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변에서 이 영화 좋다는 말이 꽤 들려왔다.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활동을 하시는 은사님 한분은 자진해서 영화 상영 후 토론에 패널로 나가시기도 했대고, 어느 이웃은 '내 인생 최고의 영화'라고 손꼽기도 했다. 내가 클래식에 무지한 게 보러 가기 전부터 염려스러웠고, 영화 속 연주를 들으며 나도 귀가 섬세해 악기의 소리를 다 구분해가며 감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쉬웠지만, 그런 우려나 안타까움과 별개로 영화는 좋.았.다.
까닭을 알 수 없이 여러 장면에서 와락 눈물이 났고 불꺼진 객석에서 수많은 자막이 올라가는 걸 보며 앉아있는 동안에도 눈물이 솟았다. 그 이유를 알기 위해서라도 한번은 더 봐야하나 어쩌나, 또 보면 진이 더 빠지는 건 아닌가 지금도 생각이 많고 정리도 잘 되질 않는다. 일단은 그런 마음이라고 실토하려고.
영화 첫장면에서 피터가 읽은 T. S. 엘리엇의 Four Quartets 도입부.
Time present and time past Are both perhaps present in time future And time future contained in time past. If all time is eternally present All time is unredeemable.
(하략. 다 퍼오렸더니 시가 엄청 길다)
그리고 아이 목소리로 읽어내려가 더 서글펐던 Ogden Nash의 시.
Old Men
People expect old men to die, They do not really mourn old men. Old men are different. People look At them with eyes that wonder when... People watch with unshocked eyes; But the old men know when an old man dies.
<비포 미드나잇>을 보기 전에 DVD로 사둔 시리즈 전편을 복습하고 가야지 마음 먹었었다. 대다수의 관객들이 그랬겠지만, 이 시리즈에 대한 나의 감정은 정말로 오래 만나지는 못했지만 문득 궁금해하고 간혹 떠올리는 친구와도 유사했다. 곁에서 지켜보며 함께 나이들어 가는 묘한 기분을 주는 이런 영화 속 인물들이 또 있을라고.
암튼 내가 기대했던 대로 제시는 <비포 선셋> 마지막 장면에서 결국 비행기를 놓쳤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뻐서 이미 <비포 미드나잇>에 후한 점수를 줄 마음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영화 보는 내내 킬킬거리며, 어쩔 수 없이 현실적인 중년 커플의 대화에 공감은 하면서도 영화관을 나서는 마음 한 켠이 씁쓸하고 서글펐다. 적당히 낭만적이고 좀 더 아련하게 그려냈을 수도 있는데 너무 현실적이기만 한 거 아니냐고! ㅋㅋ
전편들처럼 비엔나와 파리의 아름다운 장소와 풍경이 종합선물 세트처럼 펼쳐지길 기대했는데 그리스라는 배경이 그리 도드라지지 않았던 점도 내겐 불만이었던 것 같다. 작은 성당과 그리로 가는 길과 바닷가 카페의 노을 장면은 좋았지만... 그 역시 뭔가 부족한 느낌. 딸 쌍둥이을 키우며 여름휴가 온 커플의 대화에서 뭘 얼마나 더 바라겠느냐마는, 그래도 전직 환경운동가인 여자와 소설가 남편 사이에선 여전히 전편처럼 '주옥' 같은 대화들이 간간이 오갈 것이라 기대했다가 속사포처럼 오가는 건 그냥 상대에 대한 빈정거림과 실망과 구차한 현실에 대한 자각뿐이란 게 아쉬웠다. 현실이 그렇지 뭐, 하면서도 둘에 대한 환상과 낭만은 버리기 싫었던 모양이다. 전편에서 셀린이라는 인물이 참 매력적이긴 해도, 같이 살긴 심히 골치아픈 인물일 거라는 예상은 이미 했었다. 이 더러운 세상에서 살아가며 이상주의자이자 활동가이긴 참 어려운 법인데, 거기다 작가의 아내이자 쌍둥이의 엄마라고? 분명 접어주고 가야하는 조건이 한둘이 아님에도, 아줌마 셀린과 추레한 제시의 모습이 내 눈에 퍽이나 실망스러웠던 건 순전히 로맨스에 대한 내 욕심일 수도 있다. 그래도 섭섭한 건 섭섭한 거지... ㅎㅎ
18년 전 <비포 선라이즈>를 보고나와선 혼자 속으로 장담했었다. 셀린과 제시는 분명 6개월 뒤에 다시 만나지 못할 거라고. 차라리 다시 안 만나고 덮어둔 채 그리워만 하는 만남도 있는 법이다, 뭐 그랬던 것 같다. 피천득의 아사코도 막 대입시키면서. 9년 전 <비포 선셋>을 보며 내 짐작이 맞았구나 괜스레 흐뭇했고, 파리 재회 후 둘의 마지막에 대해선 절대적으로 해피엔딩을 상상했다. 제시가 유부남이든 아니든 둘은 다시 만나야한다고. 반드시 비행기는 놓치고 말 거라고. <비포 미드나잇>이 정말로 이 시리즈의 마지막일지, 뭔가 또 다른 게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영화가 끝난 이후의 이야기를 내 나름대로 또 상상해보자면, 둘이 그렇게 지지고 볶고 싸워대면서 계속해서 나란히 잘 늙어갈 것 같다. 약간 신경질적인 셀린의 성격이야 평생 안 변할테고, 제시의 가정을 깨뜨렸다는 자격지심도 아마 평생 갈 테고, 좋은 엄마가 되려는 노력은 늙을 때까지 변함없을 거다. 그러면서 간간이 쌈닭처럼 제시한테 극단적인 언사를 일삼아 싸움을 걸겠지만, 제시가 또 특유의 말재간과 유머로 풀어주겠지...
다만 제시가 번드르르한 말만 앞세우진 않길 바란다. 휴가지에서의 짧은 몇몇 장면만으로도 마초 가장의 낌새를 눈치챘다면 내가 좀 오버하는 걸까? 초대받아 떠난 여행의 휴가지에서도 셀린은 부엌에서 요리하던데, 제시는 남자들과 밖에서 수다나 떨고 말이지! +_+ 또한 제시의 지적처럼 나도 셀린이 아이들에게만 너무 헌신하지 않으면 좋겠고, 작곡과 기타와 노래를 꼭 다시 즐기면 좋겠고, 둘이 젊어서 그랬듯 대화다운 대화도 좀 나누고 살면 좋겠다. 다행히도 쌍둥이들이 엄마 손탈 나이는 이제 다 지나 학교가게 생겼더라. ^^;; 제시는 아들 헨리의 성장을 바로 곁에서 지켜보지 못하고 방학때만 만나는 걸 안타까워하지만, 영화 초반부에 얼핏 그려진 헨리의 모습과 언행으로는 대단히 잘 컸으니 걱정 안해도 될 듯. 열네 살이면 딱 나의 큰조카 나이인데, 이혼한 아버지의 애인(부인?)과 이복동생들 따라 그리스에서 여름방학을 보낸 뒤 홀로 미국으로 돌아가며 아빠에게 최고의 여름 휴가였다고 말해주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닐 거다. ㅋㅋㅋ 영화 이후 주인공들의 삶에 대해서 또 이렇게 시시콜콜 내가 염려하고 예상한다는 것도 좀 웃기지만, 이런 마음이 드는 걸 어쩌겠나. 심한 권태기와 갈등을 겪고 있는 친구 부부의 하소연을 짜증과 한숨 속에 듣다가, 불행하면 헤어져! 라고 조언하기엔 둘의 사랑이 여전히 꽤나 깊음을 깨닫고 둘이 잘 헤쳐나가겠구나 싶어 그냥 입을 다무는 느낌이랄까...
째뜬, <비포 미드나잇>을 보고 몹시도 찝찝하고 서운한 마음에 오래도록 후기를 못 쓰다가, 뒷북으로 <비포 선라이즈>와 <비포 선셋>을 다시 보고나서야 뭔가 개운해졌다. <비포 미드나잇>을 만들어줘서 고맙고, 영화를 본 것도 좋았지만 기분 좋은 여운은 <비포 선셋>이 역시 최고였던 걸로.
비포 선라이즈
아 참, <비포 미드나잇>에서 셀린이 입고 나오는 저 끈 원피스는 <비포 선라이즈>에서 스물 세살 셀린이 입은 옷과 별로 다르지 않다는 걸 발견했다. 처음 만났을 땐 안에 반팔 티셔츠 받쳐입고 있었는데, 같이 밤을 보내고 난 새벽엔 끈 원피스만 입고 다닌다.. ㅋ
앞 시리즈 두 편에선 두 주인공이 걸어다니는 장면이 많아 특히 좋았는데, 마음에 꼭 드는 사진을 잘 못찾겠다. 이상하게도 에단 호크와 줄리 델피 둘 다 제일 어렸을 때가 분명 리즈 시절일텐데, 나는 <비포 선셋>의 모습이 둘 다 제일 좋다. 서른 즈음에서 통 안늙으면 좋겠고, 정신적 성장도 멈춰버린 나의 심정이 반영된 때문일까? ㅋㅋㅋ
그런 의미에서 셀린의 기타연주 장면 퍼왔다. 줄리 델피가 직접 만든 노래라지 아마. 이렇게 예쁘고 재주 많은 셀린이 9년만에 확 늙어버렸다는 게 정말... ㅠ.ㅠ
3월 중엔 어쩔 수 없이 슬슬 일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월엔 그야말로 참 열심히 놀고먹었다. 머릿속도 좀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기대만큼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전시는 세 개나 봤잖니. ^^; 처음엔 다 따로따로 포스팅할 작정이었으나 벌써 다 기억이 가물거려 대강 기록만 해둘 요량이다. 안 그러면 몇달 지난 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릴 지도 모르니까.
1. 전시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4월 21일까지 전시중이다. 전시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흥미도 없었으나, 덕수궁 갔던 날 순전히 '프라하'에 끌려서 들어갔었다.
