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에 해당되는 글 233건

  1. 2011.12.06 화장 3
  2. 2011.11.26 번역서는 공손하다? 12
  3. 2011.11.15 합창 10
  4. 2011.10.18 아흔개의 봄 4
  5. 2011.10.14 어떤 결혼식 12
  6. 2011.10.04 엄마, 갈게 8
  7. 2011.09.22 오래된 물건 12
  8. 2011.09.03 직업 추천 17
  9. 2011.08.31 드디어 짜장면! 11
  10. 2011.08.26 캘리포니아 우리문화나눔회 돕기 11

화장

투덜일기 2011. 12. 6. 23:12

국민학교 4학년 때였던가, 학예회에서 꼭두각시 춤을 추느라 칠한 검정색 아이라인과 빨간 립스틱이 아마도 처음 내가 해본 화장이었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은 엄마 화장대에서 더러 화장놀이를 해봤다는데, 울 엄마의 유일한 화장도구는 '주홍색' 립스틱이었기 때문에 나는 시도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얼굴 새하얀 엄마에겐 잘 어울릴지 몰라도(더는 얼굴색이 하얗지 않은 노년의 울 엄마는 여전히 '주홍색' 립스틱을 가장 선호하신다. 참 취향도 일관성 있으시지;;) 내가 바르면 그야말로 '김치국물' 묻은 것으로 보일 게 뻔했다.

그 뒤로 중학생 때는 언감생심 화장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고등학생이 되자 반에서 외모에 유달리 신경을 쓰는 몇명은 체리빛깔의 립글로스를 바르고 다녔다. 똑같은 체리향이 나도 대부분의 아이들이 바르는 챕스틱 립크림과 달리 그애들이 바르는 건 향이 더욱 진하고 반짝반짝 입술에 윤기가 흘렀으며 색도 또렸했다. 물론 학생부 금지품목이었지만, 당시에 향수도 어지간히 뿌리고 다니던 친구 하나는 학생주임한테 가끔씩 립글로스 때문에 손바닥을 맞고 반성문을 써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개기름 바른 것 같다>며 그런 아이들의 요란한 입술을 비웃는 축이었다. 진짜로 안 예쁘고 입술만 동동 떠다니는 것 같던데!

그러고는 드디어 고3 말, 학력고사(그렇다, 나는 학력고사 세대 ㅋㅋ)가 끝나자 연일 화장품 회사에서 찾아와 특별수업을 진행했다. 아이섀도와 립글로스, 립스틱 샘플도 막 나눠주면서... 그러나 80년대 중반인 당시엔 파격적인 색조화장이 유행이라(분홍 바탕에 파란색으로 눈꺼풀 강조, 주황바탕에 진초록 따위!) 화장품 회사 직원이 예쁜 아이 하나를 모델로 뽑아 색조화장을 해놓은 몰골은 예뻐진 게 아니라... 퍽 무서웠다. +_+ 나는 결심했다. 졸업해도 화장하지 말아야겠다고.

대학 신입생때였던 것 같은데 당시에 <지지>라는 화장품 브랜드가 엄청 유행을 했다. 사회 초년생들에 맞는 가벼운 색조와 저렴한 가격, 앙증맞은 케이스로 관심을 끌었다. 내가 직접 샀는지 누가 선물을 해주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암튼 5월 축제를 앞두고 드디어 내 손에도 그 <지지 립글로스>가 손에 들어왔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둥근 세모꼴의 분홍색 케이스가 지금도 눈에 선한데 암튼, 최초의 화장이랍시고 그걸 입술에 펴바르고 학교에 갔더니 촌스러운 과 남자애들이 막 아유를 보냈다. 초등학생이 엄마 꺼 훔쳐바른 것 같다 야! 갈치 한마리 입에 물었냐? 그러거나 말거나 그 이후로 나의 색조 화장품은 야금야금 늘어났다. 밤색과 검정색 아이라이너, 눈썹 연필, 매니큐어, 색색깔의 아이섀도까지.

그래도 학생시절엔 매일 화장을 한 건 아니었고 그냥 시간 많고 기분 내키는 날 그림 그리듯 시도해봤다가 외출 직전에 북북 지우고는 아이라이너와 립글로스 정도만 내버려뒀던 것 같다. 본격적인 화장은 역시나 회사생활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일단은 <내 얼굴의 햇살>이라고 불리던 안경을 벗고 콘택트렌즈를 껴야 했는데(얼굴을 반쯤 가리는 당시 유행 안경을 쓴 여직원은 잘 안뽑아주던 전근대적인 시대여서 입사원서용 사진부터 안경을 벗고 찍었다. ㅠ.ㅠ), 안경을 벗고 보니 부은 듯 수북한 눈두덩이 어찌나 더 눈에 거슬리던지! 그걸 감춰보겠다고 아이섀도로 색깔을 입히기 시작한 것. 

암튼 첫 직장이 의류관련업이었고, 그 회사 모토가 <패션을 모르면 패션을 다룰 자격이 없다>는 것이어서 옷이며 화장 가지고 꽤나 스트레스를 줬다. 해서... 옷이야 뭐 그렇다 치고 당시 사진을 보면 화장이 아주 가관이다. 눈주변은 뻘겋고 퍼렇고 때론 밤탱이처럼 시커멓고 입술은 새빨갛지 않으면 시커멓고(왜 그땐 진한 갈색 립스틱이 또 그리도 유행이었는지!)... 게다가 미국본사를 등에 업고 우리가 갑 입장이라 구매자로서 '센' 이미지를 줘야 한다고 선배들에게 교육을 받기도 했다. 끙. 암튼 그래서 앨범에선 그때 사진들이 바로 나의 암흑기다. 닭벼슬처럼 앞머리를 치켜세운 꼬불꼬불한 머리칼은 치렁치렁하고 얼굴은 독기 어린 화장에다 울트라파워숄더 재킷까지. ㅋㅋㅋ  

그렇게 세월은 흐르고 흘러 화장의 유행도 변하고 나이를 먹으며, 이제는 화장이랍시고 얼굴에 공들여 색을 입히는 일이 거의 연중행사가 되었다. 물론 대개 외출할 때는 선블럭과 비비크림 정도야 바르지만, 이젠 귀찮아서 장보러 갈 때나 심지어 보호자로 엄니 병원 따라갈 때조차 미친 척 맨얼굴로 나가도 그리 민망하지 않은 뻔뻔함을 갖추었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민낯에 대한 자신감이 아니라 화장 지우기 귀찮아서다 ㅎㅎ) 민낯이 민망하면서도 귀찮음을 못이기고 그냥 집밖으로 나설 땐, 어쩔 수 없이 아줌마 다 됐구나 서글픈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다시 화장에 요란과 부지런을 떠는 모습도 상상되지 않는다.

