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09.02.26 사랑하는 영자씨 18
  2. 2009.02.17 엄마와 TV 17
  3. 2009.02.08 욕봤다 12
  4. 2009.01.24 사진 7
  5. 2009.01.15 할머니의 추억 14
  6. 2008.12.15 편애 22
  7. 2008.12.09 남산 케이블카 27
  8. 2008.12.05 왕비와 공주 30
  9. 2008.12.01 제사 다음날 18
  10. 2008.11.28 좁은 세상 6

다들 아는 얘기겠지만, 비틀즈의 노래 Hey, Jude는 존 레논의 아들 줄리앙을 위해 폴 매카트니가 만든 노래다.
존 덴버의 노래 가운데서도 아내를 위한 노래 Annie's Song이란 게 있다.
음악가를 가족으로 둔 덕분에 자기 주제가를 갖게 된 사람은 대단한 행운아겠지만, 반드시 본인을 위해 작곡된 노래가 아니더라도 자기 이름이 들어간 곡이 있다면 평범한 사람들도 퍽 흐뭇하게 여기는 것 같다. 그래서 대중가요엔 끊임없이 제목이든 가사에 사람 이름이 들어간 노래가 나오는 것이리라. 그리고 그런 맥락으로 나온 가요 중엔 이 나라의 수많은 영자씨들을 위한 노래 <사랑하는 영자씨>가 있다.

40년대 출생이신 울 엄마 또래엔 일제강점기의 영향으로 끝소리가 <子>인 이름들이 수없이 많고, 그 가운데서도 <영자>란 이름을 가진 딸은 거의 집집마다 하나씩은 꼭 있지 않나 생각될 정도다. 요새도 한달에 한번씩 모임을 갖는 울 엄마의 고등학교 동창모임에도 열두 명 가운데 무려 <영자>가 셋이란다. 김영자. 홍영자. 이영자.
그 아주머니들의 노래방 18번이 모두 <사랑하는 영자씨>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수많은 영자씨 가운데 한 분인 울 엄마는 <만남>과 <애모> 이후 거의 강제적으로 <사랑하는 영자씨>를 애창곡으로 삼아야 했다. 누가 부르든, 울 엄마를 대동하고 노래방엘 가게되면 반드시 신청해야 하는 지정곡쯤이 되고 말았으니까. 사실 이 노래는 본인보다 사랑하는 사람이 불러줘야 하는 것이라, 듀엣 곡이 되는 게 보통이었다. 주로 울 아버지가 아내에게 바치는 연가의 형식으로.
그리고 울 엄마가 요 전에 쓰시던 휴대폰 화면에는 <사랑하는 영자씨>라는 글씨가 기본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평생 곰살맞으셨던 울 아버지의 소행이었을 거다. 휴대폰 기본설정 바꾸기의 달인인 정민공주가 그 글귀를 없앴을 때 울 엄마가 펄쩍 뛰면서 야단을 쳤던 것을 생각하면 말이다.

아무려나 지난 화요일은 우리집 영자씨의 생신이었다. 주중이라 당연히 늘 하던 대로 주말에 미리 모여 저녁을 먹고 케이크 촛불을 껐다. 언제부턴가 가족들의 생일파티에서 가장 즐거운 순간은 조카들의 선물을 개봉할 때다. 어린 조카들이 할머니나 고모, 제 부모에게 하는 선물이란 당연히 손수 그린 그림이나 카드 뿐이지만, 며칠 전부터 은근히 압력을 넣어 받아내는 아이들의 선물은 그야말로 사랑스럽다. 내가 팔불출 고모임은 이미 만방에 알려졌으니 이참에 또 자랑하려는 것이 본 글의 목적이라는 사실은 이미 다들 짐작하셨겠지...


주말에 미리 생일파티를 끝내더라도 정작 당일을 그냥 넘길 순 없는 일이라, 무수리는 전날 장을 봐다가 미역국 끓이고 불고기 재고 초고추장 만들고 두릅 데쳐서 조촐한 아침상을 차렸다. 전날 밤 적어놓은 카드엔 정민공주의 카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내용으로 만날 툴툴거리고 잔소리 해야 하는 속상한 마음을 털어놓고는 무뚝뚝해서 좀처럼 하지 않는 말, "엄마 사랑해요"라는 말도 마지막에 적어 넣었다. 그러곤 또 민망해서 성의없는 현금 선물과 함께 모르는 쳑 소파에 갖다 놓고 드물게 모녀가 나란히 앉아 아침을 먹었다.

소파에서 발견한 카드를 읽은 엄마는 아침부터 사람을 울린다고 투덜거렸고
미역국 끓이느라 못 잔 잠을 자겠다고 심술내며 방에 들어온 무수리 딸도 눈물이 났다.
사랑하는 영자씨가 옆에 안 계실 날이 겁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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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TV

