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살 무렵의 정민이 그림도 예사롭지 않다고, 천재소녀화가 확실하다고 사방팔방 자랑하고 다녔다가 세월이 흐른 뒤 상당히 머쓱해졌음을 잘 안다. 그래서 준우랑 지환이 때는 호들갑을 좀 덜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여섯살 지우의 그림을 보며 나는 또 다시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 감탄하며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하루 전 작년과 올해 지우가 '비공식'적으로 집에서 그린 그림들을 자랑했지만, 미술학원(말이 미술학원이지 종일반 유치원이다)에서 '공식적으로' 그린 작품들은 그 깊이와 품격이 완전히 다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여섯살짜리가 이런 필치와 색깔과 구도로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지 원! *_*
나야 눈에 콩깍지가 완전히 덮여 이성을 잃었다고 쳐도, 화가이신 우리 막내고모마저 전문가인 자기 그림보다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인정한 그림이 꽤 많다. 그분도 역시나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데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으니--게다가 나의 조카들에게 화가 DNA를 물려주신 장본인이 아닌가!--팔이 심히 안으로 굽기는 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화가로서의 냉철한 판단력이 흐려지진 않았으리라 믿는다.
올 상반기동안 예그림미술학원에서 지우가 완성한 작품집에 든 그림이 모두 17점인데, 하나같이 훌륭하다! 화가 본인도 그 점을 잘 아는지, 지난 여름 방학에 우리집에 놀러오는 날 스케치북을 들고 와 하나하나 작품 설명을 해주었다. 뜸들이다가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 설명 내용이 가물거리는 것들도 있지만 최대한 기억을 돌이켜볼 작정이다. 너무 미리 기대치를 높이면 안되니 이쯤에서 잡설은 줄이고 드디어 천재소년화가의 그림을 전격 공개한다. ^^; (엄청 깁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예상되오니 마음의 준비를 하심이...)
2011년
<공룡> 도화지에 물감, 크레파스, 사인펜. 2011년 상반기, 6세
(똑같은 경우 아래엔 생략예정)
이곳 미술선생님의 특징이 재료와 기법을 섞어서 다양한 표현력을 가르치는 듯하다.
그림마다 거의 테두리는 싸인펜으로 그리고 물감이나 색연필,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공룡의 몸뚱이는 붓으로 칠한 게 아니라 '스펀지'로 두들겼다고 지우가 설명해주었다.
알에서 곧장 태어나 아장아장 걸어나오는 아기공룡인 듯 왼쪽 아래쪽엔 금 간 공룡알들이 세개 더 보이고 저 멀리 화산에선 용암이 분출되고 있다.
배경에 달팽이 무늬를 싸인펜으로 그려넣고 물감으로 번지게한 기법이 쓰였는데 달팽이 무늬 크기가 제각각 다 다르다.
이렇게 귀여운 공룡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둘리보다도 귀엽다고 강력주장... ㅋ
(요번엔 그림들이 클릭하면 '적당히'? 커집니다)
<열기구를 타고>
지난 여름 이 그림을 딱 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오매불망 꿈꾸고 있던 터키 카파도키아 열기구 여행이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열기구가 둥실 떠올라 있는 터키 여행사진을 녀석이 어디선가 봤을 리도 없는데... ㅠ.ㅠ
암튼 열기구를 장식한 별과 달팽이 무늬, 바구니에 탄 사람이며 저 멀리 지상에 서 있는 나무와 하늘에 뜬 햇님까지 모두 지우 솜씨라는 건 확실한데, 동그란 열기구 모양은 아무래도 선생님이 일률적으로 그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화가소년 자존심 상할까봐 당시에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살짝 물어봐야지.(지우에게 확인해보니 선생님이 열기구 모양 그려준 거 맞단다)
화면 오른쪽의 남다른 색칠도 사연을 들은 것 같은데 기억에서 사라졌다. -_-; 추석때 만나서 확인예정. (열기구 오른쪽의 희끗한 형상은 '아파트'라고 함. 왼쪽 하늘색 꽃무늬 같은 것은 구름이고 ^^;)
지우 옆에 타고 있는 소녀는 이 작품집에서 가족 이외에 최다 출연하는 지우의 여자친구 '예서'양이다. 자꾸만 등장하는 걸 보고 고모는 폭풍질투에 사로잡혔었다. ㅋ (이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열기구에 타고 있는 사람은 지우와 여친이 아니라 왕자와 공주라고! 어쩐지 이제 보니 남자아이가 좀 못생겼다. 지우가 자기를 저렇게 못생기게 그렸을 리가 없다 ㅋㅋ)
<예쁜 우리 엄마>
바로 앞 포스팅에 소개를 했지만 작품집에 든 그림 전체를 공개하는데 의미가 있기도 하고 세부설명도 필요한 것 같아 다시 올렸다.