세대차겠지만 우리때와 달리 요즘 아이들은 화장을 정말 일찍 시작하는 추세다. 요즘 열네살 조카의 (인위적으로) 뽀얀 얼굴에 놀란 내가 걱정을 했더니 비슷한 또래의 딸 키우는 친구가 별난 일도 아니라고 위로해주었다. 열네살 중학생이면 비비크림과 파우더, 아이라인은 기본이라고 봐야 한다나. +_+ 수도권 신도시에 사는 그 친구는 지켜보니 6학년 여자애들도 거의 절반은 파우더를 두드리고 다니더라고 했다. 미디어와 사회의 부추김 때문에, 온갖 수단을 동원해 더 예뻐지고 싶다는 욕망은 이제 아이들도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다는 뜻이다. 친구 말이, 고등학생인 큰딸은 차라리 지각을 했으면 했지 눈썹이 완벽하게 그려지지 않으면 아예 집을 나서질 않는단다. 그래서 친구는 고3이 되기 전에 차라리 딸에게 살짝 눈썹 문신을 해줄까 심각히 고민중이라고 했다. 참고로 친구 딸은 고교평준화가 되지 않은 수도권 지역의 유명 학교 우등생이다. 하기야 미모에 대한 관심과 성적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겠나. 개인차겠지.

그래도 여전히 나는 청소년기의 색조 화장이 걱정스럽고 마뜩찮다. 화장 안해도 눈부시게 예쁘다고, 네 나이 땐 여드름 송송난 이마도 매력이라고 아양도 떨어보고, 지금부터 화장 너무 하면 스무살 즈음엔 피부나이 서른살로 판명될지 모른다고 은근히 협박도 해보지만 별 소용은 없다. 돌아보면 화장에 대해서 이미 어른들이 너무 많은 빌미를 조카에게 제공했던 것 같다. 일종의 색채 수업일 수도 있겠다 여겨, 어린이용 장난감 화장품도 꽤 많이 사주었고(요즘 문제되는 유독성 화학제품은 아니었기를 빌고 있다 ㅠ.ㅠ), 어린 시절 미용실에서 장시간 버티며 까탈부릴까봐서 원장이 조카에게 예쁘게 화장을 해준 적도 많았다. 조카가 워낙 그런 걸 좋아라했었고...


예닐곱살 땐 가끔씩 어른들이 신나서 해주었던 색조 화장이 열네살 땐 '절대' 안된다고 말하는 논리는 내가 들어도 별로 설득력이 없다. 다만 '학칙'에 어긋난다는 점이 문제인데, 요즘 아이들이 그걸 중시할 리도 없지 않은가. 색조화장이라고 해봐야 아직은 비비크림과 아이라인 정도이니, 그저 화장은 잘 지우는 게 중요하다고 당부하며, '요즘 열네살 다 그렇대'라고 마음을 달래고 있다. 가뜩이나 감당하기 어려운 소용돌이 같은 사춘기 광풍 가운데 사실 화장은 아주 사소한 부분이니 그냥 넘어간다고나 할까. 귀엽고 어여쁜 조카들이 더는 자라지 않으면 좋겠다는 욕심을 품은 게 바로 얼마전인데, 간사하게도 지금은 사춘기가 후딱 지나버려 어서 성숙해지면 좋겠다고 빌고 있다. 그러면 사춘기의 말간 맨얼굴이 제일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걸 녀석도 뒤늦게 깨닫게 될까. ㅡ.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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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소설에는 작가에 따라서 얼마든지 비속어를 사용하는데 왜 번역서엔 그게 허락되지 않을까? 영어로  <son of bitch>는 거의 누구나 상대를 가리지 않고 흔히 쓰는 일상적인 욕이다. 그렇더라도 상황에 따라선 분명 <개새끼>가 정확한 옮김인데 번역서에선 종종 <개자식>으로 순화된다. 그뿐인가. goddamn, damn, fucking, mother fucker, shit... 제 아무리 머리 굴려 나름 기발하게 달리 옮겨봐도 편집 과정에서 그저 <빌어먹을> 아니면 <젠장>, <제기랄> 정도로 순화'당'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호밀밭의 파수꾼>을 원서로 읽으면 방황하는 십대의 날선 언어와 감정, 욕설이 난무하지만(한 페이지에 욕이 막 두세개씩 나온다), 번역서로 읽어보면 어찌나 공손하고 고상하신지. 일부 오역도 오역이지만 이 책의 경우, 비속어의 일체 순화 및 생략은 확실히 읽는 재미를 반감시켰다고 생각한다. 김려령의 <완득이>를 킥킥대고 읽으며 <호밀밭의 파수꾼>의 번역도 가끔씩 그렇게 경쾌한 분위기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문득 의구심을 품은 적이 있다. 물론 두 책의 전반적인 분위기가 퍽 다름을 잘 안다. 둘 다 남자 고등학생이 주인공이다보니 단순히 예를 들었을 뿐이다. 하지만 나라를 막논하고 약간 삐딱한 청소년이라면 원래 욕이 일상 아닌가?

