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08.10.22 또 우울증 얘기 8
  2. 2008.10.17 우울증 12
  3. 2008.06.26 질주본능 6
  4. 2008.06.24 아파트 18
  5. 2008.06.07 계단이 무서워 11
  6. 2008.05.30 손님 9
  7. 2008.05.16 마지막 장조림과 우족탕 17
  8. 2008.04.13 가족의 굴레 - 천일의 스캔들 4
  9. 2008.04.11 꽃구경 10
  10. 2008.04.05 자신감 13
이 블로그는 사적인 배설 공간이라는 의미가 더 크다고 여기고는 있지만 그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내가 아는 한도 안에서 좀 더 우울증 이야기를 해두기로 했다.
최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돌아온 지인은 파리 체류중에 최진실의 자살 소식을 접하고 놀랐었는데, 돌아오기 이틀 전 갓 서른 밖에 안된 사촌올케의 부음을 듣고 도착하자마자 빈소를 찾아야 했다며 자살이 실로 먼 이야기가 아니라고 안타까워 했다.
물론 자살로 세상을 마감한 그 젊은 엄마가 우울증을 앓았었는지는 알 길이 없다. 가슴이 아파서 물을 수도 없으며 앞으로도 물어보지도 않을 것이지만, 아이와 남편을 두고 먼저 스스로 세상을 등진 젊은 여인이 겪은 괴로움의 무게가 퍽이나 무거웠으리라고 짐작할 뿐이다. 

그렇지만 자살의 약 45%가 우울증과 관련이 있으며, 우울증 환자의 15%가 자살을 기도한다는 사실은 쉽게 지나쳐선 안될 수치다. 우울증은 성인에게 가장 흔한 정신적 장애이며, 성인 6명 중 한명은 일생동안 우울증을 한번 이상 앓는다고 하니 사실 우리들 가운데 그 누가 우울증을 피해갈 수 있을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을 것이다. 

엄마가 다니시는 병원에서 집어온 우울증 안내문에 따르면,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가운데 첫번째가 <여성>이다. 남자들보다 여자들이 우울증에 걸릴 확률은 2배나 된단다. 여성호르몬과도 깊은 관계가 있다고 들은 것 같지만, 역시나 전문가가 아닌 내 어설픈 짐작으로는 전세계적으로 여성의 삶이 훨씬 더 지난하고 척박하다는 뜻이라고 -_-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있다.

우울증의 위험인자들
1) 여성
2) 20-40대 또는 노인
3) 우울증의 가족력
4) 별거, 이혼, 가족과의 사별
5) 최근 6개월 이내에 출산한 경우
6) 신체질환 
                 (출처: 연세대학교 의과대학 정신과학 교실 - 정신건강을 위한 안내 시리즈 [우울증])

단순히 기분이 울적한 정도와 달리, 병적인 우울증으로 진단되려면 우울한 기분의 지속기간(보통 2주 이상)과 불면/식욕저하/체중감소/두통 등 신체증상의 수반 여부, 그리고 우울증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있는지의 여부를 따져봐야한다. 정신건강 관련 사이트를 찾아보면 우울증 자가진단을 위한 여러가지 문항들(해밀턴 자가진단법벡 자가진단법이 많이 쓰이는듯;;)이 있는데, 개인적으로 테스트해봤을 때 나 역시 중간정도거나 가벼운 우울증 환자에 해당될 때가 더러 있음을 고백해야겠다.
최근에 테스트를 해본 건 작년 이맘때쯤이었는데, 위에 적은 우울증 위험인자 가운데 무려 4개나 해당되는 상황이니 중간정도의 우울증을 앓고 있다고 나온 건 당연한 결과였을 것이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내가 그리 의존적인 성격도 아니고, 분노를 꾹꾹 참아내지도 않으며 인간관계에 소극적이지 않기 때문에 다방면으로 심리적 우울증의 원인을 표출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강박적인 완벽주의자이거나  타인에 의존적인 성격, 또는 분노를 잘 표현하지 않으며 인간관계에도 소극적임과 동시에 자존감마저 부족한 사람이라면, 가벼운 우울증이 병적으로 발전할 가능성은 훨씬 커질 수밖에 없다. 물론 앞글에서도 적었듯이 개인의 심리적 원인과 크나큰 스트레스로 작용한 사회적 원인(가족과의 사별이나 실직, 이혼 등) 만으로 우울증이 발병하는 것은 아니고, 그 같은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신체에 생물학적인 변화(호르몬이나 신경전달물질 이상)를 가져오거나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서 내분비계 질환과 함께 우울증이 생길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울증으로 의심되면 정말로 <반드시>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아야한다.
종합병원 정신과에 진료를 예약하려면 한달쯤 기다려야할지도 모르지만, 전전긍긍 홀로 불안해하는 것보다 단 5분일지언정 만오천원 남짓한 진료비를 들여 전문가와 상담을 해보는 편이 훨씬 이로울 것이다. 개인병원 초진의 경우는 아마 그보다도 더 저렴하지않을까 싶은데, 언젠가 후배를 데려갔던 개인병원의 경우 본격적인 치료를 시작한 뒤 1시간 넘게 걸리는 심층상담 및 설문(거의 수십장에 달하는 질문지를 집으로 가져가 꼼꼼이 기록해야 했다)에 15만원정도 비용이 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우울증은 개인의 의지력 박약과 상관없는 뇌의 질환이다. 
우리 엄마의 경우 병세가 심해질 때 나타나는 제일 첫 증상은 불면인데, 대부분의 우울증 환자들도 수면장애를 겪는다고 한다. 식욕이 줄고 잠을 잘 못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지만 반대로 식욕이 늘어 지나치게 먹고 잠이 오히려 전보다 늘어나는 경우도 있다. 내가 곁에서 지켜본 바로는 무기력감에 빠져 온종일 잠에 의지하려 드는 때도 있지만, 우울증과 불면은 불가분의 관계인 듯하다.
수면부족으로 기운이 없고 쉽게 피로하기 때문에 일의 능률은 당연히 떨어지고 대인관계도 어려우며, 심하면 음식을 아예 거부하기도 한다(예를 들어, <나는 밥 먹을 자격도 없어...>라고 하신다). 우울증 환자는 흔히 과거의 삶을 자책하거나 미래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으로 가득 차 고통스러워하는데, 정말로 우리 엄마의 경우 증세가 심해지시면 수십년전에 저질렀던 사소한 잘못과 실수, 유감스러운 일에 대한 넋두리를 거의 토씨하나 안 틀리게 매번 되풀이하신다. 작년에 돌아가신 아버지만 해도 순전히 당신 잘못이었다고, 구급차를 부르는 게 아니었다고, 평생 남편 속을 썪여 건강한 분을 졸지에 먼저 보냈다고 끊임없이 자책하시는데, 나와 가족들은 물론이고 주치의도 생각을 바꾸라 아무리 말씀드려도 병세가 도지면 아무 소용이 없다. 일시적으로 이미 본인의 의지력과 논리적 사고로는 감당할 수 없는 정신상태가 됐기 때문이다.

