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10.05.12 구김살 없는 그림 14
  2. 2010.05.12 구김살 7
  3. 2010.04.06 개구리 반찬 15
  4. 2010.03.14 끝났다 20
  5. 2010.03.07 노년의 생일 19
  6. 2010.03.05 외할아버지 6
  7. 2010.02.04 부적 20
  8. 2010.02.02 무서운 사람 13
  9. 2010.01.21 방학 14
  10. 2010.01.09 섬망증

구김살 없는 그림

놀잇감 2010. 5. 12. 20:40

간만에 숨 좀 돌린답시고 구김살 얘기를 썼더니 계속 기분이 구겨진 채로 있는 것 같아, 다시 반전을 모색하는 포스팅이다. 기분이 좋아지고 싶을 땐 그저 만만한 게 나의 조카들 자랑. ㅋ

첫조카가 생겼을 땐 나의 조카만 '유독 천재'라서 그림을 잘 그리는 거라고 착각했고, 화가의 혈통(울 막내고모)이 어떻게든 유전자로 발현된 게 틀림없다고 감탄했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의 조카들도 그 또래 때는 다들 비슷한 수준의 그림을 그리는 모양이었다. 개인차야 약간씩 있겠지만, 나의 조카들만 천재성을 발휘한 건 아니란 사실에 좀 맥이 빠졌어도 여전히 나는 "혹시 몰라..." 하는 마음에 아직도 조카들이 이면지 따위에 그려준 작품을 소중히 간직하고 있다.  

헌데 녀석들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언제부턴가는 통 작품을 받을 수가 없어졌다. 내가 지켜본 결과 아이들이 가장 황홀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그림으로 보여주는 시기는 다섯살 전후(만으로는 48개월 전후)이고, 유치원이다 뭐다  제도권 교육에 물들면서 7살쯤 접어들면 함부로 그림을 그리지 않는다. 해서 최근 2년간은 통 조카들의 새작품을 확보할 수가 없어 안타까웠다는 의미다. 집에 놀러가거나 유치원 발표회 같은 델 따라가서 그간 그린 작품들을 구경할 기회가 더러 있긴 했지만, 오로지 나만을 위해 그린 작품을 헌사받는 기쁨을 그깟 한번 구경하는 것과 비교할 순 없는 법. 나로선 제일 어린 지우가 어서 커서 고모에게 그림을 안겨줄 날을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드디어.
지우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낭보가 들려왔다. 어쩐 일인지 색칠에만 관심을 보여 윤곽선은 딴 사람에게 그리게 하던 녀석이 하루에도 스케치북을 몇권씩 써버린다는 소문이었다. 옳다구나 싶었고, 때를 노리던 나는 드디어 지우의 그림을 확보하는데 성공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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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김살

삶꾸러미 2010. 5. 12. 16:53

천진난만한 아이들에겐 정말로 구김살 없는 표정과 태도를 온전히 실감할 수 있지만, 어른이 되고 난 뒤에도 구김살이 없기란 참 쉬운 일이 아니다. 물론 다들 훌륭한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에 언뜻 보아서는 물론이고 꽤 가까이서 자세히 들여다보아도 구김살 여부는 잘 알 수 없다. 성격에 따라서는 과거의 구김살도 다리미로 완벽하게 펴 산뜻하고 매끄럽게 살아가는 이도 있으니, 구김살 없는 어른이 드물다는 나의 전제부터 틀렸다고 누가 반박한다면 싸울 생각은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내 생각은 변함없다. 이 팍팍한 세상에서 구김살 없이 성장한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나 갖고 있는 구김살을 어떻게 스스로 잘 파악하고 관리하고 펴는 노력을 펼치느냐, 하는 것이 중요할 뿐이다. 

구김살의 사전적인 뜻, "(주로 '없다'는 부정의 표현과 함께 쓰여) 표정이나 성격에 서려 있는 그늘지고 뒤틀린 모습"을 살펴보노라면 더욱 의미심장해진다. 심리학엔 완전 문외한이지만 어쩐지 심리학적으로 접근해야할 문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심리학을 공부한 친구에게 주워들은 풍월로는 확실히 그렇다. 심리치료를 공부한 뒤 개인병원에서 마음을 다친 아이들과 자폐아동 치료를 돕던 친구는 성당 봉사활동으로 기도모임에서 어른들의 다친 마음 치유를 이끌다가 결국엔 그 일을 본업으로 삼게 되었다.

독실한 신앙과 기도로도 어쩌지 못하는 마음의 구김살, 영혼의 상처가 얼마나 지독한지 친구의 얘기를 들어보면 덩달아 가슴이 아프다. 그 친구만 해도 그렇다. 친구는 어려서부터 소금과 짠맛을 즐겼다. 고1때였던가, 가정 시간에 자기는 토마토는 물론이고 수박도 소금에 찍어먹는다는 사실을 밝혀 모두를 놀라게 했을 정도였다. 얼마 전까지도 고깃집에 가면 소금을 미리 두어접시는 더 달라고 해 옆에 끼고서 찍어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기는 소금에 길들여진 체질이라 건강에 이상이 없다고 자신했다. 우린 평생 그렇게 먹어왔으니 그럴법도 하다고 여겼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리투아니아였던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곳으로 얼마 전 성지순례를  다녀온 친구는 거기서 만난 신부님에게 뜬금없이 엄마를 용서하라는 말을 들었단다. 엄마를 용서하는 마음을 갖지 않으면 아무리 소금을 집어삼켜도 마음의 구멍을 채울 수가 없다고. (통역까지 필요했던 외국 신부님이 첫눈에 친구의 소금 취향을 어찌 알았을지 그건 미스터리다. -_-;;)

심리학적인 분석의 결과라고 해야할지 영성의 힘으로 파악한 문제의 핵심이라고 해야할지 나로선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친구의 문제는 엄마 뱃속에 있던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둘째를 낳고 싶지 않아했던 터라 차마 직접적인 행동엔 옮기지 못했지만 임신 기간 내내 후회를 하며 아이가 어떻게든 잘못되기를 바랐다. 결국 친구는 칠삭동이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서 생사의 고비를 넘기며 남은 기간을 채워야 했는데, 늦둥이 막내딸임에도 넘치는 사랑보다는 터울이 많은 오빠에 비해 늘 차별을 받으며 자랐다. 어려서부터 "안 낳으려다가 어쩔 수 없이 낳은 자식이라 그런지 애가 이래저래 좀 처진다"는 말을 친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야 했다. 그런데도 친구는 나이 들어서 낳은 딸을 키우기 힘들었을 엄마를 이해하려 노력하며 약간 불만을 품었을 뿐 내면 깊이 엄마에 대한 미움과 한이 자리잡고 있을 줄은 몰랐단다. 그리고 그 증오심이 엉뚱하게 소금을 탐닉하는 것으로 표현됐을 줄은 더더욱 몰랐을 테고. 건강검진 결과로도 친구는 '전혀' 소금 체질이 아니었음이 드러났고, 지나친 나트륨 섭취 때문에 몸에 이상이 생길 정도였다. 그토록 오랜 세월 남들의 다친 마음을 들여다보면서도 본인의 마음을 파악하는 데는 소홀했던 친구는 자기 문제가 뭔지 알고 난 뒤 정말로 엄마에 대한 해묵은 감정을 다스려 용서하려고 노력했고, 여전히 남들보다는 짜게 먹는 편이지만 예전만큼 소금에 탐닉하진 않게 되었다.

