과 틀어졌고 복원되어 깔린 어느 박석은 기계로 다듬어 인공미를 펄펄 풍긴다고 개탄을 해놓았지만, 그래도 나는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인정전이며, 대조전, 이름 까먹은 건물들을 이어놓은 회랑과 난간이 아름다운 복도를 이리저리 구경다니는 게 왜 그리 뿌듯하고 좋았는지.
궁궐 마당에만 들어서면 마음이 그윽하게 차오르는 것이 흐뭇하고 뿌듯해져 아무래도 전생에 궁궐에 사는 공주였나보다고 내가 중얼거리면, 일행들은 "공주가 아니라 궁녀였겠지!"라고 퉁박을 주기 일쑤지만 암튼 나는 창덕궁에 갈 때마다 후원이 우리집 뒤뜰이었으면 좋겠다는 허무맹랑한 꿈을 꾼다. 
연두색 여린 잎과 꽃잔치가 벌어지는 봄도 예쁘고,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각기 다른 빛깔로 옷을 갈아입는 가을도 아름답지만
새하얀 눈세상이 된 호젓한 궁궐 흙길에 발자국을 찍으며 다니는 기분을 만끽할 수 있는 겨울 창덕궁도 까무라치게 멋지다.

암튼 작년엔 한번도 가보지 못한 창덕궁에 가고 싶어서 궁궐 단풍놀이 가자고 지인들을 꼬드겨 지난 화요일에 다녀왔다.
대장금 (아직도!) 영향으로 일본관광객이 많다는 얘긴 들은 것 같은데, 요샌 나 말고도 궁궐나들이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는지 평일 오후인데도 한번에 들어가는 입장객이 엄청났다. 여나믄 명이 가이드를 따라다니며 설명 들을 때나 오붓하고 좋지, 백명 가까이 되는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려니 설명 듣는 건 아예 포기해야 할 정도고 사진을 찍는 것도 전각 구경도 마음에 찰 만큼 기회가 없었다. 
추억이 미화되는 경향을 감안한다 해도 올해 창덕궁 후원의 단풍은 정말 보잘것 없었고(가물어서 전국적으로 올해 단풍이 예쁘질 않다더니, 물도 들기 전에 잎이 반이상 말라붙은 모습이었다)
1년 넘게 발길을 끊은 사이 전각들의 기와를 대거 새로이 얹고 단청 또한 죄다 새로 칠해놓는 바람에 너무 새것 같아 나에겐 마냥 아쉬웠다. 지금이라도 왕족들이 사는 것처럼 갈고 닦는다면야 좋긴 하겠지만, 인정전 내부에 걸린 왜식 전등이며 커튼은 새카맣게 때가 찌들었는데 바깥 단청만 화려하게 새로 칠하면 뭣하나. 그렇다고 단청이 죄다 벗겨진 초라한 모습을 바라는 건 아니지만, 모름지기 궁궐이란 수백년 세월의 무게를 적당히 간직한 모습이어야 격에 맞는 것 같다.
계속된 복원과 보호 때문인지 창덕궁은 갈 때마다 관람코스가 조금씩 달라진다.
몇해전까지만 해도 최근에 복원한 낙선재를 매번 보여주더니, 치사하게 낙선재는 특별관람 코스로 나뉘었고
후원 깊숙한 곳에 있는 옥류천도 특별관람으로나 볼 수 있었다. 인터넷 예약으로 날을 잡아야 하는 특별관람은 이미 인원이 다 차고 없어 우린 결국 3천원짜리 일반관람으로 만족해야 했는데, 2년만에 찾는 창덕궁은 그래도 좋았다.


나는 궁궐에서도 화려한 단청보다 문의 꽃무늬 살대, 기와지붕 옆면의 세모난 공간('합각'이라고 한다)의 장식이며 난간 같은 게 참 좋다. 구석구석 어쩜 저렇게도 소박한 아름다움을 깃들여놓았는지...

애련지와 애련정



몇해전 가을엔 3초마다 탄성이 나올만큼 아름다웠던 후원의 단풍은 애련지 주변에서나 조금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나마도 연못 근처라 나무에 물이 올랐기 때문일 것이라 짐작했는데, 확실하진 않다.

고운 가을단풍을 볼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다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후원은 그저 숲만으로도 아름답고 거기 어우러진 정자와 전각들은 보기만해도 뿌듯하다. 




창덕궁에서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은 바로 후원 안에 자리잡은 부용지 주변이다.
부용지에 두 발을 담그고 있는 듯한 부용정도 아름답지만, 그와 마주보며 언덕에 서있는 주합루는 어쩜 그리도 우아하면서 위풍당당한지. 원래 2층으로 지은 한옥은 1층을 '각', 2층을 '누'라고 부르기 때문에 주합루는 엄밀히 2층만을 부르는 이름이다. 1층은 정조가 세운 그 유명한 '규장각'인데, 올라가볼 순 없었지만 위쪽은 단청을 새로 하지 않아 적당히 낡고 풍파를 이긴 모습이 마음에 들었다.

부용지를 굽어보며 서있는 주합루

단아한 부용정



옥류천과 낙선재를 보지 못해 어쩐지 아쉬웠던 우리는 창덕궁을 나서 안국동으로 걷다가 내친김에 운현궁에도 들렀다. 다채로운 단청이 없어도 한옥이 그 자체로 얼마나 우아하고 당당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건물들을 실컷 구경하려니 반나절 내리 걸었어도 다리아픈 줄을 모르겠더라.
운현궁 같은 한옥에 사는 건 몇번 죽었다 깨나도 불가능하겠지만, 아무려나 이런 한옥에 산다면 매일매일 열심히 산책하며 마음을 닦을 수 있을 것만 같다. ㅠ.ㅠ

운현궁의 드넓은 마당에 둘러쳐진 저 아름다운 담장을 보라! +_+

짧은 궁궐 나들이가 아쉬워서 겨울에 눈이 내리면 같이 또 오자고 약속을 하긴 했지만, 아무래도 나는 조만간 자유관람이 가능하다는 목요일에 날을 잡아서 마음껏 창덕궁 후원을 쏘다녀 봐야겠다는 생각이 사진을 올리면서 더욱 강해진다.
이왕이면 궁궐지킴이 같은 걸로 후원자도 되고 자원봉사를 해서 전각 안에 들어가는 영광도 누리고 싶지만, 워낙 청소하는 걸 싫어하니 매번 망설이다 포기하게 된다. 아쉬운 대로 철철이 궁궐 나들이나 하는 수밖에.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