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여섯살 무렵의 정민이 그림도 예사롭지 않다고, 천재소녀화가 확실하다고 사방팔방 자랑하고 다녔다가 세월이 흐른 뒤 상당히 머쓱해졌음을 잘 안다. 그래서 준우랑 지환이 때는 호들갑을 좀 덜 떨었던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요즘 여섯살 지우의 그림을 보며 나는 또 다시 입에 거품을 물다시피 감탄하며 자랑하지 않을 수가 없다. 바로 하루 전 작년과 올해 지우가 '비공식'적으로 집에서 그린 그림들을 자랑했지만, 미술학원(말이 미술학원이지 종일반 유치원이다)에서 '공식적으로' 그린 작품들은 그 깊이와 품격이 완전히 다르다. 천재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여섯살짜리가 이런 필치와 색깔과 구도로 그림을 척척 그려내는지 원! *_*
나야 눈에 콩깍지가 완전히 덮여 이성을 잃었다고 쳐도, 화가이신 우리 막내고모마저 전문가인 자기 그림보다 표현력이 뛰어나다고 인정한 그림이 꽤 많다. 그분도 역시나 워낙 아이들을 좋아하는데다 핏줄은 속일 수가 없으니--게다가 나의 조카들에게 화가 DNA를 물려주신 장본인이 아닌가!--팔이 심히 안으로 굽기는 했겠으나, 그렇다고 해서 화가로서의 냉철한 판단력이 흐려지진 않았으리라 믿는다.
올 상반기동안 예그림미술학원에서 지우가 완성한 작품집에 든 그림이 모두 17점인데, 하나같이 훌륭하다! 화가 본인도 그 점을 잘 아는지, 지난 여름 방학에 우리집에 놀러오는 날 스케치북을 들고 와 하나하나 작품 설명을 해주었다. 뜸들이다가 벌써 시간이 많이 지나 설명 내용이 가물거리는 것들도 있지만 최대한 기억을 돌이켜볼 작정이다. 너무 미리 기대치를 높이면 안되니 이쯤에서 잡설은 줄이고 드디어 천재소년화가의 그림을 전격 공개한다. ^^; (엄청 깁니다. 스크롤의 압박이 예상되오니 마음의 준비를 하심이...)
2011년
<공룡> 도화지에 물감, 크레파스, 사인펜. 2011년 상반기, 6세
(똑같은 경우 아래엔 생략예정)
이곳 미술선생님의 특징이 재료와 기법을 섞어서 다양한 표현력을 가르치는 듯하다.
그림마다 거의 테두리는 싸인펜으로 그리고 물감이나 색연필, 크레파스로 색을 칠하는 모습이 보인다. 이 공룡의 몸뚱이는 붓으로 칠한 게 아니라 '스펀지'로 두들겼다고 지우가 설명해주었다.
알에서 곧장 태어나 아장아장 걸어나오는 아기공룡인 듯 왼쪽 아래쪽엔 금 간 공룡알들이 세개 더 보이고 저 멀리 화산에선 용암이 분출되고 있다.
배경에 달팽이 무늬를 싸인펜으로 그려넣고 물감으로 번지게한 기법이 쓰였는데 달팽이 무늬 크기가 제각각 다 다르다.
이렇게 귀여운 공룡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 둘리보다도 귀엽다고 강력주장... ㅋ
(요번엔 그림들이 클릭하면 '적당히'? 커집니다)
<열기구를 타고>
지난 여름 이 그림을 딱 본 순간 내가 떠올린 건 오매불망 꿈꾸고 있던 터키 카파도키아 열기구 여행이었다. 새파란 하늘을 배경으로 열기구가 둥실 떠올라 있는 터키 여행사진을 녀석이 어디선가 봤을 리도 없는데... ㅠ.ㅠ
암튼 열기구를 장식한 별과 달팽이 무늬, 바구니에 탄 사람이며 저 멀리 지상에 서 있는 나무와 하늘에 뜬 햇님까지 모두 지우 솜씨라는 건 확실한데, 동그란 열기구 모양은 아무래도 선생님이 일률적으로 그려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화가소년 자존심 상할까봐 당시에 묻지 못했는데 나중에 살짝 물어봐야지.(지우에게 확인해보니 선생님이 열기구 모양 그려준 거 맞단다)
화면 오른쪽의 남다른 색칠도 사연을 들은 것 같은데 기억에서 사라졌다. -_-; 추석때 만나서 확인예정. (열기구 오른쪽의 희끗한 형상은 '아파트'라고 함. 왼쪽 하늘색 꽃무늬 같은 것은 구름이고 ^^;)
지우 옆에 타고 있는 소녀는 이 작품집에서 가족 이외에 최다 출연하는 지우의 여자친구 '예서'양이다. 자꾸만 등장하는 걸 보고 고모는 폭풍질투에 사로잡혔었다. ㅋ (이 또한 나의 착각이었다! 열기구에 타고 있는 사람은 지우와 여친이 아니라 왕자와 공주라고! 어쩐지 이제 보니 남자아이가 좀 못생겼다. 지우가 자기를 저렇게 못생기게 그렸을 리가 없다 ㅋㅋ)
<예쁜 우리 엄마>
바로 앞 포스팅에 소개를 했지만 작품집에 든 그림 전체를 공개하는데 의미가 있기도 하고 세부설명도 필요한 것 같아 다시 올렸다.
선생님에 따르면 지우는 작품을 '구상'하는데만도 상당한 시간이 걸리며, 다른 애들이 대강 쓱쓱 재빨리 그림을 그리는데 반해 워낙 공을 들이기 때문에 작품 완성이 상대적으로 늦단다. 다른 아이들이 그림을 다 그리고 막 놀기 시작하면 지우도 막 같이 놀고 싶어 엉덩이를 들먹거린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놀 생각에 가끔 바탕색 칠하는 걸 힘겨워할 때가 있다고 해서 우린 깜짝 놀랐다. 지우가 워낙 색칠하기를 좋아하고 빈틈없이 칠하는 완벽함을 추구하는 아이이기 때문이다.
이 그림에서도 머리에 단 리본이며, 다이아몬드 귀걸이, 하트 목걸이 같은 섬세한 부분도 일품이지만, 엄마에 대한 넘쳐나는 사랑을 표현하듯 바탕에 하트를 아주 빈틈없이 도배해놓았다. 보라색과 자주색으로 이중 처리한 옷색깔은 또 어떻고! 인물도 예쁘지만 색감이 참으로 아름답기 그지없다.
이전 포스팅에서 지우가 그린 엄마와 실물 비교를 위해 사진을 올리기도 했지만, 지우가 그린 자화상과 실물의 닮은 정도는 정말 놀랍다! 내가 그림과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할 때마다 다들 입을 모았다. 싱크로율 100%야! @.,@
정말 닮지 않았나? 비단 머리모양 뿐만 아니라 맑은 눈매며 암팡진 인상까지 똑같다고 팔불출 고모는 마구 주장하는 바임. ㅋㅋ
그림 제목은 <내 입속에는>이다. 지우가 완전 편식대마왕님이라서 먹는 게 정말 한정적이다. 저 그림에 드러난 밥, 쿠키, 아이스크림, 치킨, 생선, 바나나, 포도, 수박, 사탕, 콩 정도가 전부다. (드물게 콩을 먹어서 어찌나 다행인지! 그 외에 빵과 떡도 좋아한다) 그런데 치킨 옆에 있는 저게 뭔지 통 기억이 안난다. 햄이라고 했던가? -_-; 며칠 뒤에 물어봐야지. ㅎㅎㅎ
(치킨 옆에 있는 파란 물체는 다름아닌 '물'이란다! 먹거리 그려넣으며 컵에 담겨 찰랑대는 물을 그려넣을 생각을 하다니 놀라워 놀라워;;)
<둥지 위의 새>
도화지에 싸인펜, 물감, 색종이, 크레파스
알에서 하나씩 부화하는 새들의 사랑스러운 모습이다. 태어나자마자 노래를 부르고 있는데 그걸 음표로 표현한 것 좀 보라!
보라색 배경에 어울리도록 햇님을 흰색으로 그냥 내버려둔 센스는 또 어떻고~!
화가께서는 맨 왼쪽의 금 간 알을 가리키며, 얘도 이제 곧 깨어날 거라고 말씀하시었다. ^^ 벌레를 잡으러 간 엄마새를 기다리는 모습이라고... 대체 무슨 새인지 몸통 색깔이 다 다르다.
<무당벌레>
비오는 날, 커다란 나뭇잎에 무당벌레 한 마리가 앉아 있다.
왼쪽 무당벌레는 오른쪽 무당벌레가 날아가는 모습이라고("얘가 날아가면 이렇게 날개가 펴지는 거야...")지우가 설명해주었다. 그러니까 무당벌레 한 마리의 두 가지 움직임을 한 화면에 포착한 셈이다. @.@
나는 오른쪽 아랫부분에 그린, 민들레로 추정되는 노란꽃까지 전체적인 구도며 색감이 너무 마음에 든다. ㅠ.ㅠ
<바다 위의 돛단배>
색종이를 접어 붙이는 콜라주 기법이 응용된 작품으로, 돛에는 별 스티커도 장식되어 있다. 바다를 파란색으로 칠하고는 하늘을 노란색으로 표현했다. 아웅...