선생님에 따르면 지우는 작품을 '구상'하는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다른 애들이 대강 쓱쓱 재빨리 그림을 그리는데 반해 워낙 공을 들이기 때문에 작품 완성이 상대적으로 늦단다. 다른 아이들이 그림을 다 그리고 막 놀기 시작하면 지우도 막 같이 놀고 싶어 엉덩이를 들먹거린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놀 생각에 가끔 바탕색 칠하는 걸 힘겨워할 때가 있다고 해서 우린 깜짝 놀랐다. 지우가 워낙 색칠하기를 좋아하고 빈틈없이 칠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도 머리에 단 리본이며, 다이아몬드 귀걸이, 하트 목걸이 같은 섬세한 부분도 일품이지만, 엄마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을 표현하듯 바탕에 하트를 아주 빈틈없이 도배해놓았다. 보라색과 자주색으로 이중 처리한 옷색깔은 또 어떻고! 인물도 예쁘지만 색감이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전 포스팅에서 지우가 그린 엄마와 실물 비교를 위해 사진을 올리기도 했지만, 지우가 그린 자화상과 실물의 닮은 정도는 정말 놀랍다! 내가 그림과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할 때마다 다들 입을 모았다. 싱크로율 100%야! @.,@
정말 닮지 않았나? 비단 머리모양 뿐만 아니라 맑은 눈매며 암팡진 인상까지 똑같다고 팔불출 고모는 마구 주장하는 바임. ㅋㅋ
그림 제목은 <내 입속에는>이다. 지우가 완전 편식대마왕님이라서 먹는 게 정말 한정적이다. 저 그림에 드러난 밥, 쿠키, 아이스크림, 치킨, 생선, 바나나, 포도, 수박, 사탕, 콩 정도가 전부다. (드물게 콩을 먹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그 외에 빵과 떡도 좋아한다) 그런데 치킨 옆에 있는 저게 뭔지 통 기억이 안난다. 햄이라고 했던가? -_-; 며칠 뒤에 물어봐야지. ㅎㅎㅎ
(치킨 옆에 있는 파란 물체는 다름아닌 '물'이란다! 먹거리 그려넣으며 컵에 담겨 찰랑대는 물을 그려넣을 생각을 하다니 놀라워 놀라워;;)
<둥지 위의 새>
도화지에 싸인펜, 물감, 색종이, 크레파스
알에서 하나씩 부화하는 새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태어나자마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걸 음표로 표현한 것 좀 보라!
보라색 배경에 어울리도록 햇님을 흰색으로 그냥 내버려둔 센스는 또 어떻고~!
화가께서는 맨 왼쪽의 금 간 알을 가리키며, 얘도 이제 곧 깨어날 거라고 말씀하시었다. ^^ 벌레를 잡으러 간 엄마새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대체 무슨 새인지 몸통 색깔이 다 다르다.
<무당벌레>
비오는 날, 커다란 나뭇잎에 무당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왼쪽 무당벌레는 오른쪽 무당벌레가 날아가는 모습이라고("얘가 날아가면 이렇게 날개가 펴지는 거야...")지우가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무당벌레 한 마리의 두 가지 움직임을 한 화면에 포착한 셈이다. @.@
나는 오른쪽 아랫부분에 그린, 민들레로 추정되는 노란꽃까지 전체적인 구도며 색감이 너무 마음에 든다. ㅠ.ㅠ
<바다 위의 돛단배>
색종이를 접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이 응용된 작품으로, 돛에는 별 스티커도 장식되어 있다. 바다를 파란색으로 칠하고는 하늘을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아웅...
