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07.02.01 내력 2
  2. 2007.01.22 멸치 생각 16
  3. 2006.11.21 가족의 굴레 5
  4. 2006.10.17 신데렐라 귀가시간 4

내력

추억주머니 2007. 2. 1. 23:36
찍어놓은 붕어빵처럼 똑같이 닮은 모녀나 모자, 부녀, 부자를 보면
유전자의 힘은 참 무섭고도 놀라운 것이로구나 느끼게 되는데
단순히 생김새뿐만 아니라 어느 순간 가족간에 하는 행동까지 똑같다는 걸 깨닫게 될 때는,
시대와 삶의 질이 달라진 듯해도 결국 인생은 핏줄을 매개로 돌고 도는 것인가 보다는 생각까지 든다.
다른 집은 어떨지 몰라도 적어도 우리 집은 그렇다는 얘기다.
생김새는 별로 집안 내력 따질 만큼 닮은꼴이 아닌데(내가 키 작은 거랑 눈 나쁜 거 말고 다른 생김새도 아부질 닮았다는 말을 나는 아직도 믿을 수가 없다!) 습관이나 행동은 어느 순간 놀랍도록 세대간의 동일함이 느껴진다.
예를 들어....


사례 1)
우리 친할머니는 나른한 오후쯤 가만히 앉아서 꾸벅꾸벅 조시는 일이 많았는데
베개 꺼내드리고 좀 누워 주무시라고 하면 한사코
"나 안 졸리다"고 손사래를 치셨고, 억지로 이불이라도 덮어드리면 곧장 박차고 일어나 집안일을 하셨다.

나이 드니 정말로 잠이 준다고 투덜대시는 울 아부지,
나른한 오후가 되면 꼭 TV 앞 소파에 비스듬히 앉아 꾸벅꾸벅 조시는데
요즘처럼 추운 날엔 감기 걸리니 잠깐이라도 방에 들어가서 주무시라고 내가 잔소리를 하면
이상하게도 방에 들어가면 잠이 달아난단다.
꾸벅꾸벅 졸다가 정작 누우면 잠이 달아나는 것이 노인의 전형적인 특징이라고 여길 수도 없는 것이, 울 엄마는 똑같은 상황에서 방으로 자리를 옮기라고 하면 아예 코까지 드르렁드르렁 골면서 낮잠을 주무시기 때문이다.
할머니와 아버지만의 모전자전이란 말인가?

사례 2)
우리 친할아버지는 그야말로 '한량의 삶'을 사신 분이라 할머니가 고생을 무던히도 하셨고, 장남인 울 아부지는 대단한 효자였음에도 당신 아버지의 삶의 방식은 몹시 못마땅해 하셨다.
할아버지는 '돈벌이'와는 상관없는 재주가 참 많으신 분이어서
서예, 그림, 한시(쓰기 뿐만 아니라 "처엉~~~~~산~~~~~~~~~~~~~~~~~~~이 어쩌고.."하는 한시 읊는 솜씨도 참 구성지셨다), 애완 조류 키우기, 화분 가꾸기 같은 일에 탁월하셨다.
특히 이웃에서 죽어가는 화분을 버리려고 내놓거나 할아버지께 맡기면 기필코 살려내는 '신의 손'에 가까웠다. *.* (그 재능이 나에겐 이어지지 않음이 안타깝다 ㅠ.ㅠ)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작은 화분에 키우는 무화과 나무에서 해마다 토실토실한 무화과를 '수확'해 우리도 맛을 볼 수 있게 하실 정도였으니까..