암튼 언젠가 범죄소설을 번역하면서 수시로 등장하는 fucking의 뉘앙스를 살려보겠다고 내딴엔 비속어인 '씹할'을 주장했다가 결국 졌다. 단순히 한국 출판계에서 번역어의 공손함과 교양을 추구하기 때문은 아니다. 비속어가 남발된 책은 간행물윤리위원회에서 청소년 유해간행물로 딴죽을 걸 수도 있고, 그러다 혹 재수없게 19금 판정이라도 받게 되면 비닐로 포장 판매를 해야한단다. 그랬다간 가뜩이나 열악한 시장에서 독자층은 좁아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어쩔 수 없이 지레 위축된 편집자와 번역자는 오랜 세월 원서의 비속어를 자체 검열하는 양상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소설을 읽어보면 길거리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비속어와 욕을 작품에 구사해도 아무 문제 없더구만? (가령, 정유정 작가의 <7년의 밤>을 읽으며 '씨발'을 비롯한 비속어의 사용이 매우 자연스러워 놀랐었다) 그런데 왜 번역서는 구태의연하게 계속 공손해야 하는지?

그나마도 요즘엔 번역서에서도 <나쁜년> 정도는 허용되는 추세다(과거엔 <못된 계집>을 더 많이 본 것 같다;;). 아직도 <새끼>는 <자식>, <놈>으로 순화하고 있자니 문득 부아가 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 세종이 가끔 '지랄하고 자빠졌네'라고 외칠 때 느끼는 희열을 번역서에서도 느끼면 안되는 걸까? 일부러 격 떨어지고 천박한 언어로 번역할 이유는 없지만, 걸핏하면 '원서의 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는 독자들의 비수를 맞을 각오를 해야 하는 번역인들에게도 이제는 좀 제대로 비속어를 우리말로 옮길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혹 이미 그렇게들 하고 있는데 내가 너무 보수적인 출판사들과만 일을 했던가? -_-;; 뭐 그렇다면 다행이고.) 그런 의미에서 지금 작업하는 책에선 나름 원색적인(?) 비속어를 또 한번 디밀어볼 생각이다. 통과될지 어떨지는 알 수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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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창

투덜일기 2011. 11. 15. 03:03

학창시절 해마다 열리는 합창대회가 난 그렇게 싫을 수가 없었다. 거의 한달도 넘게 방과후에 꼬박 남아 연습하는 게 무엇보다도 제일 싫고, 악보도 잘 못보는 까막눈으로 자칫하면 새로운 노래를 두곡이나(지정곡 하나, 자유곡 하나) 배워야하는 것도 싫고, 합창대회 직전 무대 뒤에서 닭비린내 나는 날달걀을 깨먹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반장이 달걀 두판 사가지고 와서는 목소리 잘 나오게 무조건 먹으라고 무식하게 강요했었다. 지금에야 말하지만 달걀 껍질에 살모넬라 균 있을지도 모른다는데! 수년간 매해 날달걀 입대고 억지로 먹고도 다들 멀쩡한 게 참 신기하다. 우웩~).
 
투덜투덜 못마땅해하는 내가 속했던 때문인지 중고등학교 6년 내리 내가 속한 반은 합창대회에서 상을 타본 적이 없었다. 지휘자랑 반주자는 꽤나 유명하고 훌륭한 애들이었는데도 그랬다. 고등학교 때 나랑 3년 내리 같은 반이었던 지휘자는 조회 때마다 단상에 올라 애국가랑 교가 지휘도 하고 성악전공도 하는 실력자였는데도 우리반 60명으로는 합창대회 수상을 이끌어내지 못했다. 악보치이긴 해도 음치박치는 아닌지라 내가 턱 들어봐도 합창 잘하는 반은 확실히 소리가 틀렸다. 화음의 균형이 잡히고 소리도 웅장하달까. 합창대회때 강당에 앉아있어보면 대강 어느 반이 상을 타겠구나 짐작이 가능했다.   

대학때도 잠깐 합창반 동아리에 억지로 끌려다닌 적이 있었는데, 둘째주였나 무려 독일어 가곡을 막 가르치려들어서 얼른 도망쳤다. 고딩때 합창대회 지정곡으로 <들장미>를 독일어로 외워 불러야했던 해의 악몽이 떠오르지 않겠나. -_-; 나는 아무래도 협동심이 좀 떨어지는 부류였던 것 같다. 매스게임도 그렇고 단체로 뭘 좀 하라 그러면 왜 그리도 싫던지! (하기야 단체로 강제노역에 시달리는 거 좋아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마는, 그래도 합창대회며 응원대회 같은데서 상타는 반은 꼭 있기 마련;;) 내가 합창을 싫어했기 때문인지, 드물게 합창공연을 보아도 별 감동은 없었다. 그저 연습하기 힘들었겠구나 생각했던가? 그래도 전문합창단 공연은 대개 악보를 보면서 하니까 별로 안 어려울 것도 같았다. 

교생실습을 나가서도 애들 합창대회 준비를 도와봤지만 어휴, 할 게 못됐다. 피아노를 좀 배운 전적이 있든지 해서 악보 보고 대강이나마 음을 잡을 줄 아는 아이들은 반에 절반밖에 안 됐던 거 같다. 한소절 두소절씩 파트별로 노래를 기껏 가르쳐 돌려보냈다가 다음날 연습시켜 보면 다시 원점이고 엉망이었다. ㅋㅋ 하기야 뭐 나도 학생땐 그랬으니까. 다만 교생 입장일 땐 내가 아는 노래여서(6년이나 합창대회를 겪어봤더니 곡이 빤하더군) 참견이 가능했을 뿐. 물론 내가 교생때 맡았던 반도 역시나 합창대회에서 상을 타지 못했다. 나의 징크스였을까? ㅋ

하여간에 억지로 합창대회 준비를 할 때는 그렇게도 싫더니만 TV 프로그램에서 연예인과 일반인이 모여 합창단을 꾸려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은 꽤 재미있게 보았다. 우는 사람 보면 덩달아 우는 버릇이 있긴 하지만 그와 별도로, 강제가 아니라 스스로 원한 개개인이 모여 함께 노력해 얻은 성취감이 주는 눈물의 의미를 알 것도 같았다. 대중매체의 힘과 유행 탓도 있겠으나, 암튼 그 프로그램 이후 전국적인 합창붐이 일었다고 들었다. 최근엔 시즌2로 실버합창단 프로그램도 방영했다.

