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꾸러미'에 해당되는 글 198건

  1. 2008.02.29 지하철에서 13
  2. 2008.02.27 이상한 일 10
  3. 2008.02.21 귤과 겨울 4
  4. 2008.02.19 6시간의 외출 7
  5. 2008.02.12 단신의 비애 11
  6. 2008.02.09 첫째 기질 12
  7. 2008.02.01 1월이 갔다 6
  8. 2008.01.24 뜬금없는 여행 8
  9. 2008.01.11 눈이 쌓였다 7
  10. 2008.01.09 궁금 13

지하철에서

삶꾸러미 2008. 2. 29. 17:43

처음엔 들판을 뛰어다니다  들어온 아이들한테서 나는 비릿한 바람냄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람을 몰고 들어온 아이들의 비릿한 냄새는 싱그러운 반면 그 냄새는 어딘가 역겹고 매캐했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휘릭 공기가 한바퀴 소용돌이 치자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꽤 멀리까지 지하철을 타느라 일부러 가져온 책에 코를 박고 있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냄새의 정체가 무엇일까 탐색에 나섰다.
멀리 고개를 돌릴 것도 없었다.
책에서 고개를 들자마자 내 오른쪽에 앉은 남자의 무릎에 덮인 빤질빤질한 외투자락이 보였다.
조심스레 곁눈질을 하니 머리 위로 푹 뒤집어 쓴 후드 앞쪽도 때가 끼어 빤질빤질했고
매캐하고 짠내처럼 농도 짙은 체취는 옆에 앉은 남자가 풍기는 게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다.
남자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반대편 좌석으로 가서 선 남자처럼
나도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하나?
나도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아마도 노숙자인듯한 이 남자는 민망해 하지 않을까?
이 남자는 정말로 노숙자일까?
아니면 그냥 오래 빨지 않은 옷을 입고 오래 씻지 않은 게으름뱅이에 불과할까?
5미터 근방에도 접근할 수 없을만큼 악취가 심하고 때가 더깨로 앉은 노숙인을 본 적도 있지만
이 남자는 분명 그 정도는 아니었고 손도 거무스름하긴 해도 손톱밑에 새까맣게 때가 낀 건 아니었다.
남자의 오른쪽 자리가 비었다 채워졌다 사람들이 다시 용수철처럼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남자는 초조한듯 고개를 수그린 채 마주잡은 양손의 검지를 계속 서로 돌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열심히 책을 읽어 약간 거슬리는 냄새를 잊으려고 했다.
내가 내릴 정류장은 꽤나 많이 남아 있었고, 다른 때는 불쾌하게 느껴졌던 딱딱한 은색 의자의 따뜻한 온기가 아쉽기도 했다.
문득 남자 역시 추위에 언 몸을 지하철 의자의 온기로 녹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진 나는 다시 책에 몰입하지 못했다.
만일 남자가 종착역까지 간다면 그건 따뜻한 온기를 누리기 위함일 확률이 높을 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남부터미널 역에서 문이 열린 뒤 후다닥 뛰어내렸고
그 남자가 앉았던 내 옆자리엔 한동안 아무도 앉지 않았으며
그가 의자에 남기고 간 농도 짙은 체취는 몇 정거장 뒤에 내가 내릴 때까지도 객차 안을 떠돌았다.

그 남자가 정말로 노숙자였는지, 씻는 걸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약간의 불쾌감을 참으며 그냥 앉아 있었던 이유도 잘은 모르겠다.
괜한 허영심이었을 수도 있겠고, 그냥 귀찮았을 수도 있고, 섣불리 오해하기 싫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포장마차 천막같은 질감의 외투를 입었던 그 남자 옆에서 나 역시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지 않은 게
스스로도 퍽 의아했다.
그나마 바깥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남자가 노숙자든 아니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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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일