반면에 우리집은 늘 화분이 죽어나가는 집이었다.
아부지가 직장생활 하시는 동안에 받아온 값비싼 난 화분이나 분재는 몇달을 넘기지 못하고 빈 화분만 남겨지기 일쑤였고, 정년퇴직 직후 선물받은 각종 화분도 다 죽였을 거다.
그래서 역시 울 아부지는 오종종한 생김새부터 할아버지(옛날 분치고는 키도 크고 멋지게 생기셨다!)랑 닮은 부분이 없구나 생각했는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고...
아부지가 본격적으로 화분에 관심을 가지면서 하나 둘 씩 집에 초록 식물을 늘려가더니, 해마다 한식 때 성묘 다녀오는 길에 사온 화분들이 나날이 번창해 우거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간 죽어나간 화분은 전적으로 엄마와 내 "악의 포스" 때문이었음 증명하듯,
아부지는 내 작업실에서 죽어가던 산세베리아도 살려내는 기염을 토했다.
그러고는 거실 한 귀퉁이에 화분들을 "모셔놓고" 손주들이 뛰어다니다 잎이라도 다칠라치면 버럭~ 화를 내셨던 울 할아버지처럼, 아부지도 거실 한 귀퉁이에 줄지어 세워놓고 달력에 날짜 표시해가며 물주고 키우는 화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다 조카들이 놀러오면 녀석들이 정신없이 뛰어다니다 혹시 애지중지하던 화분이라도 쓰러뜨릴까봐 전전긍긍하신다. -_-;;
올 한식엔 또 새 화분을 몇개나 사자고 하실까...

사례 3)
홍시 얘기를 할 때도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유사함을 적은 적이 있는데,
참외도 마찬가지다.
외할머니는 참외를 참으로 좋아하셨고, 외출했다 돌아오셨거나 야외로 소풍 같은 걸 갔을 때 참외를 드시고 싶은데 과도가 빨리 준비되지 않거나 여의치 않을 때는
그냥 손으로 참외를 퍽~ 쳐서 깨뜨려 껍질째 드시기도 했더랬다.
일제 강점기에 쬐끄만 일본 순사들이 '6척 장신'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는 우리 외할머니가 그렇게 크고 긴 손으로 참외를 쩍 잘라 나에게도 한 쪽 주시면, 난 그게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

과일을 깎아 대령하는 걸 차마 못 기다릴 만큼 참외에 대한 탐닉이 강한 건 우리 엄마도 마찬가지다. ^^;;
참외는 내가 별로 좋아하는 과일도 아니지만 (먹게 되면 속 다 파내고 먹는데, 울 엄만 그럼 무슨 맛이냐!고 막 퉁박이다), 내가 껍질 벗긴 참외를 작게 자르느라 뜸을 들이면, 대뜸 "난 자르지 말고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셨더랬다. ㅋㅋ
그나마 당뇨 발병 후엔 하나를 다 통째로 내놓으란 소린 못하고, 절반만 통째로 내놓으라고 하시며 "역시 참외는 손으로 먹어야 제맛"이라고 중얼거린다.

참외 탐닉의 내력은 이상하게도 딸인 나에게 이어진 것이 아니라
큰 동생에게 흘러갔고, 그 녀석도 외할머니, 엄마 닮아서 참외를 몹시 좋아하는데
내가 예쁘게 과일 깍는답시고 참외를 조각조각 반달썰기하면 막 화를 낸다.
먹을 게 없다나 뭐라나... -_-;;
그러면서 자기도 통째로 반쪽 내놓으라고 하는 게 보통이다.
그래서 여름 참외철이 되서 큰동생네가 놀러오면 장유유서고 뭐고 없다.
얼른 참외를 깎아 울 엄마 반쪽, 큰 동생놈 반쪽 먼저 손에 쥐어주고
그 다음에 먹기 좋게 한 접시 잘라 아부지께 드리는 순이다. ㅋㅋ
 
사례 4)
무슨 일이든 코앞에 닥쳐야 하는 버릇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습관이라고 할 수 있겠지만, 다들 방학숙제는 어떠했는지 모르겠다.
암튼 우리 집 삼남매는 어린 시절 방학숙제마저도 개학이 코앞으로 다가와야만,
그것도 급기야 부모님께 손바닥이나 종아리를 맞고 혼이 난 다음에야 전전긍긍 밤샘작업으로 개학 전날까지 가까스로 마치는 부류였다. ㅜ.ㅡ;;
그런데 문제는 방학 내내 배짱좋게 놀다가 해가는 숙제이니 '대충대충' 시늉만 하면 좋으련만 빌어먹을 소심함과 완벽주의 탓인지 이왕 하는 거 '제대로' 해야 직성이 풀리는 거다.
한달이나 두달치 일기를 한꺼번에 쓰는 주제에, 날씨 좀 틀리면 어떻다고 지난 신문을 죄다 뒤져 일일이 확인하는 식이니 시간이 오죽 더 많이 걸릴까.
내 경우는 그림이나 글짓기, 만들기 숙제도 심혈을 기울여야 직성이 풀렸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홀로 눈물을 흘리면서도 악착같이 숙제를 다 해갔던 것 같다. ㅎㅎㅎ

