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에 해당되는 글 233건

  1. 2011.08.25 분노하라 INDIGNEZ-VOUS! 12
  2. 2011.08.12 사이시옷이 기가막혀 10
  3. 2011.08.02 1
  4. 2011.07.27 비, 운, 집 7
  5. 2011.07.06 모르겠다 6
  6. 2011.06.09 돌림노래 6
  7. 2011.06.02 소중한 침 17
  8. 2011.05.27 의무 7
  9. 2011.05.20 파란 대야 13
  10. 2011.05.13 4

<전세계를 감전시킨 93세 레지스탕스 노투사의 외침> 때문이라기보다는(띠지에 적힌 글귀다) 애당초 이 책에 내가 관심을 갖게 된 이유는 표지 포함 34쪽에 불과한 얄팍한 이 원서 한권에 국내 출판사들이 너도나도 달려들어 선인세가 만오천 유로까지 올라갔다는 소문을 들었던 게 주효했다(아무리 좋은 책이라 해도 이 정도 분량의 원서라면 우리나라 출판시장을 감안할 때 선인세는 5천 유로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한다). 대체 어떤 내용이길래? 과연 그런 책이 팔리나? 출판사들 미친 거 아냐? 하기야 선인세 몇억도 막 베팅하다가 퍽퍽 부도나 넘어가는 출판사가 어디 한둘인가. 한심하다...

스테판 에셀 지음/임희근 옮김/돌베개/2011

그 상황 그대로였다면 나는 괜스레 심술이 나서 아마도 이 책을 사볼 생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원래도 무라카미 하루키를 읽어본 적 없지만[!] 선인세 10억을 주고 사왔다는 말만 듣고도 <1Q84>는 처음부터 독서제외 대상이었다. 참 별스러운 나의 독서취향^^;). 헌데 반전이라면 반전인 소식이 들려왔다. 저자를 설득한 끝에 돌베개 출판사(서경식 선생의 책을 비롯해 나도 돌베개가 내는 책들이 좋고 심지어 어쩜 그런 책들만 내는지 존경스럽다. 물론 출판사와 개인적 친분은 전혀 없고 그저 독자로서;;)가 최고액 선인세를 제시한 경쟁사를 물리치고 만 유로로 판권을 따냈다는 것. 만 유로도 적은 돈은 아니지만 어쨌든 레지스탕스 출신으로 여전히 활발하게 저항과 행동을 부르짖는 노투사다운 결정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기꺼이 책을 사들여 후딱 읽었다. (원서엔 없는 저자 인터뷰, 추천사, 역자후기를 붙여 프랑스 원서보다 두배 이상 분량을 늘였어도 불과 87쪽이다.ㅎㅎ) 

스테판 에셀은 1917년생이다. 우리나라 나이셈법으로 따지면 무려 아흔다섯. 그럼에도 여전히 사회운동 분야에서 현역으로 뛰고 있단다. 독일에서 태어나 프랑스로 이주, 드골이 이끄는 자유프랑스에 합류, 레지스탕스로 활동하다 체포되어 유대인 강제수용소에서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극적으로 탈출. 전쟁 이후엔 외교관으로 활약, 퇴직 이후에도 인권 및 환경 문제에 관심을 갖고 사회운동가로 활동 중이라는 것이 그의 약력이다. 예술애호가인 어머니 엘렌이 트뤼포 감독의 <쥘과 짐>의 실제 모델이라니, 결혼제도를 비웃는 그런 관계를 지켜보며 살았을 가정환경도 참 자유로운 분위기였을 것 같다.

얼마 전 프랑스에서 대학생, 현직 교사들을 중심으로 한 반정부 시위가 일었을 때 사람들이 외친 구호가 상당수 이 책에서 인용되었다는 말도 들었다. 전쟁은 끝났지만 여전히 사라지지 않은 부당함과 차별에 분노하고 비폭력으로, 평화적으로 저항해야 한다는 것이 책의 요지다. 어찌보면 이미 다 알고 있는 원칙적인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새삼 노투사의 당부가 설득력 있게 다가오는 건 그 이야기가 탁상공론이 아닌 평생 현역에서 활동해온 운동가의 부르짖음이자,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이기 때문이다. 부당함과 차별의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공통의 문제이기도 하고.

노상 정치쇼를 일삼는 딴나라당의 일꾼답게 사퇴 카드와 함께 눈물로 읍소까지 했던 서울시장의 주민투표가 무산된 어제, 사퇴 이야기는 쏙 빼고 딴소리를 하는 인간들의 면면이 하도 환멸스러워, 읽은지 한두달 지난 책을 새삼 꺼내들어 다시 읽었다. 이른바 한나라당 표밭이라는 강남 3구의 투표율과 대단한 차이를 보이는 가난한 자치구의 투표율을 보며, 타워팰리스 내부에 설치된 투표소의 경우엔 투표율이 60%라는 언론 발표를 보며 정말이지 깊은 한숨이 나왔다. 대체 이 사회엔 희망이 있을까? 왜 우리나라엔 이렇게 존경할만한 어르신을 찾아보기 힘든걸까.

화는 본디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는'(出) 것이라 했다. 다른 나라 어르신이긴 해도 분노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우리가 나아갈 길이라고 격려해주시니 계속 버럭버럭 분노하는 수밖에 없겠다고 여기며 다시 책을 덮었다. 사라코지 덕분에 프랑스도 우리나라와 많이 비슷해졌다는 걸 위안으로 삼는 건 너무 서글픈 일이지만, 참 구구절절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말이다.