1905년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던 체코의 근현대 미술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덕수궁미술관을 종종 가면서도 항상 내가 까먹는 사실이 있다. 덕수궁 미술관은 현대미술관의 덕수궁 분점이라 언제든 근현대 예술작품만 전시한다는 점! 그런데 나는 특히 현대미술의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를 별로 안좋아한다는 점! ㅋㅋㅋ
단순한 나의 시각에 '예뻐' 보이는 그림들도 더러 있었지만 나로선 도무지 이해하기도 어렵고 제목과도 매치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어서 그런 그림들은 설렁설렁 보는둥마는둥 지나쳐야 했다.
운명론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건만, 가끔 살다보면 기막힌 우연의 일치랄까 무언가 나의 삶이 예정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20세기 초 일어났던 '미래파'니 '미래주의 선언'이니 '마리네티'니 하는 이야기에 골머리를 싸매고 좀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떡하니 어느 전시실 벽에 적힌 작품설명에서 같은 이야기를 맞닥뜨렸다. +_+ 신기하기도 하여라.
체코 역사와 화가들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게 없어서 팸플릿을 열심히 읽어보아도 여전히 무식이 통통 튕기는 느낌이었지만, 체코와 프라하에 대한 선망과 허영심으로 택한 전시에서 더 무엇을 바라리. 같은 시기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을 작년에 이어 전시실 한 군데에서 계속 전시하고 있었기에 비교해보는 묘미도 있었다. 특히 저 그림을 그린 쿠프카의 자화상은 구본웅이 드린 이상 초상화랑 분위기가 몹시 흡사했다. 굵은 유화붓 터치며 파이프 물고 있는 것까지도.
공연히 마음에 들었던 그림 하나 더...
[1922년의 레트나] 블라스타 보스트르제발로바피쉐르바, 1926년
뒷짐진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정겹다. 샤갈의 템페라 벽화 느낌도 나고.. +_+
<옛사람의 삶과 풍류> 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
단원 김홍도 [운우도첩] 가운데...
갤러리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 2월 24일까지 했던 전시라서 끝나기 전에 얼른 보러가야했다.
단원, 혜원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조선풍속화도 풍속화려니와 '화끈한' 19금 춘화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지 않은가. ㅎㅎㅎ
생각만큼 작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변변한 팸플릿도 없는 게 내심 불만이었지만, 갤러리 2층에 따로 모아둔 춘화는 노골적인 정도가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 좀 놀라웠다. 단원과 혜원의 춘화첩이 일반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라는 듯한데, 얼굴 뜨끈해질 만큼 노골적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성까지 잃지 않다니 역시 대가는 다르단 느낌.
입장료 5천원에 함께 가 볼 수 있었던 두가헌 갤러리에선 구한말 외국인들에게 절찬리에 공급되었다는 김준근의 풍속화들이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단원, 혜원의 선과 섬세한 인체묘사에 높아진 눈으로 접하니 그림의 수준이 그리 드높다 할 수 없었지만 현란한 색채며, 당시 한글 표기법, 재미난 세시풍속이 흥미로웠다.
<한옥이 돌아왔다>에도 잠시 소개된 두가헌 한옥을 구경할 기회도 반가웠다. 안에 들어가 차 한잔 하고팠으나 시간에 쫓겨 그냥 나온 것이 한이라면 한.
그래도 두가헌 마당 한 귀퉁이 의자에서 다리는 좀 쉬다 나왔다. 저렇게 나무를 심고도 마당에 나무데크를 깔면 흙먼지 풀풀나는 걸 방지할 수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한옥의 목재와 유리는 서로 참 안어울리는 재료라던데, 유리에 습기가 맺혀 나무 썪기 딱 좋다던데, 몇년째 또 이렇게 건재하고 있는 걸 보면 건축전문가들이 다 방법을 마련해놓았나보다. 쓸데없는 염려 말고 한옥에 살고프면 그저 땅과 돈만 준비하면 되겠다. ㅠ.ㅠ
<팀 버튼>전
겨울방학 내내 사람들로 바글거린다는 얘기를 듣고 최대한 일정을 늦추어 2월말에 갔는데도 인파가 대단했다.
팀 버튼 영화개봉하면 언제 시작했다 끝났는지도 알 수 없게 슬그머니 내려가는데, 왜 이런 전시는 이토록 인기가 높은걸까? ㅋㅋ
4월 14일까지 계속 전시 중이니, 요새도 사람이 그리 많으려나 궁금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입장료는 12000원.
어린애들 데리고 온 엄마들이 특히 많아보였다. 아오... 애들은 막 싫고 무서워하는데 엄마들은 참신하고 재미나지 않느냐며 막 들이대고... 참신한 발상에 목매는 우리나라 부모들이 가엾을 지경이었다. 관람객이 많으면 난 전시를 보기도 전에 지치는 느낌이다. 이날도 신기해서 좋아라 구경을 다니긴 했지만 운동화를 신고도 왜 그리 허리 다리가 아픈지... 나중엔 머리도 어질어질.
그치만 팀 버튼은 참... 대단한 사람이 틀림없다. 선 몇 개로 어떻게 그런 그림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지! 헬레나 본 햄 카터를 배우로서도 무척 좋아하지만, 팀 버튼 영화에 또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물론 조니 뎁은 예외 ^^;)! 심지어 둘이 부부라니... 헐...
전시장 입구에 세워놓은 대형 조형물도 재미났지만 창문에 유령신부 캐릭터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꾸며놓은 거 기발하다~ 하하하.
2. 공연/영화
<오페라의 유령>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황홀한 가면무도회 장면 ^^;;
<오페라의 유령> 탄생 25주년 월드투어 내한공연이 잡혔다더니만, 예매도 전쟁이었다. 이런 공연은 그저 티켓 오픈일에 경건히 기다렸다가 광클릭을 해야지, 안 그랬다간 좋은자리에서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하는 지경이 되었다. 허 그것 참... 암튼 1월초에 알아보니 VIP석과 R석은 3월까지 전공연 모두 한두 자리만 남아있을 정도. 9만원짜리 S석도 감지덕지로 여기며 2월말 날짜로 예매를 해놓고 설레며 기다렸다.
이번 공연에선 샹들리에가 그야말로 '뚝' 떨어져줄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샹들리에는 그리 극적으로 떨어져주지 않았지만 (무대장치 기술도 죄다 가져올텐데 왜 한국 공연에선 매번 기함할 정도로 샹들리에가 뚝 떨어지지 못하고 살살 줄을 타는지 그게 정말 궁금하다!) 공연은 역시나 황홀했다. 마음 같아선 끝까지 남아 앉아 있다가 팬텀 역할 배우한테 사인도 받고 싶었는데... ㅎㅎㅎ 파트너가 귀가를 서둘러 포기했다. 삼성 블루스퀘어 공연장은 처음 가보았으나, 2층에 앉아서 그런지 음향이 그닥 흡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동받았으면 된거지만...
25주년 기념투어이기 때문일까. 공연장 밖에 의상과 소품들이 유리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어 눈요기하기에도 좋았다. 마치 뮤지컬 초반부 경매장을 살짝 엿보는 느낌도 들고... 간만에 귀호강 눈호강 잘 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베를린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로 상영해주는 데가 점점 드물어져 어렵사리 먼데까지 가서 보았는데, 평일 오전부터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모르고 예매 안하고 갔다가 맨앞줄에서 목을 꺽으며 봐야했다. ^^;
그런데 일신의 불편함을 잊을 정도로 홀딱 빠져들었으니...
보고나자마자는 무신론자로서 새삼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많았으나 벌써 다 까먹고말았다. 군데군데 영상이 정말 아름다워서 이안 감독이 정말 대단한사람이구나 싶었던 것과 책으로도 읽어보고 싶었다는 충동 정도만 떠오를 뿐이다.
<베를린>은 별 기대없이, 나 류승완 감독 영화 별로 안좋아하는데.. 궁시렁거리며 들어갔다가 뜻밖에 재미있게 보았다. 연기야 역시나 하정우가 갑이었지만, 한석규의 초라한 모습과 생활연기도 좋았다. 액션영화도 너무 힘들어가지 않게(여전히 내겐 좀 과하고 길다 싶은 액션 장면 있긴 했다만;;) 폼나게 만들 수 있구나 싶었다.
3. 2월에 읽은책
우리궁궐 이야기, 홍순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그레이스 1, 2, 마거릿 애트우드
고양이눈 1,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는 잠을 미뤄가며 단숨에 미친듯이 읽었고 <고양이눈>은 좀 괴로워하느라 천천히 읽었다. 올해는 마거릿 애트우드를 좀더 찾아 읽기로 결심했고, 초상 시리즈(?)로 <여인의 초상>도 읽고 싶어졌다. 역시 읽는 맛은 소설이야, 라며 읽다 만 과학책들은 올스톱. ㅎㅎㅎ
4. 식탐의 흔적
밖에 나가서 조미료를 많이 넣어 만든 음식을 먹고 들어오면 어김없이 탈수현상에 시달린다. 물을 두 주전자쯤 마셔주어야 갈증이 가시는 듯한... 그래도 내가 안 만든 요리는 죄다 맛있다, 싶은 심정으로 나가먹고 살긴 한다. 그러다 담백한 음식점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동탄 <담숙>
예약제로만 운영하는 한식당이라며 친구가 데려가주었다.
조미료를 쓰지 않아 집에서 만든 것처럼 담백한 음식들은 종종 '맛없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바깥 음식이야 맵고 간간하고 자극적이어야만 맛집으로 소문나고 사람들의 발길을 끌지 않나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소신있게 주인장 부부가 개발하고 만든 음식들로 정갈하게 한정식을 내오는 집이다. 아쉽게도 내가 정신없이 차에 전화기를 두고 내린 바람에, 사진은 친구한테 전달받은 이거 딱 한장이다. +_+
죽이랑 블루베리 소스를 뿌린 샐러드, 낚지볶음, 두부버섯샐러드 등등... 기억도 잘 나질 않는 음식들이 죄다 맛있었다. 사진 속 음식은 표고 탕수와 섭산적(아마도;;).
