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렵다'에 해당되는 글 233건

  1. 2013.08.15 어떤 고모 8
  2. 2013.07.17 교무실 4
  3. 2013.06.04 경복궁 예쁜 곳 7
  4. 2013.04.21 경복궁에서 옛것 찾기 8
  5. 2013.03.27 불충분한 느낌 10
  6. 2013.03.15 목구멍이 포도청 6
  7. 2013.03.08 벼락치기 17
  8. 2013.02.26 덕수궁 답사 9
  9. 2013.02.08 다시 그 자리 11
  10. 2013.01.17 사람들 11

어떤 고모

투덜일기 2013. 8. 15. 18:22

'기집애', '가시나' 소리만 들어도 엄청나게 모욕적인 욕이라고 생각해 눈물을 쑥 빼던 어린 시절. 내가 유독 싫어하는 친척 할머니가 있었다. 말끝마다 애어른 할 것 없이 누구 이야기를 하든 '요년, 조년, 망할년' 따위를 추임새로 넣으니 당연했다. 그 양반 입에서 가장 많이 흘러나온 욕은 뭐니뭐니해도 '베라먹을년'이어서, 뜻이 궁금해진 내가 엄마한테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알고보니 '빌어먹을년'이라는 뜻이었다. 나 원 참. 그뿐인가. 귀엽다며 아이들 볼을 꼬집는 어른들은 원래도 있었지만 그 할머니는 그냥 쥐는 정도가 아니라 진짜로 아프게 꽉 잡고 마구 흔들어 빨갛게 만들거나 심지어 뽀뽀를 한답시고 뺨을 깨물어 애들을 울렸다. '정말 이상한 할머니'였다. 그러고는 또 매사에 생색을 어찌나 내는지, 옛날 전쟁 피난시절 굶는 이 집(울 외할머니네)식구들을 자기가 쌀퍼다 먹여서 살렸다는 둥(남편이 군무원이라 살림이 늘 넉넉했단다), 특히 울 엄마를 두고는 내가 재를 다 먹여살려 키웠노라, 그 어려운 시절에 입히고 먹인 건 물론이고 학교 공부는 내가 다 시켰노라 입만 열면 똑같은 레퍼토리의 반복이었다. 조카딸 학교 보내주는 고모가 세상에 어디 흔한 줄 아느냐고. (그렇다, 나에게 '고모할머니' 되는 양반이다) 우리 외할머니를 비롯해 다른 친척들은 그 양반의 호언장담에 맞장구도 치지않고 반박도 하지 않으면서 그냥 묵묵히 듣고 넘기는 쪽이었다. 하기야 누가 말대답이라도 할라치면 괜히 막 쌍욕을 해대며 언성을 높였던 것 같다. 나로선 몇년에 한번 볼까말까 하는 사람이라는 게 다행스러웠다. 나랑 동생들한테도 제대로 인사 안한다고(인사를 왜 안했겠나. 넉살좋게 큰소리로 반기지 않았다는 뜻이다;;), ㅂ가네 애들 저래 숫기가 없어서 어디 가서 빌어먹기라도 하겠느냐고 보기만 하면 면박을 줘대니 얼굴 보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였다.

 

내가 커서 어른이 되는 동안에도 그 양반의 큰소리는 변함이 없었다. 특히 'ㅇㅈ년(울 엄마)은 나한테 평생 잘해야한다'는 소리는 잊을 만하면 들려왔다. 아 정말, 사람 이름에 왜 '년'자를 접미사로 붙이는지! 암튼 나는 또 궁금해져서, 진짜로 외갓집 식구들이 그 양반 덕을 많이 봤는지, 특히 울 엄마가 어떤 은혜를 입었는지 물어보았다. 기막히게도 사연은 이러했다. 

 

전쟁통 피난시절, 울 엄마네는 피난을 내려가다 이미 인민군 세상이 된 걸 알고 이천인가 안성 쯤에서 서울로 되돌아갔단다. 그러고 한참 뒤, 서울 수복이 된 후 부산으로 피난갔던 그 양반 남편이 서울로 찾아왔더란다. 집에 먹을 것도 부족할 테니 군입 하나 줄이는 셈 치고 울 엄마(당시 10살)를 부산으로 데려가겠다고. 부산엔 학교도 열렸으니 학교도 보내주고 배불리 먹여주겠다고 했다나. 외할머니는 울 엄마한테 그럼 너라도 굶지 않게 따라가라 명했고, 착한 엄마는 고모부를 따라 부산으로 먼길을 떠났다. 이 대목에서 이미 짐작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부산에서 울 엄마가 전쟁으로 중단했던 학교를 다닌 건 맞지만 엄밀히 따져 그 양반네 집안에서 울 엄마의 위치는 '더부살이 식모'였다. 군무원이라 집에 쌀이며 기타 양식이 풍족하면 뭐하나, 밥하고 빨래하고 청소하고 애보고(어린 사촌동생들이 둘이라나 셋이라나;;)... 아침에도 학교를 가려면 열살짜리 어린애가 군불을 피워 밥을 손수 해서 상차려 바치고 가야했단다. 나중에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나는 정말 피가 거꾸로 솟는 것처럼 화가 났다. 결국 제몸 편하려고 조카딸 데려다 식모살이 시켰다는 거 아닌가! 악당이 따로 없다. 그러면서 무슨 생색은! 미친 거 아닌가?

 

다행히 울 외할머니네도 1.4후퇴 때 부산으로 합류를 했고 드디어 모녀상봉을 했더란다. 맏딸만은 끼니 안굶고 배불리 먹으며 학교에 잘 다니고 있을 거라 짐작했던 외할머니는, 그 추운 겨울에 개울가에서 맨손으로 그집 식구들 빨래하느라 손등이 다 터져서 피가 줄줄 나는 딸의 손을 보고는 즉각 사태파악을 한 뒤 그 길로 도로 데려갔단다. (울 엄마 손등엔 그 때 동상에 걸려 터진 흉터가 아직도 남아있고 요새도 가끔 가렵다고 하신다) 그러니까 그 괴상한 양반이 울 엄마를 학교 보내고 먹이고 입히고 했으니 평생 잘해 받아야 한다는 '은혜'를 베푼 기간은 기껏해야 1년 남짓 되는 것 같다. 하지만 비단 옷 입고 드러누워(울 엄마의 묘사다;;) 피둥피둥 놀면서(주로 화투를 쳤단다) 열살짜리 조카딸한테 무임금 가사노동 전담시킨 죄값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 양반의 만행은 세월이 흘러 울 엄마가 여고입학할 때 다시 속개된다. 가난한 집에서 '기집년'이 무슨 고등학교엘 가느냐고 길길이 날뛰며, 돈 벌어 남동생 뒷바라지나 하라고 울 엄마의 교복을 진탕에 집어던졌다나 뭐라나...  자기한테 월사금 보태달라고 할 생각은 얼어죽어도 하지 말라면서... 아니, 자기가 왜 무슨 참견??

 

내 어린시절 기억 속의 그 양반 모습도 참 가관이다. 짜리몽땅한 키에(145센티미터쯤 되는 것 같다) 부를 과시하기 위함인 듯 요란한 양단 치마저고리에 주로 털배자를 떨쳐입고 동그란 얼굴엔 나비모양의 뿔테안경을 걸치고 나타나선 우리 외할머니댁에서 며칠 묵어가곤 했는데, 나를 보면 최대한 방정맞게 혀를 쯧쯧쯧쯧 차면서 '기집년'이 공부를 잘하면 뭐하니, 팔자만 세진다.. 따위의 악담을 덕담처럼 던져댔다. 평생 가족에게든 남에게든 제대로 이로운 일을 하고는 살았는지 어쩐지도 잘은 모르겠으나, 정말로 그 양반 입에서 좋은 이야기가 나오는 건 들어본 일이 없었던 것 같다. 울 엄마의 우울증이 심해지자, 그 양반은 또 귀신 들린 거라면서 굿을 해야한다고 난리를 피워서(굿을 안하면 화가 온 집안으로 퍼져 자기네도 해를 입는다나 뭐라나;;) 외할머니가 하는 수 없이 울 엄마를 데리고 굿당을 찾기도 했단다. (이날의 장면은 어린 시절 나의 뇌리에도 충격적으로 새겨졌다. 그 양반이 울 엄마를 끌어다가 마당 한 구석에 꿇어앉혔고,  무당이 울 엄마한테 살아있는 수탉을 확 던져셔 내가 막 울었음;;내가 다섯 살 때라는 것 같다)  심지어는 시집살이 때문에 울 엄마의 정신이 병들었으니 울 아버지와 갈라놓으라고도 한 적도 있단다. (진짜 그 양반 정신분석 한번 해보고 싶은 대목이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망발을? 울 엄마의 우울증 역사는 미혼시절부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른이 되어 그 양반의 실체를 알고 난 뒤로 나는 가능하면 그 양반과 마주치는 자리를 피했고 울 엄마와도 상종을 막았으며 최근까지 거의 교류가 없었다. 잘은 몰라도, 아무리 전쟁통이라지만 10살에 엄마와 떨어져 배불리 학교 보내줄 줄 알고 따라간 고모 집에서 졸지에 식모살이를 하게 된 건 울 엄마에게 트라우마로 남지 않았을까? 그러고도 자기 잘못한 줄 모르는 양반이니, 그런 사람과는 떼어놓는 게 상책이다. 

