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이어 올해도 魔의 6월이다. 작년에도 6월의 첫째 월요일에 119를 불러야했고, 아버지의 1주기는 보름도 남지 않았는데 이번엔 엄마가 목발을 짚은 채로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지난 월요일에 또 119를 불러 응급실로 달려가는 사태가 벌어졌다. 나 역시 계단을 그리도 무서워하고 실제로 현관 계단에서 몇번이나 넘어지고 구르기는 했지만 심하게 다친 적은 없었는데, 그간 다행스럽게도 전혀 사고를 내지 않았던 엄마는 이번 사고로 척추뼈가 부러지셨다. 다행히 머리엔 뇌출혈이 없어 척추골절만 치료하면 되는 상황이라 엄마도 나도 서로 위로를 하고 있긴 하지만 꼼짝없이 2주간 드러누워 부러진 뼈에 찬 피가 흡수되기를 기다렸다 골 시멘트 시술을 해야 한다니 간단한 일은 아니다.
식사도 누워서 해야하는 엄마를 보며 속상하고 기막힐 때마다, 머릴 안 다친 게 얼마나 천만다행이냐고 전화위복이 될 거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우유부단하게 마음의 결정을 못내리던 일도 이번 사고로 확실히 방향이 잡혔다. 계단 투성이인 이 집에선 도저히 더 못살겠다. 구조도 이상한 낡은 집이 과연 팔릴지는 모르겠지만, 우리 가족의 수많은 추억이 깃든 집이기는 하지만, 성냥갑 같은 아파트에선 정말이지 살고 싶지 않지만, 앵두나무랑 라일락이 그립긴 하겠지만, 일단은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될 작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
월요일부터 일주일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입원준비를 하느라, 옷을 갈아입느라 잠깐씩 두어번 집에 다녀가긴 했지만 줄곧 완전히 딴 세상인 병원에서 지내다보니 세상과도 담을 쌓게 된다. TV 뉴스를 보아도 다 남의 나라 이야기만 같다. 오늘은 동생에게 엄마 병실을 맡기고 집에 들어와 빨래도 돌리고 이것저것 챙겨갈 준비도 하고 있는데, 20년 넘게 산 집마저 낯설게 느껴진다. 특히 현관 계단을 내려갈 생각을 하니 섬뜩하다. 밀린 일도 좀 하고 가려고 작정했었는데, 그냥 일찍 병원에나 가야겠다.
간병인을 쓰려고 엄마 눈치를 보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고 딸무수리의 병수발이 아니면 영 불안해하는 왕비마마의 섬약한 신경 때문에 거의 꼼짝도 할 수가 없으니 당분간은 블로그질도 안녕. 염려해주실 이웃분들께는 미리 고마움을 전합니다. ^^*
콘크리트 계단 옆에 말 그대로 손바닥만한 크기의 마당에서 자라는 앵두나무엔 올해도 어김없이 하얀 꽃이 피더니 다닥다닥 열매가 달렸다가 어느 틈에 앞다투어 빠알갛게 익어가고 있다. 하루가 다르게 색이 진해지는 앵두를 보며 곧 따먹을 수 있겠구나 생각했는데, 그저께 저녁 누군가 초인종을 눌렀다. 건너 동네에 집을 새로 짓는 동안 잠시 아래층으로 이사를 와 작년부터 살고 계신 젊고 착한 목사님이었다. 마당에 있는 앵두가 익어서 좀 땄는데 아무래도 올해의 첫 수확인 듯하여 제일 어르신이신 울 엄마부터 드리려고 가져왔단다. 괜찮다고 아이들이랑 그냥 드시라고, 우리는 나중에 따먹으면 된다고 아무리 마다해도 막무가내라 하는 수 없이 두손을 바가지처럼 오므려 앵두를 받아들고 올라와 제법 맛이 든 앵두를 엄마랑 둘이 맛있게 음미했다.
앵두가 일단 익기 시작하면 한 열흘은 계속해서 심심찮게 따먹을 수가 있는데, 어제 일기예보를 들으니 비가 온다고 하여 괜스레 낭패감이 들었다. 이제 막 익기 시작한 앵두가 비를 맞고 다 떨어지거나 맛이 싱거워지면 어떻게 하나 공연한 걱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밤새 천둥 번개가 치고 굵은 빗줄기가 지붕과 창문을 때리는 소리를 들으며, 앵두는 과연 무사할까 염려하다 비가 그치자 마자 내다보니 모든 게 쓸데없는 걱정이었던 듯 다닥다닥 붙은 앵두들은 여전히 건재했다. 다만 초봄에 가지치기를 해주었어야 하는데 그냥 방치했던 터라 정신없이 사방으로 뻗어난 가지들이 비를 맞고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해 축축 바닥으로 늘어져 있었다. 생각해보니 앵두나무 뿐만 아니라 잎이 돋기 전에 지저분한 무궁화와 사철나무도 가지치기를 해주었어야 했다. 다급한 마음에 전정가위를 들고 나가 빗방울이 무겁게 맺힌 쳐진 가지들 중에서 앵두가 달리지 않은 것들로만 일단 잘라주니 순전히 내 상상뿐이겠지만 앵두나무가 무거운 짐을 좀 내려놓은 듯 가뿐해 보이는 듯도 했다.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고 싶다는 소망과, 마당이 있는 집에서 살려면 계절마다 부지런히 품을 들여 마당을 가꾸거나 돈을 써서 정원 가꾸는 사람을 고용해야 한다는 현실적인 문제는 늘 내게 별개로 다가온다. 그래서 겨우 나무 세 그루 있는 한 뼘짜리 마당도 돌보지 않는 주제에 과연 내가 어떻게 넓은 마당 있는 집을 감당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오늘 같은 순간에나 내 뒤통수를 친다. 물론 작년까진 화분 물주기와 더불어 귀찮은 가지치기 따위는 당연히 아버지의 임무였고, 앞으로 내가 마당 있는 집에 살게 되더라도 그 마당에 있는 나무와 식물을 가꾸는 일손 또한 당연히 아버지 몫일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당연하겠지만 엄마와 나는 아직도 매 순간 아버지의 부재를 인정하지 않는 듯 살다가 문득 허망한 상실감에 멍해진다.