왼쪽 돛단배에 탄 한 쌍이 또 다시 지우와 예서 커플인지, 제 엄마아빠인지 까먹었다. 물어본 것만 기억나고 대답이 뭐였는지는... 에휴... 이 또한 추후 수정하겠음.
(왼쪽 노란 배를 탄 한쌍은 왕자와 공주이고, 그 뒤를 쫓는 빨간 배에 탄 건 '나쁜 악당'이란다. 얘길 듣고 보니 빨간배에 탄 인물의 표정이 매우 포악, 사납다 ㅋㅋㅋ)
<행복한 우리집>
언뜻 보고 지우도 한옥에 살고싶어 하는 건가 의아했더니만, 자기네가 사는 아파트를 그린 거란다.
하긴 현관문 번호키를 보면 지네 아파트 맞다. ㅋ 방방마다 엄마아빠 형과 자기를 그려넣었는데 특이한 건 오른쪽 아래 누운 사람이 지우의 '이모님'이라는 사실이다. 이모가 자기네 집에 와서 자고 있다나?
고모는 안 그려주고 이모를 그렸대서
속 좁은 고모는 또다시 폭풍질투에 사로잡혔다. 그치만 뭐 어쩌겠나.. 이모는 바로 옆에 살고 고모는 아예 다른 시에 살고 있는 걸. ㅠ.ㅠ (지우네 집은 일산이다)
맨 왼쪽 네모에 들은 인물은 부엌에 있는 엄마가 아니라 '졸라맨'이란다. +_+ 그 옆에 세로로 그려진 두 인물은 아빠와 형, 오른쪽에 나란히 그린 인물이 엄마와 지우라고 함. 웬 뜬금없이 졸라맨? 아무래도 지우가 고모를 놀려주려고 장난친 것 같다. -_-;
<팽이치기 놀이>
지우랑 예서가 '베이 블레이드'라고 하는 팽이놀이를 하는 장면이란다.
팽이를 돌림판에 꽂아 끈을 잡아당겨 둥근 플라스틱 판에 놓으면 신나게 돌아가는 건데, 작년부터 한참 유행이라 나도 녀석들이랑 놀아봤다.
팽이를 부딛치게 해서 싸우거나 누가 오래 돌아가는지로 내기를 하는데, 그림 속에선 두 팽이가 불꽃튀는 전투를 벌이는 모양이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팽이의 움직임을 꼬불꼬불 용수철 모양으로 형상화한 게 인상적.
<땅속 개미>
검은 도화지에 흰 크레파스로 개미를 그려 오려붙였다. 개미굴 맨 안쪽엔 알들이 잠을 자고 있고, 주변 땅속엔 개미들이 물어다놓은 애벌레, 과자, 도넛 같은 식량이 잔뜩 쌓여있다. 심지어 아이스크림까지! ㅋㅋ
그림 맨 위 상단부의 주황색 물체는 애벌레가 아니라 '소세지'란다. ㅎㅎㅎ
<코끼리를 타고>
지우네 가족이 코끼리를 타고 있는 장면이다. 당연히 맨 오른쪽 엄마 옆에 앉아 있는 게 지우 본인.
코끼리가 네 식구나 태우고도 어쩜 저리 표정이 밝고 명랑한지. 뒷다리는 두껍게, 앞다리는 얊게 그린 것도 신기하고 힘들지 말라고 미리 포도랑 사과도 갖다주었다. 전체적으로 사랑스러운 느낌.
<거북이>
도화지 화면에 꽉 찬 거북이가 참 알차다. 등가죽의 육각형 무늬를 어떻게 저렇게 정교하게 그렸을까? *_*
그안을 촘촘이 선으로 채운 것도 그렇고... 목덜미에 땀방울까지 디테일의 승리다.
흰색 크레파스로 구름이랑 동그라미 그리고 물감으로 바탕칠하는 기법이야 선생님이 가르쳤겠지만 시원시원한 선과 색감이 일품.
<나비가 훨훨>
제목 대로 꽃을 따라 훨훨 날아다니는 나비들 모습이다. 여기선 그림물감을 어딘가 딱딱한 데 묻혔거나 물감튜브째로 찍는 기법이 사용된 것 같다.
호랑나비 색깔들도 현란하지만 더듬이와 날개 모양을 어쩜 저리도 잘 그렸는지... 꽃모양도 천편일률적이지 않고 느낌이 다양하다. 그림마다 전체적인 완성도가 확실히 다르지 않은가! ㅋ
<비누방울 놀이>
무지개처럼 영롱하게 빛나는 비누방울을 이렇게 생생하게 표현해내는 어린이가 있으면 어디 나와보라고 하고 싶다. ㅠ.ㅠ
실제로 비누방울 놀이를 많이 해봐서 처음에 훅 불어내면 약간 바람에 찌그러지는 모습까지 포착한 듯...
천재랄밖에...
<세모나라>
세모나라라서 자동차들도 세모고 나무도 세모고 세모꼴의 대표랄 수 있는 피자조각도 보인다.
팔을 길게 뻗은 듯한 회색 자동차의 정체는 코끼리 자동차익고, 밤색 네모꼴은 '택배상자'란다. ^^;
<생일축하>
이 작품은 실제로 스케치북 제일 마지막에 케이크가 입체적으로 상당히 두둑하게 붙어 있었다. 종이찰흑인지 발포제 같은 걸로 따로 만들어 붙인 듯.
발 아래 놓인 생일선물들은 죄다 레고 시리즈란다. 지우의 파티 의상도 예사롭지 않다. 레고 닌자 시리즈에 꽂혔는지 검을 세개나 차고 시커먼 복면까지... ㅎㅎ
오른쪽엔 예서양 드레스를 입고 또 등장하시었다. -_-;
우리 가족들은 지우가 하도 말라서 자코메티의 조각, 또는 이디오피아 난민이라고 부르며 많이 걱정을 하는데, 지우의 여성취향 또한 가늘가늘 마른 소녀를 좋아한단다.
좀 튼실하게 예쁜 소녀친구에겐 '잘생겼다'고 칭찬을 한대고, 유독 하늘하늘 가녀린 예서만 '예쁘다' 또는 '아름답다'는 표현을 사용한단다. 그래서 다른 여자애들이 막 속앓이를 할 정도라고... (꽃남의 인기는 어딜가나 그저!) 실제로 유치원 재롱잔치인가 발표회 때 지우가 워낙 춤동작을 잘하기도 했지만 인기를 감안해서 그런 것인지 다들 쌍쌍이 군무를 펼치는데 지우만 맨 앞 한 가운데에서 양쪽에 여자친구들을 데리고 무용을 했다.
[#M_그 증거 사진 ^^;|접기|
지우 인기가 이 정도라규~! 발표회 리허설에서 처음 두 여자에게 볼 뽀뽀를 당한 지우는 당황하여 울어버렸단다. 예서한테만 허락하는 뺨이었던가? ㅋㅋ 그러고보니 저 소녀들 중에 예서가 있었는지 물어봐야겠다.
<기차여행> 대미를 장식하는 마지막 작품이다.
나뿐만 아니라 지우 그림 사진을 보여주면 이 작품을 탐내는 이들이 꽤 많다. 아이들 그림 중에 드물게 흑백느낌이라 그럴까? 하지만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이디어도 만만치가 않다!
비오는 날(아래로 죽죽 그어진 하얀 선이 빗줄기란다) 칙칙폭폭 기차를 타고 여행을 가는데, 기찻길이 갑자기 울퉁불퉁 꿀렁거려서 '덜컹!' 하는 바람에 기차에 탄 사람들이 다들 깜짝 놀라는 장면이란다. ^^;
검은 기차는 먹구름 짙은 잿빛 하늘에 길게 하얀 연기를 내뿜는데, 기관사도 놀라 조종간을 놓쳤고 사람들은 공중에 붕 떠있다. 심지어 맨 뒤에 탄 사람은 머리가 천장에 부딪쳤다! 기찻길을 촘촘이 채운 자갈돌은 또 어떻고! 언제 지우가 기차를 타봤던가? 관찰력이 참으로 세밀한 지우.
작품집에서 뜯어내기 너무도 아깝지만 이 그림을 주면 액자에 넣어 고이 간직하겠다고 굽신굽신해보았으나 화가께선 배시시 웃기만 하였다. 그치만 이 그림 너무도 갖고 싶다! +_+
'팝업북'이라고 제목을 써놓고 '입체책'으로 바꿀까 꽤 고민하다 그냥둔다. 우짜냐. 입체책이라고 하면 책장을 열자마자 팍~하고 불쑥 튀어나오는 그림들의 느낌이 안 살아나는 기분인 걸. ㅜ.ㅜ 이러면서 남들의 외래어 남용 탓하고 앉았으니 쯧쯧쯧.
