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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7.05.02 두달치 걷기 13
  2. 2007.04.30 가정의 달 12
  3. 2007.04.29 한옥 열망 13
  4. 2007.04.27 소음공해 8
  5. 2007.04.25 산행대회 9
  6. 2007.04.19 친구의 범주 10
  7. 2007.04.17 미용실 나들이 7
  8. 2007.04.15 밤벚꽃놀이 4
  9. 2007.04.11 오랜만에 혼자 10
  10. 2007.04.09 생각 조각들 7

두달치 걷기

삶꾸러미 2007. 5. 2. 14:56
어젠 근로자의 날을 맞아
부지런하기로 소문난 후배의 소집을 받잡고 난생처음 하늘공원엘 올라갔다.
(마라톤도 하는 이 친구는 우릴 만나기 전에 먼저 10km를 뛰었다고 했다 *_*)
그 아래 월드컵공원까지 간 적은 몇번 되었지만
나만큼이나 걷기를 꺼려하는 지인들이 많다보니, 뭘 굳이 올라가느냐면서 늘 되돌아왔는데
어젠 아예 홈에버에서 먹을것까지 잔뜩 사가지고
낑낑대며 지그재그로 뻗은 계단을 올라가 정자에 자리펴고 앉아 소풍기분까지 낼 수 있었다.

해마다 억새축제 할 때마다 은근히 가고싶다는 바람을 토로하는 엄마의 얘기를 귓등으로 흘리며 "축제 같은 거 할 땐 사람 많아서 구경도 못한대!"라고 퉁박을 주었는데
비온 뒤 흐린 날의 다저녘때라 사람들도 거의 없고 가끔씩 꿩소리만 사람을 퍼뜩 놀래키는 그곳이 제법 쓸만했다.

서울에서 무엇보다도 전깃줄하나 시야를 가리지 않는 하늘과
지평선 같은 너른 초원을 볼 수 있다는 게 어딘가!
게다가 억새와 다른 식물들이 자라기 이전의 황량한 들판엔
민들레들이 제 세상을 만난 듯 떼를 지어 터를 잡고 있었다.

남들은 하늘공원, 하면 다들 억새를 떠올릴지 모르지만
나는 아마도 하늘공원, 하면 앞으로 민들레밭이 떠오를 것 같다.


280개가 넘는다는 (어느 꼬마가 가르쳐주었다) 계단을 오르고 너른 들판을 이리저리 걸어다니고 다시 월드컵 공원을 가로질러다녔으니, 어제 예상했던 대로
오늘은 뒷다리가 당기고 허리도 좀 뻐근하다.
여실한 운동부족에 민망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어제 간만에 두달치 걸어다닐 걸 한꺼번에 다 해치우듯 많이 돌아다녔으니 한 이틀쯤은 내 몸한테 덜 미안해도 되는 게 아닐까. -_-;;

어쨌든 눈가리고 아웅식이라 해도
하늘공원이 된 난지도의 변신은 놀랍다.
아주 오래전, 난지도가 아직도 쓰레기 하치장이었을 때 그곳에서 폐품을 주워 살던 이들의 천막촌에 간 적이 있었다. 성산동 일대부터 이미 악취가 나서 나는 그만 얼굴이 일그러졌는데
그들은 거기에서 아이들을 키우고 넝마를 줍고 파리가 마구 날아드는 부엌에서 밥을 해먹고 있었다.

난지도가 하늘공원으로 개발되면서 그들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 어제 잠시 궁금했는데
나는 또 그냥 아메바처럼 탁 트인 하늘과 연초록 이파리와, 하얗게 핀 조팝나무 꽃을 보며 헬렐레 좋아서 금세 그들을 잊어버렸다.

난지도와 쓰레기장 천막촌 사람들
하늘공원과 민들레밭
이 둘은 같은 공간이면서도 참 다르다.
그러고 보면 나도 그 옛날과는 다른 사람인가.

암튼 5월 첫날.
나로선 참 많은 일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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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의 달

삶꾸러미 2007. 4. 30. 19:48
5월은 1년중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기다.
나무에 돋아난 연두색 이파리가 제일 예쁠 때이기도 하고
내 입에서 춥다는 소리가 완전히 사라진 최초의 달인 경우가 많고 (4월은 내게 아직도 춥다)
중학교때 영어시간에 배운 달 이름 가운데 제일 짧아서 제일 먼저 외웠기 때문이기도 하고 ^^
또 '유월이'가 간혹 6월에 태어난 하녀이름으로도 등장하는 것과 달리
'오월'은 어쩐지 어느 시인의 호 같기도 하지 않은가? ;-p

물론 학부시절 매캐한 최루탄 냄새로 뒤범벅됐던 추억은 여기서 제외다.
민주, 항쟁, 학살, 투쟁, 처절한 생존 따위가 5월과 나란히 자리하기 훨씬 이전에
내 뇌리엔 아름다운 신록과 아카시아향기 풍기는 5월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래서 5월이 더 슬프고 의미 있게 다가오기도 했지만.

그런데 언제부턴가는 5월이 슬슬 부담스럽기 시작했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어버이날 선물의 비중도 커지더니만 이젠 조카들이 넷!
첫 조카의 어린이날 선물을 고르며 신나게 돌아다녔던 9년전과 달리
이젠 네 녀석(그나마 작년까진 셋이었다)의 어린이날 선물을 고르고 쇼핑하고 전달하려면 골치가 꽤나 아프다. ㅜ.ㅜ;;
정민공주처럼 콕 찝어서 선물을 요구하는 경우엔 그나마 고맙다. ㅋㅋ
스승의날도 대강 넘어가는 해가 많긴 하지만, 일단 신경이 쓰이는 건 사실이다. 