어쨌거나 올해도 변함없이 앵두가 익었듯, 올해도 변함없이 조카들이 오면 재잘재잘 떠들며 함께 앵두를 따서 나누어 먹게 될 것이다. 살다보면 변하는 것도 있고 변하지 않는 것도 있음을 새삼 실감하며 빗물 젖은 앵두가 예뻐서 전정가위를 내려놓고 카메라를 들고 내려갔다. 빨간 앵두들이 이슬을 머금은 빨간 보석처럼 어찌나 예쁜지 모른다. *_*
1년 중 가장 좋아하는 달인 5월이 시작되었지만, 가정의달이기도 하기 때문에 계속 슬픔이 따라다니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어버이날 선물을 뭘로 할지 두배로 걱정하지 않아도 되고 비용도 절반으로 줄었지만, 할머니 할아버지 다 살아계실 때 어버이날 부담이 네 배, 다섯 배였어도 오히려 좋았던 것처럼 상실과 부재의 크기는 현실적인 편리함과 결코 비교할 수가 없다.
5월의 첫 포스팅은 뭔가 행복한 것으로 하고 싶었는데 하루하루 날짜가 지나가도 생각나는 쓸 거리는 죄다 우울한 푸념이나 울분의 토로밖에 안될 것 같아 며칠 전 볕 좋은 날 잠깐 작업실에 나간 김에 휴대폰으로 사진을 찍었다. 나만의 방 모습을 블로그에도 담아두어야지, 라고 생각하면서. 내 살림과 남의 살림을 주제로 달랑 두 장 찍어와서 올리려고 지금 보니 사방을 다 찍어올 것을, 하는 후회가 들었다. 다음에 가면 입구쪽이랑 그저 새하얗기만 한 붙박이 장쪽도 찍어와야지. =_=
유복한 어느 선배가 분양받은 오피스텔처럼 한쪽 벽면에 질좋은 나무로 책장을 짜넣어 책을 빼곡히 꽂아넣지도 못했고, 호수나 강이 내다보이기는커녕 창밖 경치는 빨간 벽돌로 지은 다른 건물이 전부이며, 화분은 10개쯤 죽여 내보냈고 남은 화분도 누렇게 마른 잎들이 불쌍하게 매달려 있으며, 완전히 내 소유도 아니라 처음엔 못을 박고 액자를 걸어도 될까 소심하게 고민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작업실에 나가 앉아 있으면 단출한 살림살이 속에서 비로소 세상과 마음껏 단절될 수 있다는 묘한 해방감을 느낀다.
4년전 작업실을 마련했을 때 나만큼이나 좋아했던 지인들은 아직도 <작업실로 한 번 놀러갈게>라고 벼르다 서울 귀퉁이에 있는 나만의 방에 찾아와 차 한잔 마시는 게 마치 남들 모르는 예쁜 카페 하나 찾아 놓았다가 아주 가끔 가보는 느낌과 비슷하다고 입을 모은다. 어느 골목 구석의 인적 드문 카페가 영 장사가 안되는 바람에 문을 닫는다고 하면 몹시 섭섭한 마음이 들듯, 내가 작업실을 포기할까 고민하는 걸 알고 그들도 덩달아 마음이 씁쓸하다나. 나만의 방과 유럽여행을 바꿀 것인가의 결정은 우유부단한 마음속에서 여전히 오락가락하는 중이고, 만날 적자만 내면서도 어거지로 손님 없는 카페를 운영하는 주인처럼 나도 씁쓸한 웃음 지으며 4월분 관리비 청구서를 집어들고 돌아왔다.
<내 살림>을 주제로 찍은 사진인데 창문 옆에 붙어 있는 건 비상시에 몸에 묶고 뛰어내리라는 밧줄이 들어 있는 하얀 플라스팅 상자이므로 유일하게 내 살림이 아니다. 그래도 뚜껑에 샤갈전 팸플릿을 붙이고 위에 밤의 카페 테라스 액자를 올려둔 건 내 소행임. 오후 햇살이 저렇게 비쳐드는 걸 보면 서향이란 얘기다. 누렇게 잎이 말라 몰골이 형편없긴 하지만 화분에 햇살이 꼭 필요할 것 같아서 블라인드는 늘 걷어놓고 다닌다. 소파가 햇빛에 허옇게 바라든 말든... 2년 전엔가 출판사 부탁으로 dmb방송에 나가는 책소개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번역하는 사람의 작업실이라니까 책꽂이 앞에서 촬영하면 되겠다고 자기네 마음대로 생각했던 담당 pd가 와서 보고는 작업하던 책 말고는 다른 책이 한 권도 안보이는 작업실 몰골에 살짝 난감해 했다. ;-p 몇권 안되는 책들은 그나마도 붙박이 옷장에 숨어 있는데, 수십년 가까이 짐으로 빼곡한 옛날 집에 살고 있는 나는 이 공간에 별로 짐이 없다는 것이 제일 행복하다! (그렇지만 제버릇 못버리고 책상위는 늘 어지럽다 -_-;;)
이쪽은 건물주인이 원래 장만해놓은 <남의 살림>들이 주축을 이룬다. 그렇지만 전자렌지와 설거지 건조대, 커피메이커, 의자는 당연히 내 살림. 4년 넘게 저 주방에서 해먹은 요리는 라면이 유일하고 드럼 세탁기는 딱 한 번 써봤다. *_* 게을러서 컵을 있는대로 다 꺼내놓고 쓰다가 더는 쓸 컵이 없어지면 설거지를 하는 편이라 매일 출근할 때는 싱크대가 늘 만원이었는데... 간만에 나가 컵들이 건조대에 쌓여 있는 걸 보니 어째 버려진 자식들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실제로 걔네들은 더러워진 채 개수대에 켜켜로 쌓여 있을 때 버려진 느낌일 텐데)
또 언제 나가게 될지 몰라 갈 때마다 화분에 물을 잔뜩 주고 오는데, 주인 잘못 만난 화분들한테 노상 미안하다.
하얀 붙박이장 안엔 얼마 안되는 책들이 숨어있고 신발장 옆면에 붙인 그림들은 작년 고흐달력에서 오려낸 것들이다.
