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에 해당되는 글 144건

  1. 2011.01.07 그놈의 공부 20
  2. 2010.12.09 막내 프리미엄 18
  3. 2010.11.17 모녀의 취향 19
  4. 2010.10.31 이산가족 7
  5. 2010.10.29 생선가시 2
  6. 2010.10.07 공주야 고맙다 9
  7. 2010.10.02 조금 다른 결혼식 12
  8. 2010.09.23 명절 서울 5
  9. 2010.08.11 모순인가 아닌가 3
  10. 2010.06.01 대물림 10

6년 전, 첫째 조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공주의 부모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노심초사했다. 유치원엔 무려 세살부터 다녔지만 선행학습 따윈 부질없는 짓이라 여겨 한글도 입학 직전에 3개월 속성으로 겨우 깨친 조카와 달리, 다른 아이들은 책을 줄줄 읽는 정도를 넘어 독후감까지 거침없이 쓴다는 '소문'에 바짝 얼었던 거다. 염려했던 대로 12월 생이라 또래보다 좀 늦된 조카의 초반부 학교생활은 퍽 힘겨웠고 아이는 가엾게도 무책임한 공교육과 매정한 담임에게 마음의 상처를 꽤 입었다. 별달리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도 단지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아이를 교사들이 무조건 '사회적응 장애'로 몰아세운다는 사실을 우리도 비로소 깨달았다. 몰개성하고 유순한 규격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는 걸 교육자들은 정말로 모르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들의 경우엔 어느 정도 미리 '준비'를 하는 것으로 교훈을 삼을밖에. 
 
어쨌거나 여전히 개성 넘치는 성격으로 잘 자라준 조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가족들은 또 다시 불안초조하다. 요즘 중학교는 또 어떤 난관으로 아이를 힘들게 할까 싶어서 말이다. 흔히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를 잘 보내야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공부 재능도 운동신경처럼 타고나는 거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다만 뭐든 '중간쯤' 하는 평범한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워낙 '미친 사교육 열풍'에 휩싸인 사회 분위기에선 그 '중간쯤'도 쉽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벌써 웬만한 아이들은 중학교 교과 과정을 미리 공부하느라 종합반엘 다니고 있다나 뭐라나.
 
까마득한 옛날 나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상당히 겁을 냈다. 내가 배정된 중학교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사립학교'였고, 그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이 워낙 많아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소문이었다. 아주 뛰어나진 않아도 '나름 우등생'이었던 큰딸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울 엄마도 주변에 조언을 구했는지 당시 진짜로 종로통에 있었던 '종로학원'에 영어와 수학 과목을 등록해놓았으니 새해부터 열심히 다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내가 '학원'이라니 어린 마음에 바짝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사교육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 딱 새해부터 과외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중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 내내 '잉글리시 펜맨쉽'이라고 적힌 공책에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인쇄체와 필기체 대소문자 알파벳을 그려 연습하고 외웠을 뿐, 연일 동생들 데리고 스케이트나 타러 다니면서 팽팽 놀았다.

예전과 시대가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 같아선, 특목고다 뭐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시광풍에 휩쓸리는 친구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 분명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조카에게도 '마지막으로' 실컷 놀라고 해주고 싶다. '고모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조카의 영어공부를 봐주던 얼치기 과외선생으로선 걱정이 태산이다. 특히 영어과목에 대해선 요즘 부모와 애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어에 목숨건 아이들은 이미 방학을 맞아 캐나다다 호주다 필리핀이다 해서 어학연수를 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도 토익 수준의 단어를 하루에 스무개, 서른개씩 외운다던가. -_-; 그간 조카가 영어단어 외우기를 죽도록 싫어해서 (한글 맞춤법 좀 틀려도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공주의 주장;; 애당초 나도 영어 거부증을 면하게 해주려고 철자 달달 안 외워도 된다고 타일렀다가 그만 발등 찍혔다 ㅠ.ㅠ) 그냥 내버려뒀던 나도 요번엔 고삐를 죄었다. 방학동안 초등학교 기본 영어단어라는 800개는 점검하고 넘어가자고 말이다. 이미 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낱말이니까 잘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고 살살 달래보지만, 실은 나 역시 조카에서 속성 암기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영어단어 외우라고 족치는 대신에 좋은 책이나 좀 읽고 곧 헤어질 친구들이랑 실컷 놀러다니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왜 다들 공부공부 미친 타령을 해대고 있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부터도 공부라면 학을 떼겠는데! (쌘이와 미아를 비롯해 아직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친구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그 옛날의 나와 똑같이 대체 왜 써먹을 데도 없는 어려운 수학이랑 과학을 공부해야 되느냐고 묻는 조카에게 나 또한 "살아가는데 다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뻔한 대답을 해주며 한숨이 나왔다. 영어권 나라로 여행 가고 싶으면 고모를 데려가거나 영어를 잘하는 친구랑 가면 되고, 어차피 프랑스에선 영어로 해도 안 통한다며? 라고 항변하는 조카에겐 이미 영어공부의 당위성도 없어서 말문이 막힌 내가 "꼴찌는 하면 안 되잖아!"라고 윽박질러놓긴 했으나 과연 조카의 속성 단어암기 프로젝트도 성공리에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으휴. 꼴찌 좀 하면 또 어떻다고... 그 역시 학창시절의 재미난 추억이 될 거라 여기면 좋을 텐데, 부지불식간에 꼴찌는 곤란하다고 튀어나온 걸 보면 나 역시 학력지상주의에 물든 속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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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내 프리미엄

투덜일기 2010. 12. 9. 21:37

어제 할아버지 제사를 마치고 모두들 헤어져 돌아가는 순간, 주차장에서 내가 조카들을 한번씩 더 껴안고 뽀뽀를 주고받자, 막내고모가 외쳤다. "나두, 나두!" 나는 씩 웃으며 나보다 아홉살 많지만 항상 내가 뭘 더 챙겨줘야 한다고 느끼는 막내고모를 껴안고 뺨에 입을 맞춰주었다. 등을 토닥토닥 두들겨주면서. 생각해보니, 아버지가 살아계실 때도 명절이나 제삿날 밤에 헤어질 때, 아버지가 열여덟살이나 터울이 나는 막내동생에게는 각별히 꼭 포옹과 입맞춤으로 작별인사를 했던 것 같다. "우리 막둥이, 잘 가라"고 하시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살아계셨을 때 특별히 막내딸을 더 챙긴 것이야 말할 것도 없다.

겨우 9살 차이나는 고모와 조카 사이가 어렸을 땐 꽤나 경쟁적이었다는 것도 같은데, 내가 기억하는 한 막내고모는 거의 내 우상이었고 스무살 무렵부터는 어쩐지 맏이인 내가 막내인 고모를 돌봐줘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말투부터 상냥함과 애교가 뚝뚝 떨어지며 하늘 끝까지 여성스럽고 연약하고 다소곳해서 내가 봐도 보호본능을 일으키는 막내고모를 씩씩한 내가 지켜줘야 한다고 느꼈달까. 물론 고모쪽에선 그래봤자 땅꼬마 조카라고 생각했겠지만 말이다. 

요즘에야 형제들 수가 적어서 막내란 존재의 개성이 크게 두드러지지 않는 모양이지만, 맏이인 내가 보기엔 확실히 막내가 달라도 많이 다르다. 우리 막내고모로 말할 것 같으면, 무려 8남매의 막내딸이고 (할머니가 마흔 다섯살에 낳으셨다) 제일 큰 언니와는 스무 살도 넘게 차이가 나는 완전 늦둥이라, 지금까지도 온 가족이 애틋하고 안쓰러이 여기는 애교쟁이 막내의 개성이 극대화된 경우다. 천사표이신 나의 작은 엄마들은 다섯이나 되는 시누이 가운데 유일하게 막내고모를 위해선 지금도 번갈아가며 김치를 담가다주신다. 14년 전에 할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지금까지 주욱. (막내고모 요리솜씨가 엉망인가 하면, 그렇지도 않다. 예술 하는 사람들은 요리도 잘하나? 의아할 정도다;;)  울 엄마도 건강하실 땐 밑반찬 만들어가지고 아버지랑 같이 수시로 막내고모네를 살폈다. 뭘 좀 제대로 먹고 살기나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우리 집안에서 막내란 그런 존재인 것이다,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어쩐지 보살펴주어야 할 것 같고 이유없이 애틋한. 

