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물림

하나마나 푸념 2010. 6. 1. 22:06
야구 팬들이 최근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고 물으면 대뜸 멍해져서 민망해하기만 했는데, 요샌 아예 얼굴에 철판을 깔고 대답한다. 나는 <천하무적 야구단> 팬이라고.
물론 프로야구 원년엔 워낙 박철순 선수 팬이라 무조건 OB베어스를 응원하는 듯도 했지만, 박철순 선수가 안던질 땐 또 다른 팀에도 눈을 돌렸던 게 사실이다. 그래도 연고지로 따지면 MBC 청룡을 응원해야할 것도 같았고, 고질적인 지방색을 타파하자면 그냥 공평무사하게 약팀을 응원해야하는 게 아닌가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처럼 이렇게 팀에 대한 충성도가 떨어지는 야구팬보다는 죽으나사나 한팀만 결사적으로 응원하고 충성을 다 바치는 야구팬이 훨씬 더 많을 테고 그게 정상인 것도 같다.

나의 두 동생들만해도 그렇다. 한 집안에서 자랐음에도 큰동생은 LG트윈스, 막내동생은 두산베어스 팬인데 그 역사가 무려 프로야구 원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막내동생은 어린 시절 무척 구두쇠라 저금통을 웬만해선 깨지 않는 아이였는데, 프로야구 출범과 함께 현재 두산 베어스의 전신인 OB베어스에서 리틀야구단을 모집한다는 신문광고가 나자 식구들과 의논도 하질 않고 저금통을 깨 당시 초등학생에겐 상당한 거금 (아마도 5천원이었던듯;;)을 회비로 내고 가입을 했고, 팀로고가 찍힌 야구공과 유리컵, 미니어처 배트 받침대, 야구모자, 티셔츠 등을 받아와선 제일 먼저 두각을 나타내며 프로야구의 세계에 빠져들었다. 큰동생이 MBC청룡의 팬이 된건 어쩌면 먼저 치고나간 막내에 대한 반발이었을지도 모르겠는데, 어쨌든 녀석은 우리 고향이 서울이므로 당연히 청룡을 응원해야한다며 막내동생을 배신자 취급했었다.

만날 프로야구를 중계하는 TV앞에 앉아 옥신각신해대는 두 아들을 보며 아버지는 어느 편도 들지 않으면서, 은근이 우리가 팀 선택을 종용하면 늘 "나는 지는 팀 편이다"라고 하셨다. 그런 게 어디 있냐고 항의를 하면, 사는 건 서울이지만 어렸을 땐 피난 내려와 부산에서 살았으니 굳이 고향을 따지면 롯데자이언츠를 응원해야하는데 이놈저놈 다 딱히 마음에 안든다는 걸 이유로 대셨다. 그게 서울 한귀퉁이에 살던 한 집안에서 프로야구 응원팀이 제각각 나뉘게 된 이유라면 이유였다. 그리고 두 동생은 각자 고집스레 지금까지 구단주가 바뀌는 역사를 거쳐서도 여전히 그 맥락을 잇고 있는  두산베어스와 LG트윈스의 팬이다.

헌데 두 동생네 집은 현재 상황이 좀 다르다. 뱃속 태아 때부터 제 아빠가 응원하는 프로야구팀을 자연스레 자기 팀으로 세뇌당한 조카들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어진 것이다. 횟수가 몇번 안되긴 해도 각기 제 아빠와 LG와 두산 모자를 쓰고 경기장에 나가 응원막대기까지 휘둘러본 경험이 있는 조카들은 우습게도 어른인 두 동생이 LG와 두산을 응원하며 티격거리는 양상과 똑같이 자기네 팀이 더 멋지다고 서로에게 시비를 걸기도 한다. 심지어 나이차가 나는 걸 이용하여 자기네 편으로 오지 않으면 놀아주지 않겠다고 협박까지 하기에 이르렀다. (예를 들어, 모태두산팬인 지우에게 정민이가 "지우야, 너는 누나랑 같이 LG팬 할 거지? 응? 안 그럼 안놀아준다~!" 이런 식이다) 