왼쪽 돛단배에 탄 한 쌍이 또 다시 지우와 예서 커플인지, 제 엄마아빠인지 까먹었다. 물어본 것만 기억나고 대답이 뭐였는지는... 에휴... 이 또한 추후 수정하겠음.
(왼쪽 노란 배를 탄 한쌍은 왕자와 공주이고, 그 뒤를 쫓는 빨간 배에 탄 건 '나쁜 악당'이란다. 얘길 듣고 보니 빨간배에 탄 인물의 표정이 매우 포악, 사납다 ㅋㅋㅋ)
<행복한 우리집>
언뜻 보고 지우도 한옥에 살고싶어 하는 건가 의아했더니만, 자기네가 사는 아파트를 그린 거란다.
하긴 현관문 번호키를 보면 지네 아파트 맞다. ㅋ 방방마다 엄마아빠 형과 자기를 그려넣었는데 특이한 건 오른쪽 아래 누운 사람이 지우의 '이모님'이라는 사실이다. 이모가 자기네 집에 와서 자고 있다나?
고모는 안 그려주고 이모를 그렸대서
속 좁은 고모는 또다시 폭풍질투에 사로잡혔다. 그치만 뭐 어쩌겠나.. 이모는 바로 옆에 살고 고모는 아예 다른 시에 살고 있는 걸. ㅠ.ㅠ (지우네 집은 일산이다)
맨 왼쪽 네모에 들은 인물은 부엌에 있는 엄마가 아니라 '졸라맨'이란다. +_+ 그 옆에 세로로 그려진 두 인물은 아빠와 형, 오른쪽에 나란히 그린 인물이 엄마와 지우라고 함. 웬 뜬금없이 졸라맨? 아무래도 지우가 고모를 놀려주려고 장난친 것 같다. -_-;
<팽이치기 놀이>
지우랑 예서가 '베이 블레이드'라고 하는 팽이놀이를 하는 장면이란다.
팽이를 돌림판에 꽂아 끈을 잡아당겨 둥근 플라스틱 판에 놓으면 신나게 돌아가는 건데, 작년부터 한참 유행이라 나도 녀석들이랑 놀아봤다.
팽이를 부딛치게 해서 싸우거나 누가 오래 돌아가는지로 내기를 하는데, 그림 속에선 두 팽이가 불꽃튀는 전투를 벌이는 모양이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팽이의 움직임을 꼬불꼬불 용수철 모양으로 형상화한 게 인상적.
<땅속 개미>
검은 도화지에 흰 크레파스로 개미를 그려 오려붙였다. 개미굴 맨 안쪽엔 알들이 잠을 자고 있고, 주변 땅속엔 개미들이 물어다놓은 애벌레, 과자, 도넛 같은 식량이 잔뜩 쌓여있다.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ㅋㅋ
그림 맨 위 상단부의 주황색 물체는 애벌레가 아니라 '소세지'란다. ㅎㅎㅎ
<코끼리를 타고>
지우네 가족이 코끼리를 타고 있는 장면이다. 당연히 맨 오른쪽 엄마 옆에 앉아 있는 게 지우 본인.
코끼리가 네 식구나 태우고도 어쩜 저리 표정이 밝고 명랑한지. 뒷다리는 두껍게, 앞다리는 얊게 그린 것도 신기하고 힘들지 말라고 미리 포도랑 사과도 갖다주었다. 전체적으로 사랑스러운 느낌.
<거북이>
도화지 화면에 꽉 찬 거북이가 참 알차다. 등가죽의 육각형 무늬를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그렸을까? *_*
그안을 촘촘이 선으로 채운 것도 그렇고... 목덜미에 땀방울까지 디테일의 승리다.
흰색 크레파스로 구름이랑 동그라미 그리고 물감으로 바탕칠하는 기법이야 선생님이 가르쳤겠지만 시원시원한 선과 색감이 일품.