쫄깃한 표고탕수가 엄청 맛있어서, 상대적으로 파채 싸먹는 고기요리는 그저그렇게 느껴졌다. 담에 또 가게 되면 코스별로 죄다 사진 찍어다가 집에서 시도해봐야(ㅠ.ㅠ 이 투철한 밥순이 정신;;)겠다.
광화문 <어반가든>
먹기에 바빠 사진은 없다. 작년 겨울 모임때 갔다가 예약 안한 사람은 2시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쫓겨나오며 언제고 한번 먹어보리 결심했었는데, 팀버튼 전시회 본 날 문득 떠올라 찾아갔다. 덕수궁 정동길에서 거의 프란치스코 수도회까지 올라가 왼편 골목 안에 자리잡고 있다. 여름엔 온갖 화초로 유명하다는 얘기 들었는데, 이날은 꽃이며 화분 쳐다볼 여유도 없었던 거 같다. 런치세트가 17000원 정도라서, 싸지도 않은데 맛없으면 어쩌나 일행들 마음에 안들면 어쩌나 바짝 쫄았었다.
샐러드의 신선도나 수프는 마음에 들었는데, 파스타 맛은 딱히 엄청 맛있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또 요즘 집에서 파스타 요리에 심취하고 있어놔서;;; ㅋㅋㅋ
마지막 커피까지 주는 건 좋았는데, 종이컵에 주는 건 마이너스, 커피 맛도 그저그랬다. 커피까지 머그잔이나 찻잔에 주고 커피맛도 훌륭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쳇. 다음엔 정동극장 안에 있는 파스타집엘 가보고 비교해보리라
올림픽수제비 굴국밥 따라하기
이제는 나도 굴국밥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게 되었다! 하핫.
지난번 국물 낼 때 멸치까지 넣었더니 오히려 과잉이었던 듯.
무와 다시마로만 깔끔하게 낸 국물에 소금간을 한 뒤
파, 마늘, 생굴, 매운고추, 부추를 넣고 포르르 한소끔만 끓여 밥에 부어 먹으면 된다.
몇번 해먹어보니, 큼지막한 양식굴보다는 확실히 자잘한 자연산 굴로 끓였을 때 바다향이 더 싱그럽게 난다.
뚝배기에 담아내놓았을 땐, 정말로 올림픽수제비에서 맛본 거랑 비주얼까지 똑같았다. ^^;
노로바이러스의 기승으로 생굴 먹기는 좀 걱정스러우니 날 더 더워지기 전에 몇번 더 해먹어야지. 냠냠냠.
보름 나물
올해는 오곡밥과 나물을 볶아야 하는 대보름 전날이 하필 사촌 동생 결혼식이었다.
강남에서 무려 2시간도 넘게 걸려 운전하고 집에 오느라 녹초가 된 몸을 다시 꾸역꾸역 움직이며, 좀 서럽기도 했다.
안먹고 살면 될텐데, 왜 이렇게 식탐에 집착하느냐고!! ㅠ.ㅠ
하지만 이번엔 특히나 엄마가 애호박과 가지를 손수 말려놓으셨던 걸 물에 불려놓고 나갔기때문에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나마 지쳐서 홀수로 못만들겠으니, 네 가지 나물로 끝내자고 왕비마마와 합의를 보았다.
오곡밥이 아니라 10곡밥은 될 듯한 찰밥에다 저 나물 반찬으로 김쌈을 해먹는데, 어우... 맛있어서 또 짜증이 났다. (아니 왜?) 사먹는 게 더 맛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 하나는 떡집에서 오곡밥이랑 나물까지 다 사왔어도 맛있게만 먹었다던데 말이다. 으휴.
만수무강 약식
설날에 오지랍넓게도 약식을 또 만들었었다.
다른 먹을거리가 많아 그날 약식이 절반도 더 남았길래 작은댁이랑 동생네, 사촌동생들까지 죄다 싸보냈더니 왕비마마가 퍽이나 섭섭해하셨다. 당신은 약식을 딱 한입밖에 못 드셨다나 뭐라나. 나 원 참...
(그러나 나중에 올케들의 증언에 따르면 분명 한입만이 아니었다 ㅋㅋㅋ)
어쨌거나 생신도 가까워오겠다, 그렇다면 원없이 약식을 한판 다 드시게 해드리겠다며 호기롭게 약식찌기에 돌입했다. 당뇨환자용으로 설탕과 찹쌀은 양을 좀 줄이고 견과류는 더욱 풍성하게 잔뜩 넣어서...
그리하여 탄생한 만수무강 약식이다. 정말로 난 한두 조각이나 먹었나, 약식 한솥을 사흘 안에 홀로 다 드시는 바람에 무서워서 당분간은 혈당 체크도 하지 못했다. -_-;
그러고 보니 정말 2월 한달은 죽어라 먹는 것에만 탐닉했던 것 같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가 우리 두 모녀의 좌우명. ㅎㅎㅎ
보너스로 요즘 점심 메뉴로 종종 등장하는 입때표 해산물 파스타의 위용을 공개한다. 두둥~ ㅋㅋㅋ
심지어 파스타 접시도 새로 장만했다는.... ;-p 매번 몸 생각하며 건더기를 하도 많이 넣어 담고 나면 면발이 잘 안보인다. ㅋㅋ 내 그릇에 대충 담느라 가장자리에 척 걸쳐진 면발을 숨기려는 시도로 찍었으나 실패. 다 보인다!
2006년부터 블로그를 시작한 뒤로 처음 몇해는 정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지만 이젠 한해를 정리하는 포스팅을 하지 않으면 깔끔하게 일년을 마무리하지 못한 것 같은 미진한 느낌이 들 지경이다. 우선은 여기 적어두고 돌아보며 홀로 흐뭇해하려는 목적이 크다 해도, 이웃들의 베스트 목록과 비교해보는 쏠쏠한 묘미 또한 포기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연말부터 어서 해야지 해야지 마음먹고 시작은 했으되 새해 들어 열흘이 넘도록 또 차일피일 마무리를 미루고만 있는 건 곤란하다. 덜 망설이고 덜 미루겠다는 새해결심을 했으면 한달은 좀 지켜야하지 않겠니,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마저도 하지 않으면 나의 2012년은 너무도 성취한 것 없이 허송세월만 한 해로 남을 것 같아 두렵다.
자주 만나지 못해도 내 소식이 궁금하면 인터넷 서점에 내 이름을 쳐 근황을 확인한다는 이들이 더러 있는데 작년엔 내내 거의 비슷한 이야기를 들었다. 요새 일 안해요? 새로 나온 책이 없네... 그들의 물음에 대답하기가 나도 부끄러웠다. 2012년엔 정말로 내 이름을 옮긴이로 달고 나온 책이 딱 '한권' 출간되었다. 출판불황을 탓하기엔 나의 나태함이 제공한 이유가 너무도 커서 얼굴이 뜨거울 지경이다. 1년에 번역 한권 하고도 거뜬히 먹고 살만한 수입이 되는 처지도 아니면서 이 무슨 행태인지! -_-;
어쨌거나 2012년 한해 내내 이런 게 최고로 좋았다는 시답잖은 목록이라도 뽑아 놓고 지난 삶의 의미를 찾아볼 요량이다.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은 독후감도 올렸었겠다, 확실히 뽑아놓고 나머지 두권을 놓고 오래도록 고민했다. 읽을 땐 베스트 후보로 꼽았던 책들이 있었는데 막상 지나고 보니 그 느낌이 다 너무도 흐려지는 바람에... ㅠ.ㅠ
결국 공책에 인용문을 가장 많이 베껴놓은 책들 가운데 글귀들을 새삼 다시 읽어보며 어렵사리 고른 것이 <희망>과 <지구를 부탁해>다. 영화 <레미제라블> 때문에 요즘 <레미제라블> 완역본이 출판사별로 불티나게 팔리고 있다는데, <희망>에 들어있는 어느 에세이에도 선생이 감옥에서 다시 <레미제라블>을 읽으며 빅토르 위고에 대한 감사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래서 나도 따라 읽고 싶어졌었는데, 영화까지 보고나니...
5권이라니 겁이 좀 나긴 하지만 지난 가을부터 생겨난 소설 기피증을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도전해볼까 하는 중이다.
<지구를 부탁해>는 아무래도 연말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생생한 덕을 많이 봤고, 막연한 과학 공부에 대한 선망까지 더해져 뽑힌 듯. ㅋㅋ
베스트 영화도 마지막 한 편 때문에 몹시도 어려웠다. <레미제라블>을 연말에 봤어야 고민없이 골랐을 텐데! 으휴...
<미드나잇 인 파리>는 시종일관 깔깔거리게 재미를 주면서도 강요하지 않는 감동이랄까 뭔가 찡하고 짠한 느낌까지 종합선물세트 같은 영화였다.
<말하는 건축가>는 정기용 건축가의 인간적인 매력도 크게 작용했지만 다큐멘터리 영화 자체의 아름다움과 완성도가 뛰어났기 때문에 빛을 발했다고 생각한다. 그런 게 연출의 힘이겠지?
<광해>는 재미있게 봤으면서도 대종상을 부문별로 죄다 휩쓸 만큼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처럼 베스트로 뽑기가 살짝 망설여졌다. 이유가 뭘까나... 그간 이병헌을 괜히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 피하는 편이었는데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죽 안보다가 <좋은놈 나쁜놈 이상한놈>이 마지막이었던 듯;;) 이 영화 보고 앞으론 피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연기가 정말.. 물이 올랐다고밖엔;;
광해 대신 <파수꾼>을 넣을까도 생각했지만 연초에 뒷북으로 본 영화라 보고나서의 충격적 느낌이 많이 사라진 탓에 막판에 밀렸다. 2012년엔 이래저래 개봉작도, 아닌 것도 꽤 많이 봤다. <두개의 문>을 보고나서 포스팅을 어떻게 해야하나 고민하다보니 계속 밀려 이후론 영화 본 기록도 제대로 안남겼다. <다크나이트 라이즈>랑 <007 스카이폴> 모두 한물 가고 잊혀진 노장 히어로를 주인공으로 삼았다는 게 흥미로워서 비교 포스팅을 시작은 했었는데;; 결국 마무리가 안 되서 흐지부지... 이참에 영화 제목이라도 적어놓아야겠다.