우리가 몸담고 사는 사회가 자랑스러운 사회일 수 있도록 그 원칙과 가치들을 다같이 지켜나가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이른바 '불법 체류자'들을 차별하는 사회, 이민자들을 의심하고 추방하는 사회, 퇴직연금제도와 사회보장 제도의 기존 성과를 새삼 문제 삼는 사회, 언론 매체가 부자들에게 장악된 사회, 결코 이런 사회가 되지 않도록. (10쪽)

진정한 민주주의에 필요한 것은 독립된 언론이다...(중략).... 그런데 오늘날 바로 이 '언론의 독립'이 위협받고 있는 것이다. (12쪽)

극빈층과 최상위 부유층의 격차가 이렇게 큰 적은 일찍이 없었다. 그리고 돈을 좇아 질주하는 경쟁을 이토록 부추긴 적도 일찍이 드물었다. (15쪽)

최악의 태도는 무관심이다. "내가 뭘 어떻게 할 수 있겠어? 내 앞가림이나 잘 할 수밖에..." 이런 식으로 말하는 태도다. 이렇게 행동하면 당신들은 인간을 이루는 기본요소 하나를 잃어버리게 된다. 분노할 수 있는 힘, 그리고 그 결과인 '참여'의 기회를 영영 잃어버리는 것이다. (22쪽)

폭력은 희망에 등을 돌리는 일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폭력보다는 희망을, 비폭력의 희망을 택해야 한다. (34쪽)

.....위협은 아주 사라진 것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여전히 호소하는 것이다. "우리의 젊은이들에게 오로지 대량소비, 약자에 대한 멸시, 문화에 대한 경시, 일반화된 망각증, 만인의 만인에 대한 지나친 경쟁만을 앞날의 지평으로 제시하는 대중언론 매체에 맞서는 진정한 평화적 봉기"를. (38-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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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원고의 맞춤법은 어디까지나 편집자에게 최종 책임이 있다고는 하나, <손댈 데 없는 매끈한 원고>를 일단 목표로 삼으려면 맞춤법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그간 잘못 알고 있었기에 민망했던 수많은 낱말들(째째하다/쩨쩨하다, 금새/금세, 궁시렁/구시렁, -데와 -대의 구별 등 무진장 많다!)이야 얼른 수긍하고 앞으로 잘 쓰면 그만인데, 원칙과 옳은 것을 알고도 도무지 마음에 안드는 게 현 외래어 표기와 사이시옷이다.

경음은 사회가 각박해진다나 뭐라나 해서 잘 못쓰게 하는 바람에 짜장면을 굳이 <자장면>으로 강요해왔으면서 또 왜 그리 예외는 많은지(일관성 없게 <짬뽕>은 뭔가?!). 태국과 베트남어는 경음 표기가 허용되고 왜 프랑스어와 러시아어는 경음으로 표기하면 안되는가 말이다! 외래어 표기법에 대한 불만(<흔히들 bulldog을 <불독>이라고 쓰지만 맞는 표기는 <불도그>라는 걸 아시는지? ㅠ.ㅠ 하기야 <핫독>이 아니라 <핫도그>니까...)은 나중에 기회되면 입에 거품 물며 따로 쓰기로 하고, 일단은 사이시옷 성토나 좀 하자.

국립국어원 온라인 사전을 퍼왔다.  

사이-시옷[---옫]사이시옷만[---온-]〕
명사」『언어
한글 맞춤법에서, 사잇소리 현상이 나타났을 때 쓰는 ‘ㅅ’의 이름. 순우리말 또는 순우리말과 한자어로 된 합성어 가운데 앞말이 모음으로 끝나거나 뒷말의 첫소리가 된소리로 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ㄴ’, ‘ㅁ’ 앞에서 ‘ㄴ’ 소리가 덧나거나, 뒷말의 첫소리 모음 앞에서 ‘ㄴㄴ’ 소리가 덧나는 것 따위에 받치어 적는다. ‘아랫방’, ‘아랫니’, ‘나뭇잎’ 따위가 있다. ≒중간시옷.

위에서 예로 든 나뭇잎, 아랫니, 아랫방을 비롯하여 <웃옷, 뒷방>같은 것들은 하도 오래전부터 사이시옷을 넣어 써왔으니 옳다고 보는 데 다들 이견이 없을 것이다. <김칫국>도 그러려니 하겠다. 하지만 <북엇국, 감잣국>은 어떤가? 북어국, 감자국은 늘 끓여먹고 살아왔지만 <북엇국, 감잣국>이라면 먹기 싫어질 듯한 느낌마저 든다. -_-; 원칙에 따르면 순대국, 칼국수집, 떡볶이집도 <순댓국, 칼국숫집, 떡볶잇집>이라 써야 옳다.

뭐니해도 여름 내내 일기예보 보면서 내가 제일 싫어했던 표현은 <장맛비>. 그냥 편안하고 부드럽게 경음 발음없이 <장마비>라고 하면 좀 좋은가! 그런데 왜 꼭 저놈의 사이시옷 때문에 [장맏삐]로 발음해야 하느냐고!!! 장독대에 열어둔 장항아리에 들어갔다 튕겨나와 맛이 엄청 짜게 변한 (물론 말도 안 되지만;;) 비라면 모를까, 여름 장마 때 줄기차게 내리는 비는 분명 <장맛비>가 아니라 <장마비>라 우기고만 싶다. 

최근 경악하며 발견한 사이시옷의 싫은 예 중 최고는 바로 <막냇동생>. 내 평생 <막내동생>이 옳은 말이라 알고 써왔는데 아니란다. <막내동생>이 [망내동생]으로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나는 발음이라면 <막냇동생>은 낱말의 생김새부터, [망내똥생, (심지어는) 망낻똥생]이라는 발음까지 어쩐지 정 떨어지고 짜증나는 느낌이다. 

어차피 언어는 생명을 지니고 계속 변화하는 유기체이므로 특정 기관에서 시기별로 다수의 용례에 따라 원칙을 정하는 게 맞다고 동의한다. 그래서 지난 수십년간 맞춤법이 이리 바뀌었다 저리 바뀌었다 하는 것이라고 이해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표기법이 바뀔 때마다 이상하게 시대를 역행해 퇴보하는 듯한 맞춤법이 꼭 있다. 많이 헷갈려서 그렇다기 보다는 오히려 불필요하고 거추장스럽고 불편한 원칙이라 여겨 특히 사이시옷을 미워하고 있었는데, 요번 <막냇동생>에서 정말 뒷목(봐라, 여기도 쓸데없이 사이시옷 등장. 허나 '뒷목'은 심지어 표준어도 아니다. '목덜미'의 방언이라고... 쳇.)이 쭈뼛했다. -_-; 아무리 원칙이라 해도 나는 앞으로 <장마비>와 더불어 <막내동생>을 절대 사수할거다.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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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1. 8. 2. 16:06

진정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섣불리 직업으로 삼으면 안된다는 말도 있지만, 어쨌거나 평생 잊지 않고 꿈을 좇는 사람에 대한 평가는 둘로 나뉘는 것 같다. 멋지다고 추켜세우거나 현실감 떨어진다고 좀 한심해 하거나. 대부분 현실과 타협하면서 꿈을 포기하거나 잊기 때문이다. 꿈을 잃지않고 끈질기게 좇아 결국 성공한 사람들에게 세상의 갈채가 쏟아지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꿈이란 것이 다분히 허황되고 실현 가능성이 낮을 때, 사람들은 냉혹하게 낙오자라는 도장을 찍고 만다. 인생은 결코 꿈만으론 살 수 없는, 먹고 살아야 하는 현실이기 때문이다.

