쌩얼 만용

삶꾸러미 2006. 12. 26. 23:56
뽀얗고 투명한 피부를 타고나지 못한 터라
대학 졸업 무렵부터 화장을 시작하고는 맨얼굴로 외출하는 걸 극도로 두려워했던 것 같다.
아주 진한 화장이 유행하여 립스틱과 아이섀도 색깔이 눈에 몹시 띄던 초창기를  제외하면
남들이야 내가 화장을 했는지 안했는지 잘 모를 정도로
성의 없는 화장을 하고 다니긴 했지만, 번들거림이 싫어 유분기를 없애는 정도의 기본화장은
반드시 하고서야 외출을 했다는 얘기다.
여자가 화장을 하지 않고 외출하는 것은 옷을 제대로 갖춰입지 않은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야기에 꼭 동의한다기보다는, 그냥 남들에게든 나에게든 좀 더 예쁘게 보이고 싶은 생각이 더 컸던 것 같다.
어쩐지 옷차림이나 머리 모양이 심히 마음에 들지 않는 날엔 돌아다니는 것이 못마땅해
일찍 집에 들어가고 싶어지는 심리가 인간이라면 누구에게나 있지 않을까?
내 경우 남들의 이목보다는 내 판단기준이 더 중요한 것 같다.
측근이기 때문에 '하나도 안 이상하다', '괜찮다'고 위로하고 부추기는 면이 없지는 않지만, 사실 본인이 아닌 한 자기 겉모습의 미묘한 부조화나 추함을 제대로 파악하는 건 어려운 일이어서 남들은 어쩐지 마음에 안들고 못마땅한 나만의 기분을 잘 모르기 십상이다.

아무튼 그래서 나는  남들이 어떻게 보든
최소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스스로의 기준에 흡족할 때에나 외출을 감행하는
소심한 행태를 아주 오래 지켜왔고,
밤샘 여파 때문에 화장은커녕 세수도 못한 채 맨얼굴을 드러내고 어딘가 가야만 하는 경우엔 야구모자를 푹 눌러쓰고 목도리나 스카프를 둘러 최대한 남들과 나를 배려(!)하는 시도를 잊지 않기도 했다.
집안이 아닌 곳에서 마구 헝클어진 내 모습을 쇼윈도나 화장실 거울로 보게 되는 순간이 지금도 참 싫기 때문이다. (물론 이때 남들은 내게 신경도 안 쓴다는 걸 잘 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턴 쌩얼을 드러낼 만큼 피부속성이 좋지도 않은 주제에
마구 만용을 부리게 된다.
단순히 화장하기가 "귀찮아서" 주근깨와 기미가 숭숭 뿌려진 맨얼굴을 드러내고 나가는 날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뜻이다.
홀로 일하는 작업실에 갈 때에도 제아무리 집앞에서 곧장 차를 타고 가지만
일터에 '출근'을 한다는 데 의미를 두어 옷과 화장에 나름 신경을 쓰던 지난 날과는
참 많이도 달라졌다.

물론 수시로 뾰루지까지 돋은 쌩얼을 드러내려니 남부끄러운 느낌은 여전하여
외투 깃을 최대한 올리고 어깨를 옹송거리며 후다닥 드나들고는 있지만
내 어쩌다 이렇게 만용을 부리는 수준에 도달한 것인지 놀랍기만 하다.

결국엔 하늘을 찌르듯 위상이 높아진 내 게으름 때문이란 얘긴데
쌩얼 미인도 아닌 것이 맨 얼굴을 드러낸다면 그건 '게으르고 대책없는' 아줌마(여기서 방점은 '아줌마'가 아니라, '게으르고 대책없는'에 찍혀 있음을 짚고 넘어가야 할 듯 하다. 이런저런 집안일 수발에 바쁜 아줌마들의 당당한 쌩얼이야 어떠하든 아름다운 것이고, 나 역시 이미 아줌마 소리가 자연스러운 나이이기에 아줌마에 대한 폄하 의도는 전혀 없다)의 길로 들어섰다는 뜻이라는 무서운 이야기를 듣고도 자꾸만 화장이 귀찮다. ㅡ.ㅡ;;

이래서 너도나도 성형외과엘 가서 박피수술을 해 아기피부를 되찾으려 하나보다 싶기도 하지만, 워낙 젊어서도 아기피부가 아니었던 피부속성이고보니 나 역시 그 대열에 합류할 생각은 손꼽만큼도 없으되, 쌩얼로도 아름다운 이들이 진정 부럽긴 하다. ㅠ.ㅠ

결론은
1. 게으름을 극복하고 최소한의 화장은 계속해서 하고 다니거나
2. 쌩얼 만용을 계속 부리며 자괴감에 빠지거나
3. 아니면 내 쌩얼에 드러난 주근깨와 기미와 주름을 무작정 사랑하거나...
셋 가운데 하나인가 보다.

일단 내일은 친구들에 대한 예의로라도 얌전히 1번을 시도하리라. 흑...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