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에 해당되는 글 198건

  1. 2007.03.08 가끔 2
  2. 2007.03.07 3월에 내리는 함박눈 4
  3. 2007.03.01 Why not? 5
  4. 2007.02.28 낯선 오전 생활 1
  5. 2007.02.27 병원에서 본 메디컬 드라마 1
  6. 2007.02.25 간병 모드 6
  7. 2007.02.20 설날 뒤끝 5
  8. 2007.02.16 설날 준비 4
  9. 2007.02.09 옥수수 예찬 8
  10. 2007.02.08 비의 촉촉함 3

가끔

삶꾸러미 2007. 3. 8. 12:09
늘 변함없이 돌아가고 있는 세상과 나를 단절시켜 놓고 지내다가
문득 그 경계를 넘어서게 되면 이미 다 알고 있었으면서도 모르는 척 지내던 사실에 새삼 놀라게 될 때가 가끔 있다.

가령

부모님의 여행이라든지 하는 빌미로 신데렐라 통행금지 시간을 벗어나게 된 어느 밤
새벽 2시가 넘도록 불야성을 이룬 밤거리를 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을 봤을 때
어머나... 이토록 늦은 시간에도 다들 참 자유롭구나 느꼈다든지

일 욕심 좀 내느라 작업실에서 꼬박 밤을 지새고 새벽녘이라 여겨지는 7시쯤
텅빈 거리를 달려 5분 만에 집에 가겠지 생각하고 나선 어느 평일 아침,
초췌한 몰골에 퀭한 눈으로 운전대를 잡은 나와 달리, 활기차거나 조바심 치는 얼굴로
출근길 도로를 가득 메운 자동차의 행렬에 파묻혀 있을 때
아... 내가 이져 겨우 잠들려 하는 시간에 수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바쁘게 하루를 시작하는구나 새삼 깨달았다든지

무기력하고 나른한 분위기에 산소마저 부족한 것 같은 거대한 대학병원 병동만 보름 가까이 드나들다가 드디어 거기서 겨우 10분 거리에 있는 신촌엘 나가본 어제 저녁
세상 사람들 절반이 환자고, 나머지 절반은 의료진과 보호자로 느껴졌던 그간의 생각을 비웃듯  세상 사람들은 변함없이 즐겁게 웃고 떠들고 차마시고 술마시며 어깨가 서로 부딪칠 만큼 거리를 메우고 있었군,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거다.

바보처럼.

한눈팔지 못하도록 경주마의 눈 옆에 가리개를 하듯
늘 눈앞의 상황이 마치 온 세상의 전부인듯 자의적인 착각을 하고 살아가는 이 아전인수격 태도는 지금껏 늘 내게 위안이었던 것 같은데,
오늘 문득 과연 정말 잘 지내고 있는 건가 의문이 들었다.



그나저나, 질기게도 남아 미련을 떨고 있는 겨울은 오늘도 눈발을 휘날린다.
그만 좀 가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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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에도 눈발이 휘날리더니만...
3월 7일에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다니!!!

다른 동네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작업실이 있는 응암동엔 지금 굵은 함박눈이 펑펑 내리고 있다. 구름은 잔뜩 끼었지만 먹구름이 아니라 흰구름이고 얼핏 햇빛도 느껴지는 환한 하늘이어서 좀 내리다 말겠지 생각했는데 아닌가보다.

낮기온은 영하 날씨가 아니어서 쌓일 것 같지는 않지만
암튼 하도 신기하고 난감해서 어쩐기 기록해둬야 할 것 같았다.

이젠 정말 봄이 왔나보다고 마음 놓았더니
겨울은 내 뒤통수를 때리듯 며칠째 마지막 심술을 부리고 있다.
생명력이 가장 질긴 잡풀과 함께 화단에서 벌써 파랗게 돋아났던 민들레 새순은 그제 어제 혹한에 얼어버린 것 같던데, 경칩까지 다 지나고서 눈이 내리다니...
내 아무리 눈을 좋아한다지만 이럴 때 내리는 눈은
아무도 반기지 않는데 눈치 없이 떠나야 할 순간을 모르고 자꾸만 엉겨대는 주책바가지 같아 밉살스럽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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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not?