아래는 현관과 화장실 부분. 현관 문에 붙인 포스터는 브레송 사진전, 화장실에 붙인 건 몇년 전 스팅 공연때 공연장에서 CD사고 받은 것. 저렇게 덕지덕지 붙여넣고 쳐다보며 노상 흐뭇해 한다. ^^;
지금 사용하고 있는 컴퓨터는 2005년에 장만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사용범위라고 해봤자 워드 프로세서 기능과 인터넷질 밖엔 없는 내가 굳이 왜 용량이 더 큰 컴퓨터를 사겠다고 결심했는지 잘 모르겠다. 예나 지금이나 음악이든 영화든 파일로 다운받아 즐기는 수고와 부지런함은 나와 거리가 멀다.
아무튼 몇년 동안 나는 내 컴퓨터에 전혀 불만이 없었다. 2002년에 산 노트북의 느릿느릿한 속도도 별 문제 없는 내가 아닌가. 작년엔가 한번 a/s를 받기는 했는데 무슨 일로 기술자를 불렀는지도 생각나진 않지만 -_-; 보증수리 기간이 지나 출장비를 지불해야 했던 대신 바이러스 감시/차단 프로그램을 깔아주어서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몇달 전인가 바이러스 프로그램이 더는 인증되지 않는 사용자라면서 업데이트가 중지되고 불안한 나날이 이어졌다. 걸핏하면 나타나는 이상한 프로그램(패치업이라던가)에선 악성코드가 6개 발견 되었다느니, 4개 발견되었다느니 수시로 나를 겁주며 치료를 원하면 결제를 진행하라고 독촉했다. 나의 가장 큰 공포는 컴퓨터가 잘못되어 8년간 작업해온 모든 원고가 사라져버리는 것이다. @.@ 노트북을 병행해서 사용했던 2000년 이전의 원고들은 아깝게도 다 날려 사라졌다. 컴퓨터 회사 기술자라는 사람들은 걸핏하면 바이러스 탓을 하며, 복원시도는 해보겠지만 전부 복구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책임없는 말로 나를 실망시켰고, 과거에 실제로 복원해다 준 파일들은 전부 외계어 투성이였다. ㅠ.ㅠ 컴맹에 가까운 내가 그나마 생각해낸 방법은 압축파일을 CD에 저장해두는 것 이외에 주로 쓰는 메일계정의 장기 보관함에 넣어두는 것이다(저장용 CD도 오래 되면 에러나더라! 그렇다고 또 외장하드를 장만하는 건 너무 어마어마한 일 같고...) 어차피 요즘 원고파일은 죄다 이메일로 전송하므로 파일이 너무 크지만 않으면 계속 보관할 수 있어 다행이다.
어쨌거나 무료 바이러스 치료 프로그램을 깔아놓기는 했지만 점점 컴퓨터가 느려지는 것이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고, 은행 인터넷 뱅킹 보안 프로그램과 함께 깔린 듯한 몇몇 이름모를 프로그램에서 계속 악성코드가 발견됐다고 들쑤셔댔다. 어쩔 땐 그런 것들이 오히려 스파이웨어라는 말을 들은 것도 같아서 쓸데없이 불안감을 조성하는 꼴보기 싫은 프로그램을 정리한답시고 제어판에 들어가 고민고민 끝에 몇 가지 불필요해 <보이는> 파일을 지웠더니 크헉... 엉뚱하게 사운드카드 드라이브까지 덩달아 삭제된 모양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용용프로그램 CD로 필요한 파일을 다시 깔려고 했더니, CD롬이 안 읽힌다. ㅠ.ㅠ 생각해보니 그동안 최소 6개월은 CD롬을 전혀 안쓰고 살았던 것 같다. 기계든 사람 몸이든 안쓰면 고장난다는 진리를 왜 또 까먹었을까.. 에효. 컴맹주제에 그냥 가만히 있기라도 할 것이지... 겁없이 제어판은 또 왜 들어갔담. 이럴 땐 무식하더라도 일단 그냥 안철수연수소에 가서 <돈 주고> 보안프로그램을 사는 수밖에 없다. 컴퓨터 기술자를 부를래도 먼저 바이러스는 치료하고 봐야 될 것 아니겠나. 아니나 다를까 미리 무료검사를 해봤더니 바이러스가 바글바글, 스파이웨어도 바글바글...
내가 안철수연구소에서 보안 프로그램을 <돈주고> 산다고 하면 다들 무료 백신 다운받으면 되지 뭣하러 쓸데없는 데 돈을 들이냐고 주변에서 핀잔을 주는데, 내 마음은 또 그렇지가 않다. 공짜는 어쩐지 뭔가 모자랄 것 같아 불안하고, 가뜩이나 밀려 있는 상황에 애써 작업한 원고를 날려버린다고 생각하면 정말이지 죽고싶어 질 게 뻔하다.
결론은 유료 보안 프로그램을 깔고 컴퓨터 벌레들을 죄다 잡아 없앤 뒤 마음을 놓았고, 월요일에 부르려던 컴퓨터 기술자도, 응용프로그램 CD 없이도 스스로 문제를 해결했다. ^^V 아직 CD롬은 수리가 필요하겠지만, <시스템 복원>으로 사라졌던 사운드카드 드라이브를 되살리면 된다는 사실을 오늘 아침 극적으로 생각해냈기 때문이다! 남들은 다 아는 기본적인 상식이겠지만 스스로도 어찌나 기특한지 푸하하하 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러면서 문득.. 인생에도 <시스템 복원> 기능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일로 되돌리고 처음부터, 아니 내가 원하는 시점에서 다시 시작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시 복원할 수 없다는 걸 알기에 순간순간 더욱 열심히 살아야 하겠지만, 인생에 몇번쯤은 <시스템>을 되돌릴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 과거 시스템보다 현재의 시스템이 더 나아진 사람들이야 쓸데없는 소리라고 하겠지만, 계속해서 나사가 풀려 관리가 엉망진창인 내 경우엔 반짝반짝 활기차게 움직이던 과거의 어느 시점으로 정말이지 되돌리고 싶다.
날씨마저 암울한 것이 전조가 좋지 못했던 총선날 투표 마치고 결국 동네 벚꽃길에 구경갔었다. 빗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는 바람에 금세 돌아오긴 했지만 그래도 딸이랑 꼭 꽃구경을 해야한다는 엄마 원을 풀어드려서 조금 속이 후련.
