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22.02.02 엄마들은 왜 그럴까 5
  2. 2022.01.30 박수근: 봄을 기다리는 나목 @덕수궁 현대미술관
  3. 2021.12.25 엄마들은 왜 그럴까 4 6
  4. 2021.11.14 엄마들은 왜 그럴까 3 11
  5. 2021.09.13 엄마들은 왜 그럴까 2 2
  6. 2020.05.08 연어 덮밥 3
  7. 2020.02.27 80세 2
  8. 2020.02.19 다시 훈련 4
  9. 2020.02.06 아는 병 3
  10. 2020.01.17 다시 설날 고민

설날 차례 준비와 노동을 완전 독박으로 마무리했기 때문인지, 무심한 엄마한테 자꾸 짜증을 부리다가 버럭 화 나는 원인을 분석했다.

모든 엄마들에게 함부로 일반화할 수 없는 주제일 수도 있겠지만 암튼 나와 (친구의) 엄마들은 왜 자식을 편애하는 걸까?! 특히 울 엄마는 당당하게 속 마음을 내게 털어놓은 적이 있다.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특히 아픈 손가락은 따로 있다고. 울 엄마의 경우 그건 막내아들이다. 시어머니에게 맡겨두고 직장생활을 병행 하느라 밤에만 끼고 살았던 나나 큰동생과 달리 막내는 출산부터(병원에서 출산한 첫째, 둘째가 너무 수월했는지 아니면 병원비를 아끼기 위함이었는지--아마도 둘 다 였겠지--셋째는 집에서 낳음) 육아를 완전히 도맡아 지켜보았을 터이니, 막내라는 필연적인 이유+오랜 애착이 더해져 편애의 당위성(?)은 아주 공고한 것으로 보인다.

함께 살면서 당연히 의견이 부딪칠 수밖에 없고 특히나 건강 관련하여 온종일 잔소리를 해대는 존재가 되어버린 나는 그냥 공기 같은 자식이고, 일주일에 한번 안부 전화를 하는 것이 효도의 전부인 막내아들은 너무나도 고맙고 기특한 존재다. 상대적으로 맏아들인 큰동생은 웬만해선 안부전화를 하지 않아서 늘 욕먹는 편. 전화보다 찾아뵙고 싶은데 그걸 못하는 게 미안해서 아예 전화도 못 건다는 것이 큰아들의 같잖은(그러나 전화기피증이 있는 나로선 일견 이해가 되는;;) 변명이다. 암튼 친구들의 엄마도 함께 살며 옆에서 온갖 수발 다 들고 궂은 일 도맡아 하는 자식들에게 당연하다는 듯이 "원래 못생긴 소나무가 선산을 지킨다"고 말씀하셨다는 얘기에, 기막혀 한 적이 있다.

옆에선 아무리 잘해드려도 지지고볶는 애증의 관계가 될 수밖에 없으니 미운털이 더 많이 박히기 일쑤이고, 1년에 몇번 안부전화라든지 삐쭉 얼굴 들이밀며 용돈 봉투 드리는 자식들은 너무나도 장하고 기특한 자식으로 생각되는 아이러니.

더욱이 나를 포함한 K장녀들의 희생은 너무도 당연시된다. 아까 저녁때 새삼 옛날 얘기를 끄집어내며 화를 냈던 건, 엄마가 당뇨관리에 신경 안쓰고 과일을 너무 많이 드신 것에 꼭지가 돌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경도인지장애로 깜박깜박 본인이 먹은 걸 기억 못하는 상황에서 과일 탐닉은 더욱 심해져, 내가 정량 따져(사실 병원 의사들은 과일 금지! 토마토만 드시라고 함)  챙겨드렸는데도 그건 그것이고 당신은 게으른자의 최애과일인 귤을 자꾸만 꺼내드신다는 것이 문제다.

조울증이 극심했을 때 혈당관리가 아예 안 돼, 급성신부전증으로 중환자실에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을 간신히 넘긴 전적이 있는 분이 왜 과일을 자꾸 꺼내먹냐고 신경질을 내다가, 그 황망했던 두달의 간병기가 떠올랐다. 물론 엄마가 중환자실에 계실 땐 울고불며 그저 무사히 깨어나시기만을 기원했었지만, 이후 일반병실로 옮겨 하지마비가 풀리기까지 온갖 수발을 2달 내내 하면서 나도 극한 스트레스에 시달렸었다. 처음엔 출판사에 양해를 구해 마감일을 연기하고 병간호에만 매달렸지만 그 기간이 2달까지 길어질 줄 아무도 몰랐고, 아버지가 매일 아침 병실에 와 저녁까지 곁을 지키는 애정을 쏟으셨음에도 불구하고 보조침대 쪽잠은 2달 꼬박 내 차지였다. 낮엔 종종 후다닥 집에 가서 아빠 먹을 반찬 만들어놓고 와야했고, 이젠 좀 간병인을 쓰자는 동생들과 나의 제안에 아빠랑 엄마는 버럭 화를 냈다. 아니 어떻게 네 엄마를 남의 손에 맡길 수가 있느냐고! (애처가인 아빠 본인도 옆에 앉아 엄마 손이나 쓰다듬을 뿐, 기저귀 갈기라든지 소변주머니 비우기라든지 이런 건 손도 못대셨음. 욕창까지 심하게 생긴 상황이라 안쓰럽고 무서워서 자긴 손을 댈 수가 없으시다고... +_+)

당시 큰동생 부인이 나를 안쓰러이 여겨 하룻밤 당번을 교대해주겠다고 나섰으나... 한달 만인가 집에 와서 처음으로 편한 잠을 자던 새벽 3시 30분. 엄마가 빨리 오라고 전화를 했더랬다. 밤새 아예 눕지도 못하고 병상을 지켰던 큰며느리가 도통 못 미더워서 안 되겠다나. 아직까지도 주변에 효녀로 손꼽히는 나도, 그 당시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은 진리임을 깨달았다. 큰딸이자 외동딸이자 하나밖에 없는 만만한 프리랜서 싱글 자녀인 나의 희생과 봉사를 엄마 아빠가 어찌나 당연하게 여기시던지...  아들들은 일주일에 한두 번 퇴근해서 병문안만 와도 막 고마워하는데, 종일 붙어서 누렇게 떠가는 나한테는 고마워하지도 않고 말이지! (이런 상황에 네가 있어 참 다행이다, 너 밖에 없다, 너 때문에 내가 산다.. 이따위 말은 사실 세뇌이자 부담 전가일 뿐, 감사의 말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조울증 때문에 2달 내내 1, 2인실을 고집한 터라 한달에 천만원도 넘게 나왔던 병원비도 결국 절반은 내가 냈던 걸로 기억한다. 여행 가려고 모아둔 몫돈 있는 줄 어케 알고!