삶꾸러미 2007. 3. 1. 17:52

언제고 이 블로그의 주소가 왜 ynot(와이낫)인지 사연을 적어야겠다 마음 먹었는데
그날이 오늘이 되고 말았다.
물론 몹시 심오한 뜻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니다.

혹 아는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언더그라운드 밴드 가운데 '와이낫 ynot'이라는 밴드가 있다. 대학원 다니던 시절 지금은 캘리포니아에서 유학중인 J양의 추천으로 함께 대학로 소극장에서 한 공연을 보러 가기도 했는데, 간만에 락카페 간 기분으로 스탠딩 공연에서 맥주 한 캔 손에 들고 어슬렁어슬렁 춤도 따라 출 수 있었던 분위기도 좋았고, 국악과 크로스오버 한 것 같은 음악도 섞여 있는 레퍼토리가 제법 괜찮았다.
그래서 다음 카페 가입도 하고 공연소식이며 신곡 소식에 한동안 귀를 기울이기도 했었는데
늘 그러듯 나야 음악에 관한 한 문외한이고 오타쿠적인 면도 전혀 없는 인간이다 보니
어느 순간 멀어졌다.

그런데 ynot이라는 밴드 이름을 들은 순간 낯익고 정겹게 느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번역을 처음 시작할 때 이른바 '로맨스 소설'이라는 장르를 '전문적'(?)으로 출간하는 출판사와 일을 하게 되어 주야장천 몇년간 로맨스 소설만 번역한 적이 있었다. ^^;;
사실 로맨스 소설이라고 하면 중학교 시절 하이틴 로맨스, 할리퀸 로맨스를 열심히 읽다가 고등학생이 되면서 천편일률적인 갈등 구도와 인물묘사에 식상해져 집어치웠던 전적이 있었는데, 어쩔 수 없이 다시 로맨스 소설을 사랑해야 하는 상황에 놓인 거다.
전에도 살짝 이야기했지만, 원서 내용이 제 아무리 부실하고 짜증나더라도 일단 정성을 들여 번역을 하려면 (다른 번역가들은 어떨런지 모르겠다만...) 내 경우 무조건 애정을 가지려고 자기최면을 걸어야한다. 

그러다보니 또 로맨스 소설을 읽는 재미도 새삼 불타올랐다.
남성우월적인 마초이기 십상이지만 '몹시 잘생기고 훤칠하고 돈 많고 대개 목소리까지 멋진' 남자 주인공과 짜증스러운 감정의 기복을 보이며 까탈을 부리지만 매우 예쁘고 몸매도 훌륭한 여주인공에 대한 불만을 어지간히 잠재우고 나면, 그들의 밀고 당기는 사랑놀음과 절대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농염한 러브신(!), 그리고 성격파탄자 남녀 주인공을 서로 잘 길들여 어김없이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끝나는 동화적인 해피엔딩이 주는 재미가 또 쓸만하기 때문이었다. ^^;;

암튼 세부묘사가 장황한 로맨스 소설에서 빠지지 않는 상투적인 표현 가운데
여주인공의 성격을 묘사할 때 현대물의 경우 흔히 들어가는 말이
"Why?"라는 말보다 "Why Not?"이라고 되묻는 때가 더 많은 유형이라는 표현이 있었는데
삐딱투덜이 기질을 뼛속까지 지닌 나에겐 그 말이 참 마음에 들었던 것 같다.
"들어가지 마시오"라고 적혀 있으면 오히려 한 번 꼭 들어가고 싶은 반항의 기질을
한마디로 표현한 느낌이랄까...
(그러고 보니 어린시절 꼭 "잔디밭에 들어가지 마시오"라는 팻말 주변에서 보란듯이 찍은 사진들이 참 많다 ㅎㅎ)