삶꾸러미 2009. 2. 17. 00:45

늙은 엄마는 언제나 TV를 틀어놓고 잠이 든다. 그래서 공식적인 딸의 일과는 늘 엄마 방의 TV를 끄는 것으로 마무리 된다. 너무 일찍 확인해서는 곤란하다. 엄마가 선잠이 들었을 때 TV를 끄면 퍼뜩 깨어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밤새도록 TV를 틀어놓고 주무시게 내버려둘 수도 없다. 한쪽 귀도 어두워져 여간 큰 소리로 틀어놓는 것이 아닌 소음 때문에 엄마가 반드시 요란한 꿈을 꾸다 깨어나기 때문이다. 잠의 질은 엄마의 우울증세를 좌우하는 무엇보다 중요한 지표이므로 딸은 엄마의 잠을 반드시 지켜내야 한다. TV를 끄기에 가장 좋은 시간은 자정 이후. 당연히 딸이 먼저 잠들어선 안된다. 딸이 올빼미 체질인 것이 여간 다행이 아니다. 간혹 몸이 아프거나 며칠 밤샘 뒤끝이라 시체처럼 늘어져 먼저 잠드는 날이 있더라도 딸은 중간에 본능적으로 깨어나 엄마방으로 건너가 TV를 끈다. 피곤하여 먼저 잠들 터이니 오늘만은 TV를 틀어놓지 말고 주무시라고 신신당부를 해보아도, 엄마는 좀처럼 TV 없이 잠들지 못함을 잘 알기 때문이다. 아무리 약기운이라지만 딸이 보기엔 시끄럽게 TV를 틀어놓아야 잠을 자는 엄마가 더 신기하다. 딸은 잠을 자려면 반드시 사방이 조용하고 어두워야 하는데. 반대로 엄마는 너무 조용하고 어두우면 잡생각이 들고 무서움이 밀려와 잠들 수가 없단다. 사실 엄마는 홀로 잠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가능하다면 딸과 매일 동침하고 싶은 것이 솔직한 마음이다. 남편 사별후 처음 몇달은 엄마를 걱정한 딸이 실제로 같이 자주기도 했었다. 그러나 누가 옆에 있어야 코를 골며 깊은 잠을 자는 엄마와 달리 예민한 딸은 누가 옆에 있으면 결코 깊은 잠을 잘 수 없다. 결국 잠자리는 예전처럼 각자의 방으로 나뉘었지만, 엄마는 잠자리 친구 TV마저 포기하진 못한다. 
매일 똑같은 필름을 상영하듯, 비슷한 시간에 안방으로 건너가 홀로 떠들어대는 TV를 끄고, 코고는 엄마의 어깨 위로 이불을 덮어주고 나오는 딸의 마음은 언제나 묵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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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봤다

삶꾸러미 2009. 2. 8. 16:25
중학교 1학년 때, 첫 환경미화 심사를 마치고 나서 무뚝뚝한 담임선생이 말했다. "다들 욕봤다."
<욕을 보이다>는 말이 안 좋은 뜻임을 알고 있던 나는 깜짝 놀랐고, 친구들도 마찬가지인 눈치였다.
국어선생이었던 담임은 우리의 난감한 표정을 눈치채고는, 웃으며 "애썼다는 뜻이다, 이 녀석들아."라고 말했다.
그날 이후로, 우리는 그 말이 재미 있어서 <수고했다> <애썼다>라고 말을 해야하는 경우엔 일부러 "욕봤다!"라고 외치곤 했다. 영문을 몰라 처음 우리처럼 어리둥절한 반응을 보이는 친구에겐, "너는 한국말도 못알아듣냐!"라며 담임선생이 우리에게 했던 핀잔을 고스란히 되풀이했다.

어제 사촌동생의 결혼식이 끝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오며 나는 문득 그 말이 떠올라 속으로 중얼거렸다.
'다들 욕봤다.'
오죽하면 인륜지대사라고 하겠냐마는 결혼이란 참으로 피곤하고 거창한 의식임에 틀림없다. 
당신 아들도 아닌 조카 결혼식임에도 울엄마까지 잠 못 주무시고 이래저래 신경을 쓸 정도이니
당사자인 신랑신부는 물론이고 그 부모들까지 오죽 에너지가 소모되었을까.
워낙 예민하고 철두철미한 성격이라, 혼주셨던 우리 고모랑 고모부는 살이 쪽 빠져 안쓰러운 지경이었고
마지막까지 예식을 총지휘하느라 동분서주했다.
두 남동생이 결혼하는 과정을 지켜보긴 했지만 벌써 아득한 옛날 일이라 이 나라에서 집안 대 집안의 행사인 결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절차가 복잡하고 미묘한 부분까지 세세히 신경을 써야 하는지 잊고 있었는데, 새삼 어깨 너머로 또 거들떠보니 정말 보통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타고나길 무대체질이 아니고서야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는 가운데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는 건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생각해보니 우리 집안의 개혼이었던 큰동생의 결혼을 앞두고, 소심한 엄마는 결국 크게 병이 나 과연 결혼식에 갈 수 있을 것인가 없을 것인가 고민해야 할 정도였다.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보통 결혼 예식의 처음은 신랑신부 어머니가 제일 먼저 입장해 양쪽 단상에 있는 초에 불을 켜고 나서 내려와 서로 맞절을 하는 것인데, 울 엄마는 덜덜 떨거나 실수를 해 그걸 제대로 못해내실까봐 겁을 내기도 했다. ^^ 

확실히 인연이란 따로 있는가보다 싶은 선남선녀의 결합이었던 신랑신부의 모습은 참으로 아름다웠고
결혼식은 최근에 본 그 어느 결혼식보다 화려하고 성대했지만
결혼식에 참석할 때마다 내 느낌은 늘,  "어휴, 결혼식이란 정말 못할 짓이로구나..."하는 것이다.
큰동생 부부는 결혼식을 너무 얼떨결에 치른 것 같아, 제대로 다시 해보고 싶다고, 그러면 요번엔 아주 잘 할 것 같다고까지 이야기를 하지만, 그리고 더러는 몇년 살다가 리마인드 웨딩이라며 식을 다시 올리거나
간혹 재혼, 삼혼까지 화려한 예식으로 축하받는 이들도 볼 수 있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이지 결혼식이란 너무도 거창하고 무의미한 소비의식이자 자기과시의 장이라
절레절레 고개가 흔들린다. 

아무려나 간만에 무수리까지 하이힐로 마감되는 꽃단장하고서 왕비마마 모시고 다녀오느라 어찌나 욕봤는지  
열세시간을 자고 일어났는데도 아직 피곤하다. ;-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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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삶꾸러미 2009. 1. 24. 22:52

나이든 어르신들이 죽음을 대하는 방식은 크게 두가지가 있는 것 같다.
(나이들어 죽음을 반기는 사람이야 극단적인 고통에 시달리는 말기환자 이외는 아무도 없으리라 믿지만)
적극적으로 죽음을 대비하고 언급하며 자연스러운 수긍의 태도를 보이는 분들과
철저한 금기사항이나 불경스러운 일처럼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하는 분들.
"오래살면 뭐하누. 내가 빨리 죽어야지 니들이 편할 텐데."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이 오히려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하다는 말도 있으나 실제로 그런지 어쩐지는 잘 모르겠다.
내가 몸소 늙고 병들어 경험해보지 않고는 말이다.

