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 할아버지댁엘 가면 안방 아랫목의 할아버지 자리 옆에 늘 신문더미가 쌓여 있었다.
폐품 수집하는 날 학교에 내기 좋게 접어놓은 것도 아니고 신문 크기 그대로 몇달씩 쌓여있기 일쑤인
신문더미를 식구들이 돌아가며 타박을 해도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내 기억으론 신문을 두 종류나 보셨는데 (물론 둘 다 보수적인 논조의 일간지였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쓰시고도 큼지막한 둥근 돋보기를 손에 들고 앞장부터 맨끝까지 광고 포함 모든 기사를
훑으셨다.
문제는 그렇게 신문을 "방안에" 몇달씩 쌓아두었다가, 너무 많아지면 다락으로 옮겨 놓았다가
1년쯤은 지나야 폐지로 팔거나 폐품으로 내도록 허락을 해주셨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건 바로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신문 스크랩.
할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유용한' 정보를 대단히 신뢰하셨고
삶의 지혜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쓸만하겠다 싶은 기사는 반드시 오려두었다가
'해당 인물'에게 건네며 당장 당신 눈앞에서 읽게 시킨 뒤 실천을 강요하셨다.
예를 들어 환절기에 "감기 예방법"이라는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막내 고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그대로 하라고 명하시거나,
"학계에까지 침투된 고정간첩 비상" 따위의 기사는 학교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에게 건네며 주의를 주시는 것이었다.
처음 우리는 시큰둥하게 오린 기사를 받아들고 읽은 뒤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는 오린 신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나중에 그 기사를 내놓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므로 언제부턴가 나는 아예 할아버지가 오려주신 신문기사를 따로 공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가끔은 오래 된 그 신문 스크랩을 학교 숙제에 유용하게 써먹은 적도 있었다)
일요일마다 온 식구가 할아버지 댁에 가서 놀다가 점심,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건 참 좋았지만
내심 이번엔 할아버지가 누구를 불러다 신문스크랩을 내밀며 "잔소리"를 하실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애정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았던 막내고모는 할아버지가 신문 스크랩을 내밀면
꽥 소리를 지르며 그만 좀 하시라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나나 동생들, 우리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우리 아버지까지도 호랑이 할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신문 스크랩 전달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냥 묵묵히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기사를 읽고나서
"소중히" 간직하는 체 접어 넣곤 했다.
그땐 신문의 논조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강박적인 신문 스크랩과 실천 강요가 참 짜증스럽기만
했고, 나머지 식구들 모두 워낙 그 순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켜본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 전달"은 내가 서른살이 될 때까지도 그저 참고 견뎌야할
절차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툴툴거렸던
할아버지의 자식들 8남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똑같이 신문을 오려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읽어보라고 건네는
것을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셋째 고모는 신문을 3개나 구독하며 주식, 직장생활, 건강, 재테크, 웰빙... 수없이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사촌동생들과 그 배우자에게 나눠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라고
강권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그 정성이 우리집에까지 뻗쳐 "당뇨병 관련 특집 기사" 같은 것이 실리면
가족모임에 가지고 나와 우리 엄마한테 전달하기도 하신다. ^^
그뿐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 사이의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 역시
신문을 보다 가끔은 스리슬쩍 기사를 찢어 보관한다. ㅋㅋ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좌르륵 관련 기사와 정보가 수도없이 뜨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해두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로 내게 남을 것만 같다.
나는 아직 오려낸 신문기사를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정성까지 보이진 않고 있지만
내가 우리 고모들 나이가 되면 어쩌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커피 관련 특집 기사가 생각나
내다 놓으려고 꿍쳐 두었던 신문더미에서 좀 전에 후다닥 그 페이지를 찢어 책꽂이에 올려두며
내 모습이 우스워서 혼자 킥킥 웃었다. (아 참... 우유부단한 모녀는 아직도 신문구독 중단에 대한 결정을 못 내렸다 -_-;)
정리는커녕 그간 오리거나 찢어두기만 한 신문기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지만
막상 버릴까말까 다시 읽어보면 슬쩍 있던 자리에 꽂아두게 된다.
역시 핏줄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못 속이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떠오르는데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익숙한 습관의 반복인지, 정말로 유전인자의 강력한 작용 때문인지
무지한 머리로 헤아릴 길은 없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그리도 싫고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내 안에 아직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숨결로 느껴지다니, 조금씩 철이 들고 있긴 한가 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저 "늙어감"의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
폐품 수집하는 날 학교에 내기 좋게 접어놓은 것도 아니고 신문 크기 그대로 몇달씩 쌓여있기 일쑤인
신문더미를 식구들이 돌아가며 타박을 해도 할아버지는 꿈쩍도 하지 않으셨다.
내 기억으론 신문을 두 종류나 보셨는데 (물론 둘 다 보수적인 논조의 일간지였다)
할아버지는 안경을 쓰시고도 큼지막한 둥근 돋보기를 손에 들고 앞장부터 맨끝까지 광고 포함 모든 기사를
훑으셨다.
문제는 그렇게 신문을 "방안에" 몇달씩 쌓아두었다가, 너무 많아지면 다락으로 옮겨 놓았다가
1년쯤은 지나야 폐지로 팔거나 폐품으로 내도록 허락을 해주셨다는 것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을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건 바로 할아버지의 열성적인 신문 스크랩.