막내라서 본능적으로 애교와 귀염성이 많기 때문에 부모와 형제들의 사랑을 더 받는 것인지, 아니면 풍부한 애정 덕분에 막내들이 맏이와는 다르게 애교와 붙임성 같은 것들이 개발되는 것인지 나로선 통 모를일이다. 하지만 나의 막내동생을 보아도 어려서부터 무뚝뚝한 두 맏이와는 달랐다. 큰동생은 둘째이긴 해도 맏아들이네, 장손이네 하는 말을 듣고 자라서 그런지 맏이로서의 성격이 강한 편이고, 나와 마찬가지로 애교 따윈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저 자존심과 똥고집만 내세울 뿐. 삼남매가 뭐든 잘못을 하거나 싸웠다는 이유로 회초리 맞을 일이 생기면, 나와 큰동생은 '잘못했어요' 소리를 안하고 꿋꿋하게 정해진 매를 다 맞는 편이라면, 막내는 딱 한대 만 맞고도, 아니 심지어는 자기 맞을 차례가 되면 벌써부터 울음바람에 엄마를 와락 끌어안으며 잘못했다고 싹싹 빌어서 매를 피했다. 우리들 눈에 그게 얼마나 얄미워 보였던지!! 엄마 목을 끌어안고 돌아서서 막내녀석이 우리에게 혀를 쏙 내밀어 보였던 것도 같고...  -_-;  하지만 어려서도 나는 대체로 막내가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매일 저녁 좁은 단칸방에서 노래와 춤으로 재롱을 부리며 온 가족을 즐겁게 해주었던 것도 항상 막내였다. 나와 큰동생은 엄마 아빠 밖에 없는데도 앞에 나가서 노래 한 마디 하는 게 어찌나 어려웠는지 원. 심지어 막내동생은 요즘도 두 아들을 데리고 우리 앞에서 가끔 최신 유행하는 아이돌 춤을 시범 보이며 귀여움을 떤다. ㅋㅋㅋㅋ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역시나 막내인 그의 배우자까지도 춤연습을 하며 논다는 것 같다.)

나의 조카들을 봐도 그렇다. 겨우 둘씩이라 맏이와 막내로 구분하기도 좀 뭣하지만, 집집마다 첫째와 둘째는 판이하게 성격이 다르다. 둘째들은 하나같이 애교가 많고 붙임성이 뛰어나고 눈치가 빨라서 엄마의 사랑을 독차지한다. 첫째들은 뻣뻣하고 자존심만 강한 데다 융통성이 없어서 만날 엄마랑 싸운단다. 심지어 나의 올케들은 둘다 '막내'라서 맏이 특유의 애교 부족과 무뚝뚝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맏이인 내 눈엔 위기를 모면하는 약삭빠른 둘째들의 아양떨기가 귀여우면서도 가끔 얄미운데 말이다!

어쨌든 막내는 막내고 맏이는 맏이라서, 각자의 운명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긴 하다. 열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은 없지만, 확실히 아픔에도 차이가 있다는데 어쩌란 말인가. 어젯밤 왕비마마도 실토하셨다. 깨물면 새끼손가락이 제일 아프고, 엄지손가락은 별로 안아프다고. (시범까지 보이며;;) 그래서 맏이인 나와 큰동생의 경우엔 뭘 하든 믿게 되고, 약간씩 못미더운 부분이 있더라도 크게 걱정이 안되는 반면에, 막내의 경우엔 그저 안쓰럽고 염려스럽고 어떻게든 좀 더 챙겨줘야 할 것 같다고 말이다. 딸인 나와 달리, 두 형제 사이엔 은근한 경쟁심리가 있는 걸 알기 때문에 내가 왕비마마께 그렇게 티나게 굴지 좀 마시라고 했더니, 의외의 대답이 나왔다. 나랑 큰동생은 울 할머니가 키우셨는데, 막내는 당신이 직접 키워서 좀 남다른가보다고. -_-; (왕비마마는 막내를 낳고 비로소 직장을 관두고 전업주부의 길로 들어섰다.)

물론 막내라도 맏이같은 성품을 개발한 이도 있을 테고, 가족 내의 위치를 티내지 않고 사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우리집 맏이와 막내들을 보면 막내 프리미엄이란 게 존재하는 것이 확실하다. 맏이로서는 도저히 알 수 없는 신비로운 힘과 재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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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녀의 취향

투덜일기 2010. 11. 17. 16:23

넉달만에 동창모임 오찬에 나가셨던 왕비마마가 4시를 넘기고도 귀가하지 않았다. 걱정이 돼서 전화를 걸었더니 친구분들과 쇼핑을 다니다 이제 귀가 중이라는 대답. 그간 다리 허리도 아프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하여 홀로 외출은 꿈도 못꾸던 양반이 최근 매일 꾸준한 산책과 운동으로 이룬 쾌거이니 나로선 박수라도 칠 일이었다. 그리고 일흔살 노여사님들 다섯 분이 대체 어디로 쇼핑을 다니셨는지(강남 모처로 택시를 타고 이동했다고), 쇼핑 품목은 무엇일지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요가하러 다녀와 보니 그새 귀가하신 왕비마마는 희색이 만면한 얼굴로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 장만한 겨울외투를 보여주었다. 헌데 소재만 좀 달랐지 기존에 있던 외투와 색깔(진한 갈색)이며 길이와 스타일이 거의 똑같았다. 어차피 사온 물건이니 그냥 잘 샀다고, 예쁘다고 칭찬해드리면 좀 좋으련만 까칠한 딸의 입에서 좋은 말이 나갈 리가 없다. -_-; 이왕 사는 거 왜 똑같이 생긴 걸 샀느냐고 타박부터 튀어나왔다. '맞는 사이즈가 없어서'라는 왕비마마의 대답을 들으니, 타박부터 앞세운 것이 민망해져 얼른 잘 사셨다고 칭찬을 해주었는데 문제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문고리에 걸어두었던 또 하나의 패딩외투를 꺼내며 '하도 싸서 니 꺼도 사왔으니 입어보라'는 말씀. 헉... 내 눈엔 이보다 더 흉측할 순 없을 듯한 '빤딱이' 남색 원단에다 '프린세스' 라인(패딩에 웬!!)이고, 심지어  목엔 회색과 청색으로 '여우털'이 부숭부숭 징그럽게 달려 있다. (물론 왕비마마는 그 '여우털'이 '포인트'라고 강조했다) 그야말로 할머니들이 가뿐하게 동네 마실 다니실 때 입으면 딱 좋을만한 물건을 비록 나이는 40대지만 곧죽어도 '영플라자'에서만 옷을 사입는 딸에게 사다주시다니.. ㅠ.ㅠ 

사실 우리 모녀는 취향이 너무도 달라서 자기 마음대로 골라 서로에게 선물한 옷은 원래 성공하기가 힘들다. 왕비마마가 거동이 그나마 자유로웠던 5년전까지는 내가 그렇게 타박을 하고 퇴짜를 놓아도, 백화점 갔다가 괜히 집어들고 오시는 옷이 종종 있어서 너무도 괴로웠다. 내가 즐겨입는 옷들이 다 너무도 후줄근하고 추레하고 칙칙하다고 여겨 못마땅해 하는 왕비마마가 골라오는 옷이야 너무도 뻔하지 않은가 말이다! 그나마 내가 충동적으로 사오는 왕비마마의 옷은 성공률이 5할대는 되는 편이었지만 그래도 두번에 한번은 색깔이며 디자인 때문에 바꿔야 하거나 아예 반품하는 경우도 있었기에, 그간 모녀는 옷을 사다주고도 괜히 욕을 먹어 각자 삐치는 역사의 반복을 교훈 삼아 다시는 자기 마음대로 옷을 사다 내밀지 않기로, 그러니까 옷을 사주려거든 같이 가서 입어보고 고르기로 암묵적인 약속을 했었다. 그런데 새삼 도대체 왜??!! 