게다가 고혈압이나 당뇨, 갑상선 질환 등의 지병이 있는 우울증 환자의 경우는 증세가 심해지면 평소 복용하는 약만으로 신체조절이 되지 않기 때문에 대단히 위험하다.
우리 엄마의 경우 몇년 전 극심한 우울증으로 식사를 완전히 거부하시는 바람에 혈당조절이 안돼 급성신부전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까지 간 적이 있을 정도였다. 
우리 가족들도 엄마가 중환자실에서 일주일이나 사경을 헤매는 일을 당하고 난 다음에야 우울증과 제반 합병증의 무서움을 뼈저리게 실감한 것이 사실이다. 

우울증이 확실한 경우 빨리 치료를 시작해야하는 이유는, 초기에 꾸준히 항우울제를 복용해야 재발을 막고 완치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역시 우울증이 본인과 타인을 위해할 만큼 심해지는 것을 처음부터 막아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산후우울증에 걸린 산모가 자기 아기를 해쳤다는 뉴스가 그리 낯설지 않을 정도이니, 우울증 환자가 충동적으로 자신과 주변 사람을 위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은 절대 허투루 넘겨서는 안될 것이다. 우울증 환자의 15%가 시도한다는 자살은 고통과 절망에서 벗어나고 싶은 도피의 방편이기도 하지만, 죄책감에서 비롯된 자기응징일 수도 있고, 주변 사람에 대한 일종의 복수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죽음이 목적이 아니라 자신의 처지를 주변에 알려 도움을 청하거나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변화시키려는 삶의 방편일 때도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우울증 환자의 주변 사람들은 언제나 각별한 배려와 관심으로 환자의 충동적인 일탈행동을 예방해야 할 것이다.

2년 전엔가 엄마가 입원하셨을 때 만난 옆 병실의 어느 환자는 정말이지 우울증 환자로 생각되지 않을 만큼 늘 쾌활하고 씩씩해보이는 아줌마(우리 엄마처럼 60대였으니 할머니라고 해야하나?)였는데, 간병인과 둘이만 지낼 때는 그렇게 명랑하게 병동의 모든 환자들을 격려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주말에 보호자들이 면회만 왔다가면 침울해져 침대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었다. 옆 병실에 있는 우리에게 들릴 정도로, 남편과 아들, 딸이 돌아가며 <복에 겨운 호강 좀 그만 집어치우라>고 <병원비가 하늘에서 떨어지는 줄 아느냐>고 고함을 치다시피 그 아줌마를 구박했기 때문이다. 그제야 우리는 어쩌면 가족들의 무관심과 홀대의 역사가 오래 쌓여 그 아줌마의 우울증 발현에 기여했을지 모르겠다는 짐작을 할 수가 있었다. 

우울증에 관한 한 국내 최고의 권위자라고 하는, 엄마의 주치의 선생님의 명패 옆에 적혀 있는 진료항목엔 언제부턴가 '화병'이라는 항목이 추가되었다. 우울증, 조울증, 강박장애, 공황장애, 화병.
한달에 한번 찾아가는 대학병원 정신과 진료실 앞 대기의자에 앉아있는 수많은 아줌마들과 할머니들을 보면서(정말로 여자와 남자의 비율이 70:30인 듯하다), 겉으론 너무도 건강해보이는 그분들의 우울증과 정신장애엔 모두 조금씩 <화병>이 섞여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전쟁난리통에 가난한 어린시절을 보내고, 어렵사리 학업과 노동에 힘쓰다 결혼과 육아, 현모양처, 슈퍼우먼의 이데올로기의 압박을 당연하다 여기며 살아왔을 그분들의 정신이 대거 병들지 않았다면 그게 더 이상하지 않을까.
하지만 문제는 전쟁난리통과 뼈저린 절대빈곤을 겪지 않은 우리 세대의 여성들도 무한경쟁 사회의 냉혹함과 변함없는 가족주의의 잣대 때문에 과거와 변함없이 우울증을 일으키는 사회적 요인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현실이 서글프긴 하지만 어쩌겠나. 구조적인 모순과 고질적인 사회병폐를 고칠 길은 알 수 없으니 나로선 그저 우울증을 가벼이 보지 말자는 목소리나 높일 수밖에.
 