2월 1일 개학을 하루 앞둔 어젯밤, 조카 정민공주네가 집으로 쳐들어(!) 왔다는 전화가 왔다.
ㅋㅋㅋ 역시나 방학숙제 때문이었다.
방패연과 꼬리연을 만들어 가야하는데 할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했고,
동시를 지어 꾸미는 숙제엔 컬러 프린터가 필요하다는 것이 그들의 이유였다.
일기는 그나마 미리미리 다 써두었으니, 어쩌면 제 아빠나 삼촌, 고모보다 훨씬 훌륭한 조카였지만, 동시 꾸미기 숙제를 하면서 드러난 성격은 놀랍게도 판에 박은듯이 고모와 똑같았다.
이미 다 지어온 동시를 세 편이나 한글 프로그램에 앉히고
각종 그림으로 시화를 꾸미는 것이 숙제인 모양인데, 정민공주는 한글97 그리기 마당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없으면 절대로 대충 아무거나 선택하지 않았고....
인터넷 이미지를 다 뒤져서라도 결국 마음에 드는 그림을 찾아냈다.
울 올케의 짐작으론 '타이핑만 하면' 되니 금세 끝날 숙제였지만, 실제론 동시 한 편에 시간이 30분도 더 걸렸고, 결국 조카는 시간도 없는데 꾸물거린다는 제 엄마의 꾸지람과 호통에 결국 눈물을 보였으며, 공주의 방학숙제는 밤 11시가 다 되어 끝이 났다. *.*

오밤중에 숙제를 끝내놓고도 고모랑 더 놀다 가지 못해 안달하는 조카들을 내쫓다시피
집으로 보낸 뒤, 엄마가 한 말씀 하셨다.
"쯧쯧쯧.. 어떻게 방학숙제를 개학 전날까지 밤새다시피 해가는 것까지 집안 내력이라니..."

내가 <내력>이란 제목으로 포스팅을 하게 된 이유였다. ㅎㅎ
(사례 하나 추가했다. 이것들 말고도 더 많지만.. 너무 길어지면 지루할 테니까..^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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멸치 생각

식탐보고서 2007. 1. 22. 20:16
도시락 반찬으로 멸치를 싸와서 먹고 보니
피식 웃음이 난다.

사람마다 집집마다 기피하는 음식, 먹지 않는 반찬이 있기 마련인데
이제는 거의 몬도가네 수준으로 못 먹는 것이 없는 내가 그닥 즐기지 않는 몇 안되는 반찬엔 원래 '멸치'가 속했다.
그건 워낙 '편식대마왕'이란 별명에 걸맞게 가리는 것도 많고 비린것을 몹시도 싫어하시는 울 아부지의 영향이었다.
온갖 날것은 물론이고, 익힌 등푸른 생선마저도 못 먹는 것이야 그러려니 하지만, 이북에서 피난 내려와 바닷가인 부산에서 고등학교때까지 다니셨다는 분이 쬐끄만 멸치까지 못 먹는 것은 좀 이상하다 싶지 않은가?
하지만, 멸치배가 들어와 덕장에 삶은 멸치를 마구 널어 말리고 있는 동네 입구를 지나다 보면, 마음 좋은 아줌마 아저씨들이 집에 가서 반찬 해먹으라고 어린 우리 아버지한테 멸치를 한 보따리씩 싸주셨다는데, 8남매 장남 답게 살림살이를 염려한 아버지는 동생들이라도 먹이려고 그 멸치를 집까지 가져가며 비린내 때문에 숨조차 쉴 수가 없었다고 했다.

암튼 멸치와 등푸른 생선의 비린내를 못견뎌하시는 아부지 때문에
우리 엄마는 젊은 시절 아부지가 안 계실 때만 그런 '비린' 반찬을 해먹었는데,
지금이야 아부지의 인내심과 비례하여 엄마와 내 목소리가 무진장 커졌으므로 당당히 등푸른 생선을 굽거나 조려먹기도 하고, 멸치볶음을 상 위에 올려놓지만,
예전엔 아예 울 엄마가 그런 반찬거리를 사들일 엄두도 내지 못했던 때가 있었다고 했다.
해먹고 난 뒤의 비린내마저도 못 견뎌, 아버지가 추운 겨울에도 냄새 다 빠질 때까지 온통 방문과 창문을 열어놓고 시위를 벌이는 통에 '차라리 안먹고 만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나.