옷이 너무 '미워서' 절대로 입을 수 없다는 나의 입장과 동네 마트 갈 때라도 막 입으면 되지 않느냐는 왕비마마의 옥신각신은 서로의 취향에 대한 비난으로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친구분이 사입고 온 옷이 좋아 보여 다들 따라가 한두벌씩 샀다는 그 옷의 판매처가 정확히 어딘지도 모르는 상황이라 (가격으로 보아 '반품불가'가 확실하다) 반품이나 교환은 애시당초 불가능한 마당에 모녀가 실랑이를 부려봤자 소용 없는 일이다. 결국 입든지 말든지 마음대로 하라는 최후통첩과 함께 (나 또한 자꾸 강요하면 차라리 헌옷 기부함에 넣어버리겠다고 협박했음 -_-;) 왕비마마는 아침에 다시 입어보라며 문제의 패딩을 내 방에 걸어놓고 물러나셨다. 하지만 오늘 다시 쳐다봐도 내 눈엔 역시나 몸서리 처지게 싫고;; ㅠ.ㅠ 

재킷도 외투도 다들 '넣고 꿰맨 것 같이' 몸에 딱 맞는 스타일이 유행일 때에도 나는 넉넉하고 큼지막한 옷이 좋았다. 그래서 과거엔 가끔 남동생들 옷을 빌려 입거나 아예 내 옷을 크게 사서 어린 동생들과 나누어 입는 것도 좋았다. 할머니의 유품 가운데서 내가 골라 가진 큼지막한 순모 니트 외투는 그야말로 할머니 같다고 왕비마마가 질색팔색을 하든 말든 여전히 십수년째 나의 애용품이다. 아버지의 유품중에서도 수많은 옷가지는 거의 다 아름다운 가게에 기증했지만 그 전에 동생들도 올케들도 최대한 자기 몸에 맞는 걸 골라 간직했고, 나 역시 왕비마마가 내겐 어울리지 않는 '잠바떼기'라고 못마땅해 하시는 아버지 옷 두 어벌을 챙겨 입고 다녔다. 적어도 옷차림에 관한 한 나는 별로 남의 눈을 의식하지 않는 편이다. '내' 눈에 예뻐 보이고 좋으면 그만이고, 남들이 뭐라든 크게 상관하지 않는다. 10년, 20년 된 낡은 옷을 버리지 못하는 건 나름의 역사와 추억이 담겨 있을 뿐만 아니라 '정말로' 마음에 들기 때문이라, 유행에 크게 뒤떨어졌든 아니든 그런 옷을 입고 나서면 슬며시 기분이 좋아진다.

반면에 왕비마마는 남의 눈에 어떻게 보이느냐가 최우선이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져도 가을이면 겨울옷 입는 걸 꺼린다. 남들이 겨울옷을 꺼내 입은 걸 보아야만 그제야 안심하고 입는 식이다. 외투를 입으면 반드시 단추나 지퍼를 채워야 집을 나선다. 앞섶을 풀어헤친 모양새는 불량스럽고 단정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본인에겐 너무도 어색하단다. 땀을 삐질삐질 흘릴망정 집밖에선 재킷이나 외투의 단추를 잘 풀지 않는다. +_+ 겨울이면 놀라울 정도의 겹쳐입기 신공을 벌이느라 여러 옷을 풀어헤치고 목도리까지 치렁치렁 늘어뜨리고 다니는 딸의 차림새가 왕비마마에겐 얼마나 '거지 같이' 보일지 알만하다.

원래도 체구 차이가 크게 나서 옷을 같이 입는 모녀들처럼 (정민공주는 이미 제 엄마와 고모 옷을 수시로 빼앗아 입고 있지만;;) 옷을 나눠입고 살아본 역사가 없긴 하지만, 체구가 같았더라도 아마 왕비마마와 나는 극과 극인 취향 때문에라도 절대 옷을 공유하지 못했을 것이다. 수십년간 지켜보고 같이 살며 서로 못마땅했음을 누구보다 잘 아는 양반이 왜 새삼 이런 일을 벌이셨는지 원. 그나저나 저 흉측한 물건을 어떻게 하나 그게 큰일이다. 으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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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가족

하나마나 푸념 2010. 10. 31. 09:45

냉랭한 남북기조 때문에 명맥이 끊겼던 이산가족 상봉이 다시 이루어져 뉴스에 연일 등장하는 장면을 보니 마음이 아프면서 보기가 싫어 고개를 돌리게 된다. 수십년씩 헤어져 살아야 했던 혈육을 만나는 기쁨과 그간의 한을 모르는 바 아니다. 당장 나라도 졸지에 형제부모와 헤어졌다가 수십년 만에 만나야 하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기가 막힐까.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 '안' 찾는 것이 아니라 강제적인 억압 때문에 가족을 '못' 찾는 상황이라면 더더욱 그리움이 짙어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북한과 남한이라는 너무도 다른 환경이 아니더라도, 오래 헤어져 산 가족의 재상봉은 반드시 행복이 보장되지 않는 것 같다. 그저 생사여부를 확인하고 어떻게 살았는지, 어쩌다 헤어지게 되었는지 한 많은 사연을 주고받으며 해묵은 감정을 해소하고 나면, 또 언제 그랬나 싶게 각자 살던 대로 예전처럼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는 생각이다. 혹독한 현실 때문에 괴로워하느니, 차라리 그냥 아련한 그리움과 추억으로 포장한 채 살아갈 수 있었던 때가 나을 수도 있지 않을까. 심하게 연로해지셔서 상봉 차례가 돌아오기 전에 슬픈 일을 당할까봐 전전긍긍하고 계실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을 모르거나 무시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곁에서 내가 직접 지켜보니 그럴 것 같다는 짐작이다.

평안북도 출신인 우리 할아버지는 지난 80년대 전국을 울음바다로 만들었던 KBS 이산가족 찾기 방송 덕에 여동생을 찾은 적이 있다. 그분은 부산에 살고계셨기 때문에 역시나 부산에 살고 있던 큰고모와 먼저 상봉을 한 후, 할아버지께 연락이 왔고 고모할머님과 할아버지의 감격적인 통화가 이루어진 뒤, 고모할머님 내외가 오빠(우리 할아버지)를 만나러 서울로 올라오셨다. 가뜩이나 북적대는 우리 집안은 잔치 분위기였고, 온 가족이 모여 음식을 준비해 놓고 잊고 살던 고모할머님을 기다렸다.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서로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리셨고, 그걸 지켜보는 우리는 다들 마음이 짠했다. 헌데 똘똘하고 애교가 많은 막내동생이라 퍽 예뻐하셨다는 할아버지의 추억담 속에 존재했던 고모할머니는 세월에 찌들은 검은 얼굴과 시장통에서 국밥장사를 하며 거칠어졌을 입담과 엄청난 주량, 난감한 주사로 우리를 놀라게 했다.

그날의 추억은 마구 찍어댄 사진으로 남아 (할아버지와 고모할머니는 불콰한 얼굴로 어깨동무를 하고 얼굴을 맞댄 채 웃고 계시거나 음식이 차려진 상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계신다) 할아버지 앨범에 들어 있지만, 내 머릿속에 남은 그날 저녁의 분위기는 참으로 난감하고 곤혹스러움의 연속이어서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 하룻밤인가 이틀 할아버지댁에서 주무시고 서울 구경도 함께 다닌 뒤 부산으로 내려가셨던 여동생 때문에 이후에도 할아버지는 속이 상해 홀로 약주를 많이 드셨다. 알고보니 그분은 혼인신고도 하지 못하는 남자(고모할머니의 남편인 줄 알았던 분은 그러니까 따로 처자식이 있는 유부남이었다)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도 그저 '동거인'으로 데리고 살고 있었고, 조강지처한테 버림받은 병든 그 동거남을 어려운 형편으로 수발중이었다. '아들' 이 아니라 '동거인'의 지위로 살아야 했던, 나에겐 '고종당숙'이 되는 그분도 삶이 엉망인듯 했고.

당시 내가 아직 고등학생이라 어른들은 쉬쉬하는 분위기였지만, 결국 그렇게 눈물의 상봉을 한 오누이는 살가운 만남을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남과 북이 아니라 겨우 서울과 부산 사이의 거리였는데도 말이다. 그간 살아온 환경이 서로 너무 달랐고 할아버지가 보기엔 '망가진' 삶을 살아온 여동생이 못마땅했으며, 비빌 언덕이 생겼다고 여긴 가난한 누이는 오라비에게 금전적인 지원을 바랐다. 나중에 할아버지는 그 고모할머니의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게 할 정도로 역정을 내셨기 때문에, 나로선 제대로 묻지도 못하는 상황이었고 부산에 사시는 큰고모가 대표로 간간이 소식을 전하는 눈치였다. 굳이 탓을 한다면 힘겨운 세월과 가난 때문이라고 여겨야겠지만, 하나밖에 없는 여동생이 어쩌다가 '그 따위'로 아무렇게나 살게 되었는지 할아버지는 몹시 괴로워하셨다.

