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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옵션

하나마나 푸념 2012. 3. 10. 06:29

사대문에서 그리 멀진 않되 꽤 후미진 동네이기 때문인지, 동네 근처에 '이상한 곳'이 꽤 많다. 도로도 넓지 않은데(겨우 왕복 4차선), 오전오후 따질 것도 없이 관광버스가 떼로 몰려와 한 차선을 점령하고 주정차할 만큼 붐벼, 가끔 경찰차가 슉슉 마이크 소음을 내며 도로정리를 할 정도다. '내국인 출입금지'라고 건물 앞에 팻말이 붙어 있고 시뻘건 간판은 오로지 한자로만 써붙인 <고려인삼 면세점> 이야기다. 내가 발견하기론 1, 2킬로 미터 이내에 네 다섯 군데나 몰려 있는데도, 죄다 성업중인 것으로 보인다. 관광버스 앞에 써붙인 글씨로 보면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이고, 가끔 일본 관광객 버스도 보인다. 길을 막고 줄지어 서 있거나 좁은 주차장으로 기다란 버스를 대려고 중앙선까지 넘어갔다 후진하는 관광버스들 때문에 병목현상이 생겨 그 앞을 지나려면 한참 걸리기 때문에 짜증도 나지만, 한편으로는 그곳에 끌려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안쓰럽다. 보나마나 저렴한 한국관광 상품으로 놀러와, 실제 관광은 하는둥마는둥 툭하면 이런저런 면세점으로 끌려 다녀야 하는 그들에게 한국은 어떤 인상으로 남을까.

현지 언어에 자신이 없고 낯선 나라로 여행을 갈 때는 나도 더러 패키지 여행상품을 선택하지만, 싼게 비지떡이라는 말이 여행상품만큼 딱 떨어지는 것도 없음을 이젠 나도 잘 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패키지 상품을 선택하더라도, <노옵션, 노팁, 노쇼핑>이라고 처음부터 딱 못박아 놓은 상품을 찾는다. 그런 상품도 가이드에 따라선 슬쩍, 이건 정말 너무 좋은 상품이라 소개 안하면 고객들이 불만을 토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식으로 한 군데쯤은 데려가는 형편이니, 정말 패키지 여행은 편하고 싼맛에 가긴 하면서도 일신의 편안함과 맞바꾸어야 하는 나름의 스트레스가 존재한다.

내가 최초로 패키지 여행상품을 경험했던 것은 아마도 제주도 수학여행이었겠으나, 워낙 돈없는 대학생들의 수학여행이라 물건을 사라고 강요받은 기억은 전혀 없다. 그러나 직장생활 하면서 두번째로 친구들과 간 제주도 패키지는 상황이 달랐다. 관광코스 사이사이에 오전 오후 각 한 군데씩은 특산품 판매장에 끌려다녔던 것 같다. 절대 '옥돔'은 사오지 말고 '귤'이랑 '미역'이나 사오라는 엄마의 당부를 받고 간 상황이었는데, 가이드가 특산품 매장마다 하도 다그쳐대는 바람에 꿀과 로열젤리, 영지버섯 같은 걸 사들고와 엄마에게 혼이 났었다. 제주도는 그때도 아름다웠고 여행은 대부분 즐거웠지만, 이후 다시는 제주도에 패키지 여행으로 가지 않겠다는 다짐을 했다. 옵션도 어찌나 많은지, 입장료 저렴한 데는 지들이 내준다고 생색내면서 배타고 좀 비싼 데는 죄다 따로 돈을 걷두만. 쳇...

그러나 십수년 뒤인 2002년, 나는 그 다짐을 깨고 또 한번 제주도 패키지 여행에 따라나선다. LA로 이민간 친구가 언니랑 다니러 오면서 끊은 항공권이 하필 제주도 패키지 포함이었고(이왕이면 제주도 여행도 하고 좋잖아! 라고 친구가 말했을땐 나도 그저 헤벌레 좋아라 찬성했다), 나는 별도 1인용 여행비를 내고 공항에서 만나 그 팀에 합류했다. 허나 제주 공항에 내려 관광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나는 얼굴이 뜨거웠다. 버스엔 '고국방문단 환영'이라는 큼지막한 플래카드가 옆구리에 붙어 있고, 비디오 촬영기사가 계속 일행을 따라다니며 동영상을 촬영했다. ㅠ.ㅠ 대부분 십여년 만에 한국을 방문한 이민자들이라 '역사적인' 현장을 기록으로 남길만한 상황인지 어쩐지 모르겠으나, 나와 친구 일행은 거의 미칠 것 같았다. 우리는 절대로 그 비디오 테이프를 사지 않을 테니 찍지 말라고 가이드와 촬영기사에게 극구 당부해보아도, 같은 여행 팀이니 그냥 자연스럽게 촬영에 협조해달라는 말만 돌아왔다. 우웩~~!!