결국 엄마가 무사히 퇴원했던 건 감사한 일이지만 딸로서 몹시 마음 상했던 그 두 달의 간병기는 이후에도 화날 때 엄마 아빠를 공격하는 빌미가 되곤 했었는데, 부모님께 제대로 사과를 받았는지 기억이 영 나질 않는다. 좀 전에도 엄마한테 십수년전부터 엄마 입원할 때마다 당연히 간병한 나한테 왜 미안하고 고마워하지 않느냐고 따지니까.... 당신께선 기억에 없단다. 헐. 아니 그래서 내가 기억을 상기시켜드렸으면 미안하다고 하셔야죠. ㅠ.ㅠ 미안해, 안 미안해? 막 따져서 겨우 사과 받았다. 에효.

오빠만 하나 있는 친구라든지, 5남매중 막내만 남동생인 친구의 경우 어머니들의 편애는 더욱 극단적이다. 팔십이 넘은 친구 어머니는 아직도 오십대 후반인 이혼남 아들의 아침상을 정성스레 차리느라 새벽부터 친구를 가사도우미처럼 부리신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넌 안 낳으려다가 낳았으니 고마워하라고 하신다든지, 무조건 오빠한테 잘해라고 하신다든지... ㅠ.ㅠ 외아들의 큰누나인 친구도 엄마를 안쓰러워하기는 하지만 매사에 아들아들 위하는 모습에 상처를 받는 경우가 많다. 아니 해외여행이든 국내여행이든 모시고 다니는 건 내 친구인데 왜 막내아들만 예뻐하시냐고! 

3, 40년대에 태어난 엄마들은 뼛속 깊이 남아선호사상이 박혀있고 본인도 어려서부터 딸이라는 이유로 가사노동에 시달려왔음에도 그게 부당하다고 여기기는커녕 다음 세대의 딸 역시 부가노동력으로 여기는 생각을 버리지 못했을 것으로 보인다. 열살무렵부터 명절이면 생선전, 동그랑땡에 밀가루 묻히는 것부터 배우며 잘한다, 잘한다는 말이 정말 칭찬인 줄 알고 송편빚기 만두빚기에 자원한 옛날의 어린 나를 돌이겨보면 너무도 억울하고 속상하다. 남동생들은 옆에서 딱지치기 팽이치기나 하고 놀았는데! 난 음식 거들지 않으면 어린 사촌동생들 포대기로 업고 달래주고 있었고 흑..  박수근의 <애기 업은 소녀>에서 울 엄마의 모습을 떠올렸지만, 사실은 그 친숙함에 내 모습도 담겨있기 때문일 수도!  

한껏 비뚤어져 있는 내 심정으로 판단컨대 확실히 엄마들은 자식들에 대해서 얼마간 편애를 한다. 편애 받는 자식들도 아픔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암튼 편애에서 제외된 자식들은, 그 중에서도 보살핌 노동력으로 당연시되는 딸들은 특히 억울하다. 연로한 병든 부모의 보살핌 노동에 대한 실태 조사에서 1순위는 비혼딸, 2순위는 기혼딸, 3순위는 비혼아들, 4순위는 기혼아들(사실은 며느리) 순이라는 기사를 본 적이 있다. 이건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을 비롯한 아시아권의 공통점이라고 들은듯. 어차피 후대 아이들은 부모 보살핌을 의무로 여기지도 않겠지만, 심정적으로 딸이 더 부모를 잘 모실 거라는 편견이 어쩌면 요즘 딸 선호사상과도 맞물리지 않나 싶어 소름이 끼친다. 편애하는 자식 따로 있고, 보살핌 노동자로 당첨되는 자식 따로 있고, 공평하지 못하다! 요즘 세대의 사상으로 봐서는 아직도 한참 멀었다 싶지만, 후대의 딸들은 부디 더 자유롭기를... 나는 이미 이번 생에 글렀으니... 사랑하는 나의 조카 ㅈㅁ이 같은 딸들을 위해서 세상이 더 확확 바뀌기를 소망한다. 엄마들부터 제발 바뀌어야한다고! (설마 바뀌고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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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 탓도 있었고 게으름 탓도 있어서 전시 구경이 너무나도 뜸했던 2021년에 대한 보상심리인지... 굶주린 사람처럼 3주째 전시장을 휘저었음. 대규모 박수근 전시를 보았던 기억이 있어 언제인가 블로그를 뒤져보니 2014년 탄생 100주년 기념전을 가나아트센터로 보러 갔었다고 적혀 있다. 그새 8년이 흘렀다니... 그때 전시가 더 인상 깊었던 것도 같은데, 박수근 그림에 대한 애정은 어쩐지 모든 한국인에게 '국룰'이 된 것 같아서 요번 전시도 여전히 좋았다. 이건희 컬렉션이 포함되었다는 것 같았으나 주로 소품 위주라 딱히 새로이 보이는 작품이 많은 듯한 느낌은 아니고, 다른 개인소장품도 많아서 암튼 대작들은 다 볼 수 있다. 

게다가 당시 어둡고 암울한 시대상을 반영한 것인지 깜깜한 전시장에 은은하게 작품만 도드라지게 조명을 받는 분위기가 고즈녁하고 참 좋았다. 맘에 드는 그림 앞에서 한참동안 멍하니 서서 감상하는 묘미가 더욱 깊어지는 느낌이랄까.  

브로셔 표제작품 [나무와 두 여인]

작품 사진도 휴대폰에 실컷 담아왔지만....그날의 어둠컴컴한 전시실 분위기를 주로 담은 사진으로만 골라 올린다.  미술관 구경다니더라도 제발이지 이젠 엽서라든지 포스터 따위 사모으지 말아야지 결심했지만, ㅠ.ㅠ 결국 마스킹 테이프랑 맨 마지막 사진 속 작품인 [나무와 두 여인] 포스터 그림은 사오고야 말았다(아기 업은 소녀 그림과 둘 중에서 끝가지 고민함. ㅎㅎ 그리고 액자에 표구된 그림은 무려 35만원에 판매되고 있는데, 사람들이 거침없이 사들고 가는 걸 목격하고 부러웠음.) 더 이상 그림 걸 벽도 안 남은 주제에!! 째뜬 일단 고이 잘 모셔두었다. 포스터를 살 때엔 2013년에 사다붙인 브레송 사진 포스터를 이참에 부악~ 떼어버리고 대신 박수근 그림을 걸 작정이었는데... 와서 보니 또 찢어버리기가 아깝네그려. ㅋㅋ 

째뜬 허영심 가득한 문화생활은 여기에 모아두지 않으면 제대로 기록해둘 방법이 없으니 원 코로나 시국에 돌아다닌 게 민망해도 꾸역꾸역 적어둔다. 전시는 2022년 3월 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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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들은 왜 속마음을 선뜻 털어놓지 않으실까. 표본의 수가 엄청 적기는 하지만 친구들과 노모 얘기를 하다보면 역시나 공통되는 푸념 하나가 엄마의 말뜻을 어떻게 이해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한국인은 최소한 세번은 권해야한다는 쓸데없는 '국룰' 때문일까? 바쁘게 돌아가는 21세기에, 모녀지간에 아직도 그러는 건 시간낭비 감정낭비 아닌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요번 엄마 생일에 맛있는거 외식할까요? 아니 됐다. 귀찮게 뭘 나가 먹니. 간단히 집에서 먹자.... 근데 또 열심히 설득에 나서면, 영 싫은 눈치도 아니다. 물론 까칠한 딸의 설득이라는 것이 조근조근 양해를 구하는 게 아니라서, 아 몰라! 집에서 밥 차리기 내가 힘들다고요! 뭐든 나가서 먹을 거야! 한중일양식 중에 고르세요. 안 고르면 내 맘대로 정할거야!... 이런 식으로 반협박을 하면 엄만 또 못 이기는 척 따라나선다. 솔직히는 원래도 그럴싸한 데 가서 외식하고 싶으셨던 게 아닐까?