삶꾸러미 2008. 2. 27. 17:35
아주 가끔 신경줄이 너무 팽팽해지면 있는 일이긴 하지만 연일 불면에 시달린다.
머릿속이 멍해져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도 도무지 진전이 되질 않는 아침이면
그냥 스르르 누워 5분만에 잠들어야 정상인데
그렇게 누워 몇시간씩 끙끙대다 보면 그냥 오후가 되어 버리는 거다.
36시간도 내쳐 잘 수 있다고 장담하는 자타공인 잠순이 체면이 말이 아니다.
원고 마감일도 연장 받았는데... 이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잠과 식탐은 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불면 때문에 편두통이 생긴것도 모자라 식욕이 없다.
끼니 때를 지나 배가 고프면 화가 나고 공격적으로 변하며 손이 벌벌 떨리는 증상을 갖고 있는 내가
식욕이 없다는 건 매우 이상한 일이다.
오늘 아직 한끼도 먹지 않았는데 배도 안 고프다. 이건 더 이상하다. -_-;;

그리고 가장 이상한 일은 우리집 목욕탕에서 '지렁이'가 발견된 것.
루인님의 블로그에 갔다가 어젯밤 기겁한 일이 떠올랐다. ^^
오래된 옛날 집에 살면 여름 한철 온갖 벌레들과 만나게 되긴 하지만
난데없이 겨울 목욕탕 바닥에 지렁이 출현이라니 어찌나 놀랐던지.

하수구를 타고 올라온 모양이던데 느릿느릿 미끄러운 타일 바닥에서 방황하는 지렁이를 보고는
처음엔 내 눈과 시력을 의심했고
그 다음엔 기겁하며 비명을 지를 뻔했고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다 열심히 물을 부어 다시 온 길로 돌려보냈다. -_-''

오래된 집이라도 다행히 바퀴벌레와 개미는 출몰하지 않는 반면
여름이면 노린재, 매미, 벌, 이름모를 풀벌레 따위가 날아드는데
그럴 때면 나는 그들을 종이 양탄자에 태워 다시 밖으로 살려보내곤 한다.
그런 기억 때문에 어젯밤엔 지렁이도 어떻게든 집어 밖으로 내보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퍼뜩
들었는데 그랬다간 얼어죽고 말 것 같았다.

오래된 하수구엔 분명 깨진 틈이 있었을 것이고 그 틈으로 기어오른 것이 하필 우리집 목욕탕이란
얘긴데... 온갖 더러운 물과 비눗물이 내려가는 우리 집 하수구 밑에서 지렁이가 살아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최근에 지렁이를 본 건 작년 여름 하남시에 있는 외삼촌 댁 텃밭에서 감자를 캘 때였는데!

그러고 보니 십수년 전엔 비가 온 뒤 집앞 언덕을 내려가는 일이 참 고역이었다.
여기저기 지렁이들이 길고 뻘건 몸을 뒤틀며 느릿느릿 지나가거나
자동차에 치여 처참한 시체로 널려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비가 온 뒤에도 지렁이를 본 적이 거의 없어 공해 때문에 우리 동네 지렁이들도 죄다
어디로 이사를 갔거나 몰살당했나 보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근처 땅속에 살아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이상하기 보다는 신기한 일이긴 하지만
목욕탕에 출현한 지렁이. 암튼 별 일 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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귤과 겨울

삶꾸러미 2008. 2. 21. 21:37

재주소년의 노래도 있지만
귤은 내게 곧 겨울을 의미한다.
찬바람이 불고 거리 과일가게와 리어카에 귤이 쌓여 있으면 겨울이 왔다는 뜻이고
또 겨우내 맛있게 먹었던 귤이 어느 순간 싱겁고 텁텁하여 맛이 없게 느껴지면 봄이 머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것이다.

모름지기 맛있는 과일이란 달기만 해서는 안되고 반드시 새콤한 맛도 겸비해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기 때문에 귤은 내가 몹시 좋아하는 과일이어서 겨우내 집에 귤을 떨어뜨리는 일은
거의 없다.
요즘엔 보관성 때문에 딸기도 겨울 과일이 된 터라 귤과 경쟁을 벌이고는 있지만
반드시 씻어 먹어야 하는 딸기와 달리 겉껍질에 농약이 묻었든 말든 맨손으로 슥슥 까 알맹이만 입에
넣을 수 있는 귤은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겐 참으로 소중한 존재다.