절에서 흔히 여신도들을 <보살님>이라고 부르는데, 여든여섯에 돌아가신 우리 외할머니는 부처에 대한 믿음이 삶의 중심이었고 실제 삶에서도 보살처럼 자식들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들에게도 늘 베푸는 분이셨다. 불교든 기독교든 좋은 일을 하는 사람은 극락과 천국엘 간다고 믿으니 죽음을 담담히 받아들이는 데는 신앙의 힘이 크게 작용하는 것도 같다. 암튼 내가 지켜본 바에 의하면 우리 외할머니만큼 죽음을 자연스레 대한 분도 없었던 느낌이다.
"나 죽으면 꼭 화장해서 산에다 휘휘 뿌려라."는 외할머니의 말씀은 어려서부터 익히 들었고
환갑 즈음에는 손수 수의를 장만해두었다가 볕좋은 가을날엔 가끔 샛노란 삼베 수의를 툇마루에 내놓고 거풍과 일광욕을 시키셨다.
처음엔 그게 수의인 줄도 눈치채지 못했다가 하필 내가 놀러간 날 툇마루에 놓여 있는 삼베옷을 만나게 되면 공연히 화가 났다. 인간이 나이들면 언젠가는 세상을 떠나야 하겠지만 굳이 그렇게 자손들 코앞에 죽음을 들이밀어 환기시키는 할머니의 태도가 야속했던 것 같다. 묘자리와 수의를 미리 장만해 놓으면 오히려 노인들이 더 장수한다는 속설도 있으나, 우리 외할머니는 장수를 바라며 수의를 장만해놓으신 건 확실히 아니었다. 그냥 그 날을 당신이 손수 준비해두고 싶으신 듯했다.
중한 병환 때문에 이십여년이나 간수해온 수의를 정말로 입게 될 날이 머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을 때, 외할머니는 또 자진해서 영정사진을 찍으라 하셨다. 마당에 흐드러지게 핀 진분홍색 철쭉을 배경으로 의자를 놓고 앉아 나의 사촌동생에게 찍으라고 하셨다는 할머니의 영정사진은 액자에 담겨 1년 넘게 대형TV 위에 놓여 있었고, 나는 입퇴원을 반복하시는 할머니를 뵈러 집에 갈 때마다 그 사진을 보며 꽃속에서 인자한 미소를 짓고 있는 외할머니의 모습에서 정겨움과 함께 얼마 남지 않은 날의 안타까움을 동시에 느끼며 차마 오래 바라볼 수가 없었다.

손수 죽음을 꼼꼼히 준비하셨던 외할머니와 달리, 그보다 10년이나 먼저 돌아가신 우리 친할아버지의 경우엔 남은 가족들이 참 많이 허둥댔던 것 같다. 워낙 정정하셨다가 갑자기 쓰러지시기도 했지만 할아버지는 당신의 죽음을 예상하는 말 따위를 입에 올린 적이 거의 없었다. 여든 중반에 접어드셔선 예전보다 기력이 떨어지시긴 했지만, 그래도 나는 식사량이나 거동의 정도로 볼 때 우리 할아버지가 백살까지 거뜬히 사실지 모른다는 생각을 무작정했다.
이북5도청에서 실향민들을 위한 묘지를 분양한다는 소식을 듣고 아버지는 작은아버지들과 논의해 조부모님의 묘자리를 장만했지만 할아버지께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는 살아계신 노인들의 수의나 묘자리를 미리 장만하는 건 곧이곧대로 빨리 돌아가시기를 바라는 자식들의 불효가 담긴 행동이라고 생각하셨을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때 우리는 여든을 넘기고 장수하시는 두분의 존재에 그저 감사할 뿐 머지않은 사별에 대해서는 각별히 신경을 쓰지 않았거나 일부러 생각을 거부했던 듯하다. 그저 오래오래 사시기를 빌며...
그러다 황망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우린 당장 할아버지의 영정사진부터 고민을 해야 했다.
동네 사진관에서 찍으신 듯한 주민증 사진은 너무 마음에 안들고, 가족사진을 오릴 순 없는 상황이라 결국엔 칠순때 찍으신 기념사진으로 영정사진을 만들어야 했다. 앓지도 않으시고 갑자기 뇌졸중으로 쓰러져 하루만에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초상을 치르는 일은 온 가족에게 충격이었고 기막힌 슬픔도 슬픔이지만 장례절차도 낯설어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친할머니때도 마찬가지였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우리집으로 거처를 옮기신 할머니와 수십년 만에 다시 동침 파트너가 된 나는 할머니의 매끈매끈한 살결을 어루만지며 잠드는 행복을 최소한 몇년은 더 누릴 수 있을 줄 알았었다. 하지만 겨우 여섯달 만에 또 그렇게 갑자기 쓰러져 의식을 잃으신 할머니는 야속하게도 끝내 할아버지 곁으로 떠나시고 말았다. 멍청하게도 우린 그때도 영정사진을 마련해두지 않은 상태였다. 마음에 드는 사진을 골라보려는 노력을 기울일 여유도 없었고, 우린 또 15년도 넘은 너무 젊은 할머니의 낯선 사진을 장례식장에 모셔놓고 속앓이를 했다. 왜 예쁜 할머니의 모습을 미리 담아놓을 생각을 하지 못했을까 자책하면서...

