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09.06.23 가방싸기 14
  2. 2009.06.15 그럴듯함 27
  3. 2009.06.11 자전거 바람이 불었다 21
  4. 2009.06.11 춘천의 추억 7
  5. 2009.06.04 엄마표 김밥 21
  6. 2009.06.01 5월 31일 12
  7. 2009.05.21 품위있게 죽을 권리 3
  8. 2009.05.10 진지 17
  9. 2009.04.24 5월 준비 12
  10. 2009.04.17 음식 단상 13

가방싸기

투덜일기 2009. 6. 23. 11:47
그릇이나 문구용품 따위에 붙어 있는 스티커는 그냥 두고보질 못해 처음부터 떼어내고 써야 직성이 풀린다. 반면에 비행기를 탈 때 항공사 직원이 여행가방 손잡이와 몸통에 덕지덕지 붙여준 스티커는 왠지 그냥 내버려두었다가 다음번에 가방을 써야할 일이 있을 때나 떼내는 버릇이 있다. 마지막 여행이 언제였든 그 흔적의 끄트머리라도 오래오래 부여잡고 싶은 욕망 때문이겠지. 
일년 가까이 여행가방 손잡이에 붙어 있느라 누렇게 변색되기 시작한 제주발 한성항공 짐표와 스티커를 어젯밤 다 떼내고 다시 짐을 꾸렸다. 세면도구와 양말, 수건, 편한 옷과 다량의 왕비마마 속옷, 휴대폰 충전기, 커피믹스, 종이컵, 책 두 권...을 넣을 때까지는 짐짓 유쾌한 여행을 준비하는 체할 수 있었지만, 곧이어 담요, 작은 쟁반, 과도, 티스푼, 곽티슈, 그리고 약 한 보따리를 챙겨 넣으면서는 나도 모르게 한숨이 새어나왔다. 모녀의 동반가출을 준비하듯 메모지에 적어놓은 목록을 하나씩 지워나가는 손길이 너무도 익숙해 오히려 서글펐나 보다.
아침 일찌감치 화분에 빠짐없이 물을 주고, 될 수 있는대로 냉장고를 비우고... 떠날 준비는 모두 끝냈는데, 허무하게도 기다림은 다시 오후까지 이어져야 한단다. 여행 가방을 싸는 일은 늘 설렘을 동반했건만, 이젠 그 비율이 절반으로 떨어져버렸다. 옛날부터 따지면 8할대라 우길 수 있겠지만(처음엔 8할대라고 썼다가 고쳤다), 2, 3년전부터 따진다면 가방 싸기 두번에 한번은 여행 목적이 아니었다. 장농 옆에 세워두었던 여행가방을 꺼내 짐을 싸는 이유가 어느덧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을 동반할 때가 많아졌단 뜻이다. 다음 여행을 꿈꾸며 가방에 매달 예쁜 이름표를 사들여 이미 이름까지 적어둔지 어언 2년이건만, 이번에도 그 이름표는 매달 수가 없다. 집 떠나는 건 똑같아도 팔다리와 마음이 무겁기 짝이 없는 이런 가방싸기, 다시는 없으면 참 좋겠다. 부디 다음번 이 가방을 꺼낼 땐 정말로 설레는 마음으로 떠나는 여행을 위한 것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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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럴듯함

삶꾸러미 2009. 6. 15. 17:39

당신은 속설이나 미신, 사람들이 근거의 여부와 상관없이 그럴듯하다고 여기는 이야기들을 잘 믿는 편인가, 아닌가? 누가 이런 질문을 나에게 한다면, 대번에 <안 믿는 편이다>라고 대답<은> 할 것 같다.
현재 가장 널리 퍼져 있고 마케팅에도 이용되고 있는 듯한 <혈액형별 성격 분류>의 경우엔 정말이지 웃긴다고 생각하니까. A형은 소심하고 O형은 외향적이니 하는 게 정설처럼 여겨지고 있지만, 어떻게 모든 인류의 대표적인 성격과 심리를 단순히 네 종류로 분류할 수 있단 말인가! 
모든 인간은 밖으로 드러내는 부분이 다를 뿐, 온갖 심리와 특징을 내포하고 있기 마련이다. 그 성격이 드러나고 개발되는 경향은 환경과 교육에 좌우될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와 일본 국민들을 제외하고 대부분의 세계인들은 평생 자기 혈액형이 뭔지 모르고도 잘만 살아가는데, 혈액형별로 공부법, 성공법, 옷입는 법, 연애법까지 버젓이 엄연한 진리로 회자되고 받아들여지는 상황을 보면 너무도 신기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도 어려서부터 혈액형별 성격 및 심리 유형에 노출된 나머지 그렇게 재교육되고 길들여지는 게 틀림없다. 내 주변에서도 참 많은 지인들이 혈액형 속설을 깊이 신뢰하며 친구끼리도 궁합과 코드가 서로 맞느니 안맞느니 할 때 혈액형을 들먹이다 나한테 쓴소리를 듣는다. 그래봤자 그들은 결국 "역시 언니는 A형이라 까다롭고 따지길 좋아해.."라고 일갈하며 내 말문을 막아버리지만.
물론 철석같이 믿진 않아도 재미삼아 보는 사주풀이라든지 타로점, 이름풀이 같은 기회를 나 역시 마다하진 않는다. 그러고 나서 그 결과가 내가 믿고 싶은 방향이거나 놀랍게도 내 생각과 일치하는 경우, 감탄과 함께 희희낙락 역시 타고난 운명이었어, 라며 잠시 즐거워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나도 말로는 속설이나 미신을 안 믿는다고 하면서 뒷구멍으로 솔깃해 하는 의지박약인이란 얘기일 수도 있다. 뭐라는 거냐냐, 이랬다 저랬다.
어쨌거나 얼마 전 블로그 이웃인 해리님의 전생과 관련한 포스팅을 보고 나도 재미삼아 내 이름 한자를 넣어 보았는데 그 결과가 얼마나 인상적이었는지 화면을 저장해두지 않을 수가 없었다.


