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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문 스크랩

추억주머니 2007. 11. 16. 18:10
오래 전, 할아버지댁엘 가면 안방 아랫목의 할아버지 자리 옆에 늘 신문더미가 쌓여 있었다.
폐품  수집하는 날 학교에 내기 좋게 접어놓은 것도 아니고 신문 크기 그대로 몇달씩 쌓여있기 일쑤인
신문더미를 식구들이 돌아가며 타박을 해도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내 기억으론 신문을 두 종류나 보셨는데 (물론 둘 다 보수적인 논조의 일간지였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쓰시고도 큼지막한 둥근 돋보기를 손에 들고 앞장부터 맨끝까지 광고 포함 모든 기사를
훑으셨다.
문제는 그렇게 신문을 "방안에" 몇달씩 쌓아두었다가, 너무 많아지면 다락으로 옮겨 놓았다가
1년쯤은 지나야 폐지로 팔거나 폐품으로 내도록 허락을 해주셨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건 바로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신문 스크랩.

할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유용한' 정보를 대단히 신뢰하셨고
삶의 지혜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쓸만하겠다 싶은 기사는 반드시 오려두었다가
'해당 인물'에게 건네며 당장 당신 눈앞에서 읽게 시킨 뒤 실천을 강요하셨다.

예를 들어 환절기에 "감기 예방법"이라는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막내 고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그대로 하라고 명하시거나,
"학계에까지 침투된 고정간첩 비상" 따위의 기사는 학교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에게 건네며 주의를 주시는 것이었다.
처음 우리는 시큰둥하게 오린 기사를 받아들고 읽은 뒤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는 오린 신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나중에 그 기사를 내놓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므로 언제부턴가 나는 아예 할아버지가 오려주신 신문기사를 따로 공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가끔은 오래 된 그 신문 스크랩을 학교 숙제에 유용하게 써먹은 적도 있었다)

일요일마다 온 식구가 할아버지 댁에 가서 놀다가 점심,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건 참 좋았지만
내심 이번엔 할아버지가 누구를 불러다 신문스크랩을 내밀며 "잔소리"를 하실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애정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았던 막내고모는 할아버지가 신문 스크랩을 내밀면
꽥 소리를 지르며 그만 좀 하시라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나나 동생들, 우리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우리 아버지까지도 호랑이 할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신문 스크랩 전달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냥 묵묵히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기사를 읽고나서
"소중히" 간직하는 체 접어 넣곤 했다.

그땐 신문의 논조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강박적인 신문 스크랩과 실천 강요가 참 짜증스럽기만
했고, 나머지 식구들 모두 워낙 그 순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켜본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 전달"은 내가 서른살이 될 때까지도 그저 참고 견뎌야할
절차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툴툴거렸던
할아버지의 자식들 8남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똑같이 신문을 오려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읽어보라고 건네는
것을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셋째 고모는 신문을 3개나 구독하며 주식, 직장생활, 건강, 재테크, 웰빙... 수없이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사촌동생들과 그 배우자에게 나눠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라고
강권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그 정성이 우리집에까지 뻗쳐 "당뇨병 관련 특집 기사" 같은 것이 실리면
가족모임에 가지고 나와 우리 엄마한테 전달하기도 하신다. ^^

그뿐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 사이의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 역시
신문을 보다 가끔은 스리슬쩍 기사를 찢어 보관한다. ㅋㅋ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좌르륵 관련 기사와 정보가 수도없이 뜨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해두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로 내게 남을 것만 같다.
나는 아직 오려낸 신문기사를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정성까지 보이진 않고 있지만
내가 우리 고모들 나이가 되면 어쩌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커피 관련 특집 기사가 생각나
내다 놓으려고 꿍쳐 두었던 신문더미에서 좀 전에 후다닥 그 페이지를 찢어 책꽂이에 올려두며
내 모습이 우스워서 혼자 킥킥 웃었다. (아 참... 우유부단한 모녀는 아직도 신문구독 중단에 대한 결정을 못 내렸다 -_-;)