게다가 YS가 집권한 뒤였던가?
YS 아버지가 거제도에서 멸치 사업을 한다나 어쨌다나 해서 멸치값이 엄청나게 올랐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멸치 한 상자에 십만원도 넘는 가격표가 붙어 백화점에 진열되어 있는 걸 보며, 우리집은 멸치를 안먹으니 참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암튼 그렇게 특별한 사정상 자주 안 먹다 보니 멸치는 우리 삼남매 모두 별로 좋아하지 않는 반찬으로 전락하고 말았다가, 갱년기 이후 여성의 골다공증 문제를 예방하려면 칼슘을 꾸준히 먹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자주 방송을 타면서 슬그머니 우리집에도 멸치 반찬이 재등장한 것 같다.

물론 그런 뒤에도 나는 멸치 반찬에 그리 손이 가지 않았다.
어린 시절 엄마를 도와  중간 크기 정도의 멸치 내장을 따내면서 꼭 '멸치 똥을 딴다'고 표현했는데, 아버지의 편견을 그대로 답습하여 무조건 손에 배는 그 비린내가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덩달아 멸치를 싫어했던 남동생들이 자식들에게 모범을 보여야 하는 아버지가 되고,
나도 덩달아 훌륭한 역할 모델 노릇을 하고 싶은 고모가 되면서
'고모는 아무거나 잘 먹는 어린이가 제일 이뻐!'라고 조카들에게 언제나 큰소리를 치려면
싫어하는 익힌(!) 당근도, 멸치 볶음도 퍽퍽 집어먹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 것이다.

물론 요즘도 다른 반찬과 달리 멸치 볶음은 '절대로' 내가 손수 만들 수 없는 음식이라고 우기고는 있으며, 조리법을 아무리 똑같이 해도 본질적인 질이 떨어지기 때문인지, 보관이 잘못된 때문인지 비린내가 심히 나는 멸치 볶음은 여전히 씩씩하게 먹어줄 수가 없지만 ^^;;
적당한 크기의 잔멸치를 바삭하고 달달하게 볶은 멸치 반찬은 이제 나도 맛을 알고 즐기게 된 것 같다.

돌이켜보면 예전엔 죽어도 못 먹겠다 생각했다가 이제는 탐닉하게 된 음식이 한둘이 아니다.

- 무지막지 뼈다귀가 무서워 보였던 감자탕: 20살 때까지만 해도 이런 음식이 있다는 것도 몰랐고, 선배들이 감자탕집 끌고가면 이맛살 찌푸리며 '무식한' 음식도 다 있다 여겼는데 ^^;;
이제는 사먹는 것은 물론이고 가끔 정육점에서 돼지 등뼈 사다가 내 손으로 집에서도 끓여먹는다! ㅋㅋ

- 는질는질 씹히는 느낌이 소름끼쳐서 못 먹던 생선회: 맨날 회사 회식으로 횟집만 가는데 혼자 곁다리 반찬과 값싼 오징어회만 먹는 게 억울해 조금씩 시도하다  이제는 없어서 못 먹지 아마.

- 꿈툴꿈틀 애벌레처럼 보였던 산낙지: 잔인하게 느껴지지만 어쩔 수 없다. ㅜ.ㅜ;; 참기름속에서 허우적대며 놈들의 힘이 살짝 빠지기를 기다렸다가 초고추장에 찍어먹는 그 맛이란.. 흑..

- 코가 핑 뚫리는 암모니아 냄새의 삭힌 홍어: 사실 지금도 무진장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삭힌 홍어 파는 식당에 오래 앉아 있지도 못했던 예전에 비하면 ^^ 지금은 그 오묘한 맛을 좀 알 것 같다.

- 특유의 냄새를 좀체 참을 수 없던 양고기: 양고기 역시 나의 기호식품엔 들지 못하지만, 양고기 굽는 옆에서 애써 욕지기를 참느라 눈물을 흘리던 때도 있었는데;;; ㅋㅋ 지금은 그럭저럭 잘 먹는 편이다.