건축학개론 / 가을소나타 / 버니드롭 / 말하는 건축가 / 두개의 문 / 도둑들 / 미드나잇 인 파리 / 하와이언 레시피 / 광해 / 늑대소년 / 다크나이트 라이즈/ 007 스카이폴 / 아워이디엇브라더 / 26년 / 킹스 스피치 / 헬로 고스트 / 파수꾼 / 옥희의 영화 / 북촌방향 / 풍산개 / 진짜 일어날지도 몰라, 기적 / 자전거 탄 소년 / 대지진 / 시라노 연애조작단 / 맨인블랙 3
3. 2012년 최고의 드라마 3
BBC 셜록 시즌2
응답라하 1997
추적자
2012년에는 드라마를 별로 챙겨보지 않았다. 애정을 담아서 참아가며 봐줄 수 있는 드라마가 좀체 있어야 말이지! 미드, 일드를 찾아서 다운 받아 보는 부지런함은 원래도 없었으니;;;
째뜬 2012년이 시작되자마자 후딱 3편 방영하고 끝나버린 셜록 시즌2를 이리보고 저리 또 보고 케이블에서 찾아보며 상반기를 버텼던 것 같다.
그러다 후반기에 만난 대박 드라마 두 편이 <응답하라 1997>과 <추적자>. <추적자>는 불편해서 과연 볼 수 있을까 염려하며 보다말다 했었는데, 법도 공권력도 통하지 않는 이 나라의 정의에 대해서 조목조목 참 잘도 비판하고 있는데다 부모의 심정을 절절하게도 그렸다 싶어서 나중엔 크고 작은 드라마상의 헛점 따위는 눈감아주면서 응원했다. 연말에 손현주 씨가 상도 타서 어찌나 기뻤는지.
<추적자>가 끝나고 또 정붙일 드라마가 없어 방황하던 끝에 sns에서 하도 응칠, 응칠 하길래 본방 다 끝날무렵 불이 붙어 정주행하느라 아주 행복했다. 1997년이면 나도 한참 하이텔, 천리안 동호회 활동으로 밤을 설칠 때라 아이돌 팬덤에 대해선 전혀 모르면서도 그 시절 노래와 추억에 흠뻑 젖어들 수 있었다. 게다가 어찌나 시나리오며 소품이며 구성이 치밀한지 쫀쫀하기가 이를 데 없고, 캐릭터 하나하나도 허투로 그냥 지나가는 법이 없는데다, 호기심과 궁금함을 어떻게 그토록 끝까지 이어가며 퍼즐 맞추기를 하는지... 내래이션 대사들도 '주옥' 같아서 적어놓은 게 꽤 된다. ^^;
2012년엔 선망하던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3일권을 끊어 실제로 갔었다는 것이 스스로도 놀라운 쾌거였다. 라인업으로는 펜타포트가 더 멋진 것 같기도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라디오헤드> 공연을 직접 보다니! 현란한 꽃무늬 조명을 배경으로 몽롱한 분위기에서 연신 오징어춤을 추어대던 톰 요크를 비롯해 라디오 헤드의 연주와 노래를 세시간 넘게 원없이 볼 수 있었으니 무얼 더 바라랴. 더구나 낮부터 그 뜨거운 뙤약볕 아래서 쉴새없이 밴드를 따라 이동하며 공연을 본다는 문화 자체가 신기하기도 하고... 더 나이들기 전에(?) 가본 게 장하다 싶다. 과연 다시 갈 엄두를 낼 수 있을지는 모를 일...
어쨌거나 십수년째 활동중인 관록있는 노장 밴드에 환호하는 젊은이들(?)의 모습을 보며 어쩐지 가슴이 찡하다는 생각을 했는데, 한겨울에 본 스팅 공연 때도 관객층이 지난번보다 훨씬 젊어졌다는 게 새삼 뿌듯했던 것 같다. 체력 딸려서 록페스티벌 같은데 따라다니는 건 좀 무리일 것 같지만, 어쨌거나 좋은 밴드와 가수들의 내한공연이 계속해서 풍성하면 좋겠다.
포스팅을 못했지만 실로 크리스마스 이브엔 절대로 방콕을 고수하던 내가 십수년만에 옆구리를 찔려 <스윗소로우> 공연을 보러갔었다. ^^ 고려대 화정체육관 8천석을 다 채운 관객이 새삼 놀라울 정도였는데, 내년에도 옆구리를 찌르면 또 갈 순 있겠다고 생각이 들만큼 재미도 있고 노래들도 좋았으나, 저렴한 2층 좌석 탓에 음향이 '너무도 심하게' 나빴다. 가사가 하나도 안들려! ㅠ.ㅠ 스티브 잡스 패러디 해서 멤버 근황 소개하는 코너랑 수면양말 뭉쳐서 눈싸움 하는 아이디어는 기발하다 할 수 있었지만 진행이 너무 늘어지고 시간도 길다보니 나로선 지루했다. 1층 플로어석에서 멤버들을 코앞에서 보며 양말 던지고 놀았으면 안 지루했으려나? 째뜬 2층 관객들은 불우이웃돕기 기부한다는데도 입구에서 무료로 나눠주었던 수면양말을 기념으로 가져갈 생각인지 던지는 사람이 극히 드물었다. 특히 내 주변엔 참여도 꽝! (나의 일행도 기념품 양말 챙겨가겠다고 꺼내지도 않았음) 나 혼자 양말 뭉쳐 던지며 체력장 공던지기 생각나서 킬킬댔었다.
아무튼 똑같이 가장 저렴한 꼭대기 관객석에서 보았으되 음향 면에서도 뛰어났고 공연 자체의 감동도 강렬했으므로 베스트 공연 세번째 자리는 강수진의 <까멜리아 레이디>가 차지했다. 무척이나 오랜만에 드물게 보는 발레 공연이었다는 것도 가산점.
고르고자시고 할 것도 없이 전시라곤 달랑 이 셋을 봤나보다. 그래도 연초에 적어놓은 목록 중에서 놓치지 말아야지 결심했던 전시를 놓치지 않았다는 데 의의를 두어야;;; ㅠ.ㅠ
자세한 건 포스팅 링크로 대체하련다.
6. 2012년 인상적인 일들
-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3일권까지 끊어서 이틀'이나' 구경다닌 사건. 그 더운 날씨에 모여든 수많은 인파도 놀라웠고, 그 자리에 내가 있다는 것도 놀라웠고, 별이 총총한 밤하늘 올려다보며 산을 넘어다니다 모기에게 왕창 뜯겨 아직도 그 흔적이 남아있다는 것까지 모두가 오래 남을 '사건'인듯;;
- LA 친구랑 일본, 안동, 부산 여행. 특히나 작고 아담한 온천 료칸, 깔끔한 한옥, 바다 보이는 찜질방에서 모두 자 본 경험! ㅋㅋ
- 번역가라는 직업에 대해서 대학생 후배들에게 강연료씩이나 받고 이야기했던 일. 지금 생각해도 오그라든다 ㅠ.ㅠ
7. 2012년 최고의 득템 3
방구석에서 뒹굴뒹굴 게으름 부리며 방황하며 주로 보낸 한해라 아무리 떠올리려 해도 딱히 질러댄 물건이 있는 것 같지가 않다. 그저 필요한 옷가지와 신발을 엄선해서 사들인 정도. 그에 반해 생일을 빌미로 '받아낸' 물건에는 아직까지도 득템의 흐뭇함이 가시지 않은 게 있다.
첫번째는 캐스 키드슨 배낭. 북촌 구경갔던 날 삼청동 초입에 난데없이 생겨난 매장을 보고 동네랑 참 안어울린다고 툴툴대며 구경 들어갔다가 이 땡땡이 배낭을 발견했다. '땡땡이 마니아로 알려진 파피가 좋아하겠다'는 것이 처음 든 생각이었는데 신상이라 세일 안한다는 말을 듣고 어깨에 한번 걸쳐보자마자 단번에 마음을 사로잡았다. 크기도 넉넉하니 딱 내가 원하던 쓰임새의 배낭이 아닌가. ㅋㅋㅋ 거의 1분만에 생일선물로 사달라고 요구했다.
안동, 부산 여행때 몹시도 요긴하게 쓰였고, 요즘 궁궐 공부하러 다닐 때도 완전 애용하고 있다.
두번째는 스누피만화 박스세트!
절판된 50년대 세트부터 모으진 못했지만 ㅠ.ㅠ 67년부터 82년까지 장만해놓고 여름부터 틈틈이 즐겨보고 있다. 독서목록에 이것도 포함시킬까 약간 고민했었는데 관뒀다. 이건 읽는 책이 아니라 감상하는 책이여~ 이러면서...
다른 세트들도 여기 저기 사이트를 기웃거리며 호시탐탐 노리는 중이다.
세번째는 생일선물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얻은 물건이라 좀 민망하지만, 큰동생네서 쓰던 장식장을 물려받았다. 할머니가 쓰시던 낡은 화장대를 차마 못 버리고 망가지도록 쓰면서 이사가면 새로 사야지.. 라고만 생각하다가 동생네서 장식장 개비한다기에 얼른 좋아라 가져온 뒤 내다버렸다. 화장대 거울도 색깔 맞춰 페인트 사다가 진밤색으로 칠하고;;; 앞으로 또 10년은 너끈히 쓸듯. ;-p
7. 2012년 WORST 3
2건의 계약 파기. 2012년의 워스트가 바로 자기 자신이라고 쓰신 이웃도 있던데 나도 따라 그렇게 쓰고만 싶다. '신용'이란 말을 언급하기도 부끄러울 정도로 출판사를 오래오래 괴롭히다 심지어는 먹튀 버금가는 짓을 저지른 셈이 되었다. (계약금은 돌려줬으니 먹튀는 아니겠;;...) 블랙리스트에 올랐어도 할 말이 없다. 부디 정신차리는 계기가 되기를.