암튼 순전히 일하기 싫어서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가 놀랍게도 일찍 눈이 떠지는 바람에(아무래도 너무 더워서인듯;;) 일어나 아침밥도 챙겨먹고 컴퓨터 앞에 앉긴 했으나 역시나 일하기 싫어서 헤헤실실 요번에 산 팝업북을 들춰보다 아예 자랑까지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팝업북에 대해서 그리 잘 알지는 못하지만 언젠가 서점에 갔다가 보고 반한 로버트 사부다의 팝업북 시리즈는 볼 때마다 침을 흘리며 감탄을 했다. 하나같이 어쩜 그렇게 정교하고 아이디어가 뛰어난지! 갖고싶다는 욕망이 불끈 치솟았지만 '어른'이 되가지고 아이들 그림책을 좋아하다 못해 이젠 소장까지 한다는 건 좀 문제가 있다는 것이 처음 내 판단이었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조카들에게 선물을 했다. 심지어는 에라 모르겠다 친구 생일선물로도 안겨주었다. 튀어나오는 그림이 가장 현란해서 아름다운 <오즈의 마법사>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둘이 제일 먼저 물망에 올랐고 한참 공룡에 심취해 있던 지우한테는 마침 번역서로 나온 <공룡>사전을 골랐다.
어린이날인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조카들에게 팝업북을 안기며 내가 더 흥분해서 좋아라했던 것 같은데 정작 녀석들은 시큰둥해 했다. 일단 '영어'라는데서 오는 거부감이었던 듯.. (하지만 당시엔 아직 번역본이 나오질 않았다규~) 대리만족으로 조카들에게 선물해서 시리즈를 죄다 구경 및 소장하고팠던 나의 작전은 수포로 돌아갔다. <피터팬>이랑 <정글북>까지는 꼭 쓰다듬어 보고 싶었는데...
조카네 집에 갈 때마다 은근슬쩍 꺼내 한번씩 열어보며 좋아라만 하기엔 어쩐지 성이 안찼다. 그렇다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선물을 계속 억지로 조카들에게 안기긴 싫고. 그러던 차에 문득 요즘엔 내가 나한테 주는 선물에 좀 인색했다는 생각이 들었고 에라이 모르겠다는 심정이 들며 다른 책과 함께 나도 모르게 <피터팬> 팝업북을 주문하고 있었다. ^^;
결론은 그렇게 해서 요번에 장만한 피터팬 팝업북의 위용을 자랑하겠다는 것. ㅎㅎㅎ
그림체가 아기자기 귀여운 것도 아니건만 기분 처질 때마다 열어보면 효과 즉방이다. 대체 이런 걸 어떻게 설계하고 만드는지 원!
이 장면은 웬디 삼남매가 피터를 따라 네버랜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만난 숲이다.
아래쪽에 접혀있는 텍스트 책장을 열면 페이지마다 작게 또 다시 팝업되는 거 정말 좋다. *_*
나무뿌리 아래 있는 아이들의 동굴 보금자리. 빨랫줄에 넣어놓은 양말이랑 웬디가 들고 있는 빨래가 제일 귀여운데 안타깝게도 사진에서 잘 안보인다. 웅...
<피터팬> 책에서 내가 제일 좋아라하는 팝업인데 돛을 펼친 배의 위용이 잘 안보여 속상.
요즘 유난히 유치해지고 싶은 것 같아서 컴퓨터 바탕화면에도 최근 픽사가 제공한 알로하 토이스토리를 깔아두었더니 전체적으로 분위기가 아주 딱이다. 룰루룰루~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로버트 사부다 팝업북의 최고봉을 꼽으라면 난 역시나 오즈와 앨리스를 고르겠다. 둘 다 이제 번역본도 나온 걸 보면 우리나라 책 제조술도 만만칠 않다는 뜻인가보다. 만들기 엄청 까다로울 텐데... 수입책과 얼마나 접고 펴는 느낌이 다른지(또는 똑같은지) 궁금하긴 하나, 앞으로 또 사게 되더라도 수입 원서를 사고 싶은 건 일종의 사대주의일까 아닐까. -_-; 혹시... 동화책이지만 영어로 갖고 있으면 뭔가 자료스럽게 보일 거라는 착각? ㅋㅋ
오즈의 마법사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둘 다 퍼온 사진인데 아쉽게도 앨리스는 딱 이 장면밖엘 없네. 쳇... 그래도 이 페이지가 나도 제일 신기하고 예쁘다.
주말에 사촌동생네 아기 돌잔치에 갔었는데 답례품으로는 처음 받아본 게 있어서 소개한다. 언제부턴가 돌잔치를 하면 주최측에서 꼭 답례품을 돌리는 게 유행이다. 잔치를 준비하는 엄마들로서는 아가들 한복 준비하랴, 본인 의상 챙기랴, 입구에 세워놓을 사진장식 준비하랴 바쁠 일이 한두가지가 아닐텐데 답례품까지 골라 주문하려면 정말 머리깨나 아플 것 같다. 조카들 때도 그렇고 다녀보면 돌잔치 답례품에도 유행이란 게 있는 듯하다.
오래전부터 제일 흔한 건 주방용 작은 수건이나 행주, 아니면 머그잔이다. 돌잔치 답례품이 정민이 때만해도 없었으니 대대적으로 유행한지는 10년 정도밖에 안 된 듯한데, 최근까지도 수건과 머그잔을 받은 기억이 있으니 아직 선호하는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하지만 사실 나는 주방용 수건도 행주도 머그잔도 별로 달갑지 않다. 준비한 사람에겐 미안하지만 미리 슬쩍 확인해서 머그잔이 마음에 안들면 괜히 짐만 되는 걸 알기에 사양해보지만, 고약한 내 심보에 상응하는 벌을 받는 건지 그런 답례품은 꼭 두개나 챙겨주더라. ㅠ.ㅠ 버리기도 뭣해서 그런 머그잔을 꺼내놓고 더러 물잔으로 쓰기는 하지만 취향이 다양하니 내 마음에 꼭 드는 디자인일 리가 없다. (그리하여 결국 내다버린 답례품 머그잔 꽤 여럿이다. 다 낭비라고!) 주방은 원래 내가 선호하는 공간도 아니니 주방 수건이나 행주는 선물로 받고 싶지 않다! (게다가 우리집 수납장에 들은 행주는 대체 다 어디서 난 건지 내가 죽을 때까지 써도 다 못쓸 만큼 많고, 돌잔치마다 받아온 주방수건--나는 쓰지도 않는데!--도 골치아프게 여러 개다. -_-;) 역시나 주방용품인 작은 쟁반을 받아온 적도 있는데 이건 꽤나 요긴하게 사용중이다. 일부러 그림 예쁜 걸로 내가 골라오기도 했고. ^^v
암튼 엄마들의 아이디어인지 답례품 전문회사의 아이디어인지 몰라도 계속해서 트렌드가 변해가는 듯한 돌잔치 답례품 가운데 최근 내가 가장 므흣하게 받아온건 앙증맞은 상자에 담긴 수제쿠키였다. 요번에도 상자를 딱 보니 수제쿠키인 것 같아서 입맛을 다시며 두 상자 가져와야지, 라고 욕심을 부렸는데 묵직한 무게로 보아 쿠키가 아닌 듯했다. 그럼 혹시 전에도 받아본 적 있는, 분홍색 하트를 새긴 백설기인가, 짐작했다. 그치만 여름인데! 겨울이나 봄, 가을엔 떡을 답례품으로 받은 적이 있기는 했으나 여름 잔치에 떡 선물은 쉴까봐 조마조마할 것 같다.
궁금증을 못이긴 큰고모가 먼저 차에 오르자 마자 열어보니 뜻밖에도 저 상자 안엔 국산 잡곡이 들어 있었다. 어쩐지 묵직하더라니...
비용 면에서 어떤 차이가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생각해보니 일단 건강에 별로 이롭지도 않은 쿠키보다는 잡곡이 훨씬 의미 깊고 좋은 것 같다.
포장을 열면 안에 또 예쁜 레이스 종이를 감은 잡곡 비닐이 들어있고, 혼용율을 적은 스티커가 보인다. 흔히 돌잔치 주최측에서 오래 쓸 수 있는 머그잔이나 주방용품을 선물하는 건 그만큼 오래 첫돌 맞은 아이를 생각해달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으나 내 입장에선 그것 또한 귀찮게 늘어나는 살림살이일 뿐, 차라리 떡이나 쿠키처럼 훅 먹어버리면 그만인 답례품이 더 좋았다. 헌데 아무래도 떡이나 쿠키는 열량을 생각하면 건강에 그리 좋은 게 아니랄 수도 있다. 그런데 국내산 잡곡은 우리 농촌에도 이롭고 모두의 뱃속에도 좋은 선택이 아닌가! 전통적으로 이웃에 돌떡을 돌려 나눠먹으며 아이의 무병장수를 비는 풍습과도 일맥상통하면서, 뭔가 건강을 선물 받은 느낌이 들기도 하고... 암튼 좋은 아이디어, 현명한 답례품이었다는 생각이 들어 또 이렇게 구구절절 수다를 떨었다. 앞으로는 과연 쿠키, 잡곡 말고 또 어떤 기발한 돌잔치 답례품들이 나타날지 그것도 궁금하고...