특별한 이유 없이 파피는 콩국수를 못 먹겠다고 하고 ^^;;
지다님과 벨로는 미더덕을 먹어본 적도 없으며
키드님은 미더덕을 싫어한다는 걸 보면

이상한 혐오식품을 제외하곤 못 먹는 음식이 이제 달랑 셋--보신탕, 추어탕, 곱창(보신탕은 그냥 싫고, 추어탕과 곱창은 수차례 노력했음에도 극복할 수 없는 맛이 느껴진다)--밖에 남지 않은 나는 그야말로 엄청난 탐식가인듯.
어른이 된 뒤로 주욱 변화 및 발전(?)해온 나의 식생활을 따져볼 때
결국 식성과 식탐은 개인의 사회화 과정과도 유사하지 않나 싶다.
사회적 관습이나 전통의 옳고 그름을 떠나, 개개인이 그걸 얼마나 받아들이고 심취하느냐의 정도 차이랄까.

죽도록 싫어하다가 없어서 못먹게 된 음식도 있듯
앞으론 몹시 좋아했는데 죽도록 싫어하게 될 음식도 생기겠지.
내 식탐의 역사가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새삼 궁금하다. ^^;;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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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굴레

삶꾸러미 2006. 11. 21. 01:30

경제 자립도가 떨어지는 미혼의 딸이 집에 얹혀 살면서 겪는
미묘한 불편함을 토로한 파피루스의 글에 몹시 공감하며
나도 몇자 적어볼까.

우리 엄마가 수십 년째 수시로 아프긴 했지만
정말이지 나는 가족이 굴레라는 생각을 아주 최근까지는 전혀 해보지 않았더랬다.
오히려 가족은 내가 언제든 기댈 수 있고 돌아가 안길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비교적 늦게 꾸기 시작한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날개 같은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맏딸인 내 의견을 대단히 존중해주셨고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은 두 남동생들도 다른 집과 달리 누나에게 고분고분했다.
유독 의가 좋은 우리 삼남매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병든 엄마를 함께 지켜봐온 동병상련과  이해 때문일 거라고 언젠가 적어놓은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결혼해 분가한 두 동생들과 올케들, 심지어 조카들까지도 나에겐 분명 큰힘이 되는 재산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차피 부모님과 상의를 하더라도 거의 내쪽에서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편이었으므로,
두세 번 직장을 옮길 때도, 결국 아예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마뜩찮아하긴 하셨지만 큰 반대는 하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강요는 없었던 셈이다.
부모님의 집요한 강요로 몇년 새에 선을 백번쯤 보다가 결국 떠밀리듯 '아무나'하고 결혼을 선택한 지인들도 없지 않으니, 그런 점에서도 우리 부모님에겐 감사할 일이다.

요즘에도 크고작은 집안 대소사엔 어김없이 내 의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데다
부모님이 연로해지시면서 아직도 경제적으로는 분명 내가 부모님께 얹혀살고 있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어느덧 새로운 변화는 무조건 겁부터 내시고, 익숙한 습관이 달라지는 건 용납이 안되며
사소한 소홀함에도 노여움부터 타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어느새 이렇게 늙으셨나 가슴이 찡하고 속이 상한데,
또 동시에 나로선 마구 짜증이 나는 걸 어쩔 도리가 없다.
융통성 많고 쿨~하던 젊은 사고방식의 우리 부모님은 어디로 갔나 싶어서.

부모 눈엔 장성한 자식도 늘 어리고 철없고 안쓰럽고 걱정스러운 존재라고는 하지만
특히 우리 부모님은 수입도, 일감도 부정기적이고 밤샘을 밥먹듯 해야 하는 나의 직업을 몹시 안쓰러워하다 못해 별볼일 없다 여기시는 듯하다.
워낙 책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시긴 하지만 ^^;;
책이라는 결과물과 '소정의' 번역료로 주어지는 내 노동에 대한 대가가 마땅찮으신 거다.
하긴.. 이 나라에선 번역으로 밥 벌어먹기가 원래 어려운 일이긴 하다.
좁아터진 출판 시장에서 점점 책을 읽는 인구는 줄어드는 판국이니 번역료가 매년 오르는 건 고사하고, 최소한 물가 수준에 맞춰 인상되길 바라는 것도 어려우니
소박한 성취감과 중뿔난 명예욕이 없다면 동년배 월급쟁이들 연봉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입에 만족하며 살 수 없는 직업이 바로 번역이니까.