'여자가 어딜 감히...'라는 편견이라든지
'술 많이 마시지 마라', '담배 피우지 마라', '늦게 들어오지 마라', '노처녀는 안된다' 따위의 당부에 난 걸핏하면 속으로 '왜 안되는데?'라고 되뇌었고, 웬만한 건 몸소 부딪쳐 깨지고 다치고 겪어본 다음에야 나름대로 판단을 내렸던 것 같다.

carpe diem과 함께 why not?(줄여서 y_not)은 이제 거의 내 삶의 잣대쯤으로 자리잡았다고 생각된다.
그래서 더 정겨운 ynot이라는 블로그 주소.

3월 첫날을 맞아 심기일전 열심히 살아야한다고 다짐하고 나왔는데
자꾸만 엉겨붙는 짜증과 여건의 압박 때문에 오늘은 온종일
"대체 왜 안된다는 건데?"
"왜 못하게 하는 거야?"
"왜 가지 말라는 거야?"
.
.
.
따위의 why not?을 조금 전까지도 연발했다.
속이 좀 상하지만, 결국엔 내 뜻대로 밀고 나가리라 다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어본다.
까짓거 못할 건 또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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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오전 생활

삶꾸러미 2007. 2. 28. 11:52

직장생활을 했던 7년이란 세월보다
준백수처럼 산 12년의 세월이 더 긴 탓에
주로 올빼미의 삶을 영위해온 나는 오전 중에 무언가 지적인 활동을 한다는 게 참 낯설다.
특별한 날이 아니면 늘 오후와 밤중만 있는 하루하루를 살았기 때문.

아침형 인간인 후배 하나는 출근해서 9시부터 12시까지의 일의 집중도가 놀라워
하루 중 일의 효율이 오전 중에 가장 높다며 나에게도 오전 생활을 권하기도 했지만,
오늘 아침 일찍 병원 들러 왕비마마 알현하고 다시 작업실에 나와 앉아 있긴 하되
나로선 좀처럼 일에 집중할 수가 없다.
공연히 애먼 커피만 연신 들이키고 있는데, 다량의 카페인으로도 그간 오전중엔 수면에 길들여진 나의 두뇌가 쉽사리 깨어나질 않으려 하는 듯...
그나마 오후엔 새벽까지 이어지는 불면이 두려워 많이 못 마시는 커피를 맘껏 마실 수 있다는 게 흐뭇하긴 하다.

정오가 다가오고 있으니 아무래도 슬슬 깨어나긴 하겠지만
어서 깨어나라 나의 두뇌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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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마마의 병세가 그만그만한 상황이어서
엄마 시야에서 단 한 순간도 벗어날 수 없는 24시간 전방위 간병체제를 탈피할 수 있게 된
지난 주말, 재방송으로 하는 <외과의사 봉달희>를 우연히 병원에서 보았다.
한 마디로 어찌나 웃기던지, 민망한 생각에 10분도 채 보지 않고 일어나야 했다.

현실 속 병원 안내방송에선 심심치 않게 "XX 병동 코드블루 코드 블루"(응급상황임을 알리는 안내방송이다)를 외쳐대지만 병원 복도에서, 심지어는 응급실에서조차 뛰어다니는 의사나 간호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한밤중에 엄마 모시고 응급실에 갔다가 다음날 오후 4시에 병실 배정을 받기까지 무작정 기다리는 동안,
응급실에선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실려온 청년, 심장마비로 119에 실려온 할머니,
아이의 고열 때문에 사색이 되서 달려온 부모 등등 다양한 환자들을 구경했지만
메디컬 드라마 ER에서 보던 긴박감은 어디에서도 느껴지지 않았다.
간호사, 레지던트는 물론이고 떼거리로 몰려다니는 인턴들의 발걸음도 늘 여유롭기만 했으니까...