게다가 어버이날 즈음하여 분가한 두 동생네와 스케줄을 맞춰 저녁약속을 잡고
음식점을 예약하고 그러는 일도 만만치가 않다.
며칠째 올케들과 머리를 맞대고 고민중인데도, 각자 친정 행사도 있고 보니
날짜 맞추기도 어렵거니와 부모님 선물을 뭘로 해야하나 그것도 머리가 지끈거린다.
에효...

꼭 무슨 날에만 부모님을 챙기는 것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매년 해온 행사를 그냥 건너뛸 수도 없는 일이고
주말에 단체로 모여 밥먹었다 해도, 어버이날 당일을 또 그냥 넘어갈 순 없으니
난 또 한아름 장봐다가 이것저것 저녁준비를 하느라 허리깨나 아파야 할 거다. *_*
아놔... 메뉴는 또 뭘로 해야 할까.

가정의 달을 앞두고 정신 시끄러운 내 기분처럼 4월의 마지막날 날씨는 몹시 우중충하다.
얼른 골치아픈 일 마무리하고
아름다운 5월을 맞아야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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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 열망

삶꾸러미 2007. 4. 29. 16:08
요즘 한옥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지만
한옥에 대한 나의 열망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경제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집을 하나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마당이 갖추어진 한옥을 선택할 것이다.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있는 안마당과 더불어
너른 뒷마당과 장독대도 있으면 좋겠고, 요즘 마당에선 잘 보기 드문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수국, 봉숭아를 옹기종기 심으련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나는 정말로 닭장 같은 아파트가 너무도 싫고, 땅에서 붕 뜬 상태로 내 머리를 누군가 밟고 쿵쿵대며 살아가는 공간에서 사는 건 비인간적인 것 같다.
내가 아파트엘 살아보지 않아 그 놀라운 편리함을  모르기 때문이라고들 비웃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제 아무리 널찍하게 떼어 지은 아파트라고 해도 어떻게든 건너편 동의 아래층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는 도무지 불편하다.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더더욱 싫다.
만약에 그걸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몇십억 씩 돈을 주무른다 해도 나는 이왕이면
성북동이나 평창동에 있는 공기 좋고 마당 넓은 집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거창하고 웅장한 저택보다는 (관리며 청소가 얼마나 힘들까! ;-p)
4, 50평정도의 땅에 소박하게 나무로 지은 한옥이  더 좋다.
(난 역시 재테크의 ㅈ도 모르는 인간이지만 평생 그렇게 살거다 ㅋㅋㅋ)

남산 한옥마을에 떼거지로 옮겨다 놓은 한옥들을 보며
사랑채 툇마루의 난간 조각까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관대작들의 한옥도 좋았지만
중산층이나 상민들이 살던 서너 칸짜리 한옥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어제 만난 친구 하나도 한옥에 살고파서 병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도심의 아파트 8층에 사는 그 친구는 창밖으로 창덕궁 숲이 보이긴 해도
언제부턴가 뭔가 근본적인 것이 부족함을 느끼며 숨이 막힌다고 했다.
흙을 밟고, 나무와 초록의 싱그러움을 들이마시고 싶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고즈녘하게 내다보며 앞마당에 심은 소박한 꽃들을 감상하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우리집은 다세대 2층이라 머리 위를 밟고 다니는 이들은 없고 (내가 밟고 사는 쪽;;)
콘크리트로 뒤덮인 좁은 마당 옆으로 손바닥만한 땅에서 앵두나무, 라일락, 무궁화, 사철나무 한 그루씩이 자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제대로 된 마당이 그립다.

삐그덕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노할머니가 툇마루 끝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우리를 기다렸던 외할머니댁의 한옥집은
나중에 양옥으로 거의 개조를 했어도,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랑채와 ㄴ자로 꺾인 본채가 네모난 마당을 이루고 있는 구조를 얼마 전까지도 그대로 유지했더랬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좁은 툇마루를 뛰어다니며 놀면, 떨어질까봐 질색을 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댓돌에 올라가 신을 벗고 툇마루로 올라가는 구조의 할머니댁이 놀이터처럼 재미있었다.
뒤뜰엔 시원한 우물도 있고, 예쁜 꽃들이 사시사철 피어나 숨바꼭질하기에도 그만이었는데 우리가 많이 커서 숨바꼭질 놀이에 시들해질 때쯤, 할머니댁의 뒷마당에도 4층짜리 건물을 올리고 층층이 세를 주게 됐던 것 같다.

워낙 이사를 많이 다녀 어렸을 적에 우리가 살던 집은 여러번 바뀌었지만
그 가운데 유독 기억이 남는 집은 대문 바로 앞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있어서
이웃에서도 미루나무집이라고 부르던 마당 넓은 집이었다.
거기선 꽤 여러해 살기도 했지만, 엄마가 마당에 동그랗게 화단을 가꾸고 여러가지 꽃도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잔치가 벌어졌고, 함께 심은 조롱박이 지붕위까지 덩굴을 타고 자라는 바람에 나는 내심 흥부네집 같다고 몹시 흐뭇해 하며 가을에 조롱박을 따서 삶고 말린 뒤엔 친구들에게 선심쓰듯 나누어주기도 했더랬다.  