여든이 넘어서도 고운 목소리로 합창단에 지원한 할머니를 TV로 보며 자극을 받으셨는지 울 엄마도 지난달부터 동네 문화센터인지하는데서 운영하는 노인합창단에 가입해 열공중이시다. 문제는 울 엄니가 박치라는 것. +_+ 소일거리 삼아 그냥 놀러 다니면 딱 좋겠구만 다음달에 공연이 있어 두곡을 완전히 익혀야 한다는데, 노인들이 일주일에 한번 연습으로 과연 그게 가능할지 나로선 심히 의문이다. 울엄마만 해도 수요일마다 합창연습 하고 돌아온 날은 그럭저럭 악보를 보며 노래를 하시는데, 바로 다음날만 되도 전혀 다른 가락이 흘러나온다. 듣고 있자면 웃겨서 미치겠다! 완전 민폐일 것 같아 걱정했더니, 같이 다니는 이웃 한분은 아예 콩나물대가리 구분도 못하신다고 자기는 우등생축에 든단다. +_+

요즘 엄마가 매일 악보를 보며 열공중인 노래는 <그대 있는 곳까지>(나는 <에레스뚜>로 배웠던 노래). 다행히 내가 아는 노래라서 2주째 매일 개인교습(?)을 시켜드리고 있는데, 음은 이제 얼추 다 잡아드렸으나 아직도 박자가 대단히 어설프다. '...그대목소리~ 아~모두...' 부분이 전혀 안된다. 이후 반복되는 '... 있을까~ 아~ 바람아..' 부분도 마찬가지. ㅠ.ㅠ 하도 매일 이 노래를 불렀더니 나도 모르게 아무때나 흥얼흥얼 아주 입에 붙어버렸다. 물론 왕비마마께서는 TV보다 말고도 척 악보를 펼치고 연습을 하실 정도다. 그러고도 음정박자는 여전히 불안불안.

하지만 엄마의 합창연습을 보며 막상 당시엔 몰랐다가 한참 지나고서야 알게 되는 가치를 또 한번 깨닫는다. 학창시절엔 참 지겹고 싫기만 했었는데 왜 해마다 교내합창대회를 강행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억지로라도 여럿이서 입을 모아 한 목소리를 내는 연습을 한다는 것의 의미 외에도, 그때가 아니었으면 내가 어떻게 그런 합창곡들을 끝까지 외웠겠으며 날달걀 톡톡 깨먹는 법을 배웠겠나. 콩나물대가리에 서툰 내가 불안하게 외워 익힌 음정을 한달쯤 연습 후 자신있게 소리낼 수 있게 된 과정도 다 내겐 피가 되고 살이 되었겠구나 싶다. 그런 의미에서 계속해서 엄마의 합창연습을 열심히 도울 생각이다. 영원히 함께하자던 그 맹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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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개의 봄

삶꾸러미 2011. 10. 18. 20:50

우울증이 심해지면 어김없이 반복되는 엄마의 자학 레퍼토리 가운데 하나는 쓸모없는 자신을 어디에든 '갖다 버리라'는 것이다. 심지어는 매달 후원금을 보내시던 불교 간행물 <연꽃마을>에서 운영하는 요양시설을 콕 찝어서 그리로 보내고 너는 자유롭게 편히 살라는 말을 하신 적도 있다. (그러나 무슨 연유인지 얼마전 엄마는 얼마 되지도 않는 월 후원금 자동이체를 끊어버렸다. ㅋㅋ) 그 말은 곧 엄마가 가장 피하고픈 상황이 어딘가에 버려지는 것이며, 낯선 곳에 버려지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깃든 투정을 반어법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노년이 되면 누구나 그렇겠지만 칠순을 넘기면서 엄마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치매다. 얼마 전엔 나 몰래 보건소에서 운영하는 노인건강관리 프로그램에서 치매검사도 하고 왔단다. 한달에 한번 꼬박꼬박 정신과의와 상담을 하고 우울증 약을 먹는데도 안심이 되질 않았던 모양이다. 다른 건 다 잘했는데 단어 세 가지 기억했다 나중에 말하기 문제를 하나도 못 맞혔다면서 아쉬워하긴 했지만, 검사 결과 '양호' 판정을 받아온 엄마는 자기 치매 아니라면서 몹시 기뻐했다. 

가끔씩 내가 엄마에게 구구단을 외게 시키고, 불쑥 덧셈 뺄셈 문제를 내는 이유도 자꾸만 깜빡깜빡 잊는 건망증이 치매 초기증상일까봐 벌벌 떠는 엄마를 안심시키기 위함이다. 헌데 멀쩡한 젊은 사람들도 잠 잘 못자고 컨디션 안좋으면 말도 헛나오고, 구구단은커녕 단순한 셈도 못하는 게 당연하다. 그러니 일조량 떨어지면서 해마다 몹시 불안불안 조마조마하게 넘기는 가을에 접어들며 심신의 컨디션이 약간 떨어진 엄마가 불면과 건망증을 잠시 겪는 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심지어 나는 잠 잘 자고 컨디션 좋을 때도 암산이나 돈계산 같은 숫자와 관련된 사고는 단순한 것조차 잘 하지 못하며, 가끔씩 손에 멀쩡히 들고 있는 차키나 휴대폰을 찾아 집안 곳곳을 돌아다니는 인간이다. 치매초기를 의심하려면 차라리 나를 의심해야지, 수십년 전 사건부터 쓰레기 배출요일까지 나보다 더 잘 꿰고 있는 엄마는 염려할 게재가 아니다.

다른 노인들은 청년처럼 펄펄 뛰어다니실 나이인 71세에 울 엄마가 너무 엄살(?)을 떠는 것 같아 못마땅해 툴툴거리지만 내심 나도 겁이 나긴 한다. 친할아버지, 친할머니, 아버지 세분은 앓지도 않으시다가 졸지에 쓰러져 운명하셨고, 꽤 오래  병을 앓으신 외할머니도 끝까지 정신은 거의 말짱하셨기 때문에, 우리 엄마도 자잘한 지병은 있으시되 정신은 끝내 혼미해지지 않기를 바라고는 있으나 건강에 관한 한 누구도 자신할 수 있는 부분은 없다. 게다가 노인성 우울증이 치매로 이어지는 확률이 꽤나 높음(치매 초기가 노인성 우울증으로 시작된다던가?)을 알기에 마음을 놓을 순 없다. 그래도 위안이 되는 점은 울 엄마의 우울증이 45년 역사를 넘긴 지병이라 노인성 우울증과는 양상이 다르고 (사실 엄밀히 말해 울 엄마는 조울증이시다), 꾸준히 치료를 받아오고 있으며, 평생 비빌 언덕이셨던 우리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는 오히려 더 잘 견뎌내고 계셔 4년째 심하게 앓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쨌거나 못된 딸년인 나는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우환에 대비하여 이미 방향도 세워놓았다. 요즘은 치매노인 부양을 돕는 데이케어 센터가 동네마다 생겨나기도 했으므로 감당할 수 있을 때까지는 버텨보도록 노력하되, 힘에 부친다고 생각되면 당연히 요양병원에 모실 거라고.
 