그런데 봉달희 선생을 비롯한 레지던트는 물론이고, 의대 교수인 안중근 선생 같은 사람(드라마에선 무슨 교수들이 또 그리 젊은지!)까지 드라마에선 수시로 뛰어다니며 환자를 돌보는 상황을 환자복 입은 환자들과 함께 병원에서 보자니 얼굴이 몹시 간지러웠다.

그나마 메디컬 드라마와 비슷한 현실의 모습을 찾아본다면
울 엄마의 담당 레지던트가 아침마다 회진 준비를 하려고 들렀을 때 보면, 잠이 몹시 부족한 얼굴로 대개 한쪽 뺨에 눌린 자국이 있다는 정도? ^^;;
워낙 유명하신 주치의 선생님은 아침 회진도 일주일에 3번 밖에 오지 않으시는데
그때는 정말로 <하얀 거탑>의 장준혁 과장님처럼 엄청난 레지던트와 인턴, 간호사 부대를 이끌고 병실로 들어선다. 그 기세에 눌려 보호자인 나는 병실 한쪽 귀퉁이로 밀려났다가 가끔 울 왕비마마가 대답 못하시는 부분에만 황송하게 대답을 하고 있다. ㅎㅎ

그간 드라마 따위에 신경쓸 겨를이 없기도 했지만,
이제 간병은 전문가 손에 넘기고 간병무수리의 삶에서 일단 벗어난 지금 약간의 여유가 생겼어도 메디컬 드라마를 챙겨볼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막연하게 현실과 다른 이상을 다룬 그런 드라마에 품었던 동경과 바람은
냉혹한 현실 속 병원생활 며칠 만에 깡그리 사라지고 말았나 보다.

현장에서 확인한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너무도 커서,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의 과대포장엔 몰입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래도...
어서 현장에서 탈피해 다시 메디컬 드라마에 심취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

(밀린 일 핑계로 간병인 쓰자고 고집을 피워놓고선, 제일 먼저 블로그질에 열을 올리고 있는 꼬락서니라니... 좀 민망타. 하지만 병원 생활 하는 사이, 컴퓨터 못하는 게 정말로 제일 답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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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병 모드

삶꾸러미 2007. 2. 25. 15:39
최소한 새벽 6시에 시작되는 병원의 하루는 참 길고 지리하다.
본인이 환자일 땐 지루할 때마다 슬쩍 잠들면 그만이지만 ^^;; 보호자의 경우에 특히 그렇다는 말이다.

지난 수요일 밤, 무섭게 치솟는 왕비마마의 혈압과 혈당에 2년 전의 악몽이 떠올라
식겁한 우리는 곧장 응급실로 달려갔고
다행히 위중한 상황은 아니지만, 이런저런 문제가 많아 경과를 지켜보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하여 결국 입원을 결정했다.
그리하여 목요일부터 지겨운 병원 생활의 시작.
가뜩이나 예민해서 누가 옆에만 있어도 잠 못 자는 까탈스러운 인간이
병원 보조 침대에서 자는 쪽잠은 몹시 피곤하기만 하다.
그나마 엄마의 상태가 그리 나쁘지 않다는 것에 안도해야겠지만
사람의 마음이란 참으로 간사하여... 이젠 그저 몹시 꾀병스러운(!) 병세가 호전되길
지켜보기만 하면 되는 단계에 이르니, 내 몸 피곤하고, 코앞으로 닥친 마감일에 원고 못 넘기는 것 때문에 짜증스럽다.

동생들은 어서 간병인을 고용하라고 하는데,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정작 환자가 남의 손길 닿는 게 몹시 싫단다.
된장된장된장...