예로부터 병은 널리 알리라는 말이 있다.
널리 알려서 허황된 민간요법이나 근거없는 미신까지 받아들이라는 뜻은 절대로 아니겠지만, 널리 알려 주변의 배려와 도움을 받고 '용하다는 의원'이나 약을 소개받으라는 의미일 것이다.
요즘 주변엔 정말이지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많다.
심한 감기에 걸려도 내가 의학을 불신하며 그저 쉬면 낫는다고 여기고 약을 멀리하듯,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도 병원을 외면한 채 어떻게든 본인의 의지로 이겨보려고 백방으로 노력을 기울이려할지 모른다. 다행히 증세가 약한 감기라 푹 쉬고 나면 멀쩡해지듯, 하루 30분쯤 햇빛을 쪼이고, 가벼운 운동을 하고, 밖에 나가 사람들을 만나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마음을 붙일 수 있는 취미생활을 찾는 따위의 노력(실제로 우울증 환자에게 권유되는 방법이다)으로 가벼운 우울증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도 아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저절로 낫는 병인 감기와 달리, 우울증은 절대 혼자만의 노력으론 <저절로> 낫지 않는다.

<공인된> 우울증 환자는 아니지만 공연히 찌뿌드드한 날씨 때문에, 병든 엄마 때문에, 밀린 일감 때문에 나도 요즘 계속 수시로 우울함을 느끼는 터라 자꾸 우울증 얘기를 꺼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횡설수설 갈팡질팡 이야기의 두서가 없어지는 것도 우울함이 극에 달했다는 증거다.
이제 그만 닥쳐야지. ^^;

아무튼, 쓸쓸한 가을.
우울함을 이깁시다!
 
Posted by 입때
,

우울증

아픈 손가락 2008. 10. 17. 23:52

가을은 우울증의 계절이기도 하다. 1년 가운데 자살율이 가장 높은 달이 11월이라는 이야기를 어느 책에선가 읽기도 했지만, 튼튼한 사람들도 계절이 바뀌고 따뜻함이 줄어드는 걸 견디기가 쉽지 않으니 마음이 불안정한 사람의 계절나기는 특히 어려운 게 당연할 것이다.

현대인의 30%가 우울증을 안고 살아간다는 통계도 본듯한데, 유명인의 자살과 함께  늘 언급되는 우울증 병력 때문에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져 이제는 이상한 <정신병>으로 취급받는 일이 드물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사람들은 우울증을 오해하거나 편견을 갖는 경우가 많다.
우울증을 오랜 지병으로 갖고 있는 가족의 존재 때문에 일찌감치 우울증에 대해서 이런저런 지식을 얻게 된 나도, 막상 현실에서 우울증 환자를 대할 땐 나도 모르게 실수를 저지른 뒤 나중에야 후회를 한다. 환자의 불안증세와 강박증이 본래 의중과는 상관없는, 순전히 병의 발현임을 알면서도 버럭 짜증을 내고 비난하는 듯한 태도를 취하게 되는 것이다. 병에 대해 제법 안다고 자부하는 나도 이럴진대 대부분의 무지한 사람들은 어떨지, 염려하지 않을 수가 없다.
우울증에 대한 가장 잘못되고 뿌리 깊은 편견은 <개인적인 나약함>에서 생긴 병이며 <본인의 의지력>으로 극복할 수 있다는 믿음이다.
그러나 의지력만으로 극복될 수 있다면, 그것은 단순히 일시적으로 기분이 저조해지거나 맥이 빠진 것이지 병리학적인 우울증이라고 할 수 없다. 우울증은 여러가지 복합적인 원인이 한꺼번에 작용하여 생겨나는 <뇌의 질환>이기 때문에 개인적인 나약함과도 상관이 없다. 우울증 환자에게 반드시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권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흔히 우울증을 <마음의 감기>라고 비유하는데, 감기에 걸려도 웬만해선 약을 먹지도 병원엘 가지도 않고 <그저 쉬면 낫는다>고 생각하는 내 입장에선 그다지 유용한 표현이 아니다. 우울증은 절대로 저절로 치유되지 않으며 혼자서는 결코 감당할 수 없는 <병>이라는 점을 우리는 인정해야 한다.


Posted by 입때
,

질주본능

하나마나 푸념 2008. 6. 26. 17:53
작업실과 우체국과 마트에 갈 일이 있어서 잠시 외출을 했었다.
또 오래도록 버려져 있던 작업실의 탁한 공기 속에 관리인 아저씨가 들여놓은 우편물을 풀어
다시 반송 꾸러미를 만들어 우체국으로 향하는 길에 정말이지 나는 그 길로 차를 몰아 어디론가 아주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마침 라디오에선 신나는 음악이 흘러 나왔는데, 여름 뺨치는 더위에 에어컨까지 켜고 있으니 얼굴을 잔뜩 가리는 선글라스 하나 걸쳐쓰고 나무향기 그윽한 숲이든 비린내 나는 바닷가든 잠시라도 현실의 짐을 벗어놓을 수 있는 공간으로 순간이동하고 싶었다.

현실은 너무도 짜증스럽다.
마감일에 쫓기는 와중에 연일 무수리 생활에 쪽잠을 잤더니 얼굴에 빨간 뾰루지가 다섯개나 돋아나 가관이다.
척추골절은 치료가 끝났지만 골다공증이 무서워 몸쓰기를 두려워하는 엄마는 다시 예순여덟살 먹은 큰애기로 돌변했다. 당근과 채찍 요법을 쓰며 엄마를 채근하고 있는데 자꾸 채찍 쪽에 강도가 실린다. -_-;;
낡은 다가구주택은 시세를 알아보니 두채를 팔아도 두 모녀가 살 만한 작은 아파트를 살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아무리 두들겨도 열릴 생각을 하지 않는 철옹벽 같은 정부는 결국 쇠고기 고시를 강행했고
촛불을 든 사람들은 연일 언론에서 폭력 시위자로 매도당하더니 초등생 애엄마 가릴 것 없이 잡혀갔단다.
대체 이젠 무슨 방법이 남은 것인지 모르겠다.