정리는커녕 그간 오리거나 찢어두기만 한 신문기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지만
막상 버릴까말까 다시 읽어보면 슬쩍 있던 자리에 꽂아두게 된다.
역시 핏줄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못 속이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떠오르는데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익숙한 습관의 반복인지, 정말로 유전인자의 강력한 작용 때문인지
무지한 머리로 헤아릴 길은 없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그리도 싫고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내 안에 아직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숨결로 느껴지다니, 조금씩 철이 들고 있긴 한가 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저 "늙어감"의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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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호적을 떼면 나오는 이른바 '원적'엔 저런 주소가 적혀 있다.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동 ***번지.
저기가 어딘고 하면 김소월의 고향인 영변(이제는 김소월보다 핵시설로 더 유명한 듯한!)에서 멀지 않다는데, 물론 나는 단 한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고, 심지어 우리 아버지도 말로만 들었지 가 본 적은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식솔들 데리고 만주땅으로 올라가 사업(?)을 벌이던 사이 태어나셨다가 난리통에 월남하셨기 때문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이북 출신이시고, 살아생전엔 절대 고향 땅을 밟지 못하리란 걸
한으로 여기셨던 두분 때문에 나는 정말로 간절하게 "우리의 소원은 꿈에도 통일"이라고 믿고 살았던 것 같다.
내가 정민공주보다 어렸을 땐 해마다 추석에 차례를 지내고 나서
할아버지가 나와 큰동생을 데리고 주섬주섬 음식을 싸가지고 문산행 경의선 열차에 올랐다.
좌석이 있는 객차엔 앉을 자리도 없어 마룻바닥 같은 것이 길게 깔린 짐칸에 탈 때도 많았던 완행열차의 종착역에서 내리면(지금은 경의선의 종착역이 문산이 아니라 도라산 역이라더라) 다시 버스를 타고 임진각으로 가야했고, 임진각에서도 군인들이 보초를 선 철조망 앞까지 간 우리들은 작은 돗자리를 펴고 또 다시 북녘을 향해 술을 따르고 절을 했더랬다.
할아버지는 간단히 음복을 한 후 남은 음식을 보초 서는 군인들에게 나눠준 뒤
또 다시 손주들을 데리고 허름한 시외버스와 복작거리는 완행열차를 갈아타고선 서둘러 집으로 돌아오셨다.
돌아오는 기차에선 거의 어김없이 꾸벅꾸벅 졸다가 할아버지의 채근에 기차에서 뛰어내렸던 고단한 행차를 나와 큰동생은 꽤 오래 별 투정 없이 따라다녔는데, 다녀와선 가기 싫다고 엄마한테 투덜거려도 결국 추석날이 돌아오면 기차 타러 가자는 할아버지의 꼬드김에 또 다시 선뜻 넘어가곤 했다.
기차를 타는 것도 매력적이었겠지만, 철조망 너머로 하염없이 북쪽을 바라보거나 때로 눈시울을 적시기도 하시는 할아버지를 어린 마음에도 차마 혼자 보낼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우리 아버지나 작은 아버지들은 아침에 차례를 지냈는데 굳이 임진각 철조망 앞에까지 가서 또 다시 성묘 대신 절을 하는 할아버지의 고집을 못말리는 대신, 같이 따라나서진 않는 것으로 나름대로 반항을 했기 때문이다. ^^

나와 동생들이 머리가 굵어져 추석마다 고생스럽게 경의선 열차를 타고 임진각으로 떠나던 할아버지의 성묘 파트너가 되기를 거부한 뒤엔 다시 어린 사촌동생들에게 그 임무가 넘겨졌고, 차츰 기차 대신 자동차로, 임진각 대신 행주산성으로, 교통수단과 행선지가 바뀐 우리 할아버지의 간이 성묘는 돌아가시기 전까지 계속 이어졌었다.

몇년 전 김대중 대통령이 평양에서 김정일을 만나는 장면이 온종일 생방송으로 이어지던 날 나는 당연히 돌아가신 할아버지를 제일 먼저 떠올렸다.
김일성과 김정일, 그리고 김대중까지도 빨갱이라며 치를 떨게 싫어하시던 할아버지가 그 장면을 보셨더라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몹시 궁금했다.
이북 출신인 아버지를 둔 아들인 우리 아버지는 그날, 북한에 얼마나 돈을 많이 퍼다주고 저렇게 요란한 쇼를 벌이는지 모르겠다며 퍽이나 못마땅해 하셨기 때문이다.

참 많은 사람들이 햇볕정책과 북한에 '퍼다주기'를 비판하지만
나는 현재 북한 청년들의 평균신장이 165센티미터를 겨우 넘을까말까한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드러나듯 절대적으로 부족한 북한의 식량현황이 그저 안타깝기에 어떻게든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 생색내기든 아니든 북한주민들에게 쌀 한 톨이라도 더 배급될 수 있도록 계속적인 지원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 부모님만 해도 그렇게 지원한 자원과 식량은 절대 북한 주민들의 손에 들어가지 않을 것이며, 북한 권력층의 배를 더욱 불리고 군비확장과 핵시설에 투자될 뿐이라고 비아냥거리지만 그렇게 빼돌려지고도 남은 식량은 결국 죽어가는 '인민'들을 위해 쓰여지지 않겠나? -_-''
감상적인 온정주의라고 손가락질을 받아도 할 수 없다.

제3세계의 가난한 난민과 굶주린 사람들과 어린이들을 위해서는 아낌없이 선교단을 보내고
경제적인 지원을 하면서 정작 휴전선 너머에서 굶고 병들어 죽어가는 북한 어린이나 탈북자들을 나몰라라 하는 인간들은 위선자나 다름 없다고 본다.
이데올로기가 다르고 체제가 다르고 테러를 지원하는 군사독재국이고 핵으로 전 세계를 위협하는 '악의 축'이기 때문에 안된다고?
핵으로 가장 크게 전세계를 위협하는 나라는 사실 사방에 핵잠수함을 띄워놓고 있는 미국이 아니던가?

오늘 또 대통령이 군사 분계선을 걸어 넘어 북한으로 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또 다시 돌아가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떠올렸고, 과연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소원은 통일"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미국 국적을 가졌고 한국말은 몇마디 하지도 못하는 하인스 워드 같은 사람까지도 한 핏줄이고 '동포'라고 아우르는 마당에, 같은 언어를 쓰고 생김새도 같으며 커다란 스포츠 행사 때마다 한반도 기를 달고 함께 출전하면서 남북을 서로 잃어버린 자기네 땅이라고(한국 전쟁은 끝난 게 아니라 잠시 휴전 중이라잖아!) 우기는 두 나라 사람들이 좀 더 자유롭게 왕래하고 쌀과 돈을 최대한 공유하며 살면 왜 안되는데?
 