사실 울 엄만 본인의 욕망을 늘 감추고 살며 인고의 삶을 표방하는 어머니상은 아니다. 오래 우울증, 조울증을 겪으시면서 자기방어기제가 생겼는지, 아니면 늘 엄마를 중심으로 (이건 작고하신 아버지의 아내 사랑 영향이 크지만) 위해바치는 태도가 익숙해졌기 때문인지 종종 내가 "울 엄만 모성애가 부족해!"라고 투덜거릴 만큼 본인 중심의 사고방식을 시전하실 때가 많다. 나의 두 할머니들이 극진한 손주사랑으로 뭐든 손주 먼저 챙겼던 태도와 너무도 달라서 나로선 신기할 정도다. 또 예를 들자면, 울 할머니들은 과일이든 간식이든 웃 어른으로서 제일 먼저 챙겨드리면, 그걸 대체로 나나 어린 손주들에게 양보하셨다. 아니면 아껴두었다가 우리더러 더 먹어으라고 주신다든지. 근데 울 엄만 혹시라도 옆에서 빨랑 먹고 싶어 징징 우는 조카들에게 먼저 간식이나 과일을 챙겨주었다가는 엄청 뭐라고 하셨더랬다. 어른(당신)이 먼저지! 애들이 어디 버릇 없이!! (물론 맞는 말이다;;;) 그러고는 실제로도 엄마 입으로 가장 먼저 들어감. ㅠ.ㅠ 딸기공주였던 큰 조카와 왕비마마 울 엄마의 은근한 알력 다툼 때문에 ㅋㅋ 옛날엔 따로따로 담은 딸기와 케이크를 동시에 딱 가져다 드리거나, 큰 접시에 공유용으로 내갔을 땐 양손으로 동시에 포크로 찍어 나눠드렸을 정도다.

모든 엄마들이 자식을 위해 언제나 희생하는 게 옳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모성애도 결국 사회를 위한 세뇌이자 이데올로기라는 데 동조함. 그렇기에 울 엄마의 당당한 가모장 태도를 응원하긴 하는데, 먹거리 장유유서와 관련된 원칙은 중시하면서 그 외 사안엔 왜 본인의 속마음을 단번에 내보이는 건 어려워하시는지 모르겠다. 모녀 여행이라도 떠났다가는 도무지 속을 알 수 없는 반응 때문에 얼마나 속이 터졌던가. 이거 먹을까, 저거 먹을까, 여기 더 들렀다 갈까, 말까, 뭘 살 것인가 말 것인가의 선택 앞에서 엄마의 첫 대답은 늘 "됐어." "괜찮아." 였던 것 같다. 그렇다고 내가 짜증나서 쌩 돌아서기라도 해보면 섭섭한 눈치시고! 어휴.  

엄마도 이젠 내 더러운 성질머리 아실 때도 됐는데, 아직도 습관처럼 "엄만, 됐다. 니 마음대로 해."라고 하는 반응 때문에 속이 문드러진다. 그래서 요새 내가 도입한 방법은 질문하기 전에 먼저 협박(?)을 한다는 거다. 엄마, 딱 한번만 물을 거예요. 잘 생각하고 대답하세요.... ㅎㅎ (물론 이 방법도 잘 안 통할 때가 많다. +_+) 내가 너무 못됐나? 엄마들도 제발 이제 좀 자기가 원하는 것, 바라는 것, 좋고 싫은 것을 단숨에 입밖으로 내뱉으셨음 좋겠다. 여든살에도 맘대로 못하고 살면 넘 억울하지 않으시냐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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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을 실천하기는 어려워도 암튼 물건 정리하기 원칙 중 1년간 안 입은 옷은 버려라, 가 정답이라는데 동의하지만 코로나 시국에 외출을 삼가다보니 1년간 안 입은 옷을 추려낸다면 아마 절반도 넘을지 모른다. 그러니 옷 버리기는 코로나 시국에서 벗어난 다음으로 하기로 하고...

그래도 엄마옷들 중에는 1년이 아니라 3, 4년간 꺼내보지도 않은 옷들이 더러 있어서 몇 개 버리려고 꺼내놓았다가 한판 싸움이 났다. 모녀간의 싸움이라는 것이 뭐 서로에게 잔소리를 연달아 늘어놓고 반항하는 정도이긴 하지만, 엄마는 내가 안 입는 옷 좀 정리해서 버리자고 하면 꼭 "나도 갖다 버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웃기는 건 또 내가 엄마 안 계실 때 몰래 버린 옷은 없어진 줄도 아예 모르신다는 점! 

노인들이 오래된 물건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 자신도 쓸모없는 사람이 되었다고 느끼신다고 -- 함부로 버리지 못한다는 말은 들었는데, 아니 진짜로 어깨뽕이 어마어마하게 들어간 연두+주황 체크무늬 재킷 같은 건 안 버리면 대체 어쩌시겠다는 건가? +_+  그나마도 요샌 버리는 게 아니고 아름다운가게에 기부할 거다, 옷 수거함에 넣어두면 수출된다더라 살살 달래서 설득해 엄마의 허락을 받을 때가 많지만, 도무지 입을 일 없을 것 같은 여우털 달린 (무거운) 롱코트라든지 엄청 비싸게 장만했으나 10년도 넘게 안 입은 무스탕이라든지, 버버리 롱트렌치코트 같은 건 아직도 옷장을 차지하고 있다.

"아예 나도 갖다 버려라!"와 함께 세트로 엄마가 부르짖는 말 또 하나는 "앞으로 죽을 때까지 옷을 절대 사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그간 못 버린 옷들을 다 껴안고 계시니 옷장이며 서랍장이며 옷방에 옷이 오죽 많겠나. 그러니깐 유행 지나서, 혹은 너무 무거워서 안 입는 옷들 싹 다 정리하고 새로 갑삭하고 편한 옷들로 몇 개 새로 장만하시자고 아무리 얘길 해봐야 소용이 없다. 지금 있는 옷만 다 돌려 입어도 죽을 때까지 다 못입겠다나. 

