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인은 파리 체류중에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놀랐었는데, 돌아오기 이틀 전 갓 서른 밖에 안된 사촌올케의 부음을 듣고 도착하자마자 빈소를 찾아야 했다며 자살이 실로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안타까워 했다.
물론 자살로 세상을 마감한 그 젊은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가슴이 아파서 물을 수도 없으며 앞으로도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지만,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젊은 여인이 겪은 괴로움의 무게가 퍽이나 무거웠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자살의 약 45%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쳐선 안될 수치다. 우울증은 성인에게 가장 흔한 정신적 장애이며, 성인 6명 중 한명은 일생동안 우울증을 한번 이상 앓는다고 하니 사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가 우울증을 피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에서 집어온 우울증 안내문에 따르면,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가운데 첫번째가 <여성>이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2배나 된단다. 여성호르몬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들은 것 같지만, 역시나 전문가가 아닌 내 어설픈 짐작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삶이 훨씬 더 지난하고 척박하다는 뜻이라고 -_-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1) 여성
2) 20-40대 또는 노인
3) 우울증의 가족력
4) 별거, 이혼, 가족과의 사별
5) 최근 6개월 이내에 출산한 경우
6) 신체질환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 교실 - 정신건강을 위한 안내 시리즈 [우울증])
최근에 테스트를 해본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는데, 위에 적은 우울증 위험인자 가운데 무려 4개나 해당되는 상황이니 중간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나온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내가 그리 의존적인 성격도 아니고, 분노를 꾹꾹 참아내지도 않으며 인간관계에 소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심리적 우울증의 원인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강박적인 완벽주의자이거나 타인에 의존적인 성격, 또는 분노를 잘 표현하지 않으며 인간관계에도 소극적임과 동시에 자존감마저 부족한 사람이라면, 가벼운 우울증이 병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앞글에서도 적었듯이 개인의 심리적 원인과 크나큰 스트레스로 작용한 사회적 원인(가족과의 사별이나 실직, 이혼 등) 만으로 우울증이 발병하는 것은 아니고, 그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체에 생물학적인 변화(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 이상)를 가져오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내분비계 질환과 함께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울증으로 의심되면 정말로 <반드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한다.
종합병원 정신과에 진료를 예약하려면 한달쯤 기다려야할지도 모르지만, 전전긍긍 홀로 불안해하는 것보다 단 5분일지언정 만오천원 남짓한 진료비를 들여 전문가와 상담을 해보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개인병원 초진의 경우는 아마 그보다도 더 저렴하지않을까 싶은데, 언젠가 후배를 데려갔던 개인병원의 경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 뒤 1시간 넘게 걸리는 심층상담 및 설문(거의 수십장에 달하는 질문지를 집으로 가져가 꼼꼼이 기록해야 했다)에 15만원정도 비용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울증은 개인의 의지력 박약과 상관없는 뇌의 질환이다.
우리 엄마의 경우 병세가 심해질 때 나타나는 제일 첫 증상은 불면인데,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도 수면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식욕이 줄고 잠을 잘 못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식욕이 늘어 지나치게 먹고 잠이 오히려 전보다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무기력감에 빠져 온종일 잠에 의지하려 드는 때도 있지만, 우울증과 불면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하다.
수면부족으로 기운이 없고 쉽게 피로하기 때문에 일의 능률은 당연히 떨어지고 대인관계도 어려우며, 심하면 음식을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어...>라고 하신다). 우울증 환자는 흔히 과거의 삶을 자책하거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고통스러워하는데, 정말로 우리 엄마의 경우 증세가 심해지시면 수십년전에 저질렀던 사소한 잘못과 실수, 유감스러운 일에 대한 넋두리를 거의 토씨하나 안 틀리게 매번 되풀이하신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 해도 순전히 당신 잘못이었다고, 구급차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평생 남편 속을 썪여 건강한 분을 졸지에 먼저 보냈다고 끊임없이 자책하시는데, 나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치의도 생각을 바꾸라 아무리 말씀드려도 병세가 도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시적으로 이미 본인의 의지력과 논리적 사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혈압이나 당뇨, 갑상선 질환 등의 지병이 있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는 증세가 심해지면 평소 복용하는 약만으로 신체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우리 엄마의 경우 몇년 전 극심한 우울증으로 식사를 완전히 거부하시는 바람에 혈당조절이 안돼 급성신부전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들도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이나 사경을 헤매는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우울증과 제반 합병증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이 사실이다.
