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보면
기독교인도, 천주교인도 아니지만 크리스마스는 나에게도 늘 색다른 날이었다.
심지어 어려서부터 엄마랑 외할머니, 이모들 따라 절에 자주 다녔고
고등학교 시절엔 아예 불교학생회 활동도 했지만
예수님이 탄생한 날이라는 본래의 의미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는 언제나 선물 받고 즐겁게 노는 날로 자리잡은 탓이다.
크리스마스를 뭔가 특별하게 보내야할 것만 같은 생각에 시달리는 건
나뿐만이 아닌 거의 온 국민의 정서가 아닐까?
시청앞은 물론이고 온갖 백화점과 거리에 예쁜 크리스마스 트리가 장식되고
연말연시의 들뜬 분위기와 어우러져 현란한 밤거리가 모두의 외출을 유혹하지 않는가 말이다.
부처님 오신날이 다가와도 한달여 전부터 온 거리에 등이 매달리지만
비신자들에겐 그저 하루 노는 '빨간날'에 불과한 것과는 사뭇 다른 반응이다.
요즘도 그렇겠지만, 어린 시절 우리 부모님은 종교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엄마가 특별히 만들어 주신 커다란 장화 모양의 망사 양말 안에 작은 장난감과 사탕, 과자, 초콜릿 따위의 먹을 것이나, 장갑, 양말 같은 선물을 넣어주셨고,
우리 삼남매는 어서 잠들어야 산타할아버지가 온다는 으름장에 이불 속에 들어갔다가도 선물을 확인하느라 잠옷 바람으로 수시로 마루엘 나가봤더랬다.
그러면 정말로 신기하게 어느새 양말 안에 선물이 들어있곤 했다.
다음날 아침 선물을 까먹으며 양말이나 장갑을 신거나 끼고 놀러 나가 친구들에게 자랑하는 기분은 그야말로 최고였다.
산타가 부모님의 깜짝놀음에 불과하다는 걸 깨달은 게 언제였던가.. 기억도 나질 않지만
그 뒤로도 크리스마스가 되면, 주변 사람들에게 크리스마스 카드를 보내는 것이 너무도 당연한 것 같았고, 게으름이 극에 달하거나 여건히 허락되질 않는 때만 빼면
작년까지도 크리스마스 카드와 연하장을 잔뜩 사들여 여기저기 보냈던 게 사실이다.
심지어 엄마가 병원에 입원해 계시던 제작년 연말에도 남은 시간을 쪼개
바로 옆에 있던 대학 문방구에 가서 카드를 사들여 틈틈이 써보냈던 것 같다. 오 놀라워라!
그뿐인가, 지인들과 크리스마스 선물 교환놀이를 불과 몇년 전까지도 부지런히 해댔고
그와 별도로 한 해 잘, 열심히 살았으니 장하다는 의미로 내가 나에게 주는 선물도
거의 매년 사들였다. 물론 그건 핑계겠지만 ^^;;
실은 올해도 이미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 품목은 정해두었다.
시간이 없어 장만하러 나갈 짬을 못냈을 뿐...
그러면서 또 귀찮아서 크리스마스 카드 쇼핑은 미루고 미루다 결국 시기를 놓치고 말았다.
가까이 있는 지인들은 몰라도 바다 건너 있는 이들에겐 부지런히 카드라도 한 장 보내는 것을 나름의 착한짓이라 여겼는데, 이러다 올해는 연하장 보낼 시기도 놓칠지 모르겠다.
크리스마스는 가족과 함께 보내는 것이 전통인 서양문화와 달리
우리는 크리스마스 때 반드시 남자친구나 여자친구를 만나야 하고
그게 아니면 친구들끼리라도 만나 몰려다녀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게 있는 듯하다.
나 역시 몇년 전까지 대목 보려는 주인들이 값을 두배쯤으로 올려 붙인 '특별 메뉴판' 가격에 놀라면서도 종로 카페나 술집 골목을 쏘다녔고
그게 아니면 아예 스키장이나 콘도로 놀러가서 밤새 먹고 마셔댄 기억이 있다.
원래는 올해도 화려한지는 알 수 없으나 오래도록 독야청청 싱글인 친구들과
홍콩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 연휴를 계획했지만...
친구 아버님의 병세가 악화되는 바람에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크리스마스를 그렇게 요란하게 안보내게 된 것이 잘된 일인 듯싶다.
여행 가봤댔자, 국제적인 지름신 강림하시어 미친듯이 카드춤이나 추어댔을 것이 뻔한 일;;
친구 아버님과 울 엄마의 병환이 좋아지시기를 조용히 비는 게 옳은 일이리라.
성당 부설 어린이집에 다니는 조카의 발표회가 있어서
오늘 오랜만에 크리스마스 즈음에 교회엘 갈 일이 있었다.
성당을 무대로 꾸며놓은 뒷배경 천막에 '예수님, 어서 오세요'라고 적힌 문구를 보고서야
바보처럼 나는 크리스마스가 정말로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이라는 걸 새삼 실감했다.
ㅡ.ㅡ;;
12월 25일이라는 날짜가 정해진 것이야 뭐 여러가지 설도 많다지만
그건 예수탄생보다 2천년쯤 앞선 부처님 오신날도 마찬가지 아니겠나. ㅎㅎ
개천절에만 단 하루 따지는 단기(檀紀)나..
부처님 오신날에나 흘깃 따져보게 되는 불기(佛紀)와 달리
예수 탄생을 원년으로 삼은 서기(西紀)는 전 세계적으로 '너무나' 당연히 사용되고 있는 것처럼 크리스마스도 그냥 당연히 즐기는 연말의 휴일 하루로 변질되어 내 뇌리에 새겨졌던 모양이다.
부처님 오신날, 매년 특별법회가 열리는 절에 가서
예쁜 꽃에 둘러싸여 계신 아기 부처님을 맑은 물로 씻어드리는 의식 후에 머리 숙여 절하였듯
믿음의 여부와 상관 없이 성탄절도 경건하게 축하하는 게 맞는데
어쩌다 이런 풍조에 휩쓸리게 되었을꼬.
소비를 부추기는 상업주의에 가장 유력한 혐의가 가지만, 그렇다고 버스에조차 매달린 새빨간 리본 장식과 반짝이는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을 보면 반사적으로 마음이 설레는 걸 말릴 수도 없다. ^^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찜해둔 물건도 아마 점원에게 분명히 예쁘게 선물용으로 포장해달라고 요구할 것이 뻔하다.
반평생 그렇게 크리스마스를 빌미로 유희를 즐겼는데, 그 버릇이 쉽게 고쳐지겠나.
내년 크리스마스엔 또 어떤 생각을 하며 보내게될지 모르겠지만
올해는 크리스마스를 맞아 이렇게 별 것 아닌 상념을 적어둔 것으로 만족할란다.
이만하면 철들었지 뭐.. ㅡ.,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