그치만 오십대인 나도 이젠 무거운 옷 어깨 허리 아파서 못 입겠고 아무리 예뻐보여도 꽉 끼는 옷은 손이 안가게 마련인데 팔십대 노인이 무거운 옷들을 대체 어떻게 입으시겠다는 것인지... 엄마 옷 정리 문제로 싸웠다고  친구들에게  푸념했더니 역시나 그들도 깔깔 웃었다. 칠, 팔십대 엄마들 죽을 때까지 옷 안 사시겠다는 레파토리는 왜 다들 똑같으냐면서. 쳇.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작년 겨울에 편하게 입을 경량패딩을 사드렸고, 당연히 엄만 요새 가끔 병원 나들이 할 때 갑삭하니 거추장스럽지 않은 그 옷만 입으신다. 새옷 싫어하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어휴. 

아끼는 삶이 습관과 태도가 되신 엄마들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지만 이제 좀 그러지 마십시다. 계속 좀 누리고 사시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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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친가든 외가든 할머니댁에 놀러 가보면 온 집안이 깜깜했다. 전깃불을 아끼느라고 혼자 계시거나 할아버지랑 두분만 계시면 낮엔 좀처럼 전등을 켜지 않는 게 일상이었던 거다. 역시나 전쟁 세대의 습관인 것 같다. 7, 80년대까지도 종종 비가 많이 오거나 벼락치면 정전사태가 났으니 학교에서 전기 절약에 관한 표어를 만든 적도 있다. 

암튼 여름방학때 외가에 놀러가 며칠 지내다보면 외할머니는 심지어 전깃불을 켜면 덥다고 얼른 끄라고 소리치셨다. 예전 30촉, 20촉, 100촉짜리 (이런 말 아는 사람은 옛날 사람이다. ㅠ.ㅠ) 백열등에 익숙한 사고방식이었을 거다. 진짜로 백열등은 오래 켜두면 뜨거워서 손을 델 수도 있다. 그치만 형광등은 안 뜨거워진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외할머니에겐 안 통했다. 해서 여름 낮엔 어둠컴컴한 방안에서 선풍기만 휘휘 돌아가는 풍경이 그려진다.

문제는 우리 엄마도 여전히 전깃불을 몹시 아끼신다는 거다. 이번 여름에 하도 더워서 에어컨을 밤새 트는 날은 있었을지언정, 방에 전등 켜는 건 잘 볼 수가 없다. 집이 동남향이라서 오후엔 좀 거실이 어두워지는 편이라 글씨라도 읽을라치면 난 전등을 켜야 속이 시원한데 엄마는 굳이 베란다 창에 비춰가며 그냥 뭔가를 읽으신다. 화장실 갈 때도 낮엔 전등을 켜지 않으신다. 문 닫으면 당연히 어두우니 볼 일 보면서 문을 열어두는 식이다. ㅠ.ㅠ 엄마나 나나 각자 공간에서 따로 살지만 난 혼자 있어서 화장실 문 열고 볼 일 보는 건 상상도 안 되는데, 엄만 참....  

짜증이 나는 건 엄마가 뭔가 안방이나 옷방에서 물건을 찾아야할 때다. 낮에도 옷장이나 서랍에 든 물건을 찾으려면 전등을 켜야 마땅하건만, 엄만 깜깜한 어둠 속에서 더듬더듬 뒤져놓곤 "암만 찾아도 없다"고 그냥 나오신다. 내가 전등 스위치만 올려도 바로 보이는 물건을 도대체 왜?!!

놀랍게도 전등을 잘 안 켜는 것 역시 친구의 어머님들도 공통으로 보이시는 행동이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시야가 좁아지는지 물건을 잘 찾지 못하면서도, 굳이 전기요금을 아끼는 습관... 참으로 괴롭다. 우리나라만큼 전기요금 싼 데도 없다고, LED등이나 형광등은 전기요금도 얼마 안 나온다고 아무리 얘기해도 소용없다. 반면에 조카들은 가는 곳마다 전등을 켜두는 게 일상이다. 어두운 걸 못 견디는 거다. 혼자 있을땐 더더욱! 그래서 조카 ㅈㅁ이가 우리집에서 지낼 땐 전등 스위치 안 내린다고 할머니한테 잔소리를 엄청 들었다. 화장실도 늘 켜놓고 냉장고 들락날락해야하니 부엌도 켜놓고...  ㅎㅎ

신체리듬을 자연에 맞추려면 낮엔 태양광으로만 살고 밤엔 전등의 도움을 약간 받다가 깜깜하게 끄고 잘 자는 게 좋다는 걸 안다. 하지만 그게 가능하냐고! 전등은 잘 안켜고 깜깜하게 사시지만 그보다 전기요금은 훨씬 더 많이 나오는 TV는 온종일 틀어놓으신다는 것 또한 엄마들의 공통점이다. 아 진짜, 엄마들은 왜 그럴까. (그렇지 않은 어머님들의 사례 구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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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어 덮밥

식탐보고서 2020. 5. 8. 20:59

 

어버이날 행사는 늘 주말에 미리 당겨서 동생들과 모여 밥을 먹지만, 정작 당일날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지나기가 좀 그래서 어차피 먹는 밥이지만 또 한번 메뉴에 신경을 쓰게 된다.  해서 작년 어버이날엔 스테이크를 구워 곁들이 채소와 함께 접시를 채웠던 기억이 있다.

올해는 다음주 채혈을 앞두고 있어서 최소 일주일간은 나름 눈가리고 아웅 건강식으로 열량을 제한하는 중이라 가벼운 메뉴로 연어덮밥을 만들어 먹었는데, 칭찬에 워낙 인색하신 엄마가 맛있다 맛있다 여러번 감탄사를 내뱉었다. ^^ 처음 만들어본 거라 간이 어떨까 걱정했는데 간도 딱 맞았기에, 다음에도 참고하려고 여기에 기록해둔다. 

그리고... 마트에 나간 김에 카네이션도 사왔는데 ㅠ.ㅠ 아이비랑 카네이션을 예쁘게도 섞어 잘 키웠네 생각하며 들고 와보니 꽃은 조화였다. 나 원 참. 그 옆에 카네이션만 있는 화분도 있었는데 꽃이 별로 안 예쁘길래 탐스러운 것으로 골랐더니 럴수럴수 이럴수가. 눈이 삐었다는 말을 이럴 때 쓰는가 보다.  

재료: 생연어 200g(2인분), 양파 1/4개, 다진 마늘 약간, 간장 1과 1/2숟갈, 참기름 1숟갈, 설탕 1티스푼, 고추냉이 약간, 후추, 요리술, 달걀노른자, 무순

 

1. 생연어를 적당한 크기로 잘라서 오미자요리술에 담가 10분쯤 냉장고에 넣어둔다.

2. 다진 양파와 다진 마늘에 간장, 설탕, 참기름, 고추냉이, 후추를 넣고 휘휘 젓는다.

3. 재웠던 연어를 건져 요리술을 잘 짜낸 뒤에 양념장에 버무린다.

4. 뜨거운 밥은 좀 식혀야 한다고 해서 그릇에 미리 담아 더운 기운을 뺐다. 담아놓은 밥 위에 양념한 연어와 무순을 올리고 맨 위에 달걀노른자를 얹는다.