암튼 잠시 집에 다니러 온 김에 이런 보고 할 여유도 생겨 다행이라고 여겨야 할 터인데
어떻게 밀린 원고의 난관을 해결해야 할 것인지.. 그것이 막막하다.
간병 무수리의 슬픈 비애.
캥거루족으로 사는 늙은 딸에게 역시 이럴 때 가족은 분명 멍에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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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뒤끝

삶꾸러미 2007. 2. 20. 16:13
서울이 고향이다보니
명절마다 좁은 집에서 복닥복닥 워낙 많은 손님을 치르는 까닭에 명절 뒤끝마다 나는 어디엔가 그 후유증을 털어놓았던 것 같다.
이번엔 블로그가 내 넋두리 공간으로 당첨됐다.

유난히 짧았던 이번 설 연휴는 유난히 후유증이 길다.
연일 음식준비며 뒤치다꺼리에 힘쓰느라 손바닥은 수세미처럼 버석거리는데, 핸드크림을 왕창 발라도 증세가 쉬 없어지지 않는다.
명절마다 최대 고비인 설날 저녁 30인분 잔치상의 어마어마한 설거지는 두 올케가 도맡아 했음에도 그렇다. 너무 바쁠 땐 아줌마 정신이 발휘되어, 고무장갑을 낄 여유가 없다. 내 손은 내가 아껴야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ㅋㅋㅋ 섬섬옥수 다 망가졌다.

설날 전날부터 내리 콩닥콩닥 뛰어다닌 까닭에, 설날 저녁부터 뒷다리가 땡기더니 어제는 거의 절뚝거려야 할 정도로 다리가 아팠다. 오늘도 어깨와 다리가 뻐근하고 뒷꿈치가 아프다. ㅠ.ㅠ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가에 가는 걸 생략한지 2년째라 그나마 어제 온종일 쉬었는데도 이렇게 피곤이 안풀리다니... 노동의 강도가 이번엔 좀 심했나보다.

평소에도 우울증이 수시로 찾아오는 울 왕비마마께서
설날을 앞두고 거의 일주일전부터 너무도 꾀병스러운 명절증후군이 도져 완전히 아기처럼 돌변하는 바람에 특히 이번 설날은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른 땐 하루, 이틀 전부터 병이 나더니만 이번엔 일주일 전부터 아예 나몰라라 드러누우신 왕비마마를 보며, 늙은 딸 무수리는 완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온 나라의 며느리, 시어머니, 아들, 딸들이 다 겪는다는 명절 증후군...
역시나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웃기는 건 몇년 째 암것도 안하고 뒷전에 앉아만 계시는 왕비마마가 홀로 명절 증후군에 덜미를 잡혔다는 것이다. -_-;;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해마다 짜증난다.
온갖 육체적인 고생은 우리 아랫것들(!)이 다 하는데!
우리도 왕비마마의 조언 없이 명절을 치르느라, 심리적인 부담감과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은데, 왕비마마는 그저 마음 고생 약간만으로도 정신을 놓아버린다.  나 원 참...

암튼, 와병으로 드러누우신 왕비마마의 문제를 제외하면
이번 설날도 "잘" 지나갔다.
몇년 째 나는 친척들 모두 모여  맛있게 음식 먹고 담소 나누는 걸로 명절의 의의를 마무리 짓자며, 음식 싸보내는 건 하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집쟁이 울 아부지의 반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대로 손이 큰 집안 답게 모든 음식은 넘치도록 많았고, 다들 맛도 있었고, 남은 전과 떡과 잡채 따위를 바리바리 싸서 고모님들 손에까지 들려 보내는 전통을 올해도 이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난생 처음 만들어본 수정과는
울 고모님들이 "평생 먹어본 수정과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평할 만큼
너무 달지도, 진하지도, 맵거나 싱겁지도 않고, 딱 알맞은 농도의 초절정완벽진미였다. ^^V
날이 따뜻하여 미리 냉동실에 넣어 절반쯤 얼렸다가, 살얼음 살살 씹히는 상태로 대접했던 게 아주 압권이었다는 후문! 크하하하...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이겠지만... 흐뭇하면서 동시에 부담백배다.
명절때마다 다들 수정과 내놓으라고 할 테니까... 쩝...