그렇다보니,
난 늘 가난한 딸로 낙인이 박혀 있는데... ^^;;
사실 욕심을 부려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면 충분히 가난하지 않은 번역가로 살 수 있는데도 내가 맡고 있는 가족의 짐 때문에 그러지를 못한다는 게 문제다.
올빼미 생활을 탈피해 남들 일할 때 능률 높여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장만한 작업실도
한달에 절반은 거의 비워두어야 하고, 그만큼 일 할 시간을 손해보는 이유는
분명 병든 엄마를 곁에서 지켜야 하는 날들과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소한 집안일,
반찬걱정 따위에 드는 소모적인 에너지 때문이다.

언제나 착한 딸노릇을 자처하던 나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이젠 좀 지친다.
일주일에 한 두번은 가사도우미를 들여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지옥'에서 좀 벗어나고 싶고
병든 엄마 걱정 없이 아무 때나 마음 내킬 때 여행도 떠나고 싶고
결혼이 아닌 한 절대 독립은 안된다는 원칙을 고수하시는 부모님을 '배신'하고
독립을 꿈꾸고 싶다.

집에도 컴퓨터가 있는데도 굳이 오후 늦게라도 작업실엘 나가 밤늦도록 일하며,
편히 숨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느끼면서도 마음이 늘 편하지만은 않다.
일하는 시간이 자유로운 늙은 딸이 가능하면 당신들과 집에서 많이 '놀아주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이 집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좀 여유롭게 친구들이라도 만나고 돌아다닐라치면 두 분이 어찌나 섭섭해하시는지!
신데렐라 귀가시간에 더하야 이젠 아예 놀러 나갈 때마다 죄책감을 들게 만드신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 있다 해도 부루퉁하고 무뚝뚝한 딸답게 딱히 즐겁게 놀아드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마 전 만난 친구는 가족 때문에 지친다는 나에게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고 핀잔을 주었다.
남들은 20대에 이미 깨닫는 거라나.

하지만 가족은 나에게 굴레이면서 여전히 날개이기도 한다는 걸 확신한다.
그렇기에 떨치고 떠날 생각과 잡힌 발목의 아픔을 동시에 느끼는 것일 테고.

살아갈수록 참... 가족은 어렵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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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피루스의 글엔가.. 해리님이 덧붙인 댓글에서 본 신데렐라 귀가시간 얘기에
문득 자극 받아 하소연이나 해볼까..

나이 40에 아직도 부모님이 정한 통근시간에 구애를 받는다고 하면
다들 기가 막히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러면서 "부모는 말이야, 길들이기 나름이야. 니가 길을 잘못 들인 거지!"라고 나무라기 일쑤다.

하지만 비딱투덜이의 삶을 추구하는 내가 그런 길들이기 과정의 몸부림을 시도해보지 않았을 리가 없지 않은가.
시국이 하수상하여 걸핏하면 시위물결과 최루탄이 온 캠퍼스를 뒤덮던 시절에 들어간 대학 신입생 초창기 땐 심지어 '해지는 시간'이 통금이었다. ㅜ.ㅜ
여름엔 얼추 8시까지도 해가 길어지지만
겨울엔 5시반만 돼도 어둑어둑해지는데 그 시간 전에 집에 오라니!

엄마 몰래 나랑 단둘이 영화도 보고 데이트도 하고 (그럴 땐 당연히 통금 시간 해제!), 다 큰 딸이 다리 아프다 그러면 다리도 선뜻 주물러주시고, 집안 청소는 걸레질까지 온통 도맡아 하시는 등, 겉으로는 제법 자유진보주의자의 탈(!)을 쓰신 우리 아버지는 정치를 포함한 일부 분야에선 그 누구도 말릴 수 없는 보수주의 가부장으로 돌변하시는데...