하지만 요양병원에 방치하고 더는 돌보지 않는 수많은 노인 환자 문제를 언론에서 접하거나 열악하기 짝이 없는 일부 요양병원의 운영실태에 관한 뉴스를 보게 되면 이미 일어나지도 않은 일, 저지르지도 않은 일에 대한 죄책감을 느낀다. 이는 마치 결국엔 우리 엄마도 치매에 걸릴것임을 당연시하는 태도가 아닌가 말이다. 80세 이상 노인의 30-40%가 치매를 앓는다는 통계를 온전히 믿는 건 아니지만, 어떤 상황이든 미리 온갖 가능성을 상상하고 미리 걱정하는 나의 태도는 자꾸만 최악의 상황을 미리 대비해두어야한다는 쪽으로 결론을 짓는다. 이런 생각을 엄마에게 내비친 적 없는데도, 엄마가 가끔씩 우울증이 도졌을 때 들먹이는 '내다 버려라' 레퍼토리를 보면 엄마는 당신 딸년이 능히 그럴 수  있는 '냉정한' 인물임을 미리 알고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병증이 좀 나아지고 나면 다시 "엄마는 너 없이는 못산다"는 절박한 레퍼토리로 방침을 바꾸시는 것을 봐도 그런 쪽으로 심증이 굳어진다.

요양병원에 병든 부모 수발을 내맡기는 것을 '현대판 고려장'에 비유하는 세태에 우리 엄마도 나도 공감하고 있는 것 같다. 몇년전 중풍에 걸려 요양병원 신세를 꽤 오래 지고 있는 친구분을 더러 면회하러 다녀본 엄마도, 거동 못하시는 아버지를 요양병원에 모셨더니 물리치료와 집단생활 덕에 오히려 건강을 상당부분 되찾으셨다는 친구의 고무적인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나도, 요양병원에 대한 거부감은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그래도 자식이 직접 살뜰히 모시는 것만 하겠나, 하는 인습적인 사고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지인 한분은 10년째 거동 못하시는 어머니를 간병인과 함께 집에서 모시고 있다. 자기 어머니는 정신이 온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워낙 언사가 요란하시어 단체생활에 부적합하다는 것이 이유인데, 내가 보기엔 그저 안타까울 뿐이다. 일주일에 한번씩 간병인이 돌아가는 주말에 꼬박 하루 혼자서 간병을 하고 나면 심신이 완전히 지쳐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면서 왜 그 힘든 끈을 놓지 않으려는지. 하기야 그분은 나 역시 자기 같은 상황이 되어도 절대 엄마를 요양원에 보내지 못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다. 나는 그 반대를 결심하고 장담하고 있음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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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결혼식

투덜일기 2011. 10. 14. 23:47

지난주 다녀온 친구 결혼식 때문에 뭔가 끄적이고 싶긴 한데 스스로도 뭔가 입장정리랄까 생각이 마무리되질 않아 갈팡질팡했다. 오늘은 신부가 보낸 의례적인 답례 문자도 받았으면서 뭐가 이리도 불만인가. 그 이유가 정확하게 뭔지, 어쩌면 알것 같은데 편협한 자신에게 실망스러워 인정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여기다 일러바치다 보면 결론이 나지 않을까.

흥미진진한 쇼 이벤트를 보러가는 양 즐겁게 시작했던 결혼식 참석의 뒷맛이 씁쓸한 사유로 추정되는 몇 가지.
1. 데미 무어처럼 심히 어린 남편감을 짠~하고 선보일 것이라 늘 기대했던 친구의 배우자가 오십대 중반의 법조인이다.
2. 친구가 내게 "미안하다. 시집 나 먼저 간다!"라고 말했다. (-_-; 뭐가 미안한데?)
3. 가을밤 낭만적인 정취가 물씬 풍기는 아름다운 야외 결혼식장의 둥근 테이블엔 뜻밖의 팻말이 많았으나 정작 '신부 친구'가 앉을 자리는 표시되지 않아 우릴 방황하게 만들었다.

근래 참석한 식장중 단연 아름다웠다


4. 신부 친구로서 축사를 한 두 사람이 다 외국인이었다. (추워죽겠는데 영어 축사를 어찌나 길게 하던지!)
5. 신랑 친구로서 축사를 한 두 사람 가운데 하나는 특정 정당의 정치인이었다.
6. 주례가 없는 대신 두명이나 나선 사회자 소개부터 시작하여, 결혼식 내내 '모대학 법대'라는 말을 최소 30번쯤 들었다.
7. 축가로는 신랑이 직접 My way를 열창했다.
8. 이 친구의 결혼으로 인하여 마치 금지된 봉인이 풀리기라도 한 듯, 최근 10년간은 감히 아무도 언급하지 않았던 결혼독촉(너도 늦지 않았어! 넌 언제 할래? 등등)을 지인들이 내게 서슴없이들 해댔다. 푸하하하. .ㅜ.,ㅡ
9. 아무리 봐도 내가 심히 소인배다.

역시 써내려가며 결론이 났다. 답은 9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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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갈게

투덜일기 2011. 10. 4. 21:07

어제 다니러온 큰동생네가 밤늦게 돌아갈 때의 일이다. 늘 하던대로, 동생은 계단을 내려가며 위쪽 현관에 서 있는 울 엄마에게 또 한번 인사를 했다. 엄마, 갈게.

