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중엔 어쩔 수 없이 슬슬 일을 시작해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2월엔 그야말로 참 열심히 놀고먹었다. 머릿속도 좀 채워줘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기대만큼 책을 많이 읽지 못한 건 어쩔 수 없다. 그래도 전시는 세 개나 봤잖니. ^^; 처음엔 다 따로따로 포스팅할 작정이었으나 벌써 다 기억이 가물거려 대강 기록만 해둘 요량이다. 안 그러면 몇달 지난 뒤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워져버릴 지도 모르니까.
1. 전시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체코프라하국립미술관 소장품전.
덕수궁 미술관에서 4월 21일까지 전시중이다. 전시에 대해서 아무런 지식도 흥미도 없었으나, 덕수궁 갔던 날 순전히 '프라하'에 끌려서 들어갔었다.
1905년부터 20세기 중반까지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격동의 시기를 보냈던 체코의 근현대 미술 엿볼 수 있는 전시였다. 덕수궁미술관을 종종 가면서도 항상 내가 까먹는 사실이 있다. 덕수궁 미술관은 현대미술관의 덕수궁 분점이라 언제든 근현대 예술작품만 전시한다는 점! 그런데 나는 특히 현대미술의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를 별로 안좋아한다는 점! ㅋㅋㅋ
단순한 나의 시각에 '예뻐' 보이는 그림들도 더러 있었지만 나로선 도무지 이해하기도 어렵고 제목과도 매치하기 어려운 작품들이 대거 전시되어 있어서 그런 그림들은 설렁설렁 보는둥마는둥 지나쳐야 했다.
운명론자는 아니라고 생각하건만, 가끔 살다보면 기막힌 우연의 일치랄까 무언가 나의 삶이 예정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가 있다. 그날도 그랬다. 얼마 전 책을 읽다가 20세기 초 일어났던 '미래파'니 '미래주의 선언'이니 '마리네티'니 하는 이야기에 골머리를 싸매고 좀 찾아본 적이 있었는데, 떡하니 어느 전시실 벽에 적힌 작품설명에서 같은 이야기를 맞닥뜨렸다. +_+ 신기하기도 하여라.
체코 역사와 화가들에 대해서 하나도 아는 게 없어서 팸플릿을 열심히 읽어보아도 여전히 무식이 통통 튕기는 느낌이었지만, 체코와 프라하에 대한 선망과 허영심으로 택한 전시에서 더 무엇을 바라리. 같은 시기 우리나라 화가들의 작품을 작년에 이어 전시실 한 군데에서 계속 전시하고 있었기에 비교해보는 묘미도 있었다. 특히 저 그림을 그린 쿠프카의 자화상은 구본웅이 드린 이상 초상화랑 분위기가 몹시 흡사했다. 굵은 유화붓 터치며 파이프 물고 있는 것까지도.
공연히 마음에 들었던 그림 하나 더...
[1922년의 레트나] 블라스타 보스트르제발로바피쉐르바, 1926년
뒷짐진 할아버지의 뒷모습이 정겹다. 샤갈의 템페라 벽화 느낌도 나고.. +_+
<옛사람의 삶과 풍류> 조선시대 풍속화와 춘화
단원 김홍도 [운우도첩] 가운데...
갤러리현대와 두가헌 갤러리에서 2월 24일까지 했던 전시라서 끝나기 전에 얼른 보러가야했다.
단원, 혜원을 비롯한 여러 화가들의 조선풍속화도 풍속화려니와 '화끈한' 19금 춘화도 함께 전시되어 있다지 않은가. ㅎㅎㅎ
생각만큼 작품 수가 그리 많지도 않았고 변변한 팸플릿도 없는 게 내심 불만이었지만, 갤러리 2층에 따로 모아둔 춘화는 노골적인 정도가 나의 상상을 뛰어넘는 것이라 좀 놀라웠다. 단원과 혜원의 춘화첩이 일반에 공개되는 건 처음이라는 듯한데, 얼굴 뜨끈해질 만큼 노골적이면서 동시에 아름다운 예술성까지 잃지 않다니 역시 대가는 다르단 느낌.
입장료 5천원에 함께 가 볼 수 있었던 두가헌 갤러리에선 구한말 외국인들에게 절찬리에 공급되었다는 김준근의 풍속화들이 따로 전시되어 있었다. 단원, 혜원의 선과 섬세한 인체묘사에 높아진 눈으로 접하니 그림의 수준이 그리 드높다 할 수 없었지만 현란한 색채며, 당시 한글 표기법, 재미난 세시풍속이 흥미로웠다.