막내동생은 회사에서 아마추어 야구단도 만들어 간간히 경기도 하는 눈치고 집앞에서 아들녀석과 캐치볼도 꽤나 열심히 하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준우네가 야구와 두산베어스에 대한 충성도와 애정이 깊다. 그렇기 때문에 큰 일이 없는 한 준우는 어른이 되고 나서도 두산베어스나 그 맥을 이어나갈 팀의 골수팬으로 남기 십상으로 보인다. 나의 의문은 여기서 생겨났다. 과연 준우는 커서도 두산베어스 팬이라는 자기 색깔과 취향에 대해 아무런 회의감도 들지 않을까?  나처럼 야구팬이랄수도 없는 뜨내기나 방관자는 몰라도, 프로야구나 프로축구는 특정 팀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열정이 없으면 수십년씩 변함없는 열성적인 팬으로 남기가 힘든 것 같다. 간혹 구단에 환멸을 느껴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이들도 있다고는 들었지만, 내 두 동생들처럼 초등학생 시절부터 25년 넘게 충성을 바치던 팀을 버리고 다른 팀에 정을 들인다는 건 거의 불가능하다고 본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정치문제를 두고서도 사람들의 태도는 프로팀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와 비슷한 것 같다. 나처럼 싫증 잘내고 의심 많고 귀찮은 거 싫어하고 싫은 것도 많은 인간은 정치쪽에도 만날 이랬다 저랬다 고민이 많다. 최선이라고 믿을 인간이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노상 좀 덜 나쁜 놈 중에 그나마도 좀 나은 놈을 뽑다보니 기준이 들쭉날쭉이다. 하지만 내가 죽기 전에 과연 타파될 날이 있을 것인지 의심스러운 고질적인 지방색은 종종 사람들을 여전히 나누고 수십년씩 한 가지 색깔을 신봉하게 만들기도 하며, 그 취향을 대물림한다. 어린 시절부터 부와 권력을 누려온 젊은 아이들은 그 당연한 부와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사회적인 선과 번영이라 굳게 믿고 체화하였으므로 대를 이어 그 누구보다 보수적이고 우익세력이 된다. 진보적인 사고를 지닌 부모 밑에서 어려서부터 촛불시위에 따라다녀 보았거나 주류 언론의 행간에 감추어진 진실을 간파하는 법을 배운 경험이 있는 아이들 역시 대를 이어 세상을 올바르게 보는 법을 체득한다. 

불행히도 이 사회는 개천에서 더는 용이 나지 못하고, 부유함이든 가난함이든 권력이든 차별이든 모두 대물림으로 세습되는 사회가 되어가는 듯하다. 선거 때마다 뭔가 좀 달라지기를 빌어보지만 통 달라지지 않는 판세를 보아도, 어처구니 없는 사람들이 매번 권력자로 당선되는 걸 보아도, 자기 눈 앞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이웃이 당장 맨몸으로 거리로 나앉든 말든 상관없이 외면하는 사람들을 보아도, 그 생각은 굳어진다. 그러니 변화의 희망을 품는 게 오히려 헛된 짓인지도 모르겠다. 다양성과 융통성이 꿈틀거리기엔 너무 견고하게 굳어진 집단 이기심 때문이다. <나만 잘살면 되고, 나만 성공하면 되고, 내 자식만 공부 잘하면 돼>라는.

선거를 하루 앞두고 후보자들의 홍보물을 죄다 정리해 폐지로 구겨 넣으며 또 한번 착찹한 마음이다. 과연 요번엔 어떤 이들이 어떤 선택을 받게될지. 요번에라도 부디 대물림한 구태를 뒤집어 엎는 선택들이 많이 나오면 참 좋겠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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