벨로를 시초로 블로그 이웃분들의 연이은 <자신감> 포스팅을 보면서
약간은 자아비판 비슷한 고백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간 바쁘기도 했지만 자꾸 뜸을 들이게 됐던건
과연 내 인생에서 자신감 100개인 시절이 있었던가, 아닌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시기를 정점이자 100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즈키님이나 키드님처럼 살아오는 동안 자신감이 100개로 온전히 채워진 적은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던 시기를 억지로라도
100개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나를 믿는 마음>인 자신감이 앞으로 더더욱 고개를 숙이거나 고작해야 수평선을 유지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감 백개>라는 말을 처음 뱉은 11살 이쟁그만 양이나 벨로의 <자신감 백개>와 비교한다면 나의 자신감 백개의 수준은 최소한 다섯개쯤 부족한 기준의 정점임을 미리 털어놓고 시작해야겠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초기엔 비교적 기복이 별로 없는 자신감 곡선을 그리다 비스듬히 상승해 정점을 찍은 다음 비교적 짧은 시기에 쌍봉낙타 혹 같은 굴곡을 겪은 후 계속해서 완만한 하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든 재미있어 보이려고 나 또한 자신감 그래프를 덩달아 그려보았다.
컴맹답게 이면지에 색연필로.. -_-;;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 출신의 부모 슬하에서 자란 8남매 가운데서도 장남이신 우리 아버지의
첫딸로 태어난 나는 온 가족의 사랑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했다.
동네에 워낙 아기들이 없었기도 했고, 말이 빠르고 노래도 곧잘해서 재롱을 꽤나 많이 부렸다나 뭐라나..
외가에선 울보인 나를 <난이>(못난이의 준말인데, 외삼촌들은 내가 20대가 된 후에도 그렇게 불렀다 ㅎㅎ)라고 불렀지만 내심 나는 못난이 3형제 인형처럼 못생긴 건 <절대> 아니라고 자신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를 억지로 7살에 입학시키고 할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킬 때도
한글을 몰라 칠판에 적힌 숙제를 베끼느라 초반엔 늘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엄마가 손수 만들어준 원피스와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던 <귀여운> 꼬마를 선생들도 다들 예뻐해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볼타구니를 꼬집히는 것만이 불만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전혀 없고, 그저 선생님 말씀을 중히 여겨 숙제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나는 어느새 우등생 범주에 속했고, 유별나게 뛰어나진 않으면서 그림도, 글짓기도, 노래도 이것저것 두루두루 잘 하는 편이라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의젓한 누나였다.
그럼에도 자신감이 백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부족한 숫기와 형편없는 운동신경 때문이었다.
반장 부반장 따위를 하는 건 죽어도 싫었고, 어려운 선생님들이 득실거리는 교무실에 들락거리는 것도 싫었으며, 몸을 써야하는 체육 시간엔 한숨만 나왔다. 심지어는 국민학교 5학년때 기계체조 특성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체육 성적 '양'을 받은 적도 있다. ㅋㅋ (방학날 충격을 받은 엄마는 당장 성적표를 들고 학교로 뛰어가, 우등상을 주지를 말든지, 체육 양을 주지 말든지 그런 게 어딨냐며 따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 유년시절의 자신감을 갯수로 따져보면 70개에서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도 양상은 비슷했다. 특별히 열심히 공부를 하는 편은 아니고 그렇다고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으면서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는 편이랄까.