우울증이 확실한 경우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하는 이유는, 초기에 꾸준히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재발을 막고 완치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우울증이 본인과 타인을 위해할 만큼 심해지는 것을 처음부터 막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산모가 자기 아기를 해쳤다는 뉴스가 그리 낯설지 않을 정도이니, 우울증 환자가 충동적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위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허투루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울증 환자의 15%가 시도한다는 자살은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응징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 대한 일종의 복수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죽음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주변에 알려 도움을 청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삶의 방편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각별한 배려와 관심으로 환자의 충동적인 일탈행동을 예방해야 할 것이다.
2년 전엔가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만난 옆 병실의 어느 환자는 정말이지 우울증 환자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늘 쾌활하고 씩씩해보이는 아줌마(우리 엄마처럼 60대였으니 할머니라고 해야하나?)였는데, 간병인과 둘이만 지낼 때는 그렇게 명랑하게 병동의 모든 환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말에 보호자들이 면회만 왔다가면 침울해져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었다. 옆 병실에 있는 우리에게 들릴 정도로, 남편과 아들, 딸이 돌아가며 <복에 겨운 호강 좀 그만 집어치우라>고 <병원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다시피 그 아줌마를 구박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어쩌면 가족들의 무관심과 홀대의 역사가 오래 쌓여 그 아줌마의 우울증 발현에 기여했을지 모르겠다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우울증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하는, 엄마의 주치의 선생님의 명패 옆에 적혀 있는 진료항목엔 언제부턴가 '화병'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우울증, 조울증, 강박장애, 공황장애, 화병.
한달에 한번 찾아가는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수많은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을 보면서(정말로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70:30인 듯하다), 겉으론 너무도 건강해보이는 그분들의 우울증과 정신장애엔 모두 조금씩 <화병>이 섞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난리통에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어렵사리 학업과 노동에 힘쓰다 결혼과 육아, 현모양처, 슈퍼우먼의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을 그분들의 정신이 대거 병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전쟁난리통과 뼈저린 절대빈곤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의 여성들도 무한경쟁 사회의 냉혹함과 변함없는 가족주의의 잣대 때문에 과거와 변함없이 우울증을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어쩌겠나. 구조적인 모순과 고질적인 사회병폐를 고칠 길은 알 수 없으니 나로선 그저 우울증을 가벼이 보지 말자는 목소리나 높일 수밖에.
예로부터 병은 널리 알리라는 말이 있다.
널리 알려서 허황된 민간요법이나 근거없는 미신까지 받아들이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겠지만, 널리 알려 주변의 배려와 도움을 받고 '용하다는 의원'이나 약을 소개받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 주변엔 정말이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감기에 걸려도 내가 의학을 불신하며 그저 쉬면 낫는다고 여기고 약을 멀리하듯,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병원을 외면한 채 어떻게든 본인의 의지로 이겨보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려할지 모른다. 다행히 증세가 약한 감기라 푹 쉬고 나면 멀쩡해지듯, 하루 30분쯤 햇빛을 쪼이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취미생활을 찾는 따위의 노력(실제로 우울증 환자에게 권유되는 방법이다)으로 가벼운 우울증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낫는 병인 감기와 달리, 우울증은 절대 혼자만의 노력으론 <저절로> 낫지 않는다.
<공인된> 우울증 환자는 아니지만 공연히 찌뿌드드한 날씨 때문에, 병든 엄마 때문에, 밀린 일감 때문에 나도 요즘 계속 수시로 우울함을 느끼는 터라 자꾸 우울증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 갈팡질팡 이야기의 두서가 없어지는 것도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이제 그만 닥쳐야지. ^^;
아무튼, 쓸쓸한 가을.
우울함을 이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