5. 노른자를 톡 터뜨려서 비벼 먹으면 됨. 

연어보다 달걀노른자가 주인공처럼 나왔다. ㅋㅋ 연어를  칼로 길쭉하게 잘랐지만 결국 비빌 땐 가위로 더 잘라드려야했다. 다음엔 깍둑썰기로 해야지. 내가 찾아본 레시피엔 부추나 쪽파를 넣으라고 했는데, 마트에 가보니 너무 거대한 양을 사기 꺼려져 내맘대로 무순을 넣어봤는데 완전 딱이었다. 다음엔 무순을 더 많이 넣을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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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투덜일기 2020. 2. 27. 14:20

10년 전에 엄마 칠순 생일 가족모임을 어떻게 준비하나 고민을 여기 블로그에 적었던 기억이 생생한데, 후딱 10년이 지났고 ㅜㅜ 주말에 왕비마마의 팔순 생신을 맞았다. 작년 생신때는 올해 팔순을 기약하며 아예 동생들도 집에 못오게 했었다. 그때도 병끝이라 엄마 상태가 부실했었기 때문이다.  1년전만 해도 칠순때처럼 팔순 역시 가까운 친척분들은 다 모시고 밥을 먹어야하는 게 아닐까 짐작했지만 1년새 생각이 확 바뀌었다. 다 귀찮아! 준비하는 나의 귀찮음이 가장 크겠지만, 오실 분들도 다 노친네들인데 오라가라 힘드니 안 부르는 게 서로 상책이란 결론에 도달했다. 불과 1달 전만 해도 엄마가 멀쩡히 외식을 하러 나갈 수 있을지 확신도 없었기 때문이다. 스트레스는 만병의 원인이고, 그 말은 조울증세에도 해당된다. 엄마가 심히 아프기 전에 이미 의논했을 때 딴 식구는 절대 부르지 말자고, 우리 삼남매랑 손주들만 모여 평소처럼 조촐하게 밥 먹는 게 좋겠다고 주인공의 동의도 미리 받아놓았었다.

밥먹는 장소도 내 마음대로 정했고 3주전에 예약도 마쳤다. 경치가 밥값의 절반이라는 여의도 사대부집 곳간. 의외의 변수는 코로나19였지만 뭐 차로 이동하고 마스크 쓰고 가면 되겠거니 했다. 9식구 단촐하게 모여 밥먹는 자리라 딱히 준비할 것도 없었지만 그래도 팔순인데 하나쯤은 뭔가 달라야지 싶어 케이크토퍼를 주문했다. 토퍼까지 아예 세트로 보내주는 화려한 꽃앙금으로 만들어진 떡 케이크를 주문할까 말까도 오래 고민했지만 한식뷔페에 후식으로 떡이 지천일텐데 싶고, 우리 가족들은 몇번 사본 떡 케이크보다 역시 제대로 케이크를 더 좋아하므로 요맘때 제격인 딸기 케이크를 사기로 결정.

케이크토퍼 문구는 대충 샘플에서 이름만 바꾸고 주문했는데 바로 다음날 택배가 도착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나마 대구에서 확진자 폭발하기 직전이라 가능했던 것 같다. 요즘엔 뭘 시켜도 빠른 배송이 어려울 만큼 사람들이 생필품까지 배달시키며 사는 듯. 휴...

'팔순축하드립니다' 대신에 '항상 건강하세요'를 넣어야하는 게 아닐까도 좀 고민했었는데 도착한 택배를 보니 이렇게 추가 문구와 하트 두개까지 서비스로 넣어 딱딱한 종이에 단단히 붙여서 보내주더군. 뭘 살 때 잘 모르면 돈을 더주는 게 낫다는 옛사람의 진리를 요번에도 실감했다. ㅎㅎ

토요일 오후, 예약시간보다 넉넉하게 집을 나섰는데 다들 바이러스 공포로 집에 콕 박혀 있을줄 알았더니만 길에 차가 꽤 많았고, 음식점에도 사람들이 바글바글, 심지어 바로 옆 연회장에선 결혼식이 있을 예정이었다. 20200222. 2가 무려 5개나 들어가는 엄청난 길일이라 결혼식이 많다는 이야기는 진즉 들었지만 에고.

째뜬 계획했던 대로 조촐하게, 배부르고 뿌듯하게 이른 저녁을 다 먹고는 케이크를 준비해 조용조용 생일축하노래를 불러드린 뒤 엄마에게 소원을 비시라고 했다. 아들놈 하나가 웃으며 '팔십살에도 소원이 있나?'라고 코멘트하기에 속으로 버럭했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다. 인간은 죽기 직전까지도 바라는 거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 참 내... 


8개의 촛불을 엄마는 네번에 걸쳐 힘겹게 불어 끄셨고, 난 좀 속이 상했다. 원래 케이크 촛불은 거의 한방에 불어끄시는 분이었는데 흠... 사진을 보니 초를 너무 벌려 꽂아놔서 끄기 힘들었던건가 싶기도 하다. 하여간 이로써 우리나이로 80세, 엄마의 팔순 모임이 무사히 지나갔다. 약이 과도해선지 아니면 기억력이 심히 떨어진 때문인지 걱정스러운 수준이 된 건망증도 자극할 겸 열심히 외우게 시킨 영어문장 중 하나. 아임 에이티 이어즈 올드. I'm eighty years old.

헬로우로 시작되는 내용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동생들에게 퍼돌릴만큼 신나게 읽고 연습하시기에, 이날 손주들 앞에서 뭔가 짧게 영어 스피치도 하시라고 할까 계획했으나 결국 그러진 못했다. 발음도 좋으시고 읽기는 잘 되는데 암기는 어려워. ㅠ.ㅠ  반복 연습을 시키며 내년엔 에이티원이라고 말씀드리니 싫으시단다. 만으로는 에이티잖아. 계속 에이티만 할 거야. 하긴 나도 맘같아선 계속 피프티만 하고 싶다.  

그나저나 나는 팔십세까지 몇년 남은거지? ㅠ.ㅠ 또 10년 뒤면 엄마가 구순이 되시고 난 육십대가 된다는 게 지금으로선 상상도 되질 않는다. 무섭게 흐르는 시간을 이럴 때나 실감하는 듯. 하지만 그냥 하루하루 무심하게 흘려보내며 사는 수밖에 별 뾰족한 수는 없겠다. 가능하면 나이는 잊을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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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훈련

아픈 손가락 2020. 2. 19. 16:46

수년전 금강경 사경을 시작으로, 작년 상반기까지 엄마는 꾸준히 거의 매일 불경이나 불교서적을 노트에 필사 하셨다. 처음엔 그냥 종교적인 신심에서 비롯된 자발적 시도였지만, 독서보다도 훨씬 더 두뇌활동에 자극이 되는 게 바로 책을 읽고 중얼거리면서 손을 움직여 쓰고 다시 확인하는 복합과정이기 때문에 내가 강권하다시피 했고 엄마도 곧잘 협조해주셨다. 하지만 5월 22일을 끝으로 방치했던 노트는 나의 닥달로 9월1일에 딱 한번 다시 한 페이지 필사한 뒤 줄곧 외면당하고 있었다.