이산가족 상봉의 뒤끝이 그리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걸 누구보다 곁에서 느끼셨을 것 같은데도, 큰고모 역시 남북이산가족 찾기로 가족을 만나러 금강산에 다녀오셨다. 이북에 두고온 형제들을 만나러 갔다는 연로하신 큰고모의 모습은 2003년 당시 뉴스에도 나올 정도였다. 우리 할머니와 재혼한 할아버지의 전처 소생이 큰고모 한분 뿐인 줄 알았던 나로선 깜짝 놀랄 일이었다. 바리바리 선물을 싸들고 금강산 상봉장에 다녀오신 큰고모의 이야기를 나중에 들으니, 동생과 사촌이라면서 상봉장에 나온 북한의 가족들을 큰고모는 하나도 몰라보겠더라고 했다. 이야기를 나눠보아도 공유한 추억이 없어 전혀 모르는 사람들 같더라고. 당연히 감격적인 눈물의 상봉은 없었고, 옷차림이나 분위기로 보아 '꽤 사는 것 같더라'는 북한의 가족들은 고모가 가져간 선물에도 그리 반색하지 않았다고 했다. 뭐 그야 상봉인들에 대한 북한 당국의 교육탓이었을 것이라고 짐작되긴 하지만,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참석했던 큰고모는 고대하던 어머니 소식(큰고모가 당시 75세이셨으니 그분은 90세도 넘어 당연히 돌아가셨겠지만)도 거의 듣지 못해 괜히 갔나 싶어 후회스러웠다고 말씀하셨다. 사흘간이었다던가, 남북 이산가족 상봉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서로 전화나 편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일부 가족들은 중국을 통해서 편지를 주고받거나 돈까지도 보내는 방법이 있다고는 한다) 애틋한 형제의 정을 느낀 것도 아니니 뭘 더 어쩐단 말인가.

상황은 다르지만 70년대에 미국으로 입양됐던 친구 하나도 몇년 전 30년 만에 친부모를 찾으러 한국에 왔었고, 홀트아동복지회와 지방경찰청의 도움으로 친부모를 찾았다. 아이를 버린 부모는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듯했고, 친구도 눈물을 흘리며 그들을 용서했다. 한국 땅에서 고아원에 버려져 살았을 삶보다 미국에 입양되어 살았던 인생이 훨씬 더 나음을 알기 때문이라면서. 2년뒤 친구 부부는 그간 낳은 갓난쟁이 딸을 데리고 한번 더 한국을 찾아와 생모를 만났지만, 친구의 태도는 달라져 있었다. 아이를 낳아 키워보니, 남편이 못마땅하고 살기 어렵다는 이유로 자식을 버린 생모를 이해할 수도, 용서할 수도 없다고 했다. 홀로 남매를 키우기 어려워 해외입양을 선택한 생부가 오히려 이해될 것 같다나. 생모 쪽에서도 '미국사람'이 되어버린 나의 친구에게 그저 죄책감을 갖고 있을 뿐 별 정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친구는 생모가 아기 입히라며 사들고 온 옷가지와 색동저고리에 감사 인사를 하기는 했지만, 돌아서서 내겐 "촌스러워서 집에 돌아가자 마자 다 버릴 것"이라고 공언했다. 그리고 헤어지던 날, 자긴 두번 다시 한국에 오지 않겠다고 말했다. 일 때문이라면 몰라도 적어도 친부모를 만나러 오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결정타는 생모의 입에서 나왔다. 말이 안통하는 양쪽을 위해 계속 뒤치닥거리를 해오던 나에게 생모가 넌지시 물었었다. 미국서 쟤네들이 좀 사는 것 같으냐고. 사진작가와 기자면 먹고 살만 하지 않겠느냐고. -.-; 내 친구가 어떻게 나오나 한번 실험해봐야겠다면서, 생모는 대구 산다는 자신의 손녀딸(그 아주머니는 재혼해서 새로이 딸아들 낳아 잘 살고 있었다)이 쓸만한 '유아용 카시트'를 미국에 돌아가면 사보낼 수 있겠는지 내 친구에게 물어보라고 했다. 난감해진 내가 부피가 커서 배보다 배꼽이 더 클 거라고 만류해 보았지만, 일단 물어는 보라나.
 
친구가 미국으로 돌아가 카시트를 사서 대구로 보내주었는지 어쨌는지 나는 모르겠다. 어쨌든 그 질문을 받은 내 친구는 순간적으로 파르르 떨다가 흔쾌히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그날의 만남을 정리해 생모 가족과 헤어지고 나서 나와 친구, 친구의 남편은 허탈한 마음에 술을 마셨었다. 해외입양아가 친부모를 찾고, 서로 말이 안통하면서도 어떻게든 인연의 끈을 이어가려고 애쓰는 건 TV에서나 나오는 일이로구나 싶었다. 친구 부부는 뿌리를 알기 위해서였으니, 친부모를 찾은 게 잘한 일이라고 말했지만, 그 과정을 줄곧 지켜본 나로선 과연 그 상봉이 잘한 짓이었는지 자신이 없었다. 어차피 헤어질 수밖에 없는 운명의 가족이었다면 그냥 헤어진 채로 그리움과 의혹, 좋은 상상의 기억만 품고 사는 게 더 '아름답지' 않을까 싶었다.

이제 더는 그런 꿈을 꾸지 않지만, 어린 시절엔 노상 전쟁통에 피난을 가다가 가족을 잃어버리거나 사방에서 폭탄이 터져 홀로 어느 낯선 곳에 숨어 있는 악몽을 꾸다 울며 깨어나곤 했다. 꿈이라 다행이라며 어린 마음에 가슴을 쓸어내렸지만, 만약에 현실에서도 내가 그렇게 이산의 아픔을 지니고 살았다면, 나 역시 현실의 괴리가 어떻든 일단은 가족을 찾으려들 것이 확실하다. 나중에야 차라리 찾지 말 것을 그랬다고 후회하게 되든지 말든지. 그렇기 때문에 남은 생이 얼마 안되는 수많은 이산가족 어르신들이 하루빨리 더 많은 상봉기회를 누리기를 빌고 있기는 한데, 그 마음이 그리 편치만은 않다. 할아버지도, 고모할머님도 이제는 다 돌아가신 분들이라, 마음에 상처를 입었더라도 그때 만나기를 잘하셨다고 생각하는지 여쭤볼 도리도 없다. "꿈에 그리던 얼굴을 한번이라도 봤으니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흔한 말이 그분들에게나, 지금 이산가족을 상봉하고 있는 실향민들에게나 서글픈 진실이길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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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선가시

투덜일기 2010. 10. 29. 20:23

밥먹을 때 혼자 생선가시를 발라 먹기 시작한 게 언제인지는 당연히 잘 기억나질 않는다. 하지만 대충 짐작컨대 열살 언저리가 아니었을까? 할아버지의 호통 교육으로 젓가락질은 국민학교 이전에 이미 통달한데다, 밥상머리에서 오래도록 엄마의 시중을 받기엔 두 동생이 있어 어려웠을 테고, 그때도 이미 잘난척 했던 나의 성격이 그런 걸 허락치  않았을 것 같다. 엄마가 살쪽을 우리에게 나눠준 뒤 당신은 남은 살에서 생선가시를 대충 발라서 입안에 넣고 마구 씹다가 남은 가시를 뱉어내는 방식을 어려서도 몹시 못마땅해 했던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남동생들은 머리가 굵어진 뒤에도 생선을 먹을 땐 꼭 엄마가 거들어줘야 했다. 막내는 아예 비린것을 싫어해서 웬만해선 젓가락도 대지 않으려 했기 때문에 억지로 먹이려고 자꾸 밥그릇에 생선살을 올려주는 편이었고, 큰동생은 생선가시를 바르는 게 아니라 생선 몸통을 헤쳐놓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영악한 나는 생선 종류가 달라지더라도 중간 뼈대와 등, 배에 난 가시의 구조를 알면 완벽하게 생선살만 발라먹는 게 어렵지도 않은데 다들 왜 헤매는지 도대체 이해가 가질 않았다.

다행히도 착한 올케들은 생선반찬을 식탁에 올릴 때마다 어린 조카들 뿐만 아니라 남편을 위해서도 일일이 가시를 발라 살만 먹기 좋게 마련해주는 성품이다. 그게 습관이 된 덕분에 심지어 같이 밥을 먹을 땐 우리 모녀를 위해서도 가시를 발라주는 지경. 애들과 남편을 위해 돌아가며 생선 가시를 발라주느라 생선을 굽거나 조리는 날엔 정작 자기는 잘 먹지도 못한다고 푸념하면서도, 지켜보면 노상 그러고 있다. 엄마도 위대하지만 아내도 위대함을 실감하는 순간이다. 가끔 나도 밥상머리에서 일손을 돕느라 조카들에게 생선살을 발라 숟가락에 얹어주다 보면, 녀석들이 밥을 다 먹을 때까지 정말로 젓가락을 쉴 수가 없고, 내 입으론 생선살 한톨 못들어간다.

물론 이젠 나에게도 밥상머리에서 늘 생선가시 바르는 시중을 들어들어야 하는 왕비마마가 계신다. 과거에도 그랬듯 왕비마마는 대충 큰 가시만 발라낸 생선 살을 마구 씹다가(잔 가시는 칼슘 섭취를 위해 먹어도 괜찮다고 주장하신다) 걸리는 가시가 있으면 뱉어내는 분인데, 그러다 꼭 가시가 목에 걸려 켁켁거리며 괴로워하시기 때문에 나는 절대 못하게 말린다. 일주일 단위로 병원에 다닐망정 생선가시 빼러 응급실 가는 일은 피하고 싶기 때문이다. 식단을 구체적으로 짜서 해먹고 사는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생선을 굽거나 조려 상에 올리는 편이라 어느새 생선가시 바르는 일도 나름 주간행사다. 

