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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답사

놀잇감 2013. 2. 26. 17:50

포스팅거리가 너무도 많이 밀려있다보니, 길고 긴 겨울방학 끝자락에 훌쩍훌쩍 눈물 훔쳐내며 밀린 일기와 숙제 하는 아이 같은 심정이다. 방학일기야 까짓것 대충 써가거나, 아예 안 써가면 그만이지, 하며 대범하게 넘겼던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서도 나는 지난 신문더미에서 한두달 전 날씨까지 확인해가며 꼬박꼬박 밀린 일기를 쓰곤 했다. 연필 하나로 계속 연달아 쓰면 밀렸다 한꺼번에 쓴 일기임이 탄로날까봐(대체 앙큼하게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을까??) 연필도 뭉툭한 거 진한 거 흐린 거 바꿔가며 쓰던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해간 방학숙제와 일기로도 상을 하나쯤 은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_+ 

 

아무튼... 정신없이 2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궁궐지킴이 시험을 볼지말지도 아직 결정을 안 내렸고, 1월달엔 꽤 열심히 했던 예습복습(! 답사 후 포스팅하는 게 주요 복습이었는데;;)도 완전 무시하며 지낸 터라 머리에 뭐가 남아있긴 한가 잘 모르겠다. 일단 기억을 환기하여 적어보기로...

 

현대미술관 덕수궁 분점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 덕수궁에 대해서는 그나마 익숙하고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ㅋ 전각 이름 좀 알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아는 건 결코 아니었다. 덕수궁 답사의 시작을 환구단 정문에서 한다고 할때부터 의아했다. 엥? 시청앞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고? 답사안내문에 나눠준 사진과 그림을 보니 그렇다는데, 지난 가을 덕수궁 프로젝트 관람하고 나서 대한문을 나와 분명 시청앞 광장으로 길을 건너가 저녁을 먹으러 갔었음에도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내심 요 몇달 새에 생긴 건가 싶었다.

 

최근에 복원된 건 맞지만(2005년이라던가;;), 물론 환구단 정문은 분명 작년 그날에도 시청앞 광장 건너편에 엄연히 서 있었다. 무지한 내가 못 본 것일뿐.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덕수궁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덕수궁 자리는 과거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타버려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석어당(석어당이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다)에 머물게 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렸었다. 헌데 일반주택이라 해도 일단 왕이 머물고 나면 일반인이 다시 살 수가 없으며, 집에도 '궁'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운현궁이 '궁'인 이유도 훗날 왕이 된 고종이 살던 집이기 때문이다. 암튼 그래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가 머물렀던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내렸다.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의 근본이다.

 

임란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고 난 뒤 경운궁은 오래 별궁으로 남아 외면당했다가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다시 역사의 중심이 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성기 때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했단다. 궁역을 자꾸만 넓히며 건물을 짓다 보니 심지어 정동길 너머로도 영역을 확대하여 구름다리로 연결해 썼단다. 이론수업에서 아직도 그 때의 구름다리 흔적이 남아있으니 정동 돌담길 걸으며 한번 확인해보라는 말도 들었겠다, 공식 답사일정이 끝나고 나서 실제로 둘러보니 그 부분이 눈에 딱 들어왔다.

 

두툼한 구름다리 석축이 확실히 담장보다 튀어나와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여기 말고도 경희궁 쪽으로도 구름다리로 두 궁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같다. 경희궁 터야 완전 박살나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이 건너편은 서울 시립미술관이니까 구름다리를 복원해도 좋겠다 싶었다. 어차피 덕수궁(경운궁)은 고종황제가 근대왕조국가를 꿈꾸며 새로 짓다시피 확장시킨 궁궐이니 현대 기술로 복원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을까나.

 

덕수궁이 다른 궁궐에 비해 이질감이 컸던 이유도, 궁궐건축의 원칙과 풍수에 따라서 산세를 등지고 터를 고른 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남은 땅을 최대한 활용한 데다 근대건축술을 도입한 서양식 건물을 한옥전각 바로 옆에 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고종의 지시로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 셋 있는데,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이다. 석조전을 고종황제가 생활공간으로 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입김으로 생겨난 건물인 줄 알았더니 고종이 친히 의도하여 지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궁궐은 전각별로 쓰임새가 다 나뉘지만, 서양식 궁궐은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 하나에 온갖 용도의 공간이 다 들어있지 않은가. 고종 역시 석조전을 크게 지어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다. 

