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에 물 한 번만 주면 된다는 장담과 함께 선물받은 선인장도 죽이는 여자가 아무렴.. 당연한 결과겠지만, 100일 넘게 나름대로 최대한 정성을 들여 키우던 마리안느가 확실히 죽어가고 있다.
메디컬 드라마나 병원 나오는 영화를 보면, 환자가 숨을 거두어도 의사가 공식적으로 사망선고를 하지 않으면 죽은 게 아니다. 화분 전문가도 아니면서, 나 역시 억지부리듯 죽어가고 있음이 분명한... 어쩌면 벌써 죽은 것인지도 모를 화분의 사망선고를 애써 미루고 있다.
그러면서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정성스레 돌봤는지 여기저기 끄적인 글을 죄다 돌이켜 보니, 초등학교 시절 자연 시간에 강낭콩 키우며 쓴 관찰일기가 생각나 여기 모아놓기로 했다.
정말로 마리안느의 죽음을 인정하게 되는 날 너무 속상해지면, 이 글을 보며 조금이나마 위안을 받아보려는 알량한 생각.
2006. 9. 4. 월요일 <내손으로 화분을 들이다>
근 두 달만에 작업실 청소를 했나보다. -.-;; 그동안에도 청소기를 몇번 돌리기는 했지만, 본격적인 걸레질까지 한 건 확실히 두 달 넘은 것 같다. 새집증후군은 대체 얼마나 있으면 사라지는 걸까? 오피스텔을 지을 때 엄청 나쁜 재료를 썼기 때문인지, 아니면 2년 넘도록 작업실을 최소한 절반은 비워두고 잠가두었기 때문인지, 아직도 방에서 새집 냄새가 난다.
환기를 하고 나면 금방 사라지는 것도 같지만 며칠만에 출근하면 영낙없이 새집 특유의 냄새가 느껴지는 거다.
그동안 이렇게 저렇게 들였던 화분도 선인장 작은 거 두개와 수경재배하는 작은 테이블 야자 하나 빼곤 다 죽인 바람에 공기청정 효과도 기대할 게 없고 해서 오늘은 대청소 마치고 벼르고 벼르던 대로 화분 가게 가서 제법 거금을 들여 이파리 싱싱하고 예쁜 마리안느랑, 잎이랑 똑같이 생긴 빨간 꽃이 피는 화분(주인아줌마가 이름 가르쳐줬는데 까먹었다. ㅠ.ㅠ)을 사왔다.
과연 또 얼마만에 죽일지 걱정이 앞서지만.. 그래도 그놈들이 장렬하게 전사할 때까지 나에게 신선한 공기를 뿜어줄 걸 생각하여 몹시 고마워하며 어여삐 여길란다.
싱싱하고 건강하던 녀석들의 처음 모습
2006. 10. 3. <어떻게 하면>
어떻게 하면 화분을 잘 키울 수 있을까? 아니.. 식물을 금세 안 죽이려면 대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원래 나란 인간이 초록 식물들을 무섭게 죽이는 마의 손길이란 건 알지만.. 불과 한달 전에 몇 만원이나 들여 공기청정 효과도 있고 예쁘기도 한 마리안느와 아마존 화분을 둘이나 작업실에 손수 사다놓고 화원 아줌마의 당부와 인터넷에서 찾아본 매뉴얼 대로 열흘에 한번씩 꼬박 충분히 물을 주고 받침에 물 안 고이게 화분을 말리는 따위의 정성을 들이고 있는데도 필리핀에 며칠 다녀오고 나니... 두 화분 모두 잎이 군데군데 말라 시커멓게 죽어가고 있는 것을 발견! 친절한 네이버에게 물어보니, 아무래도 수분과다인듯 하여 화분을 바싹 말리고 뿌리가 썩어가고 있는 것을 대비해 살충제를 사다 꽂아주라는 전문가의 조언대로 잘라낸 이파리 두 장을 견본으로 들고 화원으로 달려갔다.
그랬더니 화원 주인 아저씨 잘라낸 이파리 두 개를 가방에서 꺼내 보여주는 내게 그냥 씩 웃으며 수분과다가 아니라 햇빛을 많이 받아 잎이 탄 것 같다는 거다.