헌데 이상하게도 며칠째 계속 먹고 있던 귤이 어제부터 어쩐지 탱탱함을 잃은 듯하더니 맛도 밍밍하고
텁텁하여 새콤달콤 싱그러운 제 맛을 잃은 것 같다.
바야흐로 봄이 머지 않았다는 뜻이라 여기며 슬며시 흐뭇해졌다.
제대로 봄이 오면 또 하우스에서 재배하여 껍질이 얇고 속살이 보드라운 '조생귤'이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지겨운 겨울은 어서 가버리고 따뜻한 봄아, 맑고 싱그러운 얼굴로 빨리 오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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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시간의 외출

삶꾸러미 2008. 2. 19. 21:36
드물게도 오전 11시에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수서에 있다는 서울삼성병원.
운전을 할 것인가 말것인가 고민하다 아무래도 병원에서 오래 머물게 될 것 같아 주차비도 아끼고
온실가스 줄이기에 협조하자는 기특한 생각으로 가닥을 잡았다.
따뜻한 봄볕 같은 햇살 아래 공연히 기분이 좋아져 그간 부족했던 운동 삼아 좀 걷는 것도 좋겠지 싶었다.
반가운 만남과 짧은 병문안, 긴 수다로 한껏 고무된 터라 피로 따윈 찾아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총 6시간의 외출을 마치고 집에 들어오면서
내 머릿속은 온통 "빨리 집에 가서 눕고 싶다, 눕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ㅠ.ㅠ

크기는 해도 별 무거울 것 없는 가방은 점점 어깨를 짓누르고
바윗덩어리 같은 다리와 발을 들어올려 집앞 언덕을 올라오는데 마치 네팔 어디 쯤에 있다는
높은 산을 등반하는 것처럼 숨이 턱에 부쳤다.

오자마자 쓰러져 허리와 다리를 쉬었는데도
등짝엔 담이 철썩 들러붙어 욱씬욱씬 결리고
허벅지와 장단지가 모두 찌릿찌릿 당긴다.

중간에 다른 볼일을 두어 개 더 보기는 했지만 줄곧 걷기만 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을 듯한데
스스로 민망하고 황당하다.
원래부터 걷기를 싫어하는 편이지만 그래도 여행을 다닐땐 아침부터 밤까지 걸어다닐 때도 있었는데
체력이 어째 이 모양이란 말인가.

불현듯 충동적으로 여권을 챙겨 떠나는 여행을 늘 꿈꾸면서
이대론 막상 떠날 여건이 돼도 몸이 따라주질 않겠다는 생각에 퍼뜩 슬퍼졌다.
거창한 운동은 관두고라도 날 풀리면 매일 좀 걷기부터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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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신의 비애

삶꾸러미 2008. 2. 12. 22:16
블로거 이웃이신 미즈키님의 소개로 일본엔 단신의 비애를 담은 <150cm Life>라는 만화책도 있음을
알게 되어 초공감했지만
딱 150cm는 아니더라도 160cm가 안되는 150cm대의 키로 이 시대를 살아가기엔 아픔이 크다.
학교 다닐 때 앞번호이긴 했어도 중학교땐 나보다 작은 아이들이 열명도 넘었고
고등학교 다닐때도 반마다 대여섯 명은 분명히 나보다 작았는데
요즘에 밖엘 나가면 어린이들을 제외하고 나보다 작은 이들을 만나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ㅠ.ㅠ
나보다 작았던 또래들이 내가 스무살 무렵 성장을 멈춘 뒤에도 계속 자랐거나
죄다 이민을 갔거나 단체로 급사를 당했다면 모를까
운동화만 신고 다녔던 대학생 때에도 나보다 작은 아이들을 캠퍼스에서 더러 만나곤 했는데(무려 우리 과엔 나보다 작은 친구가 둘이나 있었단 말이지!)
왜 세상엔 다 나보다 큰 사람들만 돌아다니는 것일까!

<150cm Life>라는 책에서 자기와 비슷한 단신을 만나면 내심 몹시 반가워하며
어깨의 높이와 키를 슬쩍 재보는 장면이 나오는데, 나 역시 그런 사람을 만나면 몹시 반갑기도 하고
동병상련이 느껴져 공연히 친근감이 샘솟는다.