 

아들 선호사상이 엄청난 데 하필 딸만 셋 둔 양반이라 나의 외숙과는 예로부터 쿵짝이 잘 맞아서 수시로 드나드는 모양이었지만, 울 엄마도 어린시절부터 평생 싫은소리를 들었던 상처가 워낙 컸던지 언제부턴가는 그 양반 돌아가도 문상을 가지 않겠노라고 선언했다. 그 양반이 불행한 노년을 보내고 있는 건 다 인과응보라고 나 역시 매몰차게 악담을 했다. 딸 셋은 각기 호주와 캐나다로 이민간 지 오래였고, 혈육들도 그 양반의 더러운 입과 안하무인 태도를 못견뎌한다고 들었다. 그러니 딸들이 보내주는 일정액의 생활비로 독거노인으로 사는 수밖에. 아흔이 다 된 나이라 얼마 전부터는 거동이 불편해 요양병원에서 지내지만, 정신은 말짱하여 목에 휴대폰 걸고 다니며 사방으로 전화를 건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번인가 집으로 온 전화를 내가 받아서 대충 통화하고 끊었다. 여전히 고압적인 자세였다. 니 엄마는 아파서 그렇다 치고 니년은 젊은 년이 왜 얼굴 한 번 안 뵈주러 오느냐고 했던가. 다행히 왕비마마는 집에 안 계셨고;;) 자식들에게도 버림받은 노인에게 인간적인 동정심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뜬금없이 욕설을 퍼붓는 그 양반이 울 엄마의 '고모'이며 나에겐 '고모할머니'라고 생각하면 연민보다는 짜증이 더 치밀었다. 더는 상종하고 싶지 않은 귀찮은 존재 정도? 차라리 남이었다면 안타깝고 불쌍히 여길 수도 있었을까? 

 

어쨌거나 엊그제 그 양반의 뒤늦은 부음을 들었다. 지난 설날에도 그 양반을 집에 모셔와 며칠 지냈다던 외삼촌도 나중에 일처리가 다 끝난 뒤 통보만 들었다는 걸 보면, 장례를 위해 딸자식들이 귀국하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그리하여 남보다 못한 '어떤 고모'의 일생이 끝난 셈이다. 내가 왜 이 이야기를 여기다 시시콜콜 적고 앉았는지, 그 이유를 나도 잘 모르겠다. 가깝든 멀든 집안 어르신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나 도리도 외면했던 것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 글쎄... 그건 아닌 것 같다. 진정코 하나도 찔리지 않는 걸. 그보다는 그 양반 문상도 안가겠다 장담하던 왕비마마가, 다음번 절에 가는 날 '영가등'('영가'는 망자를 의미한다)이나  하나 켜야겠다고 한 말 때문인 것 같다. 그 또한 울 엄니 마음 편하자고 하는 일이겠지만, 암튼 딸들도 안 들여다보는 노친네의 죽음을 결국엔 어린 시절 노동력을 착취당했던 조카딸이 챙기누나 싶어져서 나는 또 좀 화가 난다.

 

이런 부끄럽고 시시콜콜한 가족사를 이런 공개적인 공간에 적어놓아도 되는지, 내 얼굴에 침뱉기는 아닌지 생각되지만 그럼에도 결국 공개하는 건 울 엄마가 절에 가서 평생 미워한 고모를 위해 재를 올려 마음을 씻으려는 것처럼 나도 옹졸하게 마지막으로 실컷 망자를 욕해 꽁한 마음을 풀려는 시도가 아닐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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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무실

투덜일기 2013. 7. 17. 16:34

학생치고 교무실에 가는 걸 즐기는 사람이 있을까? 내 생각으론 심지어 교사라고 해도 교무실이란 공간을 사랑하게 되진 않을 것 같다. 교사에게 교무실은 곧 직장인에게 사무실과 같을 테니까. 엄청 좋아하는 일을 하는 회사가 아니고서야 사무실이 뭐 그리 좋겠나. 게다가 사무실처럼 칸막이가 있다고는 해도 학교 교무실처럼 무방비로 노출된 공간이 또 있을라고. 마지막으로 내가 교무실이란 공간을 속속들이 경험한 건 오래 전 교생실습 때였는데, 무슨 실습실을 임시로 쓰던 교생실과 달리 교무실에 들어갈라치면 한숨부터 나왔다. 매일아침 담당과목 선생님 자리 옆에 의자 놓고 참석하던 교무회의도 멀미나게 지루했던 것 같고...  

 

암튼 조카 출국 때문에 나의 모교이기도 한 중학교 교무실에 전격 방문할 일이 있었다. 그것도 출국 당일 공항가는 길에, 현장학습 확인서를 제출하려고. ㅠ.ㅠ 계속 기말고사가 있었고, 시험 끝나자마자 곧장 며칠 수련회를 다녀왔고 수련회 바로 다음날이 출국일이라, 늦어도 사흘 전에는 제출하라고 적혀 있는 확인서와 비행기표 사본을 미리 제출하지 못한 정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나, 관련서류를 담임샘의 재촉을 받고서야(전날 저녁과 당일 아침에 담임샘이 절대 그냥 가면 안된다고 신신당부하는 전화가 조카에게 걸려왔단다) 공항 가는 길에 내밀러 가는 나의 입장은 몹시 민망했다. 교무실에 같이 들어가 서류 늦어진 상황을 나더러 설명하라던 조카는 아예 자기는 차에 있을 테니 고모가 내고 오라고 슬쩍 떠넘기는데, 그럴 수야 없지!

 

뭔가 잘못해서 교무실로 불려온 학생 같은 기분으로 조카 곁으로 슬며시 다가가 담임샘한테 우물쭈물 인사와 변명과 사죄를 하는데 아뿔사, 바로 옆자리가 조카의 1학년때 담임샘이었다. ㅈㅁ이 어머니 오셨으면, 자기도 할 말이 많다며 어머니도 좀 혼나셔야겠다고 나서는 게 아닌가. ㅠ.ㅠ 꾸벅 인사하며 애엄마가 아니라 고모라고 했더니 'OO동 고모'냐고 아는 척까지! 언젠가 여기도 썼지만 조카의 1학년때 담임샘은 무려 30년전 내가 그 학교 다닐 때 막 부임해 온 신참 한문샘이었다. 모범생 코스프레를 하던 까마득한 옛 기억이 발현되었는지 제발이 저려서 얼떨결에 졸업생임을 밝혔는데, 하핫 그나마 그게 신의 한수였던 것 같다. 지각대장에 벌점대장인 조카의 근태에 대하여 한말쌈 길게 하시려던 것 같더니만, 내가 30년전 제자라는 걸 밝힌 순간 이내 어디론가 모습을 감추셨다! ㅎㅎㅎ

 

아무튼 현 담임샘께는 해외의 경우도 현장학습은 공휴일 포함 7일밖에 인정되지 않는데, 그토록 장기간 학교를 비우는 마당에 어머님이 출국 전에 전화 한통 미리 하지 않았다고 대신 혼도 좀 나고(내 생각에도 그건 좀 혼날 상황이라고 판단; 암말 못했다), 거듭 사죄하는 비굴모드로 일관한 뒤 진땀을 닦으며 잠시 후 교무실을 나올 수 있었다. 교장샘 책상이 요새도 교무실 한 가운데 있을 줄이야! 그리고 하필 그 앞 회의탁자에서 조카에게 각오와 다짐을 적게 할 줄이야! -_-;

 

잔뜩 긴장해서 제대로 둘러보지도 못했지만, 교무실은 그 옛날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는 듯했다. 좁아터진 교사용 책상이 다닥다닥 붙어있어 답답한 느낌까지도... 재단에 돈 많은 학교인데 참 투자를 안하나보다.