작업실에 있는 화분이 햇빛을 많이 받았을 리 없어 며칠 두고 여행 다녀왔다고 실토하니, 그제야 통풍이 화분 키우기에 대단히 중요하다며, 좁은 공간에 창문을 닫아두면 화분도 숨을 못쉬어서 잎이 상한다면서 마르기 시작한 잎들은 차츰 모두 잘라주고 새로 나오는 잎을 잘 받아 키우라고 당부하고는, 살충제 따위는 전혀 소용이 없다고 나를 돌려보냈다. ㅠ.ㅠ 처음 살 때부터 까짓거 최악의 경우 몇달 만에 말려죽이거나 썩혀 죽이겠지 생각했지만, 겨우 한달 만에 이건 너무 심하다. 식물도 애정과 정성을 쏟으면 알아듣는다더니 그거 다 헛소리였던 겐가?
오늘은 또 다시 변색된 이파리 몇장을 잘라주며 마리안느야, 죽지 마라.. 죽지 마라 소리내어 타일렀다. 에휴....
추석 연휴때 또 방치하고 돌아오면 어떤 모습으로 변해 있을지 두렵기 짝이없다. 그땐 죽어가는 화분도 살려내는 탁월한 솜씨를 보이고 계신 울 아부지한테 위탁 재배(?)를 하는 수밖에 없겠지. 아무튼 참살이의 길은 참 멀고 험하도다.
2006. 10. 17. <마리안느는 살아날까?>
화원 아저씨의 조언대로 군데군데 마른 잎들을 아예 잘라버리고 매일 유심히 쳐다보았더니 여전히 갈색 반점이 생긴 잎들은 더러 있지만 새순이 세개나 나와서 작은 잎사귀로 크고 있다.
나의 마리안느는 살아나려는 걸까??
통풍이 중요하다 하여 요즘 가끔 서늘한데도 늘 창문을 열어놓고 환기를 시킨다. 하긴... 공해 가득할 것 같은 바깥 공기가 오히려 수많은 유해물질로 가득한 실내공기보다 낫다더라. 신축한지 2년이 넘은 이 건물에서도 나는 아직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내가 작업실에 오래 거주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암튼 마리안느와 아마존 화분에 물을 준지가 3주가 다 돼가는데 다시 물을 줘야하나 말아야하나 아직도 고민이다. 관리법을 찾아 여기저기 뒤져보면 말들이 서로 다르다.
고온다습한 걸 좋아한다면서, 한달에 2, 3번 물을 주라는 데도 있고흙을 만져보아 바싹 말랐을 때 물을 주면 된단다.
나더러 어쩌라고??? 흙이 바싹 마른 느낌은 어떤 건데? 인공이끼로 덮어놓은 화분 흙을 며칠 마다 한 번씩 쑤셔보지만 손톱 밑에 흙만 낄 뿐, 바싹 말랐는지 아닌지 잘 모르겠다. ㅠ.ㅠ 아무튼 화장실에 가져가 물 한번 주고 나서 완전히 물기가 빠져나오기 까지 무진장 오래 걸려, 물이 다 빠진 줄 알고 방에 가져다 놓으면 한참 있다가 바닥에 물이 흥건해지는 걸로 보아, 이 화분들은 물빠짐이 안좋은 흙으로 채워진 것 같다. 그러니깐 더 오래 있다가 물을 줘야한다는 얘긴데.. ㅜ.,ㅜ;; (집에서 아부지가 키우시는 마리안느는 1주일에 한번씩 듬뿍 물을 줘도 쑥쑥 잘만 자라고 있다!)
두 화분이 내 손에 들어온 지 이제 겨우 45일. 계속 불안하다. 또 하나 휘휘 감겨 곧 벌어질 것 같은 새순도 잘 자라줄 것인지... 화분 때문에 이렇게 노심초사하기는 참... 난생 처음인 것 같다.
반점이 생겨 타 들어가고 있는 마리안느 이파리
잘하면 살아날 것도 같던 녀석들은 나날이 잎이 누렇게 변해갔고 누런 잎을 잘라주면서 모양새도 차츰 앙상해졌다. 이제 초록 부분은 거의 안남은 상태...
식물에도 생명이 있다면 그간 수없는 원망을 들었겠지만 이 녀석은 특히 떠나보내기가 안타깝다. 죽기 전까지 공기청정기 대신으로 이용해먹으려는 심산이긴 했어도 정말 이 정도면 최대한 정성을 들였던 거라 조금 억울하기도 하다.
뜻하지 않게 며칠 전에 생긴 포인세티아 화분 두 개랑 수경재배용 개운죽도 이파리 세 장 남은 아마존과 함께 과연 내 악의 포스 속에 얼마나 살아남을 것인지.. 흑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