죽음을 대비하지 않는 성품도 유전인지 우리 아버지 역시 우리 앞에선 당신의 죽음에 대해 언급하시는 일이 거의 드물었고, 우리들 또한 아직 젊고 건강하시다고 굳건히 믿은 터라 언젠가 다가올 일을 대비해야한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아버지는 다만 늘 병치레를 하는 우리 엄마보다 하루만 더 살면 좋겠다는 말씀을 하시긴 했다. 그래야 자식들한테 부담을 덜 주면서 병든아내를 보필할 수 있으리라는 의미였다.
어쨌든 갑자기 쓰러진 아버지가 대단히 위중한 상태임에도 우린 도저히 희망을 버릴 수가 없었다. 혼수상태가 한달 가까이 이어지며 의사들이 포기를 선언하기에 이르자 집안 어르신들은 최악의 상황을 대비해야 하지 않겠느냐고 우리 삼남매에게 넌지시 이르셨지만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의 죽음을 준비하기보다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와 오래도록 병원생활을 하는 경우를 상상하며 고집스레 그에 대한 대비를 의논했다.
결국 아버지의 임종 후 우리는 또 허둥댈 수밖에 없었다.
식구마다 디지털카메라를 사들여 그렇게도 사진을 많이 찍어댔는데, 막상 아버지의 멋진 모습을 담은 독사진은  드물었다. 간혹 퍽 멋진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선글라스를 쓰고 계셨기 때문에 영정사진으론 사용하기 곤란했다. 집안 어르신들은 양복을 입은 모습의 여권사진을 쓰라고 조언하셨지만, 나와 동생들은 아버지가 그렇게도 좋아하시던 등산 나들이 차림의 아버지를 마지막으로 모든 이들에게 선보이고 싶었다. 숱적은 머리는 반드시 등산모자로 가린 채로.

장례식장에서 다급히 집에 돌아와 내가 골라간 등산복 차림의 사진은 그럭저럭 괜찮았지만 인화지만 있었던 사진이라 확대하는 과정에서 많이 흐려졌고, 아주 최근의 모습은 아니라 나는 또한번 속앓이를 했다. 조카들 사진은 그렇게도 많이 찍었으면서 왜 아버지 사진은 제대로 찍은 적이 없었을까 마음이 아팠다.
물론 가장 멋진 모습의 아버지는 우리들 마음과 머릿속에 들어있지만 그래도 마지막 가시는 고인의 모습이 얼마나 중요한지 나는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외할머니, 아버지, 그렇게 네번째 장례를 치르며 비로소 깨달은 듯하다.
이번에 아버지를 모신 납골당에 세라믹으로 사진을 붙여달게 되면서 또 다시 사진고민에 빠졌던 우리는(그나마도 영정사진으로 썼던 인화지 사진은 돌려받지도 못했다) 아버지의 옛날 디카파일부터 모든 사진파일들과 앨범을 다시 뒤져야 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렇게도 드물었던, 산에서 찍은 아버지의 독사진을 이번에 찾아냈다는 사실이었다. 새로 저장해둔 폴더의 날짜를 보면 2007년 7월 1일,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이니 그건 분명 내가 컴퓨터 파일들을 뒤져 노트북으로 옮겨 장례식장으로 들고갔던 사진들이었다. 그런데 왜 그 땐 그 사진을 고르지 않았을까 영문을 알 수가 없다. 아니, 그 당시 그 사진을 본 기억도 남아있지 않았다.
슬퍼하느라 다들 경황이 없기는 했지만 노트북에 든 사진들을 나만 본 것도 아니고 동생들과 같이 뒤졌던 것도 같은데;;;

암튼 화질이 그리 좋지도 않고 크기도 작아 마음에 쏙 드는 건 아니지만, 살아생전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 가장 잘 담긴 도봉산 오봉 사진을 새삼 발견한 날 나는 슬피 울어야 했지만 그래도 많이 기뻤다.
그러고는 생각했다. 이제부턴 엄마 사진도 내 사진도 많이많이 찍어야겠다고.
독사진은 영판 쑥스러워 거부하던 것도 이젠 좀 덜해야겠다고.
아직 죽음을 대비하기에 이르다면 이른 나이지만 이왕이면 나는 준비된 상태로  언제일지 모를 내 마지막을 맞고 싶다.
남은 이들이 최대한 덜 허둥대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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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 손에 자란 아이들이 대부분 그렇겠지만 특히 나는 맏이 부모의 맏딸로 태어난 데다 친할머니, 외할머니 두분이 다 장수하신 편이라 어른이 된 뒤에도 할머니들에 대한 소중한 추억이 많다.
놀라운 건 두 할머니 모두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독학으로 한글만 익히셨으며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까지 쪽머리를 하셨을 정도로 외모로는 <구식> 할머니였고 외출할 때 말고 그냥 집에서 입는 옷은 언제나 <몸뻬> 바지였다는 점, 그럼에도 사고방식은 그 누구보다 깨어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10년대에 태어나신 분들이니 아들과 손자를 더 귀하게 여기는 남아선호사상이야 뼛속 깊이 자리잡은 본능 같은 것일 테지만, 그렇다고 우리 집안 딸들과 손녀딸들이 크게 홀대를 받은 적은 없었다. 게다가 나는 맏손녀딸이다 보니 오히려 특혜를 받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다. 예컨대, 나는 7살에 국민학교에 얼떨결에 입학한 뒤 한 학기 내내 할머니의 등에 업혀 등하교를 했다. 당시 전교에서 제일 작은 아이였다는 후문이 있기는 하지만 ㅠ.ㅠ 그래도 매일 손녀딸을 업어 등하교를 시키는 우리 할머니의 정성은 온 동네에 유명했다고 한다. 확실히 두 할머니들은 장손을 각별히 챙기시는 듯해도, 손위 누이인 나에 대한 신뢰는 더욱 전폭적이었고 내 말이라면 거의 무엇이든 다 동의해주셨다.
내가 잘 다니던 회사를 때려치우고 번역이란 걸 시작할 때도 집안에서 큰 반대는 없었지만 부모님은 내심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는 내 결심을 듣자마자 "쟤는 무슨 일을 하든 똑 떨어지게 잘 해낼 거니까 아무 염려 하지 마라"고 말씀하시며 앞장서서 온 식구들의 우려를 잠재우셨다.
두분은 완고한 보수주의자였던 친할아버지와 달리 이런저런 사회문제를 의논해도 나와 말이 잘 통했고 애들이나 젊은 사람들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며 절대 무시하는 법이 없었다.