그날 비가 내려 꽃이 다 떨어지겠다 걱정했더니 빗줄기가 그리 세지 않았는지 본격적인 벚꽃 축제는 오늘부터라면서 엄마는 또 과일 싸들고 동네 아줌마들이랑 다녀왔다는데, 청사초롱에 불 들어오고 현란한 조명이 켜지는 밤에 더 볼것이 있다면서 여전히 뭔가 바라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나를 쳐다본다. -_-
생각해보건대, 예로부터 봄이면 아줌마들이 관광버스 대절해서 버스 뒤집히도록 춤을 추어대면서 꽃구경을 다녔던 이유는 지난한 삶에서 약간의 일탈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세월과 계절의 변화에 그만큼 민감하기 때문인 것 같다. 나 역시 계절 중에선 언제나 봄이 제일 좋았고 봄꽃 피면 싱숭생숭 놀러나갈 궁리를 하기는 했으며 꽃을 유독 좋아하기는 하지만 계절따라 바뀌어 피는 꽃 하나하나에 진지한 의미를 두고 관찰하게 된 건 삼십대 이후였던 것 같다.
울 부모님이 사십대이셨을 때는 부부동반으로 근교 산에 주말마다 등산을 다니셨는데 다른 때는 몰라도 산에 진달래가 피면 진달래 능선이 있는 북한산인가 도봉산인가, 암튼 기억도 잘 안나는 산에 우리 삼남매를 데려가 꼭 구경시켜주고 싶어 하셨다. 꽃이 얼마나 예쁜지 니들도 꼭 봐야 한다면서... 그때 중학생이었나 고등학생이었던 막내는 맥가이버 봐야하는데 등산 때문에 늦어 못본다면서 볼이 퉁퉁 부은 얼굴로 따라다니다 결국 시무룩한 얼굴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는데, 지금 보면 동생녀석 뒤에 아련하게 피어 있는 진달래가 참 예쁘긴 하다.
사실 그때는 부모님을 <한번 봐드린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하면서도 등산엘 따라나섰는데 그런 경험이 아니었다면 걷기조차 싫어하는 내가 진달래 핀 봄산의 아름다움을 어찌 알았겠나 싶다.
엄마는 이제 등산은 상상도 못하고 그저 멋진 등산화를 신고 동네 앞뒷산을 조금 오르다 마는 것이 전부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봄꽃이 피면 꼭 그걸 나한테 못 보여줘서 안달이다. "흐드러지게 핀 꽃이 얼마나 예쁜 줄 아니. 사람들이 다 와서 보고 좋다고 난리더라. 그러니까 너도 봐야지."
자연의 변화와 아름다움을 뼈저리게 알 수 있는 마음은 확실히 나이와 비례하는지 나는 아직도 엄마만큼 봄꽃구경이 필수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지만 후회하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엄마랑 많은 걸 함께 누려야한다는 조바심은 확실히 생겼다. 이렇게 나도 나이를 먹다가... 해마다 꽃구경을 빠뜨리면 큰일나는 것처럼 생각하는 때가 오겠지 싶어서 마음이 묵직하다.
디카도 옛날 거지만 원래 사진을 잘 못찍는 인간이라 구도 따위는 없다. -_-;;
동글동글 작은 솜사탕들이 매달려 있는 느낌이었는데... 사진엔 그런 느낌 절대 못 살렸다.
안산 벚꽃길에서 가장 인기 높은 벚꽃나무. 어떻게 이렇게 버드나무처럼 축축 가지를 늘어뜨리고 피었는지 내가 봐도 신기하긴 하다. +_+
부실하게나마 나름 접사도 해주시고..
홍제천 산책로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답게, 진달래도 군데군데 피어있다. 한여름에도 이 근방에 오면 서늘한 바람이 불어 늘 사람들이 바글바글거리는 곳. 저 징검다리를 건너 산을 오르면 벚꽃길로 이어진다. 자연하천 조성공사가 거의 마무리 중인듯, 물도 많아졌다. 청계천처럼 콘크리트로 왕창 깔아버리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지 모르겠다. 아직 물비린내가 나지만 얼마 전까지도 물 많을 땐 송사리들이 살았으니 조만간 물고기도 볼 수 있을 게다. 올챙이는 벌써 있는 듯 꼬마들이 음료수병에 개구리 알을 담아갖고 신나게 들고다녔다.
꽃구경 간다고 꽃모자 쓰고 나선 울 엄마. 10분 걷고 15분 쉬는 작전을 충실히 이행중이시다. ^^ 이길을 쭉 따라가면 한강에 이른다. 언젠가는 <느루>와 함께 가고야 말 리... -_-
벨로를 시초로 블로그 이웃분들의 연이은 <자신감> 포스팅을 보면서
약간은 자아비판 비슷한 고백의 성격을 띨 수밖에 없겠지만 나도 스스로를 돌아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간 바쁘기도 했지만 자꾸 뜸을 들이게 됐던건
과연 내 인생에서 자신감 100개인 시절이 있었던가, 아닌가 판단이 잘 서지 않아
그냥 내 인생에서 가장 자신감으로 충만했던 시기를 정점이자 100개의 기준으로 삼아야 하는 것일까
우유부단한 고민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미즈키님이나 키드님처럼 살아오는 동안 자신감이 100개로 온전히 채워진 적은 없다고 인정하는 편이
더 정확하다 생각하면서도, 내가 가장 자신만만하고 심지어 오만불손하기까지 했던 시기를 억지로라도
100개라고 우기고 싶은 마음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아마도 그건 <나를 믿는 마음>인 자신감이 앞으로 더더욱 고개를 숙이거나 고작해야 수평선을 유지할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일 게다.
그러므로 <자신감 백개>라는 말을 처음 뱉은 11살 이쟁그만 양이나 벨로의 <자신감 백개>와 비교한다면 나의 자신감 백개의 수준은 최소한 다섯개쯤 부족한 기준의 정점임을 미리 털어놓고 시작해야겠다.
돌아보면 내 인생은 초기엔 비교적 기복이 별로 없는 자신감 곡선을 그리다 비스듬히 상승해 정점을 찍은 다음 비교적 짧은 시기에 쌍봉낙타 혹 같은 굴곡을 겪은 후 계속해서 완만한 하강세를 보이고 있다고 생각된다.