암튼 이번에도 왕비마마 대신, "수고 참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라니는 아까워서 어디 딴집에 못 준다"는 친척 어르신들의 말을 계면쩍게 들으며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니까 내가 이렇게 몸이 바스라져라 열심히 일하고 또 뿌듯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딸이 아니고 며느리의 입장에서라면 아마 입이 댓발은 더 나와서 투덜대며 명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속의 나와 달리 매번 조금도 투덜대지 않고 씩씩하게 명절 일손을 도운 두 올케가 그래서 더 기특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무사히 명절 치른 기념으로 이번에도 세 여자만 뭉쳐서 단합대회라도 해야겠다.
왕비마마까지 네 여자가 모이면 더욱 좋겠지만, 왕비여사는 하나도 수고 안 했으니 자격상실이다. 쳇...

2주전 계획은,
명절 노동으로 쑤시는 삭신을 다 같이 찜질방에 가서 노곤하게 풀자는 것이었는데
꾀병쟁이 왕비여사 때문에 그것도 다 글렀으니, 그저 뜨뜻한 방바닥에나 또 드러누워 어깨와 허리를 지져봐야겠다.
내일부턴 정신차리고 작업모드로 진입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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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준비

삶꾸러미 2007. 2. 16. 16:58
8남매 장남이신 울 아부지의 자랑스러운 '고명딸'로 태어나
나는 명절에 대한 기억이 아스라히 남아 있을 때부터 명절 노동에 손을 보탰던 것 같다.
제일 쉬운 단계인 "생선 전 밀가루 묻히기"부터.. ^^;;

이제 그 일은 작년부터 정민공주의 몫이 되었으니..
정민이도 나중에 커서 명절이면 자기도 엄마랑 고모 거들어서 포뜬 생선에 밀가루 묻혔다고 추억하게 되겠지.

"남들 다 가는"(?) 시집을 안 가고 버티기에 들어간지 꽤 됐지만
명절은 며느리가 아닌 나에게도 제법 버거운 노동의 장이다.
부실한 엄마 대신, 장보기부터 명절음식 총감독을 해온 연차가 제법 되기 때문...
음식 솜씨 좋으신 작은엄마들이 명절이며, 제사 때마다 미리 와서 도와주시지만, 이젠 환갑을 바라보시는 그분들은 좀 쉬실 때가 된 것 같아서, 올케들에겐 좀 미안하지만 작년부터 우리끼리 음식준비 다 해보자고 다짐했다.
우리식구만 달랑 먹는 음식을 준비하는 것과
3, 40명쯤 되는 친척분들이 드실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건 역시나 부담이 크다.
하지만 몇년간의 전적으로 보아, 올해도 무사히 맛있고 푸짐하게 잘 지나갈 것이라 여기며 큰 걱정은 하지 않는다.
다만... 명절 때 다 팽개치고 훌쩍 여행을 떠나고픈 나의 "로망"이 과연 언제나 이루어질까.. 하는 것이 서글플 뿐. ^^;;
하긴 그런 로망이 있긴 해도, 일년에 몇번 우글우글 다들 모이시는 친척분들이랑 맛있는 거 나눠먹고 세뱃돈 받고(요샌 부모님 밖에 안 주시지만 ㅜ.ㅜ;;)
고스톱 치시는 작은 아버지들 옆에서 개평 얻어내고, 애들 끼리 윷점치고 그러는 게 나는 싫지 않은 정도가 아니고 제법 즐기는 편이다.
명절의 즐거움이 여성들의 가열찬 노동을 전제로 한다는 것이 속상한데... 그거야 아부지를 비롯한 모든 남자들을 자꾸 부려먹으면 되지 않을까...(라지만 막강한 설거지를 좁은 부엌에서 해치우는 건 아무래도 동생놈들한테 역부족이더라. 쩝..)