 

차로 돌아와, 제대로 말 못하고 왜 부끄러운 척 했느냐고 구박하는 조카에게 내가 대꾸했다. 고모는 어렸을 때 교무실 들락거리는 거 싫어서, '서기' 하라고 하면 절대 안한 사람이란다.  그리고 교무실은 말이지, 어른들도 쉬운 공간이 아니거든! 정식 학부형도 아니고 학부모 대신 찾아간 고모는 더더욱 민망하지 않겠니?!

 

부모 노릇은 정말 어려운 일이란 걸 항상 느끼는데, 그 가운데 학부형 노릇은 더 난감하다는 걸 딱 5분만에 실감한 경험이라 기록으로 남겨야겠다 생각했다. 다시는 교무실에 갈 일이 없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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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예쁜 곳

놀잇감 2013. 6. 4. 14:47

2주가 참 금방 간다. 한달에 두 번 그까이거 아무것도 아니지, 라고 생각하지만 한달에 두번 아침부터 저녁까지 종일 뭔가를 배우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 하도 오랜만에 하다보니 퍽이나 고되게 느껴진다. 누가 시켜선 절대로 못할 '귀찮은' 일을 자진해서 하는 사람들에 대한 신기함과 존경은 여전하다. 나와는 확실히 '다른 부류'의 사람들인 듯. 나처럼 이기적인 사람은 섣불리 덤벼들어선 안될 일이다. 

째뜬 주어진 시간동안 많이 보고 들으며 예쁜 광경을 눈에 머리에 담아두자고 생각하고 있는데, 제대로 사진 찍을 여유도 사실 별로 없다. 한가로운 '관광객' 모드로 돌아다니질 못하니 원...  ㅎㅎ 그래도 눈치 슬쩍슬쩍 보면서 볼수록 예쁜 곳을 휴대폰에 담아두고 심심할 때 감상한다.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옛기술과 지혜와 솜씨와 감각을 따라가지 못하는 분야가 있다는 건 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자꾸 보고 설명을 들어도 통 모르겠다 싶은 경복궁에서 그래도 제일 마음에 드는 곳 사진 몇장 골랐다. 

여긴 흥선대원군이 경복궁 중건때, 자기 아들을 왕위에 올려준 조대비 신정왕후에게 가장 화려하게 지어바쳤다는 자경전의 꽃담. 3월에 찍은 사진이라 나무들이 앙상하다. 지금은 초록잎이 무성한데... 세월 무상.

일일이 색기와를 구워 액자처럼 꽃나무를 표현하고 바탕은 삼화토로 마무리해 갈라지는 법이 없다는 저 그림 하나하나에도 각기 다른 사연이 숨어 있단다. 앵두나무에 걸린 보름달을 표현한 첫번째 그림은 중국어 발음까지도 관련이 있다던데... 복잡해서 다 까먹었다. ㅎㅎ 암튼 경복궁에 있는 침전 중에서 옛모습 그대로 간직된 전각은 자경전이 유일하다. 그래서 보물 809호. 전각 자체의 아름다움보다도 나는 훼손되면 기술 재현이 불가능해 복구할 방도가 없다는 저 꽃담이 훨씬 더 예쁘고 정겹다.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모든 무늬는 강녕과 장수를, 아름다운 꽃나무는 부귀영화를 의미한다네. 

자경전 뒤에 있는 유명한 십장생 굴뚝도 지나칠 수 없다. 온돌과는 뗄레야 뗄 수 없는 굴뚝을 담장과 연결하고 이런 장식을 하다니 옛사람들 정말 천재가 아닌가 싶다. 자경전과 별도로 이 십장생 굴뚝도 보물로 지정, 810호다. 정면에서 찍어 안보이지만 굴뚝 옆으로 돌아가 보면 맨 꼭대기엔 박쥐가 매달려 있다. 박쥐의 한자 이름이 '편복'이어서, 과거엔 복을 주는 동물이라 여겼다고. 십장생 말고도 연밥, 포도, 불노초 등 다양한 장식을 새겨놓았다. 볼 때마다 숨은그림 찾기 하는 기분.. ^^;

예쁜 굴뚝이라고 하면 교태전 뒤 화계에 세워진 아미산 굴뚝도 빼놓을 수 없다. 굴뚝마저도  육각으로 예쁘게 쌓고 꼭대기엔 기와처럼 지붕까지 올려둘 생각을 하다니... 아무리 중전마마 보기 좋으라고 생각해냈다지만, 참 아기자기한 발상이다.

 

교태전 전각 자체는 1995년에 복원한 새것이지만, 아미산 굴뚝은 옛것 그대로라 역시나 보물 811호. 자경전부터 번호가 쪼르륵 붙어있어 욀 생각이 없었는데도 각인되었다. ㅋㅋ 요즘은 교태전과 강녕전 전각을 개방해놓아, 신벗고 들어가 대강이나마 내부를 구경할 수 있는데, 이 아미산 굴뚝은 반드시 교태전에 들어사 툇마루 쪽에서 바라보아야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고... (그러나 툇마루엔 못나가게 관리인 아저씨가 지키고 있다. 쳇;; 전각 뒤쪽 계단으로 올라가 보아도 아래에서 보는 것보다는 낫지만, 상상으로라도 중전마마 놀이 하기엔 역부족! ㅋㅋ)

마지막으로 향원정이다. 중고등학생때 수없이 그려댄 향원정을 딱 그 구도로 찍어오고 싶었으나, 그러려면 좀 더 왼쪽으로 가서 다리를 비스듬하게 잡아야하는데 해설 중 눈치보여서 그러지 못했다. 저 다리의 이름은 향기에 취한다는 뜻을 지닌 '취향교'. 원래 아치 형태로 건청궁 쪽으로 나 있었으나, 한국전쟁때 폭격 맞아 파괴된 것을 복원하며 반대쪽에 직선으로 놓았다. 건청궁은 최근에 복원하였으니 오래도록 그 자리는 그냥 빈마당이었고, 관람객 편의를 위해 다리도 반대쪽으로 놓았던 거다. 2030년까지 계속된다는 경복궁 복원사업이 끝나기 전에 저 다리 역시 건청궁 쪽으로 되돌려진다는 듯.

향원정에서 또 하나 웃겼던 건 수많은 연꽃들이 사라진 이유였다. 정말로 내가 중고딩때 그림 그리러 갔을 땐 연못 한 가득 잎 하나가 거의 우산만한 연잎이 수면을 가득 메워, 그것만 전문으로 그리는 사람들도 종종 보였었다. 나도 몇번 시도해보았다가 너무 어려워서 포기했던 것 같다. 근데 김영삼 정부 시절, 기독교인 대통령이 청와대에 들어가자 '알아서 아부하는 관리들'이 불교를 상징하는 연꽃을 경회루와 향원정 주변에서 죄다 뽑아버렸단다. (미친 거 아냐!?) 이젠 다시 작은 수련들이 생겨나긴 했지만 암튼 이 나라 행정의 무식한 무대포 정신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사례라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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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궁궐 중에서 그간 내가 경복궁을 그닥 탐탁지 않게 여겼던 이유는 일단 워낙 넓어서 어수선하고 죄다 복원해놓아 '옛맛'이 느껴지질 않기 때문이다. 들어가는 광화문부터 삐까번쩍 새것이고, 조선총독부 건물을 헐고 복원한 흥례문과 영제교 일대도 죄다 새것이고, 웬만한 행각들도, 단청 안했다는 이유로 그나마 좋아라하는 건청궁도 복원한지 10년도 안 됐다. 일제시대 훼손을 피해 그나마 남아있던 몇 안되는 건물들 역시 다들 알다시피 흥선대원군이 중건한 것이기에, 조선 건국 후 처음 지어진 으뜸궁궐이라고는 하나 내가 느끼는 경복궁의 위상은 그리 높지가 않다. 