친할머니 손에서 8살까지 자란 나는 당연히 어린 시절 이 세상에서 할머니가 제일 좋은 사람이어서 아빠와 엄마보다 순위가 앞섰고, 외할머니와는 친할머니만큼 곰살맞은 관계는 아니어도 늘 나를 감싸주시는 커다란 산 같은 분이라고 여겼다. 두분 다 서울 하늘 아래, 멀지 않은 곳에 사셨으니 그만큼 자주 만나며 지낸 덕분도 있겠지만 나에게 할머니의 존재는 참으로 크고 공고했으며 무한한 신뢰와 존경의 대상이었다.
친할머니는 허리가 심하게 굽고 심장이 약해 말년엔 바깥출입이 거의 불편하시긴 했지만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집안에선 단 한시도 쉬지 않고 걸레질과 정리정돈을 하시던 바지런한 분이었고, 외할머니는 마지막 1, 2년을 암 때문에 괴로워하셨지만 그 전엔 여든을 넘긴 나이에 전국 방방곡곡의 사찰로 성지순례를 다니실 정도로 정정하셨다. 그랬기에 내 기억에 남은 두분 할머니는 늘 자애로운 미소에 깔끔하고 단아한 모습으로 십여명이나 되는 손자 손녀들 용돈까지 일일이 챙기시는 대단한 분들이었다.

그런데 속 상한건 할머니가 된지 오래인 우리 왕비마마 때문이다.
우리 조카들은 고모한테 열광하는 것과 달리 할머니한테는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워낙 울 엄마가 손녀 손자들을 각별이 예뻐하고 안아주고 사족을 못쓰는 성품이 아니다 보니, 예민한 아이들이 제일 먼저 알아차린 때문이다. 아이들을 워낙 예뻐하셨던 울 아버지는 언제나 온 몸을 던져 손녀손자들과 놀아주셨지만 오히려 엄마는 그렇게 손주들에게 헌신적인 아버지를 못마땅해했고, 내가 보기엔 당신에게 쏟아져야 할 남편의 사랑이 손녀손자들에게 나뉘어 가는 것조차 질투하시는 듯했다. 내가 조카들에게 몸바쳐 봉사할 때도 겉으로는 늙은 딸 피곤해 할까봐 염려하시지만, 사소한 일로 어린 손녀딸과 말다툼을 벌이는 걸 보면 아마도 속마음은 무수리의 온전한 보필을 당신만 받고 싶은 건 아닌가 의심스러울 때가 있다.
한 마디로 울 엄마는 <손주들은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쌀쌀맞은 속담의 신봉자다. 아이들이 그리워서 거의 매일 손주들에게 전화를 걸어 예의 귀찮은 질문(숙제 다 했니? 밥 먹었니? 유치원에 잘 갔다 왔니?)을 던지고는 쌀쌀맞거나 시큰둥한 반응(그거 어제도 물어봤잖아? 할머니는 왜 만날 밥먹었느냐는 거만 물어요?)에 마음 상해 하고, 손주들이 놀러오기를 학수고대하는 한편, 떼로 몰려온 조카들이 마구 뛰어다니면 정신없다고 타박을 하시니 말이다.
그런 상황이니 눈치 빤한 조카들은 심지어 얼마 전부터 헤어질 때 할머니 볼에는 뽀뽀를 거부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 -_-;;

어린 조카가 장난삼아 일부러 나한테도 뽀뽀를 안해주고 까탈을 떠는 경우도 있으니 그러려니 하시라고 위로를 하긴 하지만, 어느새 머리가 굵어져 할머니한테 툴툴거려도 내심 할머니의 건강을 염려하고 배려하는 정민공주 이외엔 나머지 조카들이 가족모임이 있을 때마다 은근히 할머니를 따돌림하고 무시하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녀석들의 눈에 비친 할머니는 늘 아프고 온종일 TV나 보고 자기네랑 놀아주지도 않고 귀찮고 빤한 질문이나 해대는 사람인 모양이다. 왕비마마 본인도 그게 섭섭해서 마음 아파하시지만 정작 조카들을 대할 땐 ~~ 하지 마라, 고모 괴롭히지 마라, 뛰지 마라 따위의 잔소리만 해대니 관계가 호전될 리가 없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을 너무 일찍 빼앗겨 버린 조카들에게 할머니의 추억만이라도 오래오래 감동으로 남겨주고 싶은데 나로선 어떻게 도와야하는지 알 수가 없어 안타깝다. 조카들을 업어주기엔 울 엄마의 건강이 너무 나빠지셨고 할머니들과 윷놀이, 공기놀이를 함께 하던 나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홀로 하는 컴퓨터 게임에 너무 익숙하다. 조카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낯선 게임용어와 컴퓨터 용어에 왕비마마는 더욱 절망하는 판국이니 원...
우리 왕비마마와 어린 조카들의 전격적인 관계 개선을 위한 묘안은 어디 없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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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애

삶꾸러미 2008. 12. 15. 20:47

편견, 편단(공정하지 못하고 편벽되게 결정함), 편벽(남에게 알랑거리며 그 비위를 잘 맞추는 일, 또는 그런 사람), 편법, 편식, 편심, 편애, 편파, 편취, 편협.

<편>자 들어간 글자 치고 잘한 일은 하나도 없다.
특히 편애는 나쁘다.
원래 공평무사한 인간이 극히 드물다는 점을 구실로 삼더라도 편파적이면서 잘했노라고 말할 순 없는 일이다.