삼계탕 챙겨먹기도 지겨워진 중복날, 동생들과 갈비 먹으러 가자고 의기투합한 김에 주 목적지인 갈비집과 가까이 있다는 홍유릉에 들러 반나절을 보냈다. 지난 가을 융건릉 다녀왔다고 자랑했을 때, 친구가 지척에 있는 홍유릉에도 좀 왔다가 자기네(꽤 유명한 갈비집인데 수년째 통 못가봐서 상당히 미안했다 ^^;) 들러가라고 퉁박을 주었던 걸 내내 마음에 두고 있었기 때문이다. 서오릉이나 융건릉 만큼 규모가 커서 산책길이 꽤 길 것으로 예상했건만 웬걸, 입구에서 빤히 다 보이는 곳에 홍릉과 유릉이 바싹 붙어 있어 서로 5분도 안걸리는 거리라 산책을 운동 삼는 건 애당초 불가능했다. 그래도 왕릉을 에워싼 숲은 깊고 높은 느낌이 들었고 잔디밭도 잘 다듬어져 있었으므로 피톤치드 섭취(?)의 의미로 나무 그늘에서 한참을 잘 쉬다 돌아왔다. 과거 서오릉에선 잔디밭에서 축구도 하고 놀았던 기억이 있으나, 조선 왕릉 세계문화유산 지정 덕분/탓인지 경건하게 보존해야 한다는 지령이 내려진 모양이어서 이제 이곳에선 공과 글러브를 아예 갖고 들어가지도 못하게 했다. +_+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 대체 어떤 혜택이 있는 건지, 예산이 더 투입되어 좀 더 관리가 잘 되는 이점이 확실히 있는지 어쩐지는 모르겠지만 제주도 세계자연유산 지정과 관련한 잡음을 봐도 그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란 생각이 든다. 세계적인 유산으로 지정을 받은 말든 지켜야할 문화재나 자연이라면 힘써 보호하면 그만 아닌가. 모든 호들갑엔 '야로'가 있을 것만 같아 통 못마땅하다. 암튼 그래서 가져간 축구공은 차보지도 못했고, 야구 캐치볼도 주차장에서 조금 하다 마는 아픔이 있기는 했지만 대체로 뿌듯한 나들이였다고 인정.
고종과 명성왕후를 모신 홍릉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금세 보이는 연못엔 연꽃도 피어있고 팔뚝보다 더 긴 잉어가 돌아다녔다. 한쪽 옆에는 내가 '핫도그'라고 부르는 수생식물이 자리를 잡았고.
왕릉이 다 거기서 거기지 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홍릉과 유릉은 고종이 대한제국으로 국호를 바꾸고 중국의 제후국임을 거부하면서 건축양식도 다르다고 안내문에 적혀 있었다. 어쨌거나 내가 보기에 가장 두드러진 차이점은 홍살문부터 전각까지 이어지는 온갖 석상들이었다. 말과 해치, 양 모양은 그러려니 하겠는데 코끼리와 낙타도 있더라! 맨 안쪽에는 문신과 무신 상도 서 있고... 능 옆에 지어놓은 한옥도 규모가 꽤 대단했다.
전각에서 비각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틈에 피어난 처음 보는 꽃이 하도 신기해서 검색해보려고 찍어왔다. 혹시 나무님이 꽃 이름을 아실지도 모르겠고. ^^;; 궁궐 가서도 늘 하는 타령이지만 왕릉을 돌아다니면서도 결론은 하나, 이런 정원을 갖고 싶다는 것. 으휴.
오솔길을 따라 순종과 왕후, 계비를 모두 합장했다는 유릉까지 한바퀴 돌고 나니 제일 앞장섰던 큰동생이 대문이 활짝 열린 한옥 안에서 우리를 마구 불렀다. 시원한 대청마루에 아예 드러누워 쉬면서...
보통 관람용 한옥엔 들어가지 말라는 표지판이 떡하니 적혀 있기마련인데, 여긴 참 관람객 친화적이로군, 하며 신나했다. 잘 깎은 잔디밭도 구석구석 밟아보았고, 사랑채와 행랑채 방문도 여기저기 열어보며 새로 깔고 바른 장판지와 창호지까지 감상했다. 결론은 또 하나로 귀결, 아 이렇게 잘 생긴 한옥에 살고 싶어라!
분합문을 들어 올려놓은 대청마루에
아예 이렇게 자리를 잡고 놀았다는 얘기다.
입장료 천원(초등학생은 500원^^)이 조금도 아깝지 않아! 여기 너무 좋다! 이러면서...
(올케는 잠시 뒤 쿠션 좋은 제 남편 배를 베고 드러누웠다 ㅋㅋ)
그렇게 한 20-30분쯤 있었던가?
관리인 아저씨가 대문으로 들어서더니 우리에게 어떻게 오셨느냐고 물었다. -_-;
원래 관계자 외 출입금지 구역이라 늘 잠가두는데 일이 있어 잠시 대문을 열어놓았던 것 뿐이라고...
우리는 민망해 하며 얼른 밖으로 나왔지만 한옥의 묘미와 대청마루의 시원함은 이미 즐길대로 다 즐긴 뒤였다. ㅋㅋㅋ
나와서 보니 대문이 두 군데 있고 정문쪽 대문에는 빨간색으로 출입금지 안내판이 서 있었다. ;-p 우린 진짜로 몰랐을 뿐이고!
더 볼 것도 할 것도 없어진 우리는 늦게 출발한 막내동생네가 합류할 때까지 눈에 띄는 제일 큰 나무 그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그냥 쉬기로 했다. 오전에 내린 비로 잔디밭은 축축했지만 그늘엔 서늘한 바람이 솔솔 불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음이라...
우리에게 그늘을 드리워주었던 이 큰나무를 막내는 '낙엽송'이라 우겼는데 맞는지는 알 수 없다. 어쨌거나 축축 늘어져 넓게 퍼진 가지가 아주 일품이어서 드러누워 올려다보며 므흣했다.
요새 건강해지시면서 부쩍 콧바람을 쏘이고 싶어했던 울 엄마, 너무 가깝기는 했지만 주목적은 어디까지나 '복날 갈비 먹기'였으므로 먹기도 전에 흡족하셨는지 표정이 좋다. 휴대폰 들이대며 좀 웃어달랬더니 흔쾌히 협조도 하고.
그치만 새삼 사진으로 보니... 내가 아무리 '아줌마'라고 우겨도 어째볼 수 없는 할머니시구나. 역시나 아줌마는 내게 더 어울리는 호칭이었어. 그래도 염색 안한 회색 머리가 징그럽게 새카만 염색머리보다 나는야 더 좋다.
나도 이런 거 해보고 싶었다규! ㅋㅋㅋ 준우가 얼마전 내가 뽑고 싶었던 낚시꾼 할아버지 레고 피규어를 뽑았다며 내가 뽑은 야구선수랑 바꾸자기에 혹시 이날 갖고 올지 모른다는 핑계로 플레이모빌이랑 레고 몇 개 챙겨가서 설정사진 찍었다.
비키니 아가씨는 꽃향기 맡으며 원없이 삼림욕을 했고, 서로 헤어져 살던 쌍둥이 소녀는 감격의 상봉 순간을 즐겼다.
<나는 가수다>라는 프로그램은 보지 않았지만 그 방송 때문에 임재범이 음악인으로서 대중 앞에 다시 설 수 있게 된 건 기쁘게 생각한다. 덕분에 임재범의 전국투어 콘서트도 기획된 거나 마찬가지니, 말도 많고 탓도 많은 그 프로그램을 앞으로도 볼 마음은 없지만 고마워해야할 것 같다. 콘서트를 앞두고 하필 임재범이 오른손 골절에 맹장수술까지 겹쳤다는 소식에 예매를 하면서도 건강문제로 공연이 취소되도 어쩔 수 없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태풍이 몰고온 폭우속에서도 콘서트는 무사히 열렸다.
나도 가볍게 배를 열고 닫은 수술을 해봐서 알지만, 수술한지 한달만의 체력이란 게 뻔한데 콘서트라니 공연보러 가긴 가면서도 내심 미친짓이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임재범 본인은 사생결단의 각오로 관객과의 약속을 지키려 했다니까, 한편 존경스럽기도 하고 한편 안쓰러웠다.
공연이 취소되지 않은 것만도 감지덕지해야 할 상황이므로 체력과 목소리가 기껏해야 예전의 7, 80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듯 해도 이해해줄 수밖에 없었다. 첫곡이었던 빈잔을 부르고 나서 곧장 힘겹게 숨을 몰아쉬는 걸 보며, 과연 저래서 끝까지 공연을 해낼 수 있을까, 저러다 쓰러지면 어쩌나 걱정이 들었는데, 후반부에 디아블로와 함께 한 하드락 공연을 보면 또 언제 힘들어했나 싶게 폭발적인 에너지를 보였다. 가수에겐 노래가 곧 힘이고 약이기 때문일까.