그랬더니 아홉살 지환이가 대뜸 호통을 쳤다. 아빠는 내가 나중에 커서 인사할 때 '아빠, 갈게!'라고 하면 좋겠어? 급 당황해 말문이 막힌 동생을 본 내가 킥킥 웃으며 거들었다. 그럼, 그럼! 엄마, 안녕히 계세요, 이렇게 인사해야지. 그치?

ㅋㅋㅋ 사십줄에 들어선지 오래인데도 부모님께 존댓말이 서툰 건 나도 마찬가지다. <엄마, 진지 잡수세요>라는 말을 연습하고 자주 써먹겠노라고 언젠가 포스팅을 하기도 했지만 그야 결심이 그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선 "엄마!"라고 부르면 끝인 경우가 잦다. 기껏 높여봐야, "엄마 저녁 드셔". (오늘 저녁에도 이렇게 말한 듯;;)

밖에 나가선 그래도 제법 예의바른 언어생활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집안에서 나의 형제들이 부모님 존대를 엄중히 실행하지 못한 이유는 아무래도 부모님 두분이 서로 반말을 했기 때문인 것 같다. 겨우 한살 차이인데다가, 학년상으로는 같은 동네 친구로 연애를 시작해 8년만에 결혼했으니 두분이 평생 반말을 쓰고 산 것도 당연하다. 그렇다고해서 부모님이 서로를 함부로 대하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 그냥 워낙 막역하고 정이 깊은 부부사이라고 느꼈을 뿐이다. 가족인 경우 반말이 곧 상스럽고 예의 없는 말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고 그냥 친근함의 차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나는 심지어 친할머니께도 오래도록 반말을 했었다. 할아버지랑 외할머니한테는 당연히 존댓말을 쓰면서도 친할머니한테는 존댓말을 쓰는 게 오히려 어색했다. 가끔 할머니께 반말하다 할아버지한테 걸리면 꾸지람을 듣기도 했지만 제버릇 남주나... (그렇다고 밖에 나가 낯선 어르신에게 함부로 반말짓거리 해대는 사람들은 싫다. 그건 몰예의, 몰상식한 거고!)

밖에서 보면 버르장머리없는 집안 내력이라 손가락질할지도 모르겠는데, 중학생이 된 정민이도 제 할머니한테 아주 편히 반말을 한다. 할머니가 용돈을 주면 옆에서 고맙습니다, 라고 하라고 잔소리를 해대는 바람에 들릴락말락 '고맙습니다'라고 따라하는 적이 간혹 있지만 노상 반말 쓰다 갑자기 존댓말이 나올리 없지 않은가? 옆에서 제 엄마가 '고맙습니다'라고 인사하라 종용해도, 고집스런 정민이의 대답은 '잘 쓸게, 할머니'인 경우가 훨씬 더 많다. 외출할 때 나 역시 지금도 '엄마, 갔다올게'라고 하는 판국에 감히 누굴 탓하랴.

반면에 사내 조카녀석들은 존댓말을 꽤나 유연하고 자연스레 쓰고 있는 듯하다. 만만한 고모한테는 당연히 반말을 써도 할머니한테는 차마 못그러겠다는 듯이. 그게 대단히 기특하고 장하지만, 마음 한구석에선 말의 길이만큼 할머니와의 사이도 약간은 멀어진 게 아닐까 싶은 생각도 든다. 예절바른 사람으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이면서도, 나는 더 자글자글 늙은 후에도 녀석들에게 '고모, 안녕히 계세요'보다는 '고모, 갈게!' 또는 '고모, 안녕~!"이라는 인사를 듣고 싶다. 내가 좀 이상한 건가? ㅎ 나도 자타공인 할머니 나이가 되면 마음이 달라지려나?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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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물건

추억주머니 2011. 9. 22. 17:07

어제 만난 친구에게 이사를 가긴 가야겠는데 집을 팔고 사는 문제도 두렵지만 일단은 30년 가까이 된 두집 살림을 어떻게 정리해야 할지 도무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고 또 다시 푸념을 했다. 그랬더니 친구가 몰래몰래 버리란다. 노친네들이야 워낙 오래된 물건을 자신과 동일시하기 때문에 못버리게 하는 게 당연하므로 엄마 안 계실 적에 스리살짝. 그래야 하는 것이었군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자신은 없다. 오래된 물건 못버리는 '지병'은 (이웃 주민 '쌘' 만큼은 아니더라도) 나도 좀 심각한 걸 알기 때문이다. 

순전히 제목에 끌려서 산 책 <나의 고릿젓 몽블랑 만년필>은 막상 읽어보니 내가 워낙 클래식 음악에 무지한 탓에 3분의 1 이상은 뭔소린지도 몰라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고, (그래서 그런지) 어쩐지 젠체하는 느낌이 드는 시인의 글이라 생각보다 별로였다. 그럼에도 지은이가 찍은 오래된 독일물건들 사진을 보는 건 참 좋았다. 런던에서 수학선생님을 하고 계시는 런던아줌마님은 물건 함부로 안 버리고 죄다 껴안고 사는 습관을 '영국병'이라고 칭하지만, 내가 보기에 오래된 물건 절대 안버리고 소중히 간직하는 태도는 유럽인들의 공통적인 특색인 듯하다. 그러니까 세계대전을 두번이나 치르고도 변함없이 간직된 수많은 골동품들이 유통되고 있는 게 아닐까. 심지어 몇백년 전의 식료품 거래 영수증이나, 사적인 편지까지도. 유럽치고 벼룩시장 유명하지 않은 곳이 어디 있나 말이다. 하다못해 대서양을 건너 미국에서도 '야드 세일'이나 '거라지 세일'을 하는 판국에...
 
오래된 물건을 못/안버리는 습관은 어쩌면 근대의 정서일지도 모르겠다. 너무도 새로운 것들이 본격적으로 생겨나 확확 세상이 바뀌던 때라 과거에 대한 향수가 특히나 진했던 게 아닐까. 신문지도 함부로 안버리시던 우리 할아버지를 생각하면 확실히 맞는 것 같은데, 세대를 거쳐 우리 부모님, 그리고 나까지 그런 성향이 이어진 이유는 역시 알쏭달쏭하다. 내 경우는 단지 좀 우유부단하고 청승맞아서 과거에 얽매이는 듯도 하고. 