어떻게든 재미있어 보이려고 나 또한 자신감 그래프를 덩달아 그려보았다.
컴맹답게 이면지에 색연필로.. -_-;;
이북에서 월남한 실향민 출신의 부모 슬하에서 자란 8남매 가운데서도 장남이신 우리 아버지의
첫딸로 태어난 나는 온 가족의 사랑은 물론 동네 사람들의 사랑까지 독차지하며 자랐다고 했다.
동네에 워낙 아기들이 없었기도 했고, 말이 빠르고 노래도 곧잘해서 재롱을 꽤나 많이 부렸다나 뭐라나..
외가에선 울보인 나를 <난이>(못난이의 준말인데, 외삼촌들은 내가 20대가 된 후에도 그렇게 불렀다 ㅎㅎ)라고 불렀지만 내심 나는 못난이 3형제 인형처럼 못생긴 건 <절대> 아니라고 자신했다.
여름에 태어난 아이를 억지로 7살에 입학시키고 할머니가 업어서 등하교를 시킬 때도
한글을 몰라 칠판에 적힌 숙제를 베끼느라 초반엔 늘 고전을 면치 못했지만
엄마가 손수 만들어준 원피스와 블라우스를 입고 다니던 <귀여운> 꼬마를 선생들도 다들 예뻐해서
나는 그들에게 항상 볼타구니를 꼬집히는 것만이 불만이었다.
특별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기억은 전혀 없고, 그저 선생님 말씀을 중히 여겨 숙제만은 빠뜨리지 않았던
나는 어느새 우등생 범주에 속했고, 유별나게 뛰어나진 않으면서 그림도, 글짓기도, 노래도 이것저것 두루두루 잘 하는 편이라 동생들에게 모범이 되는 의젓한 누나였다.
그럼에도 자신감이 백배할 수 없었던 이유는 부족한 숫기와 형편없는 운동신경 때문이었다.
반장 부반장 따위를 하는 건 죽어도 싫었고, 어려운 선생님들이 득실거리는 교무실에 들락거리는 것도 싫었으며, 몸을 써야하는 체육 시간엔 한숨만 나왔다. 심지어는 국민학교 5학년때 기계체조 특성교육을 실시하는 바람에 체육 성적 '양'을 받은 적도 있다. ㅋㅋ (방학날 충격을 받은 엄마는 당장 성적표를 들고 학교로 뛰어가, 우등상을 주지를 말든지, 체육 양을 주지 말든지 그런 게 어딨냐며 따지기도 했다)
그래도 내 유년시절의 자신감을 갯수로 따져보면 70개에서 조금씩 늘어났던 것 같다.
중고등학교 때도 양상은 비슷했다. 특별히 열심히 공부를 하는 편은 아니고 그렇다고 머리가 뛰어난 것도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눈에 띄지 않으면서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는 편이랄까.
리더십도 숫기도 없으니 반장 재목은 결코 안되고(뽑아준대도 싫었다), 미화부장이나 독서부장 정도나 하면서 뒤에서 구시렁구시렁 거리는 인간이 바로 나였다.
집에서도 공부하라는 말 들어본 적 거의 없었고, 오히려 시험 때 반짝 낮엔 괜히 책상정리만 하다가 밤늦게 공부를 하려고 들면 부모님은 무리하지 말고 일찍 자라고 하셨더랬다. -_-;;
수업시간에 안 졸고 필기를 열심히 하기는 했지만, 그 외엔 정말로 별로 공부는 안했는데도 막연하게 우등생이라고 하니, 내심 진짜 열심히 공부하면 1등도 문제는 없겠군...이라고 건방지게 생각하면서 막상 실천은 하지 않는(아마도 겁이 났겠지) 비뚤어진 오만함도 있었다.
그림에 소질이 있다며 미대진학을 권유받기도 했지만, 대학 진학을 위해 뒤늦게 화실을 다니는 <공부 못하는 아이들> 부류로 취급받기도 싫고(아 재수 없다) 비싼 학원비로 부모님께 부담을 드리고 싶지도 않아서 그림은 취미로 삼아야지 마음 먹기도 했다. (자신감 갯수 80)
심지어 고3때도 열심히 공부를 한 기억보다는 야자 시간에 몰래 떡볶이 사먹으러 다니던 기억이 더 많고
연애하느라 고민에 빠진 친구 얘기 들어주느라 등나무 아래 벤치에서 수다를 더 오래 떨었다.
결국 혐오스러운 수학에 발목을 잡혀, 기대보다 낮은 학력고사 점수에 재수하겠다고 단식투쟁을 잠시
벌이긴 했지만, 대학엘 다니고 보니 학교 이름값도 전공도 내겐 그리 중요하지 않을 만큼 대학생 생활이 즐거웠다. ^^
얼마 차이도 나지 않는 점수 몇점 때문에 이른바 일류대학이라는 곳에 못 간 걸 후회할 필요도 없을 만큼, 내 주변엔 훌륭한 친구들이 많았다. 대학에서도 여전히 나는 친구들에게 노트필기를 빌려주는 우등생이었고, 문어발식 연애가 가능할 정도로 이상스레 인기도 높았다. ㅋㅋ (자신감 갯수 90)
졸업을 앞두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막연한 불안감에 역시 공부는 하지 않은 채 술만 마셔대던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시험삼아 넣어 봤던 대기업 입사 서류전형에선 당연히 떨어졌지만(토익 점수표도 없이 서류를 접수시킨 내가 미친*이라고 했다^^) 곧이어 동기들 가운데 거의 두세 번째 취업자가 되었으므로 자신감이 꺾일 필요는 없었다.
미국 의류수입업체의 서울 지사였던 나의 첫직장은 참 많은 것을 느끼고 배우게 해준 곳이었다.
영문과 출신이라고는 하지만 실용영어는 달달 외운 자기소개 내용밖에 없었던 내가 서바이벌 잉글리시를
익힌 곳도 그곳이었고, 가끔 야근과 철야를 불사하더라도 코피 터지도록 열심히 일해서 실력을 인정받고 말겠다는 꿈을 키운 곳도 거기였다. 패션과 무역에 대해서도 수박 겉핥기 식이나마 배울 수 있었다.