작년연말부터 병세가 나빠졌을 땐 온전하게 대화만 가능해도 감지덕지할 정도였으니, 필사는 개뿔. 바랄 수도 없었는데 2월 중순 접어들면서 엄마는 거의 안정적인 상태로 회복되었고, 머잖아 다시 약을 줄여야할 거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런데 이번주에 걱정스러운 두번의 에피소드가 발생했다. 일요일인 2월 16일. 화장실에 다녀온 엄마는 대뜸 내일 큰아들 생일이지? 라고 물었다. 네? 뭐라굽쇼? 내일이 며칠인데 큰아들 생일? 엄마의 대답은, 11월 17일이잖아....  (큰아들 생일이 11월 17일인 것은 맞다. 건강한 상태였던 몇달 전 그날을 기념해서 엄마가 아들 가족에게 밥도 사주셨더랬다) 다시 잘 생각해보라고, 냉장고에 붙어 있는 달력을 보시라고, 정신 차리라고, 지금이 11월이 맞냐고 물었다.  

잠시 후 11월 아니야? 2월이야? 왜 헷갈렸지? 본인도 의아해하고, 나도 어리둥절함과 속상함 속에서 그냥 넘어가는수밖에 없었다. 

그러고는 어제. 셋째주 화요일. 매달 엄마가 고교동창 친구들과 오찬을 하는 날이지만, 코로나바이러스 창궐로 전날 저녁 취소되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올해는 엄마도 엄마 친구들도 대부분 팔순이 되는 해여서, 1월부터 생일자들이 돌아가서 밥을 사기로 했다는데 1월엔 당연히 엄마 상태가 안좋으시니 불참했다.  2월 오찬은 곧 생일을 맞이하는 울 엄마가 밥값을 내기로 예정되어 있었기에 엄마 본인도 요번엔 꼭 참석하리라 단단히 벼르고 계셨고, 나도 부실한 울 엄마를 종종 보살펴주시는 친구분들(길 잃고 헤매거나 약속장소 헷갈리는 울 엄마 찾으러 출동하기도 하고, 택시 태워 보낸 뒤 나한테 전화도 넣어주시고.. ㅠ.ㅠ)께 뭔가 약소하나마 선물을 하고 싶어서 핸드크림을 사다가 포장을 해두었었다.  엄마 친구분들은 성남시장까지 가서 참기름, 들기름도 짜다가 나눠주시고 막 그러는데 자긴 맨날 받기만 한다고 울 엄마가 징징거린 적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격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전화통화 후, 미리 가방에 넣어두었던 핸드크림은 다음달을 기약하며 옷방 책상에 올려두었는데...  어제 아침에 느즈막히 일어나 보니 엄마가 보이질 않았다.

어랏? 설마... 절에 가는 날도 아니고, 에이, 모임에 가신 건 아니겠지... 생각했으나 핸드크림도 자취를 감춘걸 보며 문득, 취소되었던 모임 상황이 바뀌었나? 생각했으나 그럴 리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집이든 핸드폰으로든 전화가 걸려왔으면 내가 잠결에도 못 들을 리가 없다. 엄마가 우편물 확인하러 내려가셨나보다 했던 현관문 소리가 엄마의 외출소리였던 것이다!

득달같이 카톡을 보내고 전화를 하고 문자를 보내고... 통 답이 없더니 6번째 전화만에 엄마가 휴대폰을 받았다. 예상대로 약속장소인 사당역까지 갔다가 아무도 없어서 친구들한테 전화로 확인을 한 뒤 집에 돌아오시는 중이라고. ㅠ.ㅠ 어제 취소 전화 받은 건 전혀 기억에 없단다. 거의 두달만에 엄마 혼자 감행한 외출이다보니 그간 몇번 억지산책에 끌고 나가긴 했어도 불안했다. 혼자서 집에 잘 찾아올 수 있을까.

결과적으로 엄만 무사히 집에 돌아오셨다. (현관 비밀번호를 엉뚱하게 눌러서 내가 소리쳐 알려드려야 했으나 뭐 그건 전에도 있는 일...) 따로 쇼핑백에 들고간 핸드크림도 손에 꼭 쥐고서. ㅠ.ㅠ (한번도 손에서 놓지 않으셨다고) 근데 모임이 왜 취소되었는지, 전날 모임 취소 관련 통화를 한 기억은 전혀 없다고 했다. 모임 장소에서 홀로 기다리다가 친구들과도 한분한분 다 통화를 한 모양인데, 집에 와서도 또 다른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서 왜 안 만나기로 했는지 물으셨다. 

매달 셋째주 화요일 모임은 당연히 각인되어 있는 정보이니 잊지 않는 게 당연하다. 하지만 모임이 취소되었다는 것도 일시적인 정보이고, 내가 친구분들에게 드릴 핸드크림을 사놓았다는 것도 일회성 정보인데 왜 둘 중에 하나만 기억에 남았을까? 인간은 누구나 기억이 선택적이고 중요한 정보만 두뇌에 남는다. 근데 친구들 나눠줄 선물은 중요하고, 모임 취소는 중요하지 않았다는 의미다. 으휴.

2주전 진료때 주치의에게 정밀 뇌진단을 받아보았으면 한다고 의논했을 때, 의사는 좀 더 지켜보고 결정하자고 말했다. 인지기능개선제인 아리셉트를 드시고 계시지만, 지금 복용 용량으로도 알츠하이머 예방은 충분한 건가 불안한 엄마와 내 마음을 의사는 잘 이해 못하는 것 같다. 이런 에피소드도 그냥 일시적인 걸로 무시하고 넘어가도 되는 걸까?

암튼 몹시 불안해진 나는 다시 그 옛날 필사 노트를 꺼내왔다. 재미없는 불경과 책 내용 필사는 별로 흥미가 없을 것 같고 두뇌자극에 제일 좋은 건 외국어 배우기라는 말을 본 적이 있어서 이번엔 영어 문장을 베껴적고 단어를 외우시게 할 작정을 한 거다. 

내 이름은 OOO이고 80살이고, 어쩌고 저쩌고... 10문장쯤 되는 말을 만들어서 반복 읽기를 시킨 뒤 단어를 10번씩 쓰라고 말씀드렸다. 그런데 1시간쯤 뒤에 가보니, 3단어만 되풀이해서 쓰고 7개 단어는 깡그리 패스, 나머지는 마지막 네 문장을 베껴적어놓으셨다. 내가 나중에 외우기 시험볼 거라고 했더니 열심히 읽고 외우느라 바쁘셨나보다. 그게 아니면 정보 전달이 일부만 머리에 남거나. 흑흑.