숨막히는 만원버스나 전철에서 사방에 철옹성 같은 사람들의 등짝이나 가슴팍에 얼굴을 파묻고
버둥거리거나, 싱크대 높은 선반에 있는 그릇을 그냥 꺼내보겠다고 까치발을 들고 아등바등 거리다 목이나 어깨 관절을 삐끗한 뒤 결국 포기하고 의자를 갖다놓고 올라서야 한다거나, 요새 발육 좋은 롱다리들을 위해 천편일률적으로 길게 나온 청바지 따위를 20센티미터 가까이 잘라 수선해 입어야 하는 서글픔을 그들도 분명 공유하고 있을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같은 유전자 소인을 갖고 태어났어도 나와는 달리 키가 큰 두 남동생들은 철없던 시절에 가끔
"그 아래 공기는 여기 위보다 좀 탁하고 답답하지 않느냐?"는 둥, "낮은 눈높이에서 보는 세상은 어떻게 보일지 궁금하다"는 둥, "그나마 딸인 누나가 작고 아들들인 지네들이 큰 게 얼마나 다행이냐"는 둥 염장을 질러댔다.
과거에 장난끼 많은 키 큰 친구놈들도 나랑 마주보고 얘기를 하려면 정수리밖에 안보이는데 그나마도 속알머리가 없어(정수리 부근에 특히 머리숱이 없다 ㅠ.ㅠ) 몹시 가엾다고 능청을 떨기도 했다.

크게 넉넉하지도 않은 살림에 내가 출퇴근용 중고차나마 갖게 된 이유도
연일 아버지와 나란히 지하철 출근을 하던 시절, 만원 지하철 안에서 키큰 인간들 틈에서 짜부라질 것 같은  모양새로 누군가의 등짝 사이에 얼굴을 짓눌리는  딸래미를 보호해보겠다고 당신도 그리 크지 않은 키로 버티기를 하시던 아버지가 도저히 불쌍해서 안되겠는지, 당신은 장롱면허 20년의 뚜벅이 인생을 고수하시면서 나에겐 선뜻 차를 사주셨기 때문이었다.
 
운전대를 잡은 뒤에도 작은 키에 대한 비웃음은 줄지 않았던 것 같다.
내가 운전석에 앉으면 뒤에서 전혀 보이질 않는다나 뭐라나..
그리고 새차를 장만한 뒤 운전석에 장착된 에어백의 주의사항에도 150cm미만의 단신이나 아동은 경추 골절의 위험이 있다는 경고가 들어있는데, 단신임에도 시야확보를 넓게 유지하는 것이 좋아 비교적 의자를 멀리 놓고 운전하는 내 자세로는 에어백이 터질 때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농담을 주변에서 아주 진담처럼 해댔다.

어쨌거나...
가뜩이나 발육이 좋고 키도 큰데다 높은 신발까지 신고 다니는 요즘 젊은이들 사이에서
공연히 바닥에 붙은 껌처럼 느껴지지 않으려면 나 역시 꽤나 높은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하니
요즘 유행하는 예쁜 플랫슈즈나 캔버스 운동화 같은 것은 완전히 그림의 떡이다.
그래도 좀 더 나이 덜 들었을 땐 남들이 뭐라 하든 상관 없이 고집스레 납작한 신발을 신고 다닌 적도 있는데
요샌 아무래도 자신감이 줄었는지, 가끔 낮은 신발을 신고 밖에 나가거나 신발을 벗어야하는 공간에서
여러 사람들과 어울려야 하는 상황에 놓이면 빨리 집에 오고 싶어진다. -_-;;

게다가 사람들은 모두들 자신의 신장이나 체중에 대해서 조금씩 거짓말을 일삼기 때문에
또는 나의 신체 비율이 유난히 좋기 때문일 수도 있겠으나(ㅋㅋ 이건 순전 내 바람일 뿐이지만)
내가 좀 작긴 작다고 느끼면서도 정확한 키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해서 "그래도 그 정도면 키가 157cm는 되지요?"라고 물어 내 가슴을 아프게 할 때가 있다.
실제보다 키를 크게 보는데 좋은 것 아니냐고 물을 사람도 있을지 모르겠다만
저 질문엔 '아무리 작아도 157cm는 되겠지. 그 이하는 키도 아니지.. '라는 편견이 감추어져 있음을
키 큰 그대들은 아시는지. ㅠ.,ㅠ