하여튼 독일 벼룩시장에서 지은이가 득템한 골동품들 사진을 보며 희희낙락하다가 제일 정겨웠던 건 몽당 연필과 색연필이 든 파버카스텔 필
통이었다. 같은 브랜드는 아니지만 나도 최소 30년 된 스테들러 색연필 갖고 있다규!
전에도 어딘가 쓴 것 같은데 중학교 때 고모부가 사다주신 '독일제' 색연필을 나는 아끼느라 1, 2년간은 계속 구경만 했었고 드디어 사용한 계기는 손수 크리스마스 카드를 만들기 위함이었던 듯하다. 
고등학교 올라가선 친구들과 워낙 편지를 많이 주고받았으므로 색연필로 편지지를 꾸미기도 했고, 예쁜 편지지에 좋은 글귀 적어서 코팅해 선물하는 유행 때문에 글자 하나하나 색을 달리해 시를 베껴적는 정성을 들인 기억도 있다. 그렇게 드문드문 십수년간 사용했어도 좀체 닳을 일이 없었던 색연필을 본격적으로 소비하게 된 건 역시나 조카의 탄생 이후의 일이었다. 벽지 낙서를 거쳐 드디어 스케치북과 이면지에 작품을 그려주기 시작한 정민공주의 그림활동에 흐뭇해, 색연필이 막 부러져 하루에도 몇번번씩 깎는 일이 생겨나도 그저 흐뭇하기만 했다. 그렇게 조카들 넷을 겪고도 아직 꽤 건재(라기엔 좀 민망하지만;;)한 스테들러 색연필의 현재 몰골은 이렇다. ㅋㅋㅋ


녹이 슨 철제 케이스 위엔 정민이가 서너살 때 붙인 방귀대장 뿡뿡이 스티커가 어지럽기 이를데 없고(잘 떼지지 않아 뗄 수도 없다;;), 내용물은 중간에 없어지고 사라져버린 색깔이 많아 다른 색연필로 대체하는 바람에 마구 뒤섞였지만 아직도 그림놀이 할 때는 없어선 안될 소품이다. 문방구 가면 파버카스텔이든 스테들러든 48색, 64색 색연필이 번드르르 종류별로 진열되어 쉽게 구할 수 있는 걸 알면서도 30년 넘은 이 색연필을 못 버리고 갖고 있는 내가 확실히 청승은 청승이라고 인정할밖에. (그나마 핑계는 요즘 같은 브랜드라도 나뭇결이 거칠고 칼을 대면 뚝뚝 쪼개지는 색연필과 달리 연필 나무가 정말 연하고 부드럽다는 것. 똑같이 집어던져도 대체된 잡종 색연필보다 잘 부러지지도 않는다. ㅠ.ㅠ) 애지중지 써온 30년 역사와 색연필 하나하나에 깃든 추억을 생각하면 어떻게 버릴 수가 있단 말인가...

얼마전엔 엄마가 난데없이 장농 서랍 정리를 하며, 시집올 때 함에 들었던 혼서지와 사주단자를 버리겠다고 내놓으셨다. 아예 쓰레기통에 넣어둔 걸 나는 다시 꺼내며 왜 이런 걸 함부로 버리느냐고 막 화를 냈다. 엄마는 우리 할아버지가 손수 쓰신 글씨체도 아니고 당시 혼서지랑 사주단자 써주는 대서소에 가서 써온 거라 별로 보관할 가치가 없는 거라 항변했지만, 왠지 나는 그냥 버릴 수 없는 물건이라고 느꼈다. -_-;

40여년이 지났어도 비단 색실이 하나도 안 바랬다. 벌써 버렸으면 모르겠으나 엄마는 입때 갖고 있다가 왜 이제와서 새삼 버리시겠다고 하는지 원...

물론 나도 좀 지나면 아무 미련없이 버리자는데 동의할 수도 있겠으나 지금 마음으론 한참 더 갖고 있어야할 것만 같다. 엄마방 장농 서랍 안쪽에 든 우리 부모님의 연애편지 묶음도 마찬가지고... -_-;

옛날에 대학생 때였나, 할아버지가 다락방 한 가득 갖고 계시던 오래된 물건들을 비웃으며 대체 왜 그렇게 끼고 도시느냐고 투덜거렸는데 그 마음을 이제야 알겠으니 어쩌면 좋으냐. 오래된 물건 못 버려 전전긍긍하는 모습 때문에 머지않아 다 큰 조카들에게 고리타분한 노친네 취급받는 모습이 막 눈에 선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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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 번역가가 되고 싶다며 조언을 구할 때 
잘 생각했어! 어디가도 진짜 이만한 직업이 없지! 강추야! 완전 좋아! 날 보면 알잖아!
....
이렇게 대답할 수 있다면 정말 좋겠다.
그러나 현실은
어... 진짜? 왜 하필 이런 지난한 길을? 꼭 해야겠어? 꽤 오래 힘겹게 버틸 자신 있어? 덤벼들 실력은 있고? 겉보기보다 이 일이 실체는 퍽 초라한데... (원고료 5백원 올리자고 협상하고 있으려면 정말이지 우어~!!)
라며 자꾸 초를 치게 된다.

본의아니게 최근 번역가를 꿈꾸는 두 사람에게 번역인이라는 직업에 대해 조언을 해주게 됐다.
한 사람은 너무 어려서 (친구 딸의 후배 ㅠ.ㅠ) 앞으로 진로변경의 가능성이 훨씬 더 많으니까 현실적인 부분보다는 꽤나 아련하고 황홀한 꿈으로 포장해주고 나서 자책감에 휩싸였다. 나중에 정말로 번역가의 길에 들어선 그 소녀가 막 나를 원망하면 어쩌나. +_+ (걱정도 팔자라고 곧 머리를 흔들었다.)
또 한사람, 지금 하고 있는 출판사 편집일을 '때려치우고' 번역공부를 위해 전공을 바꿔 진학까지 결심했다는 낯선 이에게는 정 하고 싶으면 도전해보라고 빤한 권유와 함께 나름의 노하우와 현실적인 고충을 대강 알려주긴 했으나, 역시나 마음이 꺼림칙하다. 희망에 차올라 거듭 감사 인사를 하는 그의 답 메일을 열어보고 나니 더더욱. 하도 망해 넘어가는 출판사가 많아 나도 이 일로 노년까지 잘 벌어먹고 살 수 있을지 아닐지 문득문득 두려움이 밀려드는 판국에 잘하는 짓일까나. (그치만 출판계에 있으니 그 정도 사정은 본인도 알지 않겠어? 라며 책임 회피 중)