지난주 아버지 제사 때, 조카들이 대낮부터 깎은 밤이며 여러가지 제사 음식들을 먼저 먹고 싶어 안달복달을 하는 걸 본 엄마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말했다. "그런 거 보면 귀신 없다는 소린 못한다니까...."
영문을 몰라 내가 설명을 요구하자 엄마는 예로부터 아이들이 제사 때 제사음식을 먼저 탐하면 혼백들이 와서 먹을 준비를 하기 때문이라고 했단다. 아이들의 영혼이 가장 맑아 통하는 구석이 있는 거라나 뭐라나.
물론 논리적인 사고로는 상황이 빤히 짐작되는, 말도 안되는 미신이다. 옛날엔 당연히 제사음식들이 귀했을 테고, 일년에 겨우 몇번 보는 귀한 음식을 접한 아이들이 입맛이라도 다셔보려면 자정 이후에 지내는 제사때까지 기다려야 했을테니 얼마나 안타까워 엄마를 졸라댔을까. 그걸 본 어른들이 만들어낸, 조상의 혼백이 정말로 제삿날 찾아와 차려놓은 음식을 즐기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조합한 이야기일 것이다.
하지만 그런 짐작을 하면서도, 나 역시 제사를 지낼 때 정말로 할아버지, 할머니, 아버지의 혼백이 와서 지켜보고 계시는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으되 마음속으로는 정말로 그런 것처럼 인삿말을 되뇌이며 절을 한다. 성묘를 갔을 때도 마찬가지고, "고수레~"라고 외치면서 땅신이든 부엌신이든 귀신에게 먼저 먹을 것을 바치고 그런 다음에 인간이 준비한 음식을 먹는 민간신앙도 꽤 그럴듯하고 재미나다 여겨 따라하는 편이다.
공포영화는 절대 못보고 보지도 않으며 인간을 괴롭히는 <무서운 귀신>이 있다는 건 믿지 않지만, 모든 사물에 혼이 깃들어 있을 수 있다는 범신론엔 또 고개가 끄덕여진다. 과학적인 사고로는 죄다 헛되다 손가락질해야 하는 것들임에도 그냥 내가 그때그때 느끼기에 그럴듯하면 귀가 솔깃하고 안 그럴듯하면 코웃음친다는 뜻이다.
나 또한 그렇기 때문에 별자리 운명이나 혈액형별 심리분석을 철저히 신봉하는 이들을 나무랄 수만도 없다. 내가 보기엔 100퍼센트 사기꾼이고 뚜렷한 증거도 있는 범죄자인데, 그런 사람을 <믿고> 한 나라의 지도자로 뽑기도 하는 세상에서 사람에 따라 어떤 믿음인들 그럴듯하지 않겠나. 결국 사람들은 그냥 <믿고싶은> 것일 뿐이다. 내 현재의 두뇌엔 정말로 놀 욕망과 돈 벌 걱정이 가득 차 있다고 믿고 싶은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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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작년에 느루를 장만하고 나서, 그때 직접 매장을 추천하고 조언을 해주었던 막내동생네도 곧 미니벨로를 장만했다. 애팔렌치아라고 하던가, 검정색으로 아주 늘씬하게 생긴 녀석이었다. 그러고선 올해부터 아직 네발자전거를 벗어나지 못했던 준우왕자의 강훈련에 돌입했다. 초등학교 1학년생이지만 겉보기론 3학년이라 해도 믿을만큼 키가 훤칠한 녀석이라 머지 않아 제 엄마와 함께 미니벨로를 탈 수 있게 하기 위해, 네발 자전거의 보조바퀴를 뗀 거다. 겁이 많아서 통 진도가 안난다는 소식을 들은 것 같았는데 어느 틈엔가 녀석은 순식간에 두발 자전거를 마스터 하고야 말았단다. 이렇게...

그러고 나서 좀 있다 준우왕자의 동생인 지우의 생일이 돌아왔다. 겨우 만 세돌이 되는 녀석은 똑 소리나게도 우리에게 선물을 콕 찝어 요구했다. 자전거를 사달라고. +_+ 그것도 하얀색이랑 검정색으로.
"고모, 지우 자전거 사주세요. 하양색이랑 검정색 있는 거..."라는 지우의 말을 직접 전화로 들으며 나는 내심 걱정이 앞섰다. 애들 자전거가 죄다 파랑 아니면 분홍, 아니면 노랑, 초록 같은 원색이던데, 하얀색이랑 검정색이라니...
그런데 그건 나의 기우였다. 지우 기호에 딱 맞는 어린이용 자전거가 있더라!
어린 녀석 취향이 세련됐기도 하여라. @.@
문제의 자전거는 삼천리자전거에서 나오는 <하이킥>이란다. 지우도 또래들보다 키가 커서 12인치를 사줘야 하나 16인치를 사야하나 고민했는데 딱 맞춤처럼 14인치짜리가 매장에 있더라나. 당연히 지우왕자는 저 자전거에 올라타곤 내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하고... ㅎㅎㅎ
제가 원하는 선물을 생일선물로 받은 지우는 연일 자전거 타기에 힘쓰는 모양이고, 겁이 많아 속도 내는 건 엄두도 못냈던 제 형과 달리 방향전환이며 속도내기에 거침이 없어 오히려 걱정이다. *_*

무릎 보호대를 하고 제 형의 뒤꽁무니를 거의 바짝 뒤쫓는 지우의 모습을 보면 난폭운전의 기질마저 느껴진다. ^^; 귀여운 녀석...

준우마저도 두발 자전거로 씽씽 달리는 모습을 본 데다 고모와 작은엄마의 미니벨로 맛을 본 정민공주는 자기도 기어 달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본격적으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미 온 집안에 불어닥친 자전거 바람에 물든 큰동생네도 전격 미니벨로를 장만하기에 이르렀다. 그것도 내 자전거랑 똑같은 다혼 우베공 흰색으로...
다만 사이즈는 내것보다 큰 걸로. ㅠ.ㅠ

이 자전거를 타다가 공주는 오른쪽 무릎을 왕창 갈아 진물이 날 정도였는데도 거의 매일 자전거를 타러 나가는 눈치다. 사진은 5월 31일에 소풍 갔던 월드컵 공원에서 타는 모습이고, 공주의 아빠가 찍은 사진이다. 자전거를 타고 느껴지는 바람이 보이는 것 같은 이런 사진.. 좋다. @.@



자존심이 심히 상하기는 하지만, 조카랑 고모랑 나란히 똑같은 미니벨로를 타고 달리는 기분은 아주 그럴듯하다. 왼쪽이 내 느루, 오른쪽이 공주의 우베공.
이땐 하필 내 자전거를 올케가 타느라 안장을 제일 낮게 했고, 정민이 자전거는 동생이 안장을 높여 탄 직후라 더더욱 형님과 동생 같이 보인다. ㅎㅎㅎ

이번엔 여기저기서 동생들 사진을 퍼왔지만, 담번엔 정말로 온가족이 떼로 모여 자전거를 탄 뒤 단체사진을 찍어와야겠다. 암튼 온 집안에 부는 자전거 바람, 참으로 흐뭇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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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천의 추억

추억주머니 2009. 6. 11. 18:11

춘천은 나에게 아련한 추억과 동경의 장소다. 김현철의 노래 <춘천가는 기차>가 나오기도 훨씬 전인 고3 여름방학때, 두 친구와 작당하여 아침부터 이어지는 따분한 자율학습을 과감히 제끼고 난생 처음 춘천행 기차에 올랐었다. 그 전에는 땡땡이라고 해봤자 저녁 자율학습 시간에 몰래 빠져나가 떡볶이를 사먹는다든지 조금 일찍 달아나는 정도였을 뿐, 하루를 온전히 빼먹는 땡땡이는 시도해본 적이 없었던 터라 전날부터 몹시 마음이 설렜다. 청량리역에서 만나 일단 성북역까지 가서는 거기서 춘천행 기차를 타야했는데, 두어시간 남짓한 그곳이 나에겐 마치 한반도 끝에 있는 부산만큼이나 심정적으로 먼 곳이라 생각되어 대단히 짜릿한 일탈로 여겨졌다. 이미 아는 오빠를 따라 춘천에 몇번 다녀본 전적이 있는 친구의 안내대로, 춘천 역에서 내려 버스를 타고 간 공지천 주변을 거닐다 호숫가에 서 있는 <이디오피아>라는 카페에서 볶음밥과 빙수를 먹은 뒤 돌아오는 기차를 탄 것이 여행의 전부였지만, 우리 셋은 너무도 행복했다. 기차를 타고 오가면서 계속 만나게 되는 남한강과 북한강 주변의 경치도 아름다웠고, 완행열차에서 사먹은 삶은달걀도 감동의 맛이었다.
그날의 추억이 얼마나 인상적이었던지 나와 친구들은 남은 학기 내내 두고두고 춘천 기차여행 이야기를 되뇌다, 학력고사를 보고 나서 졸업 전에 다시 춘천으로 이별여행을 떠났다. 진학을 하든 재수를 하든 단짝 친구들과 헤어질 수밖에 없음을 서글퍼하면서. 두번째 춘천 여행에선 꽝꽝 얼어붙은 소양강댐에도 구경했고, 새하얀 눈밭으로 변해버린 공지천을 배경으로 사진도 여러장 찍었다. 열여덟살이던 당시 춘천은 나에게 짜릿한 일탈의 공간이었고, 어른을 동반하지 않고 내가 홀로 갈 수 있는 가장 먼 곳이었고, 여러가지 매력 넘치는 기차여행을 누릴 수 있는 여행지이기도 했다.
대학에 들어가서도 나는 춘천 기차여행을 큰 자랑거리로 떠벌였지만, 전국 방방곡곡에서 상경한 친구들에게 겨우 두시간 남짓한 거리에 있는 춘천은 일탈의 장소이긴커녕 언제라도 마음만 먹으면 금세 다녀오거나 매일 통학할 수도 있는 지척의 도시였다. +_+ 그나마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서울을 벗어나 본 적이 없는 친구 하나가 동조해주는 바람에 눈이 펑펑내리던 어느날 충동적으로 다시 춘천행 기차를 탔던 날, 우린 눈이 너무 많이 쌓여 버스가 올라가지 못하는 소양댐을 굳이 걸어서 올라갔고 언 손을 호호 불며 맛없고 쓴 커피를 마시면서도 행복했다. 그날 처음 춘천 닭갈비라는 것을 먹어보았는데, 종일 눈에 젖어 덜덜 떨다가 들어가 먹어본 그 맛은 정말이지 잊을 수가 없었다.