암튼 오늘은 난생처음 수정과를 끓이고 있다.
마음 같아선 조카들이 좋아하는 식혜도 만들고 싶지만, 아무래도 엿기름과 밥알 띄우는 게 자신 없어서, 그냥 계피와 생강을 푹푹 끓이기만 하면 되는 수정과에 도전했다.

온 집안에 풍기는 계피 냄새가 그럴듯하게 명절 분위기를 만들어주고 있다.
과연 제 맛이나 나주려는지.. 슬쩍 걱정이 든다.

오늘 안에 대청소도 해야하는데...쩝.
청소는 아무래도 나보다 더 꼼꼼하신 아부지를 닥달해봐야겠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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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수수 예찬

삶꾸러미 2007. 2. 9. 21:55
오늘은 웬일인지 정말로 '씻기가 싫어서' 작업실 출근을 포기하고
염려했던 대로 온종일 좀비처럼 빌빌거렸는데
조금 전 외출에서 돌아오신 부모님이 옥수수 한 보따리를 내게 안기셨다!
연노랑색에서 진한노랑, 갈색 옥수수알이 그림처럼 예쁘게 들어박힌 찰옥수수를 본 순간
나의 좀비모드는 돌연 식탐아귀모드로 돌변했고,
폐인준백수와 가장 잘 어울리는 메뉴인 '달걀라면'을 끓여먹은지 30분도 안된지라
배가 심히 부른 걸 아랑곳하지 않고 게 눈 감추듯 옥수수 한 자루를 해치웠다. ^^;;

조금 전 토룡일보의 바나나빵 기사를 읽으며 군침을 다셨던 걸 이심전심 부모님도 텔레파시로 느끼셨던 걸까!!
아아.. 뱃가죽이 팽팽하게 심히 늘어나 약간의 거북스러움이 느껴짐에도 옥수수가 주는 행복감에 미련스럽게도 마냥 기쁘다. ^___^
특별한 인공의 맛 없이 자연의 맛이 고스란히 느껴지는 옥수수가 나는 정말로 좋다.
생긴것도 야무지고, 이름마저도 예쁜 옥수수!
어렸을 땐 정말로 옥수수를 먹으면 늘 '옥수수알 길게 두 줄 남겨가지고~' 노래를 부르며
하모니카 부는 흉내까지 내며 행복했더랬다.
어렸을 때부터 길게 두 줄 옥수수알을 남기는 '내공'을 쌓았던 터라 찰옥수수가 아닌 몹시 무르고 노란 여물 옥수수를 먹을 때도 너덜너덜 옥수수 껍질 흔적이 많이 남은 옥수수대를 내려놓는 다른 사람들과 달리, 대단히 깨끗하고 깔끔하게 옥수수 알맹이를 완벽하게 뜯어먹은 옥수수대를 남기는 나를 보면 많은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_-V
그렇지만 그렇게 맛있고 소중한 옥수수알을 함부로 뜯어먹을 수야 없다는 것이 나의 옥수수에 대한 예의다. ㅋㅋ

요즘이야 이렇게 한겨울에도 저장해두었던 옥수수를 '맛있게' 쪄서 파는 데가 많지만
생긴건 멀쩡해도 딴지 오래된 옥수수를 저장한 탓에 너무 딱딱하고 맛이 없는 옥수수를 만나면 완전히 X밟은 기분이 되기 때문에 선뜻 사먹게 되질 않는데, 옥수수에 광분하는 딸래미의 성격을 잘 아는 부모님은 용케도 맛있는 옥수수를 찾아내신다.
당신들도 워낙 옥수수를 좋아하시기 때문에 한눈에 맛있는 옥수수를 알아보시는 것이리라.

