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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21.08.22 양양연진 이야기 4

몇년 전만 해도 스노우캣 블로그에 올라오는 냥이 사진도 무서워서 잘 쳐다보지 못하던 나는 이제 없다. 주변에 반려묘 키우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귀여운 모습을 담은 사진들부터 차츰 익숙해지다가, 아깽이를 입양한 지인네 집에 가서 실물까지 알현하고 나니, 고양이는 무서운 영물이 아니고 (과거 공포증은 모두가 어려서 본 <전설의 고향>과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탓이다!) 키우고 싶지만 역량이 모자라서 그냥 지켜보며 함께 살아가는 생물이 되었다.

그 때문일까 몇달 전 고양이들에게 집사로 선택되는(선배 냥집사들의 표현이다. ^^;;) 일이 벌어졌다. 중학생들에게 현재 자기 머릿속에 어떤 생각들이 있는지 그림으로 그려보라고 종종 요구하는데, 요즘 내 머릿속을 그림으로 그린다면 길냥이 가족인 "양양연진" 이 생각이 거의 절반은 차지하지 않을까 싶다. 그러므로 2021년 6월 7일부터 시작된 "양양연진"과의 인연을 적어보기로 한다. 

엄청 오래된 다세대주택인 우리집의 구조가 좀 독특해서 집 바로 뒤가 축대이고, 내 방 창문을 열면 아래층 뒷베란다 지붕이 축대와 건물을 연결하고 있다. 그런데 초여름 활짝 열어둔 창문 밖에서 아주 가느다란 고양이 우는 소리가 들렸다. '야옹'이라고 표현하기에도 어려울 만큼 들릴듯말듯 흐느끼듯 작은 울음소리. 방충문을 열고 고개를 내밀자, 아기 고양이 두 마리한테 젖을 물리고 있던 어미 고양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사실 이 사진은 첫날 찍은 게 아니고 며칠 뒤다. ^^; 첫날엔 당연히 당황해서 서로 숨고 도망치기 바빠 (나는 왜?;;) 사진 찍을 겨를이 없었다.

너무나도 작은 새끼고양이와 어미냥에게 뭐든 먹여야겠다고 생각한 나는 황태포를 잘라 물에 적셔서 마실 물과 함께 내다보며 계속 동향을 살폈다. 그러나 이틀간 냥이 가족은 다시 오지 않았고 플라스틱 통에 담아준 황태포도 그대로였다. ㅠ.ㅠ 나 때문에 보금자리를 떠나 도망친건가 몹시 걱정하며, 혹시 모르니 외출했다 돌아오며 고양이 통조림을 사온 날 냥이 가족은  다행스럽게도 다시 나타났다. 나의 집사생활이 시작된 거다. ^^; 

근엄한 어미냥 양양이

얼른 사료와 츄르를 주문하고 본죽 통으로 사료와 물을 담아줄 식기를 삼아, 아침 저녁으로 밥을 주었다. 냥이들을 보며 떠오른 대로 이름도 지어주었으니.. 어미냥은 양양, 아깽이들은 색이 연해서 연이, 진해서 진이. 합해서 '양양연진'. 냥이들 사진을 주변에 자랑하면 셋다 미묘라고 칭찬이 자자한데 사실 양양이는 사진발을 잘 안받는다. 표정이 늘 시크하고 뚱해서 ^^; 실물보다 사진이 별로임. ㅋㅋ

처음엔 보기만 해도 하악질을 해대던 양양이는 열흘쯤 지나자 사료 셔틀을 하는 인간임을 대충 짐작했는지, 내가 방충문을 열고 말을 걸며 사료준비를 시작하면 경계의 눈빛으로 쳐다보고만 있게 되었다.

 

 

아깽이들은 물론 문여는 소리만 나도 도망치기 일쑤지만 가끔 몰래 접근해서 엄마냥과 함께 노는 모습을 사진에 담거나 축대를 짚고 쭉쭉이를 하는 귀여운 모습도 포착했다. 

얼굴 반쪽에 무늬가 들어간 요 녀석이 바로 진이다.

처음엔 진이가 더 활발하고 잘 노는 것 같더니만... 나중엔 연이가 더 몸집도 크고 잘 돌아다닌다.