그 뒤로도 몇년에 한번씩 춘천엘 간 적은 있지만 죄다 차를 타고 갔기 때문에, <춘천가는 기차>가 상징하는 춘천여행의 묘미와 추억을 더는 느껴볼 기회가 없었다. 완행열차 비둘기호는 사라져버렸어도 언제고 한번 꼭 기차를 타고 춘천엘 가봐야지 막연하게 마음은 먹었지만, 강원도 여행길에 일부러 들르지 않는 한 춘천 자체를 찾아갈 일도 아예 없는 편이어서 춘천은 점점 내 추억의 창고에서도 깊숙한 구석쪽으로 내몰리고 있는 형편이었다.
그러던 차에, 낭보가 들려왔다. 판화가인 막내고모가 춘천에서 열리는 강원아트페어에 전시를 한다는 소식이었다. 기차여행은 못하겠지만 간만에 춘천 땅도 밟아보고 고모 그림도 보고 닭갈비도 먹고 일석삼조, 일타삼피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거다.
그래서 지난 7일, 왕비마마를 모시고 춘천으로 달려가는 마음은 당연히 설레고 들떴다. 아직 철은 이르지만 가는 길에 가평 찰옥수수도 사먹을 생각을 하면, 막히는 길쯤은 참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왕비마마와 공주 일행이 납시었는줄 온 세상이 알았는지 전날엔 미치도록 막혀 되돌아가는 사람도 부지기수였다는 춘천행 국도도 뻥 뚫려 오히려 병목현상이 나타나는 곳마다 서 있는 옥수수 장수들을 만나는 게 어려울 정도였다. 비가 오락가락했지만, 결과적으로는 뜨겁고 매운 닭갈비를 먹기에 딱 좋은 날씨여서, 이번 춘천 여행에선 정말로 눈과 입과 위 모두 흐뭇하게 대접받고 돌아올 수 있었다. 서울에서도 가끔 닭갈비를 사먹긴 하지만, 역시 닭갈비는 춘천에 가서 먹어야 제맛이란 진리는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겠다.
또 언제 춘천엘 가게 될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린시절 일탈의 공간이었던 춘천에 처음으로 가족들을 동반하고 간 이번 여행의 의미는 또 다른 추억의 겹으로 남아 돌이킬 때마다 흐뭇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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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표 김밥

식탐보고서 2009. 6. 4. 17:57

누구나 오랜 역사와 추억의 양념 때문에라도 자기 엄마표 김밥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다고 여기고 있을 것이다. 특히 요즘처럼 김밥집이 흔하지도 않았고, 김밥 먹는 날이 일년에 몇번 학교에서나 집에서 소풍 갈때로 국한되어 김밥이 꽤나 <귀한> 음식이었던 나 같은 옛날 세대에겐 더더욱.
나 역시 김밥을 아무리 손수 <싸>먹거나 <사> 먹거나 <얻어> 먹어보아도, 옛날에 울 엄마가 싸주셨던 추억의 김밥만큼 맛있는 건 없었다고 회상하게 된다. 식성에 따라 김밥 내용물이 조금씩 달라질 수 있기는 하지만, 생김새부터 맛까지 거의 천편일률적인 김밥들 사이에서 울 엄마표 김밥은 정말 조금 달랐다.
가장 큰 차이점은 당근을 채썰어 볶는 것이 아니라 다져서 볶은 뒤 밥에다 섞는다는 것. 그리고 달걀부침도 지단으로 얇게 부쳐 잘라넣는 대신 스크램블드에그 하듯 마구 뒤적여 잘게 부숴 역시 밥과 함께 볶거나 밥에 섞었다. 나는 우리집 삼남매가 익힌 당근을 워낙 싫어하기 때문에 엄마가 어떻게든 당근을 먹이겠다는 일념으로 생각해낸 아이디어인 줄로만 알았었다. 그런데 나중에 커서 들으니 다른 사연이 있었다.
가난하던 그 시절 우리집은 비싼 일반미 대신 정부미를 주로 사먹었는데, 젊은 사람들은 그 존재조차 모를 정부미는 값이 싼 대신 당연히 일반미보다 질이 떨어졌다. 색깔도 새하얀 일반미보다 당연히 탁하고 거무스름했던 듯. 평소엔 당시 혼식장려 캠페인 때문에 강제로라도 다들 보리를 넣어 도시락을 싸가야 했으므로 정부미밥도 다른 애들 밥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소풍날 혼식 검사를 할 리도 없고, 특별식인 김밥을 쌀때엔 당연히 쌀로만 밥을 짓는 것이 정석이었던 모양이다. 새하얀 쌀밥 한 가운데 정갈하게 속 고명이 들어간 김밥들 사이에서 거무스름한 쌀로 지은 김밥을 비교당하게 만들기 싫었던 울 엄마는 밥에 참기름 말고도 다진 당근과 달걀부침을 부숴 넣어 버무리는 묘안을 생각해낸 것이었다. 어린 우리들은 그저 김밥이라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기뻐서 밥 색깔이 조금 다른 것쯤 신경도 안 썼을 것 같은데, 그 옛날부터 울 엄만 참 별 걸 다 신경쓰는 아줌마였다는 얘기다.
아무려나 볶음밥으로 다시 김밥을 싼 것처럼, 약간 노르스름한 밥에 시금치와 소시지(옛날엔 햄 대신 당연히 소시지로 김밥을 쌌다!), 어묵, 단무지를 넣은 울 엄마표 김밥은 소풍 때마다 단연 인기였다. 소풍 가서 점심시간이 되면 친구들끼리 서로 엄마 음식솜씨를 품평하듯 김밥을 하나씩 서로 바꿔먹곤 했는데, 깔끔해 보이진 않지만 전체적인 간도 딱 맞고 전혀 뻑뻑하지 않은 울 엄마표 김밥만큼 맛있는 김밥은 없었다. 부잣집 친구가 싸온, 쇠고기를 볶아넣고 자른 김밥 하나하나마다 정갈하게 한 가운데 깨소금을 얹은 최고급 김밥보다도 나는 정말이지 울 엄마가 싸준 김밥이 더 맛있었다. 단순히 팔이 안으로 굽는 것만은 아니어서, 친구들도 너도나도 내 김밥을 하나 얻어먹으려고 달려들 정도였고, 소풍에 따라오신 친구 엄마들도 울 엄마한테 김밥 만드는 비법을 묻기도 했다.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엔 우리도 일반미를 먹을 형편이 되었지만, 우리집 김밥 만드는 법은 바뀌지 않았다. 쌀이 아무리 좋은 거라도 맨밥에 참기름과 소금만 버무려서는 절대로 울엄마표 김밥 맛이 나지 않는 걸 어쩌랴.
우리들이 다 자라 학교에서 소풍가는 일이 더는 없게 된 뒤에는 정말로 연중행사처럼 드물게 엄마표 김밥을 맛볼 수 있었다. 내가 조르거나, 김밥을 특히 좋아하는 막내가 먹고 싶다고 하면 엄마가 귀찮음을 무릅쓰고 해주셨는데, 옆에서 내가 거드느라 엄마의 코치대로 김밥을 말아보면 영낙없이 옆구리가 터지거나 내용물이 한쪽으로 쏠렸다. 요리솜씨 뛰어난 엄마의 유전인자를 어느정도 물려받아 웬만한 음식은 흉내낼 수 있다고 생각하고는 있지만, 예쁘게 김밥 마는 비법은 도무지 터득할 수가 없었다. 김밥집에서 파는 것처럼 밥을 잔뜩 많이 넣으면야 나도 내용물을 한가운데로 몰리게 할 수 있지만, 내가 원하는 건 한입크기로 적당히 얇으면서 내용물이 정 가운데 들어가도록 하는 것인데 난 왜 그게 안되는지! 그걸 터득하겠다고 허구한 날 김밥을 싸먹을 순 없는 일이어서, 얼마 전부터 나는 너무도 귀찮은 김밥싸먹기를 포기하기로 마음 먹었다. 울 왕비마마는 와병 후 살림에서 손을 뗀지 수년이고, 제대로 된 엄마표 김밥을 마지막으로 먹은 건 아마도 10년은 되지 않았을까 싶은데, 내가 아무리 솜씨를 부려도 김밥만은 추억의 그 맛과 모양을 살려낼 수가 없었다. 정 집에서 싼 김밥이 먹고 싶으면, 조카들의 잦은 소풍 뒷바라지에 이젠 김밥달인이 되었다는 올케들에게 살짝 몇 줄 더 싸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일인 걸 뭐. ;-p (이러니깐 시누이 소리 듣는 거라고?? ㅋㅋ)

