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에 해당되는 글 181건

  1. 2008.02.29 변함없음 10
  2. 2008.02.13 녹지않는 눈사람 10
  3. 2008.01.28 경주를 가다 11
  4. 2008.01.16 일상복귀 17
  5. 2007.12.31 새해라니 6
  6. 2007.12.03 조카랑 하는 놀이 12
  7. 2007.11.28 아 고흐... 9
  8. 2007.11.05 커피 유난 17
  9. 2007.11.03 장갑 5
  10. 2007.10.16 홍옥 예찬 18

변함없음

삶꾸러미 2008. 2. 29. 22:03

사람들은 좀처럼 변하지 않는다.
스무살 시절엔 도저히 알 수 없던, 사람들의 변함없음을 서른살이 되고 마흔살을 넘어서면서
새삼 깨닫는다.

돌이켜보면 아득하기도 하고 눈깜짝할 새에 지난 세월 같기도 한 시절에 처음 만나
10년, 20년을 함께, 또는 따로 보낸 사람들과 한 자리에 모이면 친근함과 낯설음을 동시에 느낀다.
어깨를 휘젓는 걸음걸이, 듣기 좋은 낮은 목소리, 까르르 귀를 찌르는 독특한 웃음소리, 언제나 썰렁하기만 한 유머, 수줍은 듯 빙그레 웃기만 하며 술잔을 드는 손길, 시비를 거는 것 같은 거침없는 말투, 못마땅한 사회에 대한 투덜거림과 불평, 술자리에서 먼저 일어나는 건 절대 용서 안되는 고집 같은 것들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운동화 대신 정장과 구두가 더 어울리는 외모의 까닭모를 반듯함, 그들이 내미는 명함에 새겨진 어마어마한 직함, 눈가에 살짝 내려앉은 주름살, 솟아오른 배나 숱이 엷어진 정수리와 넓어진 이마, 서로 다투듯 술값을 계산하겠다고 내미는 법인카드, 휴대폰에 저장해놓고 보여주는 아이들 사진, 가끔 너무도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재테크와 골프 이야기 등이다.

그런 자리에서 나는 정말로 20년전으로 돌아가 탁자를 두들기며 웃다가도
금세 또 유체이탈을 해서 자기 몸을 내려다보는 혼령처럼 전혀 낯선 이들의 대화를 천장쯤에서 내려다보고
있는 느낌을 수시로 오간다.

어딜 가나 제일 변하지 않았다는 소리를 듣는 게 이젠 뒤떨어졌다는 소리로 들리니
내게도 확실히 변한 건 있다.
뭐든 할 수 있다고 떵떵거리던 자신감과 낙천적인 사고는 이제 씁쓸한 자괴감에 쉽사리 자리를 내주고 만다.
그래도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약간 허황된 꿈과 로맨스를 기다리고
휘황찬란하고 복잡한 무대 한 가운데서 조명을 받는 것보다 어둑한 구석에서 소박하게 즐기는 게 더 좋고
재테크로 골치아프게 벌어들인 재산보다 인복 많은 게 더 기쁘고
편한사람들과 함께하는 술자리가 기대되고 지금껏 맺어온 인간관계 속에서 행복을 느낀다.

들여다 보면 하나도 변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세월과 함께 확실히 성숙한 사람들 틈에서
본래의 미숙함과 치기를 마냥 갖고 살면서, 나 하나쯤 그런 사람도 있어야지, 하고 위로하는
내 목소리에 점점 힘이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세월의 무게일까.

변함없고 한결같다는 게 자랑일 수도 있지만
어쩐지 미련스런 집착처럼 느껴지는 날, 그게 바로 오늘이다.
그러고 보니 날씨따라 펄럭거리는 감상주의도 하나도 변하지 않았군.
이러니 내일은 또 펄럭펄럭 행복할 수도 있겠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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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지않는 눈사람

놀잇감 2008. 2. 13.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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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까닭없이 기분이 바닥을 기어다닐 때
고개를 들어 조카들이 남기고 간 흔적들을 돌아보면 단박에 미소와 함께 통통 튀는 활력이 샘솟는다.
명절 때 조카들과 만들기를 하며 놀 때였나 보다.
아직은 제도권 교육의 틀 속에 갇히지 않아 가장 유연한 사고와 풍부한 상상력을 자랑하는 지환이(6살)가
혼자 방문 닫아걸고 후다닥 만들어갖고 나와선 <눈사람>이라고 자랑한 작품이다.