친구의 도움으로 꽁꽁 감추어져 있던 오래된 내면의 문제를 찾아내 마음의 구김살을 펴려고 노력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하나같이 놀랍다. 그들에게 상처를 남긴 장본인이 대부분 가족이나 최측근이기 때문이다. 부러울 것 하나 없어 보이는 부와 행복을 누리며 자식농사마저 성공해 화목한 가정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였던 어느 아주머니는 자신에게 아무런 문제도 없으며 다만 무뚝뚝한 남편이 좀 불만이라고 생각했지만, 심리치료의 단계를 거슬러 올라가보니 모성과 애착의 결핍이 원인이었고 사춘기 이후 50대가 되도록 "엄마!"라고 불러본 적이 없을 정도로 모녀간의 골이 깊었단다. 치료과정에서도 '엄마'라는 말을 차마 입밖에 내지 못할 만큼.

모성이나 부성의 부재 자체가 문제인 경우도 있고, 너무 잘난 형제에 치여 마음을 다쳤거나 둘도 없는 친구에게 배신을 당한 상처로 알게 모르게 마음앓이를 한 이들의 사연을 가끔 친구에게 전해듣다 보면, 나도 모르게 주변 사람들을 새삼스러운 이해(또는 편견)의 시각으로 바라보게 된다. 나의 짐작이 전적으로 맞다고 주장할 순 없겠으나, 이러저러한 상처 때문에 이런저런 성격이 생겨났을 수도 있겠구나 하고 빈약한 이론과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식이다. 구김살이 까칠함으로 발현된 것이 분명한 나 자신의 문제가 무엇인지 찾아보게 됨은 물론이다. 심지어 엄마 없이 자란 아이들이 모두 문제아가 되는 건 아니지만, 살인 같은 극단적인 문제를 일으킨 사람들의 개인사를 추적해보면 반드시 모성의 결핍이 두드러진다든가 하는 이론에 귀가 솔깃해지도 한다.

친구가 전하는 치료 사례를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어린 시절에 겪은 마음의 상처로 평생 고통을 겪는 사람들은 사실 주변에 널렸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엄마가 재혼하는 바람에 할머니 손에 자란 남매는 사춘기 때부터 성 다른 형제들과 다시 엄마 슬하에서 살았지만, 엄마에게 한번 버림 받았던 충격으로 한 사람은 우울증, 한 사람은 알코올의존증에 시달린다. 인생의 멘토라고 여길 만큼 각별하게 따랐던 여교사에게 고교시절 내내 성추행을 당했던 여학생은 커서 정신병을 얻었다. 여러 형제 가운데 가장 사랑받는 막내딸이면서도 잘난 형제들과 비교되어 늘 위축되었던 아이는 서른살을 넘기면서 조울증에 걸리고 말았다. 낳아준 엄마의 얼굴도 모른 채 할머니 손에서 자라며 친부의 결혼과 이혼, 재혼을 지켜본 어떤 딸은 가족들에게도 거짓말을 일삼다 사기꾼처럼 엄청난 금전사고를 일으켜 친적들에게조차 의절당하고 말았다. 너무 극단적인 예를 나열하긴 했지만, 아무리 사소한 상처도 본인에게는 저도모르게 큰 충격과 후유증을 남길 수 있음을 생각할 때 겉모습만으로 함부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누가 어떤 일을 얼만큼 심한 강도로 겪었는지 속속들이 알 수도 없는 일이고.

너무 끔찍해서 잘 안보는 프로그램이긴 하지만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 같은 방송만 봐도 문제 있는 아이의 원인 제공자는 늘 부모와 환경이다. 그래서 그런 환경과 부모의 태도를 한두 달만 바꿔 놓아도 아이는 확연히 달라진다. 과연 그 아이들의 마음에 새겨진 구김살도 깨끗하게 펴지거나 사라질지 아직도 의문이 들지만, 중년 이후라도 자기 문제를 파악하고 애써 노력을 기울이면 다친 마음을 어느 정도 치유하는 게 가능하더라는 사례를 보면 희망을 품고 싶어진다. 요즘 열심히 챙겨보는 드라마 <신데렐라 언니>를 보아도 하나같이 구김살 많은 인간들의 각축장인데, 최소한 그들은 자기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그걸 인정하기도 하고 회피하는 모습을 보여 허구의 캐릭터인데도 안쓰럽고 정이 간다. 물론 내 주변엔 내면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고 인정해도 상처가 너무 깊어 도저히 펴지 못해 허덕이는 이들이 존재하지만, 드라마 속 세상에서만은 좀 덜 현실적으로 그려지더라도 그들이 주름살을 차츰 펼쳐가길 비는 중이다. 아마 나도 열심히 구김살을 다림질하는 중이기 때문일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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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구리 반찬

식탐보고서 2010. 4. 6. 14:54
어릴 때 하고 놀던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놀이를 기억하는가.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자~~안다.
잠꾸러어~~기.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세수하~~안다.
예쁘~~은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옷입느~~은다.
멋재~~앵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학교가~~안다.
모버~~엄생.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놀러가~~안다.
날나~~리.
.
.
딱히 가사가 정해져 있었던 것 같지 않은 이 놀이의 마지막은 <밥먹느~~은다 -- 무슨 바~~안찬? -- 개구리 바~~안찬 -- 살았니 죽었니?>에 대한 대답과 함께 술래가 친구들을 잡으러 가거나("살았다!"고 외쳤을 때) 움찔 움직인 친구를 잡아내는 ("죽었다!"가 대답일 때) 것으로 끝이 난다. 운동신경도 둔하고 달음박질 느린 나는 친구들과 밖에서 놀이를 할 땐 별로 즐기질 않았는데, 다 놀고 집에 들어와서 흥얼흥얼 새로운 댓구를 만들어내는 걸 좋아했고, 부엌을 들여다보며 할머니나 엄마한테도 놀이를 하듯 장단 맞춰 "무슨 바~~안찬?"이라고 묻는 걸 재밌어했다. 그리고 할머니나 엄마가 "개구리 바~~안찬"이라고 대답할 땐 기쁘게도 뭔가 맛있는 <고기> 반찬을 만들고 있다는 의미였다.

수십년도 훨씬 지난 오래 전 추억이지만, 가끔 우리집에선 개구리 반찬이 아직도 <맛있는 고기 반찬>의 의미로 쓰일 때가 있다. 대개는 내가 입을 쑥 내민 채로 콩닥콩닥 냉장고와 조리대를 오가며 꽤 오래 부산을 떠는 저녁 무렵이면 왕비마마가 슬쩍 부엌으로 다가오며 묻는다. "무슨 개구리 반찬이라도 만드니?"
그러고 보니 옛날에 엄마가 장보러 가면서 아버지와 내게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없냐고 물으면 가끔 입을 모아 그렇게 대답했던 것 같다. "개구리 반찬!"이라고. 

채식이 지구를 살리고 이산화탄소 발생을 줄이는 지름길이란 걸 알지만, 우리 가족은 고기를 너무 사랑해서 절대 채식주의자로 살 순 없을 것 같다. 일주일만 고기를 굶으면 손발이 후들후들 떨린다는 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아무리 생선으로 단백질을 섭취한다고 해도 돼지고기, 닭고기, 쇠고기, 오리고기 따위를 먹어야만 채워지는 육식애호 인자를 확실히 엄마도 나도 보유하고 있음을 느낀다. 채소 싫어하는 조카들이야 말할 것도 없고!

해서 일주일에 두세 번은 정말로 개구리 반찬을 만들어 먹는 것 같다. 당연히 일주일에 한번씩 장을 볼 때도 돼지고기, 쇠고기, 닭고기, 오리고기를 종류별로 거의 빠뜨리는 일이 없다. ㅠ.ㅠ 고기마다 다 맛이 다른 걸 어쩌란 말이냐. ㅎㅎㅎ 봄이 오면 남들은 식욕을 잃는다는데, 왕비마마도 무수리도 입맛을 잃기는커녕 지난주부터는 이상스레 식탐이 동해 고기가 더 먹고 싶어서 이틀이 멀다하고 과식을 거듭하고는 피둥피둥  몸무게를 늘이고 있다. 그러고서도 여전히 또 다른 개구리 반찬을 떠올리는 식탐 모녀를 위해 적어두는 반성의 기록이다. 