물론 남이든 북이든 탐욕스러운 놈들은 더욱 많이 가질 테고 가난한 사람들은 계속해서 가난할 테지만(지금은 안 그런가 뭐?) 최소한 남북 청소년들의 평균신장 차이라도 덜 벌어지지 않겠나 말이다.
먹는 걸 누구보다 좋아하고 굶으면 벌컥 화가 나는 나로서는 전체적으로 못먹고 영양실조에 걸려 남한 또래 아이들보다 한뼘 이상 키가 작은 북한 아이들을 볼 때마다 너무 가슴이 아프다. (그런 의미에서 또 오늘 뽈록한 김정일의 배를 보니 버럭 화가 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이 짐작하듯 아직도 통일은 요원한 일일 테고
더 많은 이들이 통일을 바라지 않는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이번 만남으로 진정 '인민'과 '국민'을 위해 뭔가 소중한 결실이 하나라도 더 맺어지길 빌 뿐이다.
그러다 보면 금강산과 개성공단 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대신 내 살아 생전에 평안북도 정주군 곽산면 땅을 한 번 밟아볼 수도 있지 않겠나.

횡설수설... (쓸데 없이 글이 길긴 또 왜 이렇게 기냐..헐)
두번째 남북 정상회담을 지켜본 나의 어지러운 생각이었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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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님님

투덜일기 2007. 9. 27. 00:17
전쟁을 치르듯 새벽부터 정신없이 콩콩거려야 했던 추석 날의 마지막 행사는 역시나
친지들 배웅과 동시에 하는 달맞이.
원래 한가위 달맞이는 초저녁에 처음 떠오르는 달을 보며 해야 한다지만
그 즈음엔 늘 수십 명분 저녁식사 준비로 바쁠 때라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니
우리 가족의 달맞이는 해마다 식사 후 느즈막히 귀가하시는 친척분들 배웅하러 따라 나서며 이루어진다.

이번에도 추석날 모인 22명(올핸 큰고모네랑 네째 고모네 식구들이 빠져서 그나마 좀 조촐했다)의 식구들이 몽땅 밖으로 나가 각자 달 보며 소원을 빌라고 하자
제일 신난 건 당연히 어린 조카들이었다.
5살이 되도록 좀처럼 머리칼이 자라지 않아 속상해 했던 정민공주는 그 무렵부터 늘 소원이 "머리칼 빨리 길게 해달라"는 것이었는데, 이젠 제법 머리가 공주스럽게 자라기도 했고 나이도 무려 '10살'이나 되고 보니 작년부터는 달보며 무슨 소원을 비는지 "절대 비밀"이다. ^^
6살 난 준우는 씩씩하게 "우리 아빠 QMX(나중에 그게 뭐냐고 물어서 알게 된 QMX는 르노 삼성에서 연말쯤 출시한다는 새로운 SUV 모델이란다 -_-;; 짜식.. 차 이름을 고모보다 백 배쯤 많이 알고 실물 구분도 할 줄 안다)로 빨랑 차 바꾸게 해주세요!"라고 소리질렀는데
가장 압권은 5살 난 지환이가 뜬금없이 외친 소원이었다.
"달님님! 달님님! 애기 동생 잘 낳게(?) 해주세요! 아멘!"

골목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외쳐대는  지환이의 반복되는 소원에 우린 모두 깔깔깔 웃어댔고, '달님'에 '님'자를 하나 더 붙여 새로운 극존칭을 만들어낸 데다, 수녀원 부설 어린이집을 다녀 기도엔 일가견이 생겼다는 지환이의 소원이 정말로 이루어지나 함께 지켜보자고 의견을 모았다. ^^
(큰 동생은 늘 자식이 셋은 있어야 한다고 은근히 바라는 눈치지만, 올케는 또 다시 지긋지긋한 육아를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손사래를 치는 형편이라 지환이가 동생을 볼 가능성은 현재 지극히 낮다 ㅋㅋ)

나 역시 보름달을 올려다보며 마음 속으로 소원을 빌기는 했지만
조카들처럼 순수한 마음이 아니라 이루어질 것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 같다.
이런저런 민속 풍습을 미신이라고 코웃음 치기는 하지만 사실 나는 재미삼아서, 또는 '혹시 모르니까' 대보름날이나 한가위날의 달맞이며, 유성우 내리는 날의 소원빌기에 열심히 참여하는 편이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때 열심히 빌었던 소원들 가운데 몇 가지는 이루어지기도 했던 것 같다. ^^;;  

대학원 다니던 시절, 논문학기 앞두고 종합시험에 꼭 붙게 해달라고 빌었다든지,
여행을 계획하던 해엔, 부디 엄마가 무사히 환절기를 넘겨 마음 편히 내가 먼 여행을 떠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든지...

물론 반복해서 빌어도 지금껏 이루어지지 않고 있는 소원도 있긴 하지만
아마도 난 앞으로도 장단기기억력상실증후군을 앓고 있는 환자답게 꿋꿋이 소원을 빌어댈 게 틀림없다.
이루어지면 좋은 거고, 안 이루어져도 어차피 내가 손해볼 건 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정작 가장 둥근 보름달은 추석 다음날에야 볼 수 있다고 했는데
오늘은(시간상 벌써 어제지만) 밤하늘을 내다볼 생각도 못하고 지내고 말았다.