짜증나는 현실 속에서 나의 질주본능은 결국 비겁한 도피본능이다.
결국 도망치지도 못할 주제에.


 
Posted by 입때
,

아파트

투덜일기 2008. 6. 24. 12:29


대체 어쩌다가 아파트가 대한민국의 평균적인 주거공간이 되어버린 것일까?
거동 불편한 엄마 때문에 동생네 아파트에서 일주일째 얹혀 살면서 앞으론 나도 이런 공간에서 살아야한다는 생각에 새삼 마음을 열고 익숙해지려고 노력하고 있기는 하지만, 도무지 애정이 생기질 않는다.
집값과는 전혀 상관없다지만 북한산을 끼고 있는 위치 때문에 동생네 아파트는 공기도 청량하고 몇 걸음만 옮기면 경치 좋은 북한산이 바라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 있을 수도 있으며, 조경 잘 된 아파트 단지가 으레 그러하듯 솔직히 우리집보다 주변에 나무도 많다. 그뿐인가, 넓은 주차공간은 명절때마다 친척분들이 골목골목에 차 세우느라 골치거리인 우리집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다. 쓰레기 배출 요일과 상관없이 지저분한 쓰레기를 내놓는 얌체들 때문에 골목 어귀가 지저분할 때가 많은 우리 동네와 달리 당연히 주변도 깨끗하다. 14층이나 되는 높은 곳임에도 무시무시한 계단 대신 경쾌한 안내 멘트가 나오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오르내리면 그만이니 아직까지 걸음 부실한 엄마에게도, 계단 공포증 환자인 나에게도 더할 나위 없이 편리하다. (일단 정전이나 엘리베이터 고장의 경우는 염두에서 제외하자)
그러나 이렇게 아파트의 장점을 모두 주워섬겨보아도 나의 문제는 콘크리트 괴물이 다닥다닥 모여있는 듯한 아파트 단지가 나를 옥죄는 것 같다는 폐쇄공포증을 느낌과 동시에 발가벗겨져 거리에 내던져진 느낌을 피할 수가 없다는 점이다. 눈이 나쁜 편인데도 주방에 서서 설거지를 하고 있으려면 건너편 아파트 거실에서 빨래를 너는 아줌마나 장난감 말을 타고 노는 아이가 보인다. 그렇게 얼핏 들여다보이는 건너편 아파트의 살림살이는 놀랍도록 똑같다. 왼쪽 벽엔 소파가 있고, 오른쪽 벽엔 TV가 놓여 있고 그 가운데쯤엔 식탁 한 귀퉁이가 멀찍이 보인다.
수십층 빌딩에서 층층마다 사람들이 돌아다니며 일을 하고 책상에 앉아 있고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회의를 하는 모습은 그리 낯설지가 않다. 절반 이상 유리로 된 건물의 건너편에서 재미있다 여기며 한참을 구경한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마음 편히 쉬는 공간에서도 층층이 내 위와 아래에 사람들을 이고 깔고 지내야한다는 것이 왜 이리 불편할까. 물론 여행지에서 콘도나 호텔에서라면 수십층 겹겹이 쌓인 공간에서도 얼마든지 편안하게 잠들고 깨어날 수 있었다. 왜냐고? 그곳은 <여행지>였으니까. 얼마쯤 지나면 진정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편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마음 밑자락에 깔려 있었기 때문에 간혹 잠자리가 설어 선잠을 자는 며칠이 이어진다 해도 견딜 수 있었던 것 같다.
지금 동생네서 지내는 기분도 딱 여행온 느낌이다. 병원짐을 담았던 여행용 트렁크가 방 한구석에 놓여 있기 때문만은 절대로 아니다. 처음엔 여기서 지내는 불편함이 낯선 잠자리와 더부살이의 부담감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올케가 아무리 잘해주고 편히 대한다 해도, 익숙한 내 물건들이 거의 없는 공간에서 내집처럼 편할 수야 없는 법이니까. 그런데 기묘한 불편함은 잠잘 때만 느껴지는 것도 아니었고, 조카들이 모두 학교와 유치원에 가고 올케는 볼일을 보러 나가, 낙상 사고가 나기 전의 모녀가 살던 우리 집에서처럼 온종일 쿨쿨 잠만 자는 엄마와 나뿐인 상황에도 막연한 답답함과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물론 여행이 아니므로 여행이 주는 즐거운 설렘과 흥분 따위는 전혀 없기 때문에 이런 불편함을 견디기가 더욱 어려운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드디어 이따가 집으로 돌아간다.
계단이 소름끼치더라도 일단은 집에 가면 반갑고 편하고 숨이 잘 쉬어질 것 같다. -_-;;
어쩜 이렇게 촌스러운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자괴감이 들기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정말이지 아파트란 공간은 내 마음에 차질 않는다. 계단 많은 그 집에서 이사를 나오긴 해야할 터인데, 아... 어떡하지.
고민은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왔다.
계단은 무섭고, 아파트는 싫고, 한옥을 장만하기엔 돈이 턱없이 모자랄 테고...
아 젠장.