작년 여름에 동생네와 동해 다녀오면서 휴게소에서 사먹고
바닷가에서 또 사먹고, 결국엔 국도 근처에서 파는 옥수수를 한 자루 사다가
신나게 쪄먹었지만 나의 옥수수 열망은 좀체 가시질 않았던 것 같다.
여름 끝자락이 돼서 날것으로 파는 옥수수가 사라질 무렵이면 나는 마구 조바심을 치며
옥수수를 여러 자루 사다가 냉동실에 넣어놓고 겨울 내내 쪄먹는 방법은 없을까 별별 생각을 다하는데, 내가 그렇게 유난을 떨면 부모님은 겨울에도 옥수수 파는 데 많으니 걱정말라고 핀잔을 하셨더랬다.
그렇지만 여름에 갓 수확한 옥수수를 얼른 쪄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찰옥수수를 뜯어먹는 거랑, 어디 그 느낌이 같으랴!

하지만 그간 옥수수 열망이 컷던 덕분인지
오늘 사온 옥수수는 쫄깃쫄깃 보들보들 옥수수맛의 진수를 그럭저럭 간직하고 있다.
아... 행복해라.

한 겨울에 이렇게 맛있는 찰옥수수를 먹게 되다니..
부끄러울 만큼 게으르고 나태한 하루를 보낸 뒤에 너무 과분한 상을 받은 것 같은 느낌이다.
ㅋ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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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 촉촉함

삶꾸러미 2007. 2. 8. 23:50
이 비 그치면 더 추워지겠구나 속상해하며 비타령 한 게 불과 얼마 전인 것 같은데
오늘은 이 비 그치면 좀 추워졌다가도 결국엔 따뜻해지겠거니 희망을 품게 되는 비가 내렸다.
요새 하도 일기예보가 틀리기에
수요일쯤 비가 내리겠다는 주간 날씨를 깡그리 무시하는 척 하면서
화요일엔 알공달공 몹시 더러워 도저히 봐줄 수가 없을 것 같은 꼬락서니를 하고 있는 차도 세차를 했는데, 수요일 내내 비가 안 오기에 내 짐작이 맞았구나 했더니만 내 호기로움을 조롱하듯 밤사이 비가 내렸고, 오늘도 온종일 오락가락 우산을 쓰기에도 뭣하고 안 쓰기에도 뭣한 이슬비가 내리더라.

제 아무리 입춘이 지났다지만, 설을 앞두고 겨울에 이렇게 따뜻하고 봄비 같은 비가 내리는 건 순전히 엘니뇨, 라니냐 같은 지구 온난화 탓일 터이니 좋아할 수만도 없겠으나,
추운 걸 못 견디는 나는 민망하게도 그저 좋기만 하다.

비가 그치고도 여전히 촉촉하고 따뜻한 밤공기에선 어쩐지 봄내가 나는 것도 같아서
목에 두른 털실 목도리가 좀 민망할 정도였다.
비가 오면 공연히 센치해지고 감상적이 되는 건 순전히 저기압에 예민하게 좌우되는 신경과 호르몬 때문이라지만, 어쨌든 나는 마음까지 촉촉하게 적시는 비가 자꾸 내려서 봄소식이 빨랑 전해졌으면 하는 욕심이 앞선다.  

올 겨울엔 특히 눈 구경을 별로 못한 것 같지만, 동면하고 싶어 괴로워도, 까짓것.. 하면서 참아보기로 했던 겨울이 정말로 이렇게 힘을 잃고 있다는 것이 섭섭하기보다는 그저 반갑기만 하다.
날씨에 특히 기분이 펄럭대는 변덕쟁이답게 그래서 오늘은 봄을 재촉하는 촉촉한 비 핑계로 하루종일 탱자탱자 게으름을 부렸으니 이젠 슬슬 가속도 좀 붙여서 일을 해야 할 시간.
제발 가슴의 이 촉촉함이 두뇌의 촉촉함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노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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