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뒤끝

삶꾸러미 2007. 2. 20. 16:13
서울이 고향이다보니
명절마다 좁은 집에서 복닥복닥 워낙 많은 손님을 치르는 까닭에 명절 뒤끝마다 나는 어디엔가 그 후유증을 털어놓았던 것 같다.
이번엔 블로그가 내 넋두리 공간으로 당첨됐다.

유난히 짧았던 이번 설 연휴는 유난히 후유증이 길다.
연일 음식준비며 뒤치다꺼리에 힘쓰느라 손바닥은 수세미처럼 버석거리는데, 핸드크림을 왕창 발라도 증세가 쉬 없어지지 않는다.
명절마다 최대 고비인 설날 저녁 30인분 잔치상의 어마어마한 설거지는 두 올케가 도맡아 했음에도 그렇다. 너무 바쁠 땐 아줌마 정신이 발휘되어, 고무장갑을 낄 여유가 없다. 내 손은 내가 아껴야 한다고 다짐했었는데, ㅋㅋㅋ 섬섬옥수 다 망가졌다.

설날 전날부터 내리 콩닥콩닥 뛰어다닌 까닭에, 설날 저녁부터 뒷다리가 땡기더니 어제는 거의 절뚝거려야 할 정도로 다리가 아팠다. 오늘도 어깨와 다리가 뻐근하고 뒷꿈치가 아프다. ㅠ.ㅠ
외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외가에 가는 걸 생략한지 2년째라 그나마 어제 온종일 쉬었는데도 이렇게 피곤이 안풀리다니... 노동의 강도가 이번엔 좀 심했나보다.

평소에도 우울증이 수시로 찾아오는 울 왕비마마께서
설날을 앞두고 거의 일주일전부터 너무도 꾀병스러운 명절증후군이 도져 완전히 아기처럼 돌변하는 바람에 특히 이번 설날은 더 힘들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른 땐 하루, 이틀 전부터 병이 나더니만 이번엔 일주일 전부터 아예 나몰라라 드러누우신 왕비마마를 보며, 늙은 딸 무수리는 완전 배신당한 기분이었다.

온 나라의 며느리, 시어머니, 아들, 딸들이 다 겪는다는 명절 증후군...
역시나 우리집도 예외는 아니었던 것.
웃기는 건 몇년 째 암것도 안하고 뒷전에 앉아만 계시는 왕비마마가 홀로 명절 증후군에 덜미를 잡혔다는 것이다. -_-;; 해마다 일어나는 일이지만 해마다 짜증난다.
온갖 육체적인 고생은 우리 아랫것들(!)이 다 하는데!
우리도 왕비마마의 조언 없이 명절을 치르느라, 심리적인 부담감과  마음 고생도 만만치 않은데, 왕비마마는 그저 마음 고생 약간만으로도 정신을 놓아버린다.  나 원 참...

암튼, 와병으로 드러누우신 왕비마마의 문제를 제외하면
이번 설날도 "잘" 지나갔다.
몇년 째 나는 친척들 모두 모여  맛있게 음식 먹고 담소 나누는 걸로 명절의 의의를 마무리 짓자며, 음식 싸보내는 건 하지 말자고 주장하고 있지만, 고집쟁이 울 아부지의 반대에 부딪쳐 실행에 옮기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대대로 손이 큰 집안 답게 모든 음식은 넘치도록 많았고, 다들 맛도 있었고, 남은 전과 떡과 잡채 따위를 바리바리 싸서 고모님들 손에까지 들려 보내는 전통을 올해도 이을 수 있었다.

특히 내가 난생 처음 만들어본 수정과는
울 고모님들이 "평생 먹어본 수정과 중에 제일 맛있었다"고 평할 만큼
너무 달지도, 진하지도, 맵거나 싱겁지도 않고, 딱 알맞은 농도의 초절정완벽진미였다. ^^V
날이 따뜻하여 미리 냉동실에 넣어 절반쯤 얼렸다가, 살얼음 살살 씹히는 상태로 대접했던 게 아주 압권이었다는 후문! 크하하하...

소 뒷걸음치다 쥐잡은 격이겠지만... 흐뭇하면서 동시에 부담백배다.
명절때마다 다들 수정과 내놓으라고 할 테니까... 쩝...

암튼 이번에도 왕비마마 대신, "수고 참 많았다"는 인사와 함께 "라니는 아까워서 어디 딴집에 못 준다"는 친척 어르신들의 말을 계면쩍게 들으며
"우리" 가족을 위한 일이니까 내가 이렇게 몸이 바스라져라 열심히 일하고 또 뿌듯해할 수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딸이 아니고 며느리의 입장에서라면 아마 입이 댓발은 더 나와서 투덜대며 명절을 보내지 않았을까. 상상속의 나와 달리 매번 조금도 투덜대지 않고 씩씩하게 명절 일손을 도운 두 올케가 그래서 더 기특하고 고맙게 느껴진다.
무사히 명절 치른 기념으로 이번에도 세 여자만 뭉쳐서 단합대회라도 해야겠다.
왕비마마까지 네 여자가 모이면 더욱 좋겠지만, 왕비여사는 하나도 수고 안 했으니 자격상실이다. 쳇...

2주전 계획은,
명절 노동으로 쑤시는 삭신을 다 같이 찜질방에 가서 노곤하게 풀자는 것이었는데
꾀병쟁이 왕비여사 때문에 그것도 다 글렀으니, 그저 뜨뜻한 방바닥에나 또 드러누워 어깨와 허리를 지져봐야겠다.
내일부턴 정신차리고 작업모드로 진입할 수 있기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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