뉴욕 브로드웨이에 있는 본사로 출장을 다녀오고, 직접 개발했던 샘플 옷이 본생산을 거쳐 메이시즈, 시어스 같은 쇼핑몰에 걸려있는 걸 보게 될 때의 성취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던 것 같다.
내 본명 대신 영어 닉네임이 영어로 찍힌 명함을 들고 다녔던 그 시절엔 정말로 내가 실력 대단한 MD라도 된 듯 의기양양하여, 언젠가는 그 업계에서 지사장이나 지점장 자리 하나 꿰차고 있지 않을까 상상하기도 했다. 매일매일 너무도 바빴고 하루가 멀다하고 술 마실 일도 있었는데, 다음날엔 술냄새를 풍기면서라도 거뜬히 출근했다. 누구와 약속이라도 잡으려면 다이어리를 펼쳐들고 일주일 뒤쯤을 기약해야 할 정도로 쓸데없이 분주했다. 그 때가 바로 내 자신감이 정점이라 느껴지는, 그래프 상의 A 지점이다(드디어 자신감 100개!). ^^*
하지만 첫 직장에서 만 3 년을 지내고 보니 그동안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불합리한 인종차별과 가혹한 인사관리 문제를 개선하지 않고는 더 견딜 수가 없었고, 한국 노동위원회에 제소까지 하는 노력을 기울이다 결국엔 내가 떠났는데, 이후에 별 깊은 고민 없이 선택한 회사들은 더욱 가관이었다.
인종차별은 있었어도 성차별은 없었던 미국 회사와 달리, 한국 회사들은 뿌리 깊은 성차별로 나를 좌절시켰고 늘 커피 타는 문제, 복사하는 문제, 승진문제로 턱턱 내 숨통을 막았다. *_*
내가 아이템을 잘못 선정하여 입사한 잘못도 있지만, 야심만만했던 내 의욕만큼 회사에서 나를 키워줄 수 없는 분야임을 알게 되었으니 자신감이 극적으로 꺾이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나는 다시 미래를 염려하며 장기적인 안목으로 직업을 살폈고, 지겹도록 되풀이했던 매뉴얼과 계약서 번역이 아닌 진짜 번역을 평생 하고프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 무렵 우연히 지인의 번역원고를 몇 꼭지 도와주고 나서 재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데서 대책없이 용기를 낸 것이었는데, 내가 손만 뻗으면 당장이라도 출판사에서 앞다투어 번역을 맡길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크게 어렵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던 번역가로서의 첫발은 그리 쉽지 않았다.
그렇게 서른을 앞두고 번역가를 지망하는 막연한 백수로 지냈던 6개월 정도의 시절이 바로 자신감이 60개 정도로 떨어진 그래프의 B 지점이다.
나름대로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 시험번역을 의뢰했던 출판사에서 "좀더 습작이 필요하다"는 통보를 받았을 때 좌절하긴 했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도 놀라울 정도로 나는 머지 않아 또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었기에 자신감은 바닥을 향해 치닫지 않았다.
그리고 내 예상대로, 내게 습작이 필요하겠다던 출판사는 내가 낑낑대며 6개월쯤 습작을 하고 있을 무렵 다시 연락을 해왔고 1995년을 시작으로 내 이름을 달고 출간된 번역서들은 해가 갈수록 늘어났으며
나를 찾는 출판사도 차츰 늘어났다. ^^
비상근으로 외서기획을 맡아달라는 출판사도 있었고, 해외 도서전에 대신 다녀오기도 했다. 부족한 공부도 할 겸 가방끈도 늘릴 겸 대학원에 다닐 때는 평생 그렇게 열심히 공부한 적이 없다고 생각할 만큼 등록금 아깝지 않게 공부만 했다. 방학동안엔 다시 번역에 매달려 편집자들에게 <선생님> 소리를 들으며 원고독촉을 받았지만, 띠동갑에 가까운 아이들과 어울려 학교를 다니며 적게는 5살쯤, 가끔은 무려 열살이나 어리게 취급받으며 "학생!"이라고 불리는 묘미도 짜릿했다. 이제 더는 진솔한 인간관계를 새로이 맺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딜 가더라도 마음이 통하고 생각을 공유하는 친구는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의 자신감은 정점까지 다시 오르지 못했다.
서른 살 이후로는 연애에도 자신이 없어졌다. 아니, 아예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뭔가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 귀찮고 두려웠다. 말로는 "연애 빼고 내가 못하는 게 어딨어!"라고 하지만 그 목소리는 예전보다 확실히 덜 활기찬 게 느껴졌고, 사진 속에 변해가는 내 모습도 흠칫흠칫 놀라웠다.
물론 여전히 나는 자유로움과 소박한 성취감을 느낄 수 있는 내 일이 좋고, 남들의 잣대로 보아 크게 성공하겠다는 돈욕심도 없으며 더 큰 이름을 떨치겠다는 야망도 없다.
원숭이 줄타기 법칙 운운하며 엄살을 떨기는 하지만 지금보다 더 게으름만 부리지 않는다면 꾸준히 일감을 물어다줄 고마운 지인들도 충분하므로, 자신감이 아닌 행복의 지수로 따진다면 분명 80이상일 게다.
그럼에도
이제 더는 사람들이 나를 5살씩이나 어리게 보지 않는 것을 당연하다 여기면서 속이 상하다. -_-;;
"과학과 의술의 힘을 빌지 않고 이 정도면 내가 제일 예쁜 거야!"라는 망언을 서슴지 않던 내가
요샌 고모들의 성화대로 얼굴에 대거 포진한 점이랑 기미는 레이저로 제거하는 것도 그리 나쁘진 않겠다..는 놀라운 생각도 하게 되었다. ㅠ.ㅠ (물론 귀찮음과 아픔을 극복할 수 있을지는 나중 문제다)
누가 나이를 물으면 우선 흠칫 놀란다. 나도 내 나이가 놀랍지만, 과거의 내가 참 많은 것을 이루어놓았을 것이라고 꿈꾸었던 미래의 그 나이에, 그리 성장하지 않은 모습으로 살고 있음이 어쩐지 부끄러워해야할 노릇은 아닌지 반성되기 때문이다.
확실히 한 인간으로서 현재 내 자신감은 계속해서 하강곡선을 그리고 있다.