이면지 두 장을 마구 구겨 셀로판 테이프로 둘을 연결하고 얼굴을 그려넣은 눈사람이
하도 예뻐서 모니터에 붙여놓고 늘상 감상할 터이니 선물해달라고 졸랐는데
지환이도 자기 작품이 매우 마음에 드는지 결국엔 떼어가 버렸다.
(절대로 녹지는 않는데.. 함부로 다루면 이 눈사람 역시 찢어질 수 있다는 단점이 있다. 조카네 집으로 입양간 이 눈사람은 벌써 찢어지고 말았다는 듯하다.)

어쨌든 고모에게 남은 건 사진 뿐이지만 이것만 봐도 행복이 가슴에서 퐁퐁 솟아오른다.
주말에 놀러오면 또 만들어 달래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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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를 가다

여행담 2008. 1. 28. 17:31
방방곡곡 아직 안 가본 곳이 더 많기는 하지만
경주는 내가 제주도 다음으로 좋아하는 국내 여행지다.
제주나 경주나, 그저 눈길 닿는 곳이면 다 아름다운 그림이 되고 이야기가 숨겨져 있는 느낌이라
갈 때마다 그 감흥이 조금씩 달라지는 여러 개의 얼굴을 갖고 있달까.

고등학생 때 기차를 타고 처음 찾아가 불국사 근처의 형편없는 여관촌에서 먹고자며
둘러본 경주 수학여행은 '경주'보다 '수학여행'에 방점이 찍히는 기억으로 남았었다.
불국사, 석굴암, 첨성대 따위의 기억은 죄다 그 앞에서 60명이 빨간 모자를 똑같이 쓰고 찍은
단체사진으로 남았을 뿐이었고, 천년 고도 신라의 수도 서라벌로서의 경주 느낌 보다는
기차가 터널을 지날 때 기관사 아저씨를 구워삶아 객차 불을 끄고는 선생들에게 밀가루와 생닭발을 던진 일,
여관방에서 단체로 몰래 술마시다 뛰쳐나가 주정 부린 친구때문에 모든 것이 발각돼 단체기합을 받던 일,
토함산 일출을 본다며 깜깜한 새벽에  몽둥이 든 양치기에게 몰린 양떼처럼 바삐 산길을 오르다
숨이 딸려 몰래 뒤쳐진 것 뿐인데, 뒤 따라 오는 남학교 학생들과 모종의 접선(?)을 시도하려는 몹쓸 문제아 취급을 받아 억울했던 일, 모든 반찬이 비리고 짜기만 해서 너무도 맛 없었던 여관 음식 때문에 단식투쟁(?)을
하며 초코파이로 버텼던 일... 등등 주로 사고 치고 즐거워 했던 수학여행의 추억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후 10년쯤 지나 가을 단풍이 예쁠 때 찾아간 경주는 정말 숨겨진 이야기 보따리 같은 모습으로 나를 반겼고
똑같은 자리에서도 나는 전혀 다른 감흥을 느낄 수 있었는데
그 이유는 운 좋게도 분황사 터에서 만난 어떤 대학원생 덕분이었다.
박사 논문을 준비중이라던 그는 안내문을 대충 읽고 종알종알 떠들면서 몰려다니는 우리에게
국사책에서 그림으로만 봤던 모전석탑을 제대로 보는 법을 설명해주었고
유적지 한 귀퉁이에 그냥 아무렇게나 놓여 굴러다니는 바위 하나도 예전엔 어느 돌부처의 몸뚱이나 어깨였을 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정말로 어느 마당 한 구석에 절반쯤 파묻혀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석상과 돌부처를 발견하는 재미를 알게 해주었다.

이번엔 1월이라 무료 문화재 설명 도우미도 없었고 운 좋게 신라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을 만나지도 못했지만
그냥 아는 만큼, 모르는 만큼 휘적휘적 돌아다니며 어설피 구경한 경주도 나쁘지 않았다.
아마도 50년만에 다시 경주를 찾은 엄마와
20년 만에 다시 경주에 간 막내, 15년 만인 올케,
10년이 조금 넘은 나, 그리고 난생 처음 경주에 가본 어린 조카의 느낌을 비교하는 묘미가 워낙
특별했기 때문일 것이다.

