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삶꾸러미 2008. 2. 29. 17:43

처음엔 들판을 뛰어다니다  들어온 아이들한테서 나는 비릿한 바람냄새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바람을 몰고 들어온 아이들의 비릿한 냄새는 싱그러운 반면 그 냄새는 어딘가 역겹고 매캐했다.
지하철 문이 닫히고 휘릭 공기가 한바퀴 소용돌이 치자 냄새는 더욱 강해졌다.
꽤 멀리까지 지하철을 타느라 일부러 가져온 책에 코를 박고 있던 나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
냄새의 정체가 무엇일까 탐색에 나섰다.
멀리 고개를 돌릴 것도 없었다.
책에서 고개를 들자마자 내 오른쪽에 앉은 남자의 무릎에 덮인 빤질빤질한 외투자락이 보였다.
조심스레 곁눈질을 하니 머리 위로 푹 뒤집어 쓴 후드 앞쪽도 때가 끼어 빤질빤질했고
매캐하고 짠내처럼 농도 짙은 체취는 옆에 앉은 남자가 풍기는 게 분명했다.

순간적으로 몸이 움츠러들면서 여러가지 생각이 스쳤다.
남자의 오른쪽 자리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반대편 좌석으로 가서 선 남자처럼
나도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해야 하나?
나도 벌떡 일어나 다른 곳으로 가면 아마도 노숙자인듯한 이 남자는 민망해 하지 않을까?
이 남자는 정말로 노숙자일까?
아니면 그냥 오래 빨지 않은 옷을 입고 오래 씻지 않은 게으름뱅이에 불과할까?
5미터 근방에도 접근할 수 없을만큼 악취가 심하고 때가 더깨로 앉은 노숙인을 본 적도 있지만
이 남자는 분명 그 정도는 아니었고 손도 거무스름하긴 해도 손톱밑에 새까맣게 때가 낀 건 아니었다.
남자의 오른쪽 자리가 비었다 채워졌다 사람들이 다시 용수철처럼 일어나는 일이 반복되면서
남자는 초조한듯 고개를 수그린 채 마주잡은 양손의 검지를 계속 서로 돌리고 있었다.

결국 나는 일어나지 않기로 마음을 정하고
열심히 책을 읽어 약간 거슬리는 냄새를 잊으려고 했다.
내가 내릴 정류장은 꽤나 많이 남아 있었고, 다른 때는 불쾌하게 느껴졌던 딱딱한 은색 의자의 따뜻한 온기가 아쉽기도 했다.
문득 남자 역시 추위에 언 몸을 지하철 의자의 온기로 녹이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가 어디까지 갈 것인지 궁금해진 나는 다시 책에 몰입하지 못했다.
만일 남자가 종착역까지 간다면 그건 따뜻한 온기를 누리기 위함일 확률이 높을 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남부터미널 역에서 문이 열린 뒤 후다닥 뛰어내렸고
그 남자가 앉았던 내 옆자리엔 한동안 아무도 앉지 않았으며
그가 의자에 남기고 간 농도 짙은 체취는 몇 정거장 뒤에 내가 내릴 때까지도 객차 안을 떠돌았다.

그 남자가 정말로 노숙자였는지, 씻는 걸 싫어하는 게으름뱅이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내가 약간의 불쾌감을 참으며 그냥 앉아 있었던 이유도 잘은 모르겠다.
괜한 허영심이었을 수도 있겠고, 그냥 귀찮았을 수도 있고, 섣불리 오해하기 싫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포장마차 천막같은 질감의 외투를 입었던 그 남자 옆에서 나 역시 용수철처럼 튕겨 일어나지 않은 게
스스로도 퍽 의아했다.
그나마 바깥 날씨가 그리 춥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그 남자가 노숙자든 아니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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