한옥에 대한 나의 열망은 이렇듯 마당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못 하나 쓰지 않고 절묘하게 나무를 짜맞춰 올리는 한옥 건축의 묘미를 어설프게나마 알게된 뒤론 더더욱 한옥에 살고싶어졌다.

새집을 짓고 나서도 시멘트와 각종 접착제에서 뿜어내는 유해물질 때문에 새집 증후군이란 걸 앓아야하는 양옥이나 아파트와 달리, 좋은 나무를 엮어 만든 한옥에선 새집때부터 나무 냄새가 나지 않겠나.
게다가 어렸을 때 가을마다 창호지를 새로 붙일 때면 봄부터 책사이에 넣어 말려 놓았던 꽃잎이며 단풍잎을 곱게 배열해 문과 창문 손잡이 근처를 장식했던 우리 엄마의 미적감각도 따라해 보고 싶다.

물론 이런 나의 열망은 현실적인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ㅋㅋ
북촌 한옥마을에 가끔 매물로 나오는 집을 사서 개조를 하려면 거의 어마어마한 액수의 비용이 들어간대고, 그나마도 요즘 한옥이 붐이라 좀처럼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데 내가 언감생심 언제나 한옥을 장만해보겠나;;

그치만...
어떻게든 몇칸 안되는 한옥이라도 지을 수 있을만한 작은 땅 몇평 장만할 수 있고 (문제는 내가 도시지향적인 인간이라 그 땅이 서울 인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ㅋㅋ) 거기에 한옥 짓는 대목들을 불러들여(아 물론, 개조라도 상관없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살아보리라.

어제 내내 친구랑 한옥 타령하다가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을 개조한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에 다녀오고 나니 더더욱 한옥병이 도졌다. 에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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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음공해

삶꾸러미 2007. 4. 27. 10:47
어제는 정말 피곤한 날이었다.
아침에 잠시 눈 붙였다가, 엄마 모시고 병원가서 오전 오후로 나뉜 진료 받고 점심 먹고
백화점 들러 반찬 사오고.. 그것도 피곤의 여러 요인이었지만
가장 큰 원인은 오피스텔 건너편에 새로 개업한 어느 음식점 때문이었다.

요즘은 어떤 업종이든 일단 개업을 한다고 하면
알록달록 풍선 아치가 세워지고, 바람을 쏘아 올려 미친 듯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이상한 인형 형상이 자리를 잡고, 옷을 훌러덩 벗어젖힌 예쁜(별로 안 예쁜 경우를 많이 보긴 했다만;;;) 행사 도우미가 요란한 음악과 함께 동작 맞춰 춤을 추어대는 일이 벌어진다.
그리고 내가 가장 혐오하는 요란한 방송도.
주로 도우미 두 명이 뒤에서 춤을 추는 사이 대표격인 도우미가 헤드셋 마이크를 단 채
호객행위를 하는 건데, 요새 음향시설이 어찌나 좋은지 4차로 길 건너편에서 왕왕대는 소리가 창문을 꼭꼭 닫아도 귀에 거슬릴 만큼 들려왔다.

물론 내가 좀 예민한 편이고
번역을 시작해서 좀 유연하게 일이 진행되려면 처음에 책에 몰입할 수 있을 만큼의
정신집중이 필요한데, 이런저런 소음이 들리면 그게 방해가 되어 진도가 대단히 부실해진다.
내가 멀쩡히 집에서 일할 수 있는데도 굳이 작업실엘 나가고
또 집에선 오밤중에만 일을 하는 이유도 다 그런 것 때문인데
가끔 작업실 근처 건물에서 인테리어 개조가 시작되면 은근히 겁부터 난다.
또 얼마나 요란하게 개업식을 해댈것인가 싶어서...

시끄러워서 미칠 것 같은 요란한 개업식 행사가 벌어질 때마다 난 확 경찰에 신고를 할까도 생각하지만;;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짓(!)일 터인데 우선 새로 장사 시작하려는 주인한테도 못할 짓인 것 같고, 업소 주인한테 문제가 될지, 시끄럽게 호객행위를 한 도우미들한테 문제가 될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실천을 해본 적은 한번도 없다.
뭐... 안면 방해를 한 것도 아니고.

하지만 너도나도 개업식엔 반드시 행사 도우미를 데려다가 이상한 옷 입혀 놓고
스피커 볼륨 최대로 올린 뒤 호객행위하는 게 왜 유행이 되었는지 참으로 못마땅하다.
정말로 그런 언니들을 동원하면 장사에 도움이 될까?
지나가는 자동차들마저도 속도를 늦추고 구경을 하느라 길앞이 오후 내내 번잡했던 걸 보면
시선을 끄는 데는 분명 성공한 듯한데, 그게 매출에도 영향을 미칠까?