어제 카니발 콘서트에서도 그랬다.
나는 표나게 김동률을 더 좋아했다. 이적 노래는 몇 곡 아는 것도 없었다.
같이 간 지인은 너무 편애하지 말라고 했지만, 자지러지는 비명은 당연히 김동률만을 향한 것이었다.
물론 이적에게도 환호하고 박수도 쳐주었지만 내가 느끼는 감동은 달랐다.
다른 관객들도 마찬가지였다. 내 옆사람은 이적이 노래를 부를 때 훨씬 더 열광했고 내가 모르는 노래들도 척척 따라불렀다. 반면에 김동률이 노래할 때는 상대적으로 조용했다.
정확히 나눌 수는 없지만 두 사람을 공히 좋아하는 이들과, 따로따로 편애하는 이들이 뒤섞여 있었으니 아무도 마음 다치는 이들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마음 다치는 이들이 생겨나는 편애는 정말이지 곤란하다.
오래 전 교생실습을 나갔을 때 확실히 나도 느낄 수는 있었다. 그냥 예쁜 아이들은 단박에 눈에 들어왔다. 공부를 잘하거나 모범생이어서 예쁜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내 눈엔 심하게 잘나고 스스로의 잘남을 깨닫고 있는 우등생이나 상위권 학생들은 주는 것 없이 얄미울 때가 많았다. 성격이나 성적이 어떤지 잘 모르는 상황에서도 나는 그저 눈빛과 태도로 전달되는 맑은 심성 때문에 정이 가거나, 어딘가 측은함이 느껴지는 아이에게로 애정이 쏠렸다. 그러나 교사는, 특히 담임은 누구를 편애하는지 드러내서는 안된다. 누구나 고유의 팬을 확보하고 있는 대중가수와 달리, 아이들에겐 담임선생이 단 한명 뿐이니까.
편애를 받는 아이는 친구들에게 왕따가 되기 십상이고, 편애의 좁은 관계망에서 벗어난 대다수의 아이들은 어린 마음을 다칠지도 모른다.

매사에 잘난 척도 더럽게 많이 하면서 제 앞가림을 못하는 건 나의 가장 큰 단점임을 새삼, 그것도 옆구리를 세게 찔리고 나서야 깨닫고 속이 상해 밤새 가슴을 쳤다. 
사탕발림처럼 얄팍한 사랑을  덧칠하며 꽂는 비수는 더욱 아픈 법이거늘 소중한 사람들을 다치게 한 죄는 너무도 크다.
온종일 자학, 반성모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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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였다.
볕이 좋은 일요일, 가난한 부부는 계획했던 대로 올망졸망 어린 삼남매를 데리고 남산으로 나들이를 떠났다.
결혼식을 마치고 속리산으로 신혼여행을 떠나기 전에 택시를 대절해 친구들과 올라가 기념사진을 찍었던 것이 벌써 6, 7년 전의 일이었다. 그땐 평생 단 한번의 호사라 택시를 타고 남산을 올랐지만, 이번엔 두 아이를 걸리고 막내를 아내 등에 업힌 채 당연히 버스를 타고 회현동으로 향했다. 
탈 것들을 담은 그림책에서만 보던 케이블카를 태워주겠다고 아이들과 오래 전부터 약속을 했기 때문이다.
케이블카를 타보는 것은 젊은 부부도 처음이었기에 폴짝폴짝 뛰며 흥분해 좋아하는 아이들 못지않게 마음이 설렜다. 편도 표를 끊어 무쇠로 만든 작은 버스 같은 케이블카에 오르자 정말로 거짓말처럼 케이블카는 줄에 매달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케이블카 창에 매달리듯 유리에 얼굴을 대고 내다보는 남산의 초록빛 녹음은 더욱 아름다운 듯했고, 아이들이 손가락질하는 곳의 동네이름을 어림짐작으로 가르쳐주며 새삼 서울이 참 넓구나 싶었다.
아쉽게도 케이블카는 몇분만에 정상에 도착했다. 특히 둘째 아이의 목표는 남산구경이 아니라 오로지 케이블카 타기였기에 아쉬움이 더했다. 녀석은 케이블카에서 내리자마자 또 타자고 졸라대기 시작했다.
남편은 주머니에 든 돈을 만지작거리며 셈을 했다. 예정했던 대로 남산 팔각정 주변을 둘러본 뒤 아이들과 우동을 한그릇씩 먹고 나면 집에 돌아갈 차비 정도밖에 남지 않을 터였다.
일단은 말 잘 들으면 또 태워주겠다고 달래자 아들녀석은 환하게 웃는 얼굴로 얌전히 아빠의 손을 잡았다.
굵게 불어터진 우동 면을 멸치 국물에 말고 유부 몇조각을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지만 남산을 쏘다니다 먹은 늦은 점심은 행복의 맛이었고, 다섯 식구의 일요일 나들이는 평화롭게 끝나가고 있었다.
둘째녀석이 내려갈 때도 케이블카를 타야겠다고 고집을 부리기 전까지는.