하지만 또 내가 누구인가. 식탐 앞에선 웬만한 결심도 손바닥 뒤집듯 하고 의지력을 바닥내는 단세포 동물.
얼마 전 집에서 싼 김밥이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다른 요리는 후다닥 뚝딱 잘도 하겠는데 김밥은 정말로 귀찮아서 다시는 만들어먹지 않겠다고 결심한 걸 뒤집을 만큼 욕망이 컸다. 얼른 마트에 가서 재료를 사다가 준비하고 있으려니 아차 싶었다. 집에 흰쌀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거다. 엄마의 건강을 위해 매번 항아리에 백미, 현미, 흑미, 서리태, 보리, 율무, 기장쌀까지 모두 적당한 비율로 섞어 넣어놓고 밥을 해먹고 있으니, 흰쌀이 따로 마련되어 있을 리가 없었다. 영양가야 더 많겠지만 김밥을 시커먼 밥으로 싸야하다니... 속상한 일이었다. 밥도 어지러운데 다진 당근과 달걀을 섞어 넣는 건 곤란할 것 같아 당근은 아예 넣지 않기로 했다. 익힌 당근 싫어!

사진은 그렇게 해서, 아마도 수년만에 내가 싼 깁밥의 몰골이다. 심혈을 기울여 치즈까지 넣었지만 밥이 너무 뜨거워 금세 녹아 더욱 볼품없어졌고, 내용물은 역시나 한쪽으로 밀린데다 크기도 들쭉날쭉 가관이었다.
내용물에 다 따로따로 간을 했어도, 원래 방식대로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 싱거워 30% 이상 부족한 깁밥을 꾸역꾸역 집어 먹으며 나는 또 중얼거렸다.
"내 다시는 집에서 김밥 싸먹나 봐라..."

엄마는 좀 싱겁긴 해도 먹을만하다고(맛있다고는 절대 하지 않으셨다!) 했지만, 들인 품과 기대에 비하면 결과물은 실망스럽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랏간 무수리의 삶을 이어오면서 느끼는 건, 아무렇게나 쉽게 대충 해서 먹을 때 결과물이 더 흡족하다는 사실이다. 괜히 공들여 절차가 복잡한 요리를 하면, 가사노동을 즐기지 않는 나로서는 그 과정에 이미 지치고 화가 나는데다 식탐과 식욕 기대치 또한 높아 웬만해선 만족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왜 또 그렇게 먹고 싶은 건 많은지 원...
벨로와 키드님이 통영 여행에서 먹은 충무김밥 자랑하는 거 보고 식탐이 동해 해먹은 짝퉁 충무김밥도 그랬었다. 역시나 잡곡밥으로 싼 김밥은 보기에도 먹음직하지 않았고, 모나브님의 요리법대로 애써본 오징어무침도 어딘가 심히 부족한 맛이었다.
ㅠ.ㅠ
채썬 무를 미리 절였다가 손아프게 짜서 무쳤는데도, 왕비마마의 촌철살인.
"무가 좀 더 아작아작했어야지."
당연히 나는 그때도 투덜거렸다.
"다시는 해먹나 봐라..."

오늘은 또 무얼 해먹나 오후 내내 무수리의 고민을 잇다보니 문득 엄마표 김밥 생각이 나서 3월과 5월에 찍어둔 사진을 찾아 주절거리기 시작했는데, 결론은 없다. 김밥 싸는 엄마 옆에 앉았다가 김밥 꽁지 낼름낼름 집어먹으며 행복하던 그 때가 그저 그리워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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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1일

투덜일기 2009. 6. 1. 15:50

얼마전 토룡마을 주민들과 자전거를 타러 갔던 날, 홀로 집을 지키던 엄마가 전화로 말했었다.
"월드컵 공원 좋아? 엄마도 가보고 싶다."
서울서 태어나고 자라서 오히려 서울 곳곳을 <관광>하러 다니는 게 어색한 우리 엄마는 특히 최근들어 생겨난 크고 작은 공원 같은 곳에 대한 동경 같은 게 있는 듯해, 몇년 전부터 가끔씩 모시고 다니리라 다짐은 했지만 실천에 옮기는 건 늘 게으름에 밀리기 일쑤다. 하늘공원은 작년엔가 막내네가 모시고 다녀왔지만, 바로 아래쪽 평화공원엔 왕비마마가 발을 들여놓은 적이 없었다. 더불어 서울숲과 올림픽공원, 한강 둔치, 유람선도 아직 과제로 남아 있다.