암튼... 어제 밤중까지 종일 피곤하고 짜증스러워 투덜대는 바람에
집에 오자마자 시체놀이를 했더니만 오늘은 '덕분에' 아침일찍 하루를 시작했다.
이런 걸 '덕분'이라고 해야하는 거 맞겠지. ㅋㅋ

어젠 정말 층간 소음 때문에 폭행사건이 벌어지는 상황이 마구 이해되는 날이었다.
바늘 들고 가서 풍선 아치를 죄다 터뜨려버리거나
건물 분전함에 몰래 접근해서 전기 스위치를 확 내려버리는.. 그런 상상을 오후 내내
했으니 말이다.
설마 오늘은 조용하겠지? 개업 이틀째도 그 난리를 치는 건 정말 아니겠지?
음... 걱정이다.
이제 일에 가속도를 붙여야 할 시기가 왔거늘..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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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대회

삶꾸러미 2007. 4. 25. 17:21

오늘 오후에 휴대폰으로 전화가 왔다.
발신번호는 정민공주네 집 전화.
"XXX씨 핸드폰인가요?"
공주는 그럴듯하게 목소리를 바꿔서 물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금요일에 시간이 있으시냐고 다시 묻는다.
왜 그러느냐고 하니, 금요일에 학교에서 "산행대회"가 있는데
엄마, 아빠,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고모도 모두 같이 가도 된다고 했단다.
제 엄마가 도시락은 준비할 터이니, 고모도 같이 산행대회에 참석하라는 것이 전화의 요지.

아...
이 고모가 얼마나 산에 가는 걸 싫어하는지 공주는 잘 알고 있건만...
(반면에 공주는 등산광이신 할아버지와 제 아버지 따라 다람쥐처럼 폴짝폴짝 등산을 즐기기 때문에 10살임에도 앙증맞은 분홍색 등산화까지 갖추고 있다;;)
과거 회사다니던 시절에 산으로 "강제" 야유회를 가면, 나는 당연히 산 아랫자락에서 기다리며 막걸리나 홀짝거리다 하산할 때 합류하는 부류였고, 산을 꼴딱 넘어 하산로가 달라지는 경우엔 강압적인 윗대가리들한테 참석 여부만 확인 시킨 뒤 대번에 줄행랑을 쳤더랬다.
물론 뭐, 부모님의 부탁으로 꽃구경이나 단풍구경 따라간 산행에선 투덜대며 등산을 하기도 했지만, 자진해서 산에 가자고 말하는 건 내 평생 없을 거다.

7시 기상.
7시 30분까지 씻고 준비.
8시까지 정릉 자기네 집으로 올 것.
8시에 동생 지환이를 깨우고 나서 공주와 함께 아침을 먹을 것.
8시 20분. 동생 지환이를 고모가 어린이집 차에 태워준 뒤
8시 30분. 공주, 엄마와 함께 학교로 출발. (또는 산행 집결지인 북한산 매표소로 출발)

이상은..
휴대폰이 뜨끈뜨끈해질 정도로 오래오래 통화를 하며 공주가 고모 무수리에게 하달한
산행대회 아침 스케줄이다.
공주는 생각 좀 해보겠다는 고모에게 '알았다'는 답을 들을 때까지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고 결국 나는 얼렁뚱땅 금요일에 보자는 말로 전화를 끊을 수밖에 없었다. ㅠ.ㅠ

아 못살아...
난 정말 가기 싫은데.
산을 미치도록 좋아하거나 백수가 아니고서야 평일에 조카 산행대회 쫓아가는 고모가 어디 있다고!
제 엄마가 장보러 간 사이에 공주 혼자 일을 꾸민 것인지, 올케는 좀 전에 전화해서
정말 올 수 있겠느냐고 미안한 듯 묻는다. 같이 가주면 공주야 더할 나위없이 기뻐하겠지만;;
아침에 잠드는 인간이 아침 생새벽부터 산을 오른다는 건 턱도 없는 일임을 잘 알기 때문.
막가파 공주는 무조건 자기 말대로 금요일에 1시간만 자고 (내가 6시에 잠든댔더니만;;)
일어나 일찍 오라고 윽박을 지르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어쩌다가 나는 공주 조카에게 아무것도 거부하지 못하는 고모가 되고만 것일까..
으휴...

어떤 핑계를 대야 화를 모면하고 금요일을 무사히 넘길 수 있을 것인지
이웃분들의 의견을 공모합니다. 어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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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의 범주

삶꾸러미 2007. 4. 19. 16:06
"치부를 드러내고도 불편하지 않을 친구가 몇명이나 되겠냐는.." 미아의 댓글에
또 댓글을 달고 나서도 한참 멍하니 블로그 화면을 바라봤다.
으음...

내 인간관계의 집약이라고 할 수 있는 휴대폰을 지금 눌러 그룹별 검색을 해보니
친구 항목에 무려 51명이 들어있단다.
물론 그 친구 항목엔 10여년 넘게 얼굴도 못 본 채, 통화만 몇번 한 그야말로 이름뿐인 친구도 들어있으며, 저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나이와 상관없이 내가 친구로 생각하는 선배나 후배도 포함되어 있으니, 친구 많다는 자랑을 하려는 건 절대로 아니다.

미아 말대로 그 가운데 내가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홀라당 까발려서 보여주고도
아무렇지 않은 친구를 쏜꼽으려면 또 한참 걸려야할 테니까.