과거 주변에 이상스레 영화감독을 꿈꾸는 이들이 많았다. 실제로 충무로 바닥에서 한동안 연출부 막내부터 경험을 쌓기도 했고 전세금을 뽑아 돌연 유학을 떠난 이도 있었다. 그 가운데는 조감독 호칭을 받을 때까지 버틴 이도 있으나 결국 영화감독으로 입봉에 성공한 사람은 하나도 없다. 그럼에도 영화판이란 곳이 마약이나 개미지옥인듯, 조감독이 마지막 경력이었던 사람은 좀체 다른 일에 정착하지 못했고 거의 무위도식하며 백수로 늙어가도록 '이감독'이라는 호칭을 가장 좋아한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에 대한 세상의 평가는 한심스러운 '낙오자', '패배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몇편의 영화 포스터와 엔딩 크레딧에 연출부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으나, 연봉이 백만원도 안되는 기막한 현실에 질려 충무로 판을 영영 떠난 이들은 이제 확실히 꿈을 버린 것 같다. 영화판은 포기했어도 그나마 얼추 비슷한 영상 쪽을 대안으로 선택한 이(=큰동생 이야기다 ^^;)는 여전히 열심히 영화를 보러다니며 관객으로서 한국 영화계를 응원중이다. 영화를 체계적으로 공부하겠다며 늙으막에 유학까지 다녀온 친구는 충무로를 떠나 일반 회사에 취직을 한 이후로 십수년간 영화관에도 가 본 적이 없단다. 뭔가 아주 심하게 학을 뗀 모양이다. 그 외 친구들은 잘 모르겠다. 영화와 전혀 상관없는 생업에 종사하고 있다는 것 밖에는.

마흔살이 넘도록 아직 밴드의 꿈을 못 버린 이도 있다. 스무살 언저리에 부모를 졸라 거금 들여 장만해놓은 온갖 악기와 컴퓨터 기기를 아직도 보물단지 모시듯 껴안고 산다. 실제로 들어본 적이 없어서 도대체 연주 실력과 작곡 능력이 얼마나 되기에 그 꿈을 이십여년간 못버리고 백수로 사는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게다가 하필 밴드에서 그가 맡은 파트는 드럼이다. 밴드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은 역시나 보컬 아니면 기타 연주자 아닌가? 내가 그 방면에 무지하기도 하지만, 드러머로 이름 높였다는 사람 당최 들어본 적이 없다.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요즘 우후죽순 많아진 서바이벌 프로그램 가운데 <탑밴드>라는 게 있단다. 그리고 문제의 이 사람도 자기네 밴드와 함께 그 프로그램에 나왔더란다. 보기좋게 예선에서 탈락했지만 말이다.

백발이 성성해서도 근육질의 몸으로 멋지게 드럼을 연주하는 사람을 상상하면 꽤나 멋지다. 그러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그의 이면에 제 밥벌이도 못하고 늙도록 부모님이 주는 용돈에 의지해 살아가야 하는 생활고가 감추어져 있다면 슬프기만 하다. 홍대에 가면 기타를 둘러매고 오가는 젊은 음악인들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들의 얼굴이 아무리 밝고 빛나더라도 나는 불쑥 그들이 가엾다. 쟤네들은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까 싶기 때문이다. 임재범 콘서트에 갔을 때 본 영상이었던가, 천하의 임재범도 <나는 가수다>에 나와 새삼 조명을 받기 전까지 한달 수입이 저작권료로 들어온 7천원돈 밖에 없을 때가 있었다고 했다. 이제는 TV에 노상 얼굴을 비추며 돈방석에 앉겠겠다 싶은 부활의 김태원도 그 이전엔 먹고 살기 힘들어서 자살을 생각했다니 말해 무엇할까. 이 땅에선 밴드로 밥벌이 해먹고 산다는 게 정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도 그 꿈을 버리지 못한 사람은 과연 응원을 해주어야 할까, 정신 차리라고 질책을 해주어야 할까.

따져보면 내 주변에서 현재 그럭저럭 제 앞가림을 하며 살아가는 이들은 다 젊어서 꾸던 원대한 꿈을 버렸거나 꿈을 소박하게 변경한 사람들인 것 같다. 아닐 수도 있으니 이의를 제기하실 분 있으면 언제든 환영! (내 생각이 교정될 수 있도록, 제발이지 나는 꿈을 이루었고 그래서 행복하다고 말해주는 사람이 있으면 좋겠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예 젊어서 품은 찬란한 꿈이 뭐였는지도 기억에 없다. 번역은 그저 7년간의 직장생활이 지겨워질 무렵 평생 직업으로 딱 좋겠다 싶은 하나의 대안이자 선택이었을 뿐, 엄청 선망하는 꿈은 아니었던 것 같다. 일단 시작은 했으되 성공할지 말지 알 수도 없고 크게 자신도 없었는데, 하면 할수록 일이 어려워 자신감은 나날이 떨어지고만 있다. 그러니 새로운 꿈은 꿀 여력조차 없는 느낌이다. -_-; 

어린아이들에게, 청소년에게는 끊임없이 니들은 꿈이 뭐냐고 물으며 꿈을 향한 그들의 행보를 한껏 부추기지만 어느 정도 나이를 먹고 나면 꿈이란 건 그저 과거의 갈피에 잘 간직해두거나 절대 손닿지 않는 곳에 높이 올려두어야만 빛이 나는 허상 같다. 설사 꿈을 이루었다고 해도 꿈의 직업이 현실의 무게와 어우러지면 본래의 빛을 잃고 마는 게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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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운, 집