Posted by 입때
,

계단이 무서워

삶꾸러미 2008. 6. 7. 13:33
작년에 이어 올해도 魔의 6월이다.
작년에도 6월의 첫째 월요일에 119를 불러야했고, 아버지의 1주기는 보름도 남지 않았는데
이번엔 엄마가 목발을 짚은 채로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지난 월요일에 또 119를 불러 응급실로 달려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 역시 계단을 그리도 무서워하고 실제로 현관 계단에서 몇번이나 넘어지고 구르기는 했지만 심하게 다친 적은 없었는데, 그간 다행스럽게도 전혀 사고를 내지 않았던 엄마는 이번 사고로 척추뼈가 부러지셨다.  
다행히 머리엔 뇌출혈이 없어 척추골절만 치료하면 되는 상황이라 엄마도 나도 서로 위로를 하고 있긴 하지만 꼼짝없이 2주간 드러누워 부러진 뼈에 찬 피가 흡수되기를 기다렸다 골 시멘트 시술을 해야 한다니 간단한 일은 아니다.

식사도 누워서 해야하는 엄마를 보며 속상하고 기막힐 때마다, 머릴 안 다친 게 얼마나 천만다행이냐고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우유부단하게 마음의 결정을 못내리던 일도 이번 사고로 확실히 방향이 잡혔다. 계단 투성이인 이 집에선 도저히 더 못살겠다. 구조도 이상한 낡은 집이 과연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집이기는 하지만,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선 정말이지 살고 싶지 않지만, 앵두나무랑 라일락이 그립긴 하겠지만, 일단은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월요일부터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입원준비를 하느라, 옷을 갈아입느라 잠깐씩 두어번 집에 다녀가긴 했지만 줄곧 완전히 딴 세상인 병원에서 지내다보니 세상과도 담을 쌓게 된다. TV 뉴스를 보아도 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 같다. 오늘은 동생에게 엄마 병실을 맡기고 집에 들어와 빨래도 돌리고 이것저것 챙겨갈 준비도 하고 있는데, 20년 넘게 산 집마저 낯설게 느껴진다. 특히 현관 계단을 내려갈 생각을 하니 섬뜩하다. 밀린 일도 좀 하고 가려고 작정했었는데, 그냥 일찍 병원에나 가야겠다.

간병인을 쓰려고 엄마 눈치를 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고
딸무수리의 병수발이 아니면 영 불안해하는 왕비마마의 섬약한 신경 때문에 거의 꼼짝도 할 수가 없으니 당분간은 블로그질도 안녕.
염려해주실 이웃분들께는 미리 고마움을 전합니다. ^^*
Posted by 입때
,

손님

투덜일기 2008. 5. 30. 14:38
어렸을 때부터 나는 집에 손님이 오는 게 싫었다. 숫기 없는 아이들은 원래 그렇지 않은가. 낯선 사람 앞에 불려 나가 꾸벅 인사를 하고, 의무적으로 몇 마디 질문에 대답을 하고 나면 무슨 시험에 합격한 것처럼 용돈을 손에 쥐기도 했지만, 나는 용돈 따위 필요 없으니 제발이지 집에 손님이 오지 않기를 바랐던 것 같다. 심지어 동네 친구들이 많았던 중학생 때를 제외하면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서 노는 일도 극히 드물었다. 지금 사는 이 집에 다녀간 친구들이 더러 있기는 하지만, 다들 한두번에 그쳤을 뿐 "우리 집으로 놀러와"라는 말은 예나 지금이나 웬만해선 내 입에서  나오지 않는다.

다행히 부모님도 그리 숫기가 많은 편은 아니어서 가난한 살림살이를 드러내는 걸 꺼려하셨던 지라 집에 손님이 자주 들이닥치진 않았다. 친척들이야 워낙 많으니 무슨 날 때마다 오가는 일이 잦았지만, 우리 집에서 친척들은 손님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다. 그냥 가족일 뿐.
하지만 아주 가끔 아버지가 술을 드시고 친구들을 몰고 오시거나, 학교에 다니실 때 학생들을 몰고 들이닥치는 경우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나는 막 화가 났다. 낯선 사람들에게 내 영역을 침범당하는 기분이랄까... 게다가 온 식구들이 청소엔 젬병이라 늘 너저분하게 늘어놓고 사는데, 우리끼리야 편하고 좋지만 남들이 보고 게으르다거나 지저분하다고 욕할 게 뻔하니 창피했던 거다.

그나마 손님이 미리 온다는 걸 알면 눈가리고 아웅하듯 보이는 데만 대강 청소라도 해두지만, 그런다해도 낯선 이들과의 어색한 대면이라든지 손님접대 과정은 참 싫고 민망했다. 어른이 된 뒤에도 손님을 싫어하는 마음은 여전한데, 특히 회사를 관두고 집에서 일을 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나빠졌다. 중년 및 노년에 접어든 아줌마들의 취미가 몰려다니며 수다떨기임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수시로 이집저집 몰려가 끼니를 해먹고 와글와글 수다를 떠는 아줌마들의 취미가 가끔 우리 집에서 발현되는 경우, 내 입장이 몹시 난감해진 것이다. 특히 올빼미 생활에 빠져든 프리랜서 번역가가 집구석에서 낮동안 대체로 어떤 모습일지를 감안할 때, 상황은 더욱 괴로워진다. 쑥대머리 산발을 하고 나가서 엄마 친구들에게 인사를 하자니 꼬락서니가 말이 아니고, 인사를 안하자니 그 집 딸 예의없다는 소리를 들을 테고. -_-;
내가 오밤중에 일하고 대낮까지 잠을 자야하는 오묘한 직업을 가졌음을 나중엔 동네 아줌마들도 이해해 주셨기 때문에, 요즘엔 감지 않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눈꼽도 떼지 않은 얼굴로도 꾸벅 인사를 하거나 아예 태평하게 잠을 자고 있을 정도로 편해지긴 했지만, 우리 집으로 마실 오시는 엄마의 최측근 동네 친구들을 제외하면 여전히 집에 누가 오는 게 싫다.

