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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1.04.26 그냥 좀 두지 20

밥먹는 동안 틀어놓은 뉴스에서 언뜻 듣기는 했어도 뭥미 하고 말았는데, 실제로 목도하니 이건 좀 아니다 싶어서 투덜거려야겠다. 삼색 신호등 이야기다. 적황녹색에 초록색 화살표까지 신호가 네 개 달린 현재의 신호등을 '글로벌 스탠더드'인 삼색 신호등으로 바꾸고 화살표는 따로 그 옆에 신호등을 달아 자동차의 좌회전 방향을 정확하게 유도하겠다는 것이 경찰청 발표의 요지다. 신호등 왼쪽에 별도로 매달린 빨간색 화살표 등이 들어오면 좌회전을 해서는 안된다는 표시란다. 문제의 화살표 신호등은 이렇게 생겼다. 진짜로 이게 '글로벌 스탠더드'라고???


많은 나라를 가본 것은 아니지만 교차로마다 신호등이 가로로 매달려 있는지 세로로 매달려 있는지의 차이만 있을 뿐 저런 삼색 화살표 신호등은 본 기억이 없건만, 도대체 언제부터 저런 신호등이 세계 표준이 되었는지? 설사 세계 표준이라는 게 있어서 최근 절반 이상의 국가들이 신호체계를 '통일'했다 치자. 우리는 왜 꼭 굳이 그걸 따라가야 하는 걸까? 그것도 국민이 내는 피같은 생돈을 처들여서?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신호체계를 재정비해야, 외국인들도 우리나라에 와서 별 혼동 없이 운전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말도 들리던데, 외국인이 우리나라에 와서 운전 못하는 이유가 순전히 신호체계 때문이라고 그들은 정말로 착각하는 걸까? +_+ 의문은 꼬리의 꼬리를 물고 계속 이어졌다.

경찰청에선 홍보가 부족한 상황에서 시험운행에 들어간 바람에 사람들이 혼란스러워하는 것뿐이며, 원래 모든 변화는 얼마간의 불편과 적응기간을 필요로하므로 계속 강행하겠다는 듯하다. 어제 저놈의 삼색 신호등 때문에 사고날 뻔한 순간을 겪은 순간, 운전석에만 앉으면 욕쟁이 아줌마가 되는 내 입에서는 "미친 놈들 돈지랄 삽질하고 앉았네!"라고 거침없이 욕설이 튀어나왔다. 우리 동네 앞길은 가뜩이나 오래된 구불구불 도로인 데다 머리 위로 간선도로까지 지나가는 바람에 초행길인 사람은 교차로에서 진행방향 차로도 헷갈리는 곳이다. 그리고 근처 재래시장 주변의 삼거리는 각도가 워낙 오묘하여 원래 있던 신호등에도 헷갈림 방지를 위해 초록색 화살표 두개가(좌회전과 직진용이라지만 좌회전 표시는 각도가 10시 방향으로, 직진용도 1시 방향으로 틀어져 있었다)) 나란히 매달려 있었다. 그런데 그 친절한 화살표 신호등 대신에 광화문 일대에서만 시험운행 한다고 들은 그 문제의 삼색등으로 어느 틈에 바뀐 거다.

신호에 걸려 멈춰있다가 내가 직진 신호를 받고 맨앞에서 출발한 순간, 문제의 삼거리에서 저 삼색 화살표 신호등의 빨간 화살표를 본 운전자도 동시에 앞으로 들이닥쳤다. (人자 형태의 삼거리라 반대쪽 신호등도 한눈에 들어온다) 상대방 운전자는 좌회전 화살표가 켜지면 그게 무슨 색깔이든 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였음에 틀림없다. 빨간 화살표가 '멈춤'의 뜻이라는 건 교육이나 홍보의 문제가 아니라, 전제의 오류 아닐까? 물론 모든 신호는 정하기 나름임을 안다. 빨간색은 멈춤이고 초록색은 진행이고 노란색은 경고의 뜻이라는 게 '세계 공통'이라는 것도 알겠다. 하지만 화살표는?? 빨간색이든 초록색이든 신호가 켜지는 순간 나도 본능적으로 액셀레이터를 밟을 것 같다.