그래서 더 더워지기 전에 월드컵 공원 소풍을 계획하고 나선 것이 어제. 엄마는 걷는 운동을 하고 나는 자전거를 차에 싣고 가 타기로 마음 먹었더니, 소풍 계획을 알게된 정민공주네도 합류하고 싶어 했다. 온집안에 몰아친 자전거 열풍에 휩쓸려 자기도 어린이용 자전거 말고 <기어> 달린 자전거를 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르던 공주가 드디어 소원을 이루어 <우베공>을 장만했기 때문이다. 그것도 나와 똑같은 하얀색. 당연히 작은 사이즈로 샀을 줄 알았더니, 자존심 상하게도 M사이즈였다. ㅠ.ㅠ 좀 더 있으면 당연히 공주가 나보다 키가 커지겠지만, 제 아빠도 같이 타려면 큰 걸 사는 게 정상이긴 하지만, 그래도 고모로선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뭐든 고모 자전거랑 똑같아야 한다며 욕심을 부리던 공주는 제 자전거가 더 크다는 사실이 못마땅한 모양이더니, 벨로 언니도 M사이즈라니깐 그제야 생글생글 웃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M사이즈 살 걸! 안장 제일 낮추면 지금 내 안장 높이랑 똑같던데 ㅠ.ㅠ;;

원래 계획은 왕비마마를 모시고 월드컵 공원을 한바퀴 돌아 <빡시게> 운동을 시키는 것이었지만, 초장부터 다리 아프다며 드러누워 좀체 운동을 하려하지 않는 왕비마마를 독려하는 건 불가능했다. 속으로는 정말로 눌린 척추신경을 복원하는 수술을 해야하는 단계에 도달한 것인지 겁부터 나는데, 겉으로는 엄살부린다며 엄마한테 자꾸 짜증을 내고 있었다. 왕비마마는 자꾸 돌아다니며 전단지를 주고 가는 중국집, 치킨집 먹거리에 끌리는 모양이었고 공주네 식구도 잔디밭에 앉아 짜장면과 짬뽕을 먹고 싶어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단호히 그들을 말렸다. 말이 소풍이지 본래 목적은 가열찬 운동이건만, 나와서 잔뜩 먹기만 하면 무슨 소용이람!  

왕비마마의 운동량은 오히려 평소 홍제천 산책 때보다 적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훌륭한 편이었다. 월드컵 공원에 간 게 수차례이면서도 구석구석 다 돌아본 적 없던 나는 거의 공주에게 끌려다니다시피 공원을 여러바퀴 돌아야 했고, 심지어 공원이 너무 좁아서 자전거 타는 맛이 안난다는 공주를 데리고 한강으로 나가 성산대교, 양화대교를 지나 당산 철교까지, 그리고 다시 돌아 가양대교 방면으로 자전거길 조성공사를 새로이 하느라 길을 막아놓은 곳까지 다녀왔으며, 귀가길에도 차는 동생에게 맡긴 채 홍제천을 따라 자전거를 타고 돌아와야 했다. +_+
자전거를 처음 배우기 시작한 올케 역시 핸들이 좀 흔들리긴 해도 꽤나 진척이 있어 사람들이 많지 않은 길에선 퍽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으며, 잠시 한강변 답사를 다녀온 큰동생도 우리집에서 반포대교까지는 무리없이 출퇴근할 수 있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원래 언덕 위 우리집에서 월드컵공원까지 자전거로 걸리는 시간은 25분에서 30분. 차로 가면 주차시간까지 합해도 15분이 안 걸린다. 시간상으로는 당연히 자동차가 빠를 수밖에 없지만, 돌아오는 길에 과연 누가 빨리 도착할 것인지 궁금했는데, 예상외로 자전거를 타고 온 우리가 훨씬 빨랐다. 자전거길 조성공사로 군데군데 공사중이던 홍제천변 산책로 포장이 거의 끝났기 때문이기도 했고, 공원 주차장에서 차 두대가 빠져나오는데만도 엄청 시간이 많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가뜩이나 팍팍한 다리로 자전거를 끌고 마지막 언덕길을 오르며 나는 정말 죽을 맛이었는데, 여전히 팔팔하게 기운이 넘치는 공주는 공원에서 고모네 집까지 생각보다 거리가 너무 가까워서 실망이라고 했다.

어느새 너무 익어 마당에 떨어져 굴러다니는 앵두를 올해 처음 따면서 일행을 기다리는 동안, 나는 정말 감개무량했다. 느루를 장만하고 1년 넘게 내가 자전거를 탄 시간은 하루에 길어야 1시간 남짓. 다리가 묵직해지기 시작하면 이내 쉬면서도 홀로 흡족해했던 것 같다. 그런데 어젠 중간에 쉬엄쉬엄 타기는 했어도 꼬박 3시간은 자전거를 탔을 거다. 막판엔 엉덩이가 찢어질 듯 아프고 다리도 묵직하다 못해 거의 뻣뻣해졌으니까. 밤 10시도 되기 전에 쓰러지듯 잠들었다가 일어난 오늘도 여전히 삭신이 쑤시는데, 예상보다는 거뜬하다. 지난주에 미리 좀 걷고 자전거를 타둔 게 효과가 있었던 모양. 왕비마마도 자전거를 타실 수 있다면 다리가 좀 아파도 운동을 더 많이 할 수 있을 텐데, 무슨 방법이 없을까. <프렌즈>에서 피비가 타던 어른용 네발 자전거 생각이 난다. 우리나라엔 어른용 네발 자전거 없나? +_+ 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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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전 대법원에서 존엄사 권리를 인정한 원심을 확정하는 판결을 내렸다는 뉴스를 보았다. 소송중이었던 환자는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것 같은데, 얼마 전 서울대병원에서도 말기암 환자의 경우엔 별 의미 없는 연명치료를 거부할 수 있는 권리를 공식적으로 인정하겠다고 발표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도덕적으로 지탄받지 않을 존엄사의 범위와 관련법 제정 문제는 아직도 갈 길이 멀지만 그나마도 다행스러운 방향으로 진척이 있는 듯 해 기쁘다. 소모적인 중병으로 오래 앓지 않고 편히 자연사를 할 수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으나, 사람 일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고 수명이 나날이 길어지면서 말년에 온갖 병마에 시달릴 가능성은 더욱 높아진 게 사실이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한번은 죽음을 맞게 되어 있지만, 자살을 제외하곤 그 운명의 순간을 자기 의지대로 결정할 방도가 없었다. 갑작스레 혼수상태에 빠진 환자는 물론이고 이제껏 중병에 걸린 환자의 치료방향에 대한 결정권은 언제나 의사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입원할 때부터 치료비를 담보할 수 있는 연대보증인을 반드시 세워야 하고, 아주 간단한 수술에도 각종 의료사고에 대한 온갖 책임을 다 짊어지겠다는 보호자의 동의서가 필수적인 이 나라 의료체계에서는 무엇 하나 환자 본인의 적극적인 의지대로 되는 것이 없다.
그런데 회생가능성이 전혀 없는 상황에 의미도 없고 소모적이기만 한 연명치료를 무작정 이어가며 환자 본인과 가족들을 경제적, 심리적 공황상태에 빠뜨릴 이유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순히 치료비가 없거나 병상이 모자라다는 이유로 살아날 가망성이 있는 환자의 목숨을 비정하게 끊어버려도 괜찮다는 얘기가 아니다. 그건 당연히 살인이고 파렴치한 범죄임을 모르는 이가 어디 있겠나. 하지만 치료의 단계가 아예 불가능해져서 진통제로도 고통을 제대로 줄여줄 수 없고, 전적으로 기계장비에만 의존해 고통스럽게 생명을 유지하고 있는 터라 죽음의 순간을 억지로 지연시키고 있을 뿐이라면, 그 환자가 바로 나라면 나는 환자의 인권따위를 운운하는 게 하찮게 보이는 중환자실의 숨막히는 공기를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을 것이고, 기꺼이 편한 죽음을 선택할 것이다.