그나마 그래프를 그리다 보니 지금의 내 위치 C지점은 아직 10여년전의 나락보다 높으며,
엄청나고 드라마틱한 인생역정을 보내느라 심신을 소모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더 재미없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를 믿을 수 있었던 힘을 심어준 주변과 가족의 애정에 감사해야 될 것 같다.
내가 뭘하든 결국 내 가족과 지인들은 나와 내 선택을 믿어주었다.
펄펄 뛰는 자신감은 조금씩 잃어도 괜찮으며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자존감이 자리잡을 수 있었던 것도, 어쩌면 내 자신감의 바탕이었던 주변의 힘이 작용한 때문일 것이다.
언젠가는 나의 자신감이 역사상 최저치를 지나 더욱 아래로 떨어져 바닥에 닿는 일도 생겨날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잘 살았으니 괜찮다고 스스로 등두들겨 줄 작은 용기는 사라지지 않을 것 같다.
예나 지금이나 나의 커다란 재산이자 든든한 빽인 <인복> 때문에라도 말이다.
집구석에 틀어박혀 지낸지 꽤 되긴 했지만 간간이 잠깐씩 나갈 일은 있었음에도 관심이 없었거나 관찰력이 부족해 꽃눈이 나온 것도 모르고 지났는데 오늘 보니 몽롱하게 지내는 내 머리통에 알밤을 쥐어박듯이 황사비를 맞고서도 우아하게 새하얀 꽃을 벌린 목련과 다닥다닥 노란 꽃망울을 터뜨린 개나리가 집주변에 가득했다.
심지어 좁은 마당에 서 있는 앵두나무도 곧 꽃망울을 터뜨릴 기세다. 나는 아직도 털 달린 겨울옷을 못 벗어났건만...
헐레벌떡 성급히 꽃을 피웠다가 금세 후두둑 꽃잎을 떨어뜨리는 봄꽃을 보고 있노라면 나까지 공연히 숨이 가쁘다. 올해는 꼭 조금 멀리 꽃구경 가서 상춘곡이라도 부르려고 했는데 이러다 망연히 5월을 맞을까봐 가슴이 두근구근.
3월 1일에 꽃다발을 살 일이 있었다. 정민공주의 뮤지컬 공연을 보러가야 하던 터라, 부탁 받은 것까지 꽃다발을 2개나 사러 다녔는데 제 아무리 졸업, 입학 시즌이라고는 해도 엄청난 꽃값 때문에 거의 나는 기절할 뻔했다.
분홍 장미와 낯선 분홍 프리지아에 다른 꽃 약간과 안개꽃을 섞어놓은 꽃다발이 무려 3만원. 겨울에 흔한 노란 프리지아 약간에 안개꽃을 둘러놓은 꽃다발도 역시나 3만원이라고 했다! 내 기억에 프리지아라고 하면 한다발에 기껏해야 3천원에서 5천원쯤으로 꽃호사를 누릴 수 있는 소박한 꽃이었는데 기가 막혔다. 그나마도 꽃의 갯수가 현저히 떨어져 히마리가 없어보이는 꽃다발은 깎고 깎아서 2만원.
내가 꽃다발을 2개 사야하니 좀 깎아보려고 흥정을 붙이자 꽃집 주인은 꽃에도 A, B, C 급이 나뉜다면서 나를 물정도 모르는 무식쟁이 취급을 하며 아예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_-;; 꽃집에서도 냉장고 안에 고이 간직하고 파는 대가 굵고 길고 튼튼한 꽃들과 입구 양동이에 아무렇게나 담가놓고 팔거나, 심지어 리어카에서 물에 담그지도 않은 채 옆으로 뉘어놓고 파는 꽃들의 질과 값이 다른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꽃집 주인은 극구 최고급 A급 꽃으로 만든 것이라 장담했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꽃다발 속의 장미는 분명 대가 가늘가늘하고 송이도 작아, 아무리 잘 봐줘도 B급 정도밖엔 되지 않는 듯했다. 남대문이나 양재 꽃시장엘 다녀왔다면 같은 값에 엄청나게 탐스럽고 호화로운 꽃다발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도 얼마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비싼 꽃다발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꽃집 주인 얘기로는 꽃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이유가 비싼 기름값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비닐 하우스 난방을 해서 꽃을 재배해야 하는데 수지가 맞질 않아 많은 이들이 꽃 재배를 포기했고 그래서 품귀 현상이 벌어져 꽃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것. 게다가 꽃다발을 만든 플로리스트의 인건비가 있는데 꽃값만 따져서 꽃다발을 사려는 나의 얄팍한 생각을 나무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꽃다발의 과잉 장식도 싫고 주렁주렁 달린 리본이며 너덜거리는 포장도 싫은 사람인 걸 어쩌랴. 게다가 플로리스트의 감각과 재치가 돋보이는 색다른 꽃다발이었으면 또 모를까(요새 여러 종류의 꽃들을 교묘하게 섞어 화려하고 상큼한 느낌을 주는 꽃의 배열이 유행이며, 그렇게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꽃들을 선택해 적절히 어울리게 하는 꽃꽂이가 전적으로 플로리스트의 역량에 달렸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저 평범한 수준의 꽃다발이었기에(물론 졸업시즌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너무도 추악하게 꽃을 '싸서' 파는 꽃다발의 수준은 아니었다) 내 불만은 쉽사리 잠재우기 어려웠다.