얼마 전 잘 안쓰는 통장으로 매달 자동이체가 되던 보험료 확인(운전자 보험이었다)을 제대로 안해서
보험이 실효되어 다시 살리려면 직접 방문을 해야 한다기에 보험 영업소를 찾았는데
워낙 여러 해 전에 들은 보험이라 인적사항을 다시 기재해야 한다고 했다.
친절한 영업소 직원은 내 앞에 앉아 항목을 하나하나 되물으며 표기를 해 나갔는데
왜 거기 체중과 신장 기록란이 있는 것인지!!
의자에 앉아 있는 나를 척 쳐다본 직원은 내가 대답도 하기 전에 "48kg에 158cm이라고 적을까요?"라고
되물었다. -_-;;
순간 당황한 나는(실제 키보다 크게 봐준 그녀에게 고마움을 느끼기는커녕 '아니, 내가 48kg이나 나가 보인단 말인가?'하는 충격이 꽤 컸다) 실제 몸무게와 신장을 밝혀야 할 것인가 2초쯤 고민에 빠졌다.
체중과 신장, 둘 다 그 기준에 못미친다고 말하는 게 왜 그리 자존심 상하든지..
그리고 건강관련 보험도 아니고 교통사고나면 뒷감당 해주는 운전자보험에 왜 체중과 신장을 기록해야 하는 건데???
융통성 없는 나는 결국 어물어물 실제 몸무게와 함께 키는 실제보다 2센티미터 높인 숫자를 알려주고 나서
이내 크게 후회를 했다.
어차피 높은 운동화 신었으니 158cm이 아니라 160cm라고 우겼어도 상관없었을 텐데!!! +_+
그리고 다이어트 혐오하는 식탐녀 주제에 48kg이란 몸무게가 뭐 어떻다고!!! *_*

.....

순전히 자격지심에 불과하다고 하더라도
늘씬하고 길쭉길쭉한 멋진 사람들이 온통 득시글거리는 사회에서
칠순을 앞둔 엄마보다도 키가 작은 단신의 딸은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마냥 움츠러들 뿐인데
마침 오늘 엄마 모시고 병원에 갔다가 엘리베이터에서 드물게 나보다 작은(!) 젊은 여자를 보고
속으로 몹시 기뻐한 생각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아 기념으로 적어보았다.
써놓고도 아 민망하도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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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기질

삶꾸러미 2008. 2. 9. 17:34
별 근거가 없음에도 많은 사람들이 철석같이 믿고 있는 혈액형별 성격분류는 허무맹랑하다고 생각하지만
형제자매 가운데 몇번째로 태어났는지에 따라 성격과 기질이 어느 정도 달라져
첫째는 첫째끼리, 둘째는 둘째끼리, 막내는 막내끼리 통하는 공통점은 확실이 있다고 생각한다.
언제 어디서든 예외없는 법칙은 없으니 모든 사람에게 '딱 떨어지게' 맞는 건 아니지만
주변 친구들이나 친척,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맏딸은 맏딸대로, 맏아들은 맏아들대로,
둘째나 셋째, 또는 막내 특유의 성격을 얼추 짚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하물며 맏딸이나 맏아들, 막내의 기질을 모두 갖춘 외동딸이나 외동아들의 특징도 따로 분류가 가능할 것 같다.