암튼 근 6개월간 엄마가 글씨 쓸 일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영어단어 적어놓은 글씨를 보니 손가락 힘이며 인지기능 상태는 많이 나빠지지 않은 것 같아 조금 마음이 놓였다. 알츠하이머 노인들은 힘있게 획을 긋지 못한다고 들어서... 하여간에 너무 한번에 스트레스 주면 안되니깐 나머지 단어들은 오늘 다 10번씩 쓰시라고 숙제를 내주었는데... 어제 간만에 홀로 대중교통수단 외출로 무리를 한 탓인지 온종일 주무신다. 컨디션이 좋아지면서 약도 과도해진듯.  그치만 난 또 못된 사감선생처럼 가서 노친네를 깨워가지고 다시 두뇌훈련을 시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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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인도 당신 영어 글씨 흡족해하심.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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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병

아픈 손가락 2020. 2. 6. 16:31

 

다행히 설날을 기점으로 엄마의 병세는 고비를 넘긴 듯하다. 불안증과 의심증도 차츰 줄어들더니 드디어 오늘은 내가 언제 그랬냐 싶게 간간이 기분이 좋으시다. 1년 전에도 12월에 심하게 발병했다가 설날 지나고 2월 들어 진정세에 접어들었었다. 그래도 작년엔 2월 말이었던 79세 생일 모임을 건너뛰었다. 상태가 그리 좋지 않았었다는 의미다. 당시 핑계는 내년이 팔순이니 2020년에 거하게 밥을 먹자고, 그리고 곧이어 잡혀 있던 고손녀의 돌잔치 때 얼굴 보면 되지 않겠느냐고 동생들을 설득했다. 

 

2019년 3월9일이었던 돌잔치날 엄마는 도무지 환자로 보이지 않는 건강한 모습으로 파티에 참석하셨다. 심지어 미용실에 가서 머리 드라이도 하고 오셨던 터라 기쁨에 겨워 기념 사진도 남겼었다. 미소가 온화하고 우아하기 이를데가 없다. 평소 내가 왕비마마라고 떠받들어드리는 울 엄마의 모습이다. 남들도 다들 인상 좋으시다고, 엄청 고우시다고 (경복궁 선생님들의 칭찬이다 ㅋ) 하는 얼굴.  

오랜 세월 함께 엄마의 병증을 겪어온 가족들은 엄마 표정만 보아도 안다. 증세가 나쁠 때는 얼굴의 일부 근육과 신경도 이상해지기 때문에 사나운 표정과 눈빛으로 돌변한다. '호랑이 눈썹'이 되었다고 내가 표현하기도 하는데 눈 주변의 주름이 바깥쪽을 대각선으로 경직되면서 무서운 느낌으로 바뀌는 거다.  뇌의 일부 전달물질이 불균형을 이르면서 신경이 곤두서면 근육도 그에 따라 지배되는 것 같다. 암튼 오늘 엄마의 표정은 완전히 이 모습까지 이완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표독스러워져서 무서울 정도의 느낌에선 확실히 벗어나셨다. 이제 나도 겨우 숨을 편히 쉴 수 있을 것 같다.

 

엊그제 2주만에 다시 진료를 받으면서, 잠자는 게 여전히 불편하다는 엄마의 말에 의사는 세로켈 용량을 200mg으로 더 늘렸다. 연세가 많으셔서 복용량 변화를 심하게 할 수가 없다보니 늘 이런식이다. 입원을 시켜 곁에서 면밀히 지켜보지 않는 한 1, 2주 만에 한번씩 상담후 조금씩 약을 바꾸다 보면 한두달이 훌쩍 지나간다. 요번엔 엄마가 비협조적이어서 중간에 더 먼저 찾아가 약을 바꿀 기회를 놓쳐서 더 기간이 오래 걸렸다. 젠장.

하여간 그래도 역시나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이건 '아는 병'이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그러면서 참으면 결국 좋아지는 때가 온다. 다시 병세가 나빠지는 주기가 너무 빨라져 그것이 절망스럽긴 하지만, 악화일로에 놓이는 알츠하이머와는 또 다르니까.

연세 때문인지 점점 더 증세가 심해지고 기간도 길어지면서 요번에 특히 역대로 힘들고 괴롭던 차에 신기하게도 인간의 심리 원리를 다룬 책 증정본을 하나 받았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어쨌든 겪어 나가는 당사자로서 삶은 참 공교로울 때가 있다. 엄마한테 난데없는 의심과 비난을 받으며 내가 징징 울며 괴로워할 때 도착한 이 책을 받자마자 양극성 장애 부분을 펼쳐보았다. 그림과 도표로 간단한 정보를 담고 있는 책임에도, 그 간단한 정보가 엄청 위로를 주었다. 어차피 치료약이 있으니 전문가들은 다 아는 병이겠지만, 계속 재발하는 것이 너무 속상하긴 하지만 엄마가 보이는 성격 변화와 온갖 증상들도 결국엔 다 예측범위 안에 들어 있었다.

"기분이 급변할 때는 극단적인 성격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데 이는 사회적, 개인적 인간 관계에 심한 긴장을 유발한다" (<심리 원리> p40)

"일반적으로 양극성 장애의 주요 원인은 뇌 기능에 관여하는 화학물질들의 불균형으로 알려져 있다. 신경 전달 물질이라고 불리는 이 화학 물질에는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도파민이 포함되며 신경 세포 간에 신호를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유전도 원인의 하나로, 양극성 장애는 가족 내에서 유전되고 어느 나이에서나 발병할 수 있다. 100명 중 2명은 살면서 한번 이상의 양극성 장애의 삽화(episode, 우울증이나 조증 같은 특정 증상이 지속되는 기간-옮긴이)를 경험한다고 하는데 그 중 일부는 평생 두어번의 삽화만 겪지만 어떤 이들은 여러 번 겪는다. 삽화를 촉발하는 요인으로는 스트레스, 질병, 인간관계에서의 어려움이나 돈 또는 직장과 관련된 문제 같은 일상 생활 속의 괴로움 등이 있다." (p40-41)

우울증과 조증의 패턴을 나타내는 그림을 보아도, 아 그렇구나 싶다.   

안정기 → 경조증 →우울증(이 시기에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고 수면장애와 식욕저하를 겪고 망상 환각 불안정한 사고를 경험)  → 약한 우울증 → 조증 → 혼재성 상태  ㅠ.ㅠ

영원한 레아 공주, 캐리 피셔가 남겼다는 말도 위로가 됨. "양극성 장애는 도전이지만, 거의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을 줄 수도 있다." 

석달째 엄마를 돌보면서 나도 우울증 환자가 되는 건 아닌가 싶은 순간이 꽤 많았다. 뭔가 다 포기해버리고 싶은 느낌? 아는 게 병이기도 하지만 또 아는 게 힘이기도 해서, 기분이 바닥을 칠 때면 위험신호라는 걸 스스로 인식하고 홀로 뛰쳐나가거나 약속을 만들어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위기를 나름 잘 극복한 것 같다. 스스로 장하다. 물론 장기적으로 볼 땐 엄마의 '삽화'가 매년 같은 시기에 반복되는 양상을 보이고 있으므로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또 지나갈 것으로 믿어야지 별 수 있겠나.