그게 가장 표면적으로 두드러진 것이 큰딸의 통금시간이었다.
물론 외박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것. (대신 남의 집 딸들은 우리 집에 와서 외박을 해도 무방했다.)
통금시간을 어긴다고 해서 내가 물리적인 체벌을 받는다거나 감금을 당한다거나 하는 건 물론 아니었지만, 우리집안 사람들 특유의 '화나면 말 안하기'의 효과는 물리적인 체벌보다 그 파장이 훨씬 컸고, 당장 주급으로 받던 용돈을 달라는 말도 걸 수가 없으니 미칠 노릇이었다.

하지만 나는 야금야금 반항을 시작함과 동시에
일단 대학 친구들을 아부지한테 데려가 얼굴을 익혀드림으로써
(당시 내가 다니던 대학의 교직원이셨던 아부지는 학교에 시위라도 벌어지면, 혹시 당신 딸도 그 '뻘건' 물결에 휩쓸리지 않았는지 일부러 순시에 나섰으므로, 그걸 잘 알고 있는 나는 우연을 가장하여 수시로 친구들과 나의 '안전함'을 아부지한테 보여준 뒤, 뒤늦게 물결에 동참했다. 물론 뭐 주로 수업거부, 시험거부 뭐 이딴 이슈에 더 팔려서 ㅡ.ㅡ;;)  
하 수상한 바깥 세상에도 금지옥엽 고명딸을 믿고 맡겨도 좋을 이들이 있다는 걸 강조했다.
(다행히 우리 과엔 남들보다 늦게 입학해 나보다 6살이나 많은 언니가 동급생이었는데, 그 언니에 대한 울 아부지의 신뢰가 대단하여, 1학년 2학기 때는 단식투쟁 따위의 극단적인 반발 없이 엠티도 갈 수 있었다!)

해가 거듭될수록 통금시간은 점점 연장되어 나도 남들처럼 음주가무를 즐길 수도 있게 됐고
4학년 후반부터 이미 사회인이 된 뒤로는 까짓거 용돈 때문에 반항의 수위를 조절해야 하는 필요도 없어졌지만, 아무리 반항을 해도 자정으로 확정된 통금시간 자체를 없앨 순 없었다.

직장생활을 하게 된 뒤로는 '회식'이라는 아주 훌륭한 빌미가 있어 거나하게 술에 취해서도 당당하게 집에 들어갈 수 있었고, 화목한 조직생활을 그 무엇보다 중시하시는 아부지도 '회식'이라는 핑계 앞에선 딱히 트집을 잡아 금주를 명하거나 회사를 관두라거나 하진 않으셨다.
속으로 쾌재를 부른 나는 남들이 얘기하는 "부모님 길들이기 체제"에 돌입해
어울리지도 않는 신데렐라 딱지를 떼어보겠다고 갖은 노력을 기울였다.
직장에서 굳이 강요하지도 않는 회식자리의 2차, 3차 자리까지 죄다 쫓아다녔고
너무 늦어지겠다 싶으면 슬쩍 집에 전화를 넣어 도무지 자리를 빠져나갈 수가 없으니 먼저 주무시라고 부탁을 했다.
물론 아부지는 마구 역정을 내시며 그냥 도망쳐오라고, 택시비 없으면 큰길에 나가 기다릴 터이니 당장 오라고 난리를 치셨지만, 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새벽까지 버텼다.
(어린 사람들은 모르겠으나 당시엔 휴대폰 따위 없었다! ㅋㅋ 삐삐도 상당히 나중에야 생겼던 것으로 생각됨.. 헐... 이래서 측근들과 마구 세대차이 나주시고;;; )

그.러.나...
얼큰하게 취해 열쇠를 쩔그럭거리고 현관문을 들어선 순간 나는 자지러지게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거실 입구에 떡 하니 서 있는 검은 그림자.
별로 크지도 않은 우리 아버지의 키가 그땐 장승만큼이나 커보였고, 얼핏 보면 저승사자 같기도 했다. ㅠ.ㅠ 물론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싸늘하게 나를 노려보며, 현관에서 미처 신발도 벗지 못하고 망연자실 서 있는 나를 얼어붙게 만드는 울 아부지의 기술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몇분간 그런 대치상황을 벌이고 있거나, 약간 혀 꼬인 소리로 내가 말이라도 붙일라 치면 아부지는 차갑게 "실망이다" 따위의 촌철살인으로  나를 넉다운 시켰다. ㅠ.ㅠ

새벽 3시건, 4시건 시간을 불문하고 자식이 귀가할 때까지는 절대로 잠을 자지 않고 기다리는 우리 아부지의 무서운 집념은 때론 큰길까지 뻗치기도 했고
살짝 취해 공연히 기분 좋아 흥얼거리며 생새벽에 택시에서 내린 내 앞에 문득 나타나는 우리 아버지의 모습은 취기를 순식간에 날려버리기에 충분했다.