투덜일기 2011. 7. 27. 18:15

10년도 더 지난 일이다. 언덕 동네에 자리잡은 우리집 뒤쪽엔 축대로 옹벽을 쌓고 그 위로는 잡풀과 잡목이 자라는 경사진 공터가 있다. 그런데 그해 여름 폭우가 쏟아져 작게나마 산사태가 나는 바람에 그 공터의 흙이 우리집을 덮쳤다. 마침 우리는 동해안으로 가족 피서를 떠났던 터라 서울지역에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 줄도 몰랐다가 올라오는 길에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얼른 집으로 가보라는 아버지 동료의 연락을 받았다. 운이 좋았던 우리와 달리 아래층에선 두 사람이나 목숨을 잃는 엄청난 사고였다. 집 뒤쪽의 부엌에서 아침을 준비하던 1층 아주머니와 작은 방에서 쉬고 있던 막내딸은 물을 잔뜩 머금었다가 순식간에 밀어닥친 흙더미에 명을 달리했고, 거실에서 TV를 보던 아저씨만 홀로 목숨을 구했다고 했다. 부리나케 집에 와보니 2층인 우리집에도 뒷베란다와 창문으로 흙이 밀려 들어와 내방과 동생방에 수북하게 쌓여있고 TV가 그 위에 나뒹굴고 있었다. 믿어지지 않았지만 우리집을 보고 나니 아래층은 집안 전체가 거의 다 토사에 파묻혔다는 사실이 이해되었다. 2층에도 사람이 있는 줄 알고 119 구조대가 창문을 뜯고 들어와 확인을 했고, 이미 집안에서 흙을 퍼내는 작업이 한참이었다. 만약 우리가 여름휴가를 떠나지 않았다면 막내동생과 나 역시 자다가 봉변을 당했을지 모른다며 다들 하늘이 도왔다고 했다. 말로만 듣던 산사태가 그리도 무섭다는 걸 난생처음 경험한 셈이었다.

산사태로 아파트 2, 3층까지 흙더미에 파묻힌 광경을 뉴스로 보며 옛날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를 쳤다. 사고 수습을 하고 집수리를 하는 동안 거처를 모두 큰동생네 신혼집으로로 옮겨 피난살이 하듯 지냈다. 구청에선 집 뒤쪽 경사진 공터를 정비하고 수로를 내고 나무를 더 심었지만, 우리집은 창문과 베란다 섀시가 모두 파손되었는데도 '집이 무너진 건 아니'라며 아무런 보상도 해주지 않았다. 집수리는 오로지 우리 몫이었다. 심지어 인명이 상한 아래층도 위로금조로 얼마간 나왔을 뿐 보상비는 없었다고 들었다. 상심한 아래층 아저씨는 곧이어 집을 팔고 이사를 나갔지만 우리는 잠시 이사 욕망에 '들먹'하다가 그냥 눌러앉았다.

고비가 번역한 <식스펜스 하우스>를 읽다가 나는 도시에 살지만 정작은 시골집에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한해가 멀다하고 상태 좋고 깔끔하고 번듯한 집에서 다른 집으로 이사한다. (중략) 마치 집을 커다란 여행 가방으로 보는 것 같다. 시골에서는 다르다. 우리는 어떤 집이 갈라질 때까지 살다가, 갈라진 틈에 회를 바른다. 집이 기울면 보강을 한다. 흔들리면 밧줄로 붙들어 맨다. 벌어지면 조인다. 무너지기 시작하면 토대를 덧댄다. 그러더라도 계속 그 집에 산다."(255쪽) 처음  이집에 이사를 왔을 때 무려 '연탄 보일러'를 때던 집은 석유보일러를 거쳐 도시가스 보일러로 바뀐 엄청난 난방의 역사마저 갖고 있다. 집수리의 역사는 말도 하기 싫다. 그러면서 줄곧 그 집에 살고 있다. -_-;; 우리의 경우 시골 사람들의 집지키기 철학과는 상관없이 순전히 재테크 거부감과 귀차니즘 때문이다. 말로는 노상 이사 가고 싶다고 되뇌면서도 나는 사실 나이만 먹었지 이사와 관련된 모든 과정이 무섭다. 집을 팔고 사고 30년가까이 묵은 엄청난 짐을 정리하고 옮기고... 으어. 새삼 집안 돌아가는 꼬라지에 눈길을 돌린 엄마는 가을되면 뒷베란다 지붕도 고쳐야겠다고 선언했다. 그러느니 차라리 이사를 가자고 말했지만, 나는 과연 이 집을 떠날 수 있을까? 모르겠다. 무서운 비 이야기 쓰려고 시작했는데 얼토당토않게 집타령으로 끝을 맺을 줄도 몰랐다. 대체 아는 게 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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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르겠다

투덜일기 2011. 7. 6. 02:40

고등학교 졸업후 소식을 통 모르다 수십년 만에 만난 동창생. 많이 변했겠거니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정말로 전혀 알아볼 수가 없었다. 내가 워낙 인면치이긴 하지만 어디서 본듯한 낌새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성형 때문이었다. 눈, 코, 뺨, 치열교정의 효과라고 했다. 나로선 도대체 시선을 어디 두어야할지 몰라 어색함을 무릅쓰고 일부러 계속 옆자리에 앉았다. 좀처럼 마주볼 자신이 없을 정도로 첫인상은 좀 무서웠다. 예전엔 눈매가 기름하니 순하고 귀여운 인상이었는데.  거의 변하지 않은 목소리와 걸음걸이로 겨우 붙잡아낸 반가움이 긴 세월의 무게와 낯설음을 이기기까지 서너 시간은 족히 걸린 것 같다. 본인은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으나, 같이 만난 다른 친구에게도 고백했지만 내눈엔 조금도 예쁘지 않았고 나이보다 젊어보이지도 않아 이상했다.