그렇지만
기본적으로 친구에 대한 내 마음가짐은 그렇다.
처음부터 모든 걸 다 드러내기가 어디 쉬운가.
내 경우는 가능한 한 처음부터, "난 원래 이러이러한 인간이니 싫음 말고 좋으면 어울리고 알아서들 하셔.." 라는 잘난 체를 보이는 경향이 있긴 하지만
결국엔 함께 세월을 보내며 기회가 닿을 때마다
하나하나 드러운 성질, 치욕적인 약점, 취향 따위를 드러내게 되는 게 당연하고
그걸 최대한 받아들여주거나, 수용은 못해도 최소한 이해하려고 노력해주는 관계가
친구라는 테두리를 만들어주는 게 아닐까 생각한다.
그러니까 내 휴대폰 친구 폴더에 저장된 이들은 모두가 내게 이상적인 친구의 가능성을 지닌 후보자라는 뜻이다.
나와 함께 하는 시간과 만남의 깊이에 따라
아직은 "후배"나 "동창", 또는 "미지정" 폴더에 들어 있는 이들도 언젠가는 "친구" 폴더에 올라올 수도 있을 것이고, 몇년 후 "친구" 폴더에서 "동창" 폴더로 내려갔다가 슬며시 전화번호부에서 삭제될 친구도 있을 것이다. 아니지.. 삭제될 만큼 마음 상하는 일이 있었다면, 전화를 따돌리기 위해서라도 번호를 삭제는 못하겠군 -_-;;

암튼 내게 친구의 범주란...
지난 40년의 세월을 속속들이 이미 알고 있는 친구도 포함되어 있지만
아직 삶의 연이 닿질 않아 깊은 속내를 드러내놓고 상처를 같이 쓰다듬을 기회는 없었으되, 혹시 그럴만한 때가 되면 깊이 공유할 부분을 갖고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된다.
물론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자 턱도 없는 기대감일 수도 있으니, 몽상가스러운 나의 친구 개념을 누군가 손가락질을 하며 비웃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난 그렇게 믿으련다.

아메리카인디언의 속담이라던가.
친구는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가는 사람이라는 뜻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고
가슴이 찡했었다.
영화 <고양이를 부탁해>에서도 친구라면, 친구가 살인을 했더라도 분명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을 거라고 이해해주는 마음을 갖는 거라는(정확한 대사는 기억나지 않지만.. 이런 맥락이었던 듯..) 얘기에도 돌연 눈물이 핑 돌았던 기억이 있다.

두 경우 모두 퍼뜩, 내 짐을 대신 짊어지고 갈 친구는 내게 몇명이나 되나..
극단적으로 내가 살인을 했을 때 내 편이 되어줄 친구는 몇명일까 손꼽고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이내, 반대의 경우에도 내가 과연 그 친구들에게 선뜻 친구라고 나서줄 용기를 낼 수 있을 것인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란 사람은 관계에 늘 집착하고 꿈과 환상을 품고
그래서 또 상처받고
다행히 위로도 받고 그러는 가운데 기쁨을 누리는 것 같다.
다분히 인간집착적인 성격이랄까...

하지만
삶의 방향이 달라져서, 이젠 부동산과 애들 교육에만 열을 올리는 흔한 아줌마가 되어버려,
아직도 문방구 학용품과 잘생긴 남자배우에 열을 올리는 나와는 대화의 공감대가 사라져
어느새 많이 멀어졌다 느끼게 되는 사이라 해도
모든 걸 다 떨치고 나서 오롯이 혼자만 남게 되는 본원적인 상태에선 다시 친구임을
깨닫게 되기에

가끔씩 배신감에 땅바닥에 나동그라지게 되더라도
내게 가장 소중한 재산은 여전히 사람이라고 믿는다.

친구들이여, 앞으로 계속 추한 꼴 보이더라도 제발이지 너그러이 봐주게나.
나 또한 그러도록 노력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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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용실 나들이

삶꾸러미 2007. 4. 17. 15:36
넉달 보름 만에 드디어 머리를 했다!

예전엔 미용실에 가야겠다고 마음먹으면 그 순간부터 단 하루도 참을 수가 없어서
단번에  미용실엘 달려가곤 했는데 요샌 그것도 잘 못한다.
시간이 여의칠 않은 게 아니라 내가 더 게을러지고 무뎌진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요샌 머리를 새로 해야하는데.. 하는데... 조바심만 치다가
정 못견디겠으면 앞머리만 약간 내 손으로 잘라주는 걸로 일단 위안을 삼고는
두어달씩 질질 끌기도 한다.
나 같은 손님만 있으면 미용실 다 망할 거다.

그래서 결국 이번에도 넉달 반만에 미용실엘 갔는데,
꼼꼼한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헤어스타일을 할 것인지 미리미리 생각해두거나
미용사와 상의해서 최선의 머리모양을 만드는 편이라면..
나는 두가지 원칙만 늘 제시할 뿐 미용사에게 대강 맡기는 편이다.
두 가지 원칙이란...
1. 머리숱 많아 보이게 해주세요. (속알머리가 특히 없고 머리칼도 얇기 때문)
2. 어려 보이게(!) 해주세요. (예전엔 막 10살씩 어리게 봤는데, 요샌 안 그렇기 때문에 ^^;;)

그리고 기본적으로 긴 머리를 싫어한다.
특히 찰랑찰랑 청초한 긴 생머리.. 내게는 구미호처럼 보일 뿐이다!

긴 머리를 싫어하는 이유는 머리칼을 싫어하는 것과도 상관이 있다.
박스 테이프 같은 거 들고 다니면서 일일이 머리칼을 찍어 버리는 결벽증은 없지만
난 기다란 구렁이같은 머리칼이 마구 떨어져 있는 걸 잘 못견디겠더라.
그런 내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다닐 만큼 미용실을 멀리했으니.... 그간  바쁘답시고 청소도 멀리하고 지내며 방바닥에 떨어진 머리칼 참아내느라 너무도 괴로웠다. 으으으...