아 그런데, 요샌 신경질나게도 손님들이 자주 들락거린다. 엄마가 깁스를 해 꼼짝 못하게 되었다는 소문을 만방에 자랑하듯 알렸기 때문에 문병객이 늘어난 것이다. ㅠ.ㅠ 물론 다리를 다친 걸 빼면, 엄마는 그 어느때보다도 컨디션이 좋으시다. 뭔가 당신 몸에 더 큰 위기가 닥치면 울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 그랬냐 싶게 꼬리를 내리는 오묘한 성격을 갖고 있는데, 한동안 심해지는 듯하여 나의 제주도 여행까지 무산시켰던 왕비마마의 우울증은 이번에도 발목 뼈에 금이 간 것과 동시에 급호전되었다. ^^ 온 가족은 물론이고 친구들, 친척들의 관심이 집중될 뿐만 아니라, 툴툴거리며 성깔 부리던 늙은 딸도 순한 양처럼 왕비마마를 보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아무래도 몹시 뿌듯하신 모양이다.

어쨌거나 여전히 올빼미로 살아야 하는 나로선 갑자기 늘어난 손님접대가 짜증스러울 만큼 짐스럽다. 바쁠 땐 집안 청소에 신경쓰기는커녕 사흘씩 머리도 안감고 질끈 묶고 있는 데다가 무릎 나온 추리닝이 기본 옷차림인데 사정 빤히 아는 동네 아줌마들이야 그렇다 치고 낯선 이들에게까지 그런 한심한 모습을 보일 수야 없는 법 아닌가! ㅠ.ㅠ 설상가상으로 오늘은 엄마가 다니시는 절에서 떼지어 문병을 다녀갔다. 원래 어제부터 온다는 소식에 기겁하여 일단 청소는 했지만 그럴 필요 없다고 극구 말렸는데 급기야 쳐들어 온 것이다. 그분들이야 아픈 사람을 문병하겠다고 생각하는 건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무슨 자랑이라고 사방팔방에 부상 소식을 알려 하루가 멀다하고 손님들을 불러들이는 왕비마마가 신경질나고 꼴보기싫었다. (나 못된 딸 맞다)

아무것도 준비할 필요 없다지만, 별 것 아니라도 과일 깎아 내고 차 끓여 내는 게 얼마나 귀찮은데!! 젠장. 게다가 처음 보는 것이나 다름 없는 아줌마들 사이에서 꿔다 놓은 보리자루처럼 구석에 앉아 있는 것도 완전 고역이다. 눈치 봐서 얼른 방으로 도망쳐 나오기는 하지만, 손님 접대는 정말 내 취향이 아니다!  어서 엄마가 깁스를 풀어 병문안 오겠다는 사람들도 없어지길 바랄 뿐인데, 앞으로 남은 3주가 참 길게만 느껴진다.



Posted by 입때
,
싫으면 안 먹으면 될 것 아니겠느냐던 멍청한 어느 인간의 말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앞으로는 쇠고기를 웬만해선 안먹게 될 것이란 생각이 강하게 든다. 유기농이라고 표시 되어 있는 채소들을 장바구니에 넣으며서도 과연 유통업체와 상인들을 철썩같이 믿을 수 있을지 속으로 떨떠름한 마당에 수입 쇠고기의 원산지 표시를 어떻게 믿는단 말인가.
벌써부터 한우든 호주산이든 쇠고기 매장이 썰렁하다는데, 이런 꼴로 가다간 경제를 살리기는 커녕 소비는 날로 위축되고 축산업 농가는 FTA 비준되기도 전에 다 망해 쓰러질 판국이다. 그게 걱정은 되는데, 나로선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정말이지 모르겠다.
원래 우리 식구들은 최소한 일주일에 한번은 거하게 고기를 먹어줘야 기운이 나는 것 같은 착각에 빠져 산다. 채소와 푸성귀로만 차려진 밥상은 <저 푸른 초원>이라고 야유하며, 고기를 든든히 먹어줘야 계단 오를 때도 힘이 안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최소한 달걀이라도 상에 올라야 하고 어쩔땐 일주일에 사흘 이상 고기(생선은 고기가 아니다)를 먹기도 한다. 미역국, 무국엔 반드시 쇠고기를 넣어 끓여야지 그 밖의 조개나 버섯만 넣고 끓였다간 나 혼자 꾸역꾸역 6박7일동안 먹어야 한다. 느끼한 곰탕은 일주일 내내 맛있다고 드시면서도, 멸치로 맛 낸 된장국은 2끼 이상 내놓으면 외면당하는 것이 우리 집안 내력.

연일 광우병 쇠고기 광풍이 몰아치던 지난주말, 엄마는 마지막이될지도 모른다며 장조림을 해먹자고 한우 사태와 메추리알을 사오셨다. 나이로는 4.19 세대지만 그 때도 무서워서 밖에 안나가봤고, 68년 평생 데모란 건 처음이라며 벌벌 떨면서도 딸 성화에 덩달아 직접 청계천 촛불집회를 다녀오시고 보니, 광우병 쇠고기와 정부 해명은 죽어도 못 믿겠는데 결과적으로는 놈들이 밀어붙이기로 광우병 위험 쇠고기를 수입하고 말 것이라는 게 울 엄마의 결론인 듯했다. 그러고는 그날 저녁, 엄마는 언덕에서 발목을 접질려 복숭아뼈에 금이 가는 사고를 당했고 5주간 기브스를 해야하는 사태에 이르렀다. -_-;; 그래서 우리집의 마지막 장조림은 눈물의 장조림이기도 하다.
정말로 칼슘이 많이 우러나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엄마 복숭아뼈가 얼른 붙기를 바라는 마음에 냉동실에 아껴두었던 마지막 우족 하나를 꺼내 곰탕을 끓였다. 반나절 이상 곰솥에 우족을 끓이며, 나도 모르게 엄마한테 <마지막 우족탕>이니 맛있게 드시라고 해버렸다.