그 친구의 성형이 좀 과할뿐, 내 주변에도 성형으로 '예뻐진' 이들이 서넛에 하나쯤은 있는 듯하다. 쌍꺼풀 정도는 아마 내가 잘 몰라서 그렇지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르겠다. 이미 변화한 뒤에 만난 사람에겐 굳이 물어본 적 없기 때문이다. 본인이 원한다는데야 성형수술을 굳이 반대할 마음도 없다. 하지만 전혀 성형 따위에 관심이 없을 것 같은 친구가 떡하니 얼굴을 고치고 나타난 경우,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내심 약간 실망스럽기는 했다. 나 역시 예쁘고 잘생긴 사람에 반색하는 외모지상주의자이면서 그 무슨 심술인지 모르겠다. 어쨌든 눈을 째고 코를 높이고 턱뼈를 깎고 얼굴 사방에 주사바늘을 꽂는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외모를 바꾸는 그들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할 순 없다(배우나 모델이라면 몰라도;;). 심지어 수술후 더 미워진 경우는 정말 속상하다. 개인적으로 쌍꺼풀이 없는 길쭉한 눈매를 좋아하는데 하나같이 눈을 찝어 동그랗게 천편일률적으로 만들어놓는 것도 못마땅하다.

요즘 젊은 남녀가 많이 다니는 곳에 가보면 인면치인 내눈엔 정말 똑같아 보이는 사람들이 너무도 많다. 공장에서 규격 맞춰 찍어놓은 공산품처럼. 외모도 경쟁력이기 때문에 너도나도 어쩔 수 없이 얼굴을 뜯어고쳐야 살아남을 수 있을 듯한 사회 분위기 때문이라는 말도 들린다. 오죽하면 성형공화국이 됐을까. 가뜩이나 취직도 잘 안되는 상황에 못생기고 뚱뚱하면 시작도 해보기 전에 패배자로 낙인찍힌다나. 정말 그럴까. 90%를 훨씬 넘는다는 대학진학률처럼 우리나라 인구의 성형률도 그 정도 수치에 육박하고 나면 아무 소용없는 게 아닐까. 그 가운데서도 이른바 돈을 들여 스펙쌓기 경쟁을 하듯, 외모와 성형의 정도도 시술 가격 및 결과에 따라 경쟁력을 갖게 되려나? 아무리 생각해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 친구의 경우 성형으로 미인이 된 게 아니란 건 확실했다. 부자연스러운 건 확실히 아름답지 않다. 대부분의 인공미인을 내가 못마땅히 여기는 것도 자연스럽지 않기 때문이다. 아니, 성형까지 갈 것도 없다. <6시 내고향> 같은 탐방 프로그램에 나오는 지방의 할머니 어르신들도 가만 보면 다 문신으로 짙게 새겨 숱검댕이 같은 눈썹을 하고 나온다. 자연스럽지 않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무서워 죽겠다.

다들 감쪽같이 자연스럽게 예뻐져 눈쌀 찌푸릴 일이 없다면야, 그들이 생돈을 들이든 뼈를 깎는 아픔을 겪든 내 알 바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다. 미추의 기준은 어디까지나 주관적인 것이므로 내 잣대를 들이댈 일도 아니다. 끊임없는 자기 관리가 칭송받아야 하는 덕목임은 확실하므로, 자연을 거스르는 인공적인 관리 노력 역시 미덕으로 봐야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다음 생이 있어 외모를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면 예쁘게 태어나고 싶은지, 귀엽게 태어나고 싶은지 꽤 심각하게 고민했던 걸 떠올려 봐도 점점 더 모르겠다. 과정이 어떠하든 자연스럽고 아름다우면 좋은 건가. 에라이, 모르는 소리는 관두고 중력 때문에 늘어지고 처진 내 뺨과 주름을 사랑하는 쪽으로 마음을 돌리는 데나 신경을 써야겠다. 자연스러운 변화라고 극구 위로하면서. 10년쯤 뒤 극구 위로하던 자연스러운 변화가 영 마음에 안들면 나도 겁없이 과학과 의술의 힘을 빌려는 생각이 들지, 그 또한 모를 일이니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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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림노래

투덜일기 2011. 6. 9. 15:39

욕심 많은 사람이 푸념이 많다는 글귀를 어디선가 보았다. 하나마나한 빤한 수다로 푸념을 도배해놓은 이 공간은 그러니까 소탈한 척 무심한 척 하는 겉포장을 뚫고 꾸역꾸역 밀려나오는 내 욕심의 증거로구나 생각하니 얼굴이 뜨거웠다. 지루한 돌림노래처럼, 몇년째 같은 시기에 같은 주인공이 거의 같은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음을 깨닫고 보니 대체 왜 쓰나 싶은 맘도 들었던 차에 더욱 자판 두들기는 손이 무안했다. 비록 공개된 곳이긴 해도 냄새나는 배설의 장이니 지나는 이들은 눈치껏 알아서 피해주겠거니 여겼으나, 아무 때나 울려대는 전화처럼 수시로 업데이트 되는 나의 푸념도 일종의 폭력일 수 있음을 느낀다. 
 
어렸을 때 돌림노래를 부르다보면 늘 나는 지조없이 다른 사람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 틀린 걸 알고 슬며시 입을 다물었던 것 같다.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누나 몰래 돌을 던지자.... 귀를 막고 홀로 노래를 부르지 않는 한 말이다. 틀리지 않겠다고 귀를 막고 목청 높여 돌림노래를 부르다 문득 민망해져 귀에서 손을 뗀 순간, 저도모르게 옆사람 노래를 따라가다 아차 싶어 입을 다무는 적이 많았다. 지금이 딱 그런 순간인 것 같다. 지루한 돌림노래를 불러재끼다 가사를 놓치고 어물어물 입술을 깨무는 시기. 그래봤자 또 금방 시작되겠지. 퐁당퐁당 돌을 던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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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중한 침

투덜일기 2011. 6. 2. 11:58

학창시절 앞자리에 주로 앉아야 하는 단신이라 침을 많이 튀기는 선생들에게 가끔 봉변을 당하는 일이 있었다. 중학생 때는 착한 척을 하느라 싫은 내색도 못하고 슬쩍 닦는 걸로 그쳤지만 고등학생 때는 짝꿍과 동시에 야유를 보내며 싫은 티를 팍팍 냈다. 그러면 선생은 뻔뻔하게 스승님 침은 로열젤리라 피부에도 좋으니 고맙게 알라고 응수했다. 흥!