나에게도 꿈의 미용사가 생겼나보다고 생각했던 어느 미용실에 몇년째 다니다가
이번 미용실로 바꾼 게 또 3년째인가보다.
다행히 이번 미용사도 시원시원하게 커트도 잘하고, 예약하고 가면 2시간 이내에 파마 포함 거의 모든 손질이 끝나고(빠르다는 점이 난 가장 좋다!!), 비용도 저렴한 편이고, 특히 내가 바라는 저 2가지 원칙을 잘 이해해준다. ^^;;
그래서 미용사가 이번엔 이렇게 해보자..고 하면 대강 그렇게 따라가는 편인데
오늘은 내가 욕심을 좀 부렸더랬다.
요새 탤런트 ㅊ양의 머리가 경쾌하고 예뻐 보이는 것 같아서 내 얼굴은 생각도 안하고
덜컥 그렇게 해달라고 했던 거다.

ㅋㅋㅋㅋ
시력검사판에서 큰 글씨도 안보이는 인간이 안경까지 벗고서 두루뭉수리하게 비친 모습만
내내 보다가 모든 손질이 끝나고 나서 안경을 딱 쓰고 나니,
머리 모양은 분명 ㅊ양의 헤어스타일인 것 같다.
그런데 내 얼굴과 조합해놓으니 영.... -_-;;;

아무래도 나는 남들, 특히 연예인들 머리는 따라하지 말아야겠다는
교훈을 얻었다.

혹시 궁금해하는 분들을 위해 헤어스타일을 전격 공개해볼까나...?
후회할 것 같은 분들은 클릭하지 마시길 ㅎ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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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벚꽃놀이

삶꾸러미 2007. 4. 15. 23:56

벚꽃 축제로 유명하다는 진해나 여의도 윤중로엔 일부러 행사기간에 맞춰 가 본 적이 단 한번도 없고 
앞으로도 가고싶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 득시글 거리는 데도 싫지만, 벚꽃의 흐드러진 아름다움보다
음식냄새 진동하는 포장마차들이 더 즐비한 그런 곳... 제 아무리 축제엔 먹거리가 빠질 수 없다지만 나는 그런 분위기가 정말 싫다.

그런데 우리 동네 근처에도 꽤 커다란 아름드리 나무들이 늘어선 벚꽃길이 있다.
해마다 봄이면 구청에서 벚꽃길 걷기 축제도 하고 그러는데 요즘이 만개철인지
며칠 전부터 엄마가 벚꽃 구경하러 가자고 성화였다.
그치만 나는 완전히 초절정 마감모드였던 지라 (하도 열심히 블로그질을 해대서 티는 안났겠지만 ㅋㅋ) 계속 모른 척 했는데,
오늘은 급기야 엄마가 동네 친구 아줌마랑 둘이 먹을 것까지 싸들고
구청 뒷산에 있는 벚꽃길로 놀러가시더니, 너무 좋으니 어서 아부지 모시고 구경오라고 전화까지 해댔다.
아버지는 어제 오랜 산행 끝에 발목이 아픈 상태고
나는 아침까지 원고와 씨름하다 간신히 잠든 상황이라 몹시 쌀쌀맞게 엄마나 많이 보고 오시라고 마다하며 전화를 끊고는 조금 찔렸더랬다.

그런데 역시 나보다 효자인 큰동생과 올케가 엄마 전화를 받고선 벚꽃도 볼겸 저녁 먹으러 들이닥친 것.
결국 우린 저녁을 먹고 나서 단체로 밤벚꽃놀이에 나섰다.
청사초롱이 길게 매달린 벚꽃길은 제법 그럴듯했고, 시끄러운 스피커를 매단 장사치들도 하나 없는 오솔길은 몇년 전에 낮에 와봤던 때보다 쾌적했다.
알록달록 촌스러운 색깔의 조명을 비춰 노랑, 분홍, 초록, 하늘색으로 보이는 벚꽃을 보며 울 정민공주를 비롯해 거기 나온 사람들은 마구 감탄했지만, 나는 조명이 좀 덜 인공적인 색깔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으며 시큰둥하게 오솔길을 걸었다.

벚꽃놀이를 자주 가는 건 아니지만,
나는 벚꽃이 만개해 있는 것 자체보다, 하얀 꽃들이 눈송이처럼 후두두둑 떨어지는 모습을 더 좋아하는 편이다. 오늘따라 바람이 많이 불어 그야말로 꽃비가 마구 날리는 걸 보고서야 비로소 내가 환성을 지르며 좋아하자 아버지가 한 말씀 하셨다.
당신은 벚꽃이 한창 예쁘게 핀 걸 보는 건 좋은데, 휘날려 떨어지는 걸 보면 서글퍼서 싫으시단다.
너희야 앞으로 예쁜 꽃 볼 날이 많지만, 당신은 그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면서...

얼마 안 남긴, 무슨 소리냐고... 앞으로 10년 동안 매해 꽃놀이 모시고 오겠다고 큰소리 치며 대충 순간을 얼버무렸지만 가슴이 짠했다.
같은 꽃을 보면서도 그렇게 느낌이 다르구나...

나도 평균수명 운운하며 이젠 살아온 날보다 앞으로 살아갈 날들이 짧을 거라고
늘 엄살을 떠는데, 아버지 말씀에 문득 그런 내 촐싹거림이 부끄러웠다.
울 엄만 서울태생이면서도 아직 한강 유람선도 안 타봤고, 남산 타워에도 신혼여행 가기 직전에 택시타고 둘러 본 게 마지막이고, 그 새 수없이 생겨난 서울의 여러 공원--하늘 공원, 서울 숲 따위--에도 안 가봤다면서 가끔씩 한탄하는 걸 보며, 여유 좀 있을 때마다 모시고 가리라 마음먹지만, 재작년에 선유도 공원으로 소풍 간 걸 마지막으론 또 만날 바쁘다 바쁘다 짜증만 부리며 살고 있다.