지금쯤은 집 뒤쪽으로 많이 기울었을 '달님님'에게 마음속으로나 또 한 번
소원을 주절거려봐야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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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닥

투덜일기 2007. 9. 18. 17:42
비가 와서 커피향 그윽하다며 좋아라할 땐 언제고
오늘은 또 비 핑계로 계속 기분이 바닥이다.
아무래도 명절증후군의 전초증상인 것 같기도 하다.
추석에 대거 손님을 치르려면 대청소부터 해야할 형편이라
요 며칠 아버지 옷가지를 거의 정리해 박스에 담아두었다가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다.
등산복 욕심이 많으셨던 아버지의 옷가지는 커다란 박스 3개에 담고도 남아 푸대자루와 큰 비닐을 모두 동원해야 했다.
왜 하필 이리도 비가 추적추적 오는 날 기증품을 가지러 왔는지...
아버지가 용띠라서 움직이실 때마다 비가 온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생전에 여행 가셨을 때도 종종 그랬고,
세브란스 병원에서 거의 쫓겨나다시피 건대병원으로 옮기던 날도,
발인 날 장례식장에서 화장터로, 다시 납골당으로 모시던 동안에도 내내 비가 내렸다.
어제는 구름 한점 없이 날이 화창하더니만...


어제 오늘 온 집안 커튼을 떼서 빨고 말려 다시 매달았더니 어깨와 목이 아프다.
사촌동생들이랑 동생네 와서 잘 때 덮을 이불이랑 요도 왕창 빨아야 하는데 날씨가 왜 이런다냐.
원래 이런 건 지난주쯤 해치웠어야 하는 일이건만 꾸물럭거리며 게으름에 젖어 있다 마음이 바빠지니 또 기분만 바닥을 친다.

밥하고 빨래하고 집안일 신경쓰고 가족 대소사 챙기는 '주부'로 사는 삶이 죽도록 싫다는 게
어린시절부터 나의 표면적인, 그리고도 "중대한"  독신 지향 사유였는데 -_-''
벌 받았는지 철들고 나서부턴 아픈 엄마 대신 대리 '주부'로 살아야 하는 날들이 점점 많아져
이젠 아예 돈 못받는 파출부가 되어버린 내 신세도 오늘따라 몹시 처량하다.
주부노릇에 직장 일까지 슈퍼우먼이 되려고 자진해서 선택한 저들이야 그렇다치고
자유롭고 싶어 조직도 떠난 내 꼬라지는 만날 왜 이런가 말이다.
원래 쓸데없는 푸념과 한탄에 사로잡히면 끝없이 맥떨어져 헤어나올 수가 없는 법.
소용없는 짓임을 알면서도 온종일 모든 것에 앙탈을 부렸더니
괜스레 옆구리만 결린다.
그 여자 성질 참 못됐다.

그나마 바닥을 차고 오르기 위한 위로용 혼잣말 하나.
확실히 가족은 멍에지만, 그래도 나는 한쪽 가족만 있으니 얼마나 다행이냐.
(양쪽 가족 다 거느리고 있는 유부녀들--가령 울 올케들 같은--봐서 참아보자...고 생각하지만 남들의 불행을 담보로 느끼는 위안은 그리 설득력도 없고 별로 달콤하지 아니하다)

아무래도 이번 추석은 몹시 힘들고 슬프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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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대로

투덜일기 2007. 9. 17. 23:29
조카들은 고모의 헤어스타일 변신을 마구 비웃어댔다. ㅜ.ㅜ
하필 작은올케도 미용실에 가서 추석맞이 파마를 했다는데
작은엄마는 예쁘지만 고모는 이상하다고 정민공주 등이 깔깔대며 놀렸다.
심지어 짖궂은 정민공주는 "이상한 꼬불꼬불 머리를 한 아줌마 같은 고모!"라고
부르기까지...
늘어지는 귀고리와 목걸이, 은색 반짝이 의상으로 최대한 머리를 커버하려고 했던 나의
노력에 대해서도 "머리가 이상하니까 큰 귀고리랑 목걸이를 했구나! 근데 다 보여, 고모!"라고 일갈했다. 흑..

사실 동생들은 일주일전까지 내 몰골이 하도 추레했기 때문에 훨 나아졌다고 위로했으나
그 역시 나에겐 위로로 들리지 않았다.
불과 며칠 전 5살된 조카 지환이는 나를 이런 모습으로 묘사했었다.

아이들 눈에 비친 내 머리가 과연 얼마나 이상한지 파악해보고자
세 조카들에게 제발 고모 좀 그려달라고 부탁했더니
정민공주는 아예 보이코트, 6살된 녀석은 차마 그림이랄 수도 없는 낙서를 해놓고는 이상해진 고모라고 킬킬댔는데, 5살난 지환이가 그나마 고모 머리가 별로 이상하지 않다고 위로해주면서 그림도 꽤나 귀엽게 그려주었다.


결국 나는 다음날까지 샴푸하지 말라는 미용사의 말을 무시하고
미용실에서 돌아온 날부터 마구 감아주고 있는데, "탄력있는 컬"을 위해 단백질 파마를 권한 때문인지 별로 잘 안펴졌다. 쳇...