일요일 공연 준비로 체력을 비축해야 하므로 어젯밤 앵콜은 아예 사전에 양해를 구해 가능성부터 막아버렸고, 체력안배를 위함이라고 십분 이해는 되지만 중간중간 보여준 동영상과 내레이션은 쓸데없이 많았으며, 평범하고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들려준 것까지는 좋았는데 썰렁하고 난감한 개그 개인기를 많이 보여준 건 아무래도 민망했다. 간간이 못마땅해 투덜거리는 일반팬인 내 옆에서 <임재범을 알아야 락을 알지> 회원이기도 한 열펼 팬인 친구는 자꾸 나를 나무랐다. 저렇게라도 시간을 떼우며 좀 쉬고 힘을 비축해야 다음 노래를 하지 않겠느냐고. ㅎㅎㅎ 누가 그걸 모르나. 임재범은 마지막 무렵 <비상>을 부르며 실제로 비상하듯 입체 무대로 공중에 올라가더니 울컥해 눈물을 보이기까지 했는데, 치열하고 처절한 삶을 살아온 인간이자 가수로서의 지난날 때문이려니 하면서도 전체적인 공연 콘셉트가 너무 '감상돋는' 쪽으로 간 게 아닌가 싶었다. 노래 한곡 끝날 때마다 헐떡거리거나 "아이고 죽겠다"를 연발할 정도로 힘겨워하면서도 악착같이 3시간에 가까운 공연을 이어나가는 임재범의 모습을 봐야하는 것도 감격과 동시에 약간은 고문이었고.
째뜬 공연의 형식이 내 취향과 좀 달랐다는 것뿐이지, 체력과 목소리가 절정의 컨디션이 아님에도 노래마다 감동이었으니 보러가길 잘했다는 생각이고 대체로 행복했다. 게다가 생각지도 못한 상의 탈의로 새하얀 속살과 사방에 새겨진 문신까지 보여주는데는 좀 놀랐다. ㅋㅋ 수술 한달만인 쉰살 아저씨 몸이 탄탄하기도 하여라. 볼거리를 많이 제공하겠다고 생각했는지 의상도 다섯벌이나 갈아입으며 다양한 모습을 선보였는데, 난 아무래도 두번의 수트 차림이 제일 좋았다. 지난 1월 스팅 공연때 폭설 때문에 하도 주차에 고생을 했던 터라 요번엔 아예 지하철 타고 다녀오느라 나도 체력이 딸려 오늘까지 빌빌하다. 무거운 장화를 신고 뛰었더니 장단지도 땡기고... 구경만 한 하고 온 나도 이런 꼴인데 임재범은 오늘 저녁 또 어떻게 공연을 할까, 그게 더 놀랍다. 다시는 세상을 등지지 말라고 팬들이 <지수애비 입산금지>(임재범의 열살짜리 딸 이름이 '지수'라고;)라는 팻말도 들고 있던데, 정말로 계속해서 임재범이 늙을 때까지 감동적인 노래와 공연을 해줄 수 있기를 빈다. 노래 잘하는 가수들에 대한 대중의 현재 관심이 과연 금세 수그러들지 않고 지속적인 환경으로 자리잡을지 그건 잘 모르겠지만.
후반부로 갈수록 처음보다 덜 웃기고 자꾸 안타까워져 본방사수를 안(못)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다운로드까지 해서 본 어제 최종회로 드디어 <최고의 사랑>이 끝났다. 보나마나 연말에 베스트 드라마 집계 당첨 확률 백프로다. 가볍고 경쾌해서 열광했지만 이래저래 생각할 거리도 꽤 던져준 드라마였다. 심지어 나는 친지 중에 연예인이 있음에도 괜히 싫어하는 연예인들 굳이 콕콕 찝어 싫다고 밝히는 걸 아무렇지도 않게 여겨왔는데, 댓글 하나하나에 파르르 떠는 독고진이 생각나서 앞으로는 좀 말을 삼가게 되지 않을까 싶다. 해피엔딩을 결혼과 출산이라는 빤한 결말로 보여주어 실망이라는 사람도 있으나 나로선 흡족하다. 독고진이 심장수술하다 죽지 않았으며, 깨진 유리컵과 함께 나뒹굴었던 감자싹이 죽지 않고 화분에 담겨있는 걸 본 것만으로도 일단 안심한 터라, 사실 어떻게 끝나든 좋다는 생각이었다. 인생이란 언제 또 어떻게 뒤틀릴지 모르는 거고, 뭐니뭐니해도 로맨틱코미디라면 열린 결말이든 확정 결말이든 '그래서 둘은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로 종결되는 동화 같은 마무리가 아무래도 마음 편하다. 현실에선 그런 동화 같은 마무리가 좀 드물어야 말이지. 한편으로는 뭔가 참신하고 새로운 결말을 원하면서도, 결국 똑 떨어지는 해피엔딩이 아니면 못마땅한 이율배반의 심리를 작가들도 모르진 않을 것이다. 암튼 똑같이 결혼을 강행하고 졸지에 사내아이들을 셋씩이나 이끌고 나왔던 <시크릿 가든>의 결말보다도 <최고의 사랑> 마지막이 나는 더 좋았다.
누가 뭐래도 나는 통통한 스파이더맨 띵똥 라인이었던 터라 마지막 신까지 귀여운 띵똥 형규가 함께 나와주어 더욱 기뻤다. 엄마의 부재 속에서도 띵똥이 그렇게 속깊고 이해심과 인정이 많은 아이로 자라날 수 있었던 건 분명 구애정 고모 덕이 태반이라고 생각하므로, 계속해서 고모네 가족과 함께 하는 건 당연하다.
밖에서 대중이 뭐라고 쑥떡대건 상관없이 행복한 구애정과 독고진의 일상을 보여주던 닭살스러운 장면 가운데서도 가장 흐뭇했던 건 독고진 부녀의 취침 장면. (큰 사진을 못 구했다;;) 화면 구성 때문임을 알면서도 아가를 소파 바깥 쪽에 뉘여놓아 떨어지면 어쩌나 쓰잘데기 없는 걱정을 잠깐 하기는 했으나, 개인적으로 이런 평화로운 장면 정말 좋다.
므흣하게 이 장면을 보다가 문득 떠올랐다. 저 장면과 유사하게 막내동생네가 연출한 사진이 있다는 걸. 이른바 준우네 삼부자 취침사건이다. 어느 휴일 오전, 다 같이 외출을 하려고 엄마가 먼저 한참 씻고 나오니 침대에서 기껏 깨워 거실로 내몰았던 삼부자는 소파에서 다시 잠들어 있었다고 한다. 올케가 기막혀 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에 찍어놓은 사진을 보며 나는 미소를 짓다가 괜스레 돌연 울컥했었다. 이젠 더 띵똥과 독고진, 구애정을 볼 수 없게된 허전한 마음을 조카들 사진 보며 극뽀~옥 해야겠다.
아빠 가슴팍에 엎드려 자고 있는 아가 지우가 지금 여섯살이니 벌써 4년이나 지난 사진이다. 아마도 결국 저날 지우 돌잔치 예약을 하고 돌아온 것이 외출의 전부라고 들은 것 같으므로, 독고진네 아기랑 사진속 지우랑 개월수가 비슷하지 않을까나? 셋 다 팅팅 불어터진 얼굴로 서로 엉겨 자고 있는 모습이 정말 귀엽고 사랑스럽다.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이 전시작품에 포함됐다는 소식에 가야겠구나 벼르고는 있었다. 오르세미술관 전시회는 잊을 만 하면 몇년에 한번씩 기획되는데다가 몇해 전엔 <고흐의 방>과 밀레의 <만종>이 왔다고는 해도 작품수가 하도 알량해 보이코트했던 것과는 상황이 달랐다. 오르세 미술관 내부수리 때문에 작품을 '대거' 빌려올 수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렸기 때문이다. 134점이면 소품이 포함됐다 해도 예술의 전당까지 흔쾌히 가줄 수 있는 작품량이었다. 6월 4일에 시작해 9월 25일까지 하는 전시라 '언제' 갈 것인가 그것만이 의문이었는데, 마침 어제 저녁약속이 예술의 전당 안에 있는 벨리니에서 잡혔다. 여름밤 산책도 하자면서. 이런 걸 하늘의 뜻이라고 하는 거야, 라며 설렘을 안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별이 빛나는 밤> 말고는 또 무슨 그림이 왔는지 일부러 알아보지 않고 갔는데 그러길 잘했던 것 같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고, 꽤 유명한 그림은 10분의 1도 되지 않는듯했다. 오르세에서 빌려주는 작품만 가져오다보니 일관되는 주제나 사조로 전시실을 꾸미기에도 역부족이었던 것 같고...