남편은 남은 돈을 계산해보았으나 집에 돌아갈 버스비를 제외하면 솜사탕 하나를 사먹거나, 어린이용 반표를 끊을 수 있는 돈이 남을 뿐이었다. 한번 고집을 부리면 매를 맞고도 좀처럼 꺾이지 않는 둘째의 막무가내 성격을 잘 아는 그는 길바닥에서 큰소리로 아이를 혼내는 남부끄러운 광경을 연출하고 싶지도 않았고 기분 좋은 가족 나들이를 망치고 싶지도 않았으므로 아내와 의논 끝에 아들녀석만 케이블카에 태워 내려보내자고 결론을 내렸다.
아들 녀석에겐 꼼짝도 하지 말고 케이블카 내리는 곳에서 엄마아빠를 기다려야 한다고 신신당부를 했고, 케이블카 차장에게도 아이를 잘 간수해달라고 부탁을 한 뒤 부부는 그저 좋아라 손을 흔드는 아들을 배웅했다. 뒤이어 남은 두 아이를 하나씩 업고 안은 부부는 부지런히 뛰다시피 남산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허나 케이블카를 탔을 땐 눈깜짝할 새에 정상에 당도했으므로 동네 언덕쯤으로 어림짐작했던 남산 길은 막상 걸어보니 내려가도 내려가도 끝이 보이질 않았다. 둘째를 잃어버릴까봐 더럭 겁이난 젊은 부부는 부디 아들녀석이 케이블카 정류장에서 꼼짝않고 기다려주기를, 나쁜 마음을 먹은 누군가 데려가는 일은 없기를 기도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드디어 케이블카 승강장이 보여 길잃을 염려가 없게 되자 남편은 큰아이 손을 아내에게 쥐어주고는 홀로 먼저 승강장 건물로 달려갔다. 다행히 아들녀석은 잔뜩 겁먹은 얼굴에 눈물자국이 두 줄기 말라붙은 채로 얌전히 나무의자에 앉아 있었다. 멀고 먼 남산 길을 숨가쁘게 달려온 부모의 수고를 알 리 없는 녀석은 심통이 나서 제 아빠를 반기기는커녕 입술을 잔뜩 빼물고 눈을 흘겼다.
엄마는 금방일 줄 알았는데 걸어내려오려니 너무 멀어서 오래 걸렸다는 설명 끝에, 다음에도 또 케이블카 혼자 탈래? 라고 물으니 아이는 말없이 고개만 절레절레 흔들었다. 막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일을 겪기는 했지만, 다섯식구는 손에 손을 맞잡고 나란히 남산 입구 길을 내려오며 또 다음 나들이를 꿈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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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 케이블카가 수십년만에 새것으로 바뀌게 되었다는 뉴스를 보니 또 문득 떠올라, 우리 가족이 차를 타고 남산 옆을 지나간다거나 이야기 도중 남산이 언급될 때 늘 되풀이되던 어린시절의 추억을 적어보았다.
사실 나는 저 날을 기억하지 못하며, 전부 엄마 아빠한테 들어서 알게 된 이야기다. 나름 꽤나 놀랐을 법한 동생녀석도 그날의 기억을 갖고 있진 않는 듯하다.  
저 날 이후 나는 거의 30년쯤 뒤에야 비로소 다시 남산 케이블카를 타보았는데, 동생들은 어땠는지 모르겠다. 그들도 아이들 데리고 남산에 놀러갔단 이야기는 들어보았는데 케이블카 얘긴 없었던 걸 보면 안탔단 얘긴가? 자동차를 가져갔을 터이니 그랬음직도 하다.
어느해였나 송년모임에서 굳이 남산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가 야경을 보자던 후배의 주장에 촌스럽다고 툴툴거리긴 했지만, 안 그랬으면 새것으로 바뀌기 이전의 케이블카를 타볼 기회를 영영 놓쳤겠구나 싶어 새삼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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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비와 공주

투덜일기 2008. 12. 5. 16:28

왕비와 무수리가 사는 누추한 집엔 일주일에 한번씩 공주가 왕림한다.
각별한 보필과 우러름을 받는 것이 본능인 왕비와 공주.
그러나 서대문궁(?)엔 두분을 보필할 무수리가 하나 뿐이니, 다른 공간에서와 달리 그곳에선 각별한 관심과 보살핌을 선점하려는 할마마마와 공주마마의 세력다툼이 매번 불꽃을 튀긴다.
왕비와 무수리의 촌수는 1촌. 왕비와 공주 사이는 2촌, 공주와 고모 무수리의 촌수는 무려 3촌이다.
왕비는 그 점을 극구 강조하며 (가령, "할머니한테는 너보다 딸인 고모가 더 중요해! 그러니까 고모 고생시키지 마라!"라고 공격하심) 매번 공주 보필에 온몸을 다 바치는 고모 무수리의 행태를 못마땅해 하신다.
할마마마의 판에 박힌 잔소리를 들으면 어린 공주 또한 큰 눈을 더욱 크게 부라리며 "할머니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참견하지 마!"라고 반박한다.
무수리는 즉각 버릇없는 공주의 태도를 나무라며, 누가 뭐래도 할머니는 '우리 엄마'이니 까불지 말라고 쏘아주지만 어려서부터 할마마마와 라이벌 관계였던 공주는 무수리의 핀잔 쯤은 별로 아랑곳하지 않는다.

왕비의 존재도 중요하지만 사실 고모무수리에게 공주는 11년째 기쁨과 행복의 원천이기에 주변에서 아무리 손가락질을 해도 넘치는 애정을 주체할 수가 없다. 오죽하면 자기 자식보다 첫 조카가 더 예쁘다는 속설이 있겠나.
아무튼 공주가 왕림하는 날이면 무수리는 일찌감치 장을 봐다가 공주가 원하는 반찬을 정성스레 만들곤 하는데 공주는 생긴 것과 달리 입맛은 소박하여 요구하는 반찬이라는 것이 빨간고기(깻잎을 넣은 제육볶음을 의미), 명란젓, 날치알 넣은 달걀말이 정도다. '안심 스테이크'라든지 '생 바질을 넣은 토마토 모짜렐라 치즈 샐러드' 같은 건 정릉궁에 상주하는 왕실 요리사에게나 청해야함을 익히 알기 때문일 것이다. ^^

우스운 건 왕비에게 늘 특별히 드시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면 그런 거 없다고 대답하시면서 공주가 왕림하는 날 부산을 떨며 뭔가 특별요리를 만들면, 콩알 만한 조카딸 하나 먹이려고 뭘 그리 애쓰냐고 타박을 한다는 점이다. 물론 딸 무수리의 고생이 안타까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 만날 밥순이 노릇 하느라 손에 물 마를 날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왜 하필 공주 오는 날만 신경을 쓰시는지!
어젠 빨간고기 이외에도 공주가 좋아하는 고사리 나물을 볶으려고 왕비마마에게 손질을 부탁하였더니, 제사 때 나물 먹은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고사리는 뭣하러 사왔느냐고 구시렁거리셨다. 나물 중에서도 공주는 고사리나물을 제일 좋아하는데!
혹시라도 공주 위주의 상차림에 왕비마마가 삐치실까봐 일부러 생태찌개도 끓여바쳤건만
어제 밥상에서도 왕비와 공주는 배추쌈을 놓고 또 한판 힘겨루기를 했다.
"할머니는 애기 배추 먹지마! 작은 건 다 내 거야!"
"다 같이 먹는 거지, 네 것, 내 것이 어디 있어!"
"아니야, 애기 배추는 원래 나만 먹는 거야! 할머니는 큰 배추만 먹어!"
"너도 반씩 잘라 먹으면 되잖아!"