한동안은 계속해서 화려한 의상과 악세사리로 가리고 다니는 수밖에 없을듯;;
그놈의 빌어먹을 미용사 추석 연휴동안 배탈이나 나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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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어트

삶꾸러미 2007. 9. 14. 19:59

물만 먹어도 살이 찐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다.
울 엄마가 그렇다.
자기는 끼니 외에 별로 먹는 것도 없고, 당뇨 때문에 과일도, 달콤한 빵도 먹고 싶은 만큼 못 먹고 살며 운동도 매일 하는데 도무지 살이 안빠진다고 화를 내신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을 유심히 살펴보면 절대로 '물만 먹어서' 살이 찌는 게 아니다.
자기 생각으로는 나름대로 먹는 걸 절제하느라 꽤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지만
따지고 보면 평범한 사람보다 확실히 많이 먹는다. ^^;;

지난 두달간 허허로움 때문인지 자꾸만 간식에 손을 대는 엄마에게 시시콜콜 잔소리를 했더니 엄만 그걸 '딸의 구박'이라고 여기며 서러워했다.
당뇨에 고혈압, 고지혈증, 동맥경화 초기 증상까지 골고루 갖춘 엄마에게 먹을 것 때문에
내가 잔소리를 한 건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건만, 엄마는 새삼 그걸 남편 없는 서러움으로 연결시켰다. -_-;; (물론 아버지는 나보다 엄마의 식탐에 관대했던 게 사실이다)
나도 과부 된 엄마를 구박하는 못된 딸이 되고 싶지 않았으므로, 한동안은 잔소리를 포기하기로 하고 결과를 지켜보았다.
신이 난 엄마는 운동한답시고 동네 친구들과 산책을 나가선 자랑스레 호떡을 사먹고  찐옥수수 한 봉지까지 사들고 들어오곤 했다. 옥수수는 다이어트 음식이라면서. -_-;;
나의 예상대로 엄마는 단 5일만에 2킬로그램이 늘어 체중 75킬로그램을 돌파했고
허리둘레 36인치짜리 바지들이 다 맞지 않게 되었다. ㅠ.ㅠ
(참고로 울 엄마 신장은 159센티미터다.)

그 상태로 나가다간 혈당과 혈압도 겉잡을 수 없이 올라갈 형편이라
나는 또 다시 지독한 악역을 맡고 있는데, 참...
식탐 유전자를 나에게 물려주신 울 엄마의 끊임없는 식탐을 말리는 게 너무도 힘겹다.
끼니 외엔 간식을 못드시도록 냉장고를 거의 비워놓다시피 해도
주말에 조카들이 다니러오면 모든 게 다시 수포로 돌아갔다.
원래 한참 크는 애들은 수시로 입에 먹을 걸 달고 살지 않나?
착한 올케들은 차마 나처럼 혹독하게 엄마에게 먹을 걸 차단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잠시 한눈을 팔기라도 하면 다같이 홀라당 아이스크림, 도넛, 햄버거 같은 걸 거침없이 먹어치우시는 거다.
아니 왜 금방 밥먹고 나서 또 다들 출출하다는 건지!!! *_*

엄마 때문에 음식의 칼로리 계산에 빠삭해진 나는 김밥 한줄, 아이스크림 하나, 햄버거 한 개의 추가 열량(각각, 2, 3백 칼로리는 족히 나간다) 소모하려면 2시간 동안 열심히 걸어야 한다는 걸 알지만, 우리 엄마의 운동이라곤 고작해야 쉬는시간 30분을 합하여 1시간 동안 동네 근처를 걷는 것뿐이다.
그나마도 운동을 안하는 것보다는 낫겠지만, 알량한 운동을 핑계로 간식을 덥썩 먹는다는 게 문제인데;; 본인께서는 "나름" 간식을 쬐끔밖에 안 먹었기 때문에 양에 안 차 그게 다시 스트레스로 남는다. 흑...

그렇다고 당뇨병 환자인 엄마를 마구 굶길 수도 없는 일이다.
규칙적으로 식사를 하지 않으면 오히려 혈당이 더욱 올라가니까.
괜히 출출하면 간식 찾아먹을 생각 말고 물을 드시라고 아무리 충고해도 못들은 척
냉장고를 뒤지던 엄마에게 오후에 한바탕 잔소리를 늘어놓은 뒤 바쁜 일을 핑계로
작업실로 도망쳤는데 은근히 걱정이다.
내가 없는 틈을 타서
토마토 한 광주리, 포도 몇 송이, 귤 10개쯤은 순식간에 우습게 '작살내던' 과거의 과일킬러 실력을 발휘하고 계시면 어쩌나... ㅠ.ㅠ

뚱뚱한 딸 다이어트 시키려고 같이 헬스장과 에어로빅 다니는 엄마는 봤어도
뚱뚱한 엄마 다이어트 때문에 같이 운동 다니는 딸 얘기는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
이참에 구박만 하지 말고 나란히 헬스클럽엘 등록해볼까...
당뇨 합병증으로 손발 신경이 변형돼 오래 서 있지도 못하는 엄마를 데리고 헬스장엘
가서 과연 어떤 운동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그것도 막막하긴 하다.
어휴.. 그렇지만 난 운동이 정말 싫단 말이지. (운동 싫어하는 것도 유전인듯;;)

어디 쉽고 간단한 다이어트 비법은 없는지.. 오늘도 나는 인터넷의 바다만 헤매고 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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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투덜일기 2007. 8. 19. 12:19