아무리 깨끗해도 밖으로 튀긴 침이 남에게 로열젤리일 리는 없겠으나 본인에게는 로열젤리 못지않게 소중하다는 걸 요번에 배웠다. 역시나 진료과를 또 한 군데 개척하신 엄마 덕분이다. 증상은 잇몸이 붓고 혀가 아파 고춧가루는 단 한 알갱이도 못 견딜 정도고 맛도 못느꼈다. 틀니를 해넣은 동네 치과에 갔더니 피곤해서 그런거라며 잇몸 가라앉을 때까지 한동안 틀니를 빼고 살라고 했다. 그러고도 좀체 나아지질 않아 교수 지정 특진은 6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대학병원 구강내과에 일반진료로 예약을 해 한달뒤로 날을 받았다. 그 사이 상태가 좀 나아지긴 했지만 나도 엄마도 내심 겁이 나서(심각한 병명을 마구 상상했다) 예약한 날에 진료를 받아보니, 궤양이나 염증은 전혀 없고 그냥 침 부족 때문이란다.

어떤 약이든 입마름이 부작용으로 나타날 수 있는데, 엄마가 드시는 약은 무려 십수종. 약을 끊을 수도 없으니 침이 부족한 건 당연한 일이나, 입안에 침이 없으면 세균이 마구 번식해 곰팡이가 난단다. ㅠ.ㅠ 그래서 따로 염증이 없더라도 혀가 갈라지고 통증을 느끼고 맛을 모르게 된다는 것. 치료법은 곰팡이균을 2주간 약으로 없애고 수시로 인공침을 바르는 것이다. 인공 눈물만 있는 줄 알았더니 인공 침도 있더라. 그것도 스프레이 형태, 젤 형태로 다양하게. 스프레이는 낮동안에 한두번 뿌리고, 젤 형태는 자기 전에 혀에 바르고 자면 아침까지 세균번식을 막아준다는 듯. -_-;

상아질이 마모될 정도로 열심히 이를 닦는다고 닦는데도 자꾸만 충치가 생기는 사람이 있고, 양치질을 게을리 하는둥 마는둥 하는데도 이가 썪지 않는 사람이 있는데 그것 역시 침이 훌륭해서라고 한다. 안타깝게도 나는 전자에 속하므로 소중한 침이 별로 많이 안나온다는 뜻이다. 유난히 말할 때 침 튀기는 사람 정말 싫어하는데, 타인에게 피해를 끼쳐서 그렇지 밖으로 튀어나올 정도로 많이 분비되는 침이 본인에게는 엄청 이롭겠다는 생각 처음 들었다. 아울러 잘 때 침흘리는 사람도 나쁜 게 아니라 건강엔 좋은 거겠지. 엄마 덕분에 알게되는 놀라운 인체의 신비. 또 뭐가 남았을까.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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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무

투덜일기 2011. 5. 27. 16:41

우편으로 청첩장을 하나 받았다. 봉투에 적힌 혼주 이름이 영 낯설었으나, 내 이름으로 온 청첩장이니 잘못 왔을 리는 없었다. 대개 봉투엔 신랑신부의 부모님 성함을 인쇄하므로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내용물을 보았으나 혼주 이름 아래 적힌 신랑 역시 모르는 이름이었다. 혹시 엄마 친구분이 병 잦은 친구에게 참석 스트레스를 주지 않을 요량으로 내게 보낸 건가,  엄마에게 물으니 역시나 모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가능성은 단 하나.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아버지의 지인이라는 의미였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절친한 친구분들의 경조사에 나는 계속 부모님 대신 참석하는 걸 의무로 여겼다. 부부동반으로도 모임이 잦았던 친구분들의 경우는 홀로된 엄마라도 불러내어 자꾸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권하는 친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임을 엄마도 나도 알기에 처음 몇번은 모녀가 동반참석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막상 해보니 못할 짓이었다. 즐겁자고 모인 자리에서 자꾸 고인을 추억하게 하거나 질질 짜는 것도 볼썽사나운 일이고, 동정적인 시선을 감당하기도 싫었다. 가끔 걸려오는 안부전화를 받는 정도가 그나마 딱 좋은 선인 것 같았다.

그래서 그 뒤론 아버지 친구분들께 연락이 오면 계속 엄마의 건강을 핑계로 웬만한 자리는 다 마다하고, 어쩔 수 없는 경조사의 경우에만 싫든 좋든 내가 홀로 다녔다. 엉겁결에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끌려가 내키지 않는 밥을 먹은 적도 딱 한번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얼른 요식행위만 하고 달아났다. 어려서부터 다 아는 면면이라 해도, 굳이 어르신들에게 인사를 하고 축의금이나 부의금을 전달하는 일은 숫기없는 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귀찮은 마음이 들어 불쑥 짜증이 치밀어도 그게 의무이고 도리라고 굳게 믿었다. 그렇다고 돌아가신 아버지 이름으로 떡하니 날아온 청첩장까지 찾아다닌 것은 아니었다. 고인인지 아닌지 모른채, 혹은 고인인 건 알지만 어쨌든 그간 뿌린 축의금은 거둬들이겠다는 욕심에 보냈을 것으로 의심되는 청첩장이 아버지 앞으로 날아든 적이 두어 번 있었으나 그런 건 무시했다. 하지만 이번 청첩장은 내쪽에서 낯설 뿐, 내 이름까지 알고 있고 내가 아버지 대신 경조사에 참석하고 다닌다는 걸 알고 있는 학교 쪽 지인(그야말로 이름만 아는 지인;;)이 틀림없었다. 내가 몰라서 그렇지 그쪽에선 나를 잘 아는 아버지의 친구분이 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단언한다. 친구분들 성함은 물론이고, 아버지가 소속된 각종 등산회 모임 연락처를 해마다 다시 뽑아드려 웬만큼 절친한 지인의 이름은 나도 다 아는데 대체 누구일까.  