 

임진왜란 때 홀라당 타버린 여러 궁궐 가운데 광해군 때 경복궁 대신 창덕궁이 중건된 이유도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어차피 궁궐도 임금이 사는 집이니 나라도 좀 더 아기자기하게 사는 맛이 나고 아늑한 느낌이 드는 창덕궁을 택했을 것 같다. (물론 이것은 내 개인 사견일 뿐, 조선왕조가 경복궁을 다시 짓고 돌아가지 않은 이유는 여러가지란다. 첫째, 전쟁으로 파탄 난 경제사정 상 드넓은 경복궁 전각을 복원하는 것보다는 비교적 규모가 작은 창덕궁 복원에 돈이 덜 든다는 신료들의 입김. 둘째, 경복궁은 불길하다는 풍수가들의 주장. 셋째, 가뜩이나 왕권의 입지가 불안했던 광해군의 얇은 귀? ^^) 어쨌거나 창덕궁, 창경궁엔 3-400년 넘는 역사를 지닌 전각들이 더러 있는 반면, 경복궁엔 국보로 지정된 근정전, 경회루 정도만이 150년 전에 지어진 건물이다. 그래서 임란이후 경복궁보다 더 오래 '법궁'의 지위를 누렸던 창덕궁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도 되었겠다) 더더욱 조선 최고의 궁궐이라는 자부심을 떨치고 있는 것 같다. (물론 경복궁 계신 분들은 파르르... 떨며 인정 안하는 분위기. 경복궁이야말로 고대 예법에 맞춰 지어진 조선 최초의 궁궐이라니깐! ㅋㅋ)

 

내눈에도 경복궁은 돌아다니기에 너무 넓고 아직도 복원이 한참 덜됐다고는 하나 구석구석 어딘가 휑하고 정신이 없다. 물론 그 이유의 절반은 항상 지나치게 많은 관람객들 때문이다. ㅠ.ㅠ  창덕궁 역시 단체 외국인 관광객이 많긴 하지만 대규모 수학여행단은 좀처럼 볼 수가 없는데, 어휴.. 경복궁엔 항상 어딜 가도 사람들이 바글거리고, 요즘은 특히나 수학여행과 현장학습 철인지 와글와글 시끄럽고 요란한 학생단체가 정말 많이 몰려다닌다. 초중고생은 입장료가 무료라서 더 그렇다는데, 하긴 나 중고등학생 때도 백일장, 사생대회는 늘 경복궁에서 했었다. 흙먼지 피우며 뛰어다닌다고 그때도 주변 어른들한테 핀잔듣고 그랬으니 참 세상은 변함없이 돌고도는 듯.

 

암튼 150년도 짧은 세월은 아니지만, 암만해도 경복궁은 창덕궁이나 창경궁만큼 별로 정이 가지 않는다(덕수궁 석어당도 월산대군 사저일 때부터 선조가 임시 거처로 쓰던 그대로인 줄 알았건만, 화재로 1904년에 다시 지어졌음을 알고나서는 예전만큼 애정이 가질 않는다 ㅠ.ㅠ)는 딜레마에 빠져있던 차(?)에 엄청 오래된 물건을 경복궁에서 발견했다. 전각은 아니지만, 돌로 된 것이라 무려 태종때부터 그대로 내려온 것이라니 오호 놀라워라.

 

그것은 바로 영제교 양옆 석축에서 물길을 내려다보고 있는 '천록'들이다. ^^

원래 네 마리인데 사진을 셋밖에 안찍었다. 오른쪽 앞에 있는 나머지 한 마리는 등에 구멍이 뚫려있는 걸 다시 메워놓은 문제의 서수인데, 그 앞쪽으론 늘 사람들이 바글거려서...

어쨌거나 얘네들은 조선총독부 건물을 짓느라 이 근방을 헐어버렸을 때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다가 복원하면서 다시 제자리를 찾은 거란다. 이 천록상에 대해서는 영조 때 유득공이 서울을 유람하고 쓴 <춘성유기>에도 적혀 있단다. 이상하게도 당시 영제교 천록은 세 마리 뿐(동쪽에 두마리, 서쪽에 한 마리)이었고, 남별궁 뒤뜰에서 등이 뚫린 천록 한 마리를 본 적 있다며 필시 다리 서쪽에 있던 한 마리가 옮겨진 것이라고 유득공은 기록해두었다. 그리고 이 남별궁 뒤뜰의 천록도 고종 때 경복궁 중건하며 다시 원래 자리를 찾았다는데...

 

여기서 다시 아쉬운 점이 발생한다.

요번에 광화문 일대 복원과 함께 수정전 앞뜰로 옮겨졌던 천록들도 제자리를 찾게 되었으면, 옛 기록대로 등 뚫린 천록을 서쪽에 놓았어야 하지 않은가?!? -_-;; 그런데 어찌된 연유인지 등 뚫린 천록은 떡하니 다리의 동쪽 앞, 경복궁 안내팻말을 등지고 놓여 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6권을 내면서 경복궁을 맨 앞에 상당히 비중있게 다루었던데, '메롱'하는 천록(가운데 사진!)의 해학 찬양하는 내용은 있어도, 왜 등 뚫린 천록자리를 옛 기록과 달리 잡았는지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이 없다. 뜨르르 하는 학자들이 죄다 복원에 참여했을 텐데, 유득공의 기록을 무시할만한 다른 근거가 있었을까? 몹시 궁금타.

 

저 천록들 말고도 경복궁에서 내가 다른 궁궐보다 더 예스럽다고 느낀 부분 역시 '돌'인데, 엄밀히 이건 150년밖에 되지 않았으나 그 어느 궁궐보다도 '오리지널'이다. ^^; 그것은 바로 근정전 앞 조정의 박석. 다른 궁궐 조정의 박석들은 일제가 잔디로 바꿔놓았던 것을 현대 들어 복원하며 기계로 다듬어 깔아놓은 것인 반면, 근정전 마당 박석은 고종 때의 것. 깨진 박석을 바꾸기는 했지만, 그 박석 역시 고종 때 박석을 캐온 강화도 채석장에서 날라온 것이라 확실히 다른 궁궐 박석과는 느낌이 다르다.

 

중국과 마찬가지로 기와처럼 구운 매끈한 전돌을 깔 수도 있었겠지만(근정전 바닥은 바로 그런 전돌이 깔려있다), 조정 마당에 굳이 울퉁불퉁한 박석을 그대로 깔아놓은 데는 다 이유가 있단다. 현장학습 온 학생들에게도 선생님들이 종종 그 이유를 알아오라고 하는 모양인데, 이 녀석들 머리 쓸 생각은 안하고 대뜸 해설사분들에게 달려와 묻곤 한다. 흥! 그러나 쉽게 가르쳐주는 사람은 없다. ㅎㅎ

 

첫째는 미끄럼 방지. 옛날 가죽신엔 고무창이 달려있을리 만무하니, 매끈한 전돌이 깔려있었다면 비오는 날 뇌진탕으로 쓰러지는 사람들 여럿이었을 거다. 마른 날에도 미끄럽긴 마찬가지였을 테고...

둘째는 눈부심 방지. 울퉁불퉁한 박석 표면이 햇빛을 난반사하여 눈부심도 방지하고 근정전 안까지도 조명효과를 낸단다.

셋째는 배수량 조절. 워낙에도 근정전 앞 마당의 기울기가 상당하여 배수에 신경을 썼지만, 흐르는 물줄기가 박석 사이사이로 한번 더 휘휘 돌아 천천히 배수구로 모여들게 하는 이치다. 

넷째는 경거망동 방지. 임금 앞이기도 하고 바닥이 고르지 않으니 걸음걸이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다섯째는 지열 분산. 예전엔 박석 사이 간격이 훨씬 더 넓었고 자연히 사이사이에 풀도 많이 났단다. 한여름 뙤약볕에 달궈진 돌 대신 풀을 밟고 서면 지열을 피하는 효과도 있다고!

 

하지만 현재 근정전 마당엔 사람들이 하도 많이 돌아다녀서 그러나 풀 자란 곳이 지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람들이 별로 다니지 않는 구석쪽에나 간신히 풀이 자란 걸 볼 수 있는데, 설명 듣기 전까지 난 박석 사이에 잡초 자란 게 오히려 관리소홀인 줄 알았었다. ㅎㅎㅎ  그런 게 미안해서 친히 풀 자란 부분의 박석도 찍어왔음.

 

왼쪽 윗부분 공백은 아무래도 내 손가락인갑다 -_-;

 

한번에 무려 세 시간씩 경복궁에 대해서 다시 심화교육을 두 번이나 받았는데도 편전까지밖에 못 들어갔다. 하기야 광화문 광장에서 시작했던 첫 수업에선 세 시간 강의를 들었는데도 근정문엘 들어가지 못했으니 오죽하랴. 알아야 할 것은 많고 두뇌는 한계가 있는데, 복작거리는 사람들 상대하는 것도 싫고 생활한복이든 전통한복이든 복장강요하는 것도 싫으니 고민은 계속되는 중. 일단은 배우는 데까지만 배워보는 걸로!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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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충분한 느낌

투덜일기 2013. 3. 27. 15:10

 

사놓은 지 한참 된 더글라스 케네디의 <위험한 관계>를 드디어 읽었다. 사자마자 처음 몇장 읽어볼 땐 뭔가 견딜 수 없이 따분하고 상투적이라 참지 못하고 내려놓았었다. 나랑 안맞는 책인가. 가끔 그런 책들이 있다. 다들 좋은 책이라고 하는데 나는 통 그 재미를 모르겠는 책들. 더글라스 케네디도 그런 작가인가 싶었는데,1년도 더 지나 다시 집어드니 이번엔 꽤 잘 읽혔다. 그때도 아마 소설 기피증이 발현되었을 때였을지도 모르겠다.