같은 여행지에서 매번 다른 느낌을 받게 되는 건
어쩌면 달라진 내 나이뿐만 아니라 곁에 있던 사람들이 달랐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공통점이라면 수학여행 이후 늘 그랬듯 이번 경주여행도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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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복귀

투덜일기 2008. 1. 16. 23:00

명절때 수십명의 친척들이 와글거리다 돌아간 뒤에 좁아터진 집이 몹시 넓어보이고
이상스레 사방이 고요해진 느낌이 지금도 든다.
어젯밤 이 시간만 해도 자라고 깔아놓은 이불 위에서 공주와 무수리는 가열차게 할리갈리 게임을
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
드디어 조금 전 공주가 집으로 돌아갔고 나는 자유의 몸이 되었다!
조용하고 한가로운 분위기 속에서 나는 물론 제일 먼저 컴퓨터 앞에 앉아 블로그질에 여념이 없다.
3박4일간 컴퓨터 앞에 앉을 수 있도록 허락된 순간은 정민공주의 싸이질을 돕고 방문자수를 올리느라
공주의 감시 하에 내 미니홈피를 찾을 때 뿐이었다. *_*
어젠 잠시 블로그질 한답시고 올린 아랫글을 공주한테 들켜서 빨랑 지우라고 몇대 또 두들겨 맞아야 했다. 큭.
물론 공주가 잠든 뒤에 (무수리는 당연히 공주님 옆에 누워 꼭 껴안고 재워드려야 한다) 일어나서 일을 할 수도 있는 일이지만 온종일 시달린 뒤끝엔 내가 먼저 졸음이 쏟아지기 일쑤라 나흘 간 일은 완전히 포기했었다.

어쨌거나 3박4일을 할머니댁에서 고모무수리의 보필을 받은 공주의 감흥은 두 문장으로 요약된다.
"엄마랑 아빠랑 지환이가 보고는 싶은데 집에 가기는 싫은 거 있지!"
"응, 원없이 놀았어." (원없이 놀았냐는 제 엄마의 물음에 대한 답이었다)

욕심쟁이 공주가 "원없이 놀았다"는 대답을 할 정도면 정말로 제 성에 찰 만큼 고모를 괴롭히며 실컷
놀았다는 뜻이다. ㅎㅎ
몸은 좀 고달펐지만 나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며칠 잘 놀았다.
웃는 얼굴이 잘 안만들어져서 거울 보면 심술마녀처럼 보인다고 늘 불평하시던 왕비마마도
공주 덕분에 수시로 웃으셔서 좋았다.

오면 반갑고 가면 더 반갑다는 손주들과 조카들의 존재는 확실히 우리 모녀에게 행복의 근원이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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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해라니

투덜일기 2007. 12. 31. 16:13
겨우 하루 차이로 헌해와 새해를 나누는 건 아무래도 억울하지만
아무리 앙탈을 부려도 2008년은 몇 시간 있으면 시작될 것이다.
어차피 우주의 세월에 비하면 인간들의 1년 그까짓것 찰나에 불과하다고 위로는 해보지만
나이가 들수록 지난 1년은 정말로 찰나처럼 느껴져 허허로운 마음이 드는 걸 막을 도리가 없다.

벌써부터 사두었던 새 달력을 며칠 전부터 걸어놓은 걸 보면
마음의 준비는 해놓은 것 같기도 한데
연말모임에서 덕담과 함께  지인들이 일깨워준  나의 나이는  꽤나 어마어마하여 더럭 겁이 난다.
남들의 잣대로 나를 재단하지 말자고 다짐해도 시기적으로 한해를 정리해야하는 순간이 오면
은근히 주눅이 드는 걸 어쩌랴.

게다가 외형상으로 나의 2007년은 참 보잘것없었다.
표지갈이를 하거나 보급형으로 다시 나온 책을 빼고 순수한 신간 번역서는 겨우 두 권.
번역작업을 마친 건 5권.
핑계를 댈 수 있는 큰일을 치렀으니 나름 수긍은 가지만
'직업인'으로서 그다지 열심히 살지는 않았음은 확실하다.