<한옥이 돌아왔다>에도 잠시 소개된 두가헌 한옥을 구경할 기회도 반가웠다. 안에 들어가 차 한잔 하고팠으나 시간에 쫓겨 그냥 나온 것이 한이라면 한.
그래도 두가헌 마당 한 귀퉁이 의자에서 다리는 좀 쉬다 나왔다. 저렇게 나무를 심고도 마당에 나무데크를 깔면 흙먼지 풀풀나는 걸 방지할 수 있겠구나 싶다.
하지만 한옥의 목재와 유리는 서로 참 안어울리는 재료라던데, 유리에 습기가 맺혀 나무 썪기 딱 좋다던데, 몇년째 또 이렇게 건재하고 있는 걸 보면 건축전문가들이 다 방법을 마련해놓았나보다. 쓸데없는 염려 말고 한옥에 살고프면 그저 땅과 돈만 준비하면 되겠다. ㅠ.ㅠ
<팀 버튼>전
겨울방학 내내 사람들로 바글거린다는 얘기를 듣고 최대한 일정을 늦추어 2월말에 갔는데도 인파가 대단했다.
팀 버튼 영화개봉하면 언제 시작했다 끝났는지도 알 수 없게 슬그머니 내려가는데, 왜 이런 전시는 이토록 인기가 높은걸까? ㅋㅋ
4월 14일까지 계속 전시 중이니, 요새도 사람이 그리 많으려나 궁금타. 서울시립미술관에서 하고 입장료는 12000원.
어린애들 데리고 온 엄마들이 특히 많아보였다. 아오... 애들은 막 싫고 무서워하는데 엄마들은 참신하고 재미나지 않느냐며 막 들이대고... 참신한 발상에 목매는 우리나라 부모들이 가엾을 지경이었다. 관람객이 많으면 난 전시를 보기도 전에 지치는 느낌이다. 이날도 신기해서 좋아라 구경을 다니긴 했지만 운동화를 신고도 왜 그리 허리 다리가 아픈지... 나중엔 머리도 어질어질.
그치만 팀 버튼은 참... 대단한 사람이 틀림없다. 선 몇 개로 어떻게 그런 그림을 만들어낼 수가 있는지! 헬레나 본 햄 카터를 배우로서도 무척 좋아하지만, 팀 버튼 영화에 또 그렇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겠느냐고(물론 조니 뎁은 예외 ^^;)! 심지어 둘이 부부라니... 헐...
전시장 입구에 세워놓은 대형 조형물도 재미났지만 창문에 유령신부 캐릭터가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꾸며놓은 거 기발하다~ 하하하.
2. 공연/영화
<오페라의 유령>
내가 제일 좋아하는 황홀한 가면무도회 장면 ^^;;
<오페라의 유령> 탄생 25주년 월드투어 내한공연이 잡혔다더니만, 예매도 전쟁이었다. 이런 공연은 그저 티켓 오픈일에 경건히 기다렸다가 광클릭을 해야지, 안 그랬다간 좋은자리에서 볼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야하는 지경이 되었다. 허 그것 참... 암튼 1월초에 알아보니 VIP석과 R석은 3월까지 전공연 모두 한두 자리만 남아있을 정도. 9만원짜리 S석도 감지덕지로 여기며 2월말 날짜로 예매를 해놓고 설레며 기다렸다.
이번 공연에선 샹들리에가 그야말로 '뚝' 떨어져줄 것인가!
그러나 아쉽게도 샹들리에는 그리 극적으로 떨어져주지 않았지만 (무대장치 기술도 죄다 가져올텐데 왜 한국 공연에선 매번 기함할 정도로 샹들리에가 뚝 떨어지지 못하고 살살 줄을 타는지 그게 정말 궁금하다!) 공연은 역시나 황홀했다. 마음 같아선 끝까지 남아 앉아 있다가 팬텀 역할 배우한테 사인도 받고 싶었는데... ㅎㅎㅎ 파트너가 귀가를 서둘러 포기했다. 삼성 블루스퀘어 공연장은 처음 가보았으나, 2층에 앉아서 그런지 음향이 그닥 흡족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감동받았으면 된거지만...
25주년 기념투어이기 때문일까. 공연장 밖에 의상과 소품들이 유리상자 안에 진열되어 있어 눈요기하기에도 좋았다. 마치 뮤지컬 초반부 경매장을 살짝 엿보는 느낌도 들고... 간만에 귀호강 눈호강 잘 했다.