 

더글라스 케네디의 다른 책을 안 읽어서 저 유명한 <빅 픽처>와 비교는 불가하지만 퍽 재미나게 읽었다. 균열이 가기 시작한 부부관계와 모성의 부담감을 참 잘도 파헤쳐놓았다 싶다. 마흔 살 넘어 어렵사리 딸을 낳은 친구 하나가 겪었던 무시무시한 산후우울증을 알기에 더 실감이 났던 것 같다. 친구 역시 아기에게 위해를 가할 수 있는 엄마로 판명되어 분리하는 게 좋겠다는 의사의 권유가 있었다. 아기는 부산 시댁으로 보내고 우선 엄마의 우울증부터 치료해야한다고 했다. 친구는 아기를 죽일 뻔 했다면서 엄마 자격 불충분이라고 몹시 울었다. 다행히도 친구는 아기가 백일을 맞기 전에 건강을 회복했고, 이후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키우고는 있지만 아직도 간간이 엄마 노릇에 자신 없어하며 한숨짓는다. 가끔 우는 소리를 하는 친구에게 내가 해주는 말은 하나 밖에 없다. 세상의 모든 엄마들은 위대해!

 

모성이 뭔지 나로선 절대 알 수 없겠지만, 불충분한 느낌이 뭔지는 나도 잘 안다. 책에서도 딱 내 마음 같은 구절을 발견했다.

 

우리의 대화에 공통된 주제가 있다면 이 오래 지속되어온 불충분한 느낌이었다. 대학시절 내가 내내 그랬지만 성적이 B학점을 넘지 못하면 늘 하던 걱정.... 내가 모든 면에서 '괜찮은 편이지만' 그리 뛰어나지는 못한 사람 같다는 기분.... 내가 꽤 저명한 신문사에서 오래도록 일했거나 특파원이었다거나 직업 일선에서 자신감 넘치는 사람으로 유명했다는 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나는 늘 의심을 품었고, 언제 내 능력이 들통날지 염려스러웠다.

- p267, <위험한 관계>

 

맞다. 나는 내 실력이 늘 의심스럽다. 실제 능력이 들통날까봐 겁이 나서 늘 조심씩 허세를 부려온 것도 사실이다. 뭘 해도 불충분한 느낌이 가시질 않는 건 깜냥도 안되면서 뛰어난 사람이면 좋겠고 이왕이면 완벽을 추구하는 욕심 때문이다. 어쩌면 이미 본모습이 들통나 다른 이들은 다 알고 있는데 나만 아직 욕심을 부여잡고 징징거리는 지도 모르겠다. 하여간에 또 다시 자신감이 바닥으로 떨어져 뒹굴다 막 발에 밟히는 나날에, 내 불안을 콕 집어준 구절을 책에서 발견하고는 나만 그러는 게 아니구나 좀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또 궁금해지는 것 한가지. 불충분한 느낌이 주는 불안에 얽매이는 사람은 이 책 주인공처럼 다 그렇게 비호감에 짜증나는 성격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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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창하게 안식년 선언도 했겠다, 악착같이 알뜰하게 버티면 1년쯤은 탱자탱자 놀면서 지낼 수 있지 않을까 상상했으나 그건 나의 착각이었다. 적어도 반년(그러니깐 최소한 4월까지!)은 놀아야 재충전을 위한 안식'년'이란 말을 붙일 수 있는 게 아니냐고! 그러나 수년째 알량한 수입으로 버텨온 재정상태에 비해, 긴축을 해 살아도 고정된 씀씀이는 별로 줄지 않았고 통장 잔고는 다달이 푹푹 무서운 속도로 줄어들었다. 호기롭게 놀아보겠다던 결심도 당연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번역가도 실업수당 같은 걸 받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ㅠ.ㅠ 작년과 재작년에도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삶을 살았으니, 10여년 전에 다시 공부하겠다고 결심하고 일을 중단했을 때와 비슷한 통장 잔고로는 애당초 시작부터 무리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땐 등록금을 내야 했으니, 지금 다달이 들어가는 보험료와 국민연금, 건강보험료 따위의 총액과 대강 엇비슷할 거라 여겼는데... 누가 셈에 젬병 아니랄까봐 통장 바닥나는 속도는 내 예상을 훨씬 넘어섰다.

 

위기감에 휩싸여 보험을 해약할까 어쩔까 어떡해야 더 버틸 수 있을까, 노는 기간을 6개월로 줄여야 하나 한창 약해진 마음으로 고민하고 있자니, 일감 문의 전화를 전처럼 매몰차게 거절할 수가 없었다. 번역 문의가 오면, 신뢰 못할 악덕 번역자로 출판계에서 완전히 매장당한 건 아니로구나 내심 기뻐하며 우아하게 내년을 기약하자고 이야기해야 하는데 자꾸만 구차하게 마음이 흔들렸다. 어흑... 

 

올 10월 중순이면 만 일년을 꼬박 노는 셈이므로, 올 들어서는 여름 이후 정도로 가능한 일정을 통보하면서도 몇번 더 도끼질을 당하면 넘어가고 말 거란 예감이 들었다. 연로하신 노모한테 얹혀사는 것도 모자라 용돈까지 달라고 할 순 없지 않은가. 그저 가난이 웬수! 그래도 불황에 허덕이는 출판계를 감안하면 여름까지 통 일감 의뢰가 들어오지 않을 확률도 높으니 그저 운명에 맡기련다 하고 앉았었는데... 여차저차해서 으음... 설날 지나고 결국 계약에 응하고야 말았다. 장당 500원도 아니고 300원 인상에 마지못한 듯 넘어가면서 가슴 한켠이 슬픔으로 먹먹해졌다. 목구멍이 포도청이구나. 물려받은 재산 없고 모아놓은 돈도 없는 나 같은 인생이 신나게 아무 걱정 없이 놀고먹을 가능성은 결국 로또 당첨밖에 없다는 결론. 그러나 내 사주는 평생 소박하고 성실하게 꾸준히 벌어먹어야 한다던데 행여나!

 

어쨌거나 이젠 정말 진득하게 앉아서 일 좀 해야하건만... 펄럭거리는 궁둥이가 좀체 묵직해지질 않는다. 이 짧은 포스팅 하나도 제대로 못 끝내고 왔다갔다 여러번 오가는 산만함을 어뜨케 잡아야할 것인가. 그 또한 문제. 이래저래 서글프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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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락치기

투덜일기 2013. 3. 8. 23:40

다섯번의 현장답사를 빼고도 18번이나 이론수업을 받은 내용을 하루아침에 벼락치기로 몰아서 공부하면 과연 결과가 좋게 나올까? +_+ 왕릉답사 가는 날은 사촌동생 결혼식이랑 겹쳐 당연히 못갔고, 지난주 화요일엔 몸도 안좋고 강의내용도 별로라서(대인 예절과 자기관리법 같은 거였다) 두번째 결석을 했다. 개근상 받을 것도 아니고 뭐 어떤가.

 

궁궐지킴이 활동을 정식으로 할지말지, 그것 역시나 여전히 고민중이라서 내일 시험도 보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지난 두달 넘게 계속 마음이 변덕을 부렸다. 아 다 귀찮아, 그간 배운 걸로 충분해. 그런 마음이었다가 또 과연 시험을 보면 결과가 어떨지 궁금하다. 왜 사서 간을 졸이려는지 모르겠으나, 내 실력을 평가받고 싶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또 시험에 떨어지면 쪽팔리고 자존심 상할까봐 아예 응시하지 않아야하는 게 아닌가 싶은 마음도 든다. 아우 이놈의 변덕과 우유부단함!

 

학창시절에도 워낙 벼락치기의 여왕이었던 터라, 한 사나흘 빡세게 벼락치기로 공부를 하면 시험에 떨어지진 않겠지, 라고 막연히 생각했던 건 어디까지나 며칠 전 상황이었고, 실제 며칠동안은 놀러 나가거나 오늘아침까지 애먼 일(애물단지 동생을 돕는 일;;)로 밤샘까지 해야 했다. 결국 오늘은 온종일 시체놀이를 하다 이제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밤중이다. 심지어 내일은 저녁때 왕비마마 생신 파티가 있어서 저녁먹고는 간만에 또 대청소도 했다. ㅠ.ㅠ

 

두툼한 교재와 그간 깨알같이 적어놓은 필기노트와 궁궐 답사 갔을 때마다 집어온 안내책자를 책상에 쌓아놓고 앉아있긴 한데, 언제 다 읽어보나 싶은 것이 한숨이 푹푹 나온다. 객관식 문제만 있으면 대충 찍는 걸로 밀어부쳐 보겠는데, 주관식도 있단다. 이걸 해, 말어? ㅋㅋㅋㅋ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순전히 저 좋아서 시작한 일이 맞기는 한데, 마무리를 어떻게 해야 나답고 깔끔한지 그걸 모르겠다. 어흑...