며칠째 장조림 반찬에 우족탕을 기본으로 내놓는 데도 엄마는 아무 불평이 없다. 푸성귀 반찬을 매일 똑같이 내놓으면 손도 안대는 양반인데, 장조림이랑 곰탕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아쉬워서 더 맛있게 느껴지나보다. 사실 장조림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줄곧 한번도 해먹지 못한 음식이었다. 아버지가 짭조름한 쇠고기 장조림을 워낙 좋아하셔서 밑반찬으로 거의 떨어뜨리는 일이 없었는데, 메추리알 삶아서 일일이 까는 것이 귀찮다고 엄마랑 내가 하도 투덜거리니까 최근 몇년동안은 삶은 메추리알을 까는 것이 아버지의 임무가 되었더랬다. 냉장고에 장조림이 떨어지면 며칠 지나지 않아, 이제는 없어진 동네 농협마트 정육점에서 맛있는 사태로 쇠고기를 고르고 메추리알을 두어 판 집어 사들고는 아버지가 휘파람을 부르며 돌아오시면 두 모녀는 얼굴을 찌푸리며 귀찮은 티를 팍팍 냈지만, 아버지는 씩 웃으며 어서 메추리알 까게 삶아놓기나 하라고 하셨다.

일요일 저녁, 발은 퉁퉁 부어오르는데 엄마는 식탁에 앉아 삶은 메추리알을 까며 아버지는 메추리알을 살점 하나 안 떨어뜨리고 껍질을 잘 까셨건만 왜 자기는 알이 다 너덜너덜해지는지 모르겠다고 막 신경질을 부렸다. 엄마의 발목을 잡아먹은 장조림이라서 밉게 느껴졌는지, 오랜만에 만드느라 거의 태울뻔하기도 했던 장조림은 내 입엔 뻣뻣하고 별로 맛이 없다.

그러면서 버럭 화가 났다. 가슴이 아파서 차마 못 해먹는 것도 속상한데, 좋아하는 음식도 공포에 질려 못 먹게 만드는 정부라니! 대체 어떻게 해야 쓸개빠진 무뇌아들한테 진실을 납득시킬 수 있을지 암담하기만 하다. 고기 좋아하는 울 엄마한테 귀찮은 티 안내고 다음엔 더 맛있는 쇠고기 장조림을 해드리고 싶단 말이다, 이놈들아!
Posted by 입때
,
관객의 시선을 조금이라도 더 끌려는 관계자들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한국에서 최근 개봉하는 외화 제목들은 참 마음에 들지 않는다. 영어 제목을 그대로 한글로 읽어 쓰는 추세도 비위에 거슬리고, 아예 엉뚱한 제목으로 낚시질을 하려는 제목도 심심찮게 눈에 띄기 때문이다. 그에 비하면 <천일의 스캔들>은 비교적 양호한 편이라 할 수 있겠으나 원제가 <the other Boleyn girl>임에도 굳이 <천일의 앤>과 연결지으려는 속셈을 보이면서 <스캔들>이라는 자극적인 낱말까지 넣은 것은 못마땅했다.
게다가 영화는 절대로 단순히 앤 불린의 <천일동안>권세를 다룬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앤 불린과 헨리 8세를 다룬 영화 가운데 내 기억에 또렷이 남은 작품은 이번 영화까지 딱 세 편이다.
첫번째는 뭐니뭐니해도 아주 옛날에 본 <천일의 앤 Anne of the Thousand days>.
찾아보니 1969년 작품이란다. +_+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린 시절 TV로 본 것 같은데, 방송국에서 몇번이나 재탕을 한 듯 지금도 배우들의 얼굴이 떠오를 정도다. imdb에서 찾아보니 헨리8세로 나온 리처드 버튼은 그렇다쳐도 앤 역할의 제느비브 뷔졸드(?)라는 배우는 이름도 낯선데 코끝이 약간 들려 귀여우면서도 오만해 보이던 인상이 나의 어린 뇌에 워낙 깊이 각인됐던 모양이다.
그때의 느낌은 뚱뚱한 바람둥이 왕 헨리8세가 뭐 그리 좋다고 야망을 키우다 죽고 마는지 앤이 마냥 가엾기만 했던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그 옛날 영화도 고증에 충실했던 듯, 옷이며 머리장식, 목걸이까지 이번 영화와 거의 비슷하다. <천일의 스캔들>이 이 영화를 교과서 삼았을 수도 있겠다.
 