물론 가족의 입장에선 또 마음이 달라짐을 나 역시 잘 안다.
2년 전 응급실에 도착해서도 멀쩡히 걸어다니며 농담을 하시던 아버지가 갑자기 혼수상태에 빠져 다시는 깨어나시지 않았을 때, 우리 가족들은 냉정하게 가망성을 낮춰 말하는 의사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우린 의사들을 믿느니, 일주일에 세번씩 꼬박 등산을 다니시던 울 아버지의 의지력과 건강을 믿는다며, 고집을 부렸다. 겨우 2주만에 뇌손상으로 적극적인 치료는 전혀 할 수 없는 상황이니 요양병원 같은 곳으로 모시고 나가라는 세브란스 병원측의 몰인정한 통보를 받고도 우린 아버지가 곧 깨어나실 것이기 때문에 믿음직한 의료진이 없는 요양병원 같은 곳은 절대 갈 수 없다고 버텼다. 결국 온갖 연줄과 인맥을 동원해 다른 대학병원으로 아버지를 옮기고 나서도 우린 희망을 버릴 수 없었고, 의사들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하든말든 우리 가족들은 아버지의 장기 입원에 대비해야 한다고 의논을 했었다. 그땐 정말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었고, 그렇게 온갖 주사와 약물로 버티고 있으면 기적 같은 게 일어나 아버지가 조만간 번쩍 눈을 뜨실 거라고 믿고 싶었다. 나날이 약물과 주사의 양이 늘어났고, 체액순환이 거의 안되는 아버지의 체중도 늘어났다. 의사들은 <뇌사 직전의 상태>라고 말하며 우리에게 포기를 종용하는 눈치였지만, 우리는 <아직 뇌사는 아니지 않느냐>고 항변했다. 가능한 모든 조치를 취해달라고 우기는 우리들에게 의사들은 그나마 아버지가 그 어떤 고통도 느끼실 수 없으니 다행이라는 식으로, 아버지를 우리가 쓸데없이 괴롭히고 있는 것이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말했었다. 마지막엔 거의 협박처럼 들리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보호자들의 고집 때문에 무리한 치료를 계속하게 되면 나중에 임종후에 거의 알아볼 수 없을 정도가 될 수도 있다고. 우리 아버지도 그 병원으로 옮긴 뒤부터 따져도 이미 10kg이나 체중이 늘었다고. 나중에 후회하지 말라고.
그때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의사들이 냉혹하게 퍼센티지로 말하는 가망성에 연연하지 않고 온갖 치료방법을 동원해 아버지를 살려내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 틀림없다. 최선을 다해보지도 않고 쉽사리 처음부터 포기할 가족이 어디 있겠나. 야속한 우리 아버지는 그렇게 한달도 채 버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셨는데, 너무 많이 부어 평소의 모습과 퍽 달라진 아버지의 마지막 모습을 떠올리면 지금도 마음 한켠에 죄송한 마음이 들긴 한다. 억지로 온갖 약물과 주사액을 주입하던 과정에서 혹시 아버지가 고통을 느끼셨던 건 아닐까, 내 마음 편하자고 심한 고집을 부린 건 아니었을까. 하지만 죄송한 마음은 마음이고, 가족으로서 품는 희망은 쉽게 버려지는 것이 아니다. 어느쪽을 선택했더라도 후회는 피할 수 없는 것이라면 여한없이 노력하고 버텨보는 쪽을 택하는 것이 인지상정일 것이다.

그런데 내가 환자의 입장이라면 생각이 달라진다. 아버지가 세브란스병원 심장혈관센터 중환자실에 계시는 동안 그곳 의료진들은 무의식인 환자의 치료를 편하게 하겠다는 생각 때문인지 아버지에게 환자복도 입히지 않은 채 얇은 시트로 덮어놓기만 했었다. 중환자실에서도 홀로 방이 따로 마련되어 있었고, 체온이 수시로 오르내리고 해당 바이러스에 맞는 항생제를 찾는 게 시급한 상황이긴 했어도, 목숨이 오락가락하는 중환자실에서 환자의 인권을 찾는 게 사치일 순 있어도, 평생 점잖으셨던 아버지의 그런 모습이 나는 몹시 안타까웠다. 내가 아무리 의식이 없는 환자라도 발가벗겨져 아무렇게나 의료진의 손길에 몸을 맡겨야 하는 상황은 상상하고 싶지 않으니까. 품위 있게 죽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지 조목조목 따질 순 없지만, 마지막까지 인간으로서 제대로 대우받으며 삶을 마무리할 수 있다면 기필코 나는 그 방법을 택하겠다. 타인이 주체가 되어 거의 의도적인 살인의 의미마저 풍기는 <안락사>라는 말 대신 <존엄사>라는 말이 쓰이게 된 배경에도 환자 본인의 주체성을 인정하는 태도가 들어있을 것이다. 존엄사 결정권에 대한 엄밀한 법적 통제와 의사들의 정직한 직업윤리, 환자 및 보호자의 인권을 모두 감안한 도덕적인 존엄사의 존재는 정말로 환영할 일이다. 부디 엄숙한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이 제도가 맹목적인 종교 윤리를 앞세운 무작정 반대나 패륜의 도구로 이용되는 일 없이, 진짜로 품위있게 죽을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길이 되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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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삶꾸러미 2009. 5. 10. 16:23

이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제일 먼저 어떤 뜻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진지하다>의 어간인 진지를 떠올릴 것 같고, 군대와 관련된 직업인이나 갓 제대한 이는 부대에 꾸려놓은 진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밥>의 높임말인 순우리말 <진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어렸을 때 <진지 잡수세요>, <진지 잡수시래요>라는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가 없었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나무를 손보시거나 집 한켠에 비닐로 덮어 마련한 새장에서 새들을 거두고 계시면 할머니나 작은엄마, 우리 엄마는 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가서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그러면 당연히 큰딸인 내가 할아버지를 불러와야하는 것처럼 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퍽 자주 있는 일임에도 나는 저 말이 좀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웅얼웅얼 쭈뼛거렸다간 할아버지한테 혼쭐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번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질끈감고 어렵사리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래요."
그러고는 그 어려운 말을 혹시라도 잘못 발음한 건 아닐까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른 후다닥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중에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진지 드시래요>로 좀 바꾸기도 했다. <진지>도 어렵지만 <잡수시다>라는 존칭어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대학생쯤 되고 나선 더 영악해져 <진지>라는 말을 아예 빼버리고 <할아버지, 점심 드세요> <저녁 드세요> 그렇게 내 마음대로 바꾸어 썼다. 어른 공경에 관해서는 몹시 엄하셨던 터라 어른에겐 뭐든 먹을 것을 권할 때 <잡수세요>라고 해야한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박히게 잔소리를 하셨던 할아버지도 그 즈음엔 기력이 쇠하셨던지 별 타박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하셨다.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나조차 쓰기 어렵다고 바꿔쓰고 외면했던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요즘은 더욱 듣기 어렵다는 생각에 자꾸 안타깝다.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유아어인 <아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선 거의 반말을 썼던 내가 아버지 생전에 직접 진지 잡수시라고 제대로 된 높임말을 썼을 리 없다. 그나마 나도 끼니때 조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영 자신이 없다. 늘 하던대로 <저녁 드시라고 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요샌 너도나도 <식사하다>라는 말을 아무때나 쓰고 있긴 한데, 난 또 그 말이 왜 그리 싫은지 모르겠다.
호감이 갔던 사람이라도 그 입에서 "식사했어요?"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셔야죠?"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난 순간적으로 오만정이 다 떨어짐을 느낀다. 더불어 <식사시간>이란 말도 싫다. 그냥 점심시간, 저녁시간, 이라고 하면 좀 좋은가. 서류로 만든 일정표 따위엔 어쩔 수 없이 <식사시간>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흔히 쓰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 저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 나의 언어생활은 여전히 상스럽다. 엄마에게 툭툭 던지는 반말은 친근함의 표현이라 극구 주장하며, 화난 거 티 낼때만 엄마에게 존댓말을 쓴다. 평소엔 아무 생각없이 "엄마 밥 먹어!"와 "엄마 저녁 드셔!"를 거의 반반씩 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럴진대 조카들이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연습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옛날 거의 매일 그 어려운 말을 입에올려야했던 나도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거늘 우리 조카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의도적으로 우리 집에서나마 <진지>와 <잡수시다>라는 말이 사장되지 않도록 써보리라 마음은 먹었는데, 열두살이 된 큰조카는 단 1초도 고민없이 이미 내가 예전에 했던 말바꾸기를 실천한다. 가령 내가 "할머니 과일 잡수시라고 해라"고 하면 공주는 "할머니 과일 먹어!"라고 외친다는 얘기다. -_-;;
나 역시 애써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예전처럼 지금도 그 말들이 좀체 입에서 나오질 않으니, 무작정 조카를 나무랄 수도 잔소리를 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상스러운 반말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이따 저녁때는 기필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볼 작정이다. "엄마 저녁 진지 잡수셔." 반말과 높임말의 어중간한 형태라 요상해도 어쩔 수 없다. 갑작스레 극존칭 어미를 쓰면 왕비마마는 늙은 딸이 또 화난 줄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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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준비