돌아보면 굴비를 좋아하셨던 할머니를 위해 말년에 생선가시를 바르는 일도 내 몫이었던 것 같다. 내가 어렸을 땐 당연히 할머니가 생선 살을 발라 내 밥숟갈에 얹어주셨겠지만, 눈이 어두워지신 할머니를 위해선 나나 엄마가 할머니 밥숟갈에 굴비 살을 올려드려야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당신은 됐으니 너나 어서 먹으라고 말씀하셨지만, 잔 가시 하나 없이 '성공적으로' 살코기만 할머니 숟가락에 얹어 드리며 나는 몹시 뿌듯하기만 했었다. 그런데 엄마를 위해 생선살을 바르는 요즘은 뿌듯함보다 서글픔이 앞서고 그래서 자꾸만 심술이 난다. 할머니를 위해선 꼭 숟가락에 생선살을 얹어드렸으면서, 엄마를 위해선 가시만 따로 발라 치워놓고 직접 집어 드시라고 하는 것만 봐도 태도가 다르다. 벌써부터 매사에 너무 의존적으로 만들지 않기 위함이라는 의도가 깔려 있기는 하지만, 그 밑바탕엔 엄마가 완전히 힘없는 '할머니'란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 심보가 녹아 있다. 

오늘 저녁에도 가시가 젤 없는 편인 삼치를 구워 먹으며 생각해보니, 내가 열살무렵에 생선가시 분야(?)에서 독립했다고 쳐도 엄마의 시중을 받은 게 10년이니 최소한 나도 10년은 군말없이 봉사해야 맞는 거다. 그 이후에도 계속 그런 봉사의 세월이 이어지면 감사할 일이고... 생선가시 때문에 툴툴대다 갑자기 철났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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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야 고맙다

투덜일기 2010. 10. 7. 15:49

딸을 둔 부모는 원래 그러는 것인지 모르겠는데, 이제 겨우 열세살인 조카를 두고 동생과 올케는 공주의 결혼 문제로 벌써부터 고민을 한다. 동생 녀석은 이렇게 정성들여 키운 딸이 아까워서 어떻게 시집 보내느냐고, 남주기 싫어서 그냥 계속 데리고 살겠다는 전형적인 딸바보 아빠의 발언을 최근까지 토로했다. 그러면 올케는 펄쩍 뛴다. 스무살만 되면 독립시키고 싶다나. 그러면서 공주가 나중에 결혼해서 어떻게 살아나갈지, 가서 보면 속 터질 것 같아 안보는 게 낫겠다고 구시렁거린다. 내가 보기엔 참 걱정도 팔자다. 지난 금요일 결혼식에선 벌써부터 딸 예식 걱정을 하질 않나...

딸들의 경우 자라면서 결혼에 대한 생각은 비슷하게 발전하다 어느 시점에 확고한 자리를 잡는 듯하다. 처음엔 멋모르고 제 아빠랑 결혼하겠다고 하다가 유치원쯤 들어가면 마음에 드는 남자친구랑 결혼하겠다고 하는 식이다. (그러고 보니 사내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어려선 엄마랑 결혼하겠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족과는 결혼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여자친구 이름을 들먹이지 않는가.) 아이들의 그런 대답은 사실 어느 정도 어른들이 강요한 것이다. "너 커서 누구랑 결혼할래?"라고 자꾸 물으니 눈에 보이는 대상을 입에 올리는 게 아닐까.

어쨌든 내가 결혼이라는 제도를 회의적으로 보기 시작한 건 고등학생 때였던 듯한데, '주의'라고 이름 붙일 만한 이론적인 정신 무장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대놓고 독신을 부르짖지는 않았어도 내심 난 결혼 같은 거 하지 않으리라고 '자연스레' 마음 먹고 있었다. 사회 시간이었던가, 어쩌다 결혼제도의 종류와 일부일처제의 불합리함을 토론하던 수업 중에 나의 독신 성향이 발각되고 말았을 때, 욕쟁이 여선생은 내게 말했다. "저런 년이 제일 먼저 시집간다고 난리 치는 법이다. 다들 두고봐라. 쟤 학교 졸업하자마자 청첩장 돌리나 안 돌리나." 속으로 나 역시 코웃음을 치며 중얼거렸다. '어디 두고 보셔.'
 
얼마 전까지도 공주는 아주 돈이 많은 부자랑 결혼해서 자기가 회사 나가서 일 안해도 사고 싶은 거 다 사고 여행다니며 살고 싶다고 말해 나를 난감하게 만들었다. 그런 사고방식이 왜 옳지 않은지 제대로 설명할 방법이 퍼뜩 떠오르지 않았달까. 주체적인 삶이 어쩌고 경제적인 종속이 어쩌고 몇 마디 하다가 그냥, 그런 건 나중에 커서 결정해도 된다고, 어른 되면 생각이 바뀔 거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그런데 제 엄마에게 또 한번 "너 나중에 결혼하면.... 어쩌구 저쩌구..."하는 잔소리를 듣던 조카가 며칠 전엔 대뜸 자기는 결혼을 하지 않고 '고모처럼 살겠다'는 폭탄발언을 했다. "고모가 얼마나 행복한데 그래!"라고 부연하면서. +_+ 진정한 행복 여부를 떠나 순간 어찌나 공주한테 고맙던지! 물론 조카의 의도는 '고모처럼' 계속해서 부모에게 얹혀 살며 캥거루족이 되겠다는 것이어서 제 엄마를 더욱 펄쩍펄쩍 뛰게 만들었지만, 옆에서 듣는 나는 염려스러우면서도 뿌듯했다. 스스로 요즘 내 삶이 과연 행복한가 회의에 빠져있던 시기라 더욱 그랬던 것 같다.

소소한 데서 찾는 깨알 같은 행복으로 만족하기엔 속물스러움이 점점 심해진다. 욕심은 커지고 몸을 써서 들이는 노력은 차츰 아끼고만 싶다. 불평과 짜증은 겉잡을 수 없이 늘어나 이마엔 깊은 三자 주름이 새겨진 느낌이다. 그러던 중에 가끔씩 촌철살인 예리하게 솔직함을 드러내는 공주에게 들은 '행복해보인다'는 말에 얼마나 기운이 솟는지 모르겠다. 요즘의 감정곡선으론 몇달 안 지나서 또 죽상을 하고 있기 십상이지만 그래도 당분간은 꽤 훌륭한 자기최면의 화두가 될 것 같다. "고모가 얼마나 행복한데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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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다른 결혼식

놀잇감 2010. 10. 2. 17:38

어제 외사촌동생의 결혼식엘 다녀왔다. 가기 전엔 정말 가기 싫은 기분이었지만 그렇다고 안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왕비마마의 운전수가 감히 어딜 앙탈이냐) 무려 7년만에 만나는 사촌동생 k양은 진심으로 보고싶었으며 축하해주고도 싶었다. 제일 싫었던 건 '식' 자체였다고나 할까. 물론 외할머니 돌아가시면서 드러난 외삼촌의 인품도 꺼림칙함에 한 몫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싫은 내색할 수 있는 배포도 못되는 인간이다 내가.

어쨌든 여전히 귀여운 사촌동생을 봐서라도 가길 잘했다는 기분이 든 요번 결혼식은 몇 가지가 좀 달랐고 그래서 처음 생각과 달리 덜 피곤했던 것 같다. 정말로 내가 주최하지 않아 피곤할 이유가 없는 소규모 가족모임에서 실컷 먹고 수다떨다 돌아온 정도의 느낌이다.

우선 예식홀이 작은 곳이었다. 신랑 신부 가족들과 친구만 조졸히 모이는 예식이라며 청첩장도 아예 안 돌리더니 정말로 작은 연회장에 90명의 좌석을 준비해놓았더라. 호텔 결혼식이라고 해도 수백명이 드글대는 대연회실 예식만 보았던 터라 신선했고 상대적으로 친지들의 수도 줄어드니 내가 인사할 사람도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결혼식 같은 데서 테이블마다 먼저 자리잡은 어르신들 찾아뵙고 인사 올리는 건 신랑신부만의 의무가 아니지 않은가(친척 결혼식 가기 싫은 요인 제1위다!). 심지어 올케는 몹시 마음에 드는지 나중에 자기 딸(=정민공주)도 이렇게 보내야겠다고 읊조릴 정도였다. ㅋ 헌데 장본인인 열세살 공주는 '레드 카펫'(사실 호텔 예식장은 레드 카펫이 아니라 화이트 카펫이고, 심지어 요샌 단을 올려 패션쇼 런웨이처럼 무대식으로 꾸며놓는다는 걸 아직 어린 녀석이 까먹었나보다 ^^)이 없어 이상하다고 코멘트 했다.