라이프 오브 파이/베를린
<라이프 오브 파이>는 3D로 상영해주는 데가 점점 드물어져 어렵사리 먼데까지 가서 보았는데, 평일 오전부터 사람이 그렇게 많을 줄 모르고 예매 안하고 갔다가 맨앞줄에서 목을 꺽으며 봐야했다. ^^;
그런데 일신의 불편함을 잊을 정도로 홀딱 빠져들었으니...
보고나자마자는 무신론자로서 새삼 이것저것 생각할 거리가 많았으나 벌써 다 까먹고말았다. 군데군데 영상이 정말 아름다워서 이안 감독이 정말 대단한사람이구나 싶었던 것과 책으로도 읽어보고 싶었다는 충동 정도만 떠오를 뿐이다.
<베를린>은 별 기대없이, 나 류승완 감독 영화 별로 안좋아하는데.. 궁시렁거리며 들어갔다가 뜻밖에 재미있게 보았다. 연기야 역시나 하정우가 갑이었지만, 한석규의 초라한 모습과 생활연기도 좋았다. 액션영화도 너무 힘들어가지 않게(여전히 내겐 좀 과하고 길다 싶은 액션 장면 있긴 했다만;;) 폼나게 만들 수 있구나 싶었다.
3. 2월에 읽은책
우리궁궐 이야기, 홍순민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
그레이스 1, 2, 마거릿 애트우드
고양이눈 1, 마거릿 애트우드
<그레이스>는 잠을 미뤄가며 단숨에 미친듯이 읽었고 <고양이눈>은 좀 괴로워하느라 천천히 읽었다. 올해는 마거릿 애트우드를 좀더 찾아 읽기로 결심했고, 초상 시리즈(?)로 <여인의 초상>도 읽고 싶어졌다. 역시 읽는 맛은 소설이야, 라며 읽다 만 과학책들은 올스톱. ㅎㅎㅎ
4. 식탐의 흔적
밖에 나가서 조미료를 많이 넣어 만든 음식을 먹고 들어오면 어김없이 탈수현상에 시달린다. 물을 두 주전자쯤 마셔주어야 갈증이 가시는 듯한... 그래도 내가 안 만든 요리는 죄다 맛있다, 싶은 심정으로 나가먹고 살긴 한다. 그러다 담백한 음식점을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다.
동탄 <담숙>
예약제로만 운영하는 한식당이라며 친구가 데려가주었다.
조미료를 쓰지 않아 집에서 만든 것처럼 담백한 음식들은 종종 '맛없다'는 평가를 받기 쉽다. 바깥 음식이야 맵고 간간하고 자극적이어야만 맛집으로 소문나고 사람들의 발길을 끌지 않나 말이다.
그런데 여기는 소신있게 주인장 부부가 개발하고 만든 음식들로 정갈하게 한정식을 내오는 집이다. 아쉽게도 내가 정신없이 차에 전화기를 두고 내린 바람에, 사진은 친구한테 전달받은 이거 딱 한장이다. +_+
죽이랑 블루베리 소스를 뿌린 샐러드, 낚지볶음, 두부버섯샐러드 등등... 기억도 잘 나질 않는 음식들이 죄다 맛있었다. 사진 속 음식은 표고 탕수와 섭산적(아마도;;).
쫄깃한 표고탕수가 엄청 맛있어서, 상대적으로 파채 싸먹는 고기요리는 그저그렇게 느껴졌다. 담에 또 가게 되면 코스별로 죄다 사진 찍어다가 집에서 시도해봐야(ㅠ.ㅠ 이 투철한 밥순이 정신;;)겠다.
광화문 <어반가든>
먹기에 바빠 사진은 없다. 작년 겨울 모임때 갔다가 예약 안한 사람은 2시간 기다려야 한다는 말에 쫓겨나오며 언제고 한번 먹어보리 결심했었는데, 팀버튼 전시회 본 날 문득 떠올라 찾아갔다. 덕수궁 정동길에서 거의 프란치스코 수도회까지 올라가 왼편 골목 안에 자리잡고 있다. 여름엔 온갖 화초로 유명하다는 얘기 들었는데, 이날은 꽃이며 화분 쳐다볼 여유도 없었던 거 같다. 런치세트가 17000원 정도라서, 싸지도 않은데 맛없으면 어쩌나 일행들 마음에 안들면 어쩌나 바짝 쫄았었다.