어쨌거나 때는 가을이 한창이라, 나는 버스에서 제주 오름 근처의 억새밭이 정말 장관이겠다고 미리부터 운을 띄웠다. 가을 제주 바다는 또 얼마나 예쁜 옥색인지 몰라. 바닷물도 아직 따뜻할 걸... 그러나, 아무리 패키지 여행이라지만 고국방문단을 위한 제주 관광 코스는 정말 너무 심했다. 관광지 하나 건성으로 휙 보고 특산품 판매점에 가면 1시간 반씩 머무는 걸 3일 내내 번갈아할 줄이야! 특산품도 내가 예전에 소개받던 것과는 가격대가 아예 달랐다. 대부분 하나에 수십만원을 넘어 백만원에 가까운 말뼈(관절염과 골다공증에 특효라나)! 동충하초(설명만 들으면 거의 만병통치약이두만)! 이름도 처음 들어보는 아가리쿠스 버섯(항암과 당뇨치료제라고 들은듯)! 워낙 고가인지라 그런 상품을 사면 자연산 꿀이랑 로열젤리(십수년 전엔 내가 돈 깨나 주고 사왔었는데!)를 덤으로 막 준다고 했다. 일행중 우리만 삼십대였고, 동영상 촬영거부에다 쇼핑은 전혀 할 마음이 없어 상품설명할 때 일부러 휘휘 농장 구경이나 다니고 있으니 가이드에겐 미운털 깨나 박힌 상황이었다. 하지만 싫은 데 어쩌라고!

관광지라도 제대로 데려가면 좋겠는데, 어쩜... 바다라곤 용두암과 외돌괴 두 가지만 딱 보여주더니 잠수함, 유람선 타는 것도 옵션, 몽고인들의 조랑말 쇼도 옵션(제주도 가서 왜 몽고 조랑말 쇼를 보라는 건지!), 조랑말 시승도 옵션, 무슨무슨 박물관도 옵션... 죄다 돈내고 하는 것만 강요했다. 물론 억새밭 구경과 제주 해수욕장 구경 따위는 아예 코스에 없었다. -_-; 오죽하면 사흘간 제주 관광 중에서 가장 인상 깊은 것으로 친구가 꼽은 것이, 호텔 마당 앞 풍차 카페에서 밤에 맥주랑 칵테일 마신 거였다. 우리는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을 보려고 간 거라규~! 결국 우린 관심없는 옵션 코스 때 관광버스에 그냥 남아있겠노라고 고집을 부리기도 했으나, '안전 관리상 불가'하다는 말에 한숨을 쉬었다. 다 이민자인데 유일하게 신분이 다른(?) 내가 가이드에게도 골칫거리였을 테지만, 아니 말이 안통하는 것도 아니고 내가 제주도엘 벌써 몇번째인데! 어휴!

째뜬 덕분에 나는 제주도에 그토록 수많은 특산품 면세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자수정은 익산이 유명하다고 알고 있었는데 아 글쎄, 제주도에서도 팔더군! ㅋㅋ 정말로 또 LA 부자 교포아주머니들은 이따시 만한 자수정 금반지와 목걸이를 막 척척 사주시고... 가이드는 싱글벙글...  촬영기사 아저씨는 그들을 열심히 비디오카메라로 찍어대고... 정말 우리에겐 악몽이나 다름없는 제주여행이었다.

동네 근방에 있는 <고려인삼 면세점> 앞에 선 관광버스 행렬과 외국인들을 보며, 자꾸만 그 때의 '고국방문단' 패키지 여행이 떠올라 유심히 사람들 얼굴을 살피는데 내 선입견 탓인지 표정들이 다 좋질 않다. 명동은 물론이고 이대앞과 홍대앞에도 와글와글 지도 들고 삼삼오오 돌아다니는 중국인, 일본인 관광객들의 표정과는 사뭇 다르다. 들어보면 개인으로 찾는 일부 한류관광객들이 아닌 한, 그들도 하루쯤 시내 자유관광을 하는 것일 뿐 역시나 저렴한 패키지 상품으로 여기저기 특산품 면세점에 끌려다니는 것이 분명하다고 한다. 과연 그렇게 한국과 서울을 '관광'하고 나면 또 다시 오고 싶은 애틋한 마음이 들까? 어차피 패키지 상품이라는 것의 특징과 단점을 그들도 알고 오긴 했겠지만, 한류를 업고 여행사마다 싸구려 상품으로 외국인들 데려다가 망신만 시키는 건 아닌지 퍽 궁금하다. 내가 아무리 제주도는 그런 데가 아니라고 나중에 변명해 보아도, 친구와 언니에게 제주도는 음식도 별로 맛없고, 구경할 데도 별로 없으면서 바람만 엄청 불고, 야자수는 말라죽는 곳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오죽하면 수년 뒤 다시 온 친구에게  내가 제대로 제주여행 가자니깐, 차라리 일본엘 가자고 했을라고. +_+ 친구는 올 가을쯤 다시 한국으로 놀러올 계획을 세우고 있는데, 제주 올레길 한번 걸어볼래? 라는 나의 질문에 역시나 방사능 괜찮은 곳으로 골라서 일본 온천이나 가자니깐! 하고 대답했다. 첫인상은 이렇게 중요한 것일진대.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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