지나고 보면 세월은 참 잘도 간다는 걸 느낀다.
어제는 아버지가 돌아가신지 49일째 되는 날.
아침부터 절에 올라가 49재를 치렀다.
(참.. 절에선 제사를 지낸다고도 하지만  "'재'를 올린다"고도 표현하므로 어제 우리가 올린 의식은 49재가 맞다. 하지만 49'제'라는 말도 많이 쓰이는 듯...)
불교식으론 고인의 영혼이 49일 동안 아직 멀리 떠나지 않고 이승을 떠돌며 가족들 곁에 있다고 믿는다.
그러니까 49재는 정말로 고인을 멀리 떠나보내는 의식.
내가 보기엔 모든 장례 의식이 남은 사람들을 달래기 위한 것이라는 데 더욱 방점이 찍히지만
그런 절차가 전통과 관습으로 남은 데는 다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나 역시 다시 친지들이 모여 지켜보는 가운데
새로이 아버지의 옷을 준비했다가 살라드리고
상장과 머리 리본, 상복의 동정을 뜯어 같이 태우고
뜻 좋은 글귀를 함께 읽고 기도하는 의식에서 큰 위로를 받았다.

사실 불교든 기독교든 천주교든 어느 종교의 힘을 빌지 않더라도
우리 아버지는 "좋은 데" 가셨을 거라고 믿는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좋은 데 안 가셨다면 정말로 천국이나 극락 따윈 없는 걸 테니까.
심지어 독실한 천주교인인 친구 하나는 우리 아버지가 이미 천국에 야훼와 함께 계시다는
신성한 메시지까지 받았단다. ^^

...


아버지의 일기장을 어제 돌려받았다.
1964년부터 두해 동안 군대 시절에 기록한 아버지의 일기장이 할아버지 유품 사이에 끼어 지금껏 보관 된 것은 어쩌면 놀라운 운명 같기도 하다.
12년 전에 아버지가 손수 생겨오셨다면 쑥스러운 마음에 없애셨을지도 모르는데
그 일기장이 우리 손에까지 무사히 전달될 수 있었던 건, 아무래도 할아버지 고서와 유품을 모두 간직했던 막내고모 덕분인 듯하다.  아.. 그 전에 장남의 일기장을 오래도록 소중히 갖고 계셨던 우리 할아버지 덕분도 크다.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막내고모는 할아버지 유품 사이에서 우리 아버지의 흔적이 담긴 기록이 있었던 걸 생각해냈고, 그게 우리 아버지 일기장이란 걸 확인하고는 며칠 동안이나 울었다고 했다.
일기장엔 장남으로서 가난한 식솔들을 챙겨야하는 책임감과 애정이 담겨 있고
스무살때부터 연애중이었던 우리 엄마에 대한 사랑과 애틋함 또한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사실 막내고모는 25살의 청년이 기록한 애틋한 연정의 주인공이 혹시나 우리 엄마가 아니면
울 엄마가 상처받을까봐 끝까지 다 읽고 상황을 파악하기 전엔 함부로 일기장이 존재한다는 것조차 밝히기가 조심스러웠단다.
(설령 아버지에게 다른 여자가 있었대도 우리에겐 소중한 보물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고모는 제일 먼저 '이'씨인 울 엄마의 영문 이니셜이 뭐냐고 넌지시 물었더랬다.
나는 어린 시절 이미 부모님의 연애편지를 훔쳐본 경력이 있던 터라
Rhee로 썼던 울 엄마의 이니셜을 확인해주었고, 고모는 그제야 안심을 했다.
우리 부모님이 8년간 연애 끝에 결혼한 순애보 커플이란 걸 다들 알면서도, 젊은 시절 꽤나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았던 아버지가 혹 바람이나 폈을까봐 염려했던 거다.

고모는 누구보다 우리 식구들이 제일 먼저 아버지 일기장을 읽고 싶을 거라 생각했지만
지난 10여년 간 큰형님을 부모처럼 여겼던 작은아버지들과 고모들도 읽고 싶어하셨으므로
어르신들부터 돌려읽고 어제야 비로소 우리 손에 일기장이 들어오게 된 것.
일기장을 읽어본 친척 어르신들은 "역시 장남은 다르더라.."고 하셨다.
장남인 큰동생도 남다른 장남의 책임을 실감하는 듯했다.
사실 나는 아껴읽고 싶은 마음에 동생들과 함께 앞부분만 몇 군데 읽어보다 말았다.

이북에서 월남해 부산에서 피난시절을 보낸 우리 집안에 특별히 오래묵은 골동품 가보 따위는 없지만, 우리가 늘 자랑하는 가보 1호는 부모님이 8년간 연애하는 동안 주고받으신 편지뭉치였는데, 이젠 아버지의 일기장으로 가보 2호가 생겼다.

여러 권의 앨범 한 가득 젊은시절부터 지금까지 부모님의 추억이 순간으로 남아 있기는 하지만 젊다 못해 어리게 느껴지는 스물다섯 살 아버지의 또 다른 추억을 갖게 되어 몹시 기쁘다.
이니셜 R, 또는 子라는 호칭으로 아버지의 일기장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주인공인 우리 엄마 역시 아직도 차마 일기장을 읽지 못하겠다 하신다.
내용도 감동이지만 만년필 글씨체는 또 얼마나 유려한지... 글씨를 잘 써서 행정병이 되었다던 아버지의 말씀을 못믿었던 건 아니지만 새삼 놀랍다. 해서, 엄마랑 나랑은 두고두고 조금씩 조금씩 음미하듯 읽어볼 생각이다.