얼마 전 좌회전 신호와 직진 신호의 순서가 바뀌는 바람에 한동안 운전자들이 혼란을 겪기는 했고, 좌회전 신호 다음에 직진 신호에 익숙해 있던 나 역시 그에 맞춰 습관적으로 엑셀에 발을 올리는 시기가 있었으나 곧 적응했다. 교차로마다 현수막을 내걸어 이제는 직진 후에 좌회전 신호가 들어온다는 것을 꽤 오래 홍보했기 때문이고, 짧게 좌회전 신호를 주다가 이내 직진 신호로 바뀌는 체계보다는 바뀐 현 체계가 차량흐름에도 도움이 된다는 다수의 합의도 이루어진 듯하다. 물론 신호 순서만 바꿔 입력하면 되는 것이었을 테니, 막대한 비용을 들여 신호등을 교체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신호등을 세개짜리로 죄다 바꿔다는 건 정말이지 그럴 필요가 있는지, 운전자와 보행자에게 정말로 안전한지 심사숙고를 더 해봐야할 일이다. 

듣자하니 미쿡 따라하기 좋아하는 윗대가리들이 세계의 중심 '뉴욕 맨해튼 체계' 도입하기로 결정했다는 것 같다. 그럼 그렇지... 10여년 전이었을 거다. 서울에선 거리정비가 한창이었고, 팻말만 멀뚱히 서 있던 버스정류장에도 벤치를 놓고 ㄴ자로 유리 가림막을 세워올리는 '기특한' 공사가 사방에서 진행되었다. 버스정류장의 유리벽엔 상업광고판을 넣어 시의 재정도 올릴 수 있다고 자랑했다. 그런데 마침 그 무렵 LA 친구네 놀러갔던 나는 새로 생겨난 서울시내의 버스정류장이 LA 시내의 버스정류장과 모양도 크기도 형태도 똑같다는 걸 발견하고 실소했다. 그 디자인이 좋아보여서 로열티를 주고 사온 건지, 아니면 그냥 무식하게 모방한 건지, 이른바 '벤치마킹'을 한 것인지 나로선 알 수 없다. 단지 영 매력없는 도시 LA를 무작정 따라하고 있는 서울시의 행정이 안타까웠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엔 뉴욕이냐? 미친 것들...

아무리 생각해봐도 신호등 체계는 이미 국제적인 합의에 이르렀다. 빨간 신호등을 보고 직진하는 자동차나 보행자는 없지 않을까? 궁금해서 신호등의 역사를 위키피디아로 뒤지다 웃기는 사실을 발견했다. 공산당 혁명 이후 잠시 중국에서는 '빨간색 신호등'을 직진으로 바꾸려는 시도를 했었단다. 빨간색이 혁명과 진보의 색이라는 취지였을 거다. 중국인들이 워낙 빨간색을 좋아하기도 하고. 그러나 속옷도 양말도 빨간색을 선호하는 중국인들 역시 빨간색은 정지 신호이며 초록색이 진행신호임을 인정하고 되돌릴 수밖에 없었다는 얘기다.

신호 색깔을 바꾸자는 것도 아니고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추서 그저 색깔 화살표등 하나 더 달자는 것인데 왜 난리냐고 경찰청장은 의아해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점심시간에 굳이 짜장면 아니면 김치찌개로 통일하라고 부하직원을 닥달하는 못되 처먹은 상사도 아니고, 대체 왜 새삼 신호등을 '선진화'하고 '국제표준'(찾아보니 현재의 네개짜리 신호등이 국제표준에 맞지 않는다는 근거도 없다!)에 맞춰서 '통일'해야 하는지 나는 그걸 도무지 더 모르겠다. 그냥 좀 내버려두란 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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