고흐, 세잔, 르누아르, 밀레, 드가, 모네, 고갱, 피사로, 보나르, 로트렉, 쇠라, 루소 등등 그림책에서 봤다 싶은 화가들의 작품이 한두 개씩은 전부 포함되긴 했으나 이른바 오르세가 자랑하는 대표작은 많이 빌려주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도 난 뿌듯했고 만이천원이 아깝지 않았다. 실물 알현을 못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실컷 보고 왔기 때문이다. ^^; 데생과 스케치류의 소품도 꽤 많고, 대중화되기 시작한 20세기초의 사진 작품들도 더러 포함되어 있으므로, 134점 모두 대작일거라는 오해는 하지 않는게 좋겠다. 나는 최근 한국과 일본 근대문학을 좀 읽었더니 20세기초 사진과 작품들이 남다르게 다가왔고, 거리의 신문팔이 소년들이나 공장장에서 일하는 소녀들의 노동현장 포착 모습이 짠했다.
게다가 뜻밖의 그림들도 몇점 만나는 바람에 마음에 드는 작품만 집중적으로 몇번씩 감상하며 눈호강을 할 수 있었다. 방마다 주제를 정해놓기는 했던데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아서 모르겠고, 암튼 인물화를 모아놓은 전시실에서 맞닥뜨린 르누아르의 <소년과 고양이>,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 로트렉의 <여자 어릿광대 샤 위 카오> 세 작품은 거의 나란히 걸려 시선을 끌었다.
르누아르, [소년과 고양이]
포스터에 담긴 오른쪽 그림이 바로 르누아르의 초기작이라는 <소년과 고양이> 일부인데 정말 예쁘지않은가! @.@
르누아르는 항상 예쁘고 아름다운 대상을 화폭에 담아 눈을 푸근하게 해주는 그림을 그렸지만, 척 보면 르누아르 그림이라고 알 수 있을 듯한 특징이 작품마다 두드러진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리 초기작이라도 이게 르누아르 그림이라니 의외였다. 평소 보던 르누아르 작품과는 색감도 뭔가 다르고 분위기도 한층 어두운 것 같았기 때문이다. 도슨트의 말을 들으니 누드화 가운데서도 남자 누드는 이 작품이 유일하단다. 고양이 표정까지 어쩜 저리도 사실적일고. 꽃소년에 열광하는 본성을 못속이고 이 그림 앞에서 한참이나 헤벌쭉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가 돌아섰다. ㅎㅎㅎ
상당히 작품 크기가 큰 모네의 <고디베르 부인의 초상>도 워낙 아름다워 한참을 감상했는데, 좀 더 인상적이었던 건 그 바로 옆에 걸린 로트렉의 작은 인물화였다. 어딘가 퇴폐미와 서글픔이 철철 넘치는 것 같은 로트렉의 그림도 꽤나 좋아하는데 공단 드레스를 떨쳐 입은 단아한 귀족 여인의 전신상 옆에서 더욱 초라하게 대조되는 어릿광대의 뒷모습이라니...
로트렉의 그 그림 사진 찾아올리려고 나름 검색해보았으나 못 구했다. 하기야 구한다고 해도 전시실에서 그 순간 느꼈던 기분을 전달할 순 없을 테니 그냥 통과.
그 방에 같이 걸려 있던, 처음 들어보는 아르망 스갱이라는 화가의 인물화 <가브리엘 비앵>도 눈빛이 오래 잊히질 않을 만큼 좋았고, <빨래하는 여인>의 뒷모습을 그린 폴 기구의 그림도 마음에 들었다. 미술 교과서에 실렸던 것으로 생각되는 세잔의 <카드놀이 하는 사람들>도 볼 수 있었다. 생각보다 그림이 작군, 했다.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도 한 점 왔다. 나로선 처음 보는 <계단을 오르는 발레리나들>이긴 하지만. 가장자리 인물을 가차없이 잘라 표현한 드가의 기법이 당시로선 대단히 선구적인 시도였으며, 그게 일본 판화의 영향이라는 도슨트의 설명에 조금 놀랐다. 화투의 새 그림까지 예로 들어 설명하던데 그 부분에선 시끄럽고 듣기 싫어서 딴그림에 정신을 팔았다. 그림을 볼 때 설명을 들으면 더 많이 세세한 부분까지 보여서 좋을 때도 있지만, 때로 그냥 아무 설명 없이 나 혼자만의 느낌에 사로잡히고 싶을 때도 있어 변덕이 부글부글 끓는다. 일부러 도슨트 시간에 맞춘 것도 아닌데 그림 설명을 만나 약간 반가운 느낌과 구름처럼 몰려다니는 사람들 때문에 짜증나는 기분 사이에서 어제도 오락가락했다.
풍경화 가운데선 뭐니뭐니해도 고흐 그림이 인기 폭발이었지만, 밀레의 <봄> 앞에도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었다. 저 유명한 <만종>이나 <이삭줍기>보다(이번에 이런 작품이 왔다는 얘기가 아님;;) 나도 밀레의 <봄>이 훨씬 좋았다. 먹구름 잔뜩 낀 왼쪽 하늘에 드리워진 무지개도 예쁘고 농촌의 오솔길과 꽃을 피운 과일나무, 멀찌감치 나무 아래 서 있는 아주 작은 농부의 모습까지 정겹지 않은 구석이 없을만큼 최고의 완성도를 자랑하는 작품이 아닐는지. 하트만이라는 고객을 위해 그린 4계절 연작이라는데 겨울은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데고, <봄>이 연작중 가장 마지막 작품이란다. 계절 중엔 뭐니뭐니해도 봄이 최고지...
그밖
펠릭스 발로통, [공]
에 오호라 쾌재를 부르며 기쁘게 만난 그림은 펠릭스 발로통의 <공>. 작품 크기가 큰 것도 아니고 색감이 화려하지도 않은데 마음을 훅 후비고 들어오는 느낌이라 한참을 감상했다.
그림자까지도 행복해 보이는 것 같다가 또 좀 외로움이 풍기기도 하고... 저 멀리 서 있는 두 여인 가운데 이 아이의 엄마가 있을까 아닐까 혼자 한참 시나리오를 쓰다가 말았다.
해외 미술관에서 두서없이 주워담듯 빌려온 전시회는 통일감이 없어서 문제라고 속으로 구시렁거리다가 군데군데 마음에 드는 그림들이 눈에 띄어 불평이 쏙 들어갔다. 메인요리로 고흐의 별밤만 기대하고 갔는데 서비스로 주는 각종 디저트에 감동하고 온 기분이랄까. ㅋㅋ
벽 하나를 온전히 차지하고 있던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을 전시실에서 본 느낌을 그대로 간직해보려고 일부러 그런 사진을 구했다. 별빛을 심히 도드라지게 강조한 복제 그림들과 달린 원래 그림 느낌이 거의 고스란히 담겼다.
사진 출처: http://moonsoyoung.com/90114994256
고흐가 이 밤풍경을 그리려고 밀짚모자에 촛불을 얹어놓고 작업을 하느라 뜨거운 촛농이 뚝뚝 떨어져도 아랑곳하지 않았다는 도슨트의 말이 사실이든 아니든, 암튼 하늘의 북두칠성도, 해안도로를 따라 켜진 진노랑색 가스등도,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 부부의 미소띤 표정도 다 정겹고 아름답다. 코앞까지 가까이 가서 확인했는데 두 사람 다 웃고 있었다. ^^;
어제 만난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인생은 참 공교롭다. 97년이었던가, 도서전 때문에 프랑크푸르트에 간 김에 파리와 런던 여행을 계획했다. 파리에서 2박 3일이었나 3박 4일쯤 보내는 동안 마침 파리에 와 있던 친구와 점심무렵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했다. 세 시간이면 그림 구경 실컷 하겠지 싶어 시간을 안배했으나, 오르세미술관의 작품수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고 나는 인상파 전시관을 절반도 다 못돈 채 눈물을 머금고 약속시간에 맞춰 밖으로 나가야 했다. 그때 못봐서 제일 아쉬웠던 그림이 바로 <아를의 별이 빛나는 밤>이었다. 그날 친구는 오후에도 미팅이 잡혀있었다. 그래서 아마도 차를 마셨던가 간단히 점심을 떼우고 헤어져야 했으므로, 같이 지하철을 타다가 나는 뻬르라세즈로 친구는 미팅 장소로 향했다. 아쉬운 마음에 나는 파리일정을 하루 더 늘려 오르세 미술관을 마저 보겠다고 마음 먹었으나 런던행 비행기표 변경이 불가능했다. 하는 수 없이 다음날 파리를 떠나며 몇년 안에 다시 오리라, 파리 뿐만 아니라 유럽여행을 제대로 하리라 결심했다. 다시 가기는 개뿔. 그 결심은 지금껏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제 저녁에 만난 친구가 바로 그 때 오르세 미술관 앞에서 만났다가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진 장본인이다. 이 정도면 인생이 공교로운 거 아닌가? 물론 내가 예술의 전당 가는 김에 혼자 전시회를 볼 계획을 세웠지만, 먼저 벨리니로 장소를 정한 건 그 친구였다. 오래 전 그 친구를 만나려고 오르세에서 미처 못본 고흐의 그림을 십수년이 지난 어제 결국 보고 나서 또 그 친구를 만나니 뭔가 하나 빠졌던 퍼즐 조각을 마침내 끼웠거나 어그러졌던 아귀를 딱 맞춘 느낌이 들었다. 그날 파리 지하철에서 헤어지며 내가 친구에게 초콜릿을 주었다는데(나는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요번엔 친구가 내게 쿠키를 싸주었다. 부른 배를 꺼뜨리겠다고 예술의 전당 주변을 거닐다 올려다본 밤하늘 색깔은 유난히 푸른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하늘 색깔이 '프러시안 블루'라고 친구가 말했고 나는 오후에 보고 나온 고흐 그림의 밤하늘 색깔을 떠올렸다. 확실히 인생은 오묘하다. 혹은 인간이 같다붙이기 선수이거나.