 

오매불망 선망하던 궁궐 전각에 그나마 좀 자유로이 출입하려면 궁궐지킴이 활동을 하는 수밖에 없겠으나, 또 다시 몇 달 수습기간을 거친 뒤 부족한 숫기로 사람들 앞에 나서야 하는 일인데 과연 내가 그 자부심 돋는 '자원봉사'를 이어갈 수 있을까? 자원봉사가 진정 타인을 위한 것인지 본인의 허영심 만족을 위한 것인지 아직도 갸웃갸웃 하는 사람으로서 자격이 되는가 말이다. 100명이나 되는 교육생들과는 두달반 동안 완전히 생까고 잘 지냈지만, 수습이랍시고 궁궐에 배정되고 나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어야 할텐데 아무리 궁궐애호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해도 나름 '조직'에 속해서 사람들과 부대끼게 되는 걸 내가 잘 감당할 수 있을까. 

 

벼락치기든 아니든 '시험'을 위한 공부는 정말이지 하기 싫다는 진리를 또 한번 깨달으며, 여기 끼적이다보면 뭔가 답이 나오지 않을까 했는데 여전히 잘 모르겠다. 이제부터 예상되는 나의 행동이 대강 그려지기는 한다. ㅋㅋㅋ 일단 밤샘을 해서라도 벼락치기에 힘을 써보겠지. 그래서 시험범위를 다 끝내면 시험을 보는 쪽에 더 무게를 둘 것이고, 범위를 다 못 끝내면 아마 시험시작 직전까지(1시부터 마지막 교육과 수료를 마치고 시험은 3시부터 본다 ^^;;) 볼까말까 계속 전전긍긍하지 않을까. 에라이 소심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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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수궁 답사

놀잇감 2013. 2. 26. 17:50

포스팅거리가 너무도 많이 밀려있다보니, 길고 긴 겨울방학 끝자락에 훌쩍훌쩍 눈물 훔쳐내며 밀린 일기와 숙제 하는 아이 같은 심정이다. 방학일기야 까짓것 대충 써가거나, 아예 안 써가면 그만이지, 하며 대범하게 넘겼던 사람도 있겠지만 어려서도 나는 지난 신문더미에서 한두달 전 날씨까지 확인해가며 꼬박꼬박 밀린 일기를 쓰곤 했다. 연필 하나로 계속 연달아 쓰면 밀렸다 한꺼번에 쓴 일기임이 탄로날까봐(대체 앙큼하게 그런 건 또 어디서 알았을까??) 연필도 뭉툭한 거 진한 거 흐린 거 바꿔가며 쓰던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그렇게 벼락치기로 해간 방학숙제와 일기로도 상을 하나쯤 은 받아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_+ 

 

아무튼... 정신없이 2월이 다 지나가고 있다. 궁궐지킴이 시험을 볼지말지도 아직 결정을 안 내렸고, 1월달엔 꽤 열심히 했던 예습복습(! 답사 후 포스팅하는 게 주요 복습이었는데;;)도 완전 무시하며 지낸 터라 머리에 뭐가 남아있긴 한가 잘 모르겠다. 일단 기억을 환기하여 적어보기로...

 

현대미술관 덕수궁 분점을 자주 다니는 편이라 덕수궁에 대해서는 그나마 익숙하고 꽤나 알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건 나의 오산이었다. ㅋ 전각 이름 좀 알고 있다고 해서 제대로 아는 건 결코 아니었다. 덕수궁 답사의 시작을 환구단 정문에서 한다고 할때부터 의아했다. 엥? 시청앞에 환구단 정문이 있다고? 답사안내문에 나눠준 사진과 그림을 보니 그렇다는데, 지난 가을 덕수궁 프로젝트 관람하고 나서 대한문을 나와 분명 시청앞 광장으로 길을 건너가 저녁을 먹으러 갔었음에도 난 그런 걸 본 적이 없었다. 내심 요 몇달 새에 생긴 건가 싶었다.

 

최근에 복원된 건 맞지만(2005년이라던가;;), 물론 환구단 정문은 분명 작년 그날에도 시청앞 광장 건너편에 엄연히 서 있었다. 무지한 내가 못 본 것일뿐.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에서 시작하는 이유는 덕수궁이 대한제국을 선포한 고종황제와 절대로 뗄 수 없는 관계이기 때문이었다. 덕수궁 자리는 과거 월산대군의 사저가 있던 곳이며, 임진왜란 때 궁궐이 모두 타버려 피난 갔던 선조가 돌아와 석어당(석어당이 단청을 하지 않은 이유다)에 머물게 되면서 '정릉동 행궁'이라 불렸었다. 헌데 일반주택이라 해도 일단 왕이 머물고 나면 일반인이 다시 살 수가 없으며, 집에도 '궁'이라는 칭호가 붙는다. 운현궁이 '궁'인 이유도 훗날 왕이 된 고종이 살던 집이기 때문이다. 암튼 그래서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선조가 머물렀던 정릉동 행궁에 '경운궁'이라는 정식 궁호를 내렸다. 덕수궁을 경운궁이라 불러야 마땅하다는 주장의 근본이다.

 

임란왜란으로 소실된 창덕궁과 창경궁이 중건되고 난 뒤 경운궁은 오래 별궁으로 남아 외면당했다가 대한제국 출범과 함께 다시 역사의 중심이 됐다. 19세기 말과 20세기 초, 전성기 때 경운궁은 현재 넓이의 3배에 달했단다. 궁역을 자꾸만 넓히며 건물을 짓다 보니 심지어 정동길 너머로도 영역을 확대하여 구름다리로 연결해 썼단다. 이론수업에서 아직도 그 때의 구름다리 흔적이 남아있으니 정동 돌담길 걸으며 한번 확인해보라는 말도 들었겠다, 공식 답사일정이 끝나고 나서 실제로 둘러보니 그 부분이 눈에 딱 들어왔다.

 

두툼한 구름다리 석축이 확실히 담장보다 튀어나와 있는 게 보이지 않나? 여기 말고도 경희궁 쪽으로도 구름다리로 두 궁궐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 같다. 경희궁 터야 완전 박살나버렸으니 어쩔 수 없다 해도, 이 건너편은 서울 시립미술관이니까 구름다리를 복원해도 좋겠다 싶었다. 어차피 덕수궁(경운궁)은 고종황제가 근대왕조국가를 꿈꾸며 새로 짓다시피 확장시킨 궁궐이니 현대 기술로 복원하기에도 수월하지 않을까나.

 

덕수궁이 다른 궁궐에 비해 이질감이 컸던 이유도, 궁궐건축의 원칙과 풍수에 따라서 산세를 등지고 터를 고른 게 아니라 도심 한복판에 남은 땅을 최대한 활용한 데다 근대건축술을 도입한 서양식 건물을 한옥전각 바로 옆에 지어놓았기 때문이었다.

 

고종의 지시로 덕수궁에 지어진 서양식 건축물이 셋 있는데,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이다. 석조전을 고종황제가 생활공간으로 썼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입김으로 생겨난 건물인 줄 알았더니 고종이 친히 의도하여 지은 공간이었다. 우리나라 궁궐은 전각별로 쓰임새가 다 나뉘지만, 서양식 궁궐은 무지막지하게 큰 건물 하나에 온갖 용도의 공간이 다 들어있지 않은가. 고종 역시 석조전을 크게 지어 침전과 편전으로 사용하려 했다. 

 

언젠가 한국근대미술전 보느라 석조전에 들어가서 본 서양식 응접실과 다실에서 고종황제가 신하들을 접견하고 정사를 의논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좀 짠했다. 나라를 빼앗긴 무능력한 왕의 전형으로 오래도록 알려졌던 고종황제에 대한 재평가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여러 책에서 본 적이 있다. 어쩌면 지나친 민족주의적 시각이 아닐까 의심한 적도 있었는데, 전 세계적으로도 그 시기는 중세왕조가 사라져가고 근대국가가 생겨나는 시기였으니 조선의 패망이 고종황제의 무능력과 세계정세에 어두운 탓만은 분명 아닐 것이다.