삶꾸러미 2009. 4. 24. 17:58
원래부터 준비성이 뛰어난 인간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점점 까다롭고 괴팍한 유형으로 변하면서 뭐든 조바심을 품고 진즉에 준비를 해야 마음이 놓인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하긴, 미리 준비한다고 해서 척 마음을 놓고 뿌듯해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옛날보다 미리 걱정하는 시기가 빨라진 것뿐이라 괜스레 전전긍긍하는 기간만 길어졌으니 그것도 내심 못마땅하다.
아무려나 어린이날, 어버이날 빼곡히 들어있는 5월이 오려면 아직 꽤 남았는데도 나는 열흘전부터 고민에 돌입했다. 생일 챙기면 됐지, 어린이날과 크리스마스는 그냥 좀 넘기라고 잔소리하는 올케도 있지만 때맞춰서 조카들 선물 챙기는 것도 고모의 낙인데 어쩌라고! 물론 낙과 더불어 요샌 선택의 고민도 커지긴 했다. 만날 똑같은 걸 사줄 수도 없고...
원래 아이들은 옷선물이랑 책선물을 제일 싫어한단다. 그건 부모가 언제든 사주어야 할 의무가 있는 필수품이지 선물로 기쁘게 받을 품목은 아니란 얘기다. 그래서 나도 점수를 더 따려면 장난감을 사주어야겠지만 이번엔 녀석들이 못마땅해 하더라도 건설적인 책선물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고 이미 준비를 마쳤다. 슬쩍 어린이날 선물이 뭔지 떠본 공주는 책선물이라고 하자 몹시 실망하여 거세게 항의 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선물 주면서 나만 신나면 그만이지 뭐. 요즘 애들 책은 내가 봐도 신기하고 재미나다. *_*
곧이어 어버이날 선물은 또 뭘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왕비마마께서 수월하게 해결해주셨다. 작년에 김영임의 <효> 공연을 보여드렸는데 올해도 또 가고싶으시단다. -_-;; 작년에 공연 볼 때도 마치 중노년계의 이효리라도 되는 듯 엄청난 인기를 누리는 김영임 아줌마를 보며 나는 꽤나 의아했는데, 레퍼토리도 비슷할 게 뻔한 그 공연을 울엄마가 또 보고 싶다는 걸 보면, 그리고 벌써 사흘 내내 vip석은 한자리도 남지 않은 걸 보면 내가 몰라서 그렇지 엄청나게 인기 많은 공연인 모양이다. 아니면 효도는 딱 5월 한달동안에만 해야한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자식들이 선택하기에 적합한 공연이거나(공연 제목부터 <효>라잖아!). 울 엄만 옛날부터 외할머니가 그리 좋아하셨던 <회심곡> 때문에 가고 싶다고 하셨던 건데 올해는 좀 길게라도 불러주면 좋겠다. 작년엔 화려한 무당차림으로 굿하다 중간에 객석에 내려와 돈 걷어간 것밖에 기억에 안남는다. 내가 보기엔 시큰둥해도 어르신들은 예쁜 그 아줌마가 손한번이라도 잡아주며 잘왔다고 하니 만원짜리는 물론이고 수표까지 막 찔러주더군. 나로선 꽤나 놀라운 문화충격이었다. 나이 들어도 좋아하는 가수나 소리꾼한테 열광하는 건 똑같다는 걸 몰랐다는 게 이상한 건가? 그나마 울 엄만 나훈아, 남진 공연 보고 싶단 소리 안하니 천만다행이다. 그 아저씨들도 중노년계의 <비> 수준이라던데. ㅋㅋ
째뜬 5월 준비는 얼추 끝났다. 언제 어디서 무슨 메뉴로 거국적으로 밥을 먹을까, 를 결정하는 문제는 아직 남았지만 그거야 아랫것들이 정하라고 할 작정이다.
이젠 홀가분한 마음으로 5월을 기다려도 되는데, 왜 아직도 마음이 묵직한지 그걸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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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단상

식탐보고서 2009. 4. 17. 21:43
얼마전 공주님 납시는 날 저녁메뉴를 무얼로 할까 고민하다 연어 스테이크를 구웠다. 거창하게 말해 연어 스테이크지, 소박하게 말하면 그냥 생선구이였다. 다만 멋을 좀 부리느라 연어 살덩이에 소금과 후추, 바질가루를 슬쩍 뿌려 1시간쯤 재놨다가 열량은 그냥 무시하고 버터와 다진마늘을 좀 넣어 구웠고, 어서 본 건 있어가지고 타르타르소스랍시고 다진 양파와 다진 마늘을 마요네즈에 버무린 뒤 피클 대신 병제품으로 나온 레몬갈릭소스를 조금 섞어 구운 연어에 얹어 먹었다. 당연히 구울 때부터 고소한 냄새가 진동을 했고, 훈제 연어 샐러드인줄 알고 인상을 찌푸리던 공주님은 반색을 하며 맛있게 먹어주었다. 제대로 된(?) 연어를 처음 먹어본다면서.
왕족들은 역시 아무리 잘해줘도 끝이 없다. 이번주에 역시나 공주님 납시는 날 장도 보러가기 전에 일찌감치 전화가 왔길래, 오늘은 빨간고기를 해줄까 닭볶음탕을 해줄까 물었더니 공주의 대답이 가관이었다.
"둘 다 싫고 내가 안 먹어본 걸로 맛있는 거 만들어주라. 지난번 연어 스테이크처럼." 
버럭 화가 나서 고모가 해주는 거 아무거나 먹으라고 대꾸하곤 또 착한 무수리답게 골똘히 고민해봤는데, 연어 스테이크는 어쩌다 운이 좋았던 것이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12살난 조카가 먹어보지 않았으면서 내가 요리해줄 수 있는 <맛있는> 음식이란 거의 없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바야흐로 없는 것이 없는, 풍요의 세상에 태어나 거의 모든 걸 누리며 살아온 공주가 아닌가 말이다.