대도록은 2만원, 소도록은 5천원인데 어째 인쇄 색감이 소도록이 더 좋은 것 같아 조금도 고민 않고 얄팍한 소도록을 샀다. 한장에 천원짜리 엽서들은 눈물겹도록 색깔이 형편없어서 살 마음이 들지 않았고...
브로셔도 예뻐서 또 한참 책상 옆에 세워두고 구경중.
티켓엔 드가의 발레리나 그림이 들어 있는데 이상하게 안예뻐서 사진 생략. -_-;
* 혹시 공연 보러가실 분들은 나름 주최측이 신경을 쓴 듯한 공연 형식에 관하여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음을 미리 경고합니다. ^^;
다녀온 지 며칠 지났다고 벌써 기억이 가물가물하려 하므로 다 사라지기 전에 몇 자 적어두어야겠다. 순전히 연말 집계용으로라도. ㅋㅋ
난생 처음 가본 브로콜리 너마저 공연을 한마디로 표현한다면 '괜찮다'라고 하겠다. 라이브로 듣는 덕원의 노래가 워낙 안습이라는 언질을 하도 들어 기대치가 높지 않았기 때문이겠으나, 어쨌든 6월 8일부터 시작된 정기공연의 무대가 매번 그들에겐 연습이자 라이브였을 터이므로 공연 초반 몇번의 불안한 음이탈을 제외하곤 대체로 노래가 안정된 느낌이었다. (지산을 비롯해 다른 무대에서 지켜본 경험이 있는 일행들의 증언도 "덕원 노래솜씨 많이 늘었다"는데 모아졌다^^) 악기를 전혀 다루지 못하는 내가 보기엔 다른 세션도 없이 겨우 네명--기타, 베이스, 건반, 드럼--이 그런 꽉찬 연주와 노래를 동시에 해낸다는 게 신기할 정도. 멤버들의 생김새도 소박한 노래와 이름이랑 딱 맞는 맑은 느낌이었다. 좀 더 화려하거나 느끼한 생김새를 지닌 사람들이었다면 나로선 뭔가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공연 예습하느라 CD들으며 마음에 든다고 손꼽은 노래들이 역시 공연에서도 좋았지만, CD로 들을 땐 별로라고 생각했다가 새로이 '발견'한 노래들도 두어 개 있었다. <울지마>, <마음의 문제> 같은 곡들. 2집 들을 때 첫곡인 <열두시반>부터 주르륵 네번째 <커뮤니케이션의 이해>까지 다 좋아라 듣다가, <울지마>, <마음의 문제>, <이젠 안녕> 세 곡은 괜히 마음에 안들어서 그냥 통째로 건너뛰고 들을 때가 많았는데 앞으로는 안 그럴 거다. 마이크와 음향 탓도 있겠지만 전체적으로 CD로 들을 때보다 덕원의 목소리가 더 굵고 힘 있게 들렸고, 일부러 미성을 내려고 애쓰는 듯한 기미도 사라져 좋았다. 2집 노래를 중심으로 CD순서와는 반대로 <다섯시 반>으로 시작해 2부에선 좀 신나는 노래로 쾅쾅 달리다 <열두시 반>으로 끝낸 것도 나름 이야기의 흐름처럼 느껴졌다. 별로 재미있지도 않은 얘기로 괜히 썰렁하게 시간 때우는 것보다 노래 한 곡이라도 더 부르는 걸 좋아하는 편이라 중간에 넷이 줄지어 자리잡고 앉았을 땐 내심 불만이었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멘트는 적당한 수준이었던 것 같다. 더 길었으면 화났을 듯;;
초반에 이번 공연엔 앵콜 없다고 잘라 말하고 나서 정말로 <열두시 반> 노래 끝내고 나서는 인사도 없이 악기 두고 나가버렸을 땐 좀 황당했다. 것도 본인의 고집이려니 하면서 나는 앵콜을 외치지도 않았고, 사람들 빠져나가기를 기다려 느릿느릿 거의 맨 끝에 공연장을 나왔는데 깜찍하게도 앵콜 공연을 상상마당 입구에서 준비하고 기다리고 있을 줄이야. 하필 우리 바로 앞에 세워둔 오토바이에서 자꾸만 알람을 시끄럽게 울려대는 바람에 짜증지수가 치솟기는 했지만, 우리가 원했던 <꾸꾸꾸>랑 <보편적인 노래>를 그 난리통에 들을 수 있어서 '원 풀었네'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말만 들었지 실제론 처음 들어가본 상상마당 지하 공연장의 음향과 냉방수준도 괜찮은 편이라, 가격대비(평일 공연 25000원) 공연 만족도를 따진다면 꽤나 흡족했다. 무대가 워낙 높아서 맨 뒤쪽에 있던 단신의 나도 이리저리 사람들 머리 사이로 움직여 다니며 구경하는데 큰 무리가 없었다. 다만... 스탠딩 공연이라해도 나 같은 노구를 위하여 맨 뒤쪽에 의자 몇개라도 놔주지 하는 안타까움이 들기는 했다. 간만에 한시간 반 이상 서서 공연을 보려니 힘들어서 원! 편한 운동화를 신고 갔는데도 중간 이후부터는 다리와 허리가 아파 슬그머니 혼자 벽에 가 기대 있었는데 바닥뿐만 아니라 나무 벽으로도 쿵쿵 전해지는 음향과 리듬이 느껴져 이것도 괜찮구나 싶었다.
그러니까 공연 후기를 두 마디로 줄인다면, '괜찮다~'와 역시 스탠딩공연은 '힘들어'인가? ㅎㅎ 가만 뒀으면 공연하는 줄도 모르고 있었을 터인데 옆구리 찔러 가자고 해주신 지다니께 몹시 감사. 그나저나 브로콜리 너마저도 참여한다는 서울대 <본부스탁> 공연은 성황리에 잘 끝났을까 궁금타.
이른바 '마린룩'이라고 하여 봄과 여름이면 거의 해마다 유행하는 듯한 줄무늬 옷에 마음이 약해진다는 벨로의 포스팅을 보고 곧장 공감했다. 나는 무늬보다 색깔에 집착하는 편인데 마음에 들어서 사고 보면 회색인 경우가 어찌나 많은지. 대체로 무채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흰색, 검정색, 회색의 범주에 속하는 옷들이 가장 많으나 그 가운데도 회색이 워낙 많아서 왜 만날 스님 옷 같이, 똑같은 옷을 사오느냐고 엄마에게 종종 타박을 듣는다. 반면에 벨로가 좋아하는 미색/남색 가로줄무늬 옷은 남들이 입은 거 보며 좋아라하면서도 선뜻 사게 되진 않는다. 가로줄무늬를 입으면 '키가 작아보인다'거나 자칫 잘못하면 '죄수복'처럼 보인다는 속설에 너무 깊이 세뇌당한 탓일까? ^^; 그렇다고 그런 옷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다.
이런 옷도 있다. ㅋㅋㅋ
처음 본 순간 너무도 마음에 들긴 했으나 저 난감한 코사지(뗐다 붙였다 할 수 있는 게 아니라 바느질로 꿰매놓은 거다) 때문에 망설였더니, 점원이 정 마음에 안들면 떼고 입으면 된다며 꼬드겼다. 가을부터 겨울 내내 대개 군밤장수 패션(울 엄마가 헐렁한 나의 겉옷들을 보며 빈정거리는 용어;)을 고수하다 봄이 되면 좀 '소녀돋는' 옷에 눈을 돌리는 편이다보니, 아무래도 그 분위기에 휩쓸려 사고 말았던 듯하다.
그러나... 역시 코사지 때문인지 짤똥한 길이 때문인지 여성스러운 스타일 때문인지 (물론 세 가지 이유 전부 다 해당되겠지 ㅋㅋㅋ) 이제껏 몇번 안입었다. 그렇긴 하지만 니트 실의 재질도, 공단을 싸서 만든 단추도, 감색과 하늘색과 아이보리색의 조화도 모두 마음에 들어서 그냥 서랍 정리 할 때마다 쳐다보며 좋아하는 관람용 옷.