돌아가신 분에 대해선 당연히 좋은 기억만 남는다지만, 얼핏 들여다본 청년 아버지의 모습 역시 참 멋진 분이었음은 확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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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일째

투덜일기 2007. 6. 12. 14:11

지난주 화요일부터 일주일째 의식을 잃고 중환자실에 누워계신 아버지를 위해
모두의 기도를 바라는 글을 잠시 올렸다가 내린 이유는
혹시라도 내 이기심 때문에 누군가 괘씸죄를 적용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

세상 모든 병원에서 병마와 힘겹게 싸우고 있을 모든 환자들과 가족, 그 주변 사람들 모두
나와 같은 기도를 올리고 있을 테니까.

분명, 주변 사람들의 기도가 부족해서 누군가의 운명이 달라지진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전히 나는...
착하고 고운 심성으로 하늘과 절대자의 마음을 울릴 누군가의 기도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짧은 면회시간에 잠시 뵙고 나온 아빠는
금방이라도 눈을 번쩍 뜨고 일어나실 것만 같은데
의사들은 단호한 어조로 무서운 확률과 절망적인 가능성만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어처구니없이 꼬리를 내리려는 의학의 힘보다 우리는 늘 건강하셨던 아버지의 의지력과 하나로 모인 모든 이들의 염원을 믿고 기다릴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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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맙습니다

삶꾸러미 2007. 5. 9. 02:18
어버이날
결국 난 부모님한테 고맙습니다.. 라는 말은 하지 못했다.
그나마 어린이날 미리 모여 먹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맥주로 건배하며
올케 따라 감사하다고 거들었으니 다행인가.

꽃을 좋아하긴 하지만...
카네이션도 죄다 중국산이고 값도 엄청 올랐다기에 몇년째 실속 위주로 한답시고
가슴에 꽃을 달아드리는 쑥스러운 절차는 생략한지 오래다.
그나마 막내올케가 주말 모임 때 카네이션 바구니를 만들어 와서 부모님껜 다행이었는데
카네이션 따위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나는 좀 민망했다. ㅋㅋ

올해도 선물은 고민하다 두분 다 그냥 '현금' 봉투로 드렸다.
까다로운 두 노친네들 뭐라도 사드리려면 다리품을 꽤나 팔아야 하는데 이젠 그것도 귀찮고..
사실 사드릴 품목도 정말 마땅칠 않다. 핑계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쩔 수 없다!
그래도 며칠 전 충동적으로(사실 주차비 아까워서 쇼핑한 거지만;; ) 사다드린 연분홍색 모자는 엄마가 꽤 마음에 들어하는 눈치다.
나이든 아줌마들은 왜 그리도 '꽃가라'를 좋아하시는지... 안쪽에 꽃무늬 프린트가 들어가고 꽃모양의 장식도 붙어 있어서 내가 보기엔 약간 난한데
백화점서 여러 아줌마들에게 씌워보고 의향을 물으니 모두들 좋아라 하기에 울 엄마도 좋아할 줄 짐작은 했더랬다.

매달 부모님께 용돈을 드리거나 생활비를 내놓는 착한 딸이 아니라
생신이나 명절, 어버이날 아니면, 가끔 원고료가 무더기로(!) 들어와 통장잔고가 매우 두둑해졌을 때만 봉투를 내밀다보니, 드리는 나도, 받으시는 부모님도 참 뻘쭘하다. -_-;;

째뜬...
그래도 나무토막같이 무뚝뚝한 딸이 콩닥콩닥 바쁘게 장봐다가 차려드린 저녁상으로
얼추 감사의 마음이 전해졌으리라 믿는다. ㅎㅎ
현금봉투에다 장 본 값에다 주말에 먹은 저녁 값까지, 올해도 얹혀 사는 큰딸의 출혈이 제일 컸다는 걸 부모님은 분명 아시겠지만 ^^;; 그래도 제대로 된 인사는 여기에나마 적어두련다.
"엄니, 아부지,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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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노릇

삶꾸러미 2007. 5. 5. 00:56

워낙 옛날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버스나 지하철에서도 아기들을 보면 절대 가만 두지 못하고 아이와 눈을 맞춘  뒤 재미난 표정을 짓거나 구슬러서 아가들을 웃기거나 관심을 끌곤 했다.
최대한 옆사람들이나 애 엄마한텐 안들키게 하느라 노력하지만, 아이가 까르륵 웃어버린다든지 하면 좀 곤란해지기도 했다.

그러다 20대쯤엔
결혼은 생각 없어도 어떻게든 애만 하나 낳아서 키우는 건 어떨까..도 꽤 진지하게 (?)
고민했더랬다. ㅋㅋ
남의 애들도 예쁜데 내 애는 오죽 예쁠까.. 뭐 이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던 것.
물론 막연하게 홀부모의 힘겨움이라든지 아이가 받아들여야할 충격 같은 문제 때문에 그냥 아련하게 품은 '바람' 같은 것으로 남아 있었는데
드디어 내게도 '조카'라는 존재가 생기고부터는 생각이 완전히 달라졌다.

물론 첫조카는 탄생 이전부터 우리 가족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우린 올케의 출산 이전부터 아가를 위해 돌아가면서 비디오를 찍고 (예비 삼촌인 막내동생은 기타 치고 노래도 불렀고, 나는 태명이 '짱이'였던 아가가 태어나면 고모가 무슨 부탁이든 다 들어주겠다고 장담했다. *_*)  온 가족이 총출동해서 출산준비물을 보러 다니고 장만하고...
그랬다.