 

고종황제가 환구단을 세워 하늘에 직접 제사를 지내러 다닌 것도 황제국의 위상을 드높이려는 뜻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음이 안타까울 뿐이다. 이전까지는 조선이 중국의 제후국이라 '감히' 하늘에 제사를 지낼 수가 없었기에 고대부터 고려시대까지 엄연히 내려왔던 환구단의 전통이 조선초 완전히 사라졌던 것을 고종이 되살린 것이라고. 덕수궁 답사를 환구단 문앞에서 시작한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옛날 환구단의 모습인데, 담장 주변 잡초로 보아 일제가 철거하기 얼마 전인 것 같다.

 

 

 

하지만 우리가 볼 수 있는 환구단의 흔적은 시청앞 광장에 있는 줄도 모르게 서 있는 복원된 정문과 빌딩숲에 가려져 간신히 보이는 환궁우와 삼문(흑백 사진 왼쪽의 팔각정 같은 전각과 아치 세 개 부분), 돌북 세 개뿐이었다. 복원공사를 계속 하고 있긴 하던데 아는 사람이나 알지, 나도 예전엔 조선호텔 후원에 세워놓은 정자인 줄만 알았거늘... 흠.

 

왼쪽 사진이 바로 환구단의 정문을 뒤쪽에서 찍어온 것이다. 시청앞 광장 쪽에서는 사실 찍어도 문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바로 옆건물인 재능교육에서 해고당한 방문교사들이 바로 저 문 앞 인도에 천막을 쳐놓고 천팔백몇십 일째 농성중이었다. 올 겨울 유독 추위가 엄혹했는데 천팔백일만 따져도 대체 몇년째 농성을 하고 있다는 것인지... 복원은 했다지만 거기 있는 줄도 몰랐던 환구단 정문의 위상이나 재능교육 해고교사들의 위상이나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서글픈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고종황제는 덕수궁 대한문을 나서 환구단까지 위엄 돋는 행차를 거쳐 하늘에 제사를 올렸다. 일제의 압박에 왕위를 물려줄 때도 고종은 순종에게 대리청정을 명했을 뿐 정식으로 양위의 뜻을 밝힌 적이 없단다.  그런데 일제와 친일파 대신들이 얼렁뚱땅 왕위를 순종에게 넘긴 것이라고. 그러고 나서 일제는 상왕이 된 고종을 격하시켜 '덕수궁 이왕'이라는 궁호를 내렸다. 그래서 덕수궁이란 이름을 경운궁으로 되돌려야 한다는 주장에 열을 올리는 이들도 많은가본데, 대체로 덕수궁으로 그냥 쓰자는 분위기가 대세라고. 덕수궁 원래 이름이 경운궁인 걸 아 글쎄, 일반인들이 어떻게 알겠느냐고!

 

지난 가을 찍어왔던 정관헌 사진 재활용^^ 경운궁 내 최초의 서양 건물이라는 중명전

 

<무한도전>에도 나와서 꽤 유명해진 '정관헌'은 경치좋은 곳 여기저기 정자를 세워두었던 다른 궁궐과 달리 땅이 좁은 덕수궁에 정자 대신 세워놓고 고종이 커피도 즐기고 연회를 벌이거나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장소다. 서양식 건축과 한옥 양식을 섞어 지어서 어찌보면 이도저도 아닌 요상한 양식이 되었지만, 베란다에 깔린 타일도 예쁘고 기둥과 난간에 새긴 십장생이며 용무늬도 꽤나 정교하다.

 

'중명전'은 덕수궁 담장 밖에 있다. 홍순민의 <우리 궁궐이야기>를 처음 읽을 때만 해도 이 건물이 해방 이후 여러번 팔리다가 개인 소유가 되어 사무실 건물로 함부로 쓰이고 있다는 통탄의 내용이 적혀 있었는데, 얼마 전 정부가 사들여 복원해놓았다. 미 대사관저를 사이에 두고 현 덕수궁과 뚝 떨어져 골목 안에 숨어 있다는 중명전이 궁금해서 답사 끝나고 열성 뻗치게도 나중에 찾아가 보았다. ㅋ 입장료는 무료이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 둘러볼 수도 있게 해놓았다.

 

원래는 황실 도서관으로 지은 건물로 '수옥헌'이라 불렀다는데 덕수궁에 큰불이 났을 때 고종이 다른 궁궐로 옮겨가지 않고 이곳에서 지내며 연회장이나 접견장소로 이용했단다. 원래 왕이 머무는 전각엔 '-전' '-당' 수준의 이름이 붙는다. 그래서 나중에 이름이 중명전으로 바뀌었겠지. 헌데 여기서 바로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었대고, 헤이그 특사 파견도 이루어진 비운의 역사적 장소란다. 신발 벗고 실내화로 갈아신은 뒤 안에 들어가면 여러 사진과 함께 친절하게 여러 설명문이 적혀 있다. 물론 나는 그런 설명문보다 복도 바닥에 깔린 색깔 타일이 더 인상적이었지만서도...

 

여기도 정관헌처럼 건물 바깥쪽을 베란다로 둘러놓았다. 날씨만 안 추웠더라면 저 의자에 걸터 앉아서 높은 담장으로 가려진 미대사관저 부지까지도 궁궐터였던 때를 상상하는 놀이에 젖어볼 수 있었을 텐데... 얼른 사진만 한장 찍고 퇴장했다.

 

 

 

 

 

에고고...

덕수궁에 있는 서양 건물 셋 얘기만으로도 너무 사연이 길고 지친다. ㅋ 암튼 덕수궁 미술관 구경다니면서, 뜬금없이 화장실 건물과 나란히 한쪽 구석에 서 있는 문과 그 안에 놓인 자격루 따위의 보물이 좀 수상하다 여겼었는데 이번에 의문이 약간이나마 풀렸다. '광명문'이라는 편액이 달린 저 문은 원래 고종의 침전인 '함녕전'의 정문이었으나 엉뚱하게 옮겨진 거란다. 제 자리도 아닌 문 안에 포와 종과 물시계를 나란히 진열해놓은 것이 누구의 생각인지,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조선의 궁궐이라는 것이 어차피 죄다 과거 속의 죽은 공간이라 훼손의 역사를 빼고는 도무지 이야기 할 수가 없는 걸 안다. 그래서 궁궐을 볼 땐 상상의 나래를 많이 펼칠수록 더 많은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다고 하는데, 덕수궁은 가장 최근까지 근대의 서글픈 과거가 담긴 공간이다보니 안타까움이 더 크게 느껴졌다. 중화전만 해도 다른 궁궐처럼 처음엔 중층으로 지어졌는데 대화재 후 재정궁핍으로 조촐하게 단층으로 축소해서 지었다지 않은가. 게다가 다른 궁궐 조정 마당엔 죄다 행각을 복원해서 둘러놓았으면서, 왜 덕수궁 중화전만 휑하니 뚫리게 그냥 두었는지? 창경궁이 창경원으로 전락하면서 가장 많이 망가진 줄 알았더니만, 궁궐 훼손의 정도는 어느 게 더 심하다고 손꼽을 수가 없는 것 같다.   

 

째뜬 내가 덕수궁에서 가장 좋아하는 석어당은 퍽이나 사연이 많은 곳이었다. 선조가 피난 갔다 돌아와 임시로 거처한 역사 때문에 광해군 때부터 이미 고이 보존하라는 어명이 내려졌었대고, 인목대비가 유폐되어 살다던 공간이기도 하며, 러시아 공관에서 돌아온 고종황제 역시 경운궁을 본격적으로 넓혀 짓기 이전에 석어당을 임시 거처로 썼단다. 다만... 1904년에 큰불이 났을 때 다른 전각들과 같이 홀라당 다 타버려서, 현재 건물은 당시에 다시 지은 것이라고. 지금 전각도 100년이 훨씬 넘기는 했지만, 선조 때의 모습 그대로인가 했다가 아니라니까 왜 실망스러운지 원...

 

가을에 찍어온 석어당 사진도 재활용 ^^

아무려나, 인조반정 때 인목대비가 옥새를 넘기면서 저 석어당 마당에 광해군을 무릎 꿇려 앉혀놓고 조모조목 죄목을 읊으며 꾸짖었다는 이야기를 들으니, 머릿속으로 <광해> 2편이 마구 그려지면서 새삼 흥미진진했다. 왕위에서 쫓겨난 광해군은 아 글쎄 제주도로 유배되었지만 놀랍게도 예순살이 넘도록 살았다네그려. 나중에 인조반정을 소재로 하는 드라마나 영화 나오면, 배경이 석어당인지 아닌지 꼭 확인해야지!  