째뜬 그렇게 꽃값 비싸다는 얘기를 구구절절 귀 아프게 듣고 꽃다발을 샀던 터라 봄도 왔으니 집에 프리지아나 튤립 한 다발 꽃아야겠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런데! 어제 혜화동에 갈 일이 있어 나가보니, 전철역 안 간이 꽃집에서 아 글쎄 프리지아를 한 다발에 무려 <천원>에 팔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한 다발이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가느다란 줄기 10개를 묶은 것이긴 했지만 천원짜리 두 묶음이면 열흘도 되기 전에 내가 샀던 프리지아 꽃다발에 버금갈 정도의 양이었다! 열흘도 되기 전에 꽃값이 열배 이상 차이가 나다니 이 무슨 조화일까... -_-; 입학시즌이 끝나버려서 갑자기 꽃값이 내렸다고 해도 그간 비닐하우스에서 기름 때가며 재배한 원가가 있다면 그토록 엄청난 값의 폭락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경제 개념이나 시장 원리에 대해선 일자무식이긴 해도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결론은 3월 1일에 내가 그냥 바가지를 썼다고 간단히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날 일산에서 꽃다발을 샀던 막내네도 3만원짜리 꽃다발 값에 기막혀 했기 때문에 나만 멍청히 바가지를 썼다는 추론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실 꽃값이 제일 싼 오뉴월에도 유독 꽃이 싱싱하고 예쁜 꽃집에 가보면 유리로 된 냉장 진열장 안에 우아하게 꽂혀 한 송이에 3천원짜리 장미가 있는가 하면, 길거리 리어카에서 한 다발에 3천원 하는 장미도 있으니 꽃값의 실체 따위를 파악하는 것은 내게 꿈도 못 꿀 일이다. 다만 도매가와 소매가의 차이가 있고, 유통과정의 정성에 따라 싱싱한 꽃과 금세 시들 꽃의 차이가 있고 원가가 비싼 꽃과 원가가 싼 꽃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꽃이 내게 주는 기쁨은 같다. ^^;; 소박한 값으로 꽃을 장만할 수 있었다면 더욱 뿌듯하긴 하지만, 꽃을 꽂은 순간 그게 얼마짜리였는지 포장이 얼마나 거대하고 촌스러웠는지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곧 잊혀진다. 3천원의 행복인지, 5천원의 행복인지 따지는 꽃자랑은 사실 블로그나 미니홈피 같은데 기록하기 위함일 뿐이고, 그저 간만에 꽃을 꽂아놓고 감상하는 소박한 사치를 누린다는 것만으로 족한 듯하다.
아줌마가 주섬주섬 셀로판지에 담아주는대로 흔쾌히 사들고 온 노란 프리지아는 확실히 내가 악착같이 깎으려고 했던 열흘 전의 꽃다발보다 세배 쯤 풍성하고 훨씬 싱싱하다. 비록 C급 꽃이라 해도 한 일주일 내 눈과 코는 행복한 호사를 누릴 터이니 그저 흐뭇하다.
큰 꽃병은 작업실에 있고 엄마네 꽃병엔 영수증이 잔뜩 꽂혀 있어서 작은 꽃병 두개와 유리컵 하나에 나눠담아 한 군데에 놓았더니 이리도 풍성하다. ^^ 맨앞 유리컵에 꽂은 건 원래 화장대에 두었는데 사진 찍느라 옮겼음을 고백. 방안과 거실에 은은한 프리지아 향기가 돌아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황사속에 내린 함박눈의 흔적으로 누런 부스럼딱지가 온통 눌러앉은 듯한 몰골의 자동차 꼬락서니를 보니 우리 동네에서 제일 더러운 차 주인이라는 꼬리표에도 불구하고 휘발유 넣으며 자동세차의 유혹을 떨칠 순 없었다. 3월부터는 완전 공짜가 아니라 천원을 내야하긴 하지만 그래도 손세차에 비하면 얼마나 저렴한가 말이다.
부스럼딱지 동창생들 같은 더러운 몰골로 앞서 기다리는 두어대의 자동차가 세차기계로 들어갔다가 잠시 후 제법 말갛게 씻긴 얼굴로 나오는 모습을 지켜보며 문득 내 두뇌와 마음도 그렇게 기계 속에 집어 넣고 슥삭슥삭 금세 씻어낼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과 비눗물을 흩뿌린 다음 자동으로 돌아가는 커다란 솔로 문지르고 다시 물을 뿌려 바람으로 물기를 샥 날린 뒤 누군가 마른 걸레로 말끔히 닦아주는 과정을 거치면 언제나 새로운 각오로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5만원 주유시 무료자동세차>라는 입간판 대신 <5만원 소비시 무료자동세심>이라는 플래카드를 내걸고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 있다면 분명 대박일 텐데. -_-;;
밀린 일은 안하고 허구한 날 엉뚱한 생각이나 일삼는 내 두뇌와 마음은 정말 청소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스무살 시절엔 도저히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변함없음을 서른살이 되고 마흔살을 넘어서면서
새삼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도 하고 눈깜짝할 새에 지난 세월 같기도 한 시절에 처음 만나
10년, 20년을 함께, 또는 따로 보낸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이면 친근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어깨를 휘젓는 걸음걸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 까르르 귀를 찌르는 독특한 웃음소리, 언제나 썰렁하기만 한 유머, 수줍은 듯 빙그레 웃기만 하며 술잔을 드는 손길,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거침없는 말투, 못마땅한 사회에 대한 투덜거림과 불평,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건 절대 용서 안되는 고집 같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운동화 대신 정장과 구두가 더 어울리는 외모의 까닭모를 반듯함, 그들이 내미는 명함에 새겨진 어마어마한 직함, 눈가에 살짝 내려앉은 주름살, 솟아오른 배나 숱이 엷어진 정수리와 넓어진 이마, 서로 다투듯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내미는 법인카드,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보여주는 아이들 사진, 가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재테크와 골프 이야기 등이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정말로 20년전으로 돌아가 탁자를 두들기며 웃다가도
금세 또 유체이탈을 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는 혼령처럼 전혀 낯선 이들의 대화를 천장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수시로 오간다.
어딜 가나 제일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이젠 뒤떨어졌다는 소리로 들리니
내게도 확실히 변한 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떵떵거리던 자신감과 낙천적인 사고는 이제 씁쓸한 자괴감에 쉽사리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간 허황된 꿈과 로맨스를 기다리고
휘황찬란하고 복잡한 무대 한 가운데서 조명을 받는 것보다 어둑한 구석에서 소박하게 즐기는 게 더 좋고
재테크로 골치아프게 벌어들인 재산보다 인복 많은 게 더 기쁘고
편한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기대되고 지금껏 맺어온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들여다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월과 함께 확실히 성숙한 사람들 틈에서
본래의 미숙함과 치기를 마냥 갖고 살면서, 나 하나쯤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하고 위로하는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일까.
변함없고 한결같다는 게 자랑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미련스런 집착처럼 느껴지는 날,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날씨따라 펄럭거리는 감상주의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이러니 내일은 또 펄럭펄럭 행복할 수도 있겠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