리더십도 숫기도 없으니 반장 재목은 결코 안되고(뽑아준대도 싫었다), 미화부장이나 독서부장 정도나 하면서 뒤에서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
집에서도 공부하라는 말 들어본 적 거의 없었고, 오히려 시험 때 반짝 낮엔 괜히 책상정리만 하다가 밤늦게 공부를 하려고 들면 부모님은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라고 하셨더랬다. -_-;;
수업시간에 안 졸고 필기를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그 외엔 정말로 별로 공부는 안했는데도 막연하게 우등생이라고 하니, 내심 진짜 열심히 공부하면 1등도 문제는 없겠군...이라고 건방지게 생각하면서 막상 실천은 하지 않는(아마도 겁이 났겠지) 비뚤어진 오만함도 있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미대진학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뒤늦게 화실을 다니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부류로 취급받기도 싫고(아 재수 없다) 비싼 학원비로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도 않아서 그림은 취미로 삼아야지 마음 먹기도 했다. (자신감 갯수 80)
심지어 고3때도 열심히 공부를 한 기억보다는 야자 시간에 몰래 떡볶이 사먹으러 다니던 기억이 더 많고
연애하느라 고민에 빠진 친구 얘기 들어주느라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수다를 더 오래 떨었다.
결국 혐오스러운 수학에 발목을 잡혀, 기대보다 낮은 학력고사 점수에 재수하겠다고 단식투쟁을 잠시
벌이긴 했지만, 대학엘 다니고 보니 학교 이름값도 전공도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을 만큼 대학생 생활이 즐거웠다. ^^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 점수 몇점 때문에 이른바 일류대학이라는 곳에 못 간 걸 후회할 필요도 없을 만큼, 내 주변엔 훌륭한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나는 친구들에게 노트필기를 빌려주는 우등생이었고, 문어발식 연애가 가능할 정도로 이상스레 인기도 높았다. ㅋㅋ (자신감 갯수 90)
졸업을 앞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역시 공부는 하지 않은 채 술만 마셔대던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시험삼아 넣어 봤던 대기업 입사 서류전형에선 당연히 떨어졌지만(토익 점수표도 없이 서류를 접수시킨 내가 미친*이라고 했다^^) 곧이어 동기들 가운데 거의 두세 번째 취업자가 되었으므로 자신감이 꺾일 필요는 없었다.
미국 의류수입업체의 서울 지사였던 나의 첫직장은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해준 곳이었다.
영문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실용영어는 달달 외운 자기소개 내용밖에 없었던 내가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익힌 곳도 그곳이었고, 가끔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더라도 코피 터지도록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말겠다는 꿈을 키운 곳도 거기였다. 패션과 무역에 대해서도 수박 겉핥기 식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본사로 출장을 다녀오고, 직접 개발했던 샘플 옷이 본생산을 거쳐 메이시즈, 시어스 같은 쇼핑몰에 걸려있는 걸 보게 될 때의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본명 대신 영어 닉네임이 영어로 찍힌 명함을 들고 다녔던 그 시절엔 정말로 내가 실력 대단한 MD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여, 언젠가는 그 업계에서 지사장이나 지점장 자리 하나 꿰차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너무도 바빴고 하루가 멀다하고 술 마실 일도 있었는데, 다음날엔 술냄새를 풍기면서라도 거뜬히 출근했다. 누구와 약속이라도 잡으려면 다이어리를 펼쳐들고 일주일 뒤쯤을 기약해야 할 정도로 쓸데없이 분주했다. 그 때가 바로 내 자신감이 정점이라 느껴지는, 그래프 상의 A 지점이다(드디어 자신감 100개!). ^^*
하지만 첫 직장에서 만 3 년을 지내고 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불합리한 인종차별과 가혹한 인사관리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더 견딜 수가 없었고, 한국 노동위원회에 제소까지 하는 노력을 기울이다 결국엔 내가 떠났는데, 이후에 별 깊은 고민 없이 선택한 회사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인종차별은 있었어도 성차별은 없었던 미국 회사와 달리, 한국 회사들은 뿌리 깊은 성차별로 나를 좌절시켰고 늘 커피 타는 문제, 복사하는 문제, 승진문제로 턱턱 내 숨통을 막았다. *_*
내가 아이템을 잘못 선정하여 입사한 잘못도 있지만, 야심만만했던 내 의욕만큼 회사에서 나를 키워줄 수 없는 분야임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감이 극적으로 꺾이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나는 다시 미래를 염려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직업을 살폈고, 지겹도록 되풀이했던 매뉴얼과 계약서 번역이 아닌 진짜 번역을 평생 하고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무렵 우연히 지인의 번역원고를 몇 꼭지 도와주고 나서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데서 대책없이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내가 손만 뻗으면 당장이라도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번역을 맡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번역가로서의 첫발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을 앞두고 번역가를 지망하는 막연한 백수로 지냈던 6개월 정도의 시절이 바로 자신감이 60개 정도로 떨어진 그래프의 B 지점이다.