적고 보니 아무래도 한우는 비싼 가격 탓에 국으로 끓여먹지 않으면, 장조림 해먹는 게 다인듯. 오리고기는 훈제오리 제품을 사다가 살짝 데워서 무쌈에 싸먹으면 되므로 요리랄 것도 없다. 이렇게 먹고도 어제 왕비마마는 또 삽겹살을 구워먹고 싶다 하셨다. 으휴...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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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났다

투덜일기 2010. 3. 14. 16:35

왕비마마의 칠순모임은 잘 끝났다. 일주일 전까지도 "니들끼리 가라, 난 창피해서 안 갈란다"고 버티던 왕비마마는 D-데이를 나흘 앞둔 날 자진해서 새로 파마를 하고 오셨고 어떤 옷을 입고 갈지 골라두며 호의적인 태도로 돌아서 마음을 놓게 했고, 어젠 최상의 컨디션과 환한 얼굴로 주인공 노릇을 훌륭히 해내셨다.

연회실 규모가 정해져 있는 바람에 혹시 예약인원과 참석인원이 크게 달라 자리가 모자랄까봐 염려했던 게 가장 큰 스트레스였는데, 못온댔다가 뜻밖에 온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온다고 했다가 못오신 분들도 있어서 결과적으로는 마지막으로 조정한 예약인원과 딱 떨어진 셈이었다. 전화 거는 거 병적으로 싫어하는 내가 초대전화부터 참석확인 전화까지 돌려대느라 참 애썼다. 스스로 장하다. -_-;

오래전 외할머니의 산수연에서 예상밖으로 손님이 너무 많아지는 바람에 뷔페 음식이 모자랐던 망신살을 모두 기억하고 있던 터라, 모임을 예약하면서 우리가 가장 강조하고 확인한 게 음식이 계속 리필되느냐는 점이었다. 나의 식탐도 식탐이지만, 좋은 날 손님들이 밥 먹다가 음식 모자라는 것만큼 민망한 일이 또 어디 있겠나. 어제 호텔에 미리 도착해서도 그 점을 재차 부탁해두었는데 ㅋㅋ 차린 음식이 너무 많이 남아 안타까울 정도였다. (외할머니 산수연을 한 호텔이 더 유명한 데였는데 거긴 왜 음식이 모자랐을까 이상하다. 인원차가 너무 컸던 것일까?)
 
어르신들은 오락가락 돌아 다녀야하는 뷔페를 싫어하시는데도 굳이 뷔페식으로 정한 건 모이는 시간 때문이었다. 한정식이나 중식은 다 모여야 시작할 수 있는데 한국사람들이 어디 그런가. 양식은 우리집 어른들이 더욱 싫어하시고... 거기다 우리집 바로 옆이라는 이점 때문에 최종 선택된 장소는 뷔페식당 맛이 별로 없는 것으로 유명(?)해 내심 꺼림칙했었다. 메뉴를 선택할 때도 잠시 머리털 쥐어짜며 고민했지만, 뷔페 음식이 맛있어 봤자고 또 맛없어 봤댔자 한끼 정도는 눈감아 주리라 믿으며 마음을 접었다. 그나마 뷔페 주방과 연회 주방은 다른 곳이라고 해서 혹시 기대를 했는데, 기대치가 낮았던 때문인지 음식 맛도 대체로 괜찮았다. 친척분들이야 인사치레로 맛있었다고 하실 수 있겠지만, 입맛 까다로운 조카들이 인정해주었으니 안심.

약간의 혼선이 있었던 부분은 사회자를 비롯해 마이크까지 일절 필요없다고 얘기해 놓았는데, 뜻밖에도 조카 두 녀석이 축하노래 공연을 하겠다고 나섰던 점이었다. 무반주에 마이크도 없이 용감한 형제가 <죽어도 못보내>(클라이막스 부분)와 <사랑비>(전곡^^;)를 부르는 바람에 분위기가 한층 더 즐거워졌으니 나중에 마이크 가져다준다고 어수선해졌던 것까지도 유쾌한 해프닝이었다. 또 어린이들만 죄다 앞으로 불러내 케이크 앞에서 왕비마마 할머니를 위한 생일축하노래를 부르게 했는데, 촛불 켜주는 직원이 음을 너무 높게 잡아주는 바람에 전체적으로 노래가 엉망이 돼버렸지만 그래도 그 덕분에 하마터면 좋은 날 나 혼자 울컥 해서 질질 울뻔 했던 위기를 웃으며 넘겼으니 결과적으로 다 좋았다.

간만에 높은 구두를 신어서 그러나 별로 한 것도 없는데 무사히 행사를 마친 다음날의 피로감은 꽤나 묵직하다. 어쨌든 다 끝났으니 홀가분한 마음으로 또 10년 맘 놓고 살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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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년의 생일

투덜일기 2010. 3. 7. 18:13
떠들썩한 환갑잔치를 내가 처음 목격한 것은 스무살 무렵이었다. 당시 수원에 살던 같은 과 친구 하나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더니 난데없이 주말에 시간 되면 밥을 먹으러 오라며 수원의 어느 갈비집을 알려주었다. 터울이 많은 손위 형제들을 둔 막내였던 친구는 부모님이 옛날 분들이라 환갑엔 꼭 동네잔치를 한다고 했다. 내 조부모님의 경우 환갑은 물론이고 칠순도 조촐하게 집에서 가족모임으로 치렀던 터라, 환갑잔치의 실체에 대해서 제대로 알지 못했던 나는 흔쾌히 그러마고 약속했는데, 그날 목도한 사건이 워낙 인상 깊었던 모양으로 같이 간 친구와 내가 축의금 봉투를 가져갔는지 그냥 입만 가져갔던 건지도 지금은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무슨무슨 가든이었던 수원의 갈비집엔 큼직한 방마다 온통 잔치음식들이 차려져 있고 한 가운데 불판에선 갈비가 익어갔으며 마당으로 연결된 스피커에선 계속 흥겨운 풍악이 흘러나왔다. 결혼한 큰오빠와 큰언니가 낳은 자식들이 친구와 또래일 정도였으므로 잔치상 앞에 앉으신 부모님께 술잔을 올리며 차례로 절을 하던 자손들의 수가 꽤나 많았던 기억이 나고, 식사 후 여흥이 시작되자 춤과 노래가 쉴새없이 이어졌다. 잔치 주인공의 자손들 뿐만 아니라 자손의 친구들도 다들 앞에 나가 술잔을 올리고 축하인사를 드리는 게 예의인 모양이었지만, 숫기 없는 우리의 난감함을 알아차린 친구는 싫으면 굳이 안해도 된다고 말해주어 어찌나 고마웠던지 모른다.

친구 부모님의 환갑이나 칠순에 초대받았던 경험은 그날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는데, 말로만 듣던 동네 잔치를 처음 경험한 때문인지 나는 그날 온종일 모든 것이 낯설고 신기하고 순간순간 불편하면서 재미있기도 하고 막판엔 지겹고 곤혹스러웠다. 노래를 잘하든 못하든 사회자가 지목하면 무조건 나와서 마이크를 잡고 목청껏 고함을 질러야하는 상황도 그렇고 떼로 몰려나와 춤을 추는 모양새도 처음엔 흥겹더니 술판이 무르익으면서는 취객들 때문에 눈쌀이 찌푸려지는 장면이 자주 연출되었다. 수시로 잔치판에 불려다니느라 우릴 챙겨줄 시간이 별로 없었던 친구는 그제야 지루해하는 우리 태도를 눈치 챘는지, 먼저 가도 된다며 우릴 배웅했다.

