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옥 열망

삶꾸러미 2007. 4. 29. 16:08
요즘 한옥에 관한 책들이 부쩍 많이 나오고 있기도 하지만
한옥에 대한 나의 열망도 나날이 커지고 있다.
경제적인 능력과 상관없이 내가 원하는 집을 하나 가질 수 있다면
나는 단연코 마당이 갖추어진 한옥을 선택할 것이다.
욕심을 부려도 된다면, 대문을 들어서자 마자 있는 안마당과 더불어
너른 뒷마당과 장독대도 있으면 좋겠고, 요즘 마당에선 잘 보기 드문 채송화, 분꽃, 맨드라미,
수국, 봉숭아를 옹기종기 심으련다.

아파트에 살아본 적도 없지만
나는 정말로 닭장 같은 아파트가 너무도 싫고, 땅에서 붕 뜬 상태로 내 머리를 누군가 밟고 쿵쿵대며 살아가는 공간에서 사는 건 비인간적인 것 같다.
내가 아파트엘 살아보지 않아 그 놀라운 편리함을  모르기 때문이라고들 비웃는 이도 있기는 하지만^^;; 제 아무리 널찍하게 떼어 지은 아파트라고 해도 어떻게든 건너편 동의 아래층 거실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는 도무지 불편하다.
타워팰리스 같은 초고층 주상복합 아파트는 더더욱 싫다.
만약에 그걸 살 수 있는 능력이 있어 몇십억 씩 돈을 주무른다 해도 나는 이왕이면
성북동이나 평창동에 있는 공기 좋고 마당 넓은 집을 사는 게 낫다고 생각하고
또 그렇게 거창하고 웅장한 저택보다는 (관리며 청소가 얼마나 힘들까! ;-p)
4, 50평정도의 땅에 소박하게 나무로 지은 한옥이  더 좋다.
(난 역시 재테크의 ㅈ도 모르는 인간이지만 평생 그렇게 살거다 ㅋㅋㅋ)

남산 한옥마을에 떼거지로 옮겨다 놓은 한옥들을 보며
사랑채 툇마루의 난간 조각까지 화려하고 아름다운 고관대작들의 한옥도 좋았지만
중산층이나 상민들이 살던 서너 칸짜리 한옥의 소박한 아름다움도 나는 그저 좋기만 했다.

어제 만난 친구 하나도 한옥에 살고파서 병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도심의 아파트 8층에 사는 그 친구는 창밖으로 창덕궁 숲이 보이긴 해도
언제부턴가 뭔가 근본적인 것이 부족함을 느끼며 숨이 막힌다고 했다.
흙을 밟고, 나무와 초록의 싱그러움을 들이마시고 싶다는 것.
그리고 더불어 처마 밑으로 떨어지는 빗줄기를 고즈녘하게 내다보며 앞마당에 심은 소박한 꽃들을 감상하고 싶다고 했다.

그나마 우리집은 다세대 2층이라 머리 위를 밟고 다니는 이들은 없고 (내가 밟고 사는 쪽;;)
콘크리트로 뒤덮인 좁은 마당 옆으로 손바닥만한 땅에서 앵두나무, 라일락, 무궁화, 사철나무 한 그루씩이 자라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난 제대로 된 마당이 그립다.

삐그덕 나무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노할머니가 툇마루 끝에 앉아 이제나저제나 우리를 기다렸던 외할머니댁의 한옥집은
나중에 양옥으로 거의 개조를 했어도, 따로 떨어져 있는 사랑채와 ㄴ자로 꺾인 본채가 네모난 마당을 이루고 있는 구조를 얼마 전까지도 그대로 유지했더랬다.
할머니들은 우리가 좁은 툇마루를 뛰어다니며 놀면, 떨어질까봐 질색을 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댓돌에 올라가 신을 벗고 툇마루로 올라가는 구조의 할머니댁이 놀이터처럼 재미있었다.
뒤뜰엔 시원한 우물도 있고, 예쁜 꽃들이 사시사철 피어나 숨바꼭질하기에도 그만이었는데 우리가 많이 커서 숨바꼭질 놀이에 시들해질 때쯤, 할머니댁의 뒷마당에도 4층짜리 건물을 올리고 층층이 세를 주게 됐던 것 같다.

워낙 이사를 많이 다녀 어렸을 적에 우리가 살던 집은 여러번 바뀌었지만
그 가운데 유독 기억이 남는 집은 대문 바로 앞에 커다란 미루나무가 있어서
이웃에서도 미루나무집이라고 부르던 마당 넓은 집이었다.
거기선 꽤 여러해 살기도 했지만, 엄마가 마당에 동그랗게 화단을 가꾸고 여러가지 꽃도 심어 봄부터 가을까지 꽃잔치가 벌어졌고, 함께 심은 조롱박이 지붕위까지 덩굴을 타고 자라는 바람에 나는 내심 흥부네집 같다고 몹시 흐뭇해 하며 가을에 조롱박을 따서 삶고 말린 뒤엔 친구들에게 선심쓰듯 나누어주기도 했더랬다.  

한옥에 대한 나의 열망은 이렇듯 마당 때문에 시작되었지만
못 하나 쓰지 않고 절묘하게 나무를 짜맞춰 올리는 한옥 건축의 묘미를 어설프게나마 알게된 뒤론 더더욱 한옥에 살고싶어졌다.

새집을 짓고 나서도 시멘트와 각종 접착제에서 뿜어내는 유해물질 때문에 새집 증후군이란 걸 앓아야하는 양옥이나 아파트와 달리, 좋은 나무를 엮어 만든 한옥에선 새집때부터 나무 냄새가 나지 않겠나.
게다가 어렸을 때 가을마다 창호지를 새로 붙일 때면 봄부터 책사이에 넣어 말려 놓았던 꽃잎이며 단풍잎을 곱게 배열해 문과 창문 손잡이 근처를 장식했던 우리 엄마의 미적감각도 따라해 보고 싶다.

물론 이런 나의 열망은 현실적인 능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ㅋㅋ
북촌 한옥마을에 가끔 매물로 나오는 집을 사서 개조를 하려면 거의 어마어마한 액수의 비용이 들어간대고, 그나마도 요즘 한옥이 붐이라 좀처럼 구하기도 쉽지 않다는데 내가 언감생심 언제나 한옥을 장만해보겠나;;

그치만...
어떻게든 몇칸 안되는 한옥이라도 지을 수 있을만한 작은 땅 몇평 장만할 수 있고 (문제는 내가 도시지향적인 인간이라 그 땅이 서울 인근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ㅋㅋ) 거기에 한옥 짓는 대목들을 불러들여(아 물론, 개조라도 상관없다!^^;;) 집을 지을 수 있는 날이 오기를 소망하며 살아보리라.

어제 내내 친구랑 한옥 타령하다가 성북동에 있는 상허 이태준의 고택을 개조한
수연산방이라는 찻집에 다녀오고 나니 더더욱 한옥병이 도졌다. 에효...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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