하지만 표본조사 같은 거창한 이론적 근거를 마련한 적이 없으니
절대적으로 맞다고 극구 주장할 수야 없는 일이고, 내가 직접 겪어보지 못한 둘째나 셋째, 막내로서의 삶을
속속들이 짐작해 기질을 파악해볼 재주 또한 없다.
다만 맏딸로 살아온 본인의 경험과 주변의 맏딸과 맏아들을 두루 살핀 결과 첫째 특유의 기질은
짚어낼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첫째는 자존심이 강하다.
만만하게 따라 배울 손위 형제들 없이 부모나 조부모를 역할모델로 삼고 성장했으며, 늘 주변에서 '너는 첫째니까 의젓해야 한다'든지 '누나 또는 형님으로서 본보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큰 덕분에 은연중에 어른들과 자신을 같은 선상에 놓고 보는 자존감이 극에 달하기 때문인 듯하다.
따라서 누가 시키는 일은 견디질 못하고 스스로 다 알아서 하고 싶어한다. 심지어 부모가 하는 잔소리에도 부아가 치밀 정도여서, 스스로 하려던 일도 누가 채근하면 버럭 짜증을 내면서 아예 하기 싫어진다.
더욱이 잘못을 지적받는 일은 크나큰 수치로 여기기 때문에 스스로 잘못임을 알면서도 그 순간엔 수긍하지 못하여 반항을 하기도 하고, 비록 나중에 후회하고 잘못을 인정하는 일이 있더라도 처음엔 자기가 옳다고 박박 우긴다.
머리가 굵어지면서 부모 또한 약점 많은 인간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에 더욱 못미더워하거나 안쓰럽게 여기므로 철이 일찍드는 경우가 많다.

둘째, 첫째는 카리스마나 리더십이 강하거나, 최소한 그렇게 되려고 노력한다.
어느 집안이든 형제가 여럿인 가운데 첫째는 부모의 기대와 요구치가 높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동생들을 보살피고 이끄는 임무에 충실하다. 간혹 형제가 많으면 군림하려는 경향을 보이는 첫째도 있을 정도다.
듬직함, 책임감, 솔선수범, 친화력 등 어린시절부터 첫째에게 흔히 요구되는 정서를 골고루 개발하는데 성공한 첫째들은 가족 이외의 공동체에 진출해서도 그 같은 기질을 발휘하여 주변의 우러름을 받지만
그렇지 못하여 약간이라도 비뚤어져 자존감만 앞세우는 첫째는 손가락질 받는 '못된' 독불장군이 되는 수도 있으며, 막무가내로 권위주의를 앞세우기도 한다.
(물론 첫째로 태어나서도 병약하다든지, 심성이 유약하여 첫째의 운명이나 주변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하여 카리스마는커녕 평생 그늘이나 뒷전에 숨어 투덜거리기만 하는 첫째도 없지 않다)

셋째, 첫째는 완벽주의 성향이 다른 이들보다 강하여 흔히 까다롭다는 평을 듣기도 한다.
이 기질은 자존심과 일맥상통한다고 할 수도 있는데, 어려서부터 매사에 칭찬을 듣고 타의 모범이 되어야한다는 일종의 강박관념이 머리에 박혀있기 때문에 무슨 일이든 완벽하게 끝마무리를 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는다.
첫째들에게 '대충하고 넘어가기'란 웬만해선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가끔 말로는 '대충한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완벽해야 만족하므로 종종 주변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기도 한다.

넷째, 위와 같은 기질이 복합적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첫째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데, 자존심 때문에 또 그렇다는 티를 내지 못하고 혼자서 해결하려는 경향이 있어 속으로 끙끙 앓기 쉽다.
(스트레스 때문에 생기는 병이나 우울증에 걸릴 확률 또한 첫째가 더 높을 것 같다는 심증이 있기는 하지만 확실하진 않다. -_-;;)


대단히 신빙성 있는 이야기처럼 적어놓기는 했지만, 사실 순전히 내 주관적인 의견일 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성별을 불문하고 내 주변의 첫째는 내가 관찰하고 실감하는 공통적인 특질을 갖춘 경우가 많아
서로 이해의 폭도 큰데, 어떤 경우는 첫째 기질끼리 서로 부딪쳐 어려운 관계가 되기도 한다.
맏딸이었던 엄마가 막내딸이었던 엄마보다 첫째를 더 잘 이해하기도 하지만
자존심과 완벽주의를 앞세우는 첫째 출신 두 모녀의 성격이 더 첨예하게 부딪칠 때도 있다는 얘기다.