잔치집을 나오며 나는 당시에 아직 멀게 느껴지는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염려했던 것 같다. 혹시라도 우리 부모님이 그렇게 떠들썩하고 요란한 잔치를 원하면 어쩌나 싶었다. 무엇보다도 구경꾼처럼 모여든 하객들 앞에서 한복을 떨쳐입은 채 무대처럼 마련된 잔칫상 앞에 나아가 술잔과 절을 올린 뒤 나중엔 큰딸이랍시고 노래까지 한자락 불러야 하는 상황을 내 숫기로는 못견딜 듯했다. 세월이 흘러 부모님의 환갑잔치를 고민해야하는 시기가 닥쳤다. 다행히도 우리 부모님은 요란한 걸 싫어하시는 분들이었고, 환갑은 청춘이라며 다들 잔치대신 여행을 떠나는 세태도 나를 도왔다. 하지만 30년 넘게 다닌 직장의 정년퇴직과 맞물린 아버지의 환갑을 그냥 멀뚱히 넘길 순 없었다. 평소 생신에도 몇몇 친지들이 모여 <밥>은 먹어왔으니, 날 잡아서 조촐하게 <밥은 먹어야 한다>는 것이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외할머니는 우리 아버지가 아무리 마다해도 환갑 기념이라며 맏사위를 위해 고운 한복까지 맞춰 보내셨다.  

환갑 안한다는데 왜 귀찮게 구느냐며 화를 내다시피 했던 아버지는 결국 친가, 처가 가족들이 모여 <간단히 밥을 먹는> 그 자리에 장모님 소원대로 엄마와 나란히 한복을 입고 참석하셨다. 음식점에 미리 부탁해서, 그간 은밀하게 아버지의 옛날 앨범을 뒤져 어릴 때부터 최근까지 사진을 모아 삼남매와 올케들의 영상편지까지 담은 영상물을 틀었던 그날 우리 삼남매와 다른 친척들은 다들 뿌듯해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아버지는 몹시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바로 다음해였던 엄마의 환갑은 연달아 민폐를 끼칠 수 없다는 엄마의 완고한 고집으로 부부동반 여행으로 대체되었고, 또 10년은 안심해도 좋을 듯했다. 

그런데 오래 걸릴 것만 같던 10년이 어느새 흘러 엄마의 칠순생신을 고민해야 하는 때가 도래했다. 친척분들 모두 환갑은 건너뛰는 분위기여도 칠순에는 다들 모여 맛있는 밥을 먹어왔고, 가뜩이나 홀로 남은 엄마의 칠순 생신은 그냥 넘겨선 안된다는 것이 역시나 집안 어르신들의 의견이었다. "늬 아버지를 봐라. 그렇게 빨리 갈 줄 아무도 몰랐지만 그때 억지로라도 늬 아버지 환갑 안 챙겼으면 어쩔 뻔했니? 니들이 두고두고 마음에 한이 됐을 거다."

아버지 환갑 때도 음식점을 알아보고 친척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해 초청하는 과정을 내가 주동한 전적이 있었으며, 그땐 부모님 몰래 큰동생이 영상물 만드느라고 사진 고르고 녹화하고 제법 법석을 떨었는데도 즐겁기만 하더니 이번엔 왜 모든 과정이 온전히 스트레스로만 여겨지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물론 이번에도 주인공이신 왕비마마가 민망하다며 모임 같은 거 절대 하고 싶지 않다고 버티고 계시긴 하다. 하지만 "남편 앞서 보낸 여자가 무슨 염치로 생일잔치를 하느냐"는 엄마의 자학성 핑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발언이다. 친척 어르신들은 엄마가 혼자 남았기 때문에 더더욱 칠순을 그냥 넘기면 안된다는데!

잔치가 아니라 그냥 밥 한끼 먹는 것 뿐이라며 엄마를 계속 달래는 한 편, 두 동생 부부와 의논하여 마땅한 장소를 물색하고 음식을 정하고 참석인원을 확인해 연락을 취하며, 나도 모르게 어린 시절의 치기 어린 소망이 다시 떠올랐다. 어쭙잖게 니체를 읽고 전혜린을 읽던 중고등학생 시절 나는 왠지 모르게 친구들에게 "딱 예순살까지만 살고 죽겠다"고 장담하고 다녔었다. 생존해 계셨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삶과는 상관없이, 단지 나의 노년이 너무도 끔찍하게만 생각됐던 것 같다. 조부모님이나 부모님은 최대한 오래 사시는 게 좋겠지만, 나는 홀로 씩씩하게 딱 예순살 까지만 살다가 깨끗하게 죽겠노라고 말하면 친구들은 "그래 어디 두고보자"며 나를 흘겨볼 뿐이었다. 그런데 요번에 엄마 칠순을 준비하며 문득 세월이 흘러 나중에 누가 내 칠순 때문에 고민하고 스트레스 받는 것도 싫고 칠순이라며 주인공으로 떠밀리는 게 싫어서라도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저도모르게 하고 앉았더라는 뜻이다.

예순살까지 살겠다던 어린 시절의 나는 분명 환갑 잔치 따위는 염두에 둔 적이 없었고 다만 그 이후 노년의 삶이 막연히 구질구질할 것이라 상상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칠순 생일의 부담으로 또 다시 내 수명을 재단하고 싶어하는 욕망이 되살아나다니. 나란 인간은 도대체 어디가 잘못된 것일까.

이성적으로 생각해보아도 엄마의 칠순을 <가족모임> 행사로 치르는 게 맞는 것 같기는 하다. 밥먹기 행사 대신 칠순에도 가족여행을 떠나는 집이 있다지만, 울 엄마의 건강으로 보나 시기적으로 보나 그건 실행되기 어려운 대안이다. 어차피 매년 우리끼리 생신밥은 먹어왔으니 그걸 좀 확대시킨 것뿐이라고 여기면 될 일이다. 문제는 부모님 형제가 많아놔서 그 자손들까지 모이면 4, 50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삼남매가 나누어 분담한다고는 해도, 규모가 그리 만만치는 않다. 분위기며 음식 맛, 입을 옷까지 시시콜콜 미리 걱정하는 나 같은 소심증 환자에게는 더더욱!

사실 욕을 좀 먹을 각오만 한다면, 친척 어르신들이 아무리 들쑤셔도 엄마 본인의 뜻대로 칠순같은 거 안 챙긴다고 통보한 뒤 시치미 뚝 떼고 그냥 조용히 지나갈 수도 있었을 것이다. 엄마 건강이 좋지 않아 그렇게 되었다는 쓸만한 핑계도 존재한다. 그럼에도 그냥 넘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결국 남들(친척도 남이라고 치면) 눈 의식해서 자식으로서 속물스럽게 생색을 내려는 태도 때문이 아닌가 싶다. 옛날부터 환갑이나 칠순 때 잔치를 여는 목적은 장수를 축하하기 위함도 있지만 자손들이 그 정도 거나하게 잔치를 해줄 수 있을 만큼 번창했음을 자랑하려는 노인들의 허세에서 비롯된 게 아니던가. 해서 일부 노인들은 자식들의 능력이 되든 말든, 잔치 때문에 빚을 지든 말든 남부끄럽지 않게 소리꾼들까지 불러다가 왁자지껄 노는 잔치를 강요한다던데, 울 엄마가 그런 부류의 노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깊이 감사할 일이지만 그냥 조용히 밥 한끼 먹는 것뿐이라고 여기래도 난감해하며 지레 생병을 앓아 속을 썩이는 상황도 녹록치가 않다.