안동 여행 때 운전했던 친구. 시작부터 실망시키더니 어쩜 끝까지... 82년에 만났으니 딱 30년 만에 드디어 친구로서 제명하기로 결심했다. 생각해보니 새삼 그 옛날 삐삐도 없던 시절 셀수없이 바람 맞은 사실이 왜 그리도 열뻗치는지! 뒤끝작렬. 전화번호는 지우지 않았다. 피할래도 알아야 피할 수 있으니까...
안동 시외버스터미널에서 부산 시외버스터미널까지는 두시간 반. 푹신하고 넓은 우등고속 좌석은 곤한 다리를 쉬기에 딱이었고 우린 터미널 카페에서 드디어 반갑게 상봉한 쓴 커피를 '원샷'한 뒤에도 곧장 잠에 빠져들었다. 심야가 아닌데도 친절한 버스기사 아저씨는 버스 안 조명을 깜깜하게 꺼두었다가 부산 노포 톨게이트에 접어들고나서야 실내등을 켜 승객들을 깨웠다.
안동 여행을 계획하며 잠깐이라도 부산까지 찍고 오자 결심했던 이유는 처음 일본에 가려 했을 때 부산에 내려가 하루쯤 놀다가 배를 타고 일본에 다녀오면 더 재미있겠다는 사전 모의가 무산되면서 뭔가 대단히 아쉬웠기 때문이었다. 마음 같아선 친구 핑계대고 이왕 나선 김에 부산에 이어 통영, 해남, 순천만 생태공원까지(여름부터 친구랑 휴가 계획 짜며 모두 언급되었던 여행지들이다 ㅋ) 죄다 둘러오고 싶었다. 그러나 막상 휴가가 2주라고 해도 S는 금요일 출국인데다 수요일엔 또 LA에서 같이 휴가나온 동료도 만나야했다. 은행장이 특별히 임무를 부여했다나 뭐라나 -_-;
다음날 약속시간에 맞춰 올라갈 KTX도 이미 2시반에 예약해둔 터라 부산에서 보낼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게다가 친구는 어디서 들었는지 숙소 예약하지 말고 우리도 <바다 보이는 찜질방>에서 한번 자보자고 별렀다. 하룻밤은 우아하게 별당아씨 노릇을 했으니 또 하룻밤쯤은 행랑아범처럼 쭈그려 자도 재밌겠다고. LA교포들의 정보력이란 암튼 놀랍기 그지없다. (심지어 친구의 언니는 한인 아침방송에서 봤다며 다이어트에 좋다는 '빼빼목'을 사오라고 부탁했다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을 뿐이고!) 찜질방도 퍽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다, 수많은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과연 잠을 잔다는 것이 가능할지 두려웠으나 까짓것 하루쯤 잠 못자면 어떠랴, 내가 LA 놀러갔을 때도 뜬금없이 코리아타운 사우나엘 데려갔을 정도로 친구는 대중목욕탕 애용자인 것을. 그리하여 만 하루가 못되는 부산일정 역시 먹는 것을 중심으로 계획했다. 광안리해수욕장에서 광안대교 야경보며 시원소주에 회 먹기, 다음날 아침은 속풀이로 금수복국, 점심은 밀면! 부산 오뎅과 자갈치시장 씨앗 호떡은 간식 옵션이었다. ^^;
안동에선 시내버스비 1200원을 꼬박꼬박 현금으로 내야 했으나 부산에선 선후불 교통카드 사용에 불편이 없었다. 지산밸리 록페스티벌 갔을 때 사고 남은 티머니 카드가 그래서 서울과 부산에서 아주 요긴했는데, 친구가 갖고가 버렸다. 좀 남았을 텐데 ㅋㅋㅋ 인상적인 기념품이 되었으려나. 째뜬 노포에서 지하철을 타고 우리가 곧장 향한 곳은 광안역. 광안리해수욕장까지 걸어서 5분이면 된다더니, 우리 걸음으론 역시나 15분쯤 걸린 듯하고 인도에 나다니는 사람들 별로 없는 아파트촌 옆을 지나면서는 친구가 미국시민 답게 좀 두려워했다. 한국은 안전하다고 큰소리를 치면서도 중고딩으로 보이는 아이들 무리와 마주쳤을 땐 나도 좀 간이 오그라들었음. ㅋ 다행히 곧 나타난 광안리해수욕장 인근은 평일임에도 휘황찬란 해변 카페, 술집마다 사람들이 드글드글, 바닷가엔 저녁 산책 및 운동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친구가 제일 재미있어 한 것은 해변에서 군데군데 영업중인 점 보는 파라솔! (광안대교 사진 오른쪽에도 살짝 걸쳐 나왔다 ㅋ) 대체 누가 저런 걸 보나 싶은데도, 파라솔마다 데이트하는 연인들로 보이는 손님들이 앉아 있었다. 사주궁합 안좋다 그러면 헤어질 건가??? 오히려 내가 물어보고 싶었음. 오른쪽 사진은 민락 회타운인가 하는 건물 꼭대기층 횟집에서 내려다본 전경이다. 일부러 광안대교 보이는 집으로 골라간 건데 다리쪽 방엔 자리가 다 찼다. ㅠ.ㅠ
그래도... 요즘 제철이라며 전어회도 따로 좀 챙겨주시고 맛과 서비스는 흡족했다. 배고파서 허겁지겁 집어먹다가 매번 아차, 그러면서 찍은 사진들. (휴대폰에 먹고팠던 갖가지 한국 음식 사진을 넣어가는 것이 친구의 소망이라면 소망인지라;;)
부산에 왔으면 시원소주를 마셔줘야지 암, 그러면서 술꾼인척 소주를 시켰으나 결국엔 사이다와 소주를 3:1의 비율로 섞어 먹다 배부르다는 핑계로 반병 남기고 왔다. 소맥을 할 걸 그랬나보다. ;=p
밤이 깊어가고 있었으나, 찜질방에 체류하는 시간을 최대한으로 줄이고 싶어 내가 짜낸 아이디어는 심야영화를 보는 것. CJ에서 배급하는 영화들은 LA에서도 볼 수 있다며 친구는 이왕이면 다른 걸 보고 싶어했으나 마침 볼만한 다른 한국영화가 없으니 선택은 결국 <광해>였는데, 나는 또 묘한 인연 같은 걸 느꼈다. 영화 장면장면마다 우리가 최근에 갔던 창덕궁 구석구석이 막 나오는 게 아닌가! 쓰러진 광해가 숨어있던 집 역시 안동 하회마을일 리 없는데도 낮에 본 한옥들과 겹쳐져 더욱 실감이 났다. 그토록 뜸들이다 부산에까지 와서 <광해>를 보게 된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인가 싶기도 하고.
암튼 미루고 미루다 새벽 2시가 다 돼 택시타고 찾아간 달맞이 언덕 베*타 찜질방은 상상했던 것만큼 어마어마한 규모는 아니었으나 꽤 훌륭했다. 그리고 평일이라 사람들 별로 없으리라 예상했던 것과 달리 드넓은 방마다 자고 있는 사람들이 상당히 많았다. 큰 방엔 거의 누을 자리가 없을 정도! 여성용 수면실이 따로 있긴 하던데 좁은데다 온도가 너무 높아 숨이 막힐 정도이고 코고는 소리도 요란하여 들어가고 싶진 않았다. 다들 덮고 자는 담요는 과연 어디에서 구하는 것일까 이리저리 구경다니며 탐색하던 우리도 드디어 담요와 목침을 하나씩 구해들고 제일 덜 더운 방에 몸을 눕혔다... 근데 거기도 너무 더워 ㅠ.ㅠ 나는 잠든 친구를 남겨두고 찬바람을 쏘이러 베란다 앞으로 갔다가 식당으로 갔다가... 결국 다시 친구 옆으로. 에구구 여행에서 잠자리는 역시 편해야 제맛임을 실감.
그렇긴 해도 또 눈을 뜨자마자 이런 광경을 호텔이나 모텔이 아닌 곳에서 만나보는 묘미는 인정해야할 것 같다. 전날 밤 그저 깜깜한 유리창으로만 보였던 목욕탕 전면도 죄다 저렇게 바다로 향해 있어 탕에 들어앉아서도 바다감상이 가능했다. 누구 아이디어인지 정말 참 찜질방 자리 하나는 잘 잡았다. ㅎㅎ
아래는 노천탕이 있다는 옥상구경하러 올라가서 찍어온 해운대 앞바다 사진. 아침을 먹고 나서 친구에게 해운대 모래사장을 좀 걸어보겠냐고 했더니 바다구경은 충분하단다. 맞다, LA에서도 바다는 금방이었지...
간단하게 때밀이(!) 목욕을 마치고 나서 행선지는 계획대로 금수복국 해운대점. 오래 전 부산에 갔을 때 택시타고 가자했더니 교묘하게 곧장 2층 입구에 내려주어 얼결에 수만원짜리 '정식'을 먹어야했던 전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조심해야지 했는데, 웬걸. 택시 아저씨가 쿨하게 큰길가에 내려주고 골목안으로 들어가면 된다고 가르쳐주었다. ^^;
그래서 시켜먹은 것이 은복 지리와 복주머니 만두.
LA 한식당에 비해서 다들 음식이 왜 이리도 양이 적으냐고 투덜거리던 친구는 처음으로 1인분다운 뚝배기를 만났다고 기뻐했다. 서울에도 이미 분점이 있지만, 말간 국물의 복국은 어쩐지 부산에서 먹어야 제맛인 느낌. 해장할 필요도 없이 속은 멀쩡했지만 어김없이 시원했다.