어쨌든 내가 보기에 첫째는 확실히 쉬운 일도 어렵게 하며 살려는 경향이 없지 않다.
첫째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유별난 성격과 기질을 갖춘 인간이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이왕이면 내가 별난 인간이라 세상 참 팍팍하게 산다는 결론보다는
'첫째라서 그런 거야'라는 위안을 받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억지스럽게 꼽아보았다.
그러고 보니...
수많은 인간적인 결점을 단순히 혈액형 때문이라고 믿으며 위안을 받으려는 마음과 별로 다르지 않군.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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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이 갔다

삶꾸러미 2008. 2. 1. 20:12

월말이면 당연하게 내 목을 옥죄는 원고마감 때문에 월말 월초를 좋아하진 않지만
넘길 원고는 아직 까마득히 남아있는데도 이번엔 1월이 가버리고 2월이 온 것이 어찌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남들은 작심삼일이 되든말든 산뜻한 새해결심과 함께 시작하는 2008년을 나는 절반쯤 정신줄을 놓고
미련과 청승만 떨며 지내다 한달을 허비했기 때문이다.

작업 분량은 부끄러울 정도로 한심한데
그렇다고 기억에 딱히 남을 만큼 가열차게 논 것도 아니고
재충전을 위한 푸근한 휴식을 취한 것도 아니다.
날씨 춥다는 핑계로, 사랑스런 조카가 왔다는 구실 따위로
그저 하루하루 눈뜨고 게으름부리고 때때로 늘어진 몸을 끌어다 컴퓨터 앞에 앉혀놓긴 했으되
뭘했나 돌아보면 손에 잡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시작이 반이라고, 곧 초인적인 가속도가 붙어줄 것이라고
자신을 믿어보자고 막연하게 품었던 기대는 그야말로 물거품이 되었으니
또 다시 사방에서 원고독촉 받는 일만 남았다.

2월이 시작됐으니 이젠 좀 달라지려나.
아니 달라져야한다.
꼬인 줄을 풀고 다시 힘차게 매달리는 원숭이가 되려면 확실히 달라져야하는데
역시나 오늘도 진도는 지지부진이다.
정신이 번쩍 나는 주사라도 어디 가서 한 대 맞고 오고 싶구나야.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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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여행

삶꾸러미 2008. 1. 24. 23:23
한파가 몰아치는 이 엄동설한에 뜬금없이 여행을 간다.
따뜻한 남반구...로 가는 것이면 좋겠지만 ^^
그것은 아니고 최소한 남쪽으로 향하긴 한다.
한가로이 떠나는 여행을 계획해보자는 막내동생네의 의견에 그러마고 대답한 게
꽤 됐는데, 그때 정해진 날짜가 하필 이번 주말이었고 공교롭게도 날씨가 협조를 안하는 것 뿐이다.
지난주말까지도 까맣게 잊고 있었기에 내게는 뜬금없는 여행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따지고 보면 아주 오래전부터 계획된 여행이기도 하다.

행선지는 경주.
온 가족이 까마득한 수학여행의 추억으로만 간직한 그곳에 나는 어른이 된 뒤에도 두어번 여행을 갔고
수학여행 때 놓쳤던 옛도시의 정취와 놀라운 볼거리에 늘 감탄을 금치 못했다.
다녀올 때마다 늘어지는 나의 경주 자랑에 부모님 역시 솔깃해 하셨고
고등학교 때 본 느낌과 얼마나 다른지, 불국사와 첨성대, 안압지, 석굴암, 남산의 일출 따위를
다 같이 한번 꼭 보고 오자고 우린 막연한 약속을 했었다.  
그리고, 어딜 한 번 가려면 두 동생네가 마음쓰여 그냥 나가서 밥 한 번 먹는 자리에도 결국엔 꼭 죄다 불러들여 거국적인 대사로 만들고 마는 아버지에게 부디 경주 여행은 단출하게 엄마랑 꼭 셋이 떠나자고 해두었는데
그 약속은 결국 지키지 못했다.