주말에도 출근을 해야 하는 직장생활을 했던 올케 대신 주중엔 작은 이모가 첫조카를 돌보고
주말엔 큰동생네가 아예 우리집에서 기거하며 조카를 돌봤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아기의 24시간을 옆에서 목격하고 육아에도 참여하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거의 3, 4시간마다 우유를 먹이고, 수시로 기저귀를 갈고,
안고 흔들어서 재우고, 매일 목욕을 시키고,
갑자기 고열이라도 나면 한밤중에 응급실로 뛰어가고
정해진 예방주사를 맞추러 다니고...

큰동생이 특수한 직업을 가진 터라 철야작업이나 외박도 수시로 했기 때문에
조카 병원행은 올케와 함께 주로 내가 보필하는 경우가 많았고
또 나나 울 아버지가 안아주면 아기가 더 빨리 잠들기 때문에 서로 솜씨자랑 하느라 나서기도 했지만,
특히 그땐 내가 집에서 번역을 할 때라 아침에 출근해야 하는 동생들보다는,
밤중에 일하고 있던 내가 우유를 타거나 보채는 조카를 달래는 게 너무도 당연한 것 같았다.

그러면서 드디어 나도 깨닫게 된 거다.
아.. 육아는 정말 '장난'이 아니구나 하고.
겨우 주말에 이틀 조카와 함께 지내면서 깨달은 육아의 어려움은 조카가 점점 자라
유아원을 다니고, 유치원엘 들어가고,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 기하급수적으로 커지더니
언제부턴가는 이 세상의 모든 부모들이, 특히 엄마들이 너무도 존경스러웠다.

얼마 전 친구 하나는 그토록 기다리던 아기를 낳은 뒤 심한 우울증으로
아기를 몇달간 아예 떼어놓고 본인의 몸과 마음부터 추슬러야 하는 사태를 맞기도 했는데
그 마음이 나도 백번 이해가 되었다.
어느것 하나 혼자 할 수 없는 무기력하고 조그마한 새생명을 온전히 책임져야 한다는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을 엄마노릇을 오로지 본능과 의무감으로 해내야 한다는 건
초인적인 희생이나 마찬가지일 터였다.

어디 갓난아기 뿐인가.
초, 중, 고, 대학교를 거쳐 성인이 되고 나서도 자식이 번듯하게 홀로서는 순간은 과연 있는 것인지 의심스럽다.
직장인이 되어 제 밥벌이를 하기 시작했다 해도, 결혼이란 큰 행사를 앞두곤 여전히 부모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제도적 현실은 변하질 않고 있고(간혹 혼자 힘으로 버젓이 혼례를 치르는 장한 지인들도 봤지만, 남동생들 보니 전셋값이라도 장만할 때까지 여자친구 기다리게 했다간 끝이 없겠더라), 나만 해도 부모님이 결혼이외 독립은 죽어도 안된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지만 사실 독립하라고 등 떠밀어도 선뜻 나가지는 못할 형편 아닌가! *_*
심정적으로는 내가 이제 노부모님 모시고 사는 거라고 떵떵거리지만
실질적으로는 분명 내가 부모님께 얹혀 살고 있는 게 맞다.

설령 결혼이나 독립으로 부모님 그늘을 벗어났다고 해도
별안간 겁이 나거나 위험한 순간이 닥쳤을 때, 입에서 "엄마야!"라는 외마디가 나오는 한
엄마와 부모님에 기대는 우리의 마음은 여전한 거라고 여겨진다.
2년전 83세로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그리워서 올해로 67살이나 먹은 딸(=울 엄마 말이다)은
아직도 몸이 심하게 아프고 힘들면 '엄마...'를 찾으며 울먹인다. 
그러면 나는 할머니 대신 엄마를 토닥여주면서도, 은근히 구박한다.
"아니... 할머니는 여든이 넘어서도 엄마 김치까지 담가다 주면서 딸 챙기셨는데,  엄마도 나한테 씩씩하고 든든한 엄마가 돼 주진 못할망정 만날 왜 이리 엄살이야.." 라면서.
그치만 속으론 만날 병들어 비실비실한 엄마라도 내 곁에 있어주셔서 다행이라 여긴다.(아 물론 긴 병엔 효자 없다고 -_-;; 나도 힘들땐 별별 생각 많이 하지만...)
 


암튼 오늘 또...
자의식이 몹시 강한 조카 정민공주 때문에 저녁때 한바탕 집안에 난리가 벌어져
올케와 조카, 두 모녀를 어렵사리 화해시킨 후 집으로 돌려보내며
또 한번 부모 노릇의 어려움을 실감했다.
논리와 대화가 통하지 않는 아기들의 부모 노릇은 육체적으로 힘들고
말귀가 통하기 시작하는 아이들의 부모 노릇은 정신적으로 힘들다더니만
정말로 훌륭한 부모가 되는 건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닌 것 같다.
특히 나처럼 덜떨어진 정신연령을 갖춘 이로선 감당할 수 없는 것인듯...

이젠 절대로 내 입에서 "결혼은 말고 애나 하나 낳아서 키워볼까" 하는 만용은 흘러나오지 않는다.
그 대신 부모 노릇, 엄마 노릇 씩씩하게 해내고 있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그리고 늙은 딸 보필에 오늘도 여념 없으신 나의 부모님께
그저 갈채를 보낼 뿐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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