마침 복국집 바로 앞에 원두커피집도 있겠다, 이날은 모든 것이 계획대로 순순히 풀려주는 기분이었다. 이후 부산관광은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시티투어버스를 타고 태종대, 자갈치시장 쪽을 돌아 기점인 부산역으로 시간 맞춰 돌아오는 것이었다. 해운대 코스를 타면 광안대교도 건너간다잖아! (버스비는 만원. 하루 종일 30분 간격으로 다니는 시티투어 버스를 타고 내리며 계속 관광이 가능하다. 우리가 일본에 간 동안 역시나 부산여행을 한 울 엄니가 가르쳐 주심. 후쿠오카 시티투어버스에 비해 훨씬 유용한데 우린 다만 시간이 부족....해서 그만;;)
진짜로 광안대교를 건너가며 버스 차창으로 보이는 해운대 인근의 스카이라인이 어쩐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여름엔 정말로 뚜껑없는 이층 투어버스가 다닌다는 듯;;
부산역 앞에서 은행구경과 서비스 체험도 좀 하고(얼마나 친절하고 편리한지 친구가 미국은행과 비교를 원했다), 다시 태종대행 시티투어버스를 타긴 했으나, 2시반 기차 시간에 맞추려면 자갈치시장은 아예 갈 수도 없을 듯했고 태종대도 제대로 볼 여유는 없었다. 잘 기억도 나진 않지만 예전엔 택시를 타고 등대앞까지 갔었던 것 같은데... 이젠 입구부터 차량이 통제되고 거기선 다시 코끼리 열차 같은 걸 타고 올라가야 한단다. 게다가 시티'투어'버스다 보니 어찌나 해안으로만 돌고돌아 구석구석 다녀주시는지, 도심에서 태종대까지 시간도 꽤 많이 걸렸다. (나중에 택시타고 와보니깐 부산역까지 15분도 안 걸리더만!)
말이 태종대지 솔숲길로 조금 걸어내려가 우묵하게 파인 만과 전망대 앞 바닷가를 본 것으로 이날의 관광 끝. 점심으로 별렀던 밀면을 먹을 시간조차없었다. ㅠ.ㅠ
결국 우린 회먹으러 부산 온 거였네, 라고 자조하며 기차시간에 맞추느라 에스컬레이터에서도 뛰어야할 정도였다. 헉헉대며 자리에 앉아, 또 꾸벅꾸벅 졸다보니 어느새 서울역.
곧장 전철로 이동하여 인사동에서 만나기로 했던 친구의 동료들과 합류, 쌈지길과 청계천을 쏘다닌 뒤론 다시 홍대앞(주차장길 네일샵→액세서리 가게→조폭 떡볶이→커피집)을 휩쓸다 이날 자정이 넘어 집에 들어온 우리는 장렬히 쓰러지고야 말았다. ㅋㅋㅋ
가물거리는 기억이 다 사라지기 전에 올 여름 본 영화를 다 정리하려고 낑낑대고 있자니 꼭 밀린 방학 일기 쓰는 기분이다. 뭐든지 그때그때 해놓으면 참 좋으련만, 일도 포스팅도, 하다못해 AS신청도 왜 벼르고 미뤄뒀다 하는지 원. 어쨌거나 이거 쓰고 나면 두 편 남았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와 <두개의 문>. 미리 예고해놓아야 건너뛰지 않을 듯. -_-
<미드나잇 인 파리>는 이웃분들도 재미있다고 추천하셨고, 친구 하나도 놓치지 말고 꼭 보라고 권했다. 보고 나서 이토록 유쾌해지는 영화가 드물다나. 그렇게 입소문이 많이 나서 그런지, 워낙 개봉관이 줄어든 탓인지 예매 않고 씨네큐브로 보러갔다가 '매진' 사태에 놀라 담날 표를 예매해야 할 정도로 인기였다.
시간여행이 소재이고 작가인 주인공이 과거로 돌아가 낭만 넘치는 밤의 파리에서 수많은 유명 작가들과 예술가들을 대면한다는 이야기도 알고 갔는데도 시종일관 킬킬깔깔대며 즐거이 관람했다. 주인공 길 페더 역의 오웬 윌슨은 제대로 본 영화가 <웨딩 크래셔> 딱 한 편이라, 그냥 그렇고 그런 코미디 배우인 줄 알았는데(깨진 콧잔등이 그 영화에서만 나오는 분장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시나리오로 성공했으면서도 아직 소설의 꿈을 버리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세심한 작가 역할에 의외로 아주 딱이었다.
<웨딩 크래셔>에서도 부잣집 딸로 나온 레이첼 맥아담스랑 호흡을 맞추더니, 공교롭게 이 영화에서도 레이첼 맥아담스가 부잣집 딸인 속물 약혼녀로 나오더군. <노트북>도 그렇고 <시간여행자의 아내>도 그렇고 레이첼 맥아담스 얼굴이 애지중지 키운 부잣집 딸 이미지인가보다. ㅋ 그에 비하면 확실히 아드리아나 역할의 마리옹 코티아르도 그렇고 골동품 가게 점원이었던 레아 세이두도 그렇고 할리우드 배우랑은 느낌이 참 다르다. 같은 서양인이라도 유럽풍 외모를 더 쳐주는 나의 편견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나. '빠다' 잔뜩 바른 미국식 영어발음보다는 좀 안들리고 못 알아듣더라도 영국식 영어나 유럽인들이 하는 영어발음이 더 멋진 것 같다. 이 또한 문화사대주의인가 아닌가, 혹 인종주의의 혐의는 없나 늘 고민되는 부분이다.
하여간에 비오는 파리가 더 멋지다며 빗속을 쏘다니자거나, 운치 있는 밤 거리 좀 걸어다니자는데 정신나간 사람 취급하는 약혼녀 이네즈와 낭만주의자 길은 원래부터 잘 안맞는 사람이었다. 둘이 약혼을 한 사이라는 게 더 신기할 정도! 거기다 밤마다 뎅뎅뎅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1920년대의 파리로 돌아가 하늘처럼 떠받들던 유명 작가들과 예술가는 물론이고 당대 예술가들의 뮤즈(모딜리아니, 브라크의 연인을 거쳐 현재는 피카소의 애인이다!)인 아름다운 아드리아나까지 만났으니, 현재로 돌아와 맞는 대낮의 현실은 더욱 짜증스러울수밖에 없다. 사윗감이 못미더워 탐정까지 고용하는 장인을 보아도 그런 집안에 그냥 장가갔으면 어쩔 뻔 했나!
우디 앨런 영화는 등장인물들이 대부분 수다스럽고 말이 워낙 많아 영화가 재미 없으면 완전 따분하고 짜증스러울 수도 있지만 재치와 유머 넘치는 대화로 시종일관 킬킬거리게 만들기도 하는데, 이 영화는 단연 후자였다. 우디 앨런 영화중에 단연코 제일 재미있었다는 사람들의 평가에 나도 동감한다. 게다가 헤밍웨이도 그렇고 피츠제럴드도 그렇고 어쩜 그렇게도 작가 사진에서 익히 봤던 인물이랑 똑 닮은 배우들을 찾아냈을까나! 캐시 베이츠가 맡은 거트루드 스타인 역할은 닮았는지 잘 모르겠으나, 워낙 내가 좋아하는 배우니까 패스~. 허세 잔뜩 들어간 피카소며, 초현실주의자라들이라서 다른 시간대에서 왔다는 길의 고백도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이는 살바도르 달리, 만 레이, 브뉘엘까지, 진짜로 실물이 나타나 눈앞에 앉아 있는 기분이 나도 막 들었다. ㅋㅋㅋ 심지어 1920년대에서 한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1890년대의 파리로 돌아간 장면에서 만난 툴루즈 로트렉은 거짓말 좀 보태면 나도 알아맞힐 수 있을 만큼 자화상과 꼭 닮은 배우였다! 사실 이 영화 포스터에 떡하니 저렇게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 그림을 사용했길래, 스쳐지나가는 예술가 중 한 사람으로 고흐도 나올 줄 기대했는데 로트렉 나오는 장면에서 고갱과 드가는 나오는데 고흐는 안나오두만. 하기야 연도상으로도 1890년이면 고흐가 파리에서 예술가들과 교류할 때가 아니긴 하다. ㅠ.ㅠ
마크 트웨인이니, T.S. 엘리엇이니 하는 작가와 예술가들이 작품 속에서 실제 인물로나 대화 속에서 하도 많이 등장하는 터라 알면 알수록 더 쏠쏠한 재미가 있겠으나, 헤밍웨이, 피카소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터이니 굳이 상관없을 것 같다. 나도 콜 포터 같은 재즈 음악가나 쥬나 반스 같은 사람은 금시초문인데도 그러려니, 웃고 즐기는데 별 상관 없었다. 그래도 로댕의 조각 작품이나 모네의 수련 그림, 셰익스피어앤드 컴퍼니 서점 같이 좀 익숙한 장면이 나오면 괜히 더 반가운 건 어쩔 수 없는 듯. 등장인물의 대사에도 엄청 깨알같이 유명 작품 제목과 인용문이 대거 사용되었다니 그걸 죄다 알아듣고 영화를 감상한 사람은 더욱 우디 앨런의 천재성에 감탄했겠다.