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시험번역을 의뢰했던 출판사에서 "좀더 습작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좌절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나는 머지 않아 또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자신감은 바닥을 향해 치닫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내게 습작이 필요하겠다던 출판사는 내가 낑낑대며 6개월쯤 습작을 하고 있을 무렵 다시 연락을 해왔고 1995년을 시작으로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번역서들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으며
나를 찾는 출판사도 차츰 늘어났다. ^^
비상근으로 외서기획을 맡아달라는 출판사도 있었고, 해외 도서전에 대신 다녀오기도 했다. 부족한 공부도 할 겸 가방끈도 늘릴 겸 대학원에 다닐 때는 평생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등록금 아깝지 않게 공부만 했다. 방학동안엔 다시 번역에 매달려 편집자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원고독촉을 받았지만, 띠동갑에 가까운 아이들과 어울려 학교를 다니며 적게는 5살쯤, 가끔은 무려 열살이나 어리게 취급받으며 "학생!"이라고 불리는 묘미도 짜릿했다. 이제 더는 진솔한 인간관계를 새로이 맺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딜 가더라도 마음이 통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는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자신감은 정점까지 다시 오르지 못했다.
서른 살 이후로는 연애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아예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뭔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다. 말로는 "연애 빼고 내가 못하는 게 어딨어!"라고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예전보다 확실히 덜 활기찬 게 느껴졌고, 사진 속에 변해가는 내 모습도 흠칫흠칫 놀라웠다.
물론 여전히 나는 자유로움과 소박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내 일이 좋고, 남들의 잣대로 보아 크게 성공하겠다는 돈욕심도 없으며 더 큰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망도 없다.
원숭이 줄타기 법칙 운운하며 엄살을 떨기는 하지만 지금보다 더 게으름만 부리지 않는다면 꾸준히 일감을 물어다줄 고마운 지인들도 충분하므로, 자신감이 아닌 행복의 지수로 따진다면 분명 80이상일 게다.
그럼에도
이제 더는 사람들이 나를 5살씩이나 어리게 보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면서 속이 상하다. -_-;;
"과학과 의술의 힘을 빌지 않고 이 정도면 내가 제일 예쁜 거야!"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던 내가
요샌 고모들의 성화대로 얼굴에 대거 포진한 점이랑 기미는 레이저로 제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는 놀라운 생각도 하게 되었다. ㅠ.ㅠ (물론 귀찮음과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나중 문제다)
누가 나이를 물으면 우선 흠칫 놀란다. 나도 내 나이가 놀랍지만, 과거의 내가 참 많은 것을 이루어놓았을 것이라고 꿈꾸었던 미래의 그 나이에, 그리 성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음이 어쩐지 부끄러워해야할 노릇은 아닌지 반성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한 인간으로서 현재 내 자신감은 계속해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나마 그래프를 그리다 보니 지금의 내 위치 C지점은 아직 10여년전의 나락보다 높으며,
엄청나고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보내느라 심신을 소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재미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믿을 수 있었던 힘을 심어준 주변과 가족의 애정에 감사해야 될 것 같다.
내가 뭘하든 결국 내 가족과 지인들은 나와 내 선택을 믿어주었다.
펄펄 뛰는 자신감은 조금씩 잃어도 괜찮으며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자존감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 자신감의 바탕이었던 주변의 힘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자신감이 역사상 최저치를 지나 더욱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닿는 일도 생겨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았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등두들겨 줄 작은 용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커다란 재산이자 든든한 빽인 <인복> 때문에라도 말이다.
Posted by 입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