언제가 될지 모르지만 더는 어떻게 잘해드릴 수도 없는 순간이 온 다음에
눈물로 후회하지 말고 미리미리 잘해드려야 하는데, 왜 늘 깨달음은 뒤늦게나 찾아오는지 모르겠다.

있을 때 잘하라는 말, 참으로 무서운 진리인데
내 머리가 참 나쁜 게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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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혼자

삶꾸러미 2007. 4. 11. 23:57

오랜만에 혼자 한 게 두 가지나 되는 날이었다.
그 하나는 <음식점에 가서 혼자 식사하기> ^^;
혼자서 밥을 먹는 일은 흔하지만, 작업실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배달되는 밥을 시켜먹거나
하는 일 말고 부러 나가서 음식점을 찾아가 혼자 식사를 하는 일은 그리 잦지 않다.
혼자서 영화보기는 종종 해온 일인데, 그땐 먼저 끼니를 해결하고 가거나
밖에서 먹더라도 패스트푸드 점에서 후다닥 햄버거 따위를 먹게 되기 일쑤다.
그나마 패스트푸드 점엔 혼자 먹는 사람들도 더러 있기 마련이고
꼭 그렇지 않더라도 '패스트'푸드이니 빠르게 먹어치우고 일어나기 쉬운 것도 큰 매력이기 때문. 패스트푸드 점도 엄연히 음식점이라 할 수 있지만, 내 기준으로는 혼자 카페 가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음식점 홀로 식사' 범주엔 들지 못한다.

그런데 오늘은 우여곡절 끝에 혼자서 여성영화제 영화를 두 편 볼 작정이었고
중간에 1시간 반 정도 틈이 생기는데다 비는 시간은 마침 저녁 끼니 시간이었다.
내게 가장 중요한 끼니인 저녁을 패스트푸드 따위로 대충 때울 수야 없는법 ^^;
그래서 정식으로 음식점에 가서 저녁을 챙겨먹었는데, 생각해보니 그렇게 혼자서
음식점을 찾아가 먹고 싶은 걸 사먹은 게 거의 1년만인 듯했다.
얼마 전 엄마가 병원에 계시는 동안, 병원 식당에 내려가 쫓기듯 홀로 밥을 사먹은 경험은
여기서 제외다. ^^;
모름지기 제대로 사먹는 밥이란 스스로 쟁반들고 왔다갔다 할 필요 없이
테이블 차지하고 앉아 우아하게(랄 것까지는 없지만;;) 종업원의 접대와 봉사를  누리며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슨 드라마였더라... 명세빈이 기자로 나왔던 드라마에서 문득 스테이크가 먹고싶어진
주인공은 맛있는 스테이크집엘 가서 홀로 칼질을 하는데, 그걸 이상한듯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 속에서 명세빈은 꿋꿋하게 고기를 씹으며 ^^
혼자서도 스테이크를 먹으러 다니는 게 남들의 시선을 끌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 어서 마련되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드라마가 방영된 게 벌써 몇년 전이라서 그런가, 내가 간 쌀국수집엔 나 말고도 홀로 저녁을 먹는 사람이 또 있었고, '혼자세요?'라고 묻는 종업원도, '네'라고 대답하는 나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물론 남들도 전혀 관심없었고.. ㅎㅎ
간혹 이것저것 먹고싶어지는 게 많은 식탐녀로서 간혹 같이 갈 사람을 찾느라 두리번거리다 시간 맞추기 힘들어 포기하느니, 앞으로도 종종 홀로 밥사먹으러 다니기 프로젝트를 실천해봐야겠다.
물론 좋은 친구와 맛있는 거 먹으며 수다떠는 즐거움은 홀로 맛있는 거 먹으며 음미하는 즐거움에 비할 수가 없지만 말이다.


두번째 영화를 보고 꽤 늦은 시간에 밖으로 나오니 뜻밖에도 비가 내리고 있었다.
TV 뉴스도 신문도 들여다보지 않은 터라 비가 올줄은 생각도 못했으니 우산을 챙겨갔을 리 만무했는데도, 전혀 당혹스럽지 않았다.
너무 대책없이 자란 머리칼 때문에 요즘 거의 매일 질끈 하나로 묶고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다니던 터라 간만에 비좀 맞아볼까.. 하는 생각이 곧장 들었던 것.
그러니까 오랜만에 내가 혼자 한 두번째 일은 바로, <의연하게 비 맞고 돌아다니기>였다. ^^
신문이나 팸플릿 따위로 머리를 가리지도 않고
조금이나마 비를 피해보겠다고 뛰어다니지도 않고
다른 때처럼 마지못한 듯 새로이 우산을 장만하지도 않고
그냥 보통 걸음걸이로 초연한 사람처럼 빗속을 걷는 기분을 느껴본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아득했다.
꽤 굵은 빗줄기엔 아직도 약간 먼지냄새가 배어 있는 것 같았지만
얼룩덜룩 옷이 다 젖는데도 기분이 그럴듯했다.