둘째로는 축의금을 받지 않았다. 물론 아예 안받는 건 아니겠지만 암튼 최소한 뻘쭘하게 방명록을 펼쳐놓고 봉투를 받는 접수대는 없었고, 양가 부모도 밀린 빚 받으려는 사람들처럼 입구에 늘어 서서 하객을 맞는 대신 그냥 자연스럽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며 친지들을 맞이하고 인사를 나누었다. 당연히 축의금 봉투를 마련해 갔던 우리들은 식이 다 끝나고 나서 작별인사를 하며 슬금슬금 외숙모에게 봉투를 전했는데, 어쩐지 돌잔치 느낌이 들었다. ^^

셋째로는 주례가 없었다. 신랑신부가 나란히 입장하는 예식은 꽤 여러번 봤지만 주례가 아예 없는 결혼식은 내게 첫 경험이었다. 그냥 서툰 사회자가 (아마도 신랑신부의 아이디어인듯한) 나름의 순서대로 예식을 진행했다. 신랑과 신부는 각자 써온 서약문을 번갈아 읽었고, 반지를 주고받았으며, 사회자가 성혼 선언 직후 "이제 신부에게 키스해도 된다"고 말한 걸 보면 각각 미국에서 유학과 취업 중인 신랑신부가 일부 '어메리칸 스타일'을 추구했던 모양이다. 주례사 대신에 나중에 양쪽 아버지들이 전날 고민 깨나 했을 덕담을 해주었는데(두분 다 적어온 종이를 꺼내 들고 읽었다), 뻔한 주례사보다 그쪽이 나도 더 좋게 느껴졌다.

넷째, 예식이 끝나고 하객들인 우리가 와구와구 뷔페음식을 축내고 있을 즈음 신랑신부가 다시 나타났는데(턱시도와 웨딩드레스 차림으로 홀 안을 돌며 인사는 이미 마친 뒤의 얘기다) 그야말로 평상복 차림이었다. +_+ 사촌동생은 대체 누구 것일까 몇년이나 된 옷일까 의심스러울 정도인 검정색 박스재킷에 (길이가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온 데다 그나마도 소매를 숭덩숭덩 접었다) 프린트 티셔츠를 받쳐입고 고무줄치마로 의심할 정도의 편한 주름스커트를 발목까지 질질끌며 나타나 도저히 '방금 예식을 끝낸 신부'로 보이지 않았다. 신랑 역시 청바지에 티셔츠, 등산 조끼 같은 걸 입고, 깔끔한 정장을 하고 온 친구들 사이에 앉아서 같이 밥을 먹으며 담소했다. 당연히 어른들은 난리가 났다. ㅋㅋ 특히 울 엄마는 외숙모가 새색시 한복을 안해줬나 보다고, 한복 입기 싫댔으면 예쁜 옷이라도 한 벌 사주지 인색했다고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내내 아쉬워했다. 내가 보기에도 신부의 패션센스는 좀 난감할 정도였지만, 과거에도 워낙 착하고 털털했던 k양을 생각하면 나는 그런 파격이 오히려 유쾌했다. (폐백도 당연히 생략했다. 폐백 안하는 예식은 몇번 봤으니 그건 패스~)

다섯째, 무려 7박8일간 떠난다는 신랑신부의 신혼여행지가 글쎄, '제주도'란다. 안봐도 그림이 그려졌다. 말이 신혼여행이지 둘이 배낭 둘러매고 올레길을 죄다 순례하거나 한라산 등반을 할 거라는데 700원 걸겠다! ㅋㅋㅋ 사실 사촌동생은 가족과 함께 10여년 전에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가, 여차저차해서 최근 다시 돌아온 외삼촌 내외와 동생과 떨어져 미국에 홀로 남아 학교를 마치고 취직을 했다. 신랑에 대한 정보는 캘리포니아 유학생이라는 것과 사촌동생을 교회에서 만났다는 정도 뿐인데, 왜 하필 신혼여행을 제주도로 가냐고 외삼촌에게 물으니 다른 데는 여행 많이 가봤어도 정작 제주도는 못가봐서 애들(=신랑신부)이 정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제주도가 인기 신혼여행지였던 까마득한 옛날이라면 모를까, 최근 10년 안쪽으로는 외국이 아닌 제주도로 신혼여행 가는 커플을 주변에서 본 적이 한번도 없었기에 이 또한 신기했다. 

조금도 엄숙하지 않고 호텔 진행요원의 끼어듦과 요식행위도 과하지 않고, 혹시나 상대편 하객들의 귀에 책 잡힐만한 신랑신부의 험담을 하지나 않을까 입조심에 눈치까지 봐야하는 상황에서 자유로울 수 있었던 명랑한 결혼식이었기 때문일까. 하이힐에다 장시간 운전까지 했는데도 별로 피곤을 느끼지 않았던 것 같다. 그간 내가 예식장만 다녀오면 몇시간씩 드러누워 쉬어야했던 건 순전히 사람과 경직된 절차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엔 결혼식이 늘 재미난 구경거리였는데, 언제부턴가 식상해져 구경꾼으로서의 재미가 사라지고 하객으로서의 의무만 남으니 당연히 피곤했다. 하지만 이렇게 새삼 '구경거리'로서의 재미와 개성이 드러나는 결혼식이라면 또 기꺼이 발품 팔아가며 축하해줄 마음이 생겨날 것도 같다. 아 참, '뭐 입고 가나'의 고민만 제외한다면.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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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서울

투덜일기 2010. 9. 23. 17:23
서울이 고향이라는 말처럼 이상하게 들리는 말도 드문 것 같지만, 어쨌든 서울서 나고 자랐으니 누가 물으면 내 고향은 서울이라고 해야하나? 아니면 할아버지의 고향인 평안북도 정주라고 해야하는 건가? 그럼 만주에서 태어나 자라다 한국전쟁 통에 부산으로 피난 내려가 십대까지 보낸 아버지의 고향은 또 어디인가? 내 혈통의 절반을 차지한 엄마는 그야말로 대대로 서울 토박이인데 그건 또 어떻게 반영해야하나? 이것저것 생각하면 골치가 아파온다.

어쨌든 할아버지, 아버지 모두 살아계실 때도 우리 가족 명절 기반은 서울이었고, 우리집에서 동생네 집으로 차례의 주관이 넘어간 지금껏 상당수 서울 시민들이 귀향해 텅텅 빈 것 같은 명절 서울을 지키며 교통량이 만날 명절 때만 같으면 좋겠다는 말을 하고 산 게 수십년이다. 연휴 시작무렵 차량 몇십만 대가 톨게이트를 빠져나갔네 어쩌네 하는 뉴스를 듣지 않아도 명절 때 가끔 시내를 다녀보면 정말로 한산해서 평소보다 시간이 절반밖에 안걸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건 나의 착각이었거나, 명절 때 움직이는 쪽이 아니라 친척과 가족들의 방문을 받는 쪽이라 몰랐던 것일 뿐이었는지, 명절의 서울은 이제 그리 한산하지 않다. 사실 작년까지만 해도 설날과 추석에 온종일 왁자지껄 친척들과 먹고 마시다 늦은 밤에 헤어져 집에 오는 길은 한산하게 느껴졌었다. 명절 연휴의 길이에 따라 상황이 약간 달라지긴 했어도 명절 당일엔 길막힘 따위 모르고 살아왔다는 뜻이다. 그런데 가족회의 결과 우리집도 올해부턴 며느리들의 휴식과 친정방문을 위해(이전까지 우리 엄마를 비롯해 작은어머니들은 물론이고, 올케들까지 명절엔 온종일 시댁과 함께한 뒤 다음날에나 친정에 갈 수 있었다.) 점심까지만 다 같이 먹고 헤어지기로 했기 때문에, 명절 당일 오후에 도로엘 나서보니 교통혼잡이 상상 이상이다.

하기야 요번엔 추석 전날 서울에 물폭탄이 쏟아지는 바람에 동생네 집으로 가는 길도 수월하지가 않았었다. 20분도 안 걸리는 거리를 1시간도 넘게 걸려 꾸물꾸물 기어가며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기분이 묘했다. 명절마다 고향으로 내려가는 사람들은 늘 이렇게 막막한 기분이었겠구나 싶었다. 이미 지난 설날에도 경험했지만, 어제 오후 집으로 돌아오는 길도 마찬가지였다. 각 지방에서 아침 일찍 차례를 마친 사람들이 다 벌써 돌아온 것인지, 아니면 그냥 서울 안에서 친척집을 오가는 차들이 서로 엉킨 것인지, 그 둘 다인지 간선도로 지선도로 할 것 없이 길마다 자동차가 꽉꽉 들어차 기어가고 있었다.