<나비가 훨훨>
제목 대로 꽃을 따라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들 모습이다. 여기선 그림물감을 어딘가 딱딱한 데 묻혔거나 물감튜브째로 찍는 기법이 사용된 것 같다.
호랑나비 색깔들도 현란하지만 더듬이와 날개 모양을 어쩜 저리도 잘 그렸는지... 꽃모양도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느낌이 다양하다. 그림마다 전체적인 완성도가 확실히 다르지 않은가! ㅋ
<비누방울 놀이>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비누방울을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어린이가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ㅠ.ㅠ
실제로 비누방울 놀이를 많이 해봐서 처음에 훅 불어내면 약간 바람에 찌그러지는 모습까지 포착한 듯...
천재랄밖에...
<세모나라>
세모나라라서 자동차들도 세모고 나무도 세모고 세모꼴의 대표랄 수 있는 피자조각도 보인다.
팔을 길게 뻗은 듯한 회색 자동차의 정체는 코끼리 자동차익고, 밤색 네모꼴은 '택배상자'란다. ^^;
<생일축하>
이 작품은 실제로 스케치북 제일 마지막에 케이크가 입체적으로 상당히 두둑하게 붙어 있었다. 종이찰흑인지 발포제 같은 걸로 따로 만들어 붙인 듯.
발 아래 놓인 생일선물들은 죄다 레고 시리즈란다. 지우의 파티 의상도 예사롭지 않다. 레고 닌자 시리즈에 꽂혔는지 검을 세개나 차고 시커먼 복면까지... ㅎㅎ
오른쪽엔 예서양 드레스를 입고 또 등장하시었다. -_-;
우리 가족들은 지우가 하도 말라서 자코메티의 조각, 또는 이디오피아 난민이라고 부르며 많이 걱정을 하는데, 지우의 여성취향 또한 가늘가늘 마른 소녀를 좋아한단다.
좀 튼실하게 예쁜 소녀친구에겐 '잘생겼다'고 칭찬을 한대고, 유독 하늘하늘 가녀린 예서만 '예쁘다' 또는 '아름답다'는 표현을 사용한단다. 그래서 다른 여자애들이 막 속앓이를 할 정도라고... (꽃남의 인기는 어딜가나 그저!) 실제로 유치원 재롱잔치인가 발표회 때 지우가 워낙 춤동작을 잘하기도 했지만 인기를 감안해서 그런 것인지 다들 쌍쌍이 군무를 펼치는데 지우만 맨 앞 한 가운데에서 양쪽에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무용을 했다.
[#M_그 증거 사진 ^^;|접기|
지우 인기가 이 정도라규~! 발표회 리허설에서 처음 두 여자에게 볼 뽀뽀를 당한 지우는 당황하여 울어버렸단다. 예서한테만 허락하는 뺨이었던가? ㅋㅋ 그러고보니 저 소녀들 중에 예서가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
<기차여행>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이다.
나뿐만 아니라 지우 그림 사진을 보여주면 이 작품을 탐내는 이들이 꽤 많다. 아이들 그림 중에 드물게 흑백느낌이라 그럴까?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디어도 만만치가 않다!
비오는 날(아래로 죽죽 그어진 하얀 선이 빗줄기란다)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데, 기찻길이 갑자기 울퉁불퉁 꿀렁거려서 '덜컹!' 하는 바람에 기차에 탄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라는 장면이란다. ^^;
검은 기차는 먹구름 짙은 잿빛 하늘에 길게 하얀 연기를 내뿜는데, 기관사도 놀라 조종간을 놓쳤고 사람들은 공중에 붕 떠있다. 심지어 맨 뒤에 탄 사람은 머리가 천장에 부딪쳤다! 기찻길을 촘촘이 채운 자갈돌은 또 어떻고! 언제 지우가 기차를 타봤던가? 관찰력이 참으로 세밀한 지우.
작품집에서 뜯어내기 너무도 아깝지만 이 그림을 주면 액자에 넣어 고이 간직하겠다고 굽신굽신해보았으나 화가께선 배시시 웃기만 하였다. 그치만 이 그림 너무도 갖고 싶다!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