그래도 '딸'로서 '고모'로서 '누나'로서 '친구'로서
그리고 '블로거'로서는 꽤나 아등바등 노력했다고 생각하며 자책만 하지는 않을 작정이다.
이만하면 잘 산 거지 뭐!

새해에도 돈벌이나 재테크 따위로 성공과 행복을 가늠하는 남들의 잣대에 휘둘리지 말고
'나'답게 소박하고 씩씩하게 자알 살아갈 수 있기를 빌면서 새해를 맞이해야겠다.

아 끝으로...(원래는 이 이야기를 하려고 글을 쓰려던 것이 변질되고 말았다)
이 공간에서 새로이 관계를 맺게 되어
알게 모르게 나에게 기쁨과 힘을 전해주신 여러 블로그 이웃분들께 깊이 감사한다.
인간관계란 참 쉽지 않은 일이지만
그래도 잘 도모한 관계는 늘 내게 큰 재산이고 행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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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살 소녀부터 18개월된 아기까지 어느덧 조카가 넷이다.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들이 과연 언제까지 나를 따를 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인기관리 차원에서 늘 온몸을 다 바쳐 놀아주는 못말리는 고모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나의 조카들은 어딜 가든 이동할 때 서로 고모 차를 타겠다고 난리를 피우고
(가끔 조카 셋을 앞뒤로 다 태우고 어디론가 운전해 가다보면 사고 안내는 게 나도 신기하다 ㅠ.ㅠ)
밥먹을 땐 서로 고모 옆에 앉겠다고 싸우다 울거나
왜 만날 정민이 누나만 고모 옆에 앉으냐고 항의하며 질투를 하기도 하며
우리 집에 오면 현관문을 들어선 순간 할머니한테 인사고 뭐고 없이 "고모, 놀자~~~~!"라고 외친다. -_-;;

암튼 조카들에게 더 큰 사랑을 베풀고 받기를 원하는 이 땅의 수많은 고모와 이모들을 위하여
내가 조카들과 하는 놀이들 가운데 최근에 가장 인기가 많았던 것들만 추려 전격 공개하는 바이니
널리 애용하시기를 권한다. ^^
(허나 다른 집 조카들에게도 열화와 같은 성원을 받을지는 사실 잘 모르겠다 ㅋㅋ)




 





가장 훌륭하게 완성된 윗단 맨 왼쪽의 케이크는 5살 난 지환이가 그린 그림에 내가 색만 덧칠한 것이고
나머지는 정민공주의 주문에 따라 내가 그린 것.. ;-)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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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고흐...

놀잇감 2007. 11. 28. 00:47

미술관을 찾을 때마다 조금씩 설레기는 하지만
이번 고흐 전시회는 거의 봄부터 기다렸던 까닭에 마치 헤어진지 오래 된 지인을 만나러 가는 기분이 들 만큼
가슴이 콩닥콩닥 설렜다.

쌀쌀하긴 해도 발밑에 뒹구는 낙엽만은 여전히 가을 분위기 물씬 풍기는
정동길을 걸어 시립미술관 언덕을 오르니
어찌나 마음이 뿌듯하던지...

미즈키님이 귀띔해준 덕분에 천원 할인도 받고 예매 선착순 만명에게 준다는 샤갈 소도록을 두 권이나
받았으니 또한 기쁘지 아니할 수가 없었으나 ^^;
현장에 가보니 GS칼텍스 보너스 카드가 있으면 4명까지는 천원 할인이 되고 포인트가 있으면 2천원까지도
할인이 된다는 걸 알게 되었다.

미리 확인했던 대로 전시관은
네덜란드 시기와 파리 시기, 아를 시기, 생레미 시기, 오베르 시기로 나뉘어
화가로서의 삶을 시작한 27세에서 불운한 생을 마감한 37세까지의 인생을 조망해 놓았는데
맨 마지막 전시관엔 초기작인 드로잉 작품으로 마무리 되어
어쩐지 끝이 밋밋한 느낌을 버릴 수가 없었다.
만일 다음 관람 계획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인상주의 화풍이 극대화된 아를 시기와 생레미 시기의 작품들을
몇 번 더 둘러보아 눈과 마음의 호사를 좀 더 마음껏 누렸을 것이다.