명절 때마다 7, 8시간씩 고속도로에서 고충을 겪는 사람들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하찮은 수준이기는 했어도, 명절 교통체증을 실감하며 이렇게 다들 고생을 해가며 찾아가는 고향과 가족과 만남의 의미가 무엇일까 새삼 멍했다. 전날부터 기름냄새 온 몸에 배어가며 장만한 각종 전과 음식은 맛있었고, 일년에 몇번 그렇게 대대적으로 모여 얼굴 맞대고 왁자지껄 떠들고 노는 자리를 몹시 소중히 여기는 사람임에도 확실히 명절은 적잖은 스트레스다. 핏줄로 어쩔 수 없이 엮인 나와 달리 엄연히 따지면 남이나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고리로 묶여 노동에 힘쓰며 짜증스러워할까봐 눈치가 보이면서, 동시에 또 그렇게 가족 내에서도 편을 가를 수밖에 없는 상황에 한숨이 나온다. 거기다 이젠 명절날 몰랐던 교통 체증 속 운전까지 까칠한 인간의 성미를 돋울 줄이야.

착하긴 해도(어쩌면 착하기 때문에) 명절증후군과 스트레스를 느끼는 올케들에게 한 사람씩 돌아가며 안식년 휴식제를 실시하든지, 5년씩 돌아가며 차례와 제사를 모시는 순환제를 도입하든지 하자고 제의했던 건 어쩌면 나도 늘 꿈꿔마지않는 '명절에 해외여행가기' 를 실현하고 싶은 욕심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생선전 밀가루 묻히기부터 시작해 명절 음식 장만을 도운 역사가 7살무렵부터 따져도 무려 얼마인가. 지겨울 때도 됐다고 생각은 하는데, 사실 명절 서울을 떠나 어디 다른 하늘 아래 가 있는다 해도 아직은 마음 편히 즐길 자신이 없긴 하다. ㅋ 참 바보 같은 가족형 인간이다 난. 그러니 앞으로도 한참은 명절 서울의 막히는 도로사정에 툴툴대는 수밖에 없을 듯. 암튼 고속도로도 막힌다는데 서울 시내 도로도 동시에 막히는 건 어찌된 영문인지 그걸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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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아는 언론인과 사진작가 부부가 있다. 언론인인 남자의 취재 도구는 볼펜과 작은 수첩, 소형 녹음기가 전부다. 남자는 가방도 없이 여기저기 다니다 뭔가 기록할 일이 있으면 재킷 주머니에 넣어둔 수첩과 볼펜, 소형 녹음기를 꺼낸다. 가끔은 노트북 컴퓨터를 소지하고 다닐 때도 있긴 하다. 하지만 그땐 기사를 바로 송고하거나 자료를 참고해야 하는 경우이고, 대부분은 양손을 자유롭게 하고 다니는 걸 좋아한다. 그와 동반 기사를 취재하는 경우는 거의 없지만, 어쨌든 언론인 남편보다 상대적으로 촬영도구가 많은 여자는 작은 체구에 여러 종류의 카메라와 렌즈가 들어 있는 큼지막한 가방을 늘 어깨에 짊어지고 다닌다. 본격적인 촬영이 있는 날 쫓아다녀본 적이 있는데, 웬만한 택배상자보다도 큰 카메라 가방엔 각종 카메라와 렌즈, 빛의 느낌을 확인하기 위해 먼저 찍어본다는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들어 있어 무게가 20킬로그램은 족히 될 듯 했다.

특별히 전문적인 취재나 촬영이 있는 날은 아니지만 둘이 같이 관련된 행사 때문에 두 부부가 같이 외출을 했다고 가정해보자. 남자는 맨몸에 빈손이고, 여자는 예의 그 묵직한 카메라 가방을 들었다. 남편은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들어주어야 할까, 아닐까? 더욱이 프리랜서 저널리스트인 남자는 185센티미터의 장신에 100킬로그램은 나가는 거구인 반면, 프리랜서 사진작가인 아내는 150센티미터의 단신이다. 사실, 이런 상황에서 둘과 동행하게 됐을 때 나는 빈말로라도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어주겠다는 말 한 마디 안하는 남자의 태도에 분개했고, 복잡한 인사동을 함께 거닐며 나 역시 비슷한 단신임에도 사진작가 친구에게 가방을 같이 들자는 말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헌데 친구는 괜찮다며 내 호의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이마에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어깨가 아파 가방 매는 쪽을 자주 바꾸면서도.  

가끔 쓸데없이 오지랖이 넓은 나는 반나절을 지켜보다 참다못해 덩치 큰 남편에게 왜 부인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느냐고 묻고 말았다. 넌 짐도 하나 없으면서, 가냘픈 아내가 끙끙거리며 그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혼자 들고 다니는 게 가엾지도 않냐고. 남자는 오히려 내 질문을 의아하게 여겼다. 사진작가로서 무거운 촬영도구를 들고 다니는 건 어디까지나 당연한 일인데, 왜 자기가 간섭해야 하느냐고. 자기 아내가 사진작가라는 직업을 선택했을 땐 그에 수반되는 모든 수고로움까지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므로, 온전히 본인의 책임이라고. -_-; 논리적으로 너무도 맞는 말이었지만, 나는 그들이 '외국인'이기 때문에 그런 '쿨'한 사고방식과 행동이 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한국인 부부였다면 둘 다 아무리 '프로'다운 직업인이라고 해도, 둘이 같이 움직일 땐 상대적으로 힘 센 남편이 아내의 짐을 잠시라도 들어주지 않았겠나 말이다.

이번엔 예순 살의 아버지와 열일곱 살의 늦둥이 딸이 있다. 역시나 이들도 미국인이다. 방학을 맞아 이혼한 아버지의 집에 다니러온 십대의 딸은 올 때보다 더 빵빵해진 큼지막한 가방을 낑낑거리며 짊어지고 아버지의 배웅을 받는다. 가방의 무게 때문에 딸은 걸음걸이가 휘청거릴 정도다. 아버지는 시원섭섭함을 느끼며 딸을 위해 현관문을 열어주는 친절을 베푼다. 그의 배웅은 아파트 현관에서 끝이 난다. 주차장까지 함께 나가는 건 아버지 본인도, 딸도 상상조차 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상하지 않은가? 예순 살이라고는 하지만 깡마른 십대 딸보다는 그래도 아버지가 주차장까지 짐을 옮겨다주어야 '자연스럽지' 않을까? 물론 어디까지나 이건 내 생각이지만. 

이 장면은 지금 작업중인 소설의 이야기인데, 나는 이 부분에서 몇년 전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가 떠올랐고 확실히 내가(심히 비약하자면 한국인이) 의존적이구나 하고 느꼈다. 책 속에서 아버지가 무거운 딸의 짐을 스스로 옮기도록 내버려두는 장면은 그의 매몰찬 성격이나 무정함을 묘사하려는 뉘앙스가 전혀 없고, 그저 자연스러운 작별의 장면일 뿐이었다. 물론 유별난 딸의 독립심과 괴력을 강조한 것도 아니다. 다만 가족 안에서도 개인주의가 통용되는 미국 사람들의 사고가 드러났을 뿐이다. 부녀 사이에도 자기 일은 자기가 책임지는 게 원칙상 옳긴 하다. 그럼에도 나는 어느 틈엔가 이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 같으면 당연히 나 대신 짐을 옮겨다 줬을 텐데, 라고. 위에 적은 친구 부부의 에피소드에서 내 주변 남자들 같으면 당연히 아내의 카메라 가방을 대신 들고 다녔을 텐데, 라고 생각했던 것과 마찬가지다.

물론 나는 무겁든 가볍든 남자들이 여자의 핸드백을 대신 들고 다니는 걸 혐오스럽게 생각하는 사람이며(다만 책가방은 인정 ^^;), 사사건건 "여자는 약하니까 이런 건 못해!"라고 핑계대는 여자들을 줄곧 혐오하며 집밖에선 늘 괴력을 발휘해온 이른바 돌쇠형 여자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묵직한 아기 캐리어와 기저귀 가방, 시장바구니 따위는 남편이 매고 들어야 '옳다'고 생각한다. 물론 남편이 아내보다 더 힘이 세다는 전제 하에. 요즘엔 인식이 많이 바뀌어서 별로 그런 커플이 눈에 띄지 않지만 몇년 전까지도 흔하게 보았던, 아내에게 아기와 기저귀 가방을 모두 들게 하고 본인은 빈손으로 한가로이 걸어가는 뻔뻔한 남편들의 뒤통수를 내가 얼마나 째려보며 욕했던가.