 

 

 

 

 

 

 

탑루만 남은 러시아 공관

이날 덕수궁 미술관에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가 열리고 있었다. '프라하'에 대한 선망 때문에 별 생각도 없이 무작정 들어가 본 그림들은 공교롭게도 상당수가 덕수궁의 근현대사와 맞물리는 시기에 그려진 거였다. 초현실주의적인 추상화가 많아서 기억에 남는 그림들은 그리 많지 않았고, 오히려 작년부터 계속되고 있는 <한국근대미술: 꿈과 시> 작품들을 한번 더 볼 수 있어 좋았다. 아픈 다리를 끌고 굳이 내가 러시아 공관이 있던 언덕까지 정동길을 헤매고 다닌 이유도 아마, 이날 본 1907년 즈음의 정동 주변 그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구한말, 고종황제, 을사늑약, 한일합방... 같은 말을 들으면 까마득한 거리감이 느껴지지만, 바로 그 시기 이땅의 화가들은 또 서양 미술을 배우고 익혀 유화로 서울 풍경을 그려 남기고 있었다. 그 그림들을 불과 백여년 뒤의 내가 구경하러 다니는데, 그림 속에 담긴 러시아 공관의 모습이 일부나마 여전히 현재의 시공간 속에 여전히 실재한다는 것이 어쩐지 기묘했다. 

 

게다가 지금은 저렇게 철책으로 둘러쳐 지정문화재 따위로 엄히 보호받고 있는 공간이지만, 15년전쯤만 해도 난 친구들과 김밥 몇줄 사가지고 올라가 러시아 공관 폐허 바로 옆 잔디밭에서 뒹굴거렸던 기억도 있다. 그때도 여기가 아관파천의 역사 현장이래.... 어쩌구 종알거렸던 것 같다.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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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그 자리

투덜일기 2013. 2. 8. 14:15

 

가구 옮기고, 집안 구석구석 찌든 때 벗기고
커튼 갈고 이불 빨고
나박김치 담그고...
체력은 국력!! 튼튼해져서 다행.

물긷는 건 안했으니 무수리 역할만 빼고 온갖 노동에 힘쓰느라 계속 책상 앞에 앉을 새가 없었는데 급히 이메일 하나 보내려고 간만에 컴퓨터 켠 김에 블로그도 들어와봤다. 덕수궁 답사도 다녀왔고 프라하의 추억과 낭만 전시회도 봤지만 후기는 설날 지나고 심신의 여유가 있을 때 써야지... 

5년만에 우리집으로 돌아온 명절 준비, 드디어 이제 나가서 장 봐오고 대청소 한판 하면 얼추 사전준비는 끝이다. 야호~!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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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투덜일기 2013. 1. 17. 00:47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즐겁다. 간만에 새로운 사람들이 백명이나 득시글거리는 공간에 자주 출입하면서 뭔가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치가 않다. 물론 얼굴치라서 이제껏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번 다른 자리에 앉기도 했었고...

 

첫 수업에서 뒷줄 구석자리에 앉았다가 두시간 반 내내 담배쩐내에 혼줄이 난 뒤로는 비교적 중간 이전 구석을 노리고는 있으나, 나로선 아무리 일찍 가도 넷째 줄 이상은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볼일이 일찍 끝나 40분이나 일찍 강당에 가보았는데 맙소사, 맨앞 세줄은 이미 다 차 있었다. 주최측에선 이름표를 달기를 권하고 옆자리 앉은 사람과는 통성명과 인사를 나누라고 하는데, 어우 그런 거 민망하고 싫어서 나는 10분 전쯤 가서 될 수 있는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열심히 예습복습하는 척 하며 강의를 기다린다. 때로는 가방만 내려놓고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거나...

 

그렇게 사전차단을 하는데도 며칠 전 옆자리에 앉은, 사교성 뛰어난 아주머니 한분은 자기 원칙이라며(옆에 앉은 사람 얼굴 익히고 연락처 받아내는 게;;) 굳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따갔다'. 교육 끝나도 주최측에서 주소록이나 명단 같은 거 만들어주지도 않는다니 나중에 수업 내용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헐... ㅠ.ㅠ . 째뜬 이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앞자리에 좀 앉아보려고 자기가 1시간 일찍 온 적도 있었다는데 그 때도 겨우 셋째줄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15분 전부터 슬슬 나타나는데 20여명의 열혈 학생들이 앞자리 다툼을 엄청 한다는 얘기다.

 

좀 일찍 가방으로 자리만 맡아놓고 사람이 오래 나타나지 않으면, 과감하게 가방을 치우고 앉는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자기 가방을 분명 몇째 줄에 놓았는데 엉뚱한 데 가 있다고 씩씩대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벌써 뭉친(혹은 원래도 서로 아는 사이였거나;;) 몇몇 아주머니들은 서로 자리도 잡아주고 그러는 모양이어서, 그러지 말라고 핀잔 주는 사람도 보았다. ㅎㅎㅎ 시험기간에 피튀기며 도서관 자리잡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맨앞 세줄에 앉은 이들은 대부분 중년이상이고, 그들 중엔 매번 휴대폰으로 강의내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집에 가서 그걸 매번 다시 볼까? 녹화된 화질과 강의 내용은 쓸만할까? 챙겨보니까 계속 촬영하겠지만서도... 나로선 참 신기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크게 티 안나게 녹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놀라운 학구열;;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강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꼬치꼬치 질문을 해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수업시간 끝날 무렵 괜히 질문해서 강의시간 넘기게 하는 애들 진짜 미워했었는데, 그나마 수업 끝나고 공개질문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천만다행. ^^; 

 

반면에 평일엔 강의시간이 7시부터다보니 꾸벅꾸벅 졸거나 곤하게 자는 사람도 보인다. 지난주엔 내 바로 뒤에 앉으신 어느 밍크코트족 아주머니께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주무셨다. 아직 친한 사이들이 아니다보니 누가 깨우기도 뭣하고 아주머니 스스로 놀라 깨어나 잠시 소리가 멎었다 싶으면 이내 다시 드르렁 드르렁... 신경에 거슬려 짜증나기도 하면서 또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 옛날 요가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젊으나 나이드나 여자들 중에도 코 고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요가 마무리 때 송장자세 하고 있으면 시간이 몇분 되지 않는데도 드르렁 드르렁 코골며 자는 사람이 두셋은 꼭 있었다. 요가원도 그렇고 이곳 강당도 그렇고 워낙 따뜻하고 어두컴컴하니까 까무룩 잠드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코 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다니. ㅎㅎ

 

이십대로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의 직전에 나타나 뒷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어르신들의 열기를 못 따라가거나 양보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강의 내용에 대한 리액션도 아주머니들이 가장 열정적이다. 한번은 강의 끝나고 그날 담당 교수가 안식년이라 다음주에 외국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므로 문의사항이 있으면 이메일로 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아쉬움의 '어우~~~' 소리가(순간 방청석인가 착각할 뻔했다 ㅋ) 크게 일었다. 아니 언제 봤다고???? *_* 어차피 모든 강사진이 맡은 부분을 딱 한번씩 강의하는 체계라 두번 볼 사람도 없구만...

 

강의를 듣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교수, 강사들도 스타일이 다채롭다. TV 특강에서도 본 적 있는 엔터네이너형 강사가 있는가 하면, 두서없이 어려운 건축용어만 잔뜩 주워섬기다 만 사람도 있었다. 연구를 잘하는 학자가 다 강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몇년째 거의 같은 교재로 거의 같은 수업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건 좀 심했다. 같은 한옥 건축 이야기라도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더구만...  강의는 횡설수설하면서 대뜸 자기 책 참고하라고 광고한 이도 있었다. 그런 책이라면 절대 안 산다 안 사!  반면에 강의 교재도 그렇고 설명도 짜임새 있어서 책을 사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대뜸 사들이지 말고 일단 서점에 가서 들춰보고 결정할 작정이긴 하다만.

 

아참, 요즘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가장 궁금한 사항이 '어디에서' 사는 것인가 보다. 내 전화번호를 따갔던 아주머니도 그렇고 지난번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목례 후에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까말까 하는 듯하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는 동네 같으면 같이 가자고 할 리는 없겠지만, 동네 이름 말해주면서 기분이 묘했다. 뭐냐, 요샌 소개팅 나가서도 첫 질문이 어디 사느냐는 거라던데, 사는 동네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건가? 그러더니 둘 다 자기네는 OO구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도 다음에 똑같은 질문을 들으면 OOO구에서 왔다고 대답해야지. 대개 옆자리엔 시선도 안주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앉아도 몰라보기 십상이지만 이제까지는 한번도 같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공책이나 수첩 정도는 본다규. 과연 내일 수업 땐 또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앉을지, 어색한 대화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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