과연 울 엄마의 진짜 속마음은 무얼까. 말로는 모임 안 했으면 좋겠다지만 내심 뿌듯해하며 잔칫날을 기다리고 계시는 건 아닐까. 아니면 내 의지에 반하는 칠순잔치의 억지 주인공이 되어야 한다면 차라리 일흔살 되기 전에 죽어버리겠노라는 생각이 들만큼 회의를 느낀 내 마음처럼 엄마도 정말로 싫은 걸까. 그렇게 싫다는데 연회 예약을 취소하는 대신 엄마에게 그냥 못 이기는 척 따라오라고 말하는 나의 태도는 과연 옳은 것일까. 홧김에 다 확 취소해버리고 싶은 마음이 하루에도 몇번씩 드는데, 정말로 그러면 울 엄만 잘했다고 칭찬을 해줄까.

어쨌거나 이젠 누구를 위한 것인지도 모르겠고 한달 넘게 나의 스트레스 지수를 극도로 높인 왕비마마의 칠순 모임이 겨우 엿새 뒤로 다가왔다. 토요일이 후딱 지나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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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아버지

삶꾸러미 2010. 3. 5. 01:03

제일 많이 쓴 태그가 제일 큰 글씨로 보이는 나의 블로그 스킨에서 드러나듯이 이곳의 태그 1위는 단연 가족이다. 어쩌면 가족이란 안온한 울타리이자 동시에 나를 가두는 가시철망 또는 멍에라는 것이 내 삶의 화두일지도 모르겠다. 이미 갖고 있는 관계만으로도 무겁고 힘겨워서 내 스스로 새로운 가족은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비혼의 가장 큰 이유일 테고. 어쨌거나 읽는 이들이 지겹든 말든 또 나의 가족 이야기다.

다 저녁때 외사촌동생에게 전화가 왔었다. 일제강점기에 징용 끌려갔다 생사를 모르게 된 외할아버지 이야기가 혹시 나올지 모르니 조금 전 mbc에서 하는 <후플러스> 방송을 울 엄마가 유심히 봐주셨으면 한다는 얘기였다. 내 머릿속에 <할아버지>라고 하면 떠오르는 분은 늘 한분이었던 터라 이제껏 이 공간에서 내가 언급했던 할아버지 역시 죄다 친할아버지셨는데, 이참에 처음으로 얼굴도 모른 채 함자로만 알고 있는 외할아버지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광복절 즈음과 삼일절 즈음이면 어김없이 뉴스나 특집 프로그램의 소재로 등장하는 <일제강점기 징용조선인>이 바로 우리 외할아버지의 이름표다.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울 엄마가 세살 때 외할아버지는 일본으로 끌려가셨고 해방되던 해 고향으로 돌아온다며 마침 일본 항구에서 만난 이웃에게 당신은 다음 배로 갈 터이니 먼저 고향에 도착하면 가족에게 안부를 전해달라셨다는데 이후론 행적이 묘연하다고 했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으로 끌려가 각지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하다가 고향으로 귀국하려던 조선인이 90만명에 이른다고 하니, 방송에서 우리 외할아버지의 사연과 아주 똑같은 경우를 만나는 경우도 매우 흔하다. 부산으로 가려는 조선인들이 너무 많아 작은 연락선으론 수용이 불가능하자, 낡은 목선을 단체로 빌려타고 귀국을 시도하면서 우연히 만난 친지나 이웃에게 소식 먼저 전하고는 영영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한 분들의 사연이 중복된다는 뜻이다. 풍랑에 배가 난파되었거나 오랜 뱃길에 병사하였거나 마지막 순간에 마음이 바뀌어 일본에 남았거나 또는 귀국 길에 새로운 삶을 찾아 고향을 등지고 어디론가 떠났거나 뱃길이 꼬여 이북으로 넘어가는 바람에 붙들렸거나, 이리저리 짐작만 할 뿐 그분들에 대한 진실은 아직도 대다수 어둠에 묻혀 있다.

강제징용에 끌려갔다 희생당한 분들에 대한 진상조사가 이루어지네 마네, 일본 각지에 남아 있는 재일조선인들의 유골을 회수하네 마네, 미쯔비시 같은 거대기업의 징용 조선인 관련 기록이 20만건이나 발견되었네 마네 하는 소식들이 들려올 때마다, 외할머니와 외삼촌은 한편으로 혹시나 하는 희망을 품고 결과를 기다렸지만 매번 실질적인 일의 진척은 단 한 톨도 없었으므로 언제부턴가는 다 소용없는 헛짓이라고 아예 외면하는 쪽을 택하셨다. 유골회수를 위한 진상조사 신청이라도 하려면 우리 외할아버지가 강제징용자라는 증거서류를 내놓아야 한다는데, 해방되자마자 전쟁 통에 보퉁이 짐만 꾸려가지고 피난 내려갔다 온 집안에 그런 게 남아있을 리 만무하지 않은가? 과거 외할아버지가 일본에서 보내셨다는 편지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피난 보퉁이를 싸면서는 나라도 편지 따위 대신 귀중품과 생필품을 챙겼을 터이고 잿더미로 변한 서울에 돌아와선 우선 먹고 사느라 바빠 편지 꾸러미를 불쏘시개로 써버렸대도 당연할 것 같다. 

생사도 알 수  없고 행적도 모른 채 그저 당연히 돌아가셨으리라고 짐작하는 외할아버지의 경우, 우리 가족은 유골을 찾는다거나 더 나아가 있을지 말지도 모를 보상금을 받는다거나 하는 희망은 버린지 오래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 울 엄마가 세 살 때 헤어졌으니 자손들에게 얼굴도 기억날 리 없는 외할아버지의 존재는 그저 빛 바랜 흑백사진 속에서 하얀 한복을 입고 여자아이를 안고 있는 키큰 어르신의 모습으로 남아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어려서부터 <전주이씨 XX대군파 십몇대손>임을 귀에 못박히게 들어온 사촌동생은 입장이 좀 다른 모양이다. 실낱 같은 희망이라도 남아 있다면 할아버지의 마지막 행적을 찾는 노력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뜻일 게다.

사촌동생은 249명이라고 인원까지 정확히 언급된 징용조선인의 명단이라도 방송에 나올까 기대했던 모양인데, 냉소적인 생각으로 방송을 지켜본 내 짐작대로 새로울 것은 전혀 없었다. 일본 곳곳의 사찰에는 주소와 성명까지 똑똑히 기록된 재일 조선인의 유골함이 수두룩빽빽한데도, 훌륭하신 이 나라는 징용 조선인의 유골회수에 그다지 큰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있으며 국회에서 쌈박질을 해대는 동안 법안 통과가 늦어져 예산집행이 되지 않는 바람에 그나마 해마다 이맘때쯤 미미하게 이루어지려던 한일합동 조사는 무산되고 말았단다. 오히려 일본인들과 일본 사찰에서 그 오랜 세월 징용조선인의 유골함을 보관하다 더 적극적으로 한국으로 돌려보내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처럼 보였다. 물론 무작정 기다리며 보관하기 어려우니 담당자 마음대로 합골해서 아무렇게나 뒤섞어 놓은 곳도 있던데, 반백년이 넘도록 제 나라에서 찾아갈 생각도 안하는 남의 나라 백성 유골을 그렇게 다룬다고 해도 누가 나무랄 수 있을까.

조선으로 되돌아가다가 태풍에 난파된 배에서 떠밀려온 조선인의 시신이 엄청나게 쌓이는 바람에 손수 매장작업에 참여하기도 했다는 일본 노인이 과거 조선인 유골 매장터라고 가리키는 대마도의 어느 바닷가엔 요즘 한국에서 흘러들어간 쓰레기 더미가 어지럽게 덮여 있었다. 이 나라에서 징용 조선인 문제를 대하는 권력자들의 태도를 상징하는 듯한 그 쓰레기를 보고 있자니 분노도 치밀지 않았다. 다만 그 쓰레기 더미 앞에서 고인들을 위한 묵념을 올리는 일본 노인의 인간적인 마음이 고마울 뿐.