이번 전시의 감동은 역시나 고흐의 작품과 삶을 조금이나마 가까이서 집중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일 텐데
고흐의 새파란 눈동자와 정면으로 마주한 느낌이었던 자화상을 접하고는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약간 뜨거워져 당혹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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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 1887년 파리.종이에 유채. 네덜란드 반 고흐 박물관 소장

무척 나이들어 보이는 이 자화상은 고흐가 '겨우' 서른네 살 일 때 그린 것이다.
동생 테오가 보내주는 화구와 캔버스로 그림을 그린 탓에 고흐의 작품들은 대작이 거의 없다.
옆 작품들에 비해 몹시 크게 느껴지는 <아이리스> 그림의 높이가 1미터도 안될 정도이고
이 자화상이나 <밀 이삭> 같은 그림은 정말 아담하다.
그럼에도 작고 소박한 그의 작품 앞에 서면 화폭이 점점 커져 나를 압도하며 빨아들이는 느낌에 사로잡힌다.

고흐에 대한 나의 편애 이유에는 아름다운 색채와 꿈틀거리는 유화의 질감 외에도
분명 그의 지난한 삶에 대한 안타까움이 크게 작용한 것이 틀림 없다.
작품 설명에도 나와 있었지만 화가를 괴롭혔던 극심한 조울증과 광기는 그림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하물며 생레미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그린 그림들도 얼마나 평화롭고 아름다운지 모른다.
그림을 그리는 작업이 그의 삶에 구원이었듯이, 여전히 그의 그림들이 여러 사람들의 고달픈 삶에 구원으로 다가오기 때문에 더욱 사랑받는게 아닐까.
아무튼 나는 오늘도 고흐의 노란색과 연두색과 다채로운 파란색의 향연 속에서 막연한 슬픔과 함께
훨씬 더 큰 감동과 행복을 맛보았다.
고흐의 작품들은 단순히 미술관에 대한 문화적 허영심을 채우는 것 이외에도 분명 내 영혼을 푸근하게 만들어주는 마법을 지녔다. 물론 나 혼자만의 편애의 결과일 수도 있겠지만.  

아무려나
제 아무리 뛰어난 인쇄술로 찍어낸 화집이나 도록이라 해도
역시 원작의 아름다움과 생동감은 제대로 담아낼 수가 없음을 미술관에 갈 때마다 깨닫는다.
<아이리스>의 노란 바탕은 그야말로 내가 고흐와 함께 제일 먼저 떠올리는 따뜻한 노랑색이었고
<프로방스 시골 야경>의 아련한 별빛과 달빛은 쓰다듬어주고 싶을 만큼 사랑스러웠으며
<생레미 정신병원의 정원>에 피어난 5월의 꽃과 신록은 보기만 해도 마음이 화사해졌다.

문제는 고흐 그림의 경우 보면 볼수록 더 욕심이 생긴다는 점이다.
고흐의 작품들이 빼곡히 걸려있을 유럽 미술관 순례는 물론이고(게다가 몇몇 주요 작품들은 미국에나 가야 볼 수 있으니 오호 통재라) 그가 생애 마지막의 70일을 보냈다는 오베르의 소박한 골목길과 밀밭,
그리고 밤의 카페 테라스가 있는 아를에 가고싶어서 몸살이 날 것만 같은 마음으로
휘적휘적 돌아왔다.

너무 원대한 욕심은 일단 접어두고
조만간 다시 전시회 보러갈 날짜를 고민하며 어렵사리 고른 엽서 3장이나 또 쓰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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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유난

식탐보고서 2007. 11. 5. 18:29
무슨 일에든 나는 그리 유난을 떨며 집착하는 유형은 아니다.
'오타쿠'라는 말을 나는 아주 최근에야 알았을 정도.
그렇기 때문에 커피를 꽤 좋아하고, 커피가 맛있는 찻집을 찾으면 퍽이나 기뻐하면서 마시긴 해도
그 오묘한 맛을 집에서도 내보겠다고 용을 쓸 생각은 없었다.