벛꽃 만발한 봄과, 단풍이 아름다운 가을에 경주 모습이 제일이긴 하지만
눈이 쌓였을지 어쩔지는 모르겠으나 한겨울의 경주는 나 역시 처음이라 살짝 가슴이 설렌다.
운동부족에다 체중은 나날이 늘어나 걸음걸이마저 시원찮은 엄마 역시
짐스러울까봐 걱정을 하면서도 소풍 앞둔 아이처럼 퍽 기대하는 눈치다.
엄마랑 조카들이랑 같이 아버지 몫까지 최대한 실컷 보고 먹고 찍고 돌아올 생각이다.

음... 해서 내일부터 일요일까지 블로그 개점휴업이라고 간단히 알리려던 것인데,
늘 나의 수다는 참 길기도 하다. -_-;;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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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쌓였다

삶꾸러미 2008. 1. 11. 15:39
세상모르게 쿨쿨 자고 있다가
꽤 많은 눈이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벌떡 일어나게 되는 계기는 늘
집앞을 쓰는 빗자루 소리였다.
그리고 그렇게 부지런히 집앞에 쌓인 눈을 쓰는 사람은 십중팔구 우리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저 멀리 골목 어귀까지 눈을 치우고 있자면, 비질하는 소리를 듣고서 이웃 아저씨들도 나와서 거들곤 하셨는데 오늘은 아침부터 계속 사방이 고요하다.
사람들이 힘겨운 비질보다 염화칼슘 내다 뿌리는 걸 더 선호하기 때문이리라.

하염없이 내려 쌓이는 눈을 내다보다가 커피 한잔 마시고는
동네 친구 아줌마 등쌀에 반강제로 마실간 엄마가 돌아오는 길에 혹시 계단에서 미끄러질까봐
모자달린 파카 입고 나가서 기다란 빗자루로 알량하게나마 집앞에 길을 냈다.
꽤 많이 쌓인 눈은 원래 무거워서 잘 쓸어지지도 않는데
오늘은 푹한 날씨 탓에 젖어 늘어붙은 눈이라 비질이 더욱 어려웠다.  

촤륵촤륵... 눈 쓰는 소리가 정겨운 만큼 슬퍼져서 얼른 들어와
눈 핑계대고 술 한잔 청해볼까 지인들을 떠올리다가
그냥 차나 한 잔 더 마시려고 찻물을 올려놓았다.

마실간 엄마는 수다가 길어지는지 아직도 안 오시고
부슬부슬 힘없는 눈발은 그칠줄을 모르고...
고양이 세수하듯 쓸어놓은 집앞 길엔 또 다시 눈이 쌓여 있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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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

삶꾸러미 2008. 1. 9. 16:10
문득 몹시 궁금해졌다.
2007년을 회고하여 best 문답을 올리시는 부지런한 이웃 블로거분들은
영화니, 전시회니, 공연이니 하는 것들을 다 어떻게 기억하는 것일까? *_*
구입한 책이나 음반이야 실물이 버젓이 남아있으니까 그걸 참고로 할 수 있겠지만
나처럼 아메바 같은 인간은 꽂아둔 책이 올해 산 것인지 작년에 산 것인지 언제 읽었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어디에다 딱히 기록을 해두는 것도 아니어서
도대체가 길고긴 1년이란 세월을 회고하겠다는 작심자체가 무리다.

그나마 재작년까지는 싸이 미니홈피를 다이어리 삼아서 영화든 공연이든 책이든 거의 기록을 해두었지만
그 역시 관두고 나니 나는 겨우 몇달 전에 본 영화조차 제목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질 않는다. ㅠ.ㅠ
심지어 영화를 수십편, 백여편 쯤 보시는 분들도 많은데, 그분들은 설마 어딘가에 꼬박꼬박 기록을
해두시겠거니 짐작하면서도 나와 비교를 해보자니 머릿속이 아득해진다.

예쁜 다이어리를 장만해서 영화표며 공연 티켓을 꼬박꼬박 모아두는 지인도 있는 것은 알지만
나처럼 대책없이 정리정돈에 젬병인 데다 기억력마저 부실한 인간이 대체 뭘 믿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인지 새삼 놀랍다.
 
이렇게 무방비로 사는 인간도 더러 있어야 세상이 재미있지 않겠나 싶기도 한데
솔직히는 이런 내 꼬락서니가 좀 남부끄럽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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