감독이 배경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담아낸 영화는 꼭 그런 티가 난다. <하와이언 레시피> 보면서는 하와이의 에메랄드 빛 바다 보고싶다, 저 한적한 섬에 가보고 싶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주인공과 함께 파리의 낮과 밤을 쏘다니는 동안엔 파리 열망이 꿈틀 솟았다. 며칠 겉핥기로 본 과거의 파리는 좀 쌀쌀맞은 느낌이었고 그다지 낭만적인지도 모르겠던데, 비오는 날엔 기분이 좀 다르려나? 어쨌거나 실제로 가서 확인해보고 싶다규~~
길이 1920년대를 황금시대라 여기며 동경했듯, 그 시대를 살고 있는 아드리아나는 또 다시 한 세대 이전의 아름다운 과거를 동경한다. 근데 또 막상 1890년대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시대야말로 최고의 황금기였다고 푸념하고.... 결국 지나간 과거는 다 아름답게 포장되어 후대인을 유혹하는 법이란 의미. 나 역시 인생의 황금기는 이미 지나가버렸다고 아쉬워한 적 있지만, 막상 그때로 돌아가겠느냐고 하면 굳이 그럴 마음이 없다. 좌충우돌 펄럭거리던 청춘은 한번으로 족해! 혹 어쩌면 아직 내 인생의 황금기가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p 역시나 결론은 카르페 디엠, 지금 당장 하고 싶은대로 살기!
범죄의 재구성, 타짜, 전우치까지, 최동훈 감독의 화제작은 다 본 것 같다. 짜임새와 캐릭터에 그저 감탄했던 전작 두편과 달리 <전우치>에선 임수정 캐릭터가 영 마음에 안 들었고 웃기기 강박같은 게 느껴져 불편했지만, 이번에도 기본은 하겠지 하는 생각으로 <도둑들>을 보러 갔다. 영화관으로 피서 가는 셈치고 거의 개봉하자마자 봤는데, 새삼 천만 관객을 넘기지 마느니 하는 다음에야 후기를 올리려니 점점 쓰기가 싫어졌다. 역사상 천만 관객을 넘긴 한국영화 가운데서 나는 안 본 게 절반 이상이라는 데서 쓸데없이 묘한 뿌듯함을 품고 있기 때문일까?
좌우지간 볼거리가 풍부한 영화이긴 했다. 그렇게 수많은 대배우들을 데리고 골고루 영리하게 이야기를 풀어냈다는 점도 인정해야할 것 같다. 영화 제작후 김수현이 드라마로 워낙 떠서 김수현과 전지현의 키스씬 가지고 마케팅을 엄청 하던데, 카리스마 넘치는 대배우들 틈에서 막내 김수현은 존재감이 거의 없을 정도다. 임달화를 비롯한 중국 배우들의 연기도 대단했다. 씹떤껌 김해숙 아줌마와의 로맨스도 눈물겨웠고.
근데 이 영화가 관객 천만을 넘길 정도로 그렇게 대단한 영화였던가? 끙... 근데 왜 난 후반부 내내 자꾸만 하품이 났을까나. -_-; 액션 오락 영화로 담아낼 수 있는 재미와 볼거리를 최대치로 높이려 한 점은 인정하겠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데 <오션스 일레븐>의 짝퉁이 될까 염려했던 우려를 잠재우며 이 정도면 누구 하나 딱히 섭섭한 캐릭터 없이 잘 버무린 것 같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숨겨놓았던 몇 가지 반전이 드러나는 것도 좋았다. 그런데 나중엔 감독이 반전 강박에 걸렸나 싶어지면서, 점점 스토리가 빈곤해지는 느낌이들었다. 이미 서로 계속 등 쳐먹으며 살아온 도둑들의 행동이야 어디로 튈지 너무 빤한 거 아닌가?
전지현이 딱 영화속 예니콜 캐릭터 같은 모습으로 휴대폰 광고에 나오는 걸 보니, 아무래도 이 영화에선 전지현이 제일 주목을 받나 싶지만 솔직히 나는 영화보며 전지현의 대사를 태반 못 알아들었다. 몸매 훌륭한 줄타기 도둑의 빛나는 미모를 여실히 보여주며 딱 자기한테 맞는 옷을 입은 건 좋았는데 왜 아직도 발성이 안되느냐고!!! 요샌 현장 마이크 성능도 엄청 막강할텐데 한국영화 보면서 자막 있으면 좋겠다고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김윤석 같은 배우는 나직하게 조용히 읊조려도 다 대사전달이 되던데 참 나.
하여간에 나는 얼른 보고 나와서 이 영화 봤다고 남들한테 말하기 부끄러운 영화라는 생각을 얼핏 했고, 또 영화관을 나와서는 남는 게 없어서 잊고 있었다가 관객 천만 동원이 초읽기니 어쩌니 하는 뉴스를 보고 좀 놀랬다. 하기야 취향차도 있을 테고 관객수만으로 영화의 점수를 매길 순 없는 것이겠지. 그 천만 숫자에 머리 하나 보탠 주제에 참 말도 많다. <오션스 일레븐>은 개봉하자마자 달려가 보았지만 내 사랑 조지 클루니가 계속 나오는데도 <오션스 트웰브>는 볼 마음이 없었던 것처럼, 이 영화 시즌2 나온대도(결말을 보면 2편 제작의 열망이 보인다) 나는 또 보러 갈 것 같지 않다는 게 나의 결론.
시간이 지날수록 여운이 계속 사라질 게 뻔하므로 기억이 다 지워지기 전에 후기 몇 마디 적어놔야겠다. 올해의 베스트 영화에 들어갈지도 모르니까.
다큐멘터리 영화인데도 이 작품을 찍은 정재은 감독의 상업영화 <고양이를 부탁해>보다 관객이 많아 4만명을 넘어섰단다. 3월에 개봉한 '다큐멘터리' 영화를 아직도 소수의 개봉관에서 하루에 한두 번씩 볼 수 있게 상영한다는 건 그만큼 찾는 이들이 많다는 증거다. 나도 봐야지 봐야지 벼르다가 6월 들어선 당연히 끝났겠거니 했는데 아직 상영하고 있는 데가 있었다. 마지막 기회마저 놓칠 순 없다고 결심하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로 나갔다.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건축학개론>의 열풍 덕을 봤다고 우스갯소리를 했다는데, 고 정기용 건축가가 지닌 인간미와 고집 같은 것 때문인지 극영화로 보아도 손색없을 만큼 좋은 영화였다. 암으로 언제 죽을지 모른다는 말을 본인 입으로 하지만, 병과 죽음을 극적인 소재로 이용하려는 시도는 원래부터 없는 듯하다. 다만 안타까울 뿐. 건축에 대한 생각과 접근방식은 존경할만하지만, 건축 자체로서의 조형미나 완성도는 떨어진다고 가차없이(그러나 애정을 담아서) 비판하는 동료 건축가나 비평가들의 증언(?)도 신선했고, 병 때문에 쉰 목소리로 힘없이 전하는 정기용 선생의 이런저런 이야기도 좋았다. 원래도 유머감각과 멋이 넘치는 분이었을 듯. 저런 모자가 저렇게 잘 어울리기란 정말 쉬운 일이 아니다.
건물을 지을 땐 쓸 사람의 의견을 제일 많이 반영해야한다며 안성면사무소에 목욕탕을 함께 지었다는 일화는 원래도 유명해 들어본 적 있다. 할머니들이 일년에 몇 번 봉고 빌려서 겨우 다니던 목욕탕을 단돈 천원에 노상 다닐 수 있게 되어 누가 지었는지도 모르면서 편하고 좋다고 말하는 모습은, 우리가 바라는 공공 건축물의 이상을 잘 보여주는 듯했다. 기괴하고 흉물스러워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요즘 서울시청의 모습을 내가 왜 그렇게 못마땅해하는지 그 이유도 잘 알겠고. 박원순 시장이 아무리 시청을 결혼식장이며 행사장으로 시민에게 내준다고 해도, 이젠 쓸데없는 짓이다. 그 흉측하고 불편한 곳에 가서 그런 일생의 중요행사를 하고 싶겠느냐고! 더불어 돈 처들여 흉측하게 만들기 분야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것 같은 동대문운동장 이야기도 언급되던데, 서울의 역사, 동대문 운동장의 역사를 최대한 반영하려 했다가 설계 경쟁에서 떨어진 다른 한국 건축가들의 아이디어가 난 훨씬 좋았다. 나도 생애 최초로 야구 구경을 간 곳은 동대문운동장이었단 말이닷! 하지만 심사를 맡은 이들도 설계 경쟁 우승작도 외국인이었다는 점을 참... 어떻게 생각해야 좋을지 원. 이명박 시장시절부터 시작해 5세훈이 디자인 서울이랍시고 망쳐놓은 것들의 후유증은 그러고 보니 아직도 멀었다.
등나무를 심어 천연 지붕 효과를 낸 무주의 등나무 공설운동장도 그렇고, 원래 있던 나무를 그대로 살리고 도너츠 모양의 건물로 지은 기적의 도서관 같은덴 나중에 한번 여행삼아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런 작품 같은 건축물에 건축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공무원들이 '녹색성장'을 빌미로 흉물스러운 태양광 수집판을 덕지덕지 가려놓아, 선생한테 "개같은 새끼들"이라는 평가를 듣는 장면을 보면서는 한숨이 나왔다.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참 안목과 하는 짓거리가 왜 다 그 모양일까나. 최근에 새로 지은 군청, 구청, 시청 청사들을 보면 하나같이 천박한 유리 외관이고 말이지... 하기야 애당초 정기용 선생 같은 이에게 건축을 맡긴 공무원들도 있긴 했구나. -_-;
일민미술관에서 회고전 준비하는 과정도 영화에 담겼던데, 후회해도 진짜 소용없는 짓이지만 그 전시를 보고싶다고 달력에 적어만 놓았을 뿐 놓쳤던 게 참 안타까웠다. 드물게 건축가를 남편으로 둔 친구들에게 내가 "좋겠다 좋겠다 멋지다"따위의 감탄사를 연발하면, 뜻밖에도 설계랍시고 만날 컴퓨터 앞에서 마우스만 갖고 씨름한다는 실망스러운 대답을 듣곤 했으나 정기용 선생은 옛날 분이라서 그런지, 아랫사람 실무자가 아니라서 그런지 아날로그 방식대로 연필과 색연필로 그린 설계를 보여주어 더욱 좋았다. 그 그림과 도면들을 실물로 알현할 기회가 있었는데 내가 날려버렸다니... 으휴.