두번째로 기억하는 영화는 2부작 TV 미니시리즈 <헨리8세>.
2003년에 제작된 건데, EBS에선 세계명작드라마로 2005년에 방영했다. 게으른 내가 일요일 낮에 방영되는 걸 2주 연속 찾아서 보았을 리는 없고^^ 생생히 기억하는 이유는 내가 자막 번역을 했기 때문. 그 시기엔 책 작업하는 사이사이 일부러 짬을 내서라도 EBS 영화를 꽤 열심히 번역할 때였는데, 워낙 들이는 품에 비해 부가가치가 책 번역보다도 낮은 터라 요샌 부탁을 받아도 튕기게 된다. -_-;;
암튼... 헨리8세가 주인공이니 당연히 그의 여성편력에 더하여 당시의 세계 정세와 국내 정치 상황, 인간적인 번민 같은 것도 그려졌기 때문에, 아내를 선택하는 것(첫 왕비 아라곤의 캐서린이 형수였음에도 스페인과의 외교관계 때문에 결혼을 감행한 것은 주지의 사실)도, 자식을 낳는 것도 사사건건 참견을 받고 어느 것 하나 마음대로 할 수 없는 한 나라의 왕이 문란한 여자관계에서나마 돌파구를 찾으려 했을지 모른다고 미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내 아메마스러운 기억력에도 불구하고 뇌리에 새겨졌던 건 순전히 앤 불린으로 나온 헬레나 본햄 카터 때문이었다. 강렬한 눈빛과 약간 쇠를 가는 듯한 목소리로 헨리8세를 좌우하다 마지막에 처형장에서 기도를 올리던 모습까지 그야말로 카리스마가 절절 흘러넘쳤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헨리 8세는 레이 윈스턴이라는 배우가 맡았는데 크게 인상적이었던 건 없고, 흔히 헨리 8세의 이미지로 남은 뚱뚱하고 배나온 탐욕스러운 왕의 모습에 충실했다. 아마도 홀바인의 그림이라고 생각되는 세밀화 속의 헨리8세는 언제나 빵떡모자에 물방울무늬가 들어간 담비 모피 외투를 걸친 비대하고 노회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싸이에 올린 글을 보니 그림 사진도 있어서 퍼왔는데 어우... 정식 부인만 6명이나 두었고 애인들은 셀 수도 없었으며 대부분의 전부인들을 참수한 <천하잡놈>이라고 생각하면 도저히 멋있게 봐줄 수가 없다. 그것이 제 아무리 국내외 정세와 관련된 일이라 하더라도!


본격적인 <천일의 스캔들>이야기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으므로 숨겨야겠다.
Posted by 입때
,

꽃구경

삶꾸러미 2008. 4. 11. 20:13
날씨마저 암울한 것이 전조가 좋지 못했던 총선날 투표 마치고 결국 동네 벚꽃길에 구경갔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금세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딸이랑 꼭 꽃구경을 해야한다는 엄마 원을 풀어드려서 조금 속이 후련.

그날 비가 내려 꽃이 다 떨어지겠다 걱정했더니 빗줄기가 그리 세지 않았는지 본격적인 벚꽃 축제는 오늘부터라면서 엄마는 또 과일 싸들고 동네 아줌마들이랑 다녀왔다는데, 청사초롱에 불 들어오고 현란한 조명이 켜지는 밤에 더 볼것이 있다면서 여전히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본다. -_-

생각해보건대, 예로부터 봄이면 아줌마들이 관광버스 대절해서 버스 뒤집히도록 춤을 추어대면서
꽃구경을 다녔던 이유는 지난한 삶에서 약간의 일탈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월과 계절의 변화에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 계절 중에선 언제나 봄이 제일 좋았고 봄꽃 피면 싱숭생숭 놀러나갈 궁리를 하기는 했으며 꽃을 유독 좋아하기는 하지만 계절따라 바뀌어 피는 꽃 하나하나에 진지한 의미를 두고 관찰하게 된 건 삼십대 이후였던 것 같다.

울 부모님이 사십대이셨을 때는 부부동반으로 근교 산에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셨는데
다른 때는 몰라도 산에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 능선이 있는 북한산인가 도봉산인가, 암튼 기억도 잘 안나는 산에 우리 삼남매를 데려가 꼭 구경시켜주고 싶어 하셨다.
꽃이 얼마나 예쁜지 니들도 꼭 봐야 한다면서...
그때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던 막내는 맥가이버 봐야하는데 등산 때문에 늦어 못본다면서 볼이 퉁퉁 부은 얼굴로 따라다니다 결국 시무룩한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지금 보면 동생녀석 뒤에 아련하게 피어 있는 진달래가 참 예쁘긴 하다.

사실 그때는 부모님을 <한번 봐드린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등산엘 따라나섰는데
그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걷기조차 싫어하는 내가 진달래 핀 봄산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았겠나 싶다.  

엄마는 이제 등산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멋진 등산화를 신고 동네 앞뒷산을 조금 오르다 마는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봄꽃이 피면 꼭 그걸 나한테 못 보여줘서 안달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얼마나 예쁜 줄 아니. 사람들이 다 와서 보고 좋다고 난리더라. 그러니까 너도 봐야지."

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뼈저리게 알 수 있는 마음은 확실히 나이와 비례하는지
나는 아직도 엄마만큼 봄꽃구경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후회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엄마랑 많은 걸 함께 누려야한다는 조바심은 확실히 생겼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먹다가... 해마다 꽃구경을 빠뜨리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때가 오겠지 싶어서 마음이 묵직하다.

Posted by 입때
,

자신감

삶꾸러미 2008. 4. 5. 22:51

벨로를 시초로 블로그 이웃분들의 연이은 <자신감> 포스팅을 보면서
약간은 자아비판 비슷한 고백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간 바쁘기도 했지만 자꾸 뜸을 들이게 됐던건
과연 내 인생에서 자신감 100개인 시절이 있었던가, 아닌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시기를 정점이자 100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즈키님이나 키드님처럼 살아오는 동안 자신감이 100개로 온전히 채워진 적은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던 시기를 억지로라도
100개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나를 믿는 마음>인 자신감이 앞으로 더더욱 고개를 숙이거나 고작해야 수평선을 유지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감 백개>라는 말을 처음 뱉은 11살 이쟁그만 양이나 벨로의 <자신감 백개>와 비교한다면 나의 자신감 백개의 수준은 최소한 다섯개쯤 부족한 기준의 정점임을 미리 털어놓고 시작해야겠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