버럭 짜증이 났다. 이 사회에서 결혼식이란 많은 경우 일종의 흥행을 노린 비즈니스라는 걸 모르는 바 아니다. 결혼식 참석이 대부분 마뜩찮은데도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빚을 갚는 마음으로, 또는 미래의 수확을 기약하며 품앗이 다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고. 하지만 이 경우는 뭔가. 하는 수 없이 아버지의 장례 후 보낸 인사장 명단 파일을 찾아보았다. 거기 들어 있으니 아버지의 '지인'임은 확실하지만, 이름을 확인하고도 찜찜한 기분은 가시지 않았다.

딸인 나는 그렇다 쳐도 엄마도 이름이 낯선(생전에 아버지는 그날 하루 어디에 가서 누굴 만나 무얼 했는지 시시콜콜 아내에게 다 털어놓는 분이었고, 건강이 나빠지기 전까지는 울 엄마도 아버지의 온갖 등산모임, 동반모임에 다 같이 참석하셨다. 엄마가 모르면 정말 '모르는' 사람이다) 사람의 아들 결혼식까지 참석하는 것이 의무일까? 엄마는 아버지 장례 때 부의금 기록을 확인하여 그 사람이 낸 금액과 동일한 축의금을 보내야 한다고 말했다. 보나마나 3만원짜리일 거라면서. +_+ (원래 대학교쪽 인원이 워낙 방대하여 부서별로 부의금을 모아 보낸 경우는 1, 2만원도 흔하다.) 그러나 부의금 기록 따위는 없다. 경조사 때 받은 만큼 갚겠다는 사람들의 계산속이 늘 못마땅했던 나는 아버지 장례 때, 문상객 접수를 맡은 이에게 조문객 명단만 남겨달라고 부탁했다. 나 역시 품앗이를 해야 한다면 그때그때 마음과 형편이 닿는 대로 하면 될 일이라 여겼다. 그런데 이를 어쩐다.

1. 어쩔 수 없다. 묵묵히 청첩일에 결혼식에 참석하여 통상적인 액수의 축의금을 직접 내고 온다. (누군지 서로 얼굴도 모르니 인사는 생략하고 봉투만 불쑥 내밀면 끝이겠다)
2. 시간도 아까운데 직접 갈 필요까진 없다. 참석 못해 죄송하다는 메모를 넣어, 전신환 축의금이나 현금 봉투를 등기로 부친다.
3. 아버지 친구분들에게 참석자를 수소문하여 축의금을 대신 내달라고 부탁하고 송금해드린다. (전화 기피증 환자에겐 가능성 거의 제로;;)
4. 무시한다.

현재로선 1, 2번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다. 그런데 계속 부아가 치민다. 본인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 금전적인 채무가 배우자와 자식에게 남는다는 건 알지만, 경조사의 품앗이 빚도 똑같은 의무라는 건 좀 서글프다. 내게 청첩장을 보낸 저 어르신은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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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 대야

추억주머니 2011. 5. 20. 23:21

온 집안 가득 대부분 옛날 살림살이로 들어찬 우리집.
창고나 다름없는 옷방 한 구석엔 엄마가 시집올 때 혼수로 해온 재봉틀이 아직도 있다. 아주 오래 전 방바닥을 죄다 뜯고 새로 난방용 파이프를 깔던 대공사를 했을 때, 나는 쓰지도 않는 그 재봉틀을 버리자고 주장했다가 혼만 났다. 반들반들한 까만색에 자개로 양쪽 문에 무늬를 넣어 키 큰 문갑처럼 생긴 발재봉틀은 의자를 놓고 사용해야 하는데, 어찌나 무거운지 어른 둘이 들기에도 만만칠 않은 애물단지다. 그 재봉틀로 엄마가 시집와서 옷감 끊어다가 어린 시누이들 옷도 만들어 입혔고, 온갖 낡은 옷 수선하고 20년 전쯤까지는 내 바지 길이도 잘라 박아주고 통짜 커튼이랑 식탁보도 만들었다는 걸 알고는 있지만, 효용 면에서나 공간 면에서 이젠 그만 버려야한다는 것이 당시 나의 판단이었다. 하지만 집안 개조 스트레스 때문에 병이 도져 거의 정신줄을 놓았던 엄마 등 뒤에서 아버지는 목소리를 낮춰 나를 나무랐다. 엄마 혼수품 중에 딱 하나 남은 재봉틀이 상징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물건인데 그러냐고, 우리가 함부로 버리고 말고 할 순 없다는 것이었다. 나중에 혹시라도 엄마가 스스로 버리겠다는 결정을 내릴 때까지 둬야한다고. 10년쯤 전에 내가 또 슬쩍 재봉틀 쓰지도 않는데 버릴까, 하고 물어봤을 때도 엄마는 니 마음대로 해라, 고 하라면서도 눈빛으로는 몹시 아까워하는 것 같았다. 엄마가 직접 만든 누렇게 바란 천덮개를 쓰고서 골동품 발재봉틀이 아직도 옷방 구석에서 온갖 짐에 눌려 있는 이유다.
 
정수기 청소를 하러 오는 분들이 작년부턴가는 물을 받을 통까지 들고 오지만, 그 전까지는 우리에게 물을 받을 커다란 통을 달라고 했다. 그래서 옛날에 엄마가 간단히 김치 담글 때나 만두를 빚을 때 쓰던 대야 두개(하나는 둥근 동심원 무늬 요철이 있는 양은[?] 재질이고 하나는 파란색 플라스틱이다)는 싱크대 밑에서 먼지를 쓰다가 두달에 한번씩 요긴하게 쓰였다. 헌데 이제는 그 두달에 한번 쓸모가 없어진 거다. 어차피 김치는 담가먹지 않기로 했으니 정수기 청소용으로도 필요 없게된 그 대야는 없애도 되는 물건이란 생각에 난 또 슬쩍 버려도 되겠느냐고 엄마에게 물었다. (요즘 잘 못버리는 지병 자가치료를 시도하는 중이다 ㅎ) 어차피 크기가 커서 재활용품 버리는 날 몰래 들고나가는 건 불가능한 물품이다. 엄마는 또 니 마음대로 해라, 고 말은 하면서도 눈빛이 흔들렸다. 그러고는 파란 대야의 사연을 들려줬다.