 

언젠가 한국근대미술전 보느라 석조전에 들어가서 본 서양식 응접실과 다실에서 고종황제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의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짠했다. 나라를 빼앗긴 무능력한 왕의 전형으로 오래도록 알려졌던 고종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그 시기는 중세왕조가 사라져가고 근대국가가 생겨나는 시기였으니 조선의 패망이 고종황제의 무능력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탓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러 다닌 것도 황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뜻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전까지는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기에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엄연히 내려왔던 환구단의 전통이 조선초 완전히 사라졌던 것을 고종이 되살린 것이라고.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 문앞에서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옛날 환구단의 모습인데, 담장 주변 잡초로 보아 일제가 철거하기 얼마 전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환구단의 흔적은 시청앞 광장에 있는 줄도 모르게 서 있는 복원된 정문과 빌딩숲에 가려져 간신히 보이는 환궁우와 삼문(흑백 사진 왼쪽의 팔각정 같은 전각과 아치 세 개 부분), 돌북 세 개뿐이었다. 복원공사를 계속 하고 있긴 하던데 아는 사람이나 알지, 나도 예전엔 조선호텔 후원에 세워놓은 정자인 줄만 알았거늘... 흠.

 

왼쪽 사진이 바로 환구단의 정문을 뒤쪽에서 찍어온 것이다. 시청앞 광장 쪽에서는 사실 찍어도 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건물인 재능교육에서 해고당한 방문교사들이 바로 저 문 앞 인도에 천막을 쳐놓고 천팔백몇십 일째 농성중이었다. 올 겨울 유독 추위가 엄혹했는데 천팔백일만 따져도 대체 몇년째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복원은 했다지만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환구단 정문의 위상이나 재능교육 해고교사들의 위상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종황제는 덕수궁 대한문을 나서 환구단까지 위엄 돋는 행차를 거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의 압박에 왕위를 물려줄 때도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뿐 정식으로 양위의 뜻을 밝힌 적이 없단다.  그런데 일제와 친일파 대신들이 얼렁뚱땅 왕위를 순종에게 넘긴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일제는 상왕이 된 고종을 격하시켜 '덕수궁 이왕'이라는 궁호를 내렸다. 그래서 덕수궁이란 이름을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많은가본데, 대체로 덕수궁으로 그냥 쓰자는 분위기가 대세라고. 덕수궁 원래 이름이 경운궁인 걸 아 글쎄,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지난 가을 찍어왔던 정관헌 사진 재활용^^ 경운궁 내 최초의 서양 건물이라는 중명전

 

<무한도전>에도 나와서 꽤 유명해진 '정관헌'은 경치좋은 곳 여기저기 정자를 세워두었던 다른 궁궐과 달리 땅이 좁은 덕수궁에 정자 대신 세워놓고 고종이 커피도 즐기고 연회를 벌이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장소다. 서양식 건축과 한옥 양식을 섞어 지어서 어찌보면 이도저도 아닌 요상한 양식이 되었지만, 베란다에 깔린 타일도 예쁘고 기둥과 난간에 새긴 십장생이며 용무늬도 꽤나 정교하다.

 

'중명전'은 덕수궁 담장 밖에 있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이 건물이 해방 이후 여러번 팔리다가 개인 소유가 되어 사무실 건물로 함부로 쓰이고 있다는 통탄의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얼마 전 정부가 사들여 복원해놓았다. 미 대사관저를 사이에 두고 현 덕수궁과 뚝 떨어져 골목 안에 숨어 있다는 중명전이 궁금해서 답사 끝나고 열성 뻗치게도 나중에 찾아가 보았다. ㅋ 입장료는 무료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도 있게 해놓았다.

 

원래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은 건물로 '수옥헌'이라 불렀다는데 덕수궁에 큰불이 났을 때 고종이 다른 궁궐로 옮겨가지 않고 이곳에서 지내며 연회장이나 접견장소로 이용했단다. 원래 왕이 머무는 전각엔 '-전' '-당' 수준의 이름이 붙는다. 그래서 나중에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겠지. 헌데 여기서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대고, 헤이그 특사 파견도 이루어진 비운의 역사적 장소란다. 신발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안에 들어가면 여러 사진과 함께 친절하게 여러 설명문이 적혀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설명문보다 복도 바닥에 깔린 색깔 타일이 더 인상적이었지만서도...

