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샌 방송은 물론이고 공공기관이며 은행, 음식점 따위에서도 흔히 들을 수 있는 말이 있다.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하도 많이 들어 귀와 입에 익다보니 들을 때마다 늘 마뜩찮아 하던 나도 혹시 어디선가
덩달아 쓰고 있는 건 아닌가 우려될 정도다.
아니, 나 역시 아무 생각 없던 시절엔 당연한 듯 따라 썼음을 고백하자. 
특히 메신저나 이메일의 경우엔 더더욱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이미 많이들 주지하고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좋은 하루 되세요>나 <즐거운 시간 되세요>는
참 말도 안되는 말이다.
인간에게 좋은 하루가 되고, 즐거운 시간이 되라니!

분명 영어의 Have a nice day, Have a great time 따위를 대책없이 빌어다 쓰고 있는 말일 터인데
아침 인사로 뜬금없이 "좋은 아침!"이라는 말을 들을 때처럼 나는 혼자 속이 쓰리다.
엄밀하게 따져서, <좋은 하루 되세요>, <즐거운 시간 되세요>, <행복한 여행 되세요>라는 말은 비문이다.
게다가 이래라, 저래라 하는 명령형이므로 높임말과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구조다.
올바르게 쓰려면 <좋은 하루 보내시기 바랍니다> <즐거운 시간 보내시길 빌어요>, <여행 잘 다녀오시길 빕니다> 쯤으로 바꿔야 한다. (사실, "좋은 하루, 즐거운 시간"의 관형어구도 트집 잡으려면 이야기가 또 길어진다)
같은 명령형이라도 오래전부터 써내려온 <안녕히 가세요> <살펴 가십시오>와는 또 다르다.

그런데도 영어병에 찌들은 대다수의 이 나라 사람들은 비문이든 아니든 그저 좋은 말인 줄로만 알고
아무 생각 없이 영어식 문장을 그대로 쓰고 있는 것 같다.

물론 우리네 아침 인사라는 것이 하도 못먹고, 난리를 겪으며 살던 백성들의 삶을 반영한
"식사 하셨어요?"나 밤새 "안녕하세요?"라는 것이 못마땅해 다른 인삿말을 찾으려는 심리도 깔려 있으리라고
짐작은 된다.

하지만 아무리 좋게 봐주려 해도, 아침인사로 동료들끼리 "좋은 아침!"이라고 외치거나
상사에게 "좋은 아침입니다!"라고 하는 것은 우스꽝스럽기만 하다.
문제는 그렇게 내눈에 말도 안되고 우스꽝스러운 인사법이 너무도 당연하게 방송이나 인쇄물을 통해
재생산되고 강화되어 '옳은 말'로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늘 문득 은행 ATM에서 거래를 하고 명세표를 받으니 맨 아래
<좋은 하루 되십시오>라고 적혀 있었다.
인간이 어떻게 좋든 나쁘든 <하루>가 되느냐 말이다!

얼마 전 뉴욕필의 평양 공연을 담은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미국인 지휘자는 애써 우리말을 외운 듯, 연주 시작전 인사말의 끝을 이렇게 맺었다.
"좋. 은. 시. 간. 되. 세. 요."
(혹, '즐거운'이었는지도 모르겠다. -_-;;)
어눌하게라도 한국어로 북한 관객에게 마음을 전하려 한 그의 의도는 감동적이었지만
나는 Have a great time 쯤 되는 영어를 누군가 번역하여 한국어라고 가르쳐주었을 그 말이 못마땅했고
과연 북한 관객들은 그 말을 제대로 알아들었을까 의아했다.
지휘자의 한국어 맺음말 뒤에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왔으니, 다들 알아들었을 것이라고
짐작은 하지만 이왕이면 누가 좀 제대로 가르쳐주지 싶었던 것이다.

어쩌면 이런 내 불만은 이미 대세로 기울어 버린 우리말의 변화를 못 받아들이고
혼자만 고집을 부리는 쓸데없는 투정인지도 모른다.
언어는 생명체와도 같아서 끊임없이 성장, 변화하므로
수많은 외래어와 외국어식 표현으로 <감염>된 한글의 영역이 오히려 넓어지고 어휘가 풍부해졌기에
무작정 일본식, 영어식 어휘를 배척하기만 해서도 안됨을 안다.
하지만 어휘가 풍부해지는 것과, 비문이 올바른 문장인 양 막강하게 터를 잡고 앉는 것은 다르다.

아, 물론
나 역시 매일 번역하는 문장에서 주술 관계가 맞지 않은 비문을 양산하고 있을지도 모르며
누군가 내 블로그의 글을 죄다 분석해 빨간 펜으로 비문을 찾아낸다면 시뻘겋게 만신창이가 될 수도
있음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나는 비문을 쓰지 않으려고, 가능하면 제대로 된 문장을 짓고 맞춤법도 틀리지 않으려고
최대한 노력은 하고 있으므로 약간의 면책 가능성은 있을 것이라고 혼자 자위하고 있다.


얼마전엔 나 역시 맞는 말이라 여기고 있던 <감사드린다>는 말도 잘못된 말임을 알고 깜짝 놀랐다.
<감사>는 남에게 주는 게 아니라 본인이 고맙게 느끼는 마음이므로 <드리면> 안되고,  그냥 <감사해야> 한단다.
정 <드리고> 싶으면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감사의 말씀을 올립니다>로 쓰는 게 옳다고.
그런데 우리는 <축하드린다>와 헷갈려 <감사>마저도 드리는 게 당연하다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매일 쓰고 사는 우리말이지만 알면 알수록 더 어려운 게 한글이고 조심스럽다.
그래도 명색이 우리말과 글로(물론 영어와 더불어) 먹고 산다는 사람이 제대로 된 우리말을 써야한다는
생각에 어깨는 자꾸 무거워지는데 나를 둘러싼 세상은 내게 그리 협조적이지 않은 듯하다.

내가 이리도 마뜩찮게 여기는 <좋은 하루 되세요>가 10년쯤엔, 아니 불과 2, 3년 뒤엔
당연히 옳은 말로 여겨지면 어쩌나 마음이 찜찜하다.
하물며 관공서에 나붙은 플래카드에도 <즐거운 명절 되세요>라고 적혀 있는 마당 아닌가!

영어,영어 하지 말고 다들 우리말이나 제대로 하면 참 좋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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