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을 사다

삶꾸러미 2008. 3. 11. 20:00
3월 1일에 꽃다발을 살 일이 있었다.
정민공주의 뮤지컬 공연을 보러가야 하던 터라, 부탁 받은 것까지 꽃다발을 2개나 사러 다녔는데
제 아무리 졸업, 입학 시즌이라고는 해도 엄청난 꽃값 때문에 거의 나는 기절할 뻔했다.

분홍 장미와 낯선 분홍 프리지아에 다른 꽃 약간과 안개꽃을 섞어놓은 꽃다발이 무려 3만원.
겨울에 흔한 노란 프리지아 약간에 안개꽃을 둘러놓은 꽃다발도 역시나 3만원이라고 했다!
내 기억에 프리지아라고 하면 한다발에 기껏해야 3천원에서 5천원쯤으로 꽃호사를 누릴 수 있는 소박한 꽃이었는데 기가 막혔다.
그나마도 꽃의 갯수가 현저히 떨어져 히마리가 없어보이는 꽃다발은 깎고 깎아서 2만원.

내가 꽃다발을 2개 사야하니 좀 깎아보려고 흥정을 붙이자
꽃집 주인은 꽃에도 A, B, C 급이 나뉜다면서 나를 물정도 모르는 무식쟁이 취급을 하며
아예 가게 안으로 들어가버렸다. -_-;;
꽃집에서도 냉장고 안에 고이 간직하고 파는 대가 굵고 길고 튼튼한 꽃들과 입구 양동이에 아무렇게나 담가놓고 팔거나, 심지어 리어카에서 물에 담그지도 않은 채 옆으로 뉘어놓고 파는 꽃들의 질과 값이 다른 걸 내가 왜 모르겠는가!
꽃집 주인은 극구 최고급 A급 꽃으로 만든 것이라 장담했지만 그리 크지도 않은 꽃다발 속의 장미는
분명 대가 가늘가늘하고 송이도 작아, 아무리 잘 봐줘도 B급 정도밖엔 되지 않는 듯했다.
남대문이나 양재 꽃시장엘 다녀왔다면 같은 값에 엄청나게 탐스럽고 호화로운 꽃다발을 만들 수도 있었겠지만, 시간도 얼마 없고 선택의 여지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비싼 꽃다발을 살 수밖에 없었는데
꽃집 주인 얘기로는 꽃값이 엄청나게 비싸진 이유가 비싼 기름값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비닐 하우스 난방을 해서 꽃을 재배해야 하는데 수지가 맞질 않아 많은 이들이 꽃 재배를 포기했고
그래서 품귀 현상이 벌어져 꽃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는 것.
게다가 꽃다발을 만든 플로리스트의 인건비가 있는데 꽃값만 따져서 꽃다발을 사려는 나의 얄팍한 생각을 나무라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꽃다발의 과잉 장식도 싫고 주렁주렁 달린 리본이며 너덜거리는 포장도 싫은 사람인 걸 어쩌랴.
게다가 플로리스트의 감각과 재치가 돋보이는 색다른 꽃다발이었으면 또 모를까(요새 여러 종류의 꽃들을 교묘하게 섞어 화려하고 상큼한 느낌을 주는 꽃의 배열이 유행이며, 그렇게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꽃들을 선택해 적절히 어울리게 하는 꽃꽂이가 전적으로 플로리스트의 역량에 달렸다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그저 평범한 수준의 꽃다발이었기에(물론 졸업시즌에 아줌마 아저씨들이 너무도 추악하게 꽃을 '싸서' 파는 꽃다발의 수준은 아니었다) 내 불만은 쉽사리 잠재우기 어려웠다.

째뜬 그렇게 꽃값 비싸다는 얘기를 구구절절 귀 아프게 듣고 꽃다발을 샀던 터라
봄도 왔으니 집에 프리지아나 튤립 한 다발 꽃아야겠다는 생각은 쏙 들어가고야 말았다.

그런데!
어제 혜화동에 갈 일이 있어 나가보니, 전철역 안 간이 꽃집에서 아 글쎄 프리지아를 한 다발에 무려 <천원>에 팔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한 다발이라기엔 민망할 정도로 가느다란 줄기 10개를 묶은 것이긴 했지만
천원짜리 두 묶음이면 열흘도 되기 전에 내가 샀던 프리지아 꽃다발에 버금갈 정도의 양이었다!
열흘도 되기 전에 꽃값이 열배 이상 차이가 나다니 이 무슨 조화일까... -_-;
입학시즌이 끝나버려서 갑자기 꽃값이 내렸다고 해도
그간 비닐하우스에서 기름 때가며 재배한 원가가 있다면 그토록 엄청난 값의 폭락은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닐까? 경제 개념이나 시장 원리에 대해선 일자무식이긴 해도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결론은 3월 1일에 내가 그냥 바가지를 썼다고 간단히 인정할 수도 있겠지만, 같은 날 일산에서 꽃다발을 샀던 막내네도 3만원짜리 꽃다발 값에 기막혀 했기 때문에 나만 멍청히 바가지를 썼다는 추론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실 꽃값이 제일 싼 오뉴월에도 유독 꽃이 싱싱하고 예쁜 꽃집에 가보면
유리로 된 냉장 진열장 안에 우아하게 꽂혀 한 송이에 3천원짜리 장미가 있는가 하면,
길거리 리어카에서 한 다발에 3천원 하는 장미도 있으니 꽃값의 실체 따위를 파악하는 것은 내게
꿈도 못 꿀 일이다.
다만 도매가와 소매가의 차이가 있고, 유통과정의 정성에 따라 싱싱한 꽃과 금세 시들 꽃의 차이가 있고
원가가 비싼 꽃과 원가가 싼 꽃의 차이가 있을 것이라고 짐작만 할 뿐이다.

어쨌든 꽃이 내게 주는 기쁨은 같다. ^^;;
소박한 값으로 꽃을 장만할 수 있었다면 더욱 뿌듯하긴 하지만, 꽃을 꽂은 순간 그게 얼마짜리였는지
포장이 얼마나 거대하고 촌스러웠는지는 그리 중요하지도 않고 곧 잊혀진다.
3천원의 행복인지, 5천원의 행복인지 따지는 꽃자랑은 사실 블로그나 미니홈피 같은데 기록하기 위함일
뿐이고, 그저 간만에 꽃을 꽂아놓고 감상하는 소박한 사치를 누린다는 것만으로 족한 듯하다.

아줌마가 주섬주섬 셀로판지에 담아주는대로 흔쾌히 사들고 온 노란 프리지아는 확실히
내가 악착같이 깎으려고 했던 열흘 전의 꽃다발보다 세배 쯤 풍성하고 훨씬 싱싱하다.
비록 C급 꽃이라 해도 한 일주일 내 눈과 코는 행복한 호사를 누릴 터이니 그저 흐뭇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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