지난번 이모부 칠순잔치 때 큰맘 먹고 입으려고 스커트와 함께 챙겨두었다가 막상 그날 되니 부페음식 잔뜩 먹고 배나오면 흉측할 것 같아 입지 못했다. ㅎㅎㅎㅎ
암튼 일하긴 싫고 책도 눈에 안들어오고 TV도 별 볼일 없기에 나도 승복 퍼레이드로 트랙백하려고 옷장을 열었다. 회색 옷이 제일 많은 건 사실이나 먹물 들인 스님옷과 가장 유사한 '그레이 헤더' 옷은 생각보다 '그렇게' 많질 않은 느낌이라 진하고 흐린 회색옷을 몽땅 찍으려니 또 막 귀찮고... 암튼 그래서 그냥 손에 집히는 대로 골라 모았으니 큰 기대는 하시지 마시라. ^^;
가장 최근인 올봄에 산 승복 색감의 회색옷이다. 다이마루로 짠 그레이헤더 저지 원단으로 입으면 축축 쳐지고 늘어지는 게 아주 마음에 드는데... ㅠ.,ㅠ 결정적으로 입을 시기를 놓쳐 한번도 아직 입지 못했다. 4월에 샀을 땐 입기에 너무 추웠고, 5월엔 저걸 떨쳐입고(앞자락이 스카프처럼 한번 매는 형태라 좀 거추장스러운 느낌이 드는;;) 외출할 마음이 들질 않았고 지금은 너무 더워졌다. 그래도 아직은 장마철에 입을 일이 있지 않을까 노리고 있다. :-p
가디건을 좋아해 사고보면 역시나 회색이다. 역시나 소녀돋는 코사지가 달린 왼쪽 카디건은 착탈식 옷핀이라 주로 떼고 입는다. 오른쪽은 사실 스포츠웨어 같은 스타일이 내 취향과는 거리가 먼데 순전히 재질과 색깔 때문에 무리해서 산 케이스. 캐시미어, 캐시미어 노래를 부르던 어느 겨울에 발견한 이 카디건은 승복 같은 회색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하늘색까지 덧대어 있으니 깃부분과 지퍼가 마음에 안들어도 그냥 살 수 밖에 없었고, 정말 정말 따뜻해서 후회하지 않았다! 회색 카디건이 또 어디 있을 텐데... 세탁소에 보냈던가. -_-;
한벌한벌 옷을 찍자니 귀찮아서 한꺼번에 열을 맞추어 놓고 찍었다.
줄 맞추느라 위 두벌도 같이 접어 놓았음. 찍고 보니 회색도 이렇게 '버라이어티'하구나야. ㅋㅋㅋ
맨 윗줄 왼쪽 세벌 빼놓고는 다 여름옷이라 반팔 아니면 민소매다.형광등 조명이라 색이 더 흐리게 나오지 않으면 진하고 나왔음. 엄청 오래된 옷들도 꽤 되는데 좋아하는 것들이라 절대 안버리고 여름마다 애용한다. 하도 오래 돼 집에서 막입는 V넥 면티도 두어개 더 있으나 하나는 빨래통에 하나는 마침 입고 있어 생략.
이번엔 겨울옷 서랍에 들어 있던 회색 털실옷. 회색 터틀넥은 겨울에 한참 입다가 좀 오래 됐다 싶으면 새로 개비하는 필수품인 것 같다. 얇은 것, 두꺼운것, 면으로 된 것, 모직으로 된 것 종류별로 있는데, 면으로 된 터틀넥이 어디로 갔는지 안보인다. 옷방에 있는 듯.
왼쪽 가운데 옷은 검정색처럼 나왔지만 실제로는 그냥 진한 회색이다. 첫직장에서라면 딱 '다크 차콜그레이'라고 불렀을 색깔인데...
당연히 회색 재킷과 코트도 두어개 씩은 있으나 옷방에서 꺼내오기 귀찮아 대신 소품을 찍었다.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다. 회색을 좋아하긴 해도 나름대로 다양하게 진하고 흐린 변화를 추구한다는 걸 새삼 깨달았다. 검정색처럼 나온 겨울 목도리도 엄연히 진한 회색이라고 극구 주장.
스카프와 목도리를 옷장에 다시 넣다가 회색 원피스에도 눈길이 갔
다. 꽤 오래전에 산 옷이고 한해에 한번 입을까말까 하지만 어쨌거나 단순한 디자인과 색깔이 내 마음에 꼭 든다. 비록 지인들에겐 '너무 수녀복 같다'는 평을 듣기도 하지만 스님옷이나 수녀복이나 그게 그거지! ㅋㅋㅋ
그밖에 회색 추리닝은 긴것, 칠부, 반바지까지 계절별로 갖추어져 있으나 굳이 사진까지 공개하지 않아도 상상가능한 옷이므로 생략하였다. 그러고 보니 양말은 칠할이 회색이고, 속옷까지 회색이 적지 않으니... 회색 인간의 회색사랑은 앞으로도 끝이 없을 듯. ^^;
한참 전에 이웃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브로콜리 너마저 노래 베스트 다섯곡 뽑기, 뒷북도 이런 뒷북이 없다 싶지만 새삼 해봤다. 공연보러 가려면 어차피 노래 예습도 해야하니 겸사겸사다. CD를 사서 처음 들을 때 좋은 곡이 있고 나중에 더 좋아지는 곡이 있고, 또 계절이나 시기에 따라서 유독 귀에 박히는 곡이 있게 마련이다. 그래서 그런지 뽑고 보니 나도 좀 의외였다. 약간 의기소침한 요즘 상태를 반영하듯 전부 다 조용조용한 곡인 것 같다. 원래 브로콜리 노래가 거의 그렇긴 하지만...
- 춤. 처음 들었을 때 꼭 토이 노래를 듣는 것 같았다. 잔잔한 도입부부터 뭔가 징 마음을 울리는 데가 있다.
- 앵콜요청금지. 워낙 유명한 곡이라 CD사기 전에도 라디오에서 처음 들어본 것 같은데,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그때 그 마음이 부른다고 다시 오나요' 부분이 특히 짠했던 기억이 있다. 계피 양(이겠지?) 이 노래 부를 때 목소리가 제일 마음에 든다.
- 보편적인 노래. 정규 1집의 타이틀곡이니 더 말할 필요가... '보편적'이라는 말이 이렇게 슬프게 들리는 말이란 걸 처음 깨달았다. 흔해빠진 사랑과 이별 노래가 다 자기 얘기 같은 청춘의 경험도 이렇게 담백하게 표현될 수 있다니. '문득 선명하게 떠오르는 그때, 그때의 그때' 부분 가사가 특히 좋고, 징징징 기타연주가 인상적인 간주도 마음에 든다. 어딘가 좀 헐렁한 듯한 느낌이 브로콜리 음악의 매력인 것 같은데, 이 노래는 그 중 가장 꽉찬 느낌이다.
- 열두시 반. CD에서 음원 추출하면서 뭔가 잘못됐는지 마지막 부분이 이상하게 씹혀 매번 건너뛰고 들었었는데, 요번에 예습하며 들으니 반하게 좋다. 덕원의 곡과 가사는 여백 많은 그림이 연상되는 느낌이 좋은 듯. 기타를 배워서 한번 직접 연주하며 불러보고 싶다는 선망이 생겼다. ㅋ
-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처음 들을 때 보편적인 노래랑 좀 헷갈려 했고(이렇게 귀가 무뎌서야 원;; 가사 발음을 헷갈리는 것과는 또 다른 사오정 증상), '말하지 않아도..' 부분에서 덕원 발음이 귀여워하는 척 하는 것 같아서 괜히 싫어했었는데, 이번에 들으면서 좋아졌다. 도입부에 피아노로 시작해서 장중하게 이어지는 전주부터 마음에 든다.
2집 처음 들었을 때 1번 트랙부터 앞부분 곡이 다 좋아서 나는 1집보다 2집 노래에서 더 많이 꼽게 될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며칠 들으며 후보곡을 뽑다보니 아니었다.
다섯곡 후보에 최종까지 올랐다가 떨어진 노래들은 두근두근, 이웃에 방해가 되지 않는 선에서, 커뮤니케이션의 이해, 말.
내게는 노래가 없지만 이웃들이 번외편으로 많이 좋아한 노래, 꾸꾸꾸도 찾아 들어보니 사랑스러운 곡이다. 뭔가 경쾌한 곡도 좀 꼽아보려고 의도적으로 챙겨 들어보았으나 안타깝게 마지막에 다 떨어졌다. ㅎ 역시 시기 탓인지도. 아이튠즈 재생 횟수를 보아도 딱 좋아해서 많이 들은 노래가 보이더라.
노래를 아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감동스러울 만큼 음향이 꽉 찬 것도 아니지만 묘한 매력이 있는 브로콜리 너마저 노래는 꾸밈이 심한 발음과 노래를 싫어하는 취향과 꽤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다(요즘 대세라는 아이유의 경우, 아이 자체가 귀여운 건 나도 인정하겠는데 노래하는 목소리랑 가사 발음이 무작정 싫다. 그래서 요즘 S오일 광고 노래 나오면 괜히 짜증 -_-;). 그러니까 공연도 따라 보러갈 생각까지 했겠지. 아주 오래전 파고다예술극장으로 다섯손가락, 이치현과 벗님들 등의 공연을 보러 다니던 때도 떠올라, 이번 브로콜리 공연에 설렘을 품고 있다. 성대 자랑을 하지 않는 가수들이니 라이브로 들으면 과연 어떤 곡이 제일 가슴에 와 닿을지 그것도 궁금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