둘(울 엄마와 아버지)이 벌어 총 열 식구 먹여살리느라 워낙 살림이 빠듯하고 정신이 없던 가난한 집안에선 첫손녀딸 백일이 오는지 가는지 관심도 없었다. 엄마는 섭섭함을 감추고 주말에 몰래 나가 백일사진이나 찍어주어야지 생각했는데, 그날 아침 일찍 출근도 하기 전에 외할머니가 뜨끈뜨끈한 수수팥떡을 이고 오셨단다. 나의 백일 떡을 문제의 그 파란 대야에 담아서. 심지어 새벽같이 부처님 앞에 올렸다가 날라온 거였다나. (나의 우상이자 영원한 1순위 천사표 친할머니가 나의 백일도 몰랐다는 놀라운 반전에 잠시 멍했다가, 그런 일에 꽁하는 내 자신이 웃겨서 피식 웃었다.)

그냥 내다버리기엔 너무 멀쩡하다고 인정;; 이러다 평생 끼고 산다

'나쇼날'이라서 물도 잘 안들고 플라스틱도 튼튼하고 좋다고, 요샌 그런 플라스틱 나오지도 않는다고 말하는 엄마 앞에서 파란 대야를 뒤집어보니 정말로 영어로 National이라고 적힌 마름모꼴 로고 위에 역시나 영어로 National Plastic Co., Limited라고 둥글게 찍혀 있었다. 나는 슬며시 다시 대야를 싱크대 밑으로 밀어넣고 일어섰다. 무려 사십여년 전 내 백일에 맛있는 수수팥떡을 담아 외할머니가 이고 오신 대야라는데... -_-;
이런저런 의미와 추억을 이유로 결국 나는 아무것도 버릴 수 없는 것인가, 한숨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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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덜일기 2011. 5. 13. 21:28

끊임없이 창의력을 발휘해 아이디어를 내야 하는 직업을 지닌 동생은 얼마 전부터 전업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이 분야에선 감 떨어지면 생명 끝이야, 라는 그의 비장한 말을 들은 건 꽤 됐다. 20년 가까이 머리를 쥐어짜가며 버티고는 있지만 자꾸만 그 '감'이라는 게 떨어져감을 느끼는 모양이다. 타고난 재능이 워낙 화수분 같아서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감 떨어질 고민 같은 건 하지 않아도 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어느 시점이 되면 확실히 감이 떨어지는 것 같다.

직장생활을 하던 시절, 노래방엘 가서도 꼭 김동률, 넥스트 같은 노래를 선곡하며 젊은 감각을 유독 자랑하던 부장이 있었다. 다방면의 음악을 들었고 와인을 음미했고 연극을 보러 다녔고 정장에 메신저백을 매고 다녔다. 그런데도 이십대였던 우리는 그 사람을 질색했다. 그가 어디선가 물어오는 썰렁한 유머라는 것도 하나같이 고리타분 전혀 웃기지 않았고, 우리들의 유머는 잘 못알아듣고 초를 쳤다. 그럼에도 부하직원들의 사적인 대화에 어떻게든 끼어들려고 하는 행동이 밉상이었다. 우리는 애써 젊은 척하려는 그에게 '나잇값' 못한다고 흉을 봤다. 이제는 '나잇값'이라는 말을 치떨리게 싫어하건만, 그 땐 툭하면 쯧쯧 혀를 차며 그런 말을 중얼거렸던 걸 보면 한심하게도 나는 조직내 왕언니라는 호칭 때문에 조로 상태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는 나잇값을 못했던 게 아니라 그냥 자기 나름의 취향을 고수하며 살다가 어느 순간 감이 떨어진 것 뿐이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감이 떨어진다는 건 지켜보는 사람으로서도 서글픈 일이었다. '왕년에'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다 지난 과거를 포장해 자꾸만 추억하는 사람을 보는 때만큼이나 서글펐다. 꼴같잖은 상사나 중노년의 어른들을 볼 때마다 나는 나중에 저러지 말아야지 마음먹었던 게 벌써 까마득한 오래 전 일이다. 그리고  이제 내가 그렇게 감 떨어진다고 비웃던 사람들과 비슷한 나이에 접어들었다. 중년이 되었다고 해서 철이 더 들었다거나 현명해졌다거나 지식이 많아졌다거나 하는 변화는 하나도 느껴지지 않는다. 다만 가끔씩 순간순간 스스로 감떨어지는 중늙은이가 됐다는 깨달음이 들어 허걱 하고 놀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며 늙는 건 마음먹기 달렸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의 나는 간혹 저도모르게 꼰대같은 소리나 툭툭 내뱉고 앉았고 빠릿빠릿한 센스도 한참 뒤떨어졌다. '아'하고 이야기했는데 '어'하고 알아듣는 사람만큼 답답한 게 없다고 노상 떠들어댔으면서 문득 내가 그러고 있다. 나이와 상관없이도 원래 자의식에 빠져 움츠러들면 아무것도 아닌 말조차 오해하고 오독하는 일이 흔하다. 그런데 내가 시방 그러는 것 같은 기미가 느껴진다. 서글프다. 가장 슬픈 건 슬쩍 나이탓을 하며 모자란 행동에 면죄부를 씌우려는 무의식적인 나의 태도다. 아니, 감이 떨어졌는지 아닌지 모를만큼 거침없고 무감하게 살 수 없게 된 작금의 상황이 참 슬프다. 

떨어지는 감을 세워올리려면 최첨단 안테나라도 구비해야하는걸까, 아니면 그냥 이렇게 그 옛날 내가 손가락질하며 외면하던 중년의 부장처럼 못나게 몸부림치다 사그라져야 하는 걸까. 비어버린 머리는 어떻게든 두들겨서 뭔가를 집어넣어본다지만, 고성능 최첨단 안테나는 구할 수나 있는 것인지 그걸 몰라 더욱 어깨가 처진다. 감 좀 떨어지면 어때, 하면서 뻔뻔하고 자연스레 수긍하며 살아갈 용기를 찾는 게 더 빠르고 옳은 길일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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