80만원이라는 거금을 들여 장만했다는 어느 지인의 막강한 에스프레소 머신을 봤을 땐
속으로 참 유난도 떤다...는 생각이 강했다.
집에서도 볶은 지 일주일이 지나지 않은 원두만을 특별히 사다가 그때그때 갈아서 맛있는 커피를
만들어 마시는 비용을 따져보면, 커피집에서 때로 6, 7천원을 훌쩍 넘기는 돈을 받는 것도 다 옳은 계산법이라는 그 언니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절차가 복잡하고 귀찮아서라도 그렇게 못하겠다고 속으로 툴툴 거렸었다.
그 뒤론 누군가 저렴하게 출시된 19만원짜리 에스프레소 머신을 자랑했고
밖에 나가 마시는 커피값 몇번(실은 몇십번이지만) 절약해서 집에서 마시는 게 훨씬 낫다고 열변을 토하는 걸
들었지만 나는 여전히 시큰둥했다.
꽤 여러 종류로 갖춰 놓은 커피 원두를 갈아서 한두잔씩 내려 마시면 내가 집에서 먹는 커피도 그리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커피귀신에 가까운 주변 지인들은 그 뒤에도 가스렌지에서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는 모카포트를
사들인다, 드리퍼를 장만한다, 유기농 커피를 마셔야한다, 생산자에게 이익이 제대로 분배되는 착한 커피를 마셔야한다, 요새도 구형 커피메이커로 커피를 내려마시는 건 원시적인 짓이다.... 계속해서 유난을 떨었다.

그래도 내 생각은 굳건했다.
모카포트다 에스프레소 머신이다 요란떨며 손수 만들어준 지인들의 커피맛이 생각만큼 그리 감동적이지 않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역시 서툰 목수가 연장탓 하는 법이라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정 맛있는 커피가 마시고 싶으면 나가서 사먹으면 될 것을, 그 맛을 찾아내겠다고 끙끙거리며 수고를 반복하는 건 어쩐지 시간낭비 같았다.
온종일 커피를 입에 달고 살아도 무사할 정도로 카페인에 강하지 않게 된 탓도 컸다.
암튼 기껏해야 하루 한두 잔 정도 마시는 커피, 에스프레소 기계에서 나온 거면 어떻고 커피믹스나 자판기 커피면 어떠랴 싶었다.
커피 마시면서 행복하면 그만이지.

그런데 요새 베트남 커피를 스텐레스 드리퍼에 제대로 담아 뽑아마시다 보니
점점 맛있는 커피에 대한 욕심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물며 똑같은 커피믹스로 커피를 타도 맛이 조금씩 다른데 (물의 양과 설탕 조절이 관건이다)
같은 드리퍼를 써도 물의 온도와 물 붓는 기법, 원두의 갈린 정도에 따라 맛이 천차만별인 건 당연한 일이다.
사실 무식하게도 나는 그간 베트남 커피도 머그잔에 여과지를 대강 얹어 뽑아 마실 정도 였는데
'정석'대로 드리퍼를 사용해 커피가루를 약간 뜸들였다가(!) 다시 물을 부어 마셔보니 확실히 깊은 맛이 살아났다.

역시나 커피에 관한 한 무식함을 자랑하듯
우리집 냉장고엔 커피 원두가 아직도 여섯 봉지쯤은 들어있는 듯하다. -_-;;
커피 욕심은 또 많아가지고 여행갈때마다 사오거나 지인에게 부탁을 하기도 했고
커피 좋아하는 나를 위해 지인이 선물한 커피도 꽤 됐다.
나름대로 꽁꽁 묶고 포장해 냉동실에 넣어두고 조금씩 꺼내 먹긴 했지만
볶은지 1주일이 지나면 원두가 산화되어 맛이 없다는 까다로운 커피광들의 시각에서 본다면
참 무식하기 그지없는 짓이라고 하겠다.

째뜬 요새는
밤마다 문방구 눈요기에 더불어 커피용품 눈요기를 하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다.
1, 2인용 카페모카 주전자도 어찌나 예쁜 게 많은지 고가품은 에스프레소 기계 못지 않다. -_-;;
드리퍼도 융에서부터 도자기, 황동, 플라스틱, 종이... 구멍이 하나짜리, 세개짜리, 둥근 모양, 세모 모양...
종류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많다!

