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크레파스 색깔 가운데 제일 닳아 없어지는 색깔이 사람마다 조금씩 달랐을 거다.
내 경우는 노란색이었는데,
노란색도 연노랑과 개나리색, 귤색까지 톤별로 갖추어진, 호화찬란한 48색 크레파스를 가진 친구와 달리, 호사를 누려봤댔자 24색 정도로 만족해야 했던 나는 제일 먼저 하나 뿐인 노란색이 떨어지면 그림 그릴 의욕까지 떨어졌던 것 같다.
나중에 그림물감을 쓰게 되고 수채화의 묘미에 빠졌을 때도, 노란색을 하도 이색 저색에 조금씩 섞어 새로운 색을 만들어 쓰는 바람에 노란색이 제일 부족했더랬다.
내가 여러 화가들 가운데 고흐의 그림을 제일 좋아하는 건 아마도 어렸을 때부터 심취했던 노란색에 대한 애정 때문일 거란 생각도 든다.
미술책에서 고흐의 그림을 제일 처음 접했을 때 본 그림이 <해바라기>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조악한 인쇄술 때문에 색감을 제대로 살려냈을 리 없는데도
샛노란 꽃잎이 뚝뚝 떨어질 것처럼 탐스럽게 꽂혀있는 해바라기 그림이 참 좋았다.
그래서 고흐의 그림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작품을 꼽으라면 한 때는 주저없이 "해바라기!"라고 대답하기도 했는데, 사실 수많은 고흐의 해바라기 연작 가운데 어린 시절 동경의 대상이 어떤 작품이었는지는 지금도 알 수 없다. ^^;;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실제로 감상하는 영광을 누린
런던 내셔널 갤러리의 열네 송이 해바라기 그림이 제일 마음에 드는 것도 같지만, 벌써 오래 전 일이라 가물가물할 뿐이다.
물론 고흐 그림에서 눈에 띄는 게 어디 노란색 뿐이랴...
고흐의 그림에선 파란색도 확실히 남다르게 느껴진다.
인상파 그림들은 워낙 색감이 다채롭고 뛰어나지만, 고흐 작품에서 꿈틀거리는 듯한 붓자국으로 표현된 아주 다양한 색깔의 변주를 보면 참으로 신비롭고 아름다워 가슴이 촉촉하게 젖는 것 같다.
많은 이들이 좋아하는 <별이 빛나는 밤>과 <밤의 카페 테라스>에 표현된 밤하늘의 색감은
보랏빛이 아련한 <아이리스> 연작과도 이어진다.
물론 실제로 감상한 게 아니라 화집이나 달력, 인터넷 따위로 본 것이 더 많으니
이런 그림들 또한 인쇄 판본마다 조금씩 다른 색감을 전제로 나 혼자 구성하고 상상한 색감이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그럼에도 고흐 작품의 색채는 그 누구의 작품보다 현란하다고 단언한다.
스케치 작품까지 합하면 고흐의 작품 수가 1000편이 넘는다고 들은 것 같은데
(덧붙임: 고흐 관련 다큐멘터리에서 고흐가 10년간 자그마치 1900여점의 작품을 남겼다는 기록을 발견했다!!)
내가 사진으로라도 본 건 절반이 조금 넘는 400여편 정도에 불과하지만
자기중심적인 내 시각으로 볼 때 그 많은 그림 가운데 가장 강렬하게 인상에 남은 색은
역시나 노란색이다.
이 블로그 스킨이기도 한 <아를에 있는 빈센트의 방>이나
대문 사진으로 일부만 오려 놓은 <밤의 카페 테라스>도 그렇고
<해바라기>는 물론, 꽤 많은 <밀밭> 연작에서도
하물며 다양한 인물의 초상화에서도 내 눈엔 다채로운 색감의 노랑이 제일 강렬하게 남아
샤갈, 하면 강렬한 빨강이 떠오르듯 (이것도 나만 그럴지도 모르겠지만)
고흐, 하면 노랑이 떠오른다.
그리고 강렬하고 선연해서 가끔 슬프기까지한 고흐의 노란색이 어쩌면
점점 강렬해지는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이자 광기를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혼자만의 추측을 하곤 한다.
인상파 화풍의 영향을 받기 전인 초기작에선 노란색의 꿈틀거림이 그다지 강렬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고흐가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그린 마지막 그림이라고 알려진
<까마귀가 나는 밀밭>에서도 노란 밀의 물결은 검푸른 하늘에 대비되어
흐드러지게 아름답고 동시에 참 슬프다.
어쩌면 그의 마지막 그림이란 걸 알고 보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고흐의 노란색은 어린 시절 그림에 대한 나의 애착을 불러 일으키는 아련한 향수이자 막연한 슬픔이고 또 행복이기도 하다.
당대의 잘 나가는 화가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작은 거의 없고, 대부분 크기가 작은 고흐의 작품들은 보면 볼수록 정이 가고 마음이 끌리는 친구 같다.
내게 행복을 안겨주는 친구...
![사용자 삽입 이미지](https://t1.daumcdn.net/tistoryfile/fs1/22_2_10_14_blog9361_attach_0_3.jpg?original)
까마귀가 나는 밀밭, 50.5x103cm, 1890년 7월, 캔버스에 유채, 암스테르담 반 고흐 미술관'
고흐...
라고 하면 우선 그의 불행한 병력과 생전 화단의 외면 같은 외적인 요인을 떠올리지 말고
모두들 나처럼 화려하고 다채로운 노란색을 제일 먼저 연상해 주면 좋겠다는 생각에
끄적거려봤다.
오늘 문득
작은 복제품 액자로, 컵받침으로, 스테인드글라스 장식으로, 달력으로,
블로그 꾸밈으로 모습을 바꾸어 작은 내 작업실 구석구석에서 나를 쳐다보는 고흐의 작품들이 일제히 나에게 말을 거는 것 같은 느낌을 받고는
아무래도 내 스킨 선택의 이유도 블로그 어딘가엔 적어 놓아야
고흐한테 덜 미안할 것도 같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