돌이켜보니 나는 양성평등과 성별역할 구분의 철폐를 집밖에서만 엄중이 부르짖었던 것 같다. 집안은 마치 그런 원칙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으니 마음껏 응석을 부리거나 편협한 태도를 취해도 용서될 수 있다는 듯이. 물리적인 힘을 쓰는 부분에서도 양성평등을 주장하는 건, 무조건 남녀 공히 군대에 가야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나 어린이든 성인이든 하나의 인간 개체임은 마찬가지이므로 모든 사회적 의무를 똑같이 져야 한다고 우겨대는 억지논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걸 잘 안다. 그럼에도 어쩐지 집 안과 밖에서 성별 문제에 대한 나의 이런 태도가 모순처럼 느껴지는 걸 피할 수가 없다. 험악하게 운전하는 것조차 여성에 대한 편견 타파와 양성평등을 향한 내 나름의 노력이라고 우스개 소리를 하면서, 정작 집안의 영역에선 상당히 '연약한' 여자라 '특별히' 더 존중받아야 한다는 특권을 자임했다. 물론 나의 이런 태도는 맏딸이면서 고명딸이라는 지위에서 오는 프리미엄이 작용한 덕분이다. 상대적으로 두 남동생들은 나 때문에 역차별을 당하고 살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다행스럽게도 체중과 체구에 상관없이 어느덧 집안에서 '힘쓰는' 인물이 되면서, 그리고 '딸이고 첫째'이라서 더 예쁨을 받는 건 엄연한 '차별'임을 눈 동그랗게 뜨고 지적하는 똘똘한 조카들 덕분에 집안에서도 성 역할의 경계는 확실히 무너지고 있음을 느낀다. 그런데 또 불쑥 걱정이 든다. 가족적 온정주의는 양성평등과 꼭 상충되어야만 하는 것인지? 제대로 공부는 안하고 몸으로 부딪치고 느끼는 현실로만 나름의 원칙과 이론을 정립하려니 생겨나는 부끄러운 헷갈림이다. 언제고 제대로 여성학 공부 좀 해봐야할 터인데, '과연' 언제나... 만날 해야할 일, 하고 싶은 일을 뒤로 미루고 한탄만 하는 이런 태도야 말로 진정 모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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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물림

하나마나 푸념 2010. 6. 1. 22:06
야구 팬들이 최근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고 물으면 대뜸 멍해져서 민망해하기만 했는데, 요샌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답한다. 나는 <천하무적 야구단> 팬이라고.
물론 프로야구 원년엔 워낙 박철순 선수 팬이라 무조건 OB베어스를 응원하는 듯도 했지만, 박철순 선수가 안던질 땐 또 다른 팀에도 눈을 돌렸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연고지로 따지면 MBC 청룡을 응원해야할 것도 같았고, 고질적인 지방색을 타파하자면 그냥 공평무사하게 약팀을 응원해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이렇게 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야구팬보다는 죽으나사나 한팀만 결사적으로 응원하고 충성을 다 바치는 야구팬이 훨씬 더 많을 테고 그게 정상인 것도 같다.

나의 두 동생들만해도 그렇다. 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큰동생은 LG트윈스, 막내동생은 두산베어스 팬인데 그 역사가 무려 프로야구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내동생은 어린 시절 무척 구두쇠라 저금통을 웬만해선 깨지 않는 아이였는데,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현재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베어스에서 리틀야구단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자 식구들과 의논도 하질 않고 저금통을 깨 당시 초등학생에겐 상당한 거금 (아마도 5천원이었던듯;;)을 회비로 내고 가입을 했고, 팀로고가 찍힌 야구공과 유리컵, 미니어처 배트 받침대, 야구모자, 티셔츠 등을 받아와선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야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큰동생이 MBC청룡의 팬이 된건 어쩌면 먼저 치고나간 막내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녀석은 우리 고향이 서울이므로 당연히 청룡을 응원해야한다며 막내동생을 배신자 취급했었다.

만날 프로야구를 중계하는 TV앞에 앉아 옥신각신해대는 두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은근이 우리가 팀 선택을 종용하면 늘 "나는 지는 팀 편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항의를 하면, 사는 건 서울이지만 어렸을 땐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살았으니 굳이 고향을 따지면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해야하는데 이놈저놈 다 딱히 마음에 안든다는 걸 이유로 대셨다. 그게 서울 한귀퉁이에 살던 한 집안에서 프로야구 응원팀이 제각각 나뉘게 된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리고 두 동생은 각자 고집스레 지금까지 구단주가 바뀌는 역사를 거쳐서도 여전히 그 맥락을 잇고 있는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의 팬이다.

헌데 두 동생네 집은 현재 상황이 좀 다르다. 뱃속 태아 때부터 제 아빠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을 자연스레 자기 팀으로 세뇌당한 조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횟수가 몇번 안되긴 해도 각기 제 아빠와 LG와 두산 모자를 쓰고 경기장에 나가 응원막대기까지 휘둘러본 경험이 있는 조카들은 우습게도 어른인 두 동생이 LG와 두산을 응원하며 티격거리는 양상과 똑같이 자기네 팀이 더 멋지다고 서로에게 시비를 걸기도 한다. 심지어 나이차가 나는 걸 이용하여 자기네 편으로 오지 않으면 놀아주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모태두산팬인 지우에게 정민이가 "지우야, 너는 누나랑 같이 LG팬 할 거지? 응? 안 그럼 안놀아준다~!" 이런 식이다) 

막내동생은 회사에서 아마추어 야구단도 만들어 간간히 경기도 하는 눈치고 집앞에서 아들녀석과 캐치볼도 꽤나 열심히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준우네가 야구와 두산베어스에 대한 충성도와 애정이 깊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일이 없는 한 준우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두산베어스나 그 맥을 이어나갈 팀의 골수팬으로 남기 십상으로 보인다. 나의 의문은 여기서 생겨났다. 과연 준우는 커서도 두산베어스 팬이라는 자기 색깔과 취향에 대해 아무런 회의감도 들지 않을까?  나처럼 야구팬이랄수도 없는 뜨내기나 방관자는 몰라도,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는 특정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수십년씩 변함없는 열성적인 팬으로 남기가 힘든 것 같다. 간혹 구단에 환멸을 느껴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이들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내 두 동생들처럼 초등학생 시절부터 25년 넘게 충성을 바치던 팀을 버리고 다른 팀에 정을 들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치문제를 두고서도 사람들의 태도는 프로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 나처럼 싫증 잘내고 의심 많고 귀찮은 거 싫어하고 싫은 것도 많은 인간은 정치쪽에도 만날 이랬다 저랬다 고민이 많다. 최선이라고 믿을 인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상 좀 덜 나쁜 놈 중에 그나마도 좀 나은 놈을 뽑다보니 기준이 들쭉날쭉이다.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과연 타파될 날이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운 고질적인 지방색은 종종 사람들을 여전히 나누고 수십년씩 한 가지 색깔을 신봉하게 만들기도 하며, 그 취향을 대물림한다. 어린 시절부터 부와 권력을 누려온 젊은 아이들은 그 당연한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인 선과 번영이라 굳게 믿고 체화하였으므로 대를 이어 그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우익세력이 된다.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부모 밑에서 어려서부터 촛불시위에 따라다녀 보았거나 주류 언론의 행간에 감추어진 진실을 간파하는 법을 배운 경험이 있는 아이들 역시 대를 이어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체득한다. 

불행히도 이 사회는 개천에서 더는 용이 나지 못하고, 부유함이든 가난함이든 권력이든 차별이든 모두 대물림으로 세습되는 사회가 되어가는 듯하다. 선거 때마다 뭔가 좀 달라지기를 빌어보지만 통 달라지지 않는 판세를 보아도,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이 매번 권력자로 당선되는 걸 보아도, 자기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당장 맨몸으로 거리로 나앉든 말든 상관없이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 생각은 굳어진다. 그러니 변화의 희망을 품는 게 오히려 헛된 짓인지도 모르겠다. 다양성과 융통성이 꿈틀거리기엔 너무 견고하게 굳어진 집단 이기심 때문이다.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성공하면 되고, 내 자식만 공부 잘하면 돼>라는.

선거를 하루 앞두고 후보자들의 홍보물을 죄다 정리해 폐지로 구겨 넣으며 또 한번 착찹한 마음이다. 과연 요번엔 어떤 이들이 어떤 선택을 받게될지. 요번에라도 부디 대물림한 구태를 뒤집어 엎는 선택들이 많이 나오면 참 좋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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