물론 조만간 내가 지금보다 더 심하게 커피 유난을 떨게 될 것 같진 않다.
일단 귀찮음이 가장 큰 이유이고, 하루 한두 잔 마시겠다고 복잡한 커피용품을 사들이기엔 아무래도 너무 억울하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 단 한 잔의 소중함을 위해 더더욱 투자해야 한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돌아보니 중3때부터 나의 커피 애호 역사도 꽤 길다.
선생님 몰래 뽑아 마시던 자판기 커피 아니면, 나중에 도시락 김치병으로 더 많이 사용됐던 손님접대용 '맥스웰 화인' 커피가 처음이었으니 올해로 27년째인가 보다.
이제와서 새삼스레 커피 갖고  유난 떠는 대열에 끼는 것도 좀 우습겠지만
하여간에 원두를 갈아 좀 진하다 싶게 뽑은 커피향이 풍기면 나도 모르게 마음이 푸근하고 너그러워진다.
문득 잠잘 걱정 없이 마음껏 커피를 마실 수 있던 때가 그립다.
내가 커피 자체보다 커피 용품들에 더 심취하고 있는 것도 아마 못 마시는 커피에 대한 보상심리나 대리만족 때문일 게다.
에효...
오늘도 한밤중에 커피 마시고 싶으면 단골 사이트에 들어가 그저 모니터 화면이나 쓰다듬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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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갑

삶꾸러미 2007. 11. 3. 15:35


종교와 상관없이 크리스마스를 유별나게 따지던 시절,
그리고 찬바람이 불 무렵 생일을 맞은 이들에게
나는 별 고민 없이 늘 장갑을 선물했다.
스카프나 목도리가 많을수록 좋은 것처럼, 장갑도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은가..라고 혼잣말을 하면서.

언제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나지는 않지만
장갑은 사랑하는 이에게 선물하기 참 좋은 물건이라고 했다.
왜냐하면 *장갑; glove*에 '사랑; love'이 깃들어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사랑과 관련된 복합어가 아닌 한, 저렇게 love가 단어 안에 들어가 있는 말은 glove 말고는 없는 듯하다 (찾아내시는 분께 700원*a 드리겠습니다!)

장갑을 선물할 때 그래서 난 꼭 glove와 love 이야기를 전하곤 했는데
그렇게 십수년간 사랑을 전파했음에도 -_-;;; 정작 내가 사랑이 깃든 장갑 선물을 '타인에게' 받아본 기억은
딱 한 번 뿐이었다.
생일이 여름이기도 하고 크리스마스 선물을 굳이 안챙기게 된 탓임을 알기에
언젠가 한 번은 나에게 주는 크리스마스 선물로 부러 고급스런 장갑을 고르고나서 혼자 민망해한 적도 있었다.
하이고, 내가 이리도 사랑에 굶주렸구나 싶어서 말이다.

여전히 겨울만 되면 나는 장갑 코너에서 만지작만지작 욕심을 부리다가
집에 열 개쯤 있는 장갑을 떠올리고는 지름신을 물리친 뒤
정 사고 싶으면 지인에게 선물할 것을 하나쯤 고르는 게 다였다.

그런데 어제 '드디어' 간만에 나도 장갑 선물을 받았다.
가죽느낌이 부드럽고 손목을 꽤 길게 덮는 리본 달린 날씬한 장갑이다.
역시 주는 사랑보다 받는 사랑이 따뜻하고 푸근하다는 걸 실감하며
싱글벙글 오늘까지도 주책맞게 자꾸 장갑을 껴보고 있다.

날씨가 영하로 떨어지는 날..
난 또 겨울이 온 것을 슬퍼하겠지만
그래도 새 장갑 끼고 나갈 생각에 잠깐이나마 흐뭇할 수 있지 않을까.
뭐 그런 것이 행복이려니 하련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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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옥 예찬

추억주머니 2007. 10. 16. 21:05

홍옥에 관해 비슷한 글을 이미 쓴 것 같아 찾아보니 벌써 2년 전이었다.
다시 봐도 감흥이 지금과 별로 다르지 않아
퍼다가 조금 다듬어본다.

내가 어렸을 땐 사과 종류가 홍옥과 국광(어린 친구들 이런 사과가 있었다는 거나 알려나?)만 있는 줄 알았다.
제사나 차례상에 오르는 사과는 그냥 내게 "맛없는 사과"일 뿐이었고 그 이름이 '부사'라는 건 아마 나중에 알았던 듯하다.