21년 6월 17일 비온 뒤 털을 말리고 있는 양양이
미묘의 정석 연이 ㅠ.ㅠ 

비오는 날 비 피할 곳을 마련해주어야 할 것 같아 스티로폼 상자에 구멍을 뚫고 차양도 덧댄 다음 안에 수건을 깔아주었는데, 수건이 엉망진창으로 접혀 더러워진 걸 보니 애들이 들어가기는 하는 모양인데, 자주 이용하진 않는 것 같다. 비가 올 것 같으면 암튼 저 안에 사료통을 놓아준다. 

진이 & 연이:  도망치다말고 사랑스럽게 쳐다봄 ㅠ.ㅠ 21. 7. 9. 
드물게 찍는데 성공한 가족사진. 21. 7. 11.
양양이 독사진. 21. 7. 13. 의젓하다
역시 21년 7월 13일 가족사진. 

7월 내내 연일 35도를 넘나들던 폭염 속에서도 연진이는 쑥쑥 자라 처음 만났을 때보다 몸집이 한배 반쯤 커졌는데 어느 순간부터 사료를 먹는 양은 점점 줄었다. 입맛이 없는 건가 병이 난 건가 염려했더니 집냥이들도 그런다는 듯해서 조금 마음을 놓았으나... 똑같은 사료 양을 주어도 이틀이나 갈 정도로 먹는 게 시원찮은 것 같았다.

그러다 이유를 깨달았다. 양양이가 사라져버린 거다. 고양이 기척만 나도 내다보기를 며칠이나 반복했으나 늘 연이와 진이 뿐... 양양이는 아깽이들을 버리고 떠난 것 같았다. 

 엄마냥의 부재를 내가 확실하게 인지한 건 8월 1일. 아직 어리고 연약한 새끼들을 두고 양양인 어디 간 걸까, 얘들이 벌써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능력이 될까, 잠깐 어딜 다니러 간 걸까... 걱정스러워서 밤에 잠이 다 오질 않았다. 

이 왼쪽 사진이 바로 8월 1일에 찍은 것. 

고아가 되었다고 느껴서 그런지 둘 다 표정이 불안하고 측은해보인다. 처음과 달리 진이는 겁이 엄청 많아서 가까이 오는 일도 거의 없고 나와 눈이 마주치면 무조건 달아난다. 사료를 줄 때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건 연이 혼자일 때가 많았다. 해서 나는 또 진이가 어디 병이 난 건가, 다른 길냥이한테 공격을 당한 거나 아닌가 별 걱정을 다하게 되었다... ㅠ.ㅠ 

 

 8월 10일 홀로 나타난 연이

 

간간이 나타나는 침입자 고양이 때문이었는데, 급기야 8월 17일 새벽 5시 반. 창밖에서 요란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짝짓기때 우는 소리와는 또 다른 뭔가 급박하고 공격적인 울음소리였다. 무더위 탓에 창문을 활짝 열고 잔 터라 후다닥 잠이 깬 나는 달려가 뒷 베란다 창문을 확 열어보았다. 축대와 아래층 베란다 지붕 틈으로 머리를 들이밀고 미친듯이 울어대고 있는 검은 무늬 성묘 한 마리!

아니 이놈이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내가 나타나 위협하자 녀석은 줄행랑을 쳤지만 성묘답게 멀리 떨어져서 계속 노려보는 것 같았다. 잠을 자는둥마는둥... 무슨 기척만 들리면 창밖을 내다보느라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겠다. 

당연히 연진이는 만 하루 동안 모습을 감추었고 사료 주는 시간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츄르를 듬뿍 부어주면 금방 냄새 맡고 나타나는 녀석들이 한밤중이 되도록 사료를 멀리하다니. 난 또 전전긍긍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다음날 연이와 진이는 다시 씩씩하게 사료를 먹으러 나타났고, 오늘도 침입자 고양이의 공격 시도가 있었으나 내가 쫓아버렸다. 솔직히 말하면 이 녀석도 꽤나 예쁜 길냥이인데;;; 양양연진이 구역이라 내가 지켜주는 수밖에 없다. 뒷 마당에 사료를 부어준 적도 있는데 그건 또 입도 대지 않았다. 양양연진이가 사는 곳이 아늑해보여서 빼앗으려는 걸까. 어휴. 연진이가 아직 너무 어리고 연약해서 성묘의 공격으로 다치거나 쫓겨나게 될까봐 걱정이다.

두달 넘게 자랐는데 너희 언제 성묘 될래... 엄마 양양이는 돌아오라 돌아오라! 인간지킴이는 아직 두 아깽이 보호에 자신이 없단 말이다. 흑흑. 어쟀거나 오늘도 수북하게 사료를 담아주었다. 

21년 8월 21일 바로 어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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