물론 징용조선인의 유골 환수 문제는 전범 일본의 배상금 책임 문제와 엮여 있고, 강제노역에 끌려간 할머니들에게 배상금이랍시고 겨우 99엔을 내미는 모욕을 서슴지 않는 일본 정부의 떳떳한(?) 입장은 박정희 정권 시절 경제원조를 빌미로 정부차원에서 배상문제를 제멋대로 마무리한 이 나라 권력자들의 과오 탓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잘못된 일은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원칙이고, 힘없는 나라 탓에 남의 나라에 끌려가 억울하게 노동력을 착취 당하다가 죽은 국민들의 후손이 원한다면 그 유골이라도 되찾아 이 땅에 모셔오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이렇게 미온적이고 알량한 태도로 90만에 이르는 징용 조선인의 흔적을 찾고 유골을 반환하려면 앞으로 몇년이 더 걸릴지 당연히 알 수 없는 일인데, 국회에 앉아 있는 놈들은 얼마 되지도 않는 집행 예산 삭감이나 하고 앉아 있으니!

사촌동생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내일쯤 녀석에게 외할아버지의 흔적 찾기에 대한 희망은 포기하는 게 좋겠다고 전화를 할 것이다. 이 나라 권력자들은 올림픽에서 메달 따온 선수들에게는 <국격>을 높여 자랑스럽다고 플래카드 내걸고는 앞다투어 같이 사진찍고 생색내기 좋아할지 몰라도, 힘없고 돈없는 소시민들의 조상 찾기는 놈들이 보기에 <국격>이나 <국력>과는 전혀 상관없는 쓰레기 더미 뒤지기로 여겨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기야 굳이 내가 전화를 하지 않아도 사촌동생 역시 방송을 봤다면, 외할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에 대해서 이 나라에 별로 기대할 것이 없음을 깨달았을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나의 가장 어린 시절은 대여섯 살 무렵인데, 놀랍게도 울 엄마는 세살 때의 기억을 갖고 있다. 하얀 한복을 입고 머리를 짧게 자른 키 큰 남자가 자신을 안고 마당을 왔다갔다 했다는 울 엄마의 말에, 외할머니가 희안하다며 "그분이 바로 네 아버지시다"고 했다니 우리로선 믿지 않을 수도 없다. 괜한 전화 한통에 울 엄마 역시 얼굴도 모른 채 느낌으로만 남아 있는 아버지에 대한 희망을 새삼 달구는 듯하던데, 혹시 외할아버지 함자가 나오는지 눈 부릅뜨고 지켜볼 터이지 걱정말고 주무시라고, 그래도 별 기대는 하지 마시라고 미리 언질은 했지만 내일 대뜸 엄마한테 화부터 낼까봐 걱정이다. 부디 "엄마는 그렇게 겪고도 아직 이 나라에 기대하는 게 있어!? 징용 끌려간 사람들 생사 확인해주려고 나섰더라면 벌써 해줬어야지!"라고 버럭 소리지른 대신 그냥 얌전하게 "우리 외할아버지 얘긴 전혀 안나오더라."고 이야기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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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적

삶꾸러미 2010. 2. 4. 21:31

나에게 동짓날이 팥죽먹는 날이라면 입춘은 부적의 날이다. 예전 마당 있는 집에 살 땐 골목길을 지나치며 더러 대문에 <입춘대길>이라고 쓰인 입춘첩을 붙여놓은 집도 더러 볼 수 있었지만 요샌 통 구경할 수가 없으니, 그저 조용히 엄마가 절에서 얻어다준 새로운 부적을 지갑에 넣고 오래된 부적을 내놓고는, 집안화평을 비는 기다란 부적을 현관 문설주에 붙이는 것으로 간단한 입춘날 행사가 끝난다.

사실 모든 종교가 이승과 내생의 행복을 바라는 기복종교이긴 하지만 불교는 전래되면서 토속신앙과 특히 많이 접목된 탓에 원래 불교의식과는 상관없는 오묘한 미신이 참 많이도 스며들었다. 그래서 더욱 돈을 노리는 사이비 신앙행위가 판을 치기도 하며, 일부 탐욕스런 절에서는 다량으로 인쇄된 기복 부적을 사다가 신도들에게 돈을 받고 팔기도 하는 상황이니 혀를 찰 노릇이다. 면죄부를 팔아 치부했던 중세 기독교인의 환생도 아니고 뭐하자는 짓인지 원.

어쨌든 지니고 다니면 화를 면하고 복을 부른다는 부적에 대한 불교신자들의 믿음이 워낙 확고한 탓에 입춘날엔 대부분의 절에서 공짜로 부적을 나눠주기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법회에 참석하는 신도들의 수가 많단다. 태어나서부터 줄곧 외할머니와 엄마 영향으로 불교와 친숙했던 내가 지켜봐온 바에 따르면, 입춘 부적에도 변화가 있었다. 처음엔 삼재인가 아닌가에 따라서 그냥 부적과 삼재 부적만 식구들 수대로 나눠주더니, 운전하는 가족들이 있는 신도들의 특별 부탁 때문인지 어느해 부턴가 나는 입춘마다 일반 부적 말고도 자동차에 두고 다니라는 <운전용> 부적을 따로 받았다. 그나마 자동차 부적은 해마다 안바꿔도 되는지 몇해 전부터는 그냥 같은 부적을 햇빛 가리개 안쪽 주머니에 찔러넣어둔 채 잊고 지내는 중이다.

난생 처음 차가 생겨 운전을 하게 되던 날은 더 재미있는 일도 있었다. 사촌형부가 몰던 차를 물려받은 그날, 엄마는 미리 절에서 특별히 주지스님이 챙겨주었다는 자동차 사고를 막아준다는 부적을 받아와서는 후드를 열고 떡하니 엔진 위에 견고하게 붙여주었고, 막걸리를 사다가 차 바퀴 네 군데에 나눠 부으며 무사고를 빌었다. ^^; 우리 동네 카센터 아저씨는 기독교인이었는데, 처음 엔진오일을 갈러 갔던 날 그 부적을 보더니 빙그레 웃으면서도 부적이 떨어지지 않게 더 꽉 붙여주었다. 불교신자들 뿐만 아니라 천주교신자 가운데서도 차안에 걸고 다니는 염주나 묵주 외에 그렇게 자동차 엔진에까지 뭔가를 붙이고 다니며 무사고를 비는 어머니들이 꽤 있다나.  

사실 내 자동차에는 엄마가 넣어주신 부적뿐만 아니라 돌아가신 외할머니가 무사고를 기원하며 사다주신 예쁜 조각 염주도 있고, 역시나 외할머니가 주동하신 부처님 금불사(절에 모신 부처님한테 새로이 순금을 다시 입히는 행사를 <금불사>라고 한다) 때 쓰인 오색실과 팥알이 들어 있는 작은 향낭도 걸려 있다. 물론 나는 그런 물건들의 <영험한> 효험을 전혀 믿지 않는다. 바퀴에 막걸리 뿌리고 엔진에 부적까지 붙였던 나의 첫차로 두어달 만에 나는 그렌저 문짝 두개를 보란듯이 우그러뜨려 거금을 물어줘야 했고, 운전연습을 시작한 큰동생은 주차장에서 남의 차를 찌그러뜨린 뒤 몰래 도망치는 사고를 저질렀으며, 수동이라 엔진 꺼뜨리지 않고 언덕길 운전연습 한답시고 동네 약수터의 벤치를 들이받질 않나 골목길에 주차한 자동차들의 사이드미러에 죄다 흠짐을 내놓지를 않나, 큰 사고만 없었다뿐 자질구레한 사고는 셀 수 없이 많았다. 그런데도 부적에 대한 울 엄니와 외할머니의 믿음은 전혀 흐트러지지 않았다. "거봐라! 큰 사고 아니라서 사람도 안다치고 그 정도니 얼마나 다행이니!" 