왜 그렇게 딸을 못 믿느냐고 항변하면 (여러가지 면에서 나는 그간 믿음직한 큰딸이었고 그건 부모님 포함 친척들까지 인정하는 부분이었다!)
울 아부진 '너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을 못 믿는 거'라고 하셨다.
그리고 그 말을 반증하듯, 주기적으로 아녀자 피습사건이나 납치, 강간 따위의 사건이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젠장!

그렇게 통금시간을 둘러싼 부녀간의 줄다리기가 이어지던 와중에 결정적으로 나의 패배를 선언하게 된 계기는, 그간 심정적으로 무던히 딸을 지원해주던 우리 엄마의 와병이었다.
몇년에 한번씩 아주 잠깐씩만 찾아오던 엄마의 우울증은 언제부턴가
거의 해를 거르지 않았고, 우울증의 첫 증세는 무엇보다 불면이었는데
내 귀가시간이 좀 늦어질라치면, 예전엔 아부지가 제 아무리 안달을 하셔도 염려없이 먼저 주무시던 엄마까지 동참해 나란히 어두운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부모님을 못본 체 하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그렇게...
언제 어떻게 찾아올지 모르는 우리 엄마의 불면과 우울증이라는 효과적인, 참으로 서글픈 족쇄 때문에 나의 신데렐라 생활은 아직도 이어지고 있고,
가끔 반항기가 동하면 지금도 통금시간 12시를 살짝 넘기는 일탈을 벌이기도 하지만, 그러면서도 늘 엄마 걱정에 내 마음 역시 조마조마하기 때문에 어렸을 때처럼 금기를 저지른다는 짜릿함이나 별 재미를 느끼지 못한다. ㅡ.ㅡ;;

그리고 늙어가는 딸에 대한 귀가시간 제한을 여전히 고수하시는 이유가
정말로 딸에 대한 불신보다는 무서운 이 세상에 대한 불신이라는 걸 나도 잘 알고 있다.
가끔 음주 모임 때문에 귀가가 늦어지는 아부지를 기다리며, 시간이 많이 늦어지면
이제 할아버지가 되어버린 울 아부지가 술김에 잠들었다가 혹시 아리랑치기 따위를 당하시는 건 아닌지 별별 망측한 상상을 다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니 말이다.

늘 투덜거리면서도 사실 부모님 품안에서 캥거루족으로 살아가며 온간 혜택을 누리고 있는 게 사실인데, 혹시라도 능력을 키워 독립하는 그날이 오면 드디어 통금시간 따위 없어졌다고 통쾌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치만 그땐 또 딱히 통금시간을 넘겨 곤드레만드레 음주를 즐기거나
시간 가는줄 모르고 밤새 정담을 이어갈 지인들이 곁에 없어서 일찍일찍 집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건 아닐지...

생각해보면 요즘엔 정말 술친구 청하는 이들이 줄었다.
술 안마시는 문화가 자리잡아 가고 있다는 얘긴데...
쓸데없이 감정이 넘쳐나고 마음의 빗장이 스스르 풀리긴 하지만, 나는 알콜의 힘을 빌어서라도 가끔 관대해지고 온 세상이 잠깐이나마 근사해보이고 술자리 건너편에 앉은 이가 몹시 예뻐 보이는 순간을 참 좋아하는 인간이다.
이렇게 쓰고 보니 마치 대단한 술꾼 같군.. 예전엔 정말로 제법 대단한 술꾼이었는데.. 이젠 맥주 한두 병에 알딸딸해지고 만다. 늙기도 설워라커든... ㅜ.ㅡ;;

하여간 이젠 나도 익숙해져버린 신데렐라 귀가시간...
굳은살처럼 내 몸의 일부가 되어버려서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판단도 잘 안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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