어차피 손바닥만한 크기의 쌈배추라 크고 작은 걸 다툴 일도 없었는데... 나 원 참. -_-;;
공주 안 보는 사이 얼른 앙증맞은 노란 배추를 집어드는 왕비의 손길을 보며 무수리는 속으로 킥킥킥 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누가 뭐래도 무수리에겐 첫번째 관심의 대상이어야 직성이 풀리는 왕비와 공주의 사소한 알력다툼은 과연 언제까지 이어질지 귀추가 주목된다. 왕비마마는 자꾸만 아이처럼 어려지지만, 공주는 나날이 생각이 깊어지고 어른스러워지고 있으니 언젠가는 공주도 무수리와 함께 할마마마를 깍듯이 보필할 날도 오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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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사 다음날

삶꾸러미 2008. 12. 1. 15:58
그날은 몹시 추웠다.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친구들과 설악산 콘도에 놀러갔다 밤늦게 돌아온 크리스마스 이브,
이상스레 음산하고 어두운 집을 엄마가 홀로 지키고 있었다.
낮에 할아버지가 길에서 쓰러지셔서 응급실로 옮겼지만 위중한 상태라는 이야기를 전하며 엄마는 병원에 가보겠다는 나에게 그냥 집에 있으라고 했다. 
안절부절 다가온 크리스마스 새벽에 결국 할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열명도 넘는 가족들이 응급실 밖을 지켰지만 할아버지의 갑작스런 임종을 지켜본 건 장손인 큰동생과 막내동생 뿐이라고 했다.

너무 갑작스러워 더욱 허망하고 슬펐던 할아버지의 마지막 가시는 길은 참 혹독하게도 추웠는데
13년이 흐른 뒤, 빨라진 음력 탓에 어젠 날씨가 너무 온화해 같은 날로 인정하기가 어려웠다.
온종일 기름내를 피우며 준비한 부침개와 전, 나물과 고기를 차려놓고 버글버글 모여든 가족들과 절을 올리며 이제 확실히 할아버지 기일은 슬퍼하는 날이 아니라 가족들의 즐거운 회합일임을 깨달았다.
이북식으로 절대 빠지면 안 되는 돼지고기 편육을 자르던 나도 다른 때보다 비계가 많아 부담스러워 보이는 부위가 딱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모양이라고 농담을 하고 있었다. 

제사 다음날이 피곤하고 뒷다리가 땡기는 후유증을 남기는 건 똑같지만
슬픔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은 노동은 확실히 여유롭다.
어른들 얘기로는 3년은 지나야 제삿날이 돌아와도 서러운 눈물이 나지 않는다고 하는데
3년만에 슬픔을 이기는 건 너무 매몰찬 것 같다.
언제부터 할아버지, 할머니 기일에 당신들을 추억하면서도 눈물을 비치지 않게 되었는지 그것도 벌써 기억이 나질 않는 걸 보면 확실히 인간은 망각의 동물인데 앞으로 몇년 더 지나면 아버지의 추억도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그건 또 미리 서글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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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세상

삶꾸러미 2008. 11. 28. 16:37

인간관계의 6단계라나 뭐라나 해서,  여섯 단계만 건너면 세상사람들과 다 연결되어 있다는 인간관계망의 협소함을 토로하는 이론을 누구나 들은 적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세상 살다보면 뜻밖의 곳에서 통성명을 하다 두어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을 만나게 되는 일은 흔하고 특히 좁은 출판계에선 세 다리까지 건널 것도 없이 두번 정도만 관계를 건너뛰면 정보를 입수할 수가 있다.

그런데 또 한번 좁은 세상을 실감하는 일이 생겼다!
결혼이 늦어져(사실 크게 늦은 것도 아니건만) 우리 세째 고모의 애를 태우던 사촌동생 녀석이 결혼하려고
날을 잡았다는데 아 글쎄 그 아가씨가 나를 안단다. 내 사진도 봤단다. -_-;;
서로 대면한 적은 없어도 학연의 고리로 엮였으니 후배가 선배 이름 정도 아는 것이야 당연하겠지만
나는 그 사람을 모르는 상태에서 익히 나를 안다는 사촌동생의 신부감이 과연 나에 대해 어떤 이야기를 전해들었을지 궁금도 하고(부디 모두 칭찬이길! *.*), 다 늙어 공부하는 주제에 퍽이나 설레발을 치고 다닌 것 같아 괜히 <사돈댁>에 책 잡힐 빌미를 제공한 건 아닌지 돌연 뜨악해졌다.
학력이나 지식의 여부와 상관없이 집단이 커지면 말들이 많아지고 취향에 따라 파벌이 생기며, 좋은 이야기도 오래 입에 오르내리게 되면 변질되기 마련이 아니던가. 어딜 가나 쉽게 적을 만드는 유형은 아니지만 대학원에서 날 마뜩찮게 여긴 인간들도 분명 있었을 텐데! ^^

암튼 잘하면 사촌동생의 결혼식에서 대학원 후배들을 대거 만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재밌기도 하고 세상살이에 좀 더 신중하고 조심해야겠다는 생각도 든다.
세상 참 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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