자동차에 주렁주렁 매달린 염주와 향낭, 햇빛 가리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부적을 내가 굳이 치우지 않는 이유는 그 물건의 효험을 믿어서가 아니라 외할머니와 울 엄마의 마음 때문이다. 더욱이 외할머니는 돌아가신지 5년이 다 돼가는데도, 룸미러에 매달아둔 염주만 보면 성지순례 다녀오신 할머니가 한복 저고리 주머니에서 <옴>자가 양각으로 새겨진 그 염주를 꺼내 주시며 꼭 차에 매달고 다니라고 했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나에겐 기복용 부적이 아니라 소중한 추억회상용 유품이 된 셈이다. 팔순 노모가 육순 자식에게 길조심을 당부하는 게 인지상정인 것처럼, 공식적으로 무사고 10년이 넘은 베테랑인데도 울 엄마가 여전히 내 운전을 염려하는 걸 알기에 날 못 믿겠으면 부적이라도 믿으시라고 군말없이 오늘도 엄마가 가져다준 부적을 지갑에 소중히 간직했다. 어쩌면 이제껏 큰 사고 없이 잘 지내온 건 나를 염려하는 어르신들의 걱정을 덜어드리려는 조심 노력 덕분일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결론적으로 부적에 효험이 있다는 말인가 아닌가. ㅋㅋㅋ 하기야 전우치 같은 도사님 부적을 백장이나 붙인들 본인이 조심하지 않으면 말짱 꽝일 터, 결국 부적의 힘은 자중의 힘인가 보다.

아무려나 입춘대길. 얼마 안남은 진짜 새해엔 정말 크게 좋은 일만 빵빵 터져주길 무신론자인 내가 아무데나 빌어도 이루어지려나?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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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사람

투덜일기 2010. 2. 2. 22:02

아버지가 생전에 늘 그러셨다. "나는 제일 무서운 사람이 쟤(나를 가리키며)"라고. 엄마도 그 말뜻을 이제야 알겠다며, 내가 제일 무섭고 눈치 보인단다. 대외적으로는 소심하지만 가족에게는 해야할 말이나 의견을 거침없이 쏟아내는 내 성격 때문일 것도 같고, 또 연로하신 부모님과 동거하는 비혼 자식의 흔한 상관관계 때문일 듯도 하다. 하기야 가끔은 고모님들에게도 똑같은 말을 듣고 살았다. "나는 라니가 제일 무서워!" 병약하고 연로한 울 왕비마마 대신 집안 대소사에 얽힌 의견조율과 결정을 내가 도맡으면서 목소리가 커진 것도 사실이다. 그런 만큼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싶기도 한데, 한 몇년 쯤 어디론가 멀리 사라졌다 오면 모를까 어느덧 <집안의 최고어른>이 되어버린 왕비마마를 모시고 사는 한은 권한대행 격으로 휘두르는 칼자루를 놓기 힘들지도 모르겠다. 작은아버지들도 장손인 동생놈과 의논하는 것보다 아직은 형수님 계신 우리집과 먼저 상의하는 게 옳다고 느끼시는 모양이라, 톡 잘라서 손떼겠다는 말이 안나온다. 어쩌면 내심 무서운 사람으로서의 권력을 즐기는 건 아닌지.

암튼 친지들은 내가 제일 무서운 사람이라는데, 나는 조카들이 제일 무섭다. 특히 섣불리 한 약속을 절대 안 까먹고 들이대는 조카들의 새카만 눈망울을 보면 오금이 저린다. 얼마 전엔 공주한테 이런 말도 들었다. "약속 안지키는 어른들 정말 짜증나! 고모도 똑같아!" 주로 놀러 가겠다거나, 장난감을 사주겠다는 약속을 해놓고서 기한을 못지키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방학엔 은근히 공허한 약속을 남발했다가 덜컥 개학을 맞고 말았다. 게으름 탓에 언제나 마감에 쫓기는 마감인생 고모가 특히 월말월초에 바쁘다는 걸 조카들에게 핑계대기엔 스스로도 민망하지만, 결국 이번 방학 약속은 봄방학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었다. 부디 봄방학 동안에는 고모의 신용을 좀 회복할 수 있으려나. 조카들이 조금 더 크고 나면 "고모 놀자!" 소리도 하지 않게 될 거라고, 그 때가 올까봐 벌써부터 속상한 마음은 분명 있는데, 동시에 "고모 놀자!"는 말이 무섭기도 하다. 체력 딸리고 아이디어 딸려서 예전처럼 뛰노는 놀이는 쉬 지치는 데다 한꺼번에 달려들어 안기기라도 하면 허리가 휘청~ 자빠질까 겁난다. 마음 한 켠으론 내게 무서운 사람으로서의 짜릿한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있는 녀석들이 그만 자랐으면 좋겠다가도, 팔팔하던 예전보다 고모 노릇을 제대로 못할까봐 겁이 나는 모양이다. 에구구. 그나저나 봄방학도 열흘밖에 안남았다. 원고 독촉보다 더 무서운 조카들과의 약속을 위해서라도 더욱 매진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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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학

추억주머니 2010. 1. 21. 22:12

방학(放學): 학교에서 학기나 학년이 끝난 뒤 또는 더위, 추위가 심한 일정 기간 동안 수업을 쉬는 일. 또는 그 기간. 놓을 방, 배움 학이니, 방학은 배움을 놓고 놀라는 뜻이 틀림없다.

초중고대,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아도 방학땐 거의 놀기만 했던 것 같다. 요샌 방학이 되어도 누구 하나 정신없이 놀기만 하는 학생을 찾아볼 수 없으니, 마냥 놀아도 되었던 시절을 타고난 복도 작용했을 것이다. 고3을 앞둔 겨울방학엔 자율학습을 하느라 매일 학교에 가야했지만, 등교는 했으되 공부대신 우린 여전히 수다가 본업이었고 고체 연료와 냄비, 양푼 따위를 집에서 날라와 친구가 끓여준 수제비를 먹거나 도시락을 모두 모아 비빈 양푼 비빔밥에 달려들어 숟가락 다툼을 하며 히히덕거렸다. 

대학생 때도 마찬가지였다. 지금과 달리 괜한 시국 탓하며 학기중에도 학업을 멀리했던 우리가 방학 동안 공부를 했을리 만무했다. 친구들 따라 토익, 토플 특강을 신청하긴 했어도 출석일수가 열흘을 넘긴 적은 없었다. 그나마도 3학년 때부터는 특강 등록증을 검사하는 학생회 친구가 거저 들여보내 줄 터이니, 다들 특강비로 술 사마시자고 꼬드겨 단체로 부모님을 속인 뒤 꽤 오래 술과 밥을 사먹으며 놀았다. 내 인생의 황금기는 대학시절 4년이라고 아직도 아련하게 추억하는 이유도, 학기중이든 방학이든 따지지 않고 참 원없이도 놀았기 때문이다. 막연히 미래가 두렵긴 했지만 특별히 인생을 계획하고 앞길을 따져 본 적 없이, 그저 빈둥빈둥 놀았다. 뭐가 그리 재미 있었으냐고 꼬치꼬치 따지면 딱히 손꼽을 것도 없이, 멍하니 무심하게 놀 수 있었던 건 정말 그 때 뿐이었던 것 같다.