한 1, 2 백년쯤 지난 뒤 수많은 직업이 사라지고 새로이 생겨나고 했을 무렵, 번역가는 과연 어느 부류에 속해 있을지 돌연 궁금하다. 젊은 사람들에게 이 직업 추천하고 앉았는게 설마 죄는 아니겠지? 에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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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장면'을 맛없어하고 못마땅해하는 사람들이 워낙 많았던 덕분인지 국립국어원에서 요번에  드디어 <짜장면>을 표준어로 인정했다는 반가운 소식. 출판사 트위터를 몇군데 팔로우 했더니 오늘 종일 그와 관련된 이야기가 타임라인에 떴다. 그 기념으로 점심때 짜장면 먹으러 갔다는 증거사진까지 첨부해서.

짜장면을 포함해 새로이 표준어로 인정된 단어가 39개나 된다'길래'(그간 '~기에'만 표준어였는데 이제 바뀌었다!) 국립국어원 홈페이지에 가서 일부러 퍼왔다. 컴퓨터에 파일 저장해두어도 좀 지나면 어디 있는지 헤매겠지만 여기다 옮겨놓으면 제일 접근성이 좋을듯하여...
번역 초창기 시절 <간지럽히다>가 표준어가 아니라 책에 <간질이다>로 바뀌어 있는 걸 보고 정말 뜨악했었다. (사이시옷 푸념할 때 썼듯이 기묘한 맞춤법이 어디 한둘이겠느냐마는;;) 중고등학교 때 배운 표준어의 정의가 서울 경기 지방 중산층이 쓰는 말로 알고 있었기에 꽤나 잘난 척 내가 쓰는 말은 죄다 표준어일 거라 믿었던 게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사전을 찾아보며 기막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다. 어쨌든 요번에 현실성을 반영하여 인정된 낱말들을 보니 다 반갑다.

특히나 눈에 들어오는 건, 짜장면, 맨날, ~길래, 허접쓰레기, 걸리적거리다, 복숭아뼈, 떨구다, 손주!! ^^
누가 뭐래도 <짜장면>과 <장마비>, <막내동생>은 고수하며 살겠다고 포스팅한지 불과 몇주만에 이런 소식이 날아드니 조만간 우스꽝스러운 '막냇동생'도 제대로 바꿔낼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이 막 솟는 것 같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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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또한 뜬금없는 홍보성 글이라 민망하지만, 한번 해보니 얼굴에 철판깔기 그리 어렵지도 않은 듯하여 그냥 저지른다. 새벽이라 정신도 몽롱하겠다... -_-;

아는 분(실은 친구 남편이시다)이 LA에서 NGO활동(KIWA라는 단체임)을 오래 해오고 계신데, 최근 역점사업이 한인교민들을 위한 생활공동체같은 나눔농장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그간 순전히 기부금으로 농장부지 마련에 힘을 써온 끝에 7만불이 모였지만 아직은 기금이 많이 모자란 상황이고, 그 타개책으로 기부금 대신 <희망벽돌 쌓기>라는 이름으로 씨앗기금 출연을 하고 있단다. 간단히 말해서 벽돌 한장(2천 달러 이상)씩 품앗이를 하듯 2년간 무이자로 빌려주시는 분께, 정확히 2년 후 원금을 갚겠다는 뜻이다. 씨앗기부자들에게는 일년에 몇번 농장 내 숙소를 이용할 수 있는 혜택이 주어지고(이거 핑계 대고 놀러가야지!), 법적으로 권리를 보장하는 일종의 담보권도 받을 수 있다고 한다. 

아래는 메일로 받은 제안서 일부에 적혀 있는 혜택 부분.

고향을 떠나온 이민자들에게 고향 같은 공간을 마련해보겠다는 것이 이 사업의 취지인 것 같다. 문제는 한달 아내로 기한이 상당히 촉박하다는 것. 십시일반으로 마지막 벽돌을 쌓을 수 있도록 주변인들에게 널리 알려달라는 취지에서 나한테까지 연락이 닿았다. 도대체 뭘 믿고 이런데 투자를 하라는 건지 빗발치는 비난이 예상되는 것도 같지만, 친구든 친척이든 캘리포니아쪽에 이민하신 분들을 주변에서 찾아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는 생각에 무례를 무릅썼다.

이민 역사가 상대적으로 짧은 탓이겠지만 LA에 가보면 코리아타운이라고 해봤자 한국 상점들이 군데군데 모여있을 뿐 진짜로 고향의 느낌 따위는 전혀 없다. 반면에 일본인들의 리틀도쿄 거리엘 가보면 확실히 다르다. 심지어 일본 이민사 박물관도 있더라니까!(궁금해서 들어가봤는데 친절한 일본인 할머니가 끝까지 쫓아다니며 설명을 해주더라 -_-;) 한인공동체는 세계 어느 지역엘 가든 교회가 아니고선 좀체 결집되지 않는 것 안타까웠는데, 이런 나눔농장 같은 움직임이 있다는 게 나는 그저 반갑다.

내가 제대로 설명을 잘 했는지 모르겠는데, 더 궁금한 게 있으신 분들은 우리문화 나눔회 사이트(www.nanum.us) 게시판에서 직접 확인해보셔도 좋을듯. 사이트 정비한지 얼마 안되는 듯, 단체 홍보내용은 많지 않지만 게시판엔 사업내용과 요지가 잘 적혀 있다. 아래는 농장 위치와 주소가 들어 있는 제안서 부분이다.

요즘 부쩍 방문자수가 많아서 두렵고 불편했는데 의외로 그 덕을 캘리포니아에 계신 분들이 보게 될지 어쩔지 모르겠다. 사기극은 절대 아님을 보장하는 바이니 혹시 관심 있으신 분은 참여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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