엄마의 성격변화와 몇몇 이상 증세가 유독 심해서 혹시 조울증 때문이 아니라 알츠하이머의 전조이면 어쩌나 걱정이 되어 - 치매 환자를 겪어본 주변 사람들은 대체로 알츠하이머의 가능성에 손을 들었다 - 주치의에게 두뇌 정밀검사를 해봤으면 좋겠다고 했더니 증세가 완전히 회복된 이후에도 그러는지 두고 보자고. 엄마도 나도 가장 두려워하는 그 병만은 진짜로 아니면 좋겠다. 째뜬 보름 뒤로 다가온 조촐한 팔순 가족모임은 별 문제 없이 강행해도 좋을 듯하니 다행이다. 다들 웃는 얼굴로 맛있는 밥 먹고 힘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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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설날 고민

투덜일기 2020. 1. 17. 16:56

최대명절 설날이 일주일 앞으로 다가왔다. 당연히 또 마음이 무겁다. 아니, 올해는 심히 더 무겁다. 재작년 가족회의를 거쳐서 차례는 연1회, 설날에만 우리집에 모여 올리고 추석땐 성묘를 가서 묘제를 지내는 것으로 결론을 냈었다. 그런데 작년초에 갑자기 내가 아프게 되면서 설날 차례는 결국 못지냈다. 아파서 누웠다가 절뚝절뚝 거리면서 장도 보러 다니고 차례 음식 장만을 할 수는 없는 일. 결국 설날과 추석 연휴 모두 이불속에 누워 있거나, 편히 쉬면서 잘 보냈다.

1년 사이 나름 많은 일이 있었다. 남의 집에만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고부갈등이랄까 '시'자 붙은 사람들과 성 다른 며느리의 시각차이를 뼈저리게 느끼는 사건들이 몇 차례 이어졌고, 내가 아무리 '페미니스트' 시누이로서 중간 역할을 잘한다고 해도 역시나 나도 '시'자가 붙은 당사자이기에 절대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음을 깨닫는 시간이 있었다.

암튼 여차저차 서로에게 수많은 상처를 안기고 남은 결론은 서로 '영원히' 안 보고 사는 것. 두 며느리 중 한 며느리는 없는 셈 치고 살기로 했다. 상황을 정리하기까지 많이 괴로웠지만 사실 나 역시 그 편이 마음이 훨씬 홀가분하다. 명절만 해도 노동의 상당부분을 내가 더 많이 하고 신경도 내가 더 쓰며 배려한다고 살았는데, 이젠 육체적인 노고는 더 많아졌어도 정신적으로는 더 편해졌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나머지 한 명의 며느리도 공감했다. 이제 그 사람 눈치 안봐도 되서 마음 놓인다고.

그러나 셋이 나눠 하던 음식 준비중 삼분의 2를 내가 도맡는다고 해도 (녹두전은 이미 공산품으로 나온 걸 여럿 먹어보고 골라서 이미 냉동실에 사다 두었음!), 남자들에게 설거지며 청소 관련 일을 더 시킨다고 해도, 남은 한 명의 며느리 입장에선 그 외 잡다한 명절 노동의 부담이 늘어난 것이 사실이다. 그것은 과연 공평한가.

명절 이외에도 우리집엔 두번의 제사가 있다. 조부모님과 우리 아빠. 제사란 것이 음력으로 날짜를 따지다 보니 거의 매번 평일이기 때문에, 멀리 지방 본사로 내려가 주말부부로 살고 있는 아들 하나는 제사 때문에 상경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그렇다면 남편도 없는데 얼굴도 모르는 시조부모님의 제사를 위해 손주며느리가 음식장만을 해와야 하는 의무는 옳은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고민 끝에 내가 내린 최선의 결론은 95년과 96년에 차례로 돌아가신 조부모님 제사를 이제 정리하는 것이다. 25,6년이나 정성스레 모셨으니, 울 할머니 할아버지의 영혼이 정말로 있다면, 이제 그만 되었다, 수고 했으니 그만해라... 라고 하시지 않을까. 여차하면 2007년에 돌아가신 아빠 제사도 그만둘 참이다. 10년 넘겨 지냈으면 할만큼 한 거 아닌가. 그것도 비혼의 딸이 노상 병들어 비실비실하는 엄마를 모시고 우리 집에서 주관하는 차례와 제사는 과연, 집안 모두의 평화를 위해 지속되어야 하는가?

특히나 요번 겨울은 엄마 때문에 너무 힘들어서, 정신이 불안정한 환자 케어와 명절 준비를 동시에 진행한다는 것이 고난도의 미션 같다. 해서 요번 설날에 다들 모이면 또 한번 가족회의를 열어야겠다. 조부모님 제사는 이제 그만 지내기로 결정하는 것이 1안, 작은아버지가 모셔가서 조촐하게 지내시라고 하는 것이 2안. 몇달 전 심신 멀쩡하실 때 울 엄마가 제안했던 대로 절에다 얼마간의 돈을 내고 제사를 맡기는 것이 3안이다.

추석 차례를 없앨 때, 전통적으로 추석땐 다들 성묘만 한다더라, 집안 여자들의 노동이 너무 고달프다,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았을 때 가부장제의 화신이 깃들었는지 큰동생과 작은아버지는, 옛날엔 하루 종일 3끼 다 먹고 헤어졌던 때도 있는데, 식구도 많이 줄었는데 (그땐 아버지의 오촌당숙님네 식구들도 10명씩 몰려와서 세배하고 그랬었다) 뭐가 그리 힘들다고 그러냐고, 일년에 몇번이나 된다고 그러느냐고, 이젠 전날 와서 자는 것도 아니고 음식도 셋이 나눠서 하지 않느냐고 말해서, 내가 열이 뻗쳐 뒷목을 잡았었다.  결국 "1년에 한번이든, 3년에 한번이든 힘든 건 힘든 거지! 내가 이제 늙어서 힘들어서 못해먹겠다고!" 버럭 소리를 지른 다음에야, 아 그럼 그러든지... 억지 동의를 했던 거다.

그러니 요번에도 제사문제를 거론하면 또 어떤 의견과 난항에 부딪칠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확고한 건 내가 악역을 맡아서 매듭을 지으리라는 결심이다. 엊그제부터 엄마가 징징거리며 반복하는 말이, "착한 딸은 어디 가고 어디서 악독한 년이 와 있다"는 푸념이다. 맞다, 이제 나도 착한 딸 착한 누나 착한 조카 노릇은 그만하련다. 악독한 년, 싸난 년이 되어서 내 앞가림부터 해야지. 그렇지만 회의하자고 해놓고 강압적으로 통보하고 윽박지르는 느낌은 안 들도록, 부디 현명하고 지혜롭게 우아하게 내 입장을 잘 설명할 수 있기를 바란다. 전통이 허락한 진짜 의무는 생각 않고 이름만 남은 권위만 내세우려는 늙고 젊은 가부장들도 제발 유연한 사고를 품어주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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