첫 영화(스파이더 릴리)를 보면서는 가슴이 저릿저릿 아파왔고
두번째 영화(스무살이 되기까지)를 보면서는 수시로 깔깔 웃다 두어번 눈물을 닦았는데
그렇게 펄럭거린 내 감정의 기복과도 잘 어울린 비맞기 경험이었다.

밥을 먹든, 술을 마시든, 여행을 가든, 영화를 보든
뭐든 뭉쳐서 떼거리로 어울려다니는 걸 좋아하는 것이 이 나라 사람들의 특징이라고는
하지만, 언제부턴가 나는 홀로 있는 시간이 소중하고 편할 때가 차츰 많아진다.
어울림과 소통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는 순간이야 물론 여전하지만,  
때로 대화와 소통의 피곤함을 잊어도 되고 번잡할 필요도 없는 혼자만의 시간이 보배롭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
안 그래도 혼자 보내는 시간이 많은 인간인데, 점점 자폐성향이 짙어지는 것도 같아
한편으론 슬몃 걱정도 들지만, 혼자라서 참 좋고 다행이라는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나름대로의 행복이라 여기련다.

행복 뭐 별 거 있어? ^^;;
(나는 늘 불행과 행복 사이를 촐싹거리며 오가는 인간임에 틀림없다)
행복한 마음을 오래 연장하는 의미에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는 좀 뜸들였다 써야쥐!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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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조각들

삶꾸러미 2007. 4. 9. 01:26

화창한 일요일, 간만의 외출.
출퇴근 하며 집앞 앵두꽃과 옆집 벚꽃, 목련,  온동네 개나리가 다 핀 건 알았지만
정작 온 거리가 꽃밭이라는 데 조금 놀라며
꽃처럼 화사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좀 우중충하다는 느낌에 움츠러들었다.
찬란한 햇살 속에 혼자서만 우중충하다는 자의식은 순전히 4개월째 방치한 대책없는 머리칼 탓이렸다. 어서 손봐줘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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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영화제 영화를 드디어 한 편 봤다.
행복의 적들. Enemies of Happiness.
다큐멘터리를 볼 때마다, 역시 인간의 삶은 드라마보다 드라마틱하다는 걸 실감한다.
총탄이 난무하는 남성중심사회 아프가니스탄에서 정치에 뛰어든 젊은 여성의 삶이야 오죽하랴.
1시간만의 짧은 영화에서 참으로 치열한 삶의 진정성을 본 듯하다.
몇년 째 암살의 위협을 받으며 최초 국회의원 선거에 나가 당선되고, 여전히 국회 안에서도 민주주의와 여권 보호를 위해 압제와 편견에 맞서 싸우고 있는 그녀는 이제 겨우 29살이라고 했다.
게다가 상영이 끝나고 뜻하지 않게 다큐멘터리 주인공 말랄라이 조야(www.malalaijoya.com)와 대화의 시간이 이어졌다.

허울좋은 친미정권은 민주화를 표방하지만 정권을 쥔 자들은 여전히 범죄자 집단과 군벌이고
아직도 어린 소녀들에 대한 강간과 학대가 자행되고 있으며
말랄라이 조야에 대한 죽음의 위협은 나날이 심해지고 있단다.
자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지만 민중의 행복을 위한 노력은 계속될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에 박수가 절로 나왔고, 조야의 신변보호와 정치활동을 위한 기금모금을 한다는 말에 당연스레 지갑이 열렸다.
저 위 사이트로 들어가면 달리 기부 방법이 있다고 하므로 관심 있는 분들은  참여바람 ^^

 아참.. 벨로와도 심히 공감했지만, 자원봉사자인지 고용된 통역사인지 모를 사람이 어찌나 우리말도, 영어도 핵심을 짚어가며 잘 정리를 해주는지 완전 감동이었다.
이상한(?) 색깔이 대비된 튀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서 앉음새도 민망한 바람에 속으로 대뜸 못마땅해하고 있었는데, 알게 모르게 늘 겉모습/외모 지상주의에 편승하는 내가 민망하고 부끄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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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영화제가 열리고 있는 아트레온 앞을 오가며 올해도 느낀 건
영화제 전용 티켓박스가 있는 곳 앞의 쉼터에 유독 흡연 여성들이 많다는 것.
(다른 땐 주로 쌍쌍이 닭살을 떠는 연인들이 터를 잡고 앉아있는 곳이다)
그리고 행사장엔 늠름한 장정 같은 여성들이 눈에 많이 띈다는 것이었다.
물론 아리땁고 우아한 행사요원들도 많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흡연을 하고 성별 차이에 대한 반발을 겉모습으로 하는 이들이 여성주의 문화를 대변하는 건 아닌가 좀 걱정스러웠다.
그건 내가 학교를 다니던 80년대에도 그랬기 때문...
이젠 좀 더 자연스러워져야 하는 게 아닌가 말이다.
아 물론, 구태의연한 내 편견의 잣대로 그렇게 보인 것뿐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
나 역시 늘 경험에서 비롯된 불만과 억울함을 토로하는 반항적 여성주의에서 탈피해 좀 더 견고한 사고체계와 대안을 내세울 수 있는 제대로 된 '페미니스트'가 되고 싶다고 '생각은' 하는데 늘 생각에만 그치는 게 문제다.
행동하지 않는 자는 불만을 품을 자격도 없다고 했거늘...

아무려나 영화제가 끝나기 전에 몇 편 더 볼 수 있는 여유를 누릴 수 있기를 빌고 있다.
언제나 즐거운 벨로와의 데이트에 겸해서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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