홍옥은 새빨갛고 윤기 나는 얇은 껍질이 특색이고 새콤달콤한 맛이었던 반면
국광은 알도 작고 볼품이 없을 뿐더러 육질이 좀 단단하고 단맛이 많았는데
둘 다 가격은 저렴해서 우리는 가을 무렵 얼기설기 나무로 엮어놓은 상자에 담겨, 쌀겨에 파묻힌 홍옥이나 국광 사과를 한 '궤짝'씩 집에 들여놓고 오래도록 먹곤 했다.
홍옥은 금세 시장에서 사라지는 데 반해, 국광은 좌판에서 한겨울에도 구경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물론 후지, 또는 부사로 불리던 사과도 지천으로 깔려 있었지만 달기만 하고 푸석푸석한 사과의 맛을
나는 좀체 좋아할 수가 없었다.

암튼 내가 그리도 좋아했던 홍옥이 단맛 위주의 사과 종류에 밀려 사라진 것이 10년도 더 넘은 듯했다.
더불어 저렴하지만 때깔도 떨어지고 다소 촌스러운 이름의 '국광' 사과도 찾아볼 길 없었다.
해서 그나마 초가을에 나오는 초록색 풋사과로 새콤달콤한 홍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래곤 했는데...
몇년 전부터 드디어 홍옥이 과일가게에 다시 출현한 것이다!

모름지기 홍옥은 빤질빤질 매끄러운 빨간 껍질을 눈으로 음미하다
통째로 한손에 쥐고 와삭... 깨물어 먹는 것이 제맛이다.
그러면 새콤달콤 싱그러운 과즙이 입 한 가득 돌면서 행복함이 밀려든다.

고등학교 때였나...
야간 자율학습 때문에 도시락을 두개씩 싸가지고 다니던 시절,
가을부터 겨울까지
울 엄마는 도시락 두개와 함께 꼭 홍옥 사과 두 개를 함께 싸주셨더랬다. 디저트로 먹으라고..
그러면 손 힘 좋은 단짝 친구한테 반으로 쪼개달라고 부탁해서
반쪽씩 손에 들고 서로 바라보며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던 재미와 맛도 일품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홍옥을 통 만나볼 수가 없었기에 안타까워하고만 있었는데
이태 전 과일가게에서.. 수많은 종류의 사과 이름 속에서 '홍옥'이란 글씨를 보고 긴가민가.. 의심 많은 인간 답게 설마... 했었다. '홍옥'의 짝퉁임이 분명한 '홍로'를 좀 더 익혀놓고 사기 치는 게 아닌가 했던 것.
그러나 "속는 셈 치고" 한번 사와 먹어보니
역시나 새콤달콤 감동의 맛이었다.
나처럼 그간 홍옥을 오매불망 기다리던 사람들이 꽤 많았던지
행복하게도 해마다 요맘때면 반짝 과일가게에서 홍옥을 만날 수가 있다.

감기 기운을 이겨보겠다고 며칠 신경써서 과일을 먹으며 계속 홍옥 타령을 해댔더니
엄마가 드디어 새빨간 홍옥을 사다주셨다.
겉에 입혀 놓은 왁스 때문이라지만, 예전엔 홍옥을 먹기 전에 꼭 옷자락에(지금 생각하면 더럽기도 하다만;;)
쓱쓱 닦아 빤질빤질 더욱 윤이 나게 문지르곤 했다.
그러면 제일 처음 한입 크게 깨물었을 때 생겨나는 동그란 이빨 자국과 연노랑색 과육이 참으로 예쁘게 느껴졌다.
*_*

좀 전에도 엄마가 굳이 과도와 포크까지 쟁반에 받쳐다 주신 걸 마다하고 덥썩 집어
무식하게 와그작 와그작 깨물어 먹었다.
껍질에 농약성분이 남아 있거나 말거나, 홍옥은 무조건 껍질째 먹어줘야 제맛이란 말이지.
쨍쨍 얼음이 어는 겨울은 커녕 11월만 되도 홍옥은 자취를 감춘다.
과육이 연한 탓에 오래 보관하거나 유통시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러니 있을 때 많이많이 먹어두는 수밖에 없다.

으으...
글을 쓰면서도 다시 입안에 침이 돌아 얼른 또 새빨간 홍옥 사과 하나 꺼내
깨물어 먹어줘야겠다.

사고가 단순한 식탐가인 나에게 홍옥은, 이 가을 몇 안되는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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