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대체 이 나라를 믿고 참으며 살아갈 희망이란 게 과연 있는가 연일 고민하던 나는 요 며칠 갑작스레 미래에 대한 희망을 느낀다.
수없이 욕을 먹으며 개밥의 도토리처럼 이리저리 치이다 퇴임직전까지 보수언론의 악성 루머에 시달려야 했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몇 가지 <업적> 가운데 나는 대통령의 권위가 철푸덕 땅바닥에 떨어져 이놈저놈 아무나 대놓고 씹어댈 수 있게 된 것을 최고로 여긴다. ^^; 대통령 욕 함부로 하다간 쥐도새도 모르게 안기부로 잡혀가는 공포시대를 거쳐, 늙고 낡은 양김씨의 시대를 청산한 뒤라 그리 젊은 것도 아닌 데 새파랗고 만만하게만 보였던 노무현 대통령은 걸핏하면 언론의 딴죽걸기에 쓰러져 대국민사과문이나 담화문을 발표해야 했고 심지어는 선거에서 중립을 지켜야하는 공직자의 의무를 위반하고도 사과하지 않았다는, 탄핵사유로는 완전히 깜냥도 안되는 이유로 의회에서 탄핵까지 당하지 않았던가.
국민들 70%가 탄핵이 잘못되었다고 여기며 연일 촛불집회를 벌이던 가운데 헌법재판소는 노무현 전대통령이 헌법과 법률을 위반하기는 하였으되, 탄핵될만큼 그 사유가 중대하지 않다는 결론으로 노무현의 손을 들어주었더랬다. 하지만 국민들이 직접선거로 뽑은 대통령을 정치인들이 입맛에 맞지 않는다고 갈아치우겠다고 날뛰었던 당시의 웃기는 코미디는 분명 어린 학생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던 것이 틀림없다. 대통령의 탄핵소추 사유가 헌법과 법률을 심각하게 위해한 때에 해당되기 때문에, <헌법이나 법률의 해석을 그르친 행위, 위법차원이 아닌 부당한 정책결정행위, 정치적 무능력으로 야기되는 행위 등은 탄핵의 사유가 되지 아니한다>는 당시 헌재의 해석은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실제로 온/오프 라인의 움직임이 실질적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탄핵으로 이어질 것이라 믿는 이들도 거의 없다.
하지만 어느 고등학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다음 아고라의 명바기 탄핵 서명운동은 그래서 더 의미가 있다. 당장 자기 집값 땅값 올라간다면 영혼이라도 팔 준비가 되어 있는 기성세대나, 정치엔 별 관심도 없고 경제살려 일자리만 만들어준다면 대통령이 나라를 회사 경영하듯 주무르는 CEO가 되어 직원들을 다그친대도 뭐 어떠냐고 생각하는 꼴통 이십대와 달리, 당장 수시로 바뀌는 입시제도와 교육 제도 때문에 갈팡질팡 헤맬 수밖에 없고 전국학력평가고사로 성적이 백분율 전국석차까지 나와 자괴감에 젖어 있으며, 뜬금없는 영어몰입교육, 우열반이나 다름없는 수준별 이동학습, 자립형 민사고 확대 등 도무지 사교육비를 무한대로 대지 않고선 따라갈 수 없는 제도들을 정부가 거듭 내놓는 바람에 당장 가장 피해를 많이 입게된 십대들이 정치적인 행동에 나섰기 때문이다.
정치와 전혀 무관해 보이는 그들의 <못살겠다>는 외침과 더 나은 미래를 요구하는 주장은 미국 쇠고기 협상으로 직접적인 타격을 받게 된 한우농가나 FTA를 반대하는 농축산민들의 <못살겠다>는 시위와는 확실히 다르다. 값싼 쇠고기가 쓰일 수밖에 없는 급식을 먹어야하는 상황이기에 똑같은 생존권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의 목소리엔 확실히 직접적인 이익을 추구하겠다는 욕심보다 불합리한 정책을 바꿔야한다는 순수한 정의감, 그리고 개인과 나라의 미래를 염려하는 애틋한 충정이 더 크게 깃들어 있다.
3일에는 2만이나 모였다는 촛불문화제 현장에 나가보지는 않았지만 흥미롭게 기사들을 찾아 읽어보면, 인파의 6, 70 퍼센트가 중고생이었고 그 대다수가 교복을 입은 여학생들이었다고 한다(현장에 있었던 파피도 그렇게 증언했다^^). <나도 대학 가고! 결혼하고! 애낳고 싶어요!>라는 귀여운 문구나 <미친소 먹고 민영의료보험으로 돈없어 죽거든 대운하에 뿌려주오>라고 적힌 기발한 전단을 들고 나와 있는 여학생들의 사진을 보며, 어떤 이들은 순진한 어린학생들이 정치선동에 물들었다고 염려한다지만 나는 그저 흐뭇할 뿐이다. 요즘 아이들은 누가 정치적으로 선동한다고 해서 그렇게 우르르 행동할 만큼 어리석지도 않고, 자기 앞가림 정도는 확실히 할 만큼 똑똑하다. 그리고 그 아이들이 대통령 탄핵 서명에 가담하고, 거리로 뛰쳐나와 촛불 문화제를 열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도 그간 세상 돌아가는 꼬락서니를 지켜보고 뭔가를 배웠기 때문이다. 나처럼 뒷구멍에 앉아 구시렁구시렁 투덜투덜 욕이나 하는 데서 그치는 게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기까지 한다는 점에서,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그 아이들이 얼마나 기특한지 모르겠다.
나는 계속 이런 꼴로 돌아가면 이민 가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린 국민들이 이렇게 똘똘하고 행동력이 있다면 기성세대들도 뭔가 깨닫는 바가 있을 것이고 그들이 이십대 삽십대가 되는 미래엔 뭔가 좀 달라지지 않을까 희망을 품어본다. 청출어람이란 말이 괜히 있는 건 아닐 테니까.
그러니 부디 썩어빠진 딴나라당 정치인들과 수구언론들은 뜬금없이 배후에 좌파 세력의 음모가 있느니 어쩌느니 헛소리 좀 집어치우고(국민건강 우선으로 생각하라며 미국 쇠고기 광우병 문제 집중적으로 떠들어댄 건 작년까지 니들이었거든!!), 국민들이 마음 편히 쇠고기도 먹고 채소도 먹고, 병원 걱정, 수돗물 걱정, 온 나라 파헤쳐질 걱정 없이 좀 살게 해주면 좋겠다.
그런 상징적인 의미에서라도 명바기 탄핵서명 천만 명은 꼭 이루어졌으면!
영화 한편에도 천만 명 관객이 드는 시대인데, 한달만에 백십만 명이면 목표가 그리 멀지도 않았다. ^^
2002 월드컵때 시뻘건 집단주의의 광기가 무서워 단 한번도 단체응원 해 본 적 없고, 월드컵 생중계도 거의 보지 않았으며, 개봉 초반엔 몰라도 천만 명이나 봤다는 거창한 꼬리표가 붙은 영화는 보기 싫어질 만큼 떼거지로 하는 건 죄다 싫어하는 나이지만, 이번엔 귀찮아서라도 침묵하는 나머지 3천5백만명에 드느니 상대적 소수이지만 엄청난 숫자인 천만 서명인에 포함되기로 했다.
혹시 아직 서명 안 하신 분이 계시다면 [여기]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