샐러드의 신선도나 수프는 마음에 들었는데, 파스타 맛은 딱히 엄청 맛있다고 느끼진 못했던 것 같다. 내가 또 요즘 집에서 파스타 요리에 심취하고 있어놔서;;; ㅋㅋㅋ
마지막 커피까지 주는 건 좋았는데, 종이컵에 주는 건 마이너스, 커피 맛도 그저그랬다. 커피까지 머그잔이나 찻잔에 주고 커피맛도 훌륭했으면 얼마나 더 좋았을까. 쳇. 다음엔 정동극장 안에 있는 파스타집엘 가보고 비교해보리라
올림픽수제비 굴국밥 따라하기
이제는 나도 굴국밥의 맛을 제대로 낼 수 있게 되었다! 하핫.
지난번 국물 낼 때 멸치까지 넣었더니 오히려 과잉이었던 듯.
무와 다시마로만 깔끔하게 낸 국물에 소금간을 한 뒤
파, 마늘, 생굴, 매운고추, 부추를 넣고 포르르 한소끔만 끓여 밥에 부어 먹으면 된다.
몇번 해먹어보니, 큼지막한 양식굴보다는 확실히 자잘한 자연산 굴로 끓였을 때 바다향이 더 싱그럽게 난다.
뚝배기에 담아내놓았을 땐, 정말로 올림픽수제비에서 맛본 거랑 비주얼까지 똑같았다. ^^;
노로바이러스의 기승으로 생굴 먹기는 좀 걱정스러우니 날 더 더워지기 전에 몇번 더 해먹어야지. 냠냠냠.
보름 나물
올해는 오곡밥과 나물을 볶아야 하는 대보름 전날이 하필 사촌 동생 결혼식이었다.
강남에서 무려 2시간도 넘게 걸려 운전하고 집에 오느라 녹초가 된 몸을 다시 꾸역꾸역 움직이며, 좀 서럽기도 했다.
안먹고 살면 될텐데, 왜 이렇게 식탐에 집착하느냐고!! ㅠ.ㅠ
하지만 이번엔 특히나 엄마가 애호박과 가지를 손수 말려놓으셨던 걸 물에 불려놓고 나갔기때문에 내버려둘 수도 없었다. 그나마 지쳐서 홀수로 못만들겠으니, 네 가지 나물로 끝내자고 왕비마마와 합의를 보았다.
오곡밥이 아니라 10곡밥은 될 듯한 찰밥에다 저 나물 반찬으로 김쌈을 해먹는데, 어우... 맛있어서 또 짜증이 났다. (아니 왜?) 사먹는 게 더 맛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고생을 사서 하지 않아도 될 텐데.. 하는 생각이 잠시 들었기 때문이다.
친구 하나는 떡집에서 오곡밥이랑 나물까지 다 사왔어도 맛있게만 먹었다던데 말이다. 으휴.
만수무강 약식
설날에 오지랍넓게도 약식을 또 만들었었다.
다른 먹을거리가 많아 그날 약식이 절반도 더 남았길래 작은댁이랑 동생네, 사촌동생들까지 죄다 싸보냈더니 왕비마마가 퍽이나 섭섭해하셨다. 당신은 약식을 딱 한입밖에 못 드셨다나 뭐라나. 나 원 참...
(그러나 나중에 올케들의 증언에 따르면 분명 한입만이 아니었다 ㅋㅋㅋ)
어쨌거나 생신도 가까워오겠다, 그렇다면 원없이 약식을 한판 다 드시게 해드리겠다며 호기롭게 약식찌기에 돌입했다. 당뇨환자용으로 설탕과 찹쌀은 양을 좀 줄이고 견과류는 더욱 풍성하게 잔뜩 넣어서...
그리하여 탄생한 만수무강 약식이다. 정말로 난 한두 조각이나 먹었나, 약식 한솥을 사흘 안에 홀로 다 드시는 바람에 무서워서 당분간은 혈당 체크도 하지 못했다. -_-;
그러고 보니 정말 2월 한달은 죽어라 먹는 것에만 탐닉했던 것 같다. 먹고 죽은 귀신이 때깔도 좋다, 가 우리 두 모녀의 좌우명. ㅎㅎㅎ
보너스로 요즘 점심 메뉴로 종종 등장하는 입때표 해산물 파스타의 위용을 공개한다. 두둥~ ㅋㅋㅋ
심지어 파스타 접시도 새로 장만했다는.... ;-p 매번 몸 생각하며 건더기를 하도 많이 넣어 담고 나면 면발이 잘 안보인다. ㅋㅋ 내 그릇에 대충 담느라 가장자리에 척 걸쳐진 면발을 숨기려는 시도로 찍었으나 실패. 다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