<말하는 건축가>라는 제목에도 참 기막히게 어울릴 만큼, 건축에 대해서 건축하는 사람의 태도에 대해서 한 마디 한 마디가 다 주옥같은 명언이라고 생각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는데 벌써 다 까먹고 말았다. 책을 사보면 되려나.. 그러는 중이다. 영화가 끝나고 광화문 스폰지하우스에서 나와 골목을 벗어나자마자 눈앞에 떡 일민미술관이 보이는데, 마음이 스산했다.
친구가 5월에 어울릴 것 같다며 이 영화 보고싶다고 해서 개봉일을 기다려 약속을 잡았다. 헌데 가까운 데는 개봉관이 없다! 대한극장, 서울극장 이런데는 하루 중 이상한 시간에 한번쯤 교차상영을 하고, 전국적으로도 상영관이 열개 안팎일 정도 ㅠ.ㅠ
암튼 그래서 일산 화정까지 가서 어렵사리 보고왔다. 그렇게 벼르고 볼 만큼 주변에 강력추천할 영화는 아니지만, 촉촉히 봄비 내리는 날 우산쓰고 돌아다니다 관람객이 전부 네명 밖에 안되는 초소형 영화관에서 각자 막 수다떨며 보기엔 딱이었다(우리 석줄 앞쪽에 앉은 커플 중 남자는 일본 영화인줄도 모르고 들어왔두만 ㅋㅋ). 조숙한 어린아이와 철부지 어른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영화의 전형적인 정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그야 뭐 나도 알고 간 거니 상관없다. 아이가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가, 내겐 항상 그것이 관건!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셔 문상을 내려간 다이키치. 친척들은 외할아버지와 꼭 닮은 다이키치의 외모에 '히엑~!!'하면서 놀라고, 동시에 할아버지의 숨겨진 딸 6살짜리 린의 존재 때문에 수군거린다. 엄마가 누군지도 모르는 골칫덩어리 꼬마는 입양보내는 것이 최선이라는 친척 어른들의 냉담한 반응에 다이키치는 충동적으로 자기가 맡겠다고 선언한다. 첫눈에도 슬프고 외로워 보이는 린에 대한 연민 때문. 린 또한 다이키치의 제안에 옷자락을 덥썩 잡는다. 어른들 가운데 유일하게 다정하게 바라보기도 했고, 일단은 다이키치의 외모가 아빠(할아버지)랑 닮은 설정이니 뭐.
아우, 진짜 쪼끄만 애가 표정이 어찌나 처연하고 슬픈지, 나중에 조잘조잘 웃으며 떠드는 모습이랑 같은 애가 아닌 것만 같다. 린의 자연스러운 연기에 비하면, 다이키치의 만화같은 과장 연기는 막 유치해! (원래 만화가 원작이라고;;) 다이키치 뿐만 아니라 다른 어른들 연기도 지나치게 과장되고 희화된 느낌인데(특히 물류센터 같은데서 일하는 직장 동료들!), 이런 영화는 또 아역배우 하나만 건질 수 있으면 다 용서가 된다. 린이 넘 귀엽고 깜찍하니깐!
그나저나 포스터 보니 다이키치가 겨우 27살이었군. 회사에서 워낙 일 잘하는 관리직 상사인 듯 나와서 30대인줄 알았다. ㅋ 일본에서도 쉽지 않은 육아문제, 부모의 역할, 가족애를 한 축으로 하고, 아이와 어른의 동반성장을 아기자기하게 그린 영화다. 다이키치가 린을 데려와 사는 단독주택도 예쁘고, 처음 나온 할아버지네 집, 나중에 잠깐 나온 부모님네 집, 다이키치가 출근시간에 늦어 노상 린을 안고 뛰어다니는 골목길도 다 예쁘고 정겹다. 일본영화 보고 나면 나는 영화속의 예쁜 골목길이랑 주택가만 기억에 남기도 하는데, 촬영지가 어디인지 모르겠으나 불쑥 가보고 싶다고 느꼈다. 한류 드라마 촬영지에 외국 관광객 바글거리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니까. 아무튼, 포스터에도 보듯, 저렇게 애랑 땡땡이무늬 커플 잠옷 입은 것도 귀여워 귀여워! 작아도 아이들 머릿속엔 별별 복잡한 생각이 다 들어있고, 마음씀씀이가 어른들 뺨친다는 걸 아는 어른들이 만든 이야기구나 싶다.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 하는 어린 조카 앞에서 나도 멍해진 적 있었다.
아 맞다, 나에겐 영원히 '조제'로만 기억된 (워낙 일본영화와 드라마를 많이 보지 않는다;;) 이케와키 치즈루가 단역으로 나와서 깜짝 놀랐다. 그것도 두살 아들을 키우며 다이키치에게 조언을 해주는 회사 선배로.. +_+ 뭐 여전히 젊지만, 풋풋한 조제 때랑 비교하면 세월이 느껴지는 얼굴이라 내가 괜히 뜨악했다.
딸바보들의 세상을 칭송하고 가족권장 드라마 같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어쨌거나 아이들은 어른의 스승이라고 결론내렸다. 부모노릇은 아무나 하는 게 아니지만, 부모노릇을 비스름하게만 해봐도 확실히 인간적인 성숙은 필수다. ㅋ
맨처음 린이 까만 원피스 입고 마당에 서 있을 때 나도 한 눈에 반하겠던데, 그 장면 사진이 없어서 아쉽;;
점심을 배불리 먹고 곧장 들어간 탓도 있겠으나, 워낙 잔잔한 영화라 감기는 눈꺼풀을 애써 들어올리며 하품과 함께 어렵사리 봤다. 가을에 봤더라면 좀 더 확 와 닿는 느낌이 있었으려나? 어쨌든 꼭 보라고 주변에 추천할 만한 매력을 느끼지 못했음에도, 며칠 지나서까지 불현듯 생각나는 장면이 있는 영화다.
(스포일러 주의)
모녀의 이야기라서 그랬을까? 잘나고 이기적인 유명 피아니스트 엄마에게 치인 상처를 간직하고 있는 평범하고 소심한(사실 그렇게 평범하지도 않다. 자기 책을 두권이나 낸 작가던데) 딸과 모성에 익숙치 않았던 엄마의 갈등을 담은 영화다. 포스터 카피엔 '화해의 이중주'라고 되어 있지만, 두 사람이 화해했다고 과연 볼 수 있을지.
엄마는 폭풍같은 딸의 비난을 듣고나서 그저 몰랐다는 말만 되풀이하다 결국 다시 도망친다. 모성애가 여성이라면 누구나 타고나는 천부적 소양이 절대 아니며, 아무나 잘 할 수 있는 역할도 아니라는 주장에 백번 동의하는데도, 나는 딸 에바(리브 울만)의 입장에 더 깊이 공감할 수 있었다. 위대한 예술가라면야 개인의로서의 삶보다는 예술과 일을 앞세워 예민하게 사느라 주변 사람들을 불행하게 만드는 걸 용납하는 시선도 있겠으나, 나는 그런 선택을 결코 정당화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나 같으면 그렇게 오래 참지도 않았을텐데, 에바는 엄마에게 늘 버림만 받은 상처 때문에 아무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고 굳게 믿으며 평생을 살았으면서도 여전히 엄마를 더 보살피고 걱정하는 쪽이다. 답답해서 내가 미쳐! 엄마인 살롯(잉그리드 버그만)도 딸에게 반문한다. 그렇게 오래 날 미워했으면서 그동안 왜 아무 말도 안했느냐고. 내 말이... (하지만 다가가 말을 걸기조차 불가능할 만큼 엄마가 냉정하게 곁을 안줬을 수도 있다!)
1978년 작품이고 워낙 고전적인 베리만의 영화라서 한 편의 연극을 보는 것도 같다. 첫 장면은 에바의 남편이 관객을 향해 아내 이야기를 하며 시작되고, 독백, 방백도 많이 활용한다. 홍상수 영화에서도 많이 보듯, 카메라가 인물을 갑자기 확 끌어당겨 클로즈업하는 장면도 종종 연출되고, 배경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다. 그런데도 촌스럽다는 느낌이 크게 안드는 건 거장의 힘? 아니면 내 편견의 힘? ^^;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베리만의 영화 중 걸작을 뽑아 계속 상영할 모양이던데, 다른 것도 보러가게 될 것 같지는 않다. 십자군 전쟁을 떠난 기사 이야기라는 <제7의 봉인>은 살짝 보고픈 마음도 들던데, 성경 내용에 워낙 무지해 보고도 못알아먹을 것 같아서 쫌;;
암튼 잉그리드 버그만은 참 아름답고 우아하게도 늙었다. 스웨덴어와 영어를 넘나드는 자연스러운 연기와 표정, 자부심 강한 피아니스트에 딱 맞는 고상한 자태, 예술가 특유의 예민함까지 대단하다 싶었다. 간간이 흘러나오는 클래식 곡들을 내가 좀 더 알았더라면 더 좋았겠으나, 뭐 몰라도 괜찮았다. 같은 곡을 연주해도 엄마의 쇼팽(쇼팽 맞던가;;;)과 딸의 쇼팽이 다른 느낌이라는 건 어렴풋이 알겠던 걸(진짜로 차이를 알았는지 배우들이 설명해준 거로 그렇다고 느낀 건지 잘 모르겠음을 실토;;).
영화 초입에 에바의 남편이 편지쓰는 아내를 몰래 지켜보다, 자기가 제일 좋아하는 아내의 책 구절이라며 읽어주는데 그 문장이 결국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 같다. "인생에도 연습이 필요하다. 그래서 나는 끊임없이 애쓰고 있다."(몹쓸 기억력으로 정확히 이런 문장인지는 자신 없으나 이런 의미였음) 엄마 노릇, 딸 노릇, 사람노릇도 죽을 때까지 계속 연습하고 애써야 할 것이다. 암, 그렇고 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