아 물론, 노는 게 본업이었던 유년시절은 빼고서 그렇다는 말이다. 학원이나 과외는 생각도 못하고 요즘 학습지에 해당하는 <일일공부>가 유일한 사교육 경험이었던 나는 학기중이든 방학때든 만날 시험지가 밀려도 별 걱정하지 않고 놀았다. 까짓것 일주일치가 밀려도 하룻저녁 끙끙대며 앉아 다 풀면 되는 일이었다. <방학생활>과 일기가 문제이긴 했지만, 지금이나 그때나 한참 밀어 두었다가 한꺼번에 해치우는 버릇은 여전했으므로 개학을 일주일 쯤 앞두고서 숙제검사를 실시한 부모님에게 손바닥을 몇대 맞은 뒤 시작해도 결과는 똑같았다. 개학 후 글짓기든 독후감이든, 만들기든 뭔가 하나쯤은 상을 타왔으니까. 어린 마음에도 치밀한 구석이 있어서, 똑같은 굵기와 진하기의 연필로 밀린 일기를 한꺼번에 다 쓰면 티가 날까봐 나는 연필도 굵은 것, 흐린 것, 뾰족한 것, 뭉툭한 것 번갈아서 일기를 썼던 기억이 난다. 그땐 그렇게 강요받은 일기 쓰기가 싫더니, 요샌 누가 쓰라지도 않는데 이렇게 열심히 블로그질을 하는 걸 보면 우습다. 한두 달치 밀린 일기를 며칠 만에 다 해치우던 어린 시절의 <필력> 덕을 지금 보고 있는 건가? 흐흐흐.

어쨌든 어린 시절 방학 중 내가 가장 크게 기대했던 이벤트는 친척집 순례였다. 친할머니댁에서 며칠,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고모네집에서 며칠, 원두막이 있는 시골집이 아니라 다들 서울 하늘 아래라 특별한 것도 없건만 나는 방학동안의 홀로 외박을 학수고대했다. 싸가지고 간 방학숙제와 일기는 언제나 손도 대지 않은 채 며칠 뒤 다시 집에 가져갔다. 아침잠이 많은 내가 부시시 눈을 떠보면, 안방 한가운데 덩그라니 내 이불만 놓여있고 같이 잤던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불은 어느틈에 치워졌을 뿐만 아니라, 방 구석에 상보가 덮인 소반 하나가 놓여있기 일쑤였다. 두분 아침 드시는 동안에도 아무것도 모른 채 쿨쿨 자고 있었다는 얘기다. 완고하고 무섭기로 소문난 우리 할아버지가 늦잠 자는 손녀딸을 그냥 내버려두고 그 옆에서 아침상을 받아 진지를 드셨을 걸 생각하면 지금도 놀랍다. 할머니가 깨우지 말고 그냥 자게 내버려두라고 말리셨을 게 분명하지만, 밥상 예절을 중시하셨던 할아버지 성격상 보아 넘기시기 힘드셨을 텐데. 딱히 할머니댁에서 뭘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할머니 옛날 이야기 듣고, 갓 성년이 된 고모들 수다 떠는 데 눈을 빛내며 끼어 앉아 있고, 낮잠자고 누룽지나 찐고구마 같은 간식 먹고 TV 드라마 보고... 나중에 작은아버지댁이랑 합치셨을 땐 사촌동생들이랑 놀아주고... 근데 그게 왜 그렇게 좋았는지.

방학때 할머니댁에서 며칠 놀다 돌아오면 집에서 한 일주일쯤 보내다가 다시 외할머니댁엘 갔다. 거긴 사촌언니가 있는데다 만화책을 수십권씩 빌려다 쌓아놓고 보는 외삼촌들도 있었으니 더욱 즐거웠다. 물론 할머니댁보다는 늦잠자기가 수월하지 않았지만 새벽같이 안방에서 쫓겨나 잠이 모자라면 건넌방이나 사랑방으로 베개를 들고 옮겨 이어잘 수도 있었다. 온갖 과일과 한과, 견과류가 그득했던 외할머니댁 광이나 다락에서 끊임없이 가져다먹는 간식의 묘미는 또 어떻고!  두 할머니댁 말고도 고모네 집에서도 거의 방학마다 나를 불렀던 건 좀 의아하다. 살림이 여유로웠던 셋째 고모는 딸이 없어 그러려니 한다지만, 꽤나 먼 동네 단칸방에 살았던 넷째 고모네는 딸도 있는데 거길 가서 며칠 씩 지내다 온 건 무슨 이유였을까. 아무리 아이라지만 군 식구 하나 더 챙기는 게 꽤나 귀찮았을 텐데, 고모들이 나를 심히 예뻐했다는 것말고는 딱히 나를 오라고 했던 정황을 설명하기가 어렵다. 편하기만 했던 두 할머니댁과는 달리 고모네 집에서 지내는 며칠은 나도 대단히 조심스럽고 어려웠는데도, 다니러 오라는 고모들의 청이 싫지 않았다. 어린마음에도 오히려 내쪽에서 큰 아량을 베푸는 기분이었던 것 같다. 끼니 때마다 고모들을 도와 수저를 놓거나 물잔을 옮기며 듣는 칭찬도 퍽이나 뿌듯했고.

물론 요즘 아이들은 방학에도 과거의 나처럼 마냥 놀지 못한다. 놀기는커녕 다음 학년 수업을 땡겨서 선행학습을 하느라 학교 다닐 때보다도 더 오래 학원에서 지내는 아이들도 많다고 들었다. 좀 더 여유가 있는 집안에선 아예 방학 내내 외국으로 연수를 보내거나... 달리 노는 인생을 아예 알지 못하는 요즘 아이들은 그 속에서도 나름 행복과 즐거움을 찾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가장 여유롭고 신나야 할 때조차 공부에 치여 보낸 아이들이 앞으로도 계속해서 더더욱 숨막히는 삶에 찌들어야 한다고 생각하면 몹시 안타깝다. 유년을 돌아보며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빈둥빈둥 놀기만 했어!"라고 즐거이 고백하는 나와 달리, 그 아이들은 "나 어렸을 땐 방학 내내 학원을 다섯개나 뺑뺑이하느라 정신없었어!"라고 토로하며 그마저도 행복하다 여기는 건 아닌지.

아무려나 일 하기가 싫으니 만날 꿈꾸는 게 진정한 의미의 안식년, 방학, 휴가, 이 따위 것들이다. 이 맘때쯤 아직은 밀린 방학숙제와 일기 걱정 없이 태평하게 빈둥빈둥 놀고 있었을 내 유년의 방학이 그리워 죽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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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망증

아픈 손가락 2010. 1. 9. 02:43
윙윙거리는 정적 속에 가끔 컴퓨터 자판 두들기는 소리만 툭탁거리는 새벽, 안방에서 자고 있던 엄마가 난데없이 작업실 방문을 열고 말했다. 자다가 생각하니 암만해도 이상해서 일어났다. 니네 아빠 참 이상하다. 어딜 가서 며칠 째 집에 안 들어오는 거니? 밤마다 신경안정제 기운으로 간신히 잠드는 엄마는 가끔 벌떡 일어나 엉뚱한 잠꼬대를 현실처럼 하는 바람에 사람을 놀래키지만, 그날은 나도 당황해 어떻게 대처해야할지 순간적으로 말문이 막혔다. 멍하니 바라보다 드디어 내가 입을 열었다. 잘 생각해 봐, 엄마. 아빠 어디 갔는지 기억 안나? 몹시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맛살을 찌푸리고 있던 엄마는 그제야 망연자실한 얼굴을 했다. 맞다, 니네 아빠 돌아갔구나. 그걸 어떻게 까먹었을까. 엄마 어쩌면 좋으니...  잠깐동안 더럭 겁이 났던 딸은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쉬며 엄마를 데리고 안방에 가 이불을 덮어드리고 나왔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새벽녘 잠결에 벌어진 그 같은 해프닝을 다음날에 엄마가 전혀 기억하지 못할 것이라는 점이었다. 한 사람과 쌓은 50년의 추억과 습관이 단 2년만에 지워질 리 없다고 애써 놀란 가슴을 진정시켜보지만, 우울증이 심해져 가끔 섬망증까지 보이면 더럭 겁이 난다. 이건 분명 약 탓일 거야. 암. 그렇고 말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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