 

여기도 정관헌처럼 건물 바깥쪽을 베란다로 둘러놓았다. 날씨만 안 추웠더라면 저 의자에 걸터 앉아서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미대사관저 부지까지도 궁궐터였던 때를 상상하는 놀이에 젖어볼 수 있었을 텐데... 얼른 사진만 한장 찍고 퇴장했다.

 

 

 

 

 

에고고...

덕수궁에 있는 서양 건물 셋 얘기만으로도 너무 사연이 길고 지친다. ㅋ 암튼 덕수궁 미술관 구경다니면서, 뜬금없이 화장실 건물과 나란히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문과 그 안에 놓인 자격루 따위의 보물이 좀 수상하다 여겼었는데 이번에 의문이 약간이나마 풀렸다. '광명문'이라는 편액이 달린 저 문은 원래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엉뚱하게 옮겨진 거란다. 제 자리도 아닌 문 안에 포와 종과 물시계를 나란히 진열해놓은 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궁궐이라는 것이 어차피 죄다 과거 속의 죽은 공간이라 훼손의 역사를 빼고는 도무지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걸 안다. 그래서 궁궐을 볼 땐 상상의 나래를 많이 펼칠수록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덕수궁은 가장 최근까지 근대의 서글픈 과거가 담긴 공간이다보니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중화전만 해도 다른 궁궐처럼 처음엔 중층으로 지어졌는데 대화재 후 재정궁핍으로 조촐하게 단층으로 축소해서 지었다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궁궐 조정 마당엔 죄다 행각을 복원해서 둘러놓았으면서, 왜 덕수궁 중화전만 휑하니 뚫리게 그냥 두었는지?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하면서 가장 많이 망가진 줄 알았더니만, 궁궐 훼손의 정도는 어느 게 더 심하다고 손꼽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째뜬 내가 덕수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석어당은 퍽이나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선조가 피난 갔다 돌아와 임시로 거처한 역사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이미 고이 보존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었대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살다던 공간이기도 하며,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온 고종황제 역시 경운궁을 본격적으로 넓혀 짓기 이전에 석어당을 임시 거처로 썼단다. 다만... 1904년에 큰불이 났을 때 다른 전각들과 같이 홀라당 다 타버려서, 현재 건물은 당시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지금 전각도 100년이 훨씬 넘기는 했지만, 선조 때의 모습 그대로인가 했다가 아니라니까 왜 실망스러운지 원...

 

가을에 찍어온 석어당 사진도 재활용 ^^

아무려나,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가 옥새를 넘기면서 저 석어당 마당에 광해군을 무릎 꿇려 앉혀놓고 조모조목 죄목을 읊으며 꾸짖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으로 <광해> 2편이 마구 그려지면서 새삼 흥미진진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아 글쎄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놀랍게도 예순살이 넘도록 살았다네그려. 나중에 인조반정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나오면, 배경이 석어당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야지!  

 

 

 

 

 

 

 

탑루만 남은 러시아 공관

이날 덕수궁 미술관에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프라하'에 대한 선망 때문에 별 생각도 없이 무작정 들어가 본 그림들은 공교롭게도 상당수가 덕수궁의 근현대사와 맞물리는 시기에 그려진 거였다.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 그림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오히려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한국근대미술: 꿈과 시> 작품들을 한번 더 볼 수 있어 좋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굳이 내가 러시아 공관이 있던 언덕까지 정동길을 헤매고 다닌 이유도 아마, 이날 본 1907년 즈음의 정동 주변 그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구한말, 고종황제, 을사늑약, 한일합방... 같은 말을 들으면 까마득한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바로 그 시기 이땅의 화가들은 또 서양 미술을 배우고 익혀 유화로 서울 풍경을 그려 남기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불과 백여년 뒤의 내가 구경하러 다니는데, 그림 속에 담긴 러시아 공관의 모습이 일부나마 여전히 현재의 시공간 속에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 어쩐지 기묘했다. 

 

게다가 지금은 저렇게 철책으로 둘러쳐 지정문화재 따위로 엄히 보호받고 있는 공간이지만, 15년전쯤만 해도 난 친구들과 김밥 몇줄 사가지고 올라가 러시아 공관 폐허 바로 옆 잔디밭에서 뒹굴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때도 여기가 아관파천의 역사 현장이래.... 어쩌구 종알거렸던 것 같다.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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