일제 강점기 끄트머리에 태어나 전쟁을 거치고 어마어마한 변화의 역사를 거쳐온 우리 엄마 세대엔 댈 것도 아니겠지만, 먹거리에 관한 한은 나 역시 퍽이나 큰 변화의 흐름 속에 살아왔다고 할 수 있다. 외식이라고 하면 엄마 곗날 중국집에 쫓아가 짜장면을 먹거나 졸업식 같은 중요한 날 큰맘 먹고 한일관 같은 불고기집엘 가는 게 전부였던 나의 유년과 비교하면 요즘 호화찬란하고 국적까지 다양한 외식문화와 먹거리의 발달은 입이 딱 벌어질 정도다.
아직도 지방에 따라 취향에 따라 사람들마다 먹어본 음식의 종류가 한정될 터이고, 음식도 유행이라 시대의 흐름을 타 새로 생겨나거나 새삼 유행을 하거나 인기를 잃어 사라지는 걸 막을 순 없을 것이다. 그러나 집밖엘 나가보면 한집 건너 한집씩 음식점이 자리잡고 있을 정도로 놀라우리만치 방대해진 외식산업은 확실히 옛날과 다른 방식과 빈도로 사람들을 지배한다. 나는 감자탕을 대학시절에나 비로소 구경해보았고 삭힌 홍어 전문점은 사회생활을 한참 하고 난 뒤에나 접할 수 있었으며 누룽지탕 같은 메뉴는 불과 몇년 전에 생겨난 것 같은데, 우리 조카들만 해도 이미 열살 이전에 저런 음식들을 다 거쳤기 때문이다. 다 외식을 즐기기도 하고 맛있는 거라면 사족을 못쓰는 어른들 탓이고, 또 정 먹고 싶으면 삭힌 홍어 사다가 집에서도 삼합을 만들어 먹거나 오븐에 수제 피자를 구워내는 놀라운 솜씨를 지닌 우리 올케들 덕분이다. 
뷔페에라도 가면 울 엄마는 지금도 무얼 먹어야할지, 뭐가 뭔지 메뉴를 읽어도 잘 모르겠다고 푸념을 하시는 터라 우리 아랫것들이 적당히 알아서 음식을 담아다드릴 때가 많다. 하지만 유치원생과 초등학생인 어린 조카들은 아무 문제 없이 척척 지들이 먹고 싶은 것들을 담아다가 먹는다. 어쩔 땐 어른들이 되레 그들에게 뭐가 맛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우리집의 진짜 미식가들은 어린 조카들이어서, 옛날부터 그들이 잘 먹고 맛있다고 하는 걸 먹으면 실패하는 법이 없었다. +_+ 파스타가 맛이 없네, 깐소새우가 맛이 있네... 어른스러운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가끔은 실소가 나온다.
스파게티가 파스타의 한 종류임을 내가 알게 된건 분명 어른이 되고 난 뒤였다. 아니, 어른이 된 후로도 한참동안 스파게티는 <경양식집>에서 가끔 파는 맛없는 이태리 국수라고 여겼고(그게 첫 만남이었으니까;;) 맛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첫 출장을 갔을 때 본사 직원들이 환영파티랍시고 뉴욕에서 꽤 유명한 이탈리아 레스토랑엘 데려가선 파스타를 먹으라고 권하는데 난감할 수밖에 없었다. 뉴욕까지 가서 맛없는 스파게티를 환영파티 음식으로 먹을 순 없다고 여기며 낯선 메뉴에 끙끙거리다 누군가의 추천으로 시켜 먹은 <토르텔리니>의 맛을 나는 지금도 잊지 못한다. 이태리식 작은 만두인 토르텔리니를 맛있게 하는 곳을 아직도 서울에서 찾아 헤매고 있을 정도. +_+
어쨌거나 나는 <파스타>라는 말을 안 게 얼마 안되는데, 겨우 열살 전후의 조카들이 제 엄마에게 파스타며, 바비큐립, 퀘사디아 같은 어려운 음식이름을 척척 대며 만들어달라고 청하는 걸 보면 세상이 변해도 참 많이 변했구나 싶다. 그리고 확실히 음식은 길들이기 나름이다. 내 주변엔 덩치만 커다란 어른이었지 감자탕이며 선지해장국, 간장게장을 못먹거나 맛을 모르는 지인들이 꽤 되는데 나의 조카들은 서너살 때 이미 입주변이 새빨갛게 변할 만큼 매워서 낑낑대면서도 감자탕의 맛을 알았고(할아버지의 술안주 기호식품이었으니까;;), 선지 해장국을 시키면 공주는 온 식구들의 선지를 죄다 빼앗아 먹곤 했다. 간장 게장 게딱지를 먼저 차지하고 앉아 거기에 야물딱지게 밥을 비벼 먹는 아이들의 모습이 우리 집에선 전혀 놀라운 게 아니다. 물론 요즘 아이들답게 조카들도 고기를 심히 편애하고 채소를 마지못해 먹기는 하지만 지금 하는 식상활 대로라면 웬만한 나의 지인들보다 빨리 음식 사회화 과정을 마치고도 남을 것 같다. 그런 마당에 나더러 안 먹어본 맛있는 요리를 해놓으라니...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요구였던 셈인데, 난 또 뭐가 없을까 며칠째 틈틈이 고민하며 무수리의 책무에 충실히 살고 있다.

음식은 언제부턴가 식탐 많은 나에게 끝없는 욕망의 대상이자 짜증스러운 노동의 집약체가 되고 말았다. 맛있는 음식 먹는 걸 그 무엇보다 좋아하기에 식도락 흉내내며 이런저런 음식점을 순례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요즘은 확실히 예전보다 외식 요리에 대한 애정이 줄었고 좋지 못한 재료가 남기는 외식 후유증에 더욱 민감해졌다. 복잡한 건 귀찮으니까 당연히 재료의 원맛을 살리는 소박한 요리법을 실천하게 되기도 했고, 온갖 성인병의 징후를 다 갖고 있는 엄마 때문에라도 싱겁고 건강한 집밥을 <손수> 해먹고 살다보니 생겨난 결과다. 아직도 맛있는 걸 먹으면 몹시 행복한데 그걸 만드는 주체가 주로 나여야 한다는 상황은 여전히 뼈저리게 체화되질 않는다. 비길 데 없이 맛있었던 엄마표 탕수육과 엄마표 돈까스, 엄마표 김밥 따위를 이제 더는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거부하고만 싶은 중년의 딸에게, 부엌은 확실히 <맛있는 냄새가 나는 지옥>이다(오래 전 씨네 21 칼럼에서 본 표현인데 바쁘게 부엌에서 콩닥거리다가 땀찬 고무장갑을 서둘러 벗을 때 잘 벗겨지지 않는 짜증스러움 등 공감가는 얘기들이 참 많았으되, 누구의 칼럼이었는지 기억나진 않는다). 차라리 먹는 걸 뜨악하게 여기는 사람이었더라면 정말 대충 해먹으며 덜 불행하게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결국 문제는 나의 식탐으로 귀결됨을 느끼며 더욱 한숨이 나온다. 요리하는 건 싫은데 반찬 없는 밥상은 더 싫으니 어쩌란 말이냐!

이왕 할 거면 투덜거리지를 말든지, 투덜거리려면 하지를 말든지 둘 중 하나여야 할 텐데, 식탐녀 무수리는 끼니때마다 노상 입이 튀어나온다. 어쨌든 오늘 저녁 다시멸치와 마른 새우를 넣고 감자 한개, 애호박 반개, 양파 한개, 새송이버섯 한개, 맛타리 버섯 한줌, 두부, 다시마가루 조금, 된장을 풀어 끓인 된장찌개는 <매우> 맛있었고, 소금을 거의 뿌리지 않고 고추냉이 간장에 찍어먹은 삼치구이도, 파프리카, 오이, 샐러리, 삶은 달걀에 발사믹 식초와 흑임자소스를 섞어 뿌린 샐러드도 훌륭한 맛이었다. (솜씨 자랑하는 거 맞다;;)
짜증과 투덜거림 속에서 그나마 내가 붙들고 살아갈 기둥은 이것뿐이려니...
<식탐은 나의 힘. 밥심으로 살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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