할아버지는 신문에 실린 '유용한' 정보를 대단히 신뢰하셨고
삶의 지혜라고 여기셨기 때문에 자식들이나 손자들에게 쓸만하겠다 싶은 기사는 반드시 오려두었다가
'해당 인물'에게 건네며 당장 당신 눈앞에서 읽게 시킨 뒤 실천을 강요하셨다.
예를 들어 환절기에 "감기 예방법"이라는 기사가 실리면 그걸 오려
늘 감기를 달고 사는 나와 막내 고모를 불러다 앉혀놓고 그대로 하라고 명하시거나,
"학계에까지 침투된 고정간첩 비상" 따위의 기사는 학교에 계시던 우리 아버지에게 건네며 주의를 주시는 것이었다.
처음 우리는 시큰둥하게 오린 기사를 받아들고 읽은 뒤 건성으로 "네" 대답하고는 오린 신문을 잃어버리기
일쑤였지만 나중에 그 기사를 내놓으라는 불호령이 떨어지기도 했으므로 언제부턴가 나는 아예 할아버지가 오려주신 신문기사를 따로 공책 사이에 끼워두었다. (가끔은 오래 된 그 신문 스크랩을 학교 숙제에 유용하게 써먹은 적도 있었다)
일요일마다 온 식구가 할아버지 댁에 가서 놀다가 점심, 저녁을 먹고 돌아오는 건 참 좋았지만
내심 이번엔 할아버지가 누구를 불러다 신문스크랩을 내밀며 "잔소리"를 하실까 노심초사하는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할아버지의 애정과 신뢰를 가장 많이 받았던 막내고모는 할아버지가 신문 스크랩을 내밀면
꽥 소리를 지르며 그만 좀 하시라고 신경질을 부리기도 했지만,
나나 동생들, 우리 엄마, 작은엄마, 그리고 우리 아버지까지도 호랑이 할아버지의 호통이 무서워
"신문 스크랩 전달 대상"으로 지목되면 그냥 묵묵히 할아버지가 시키는 대로 기사를 읽고나서
"소중히" 간직하는 체 접어 넣곤 했다.
그땐 신문의 논조와 상관없이 할아버지의 강박적인 신문 스크랩과 실천 강요가 참 짜증스럽기만
했고, 나머지 식구들 모두 워낙 그 순간을 싫어했기 때문에
어려서부터 지켜본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 전달"은 내가 서른살이 될 때까지도 그저 참고 견뎌야할
절차라고 여겼던 듯하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할아버지의 신문 스크랩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툴툴거렸던
할아버지의 자식들 8남매 가운데 절반 이상이 똑같이 신문을 오려두었다가 자식들에게 읽어보라고 건네는
것을 "생활화"했다는 점이다.
특히 셋째 고모는 신문을 3개나 구독하며 주식, 직장생활, 건강, 재테크, 웰빙... 수없이 다양한 주제의
기사들을 스크랩해 두었다가 사촌동생들과 그 배우자에게 나눠주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라고
강권하기에 이르렀다. 가끔은 그 정성이 우리집에까지 뻗쳐 "당뇨병 관련 특집 기사" 같은 것이 실리면
가족모임에 가지고 나와 우리 엄마한테 전달하기도 하신다. ^^
그뿐인가.
아날로그와 디지털 세상 사이의 낀 세대라고 할 수 있는 나 역시
신문을 보다 가끔은 스리슬쩍 기사를 찢어 보관한다. ㅋㅋ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좌르륵 관련 기사와 정보가 수도없이 뜨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어쩐지 가위로 오려 "스크랩"을 해두어야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정보로 내게 남을 것만 같다.
나는 아직 오려낸 신문기사를 누구에겐가 전달하는 정성까지 보이진 않고 있지만
내가 우리 고모들 나이가 되면 어쩌려는지 전혀 알 수 없다. ^^
얼마 전에 신문에서 본 커피 관련 특집 기사가 생각나
내다 놓으려고 꿍쳐 두었던 신문더미에서 좀 전에 후다닥 그 페이지를 찢어 책꽂이에 올려두며
내 모습이 우스워서 혼자 킥킥 웃었다. (아 참... 우유부단한 모녀는 아직도 신문구독 중단에 대한 결정을 못 내렸다 -_-;)
정리는커녕 그간 오리거나 찢어두기만 한 신문기사는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을 뿐이지만
막상 버릴까말까 다시 읽어보면 슬쩍 있던 자리에 꽂아두게 된다.
역시 핏줄에 흐르는 유전인자는 못 속이는 것인가 하는 생각까지 떠오르는데
어려서부터 보고 자란 익숙한 습관의 반복인지, 정말로 유전인자의 강력한 작용 때문인지
무지한 머리로 헤아릴 길은 없지만 아무튼 이런 것도 "집안 내력"이 아닐까 싶다.
예전엔 그리도 싫고 짜증스러웠던 일들이
내 안에 아직 살아계신 할아버지의 숨결로 느껴지다니, 조금씩 철이 들고 있긴 한가 보다.
어쩌면 이런 태도가 그저 "늙어감"의 증거일 수도 있겠지만
그렇더라도 기쁘게 받아들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