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0.07.12 안전거리 6
  2. 2010.06.09 어울림 5
  3. 2010.01.08 조심히 22
  4. 2009.12.17 연말유예 7
  5. 2009.12.09 내부공익제보자 : 호루라기부는사람 14
  6. 2009.12.05 혼자서는 못해요 14
  7. 2009.11.30 책 고르기 20
  8. 2009.11.06 어렵다 6
  9. 2009.05.10 진지 17
  10. 2009.05.04 도서관 18

안전거리

하나마나 푸념 2010. 7. 12. 02:42

얼마전 인천대교 부근에서 난 버스 교통사고 뉴스를 보며 너무 참혹해서 소름이 끼칠 정도였다. 가끔 고속도로에 나가는 일이 있어도 나 역시 안전거리따위는 무시하고 다들 그러듯 앞차에 바짝 따라붙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간혹 미적미적 느리게 가면서 차간 간격을 쓸데없이 넓게 둔 차를 만나면 신경질을 확 부리면서 차선을 바꿔 앞지르기 일쑤고...

물론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었다. 어떤 이들은 초보때도 시내운전보다 고속도로 운전이 훨씬 쉽다고 이야기했지만, 나는 초보시절 고속도로에 감히 진출하기까지 시일이 꽤 걸렸다. 처음 한달은 올림픽대로에서 고집스레 시속 60km로 달리며 사방에서 빵빵거리는 차들의 욕을 먹기도 했으니, 시속 100km까지 밟을 자신은 정말로 없었던 거다. 당시엔 수동 자동차를 운전했는데, 기어를 4단까지만 넣겠다고 다짐하고 다녔었다. 5단은 고속도로 용이야 이러면서;; 시내에서야 기껏 사고가 나도 경미한 접촉사고겠지만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는 건 상상하기도 싫었다. 그러나 어느틈에 나는 꽤 난폭한 운전자가 되어 있었고 초보운전 딱지를 뗀지 1년쯤 뒤엔 경인고속도로에서 나를 무시하고 욕설을 해대는 대형 트럭과 추월해서 브레이크 밟기 싸움을 할 정도로 무모해졌다.

세월이 지나면서 철이 좀 들었는지 운전 방식은 퍽 얌전해지고 있어도 안전거리만은 잘 못지켰던 게 사실이다. 원칙대로 100미터쯤 안전거리를 두고 달리면 수시로 끼어드는 옆차선의 차들을 못견디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차간 거리를 너무 띄우면 오히려 함부로 끼어드는 차들 때문에 더 위험하다고 핑계를 대면서...

그래도 뭔가 큰 사고가 났을 때만 반짝 반성하는 기미를 보이는 성격답게 간만에 오늘 고속도로를 달리며 나는 정말로 안전거리를 최대한 지키려고 노력했다. 시속 100km일 땐 안전거리 100미터가 원칙이라지 않은가. 100미터가 얼만큼인지는 몰라도 시내에서 달릴 때처럼 바짝 따라가는 짓거리는 최대한 삼가며 안전운전에 힘써보았는데, 역시나 사람들은 변함이 없었다. 다른 차선 자동차들에 비해 내가 좀 넓은 간격을 유지하는 걸 보아넘기질 못하고 다들 추월해가질 않나, 마구 끼어들질 않나, 카레이스하듯 미친듯이 달리는 자동차들이 요리조리 옮겨다니는 통로로 이용되기 일쑤였다.

이런 사고가 날때마나 지겹게 나오는 말이 '안전 불감증'이라는 짜증스러운 표현인데, 이 나라에서 운전하는 사람들은 안전 불감증이 아니라 아예 안전과 담 쌓고 사는 사람들인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트렁크에 삼각대랑 사고났을 때 표시할 하얀 페인트는 있어도 필수품이라는 휴대용 소화기는 없으니 하는 말이다. 아마 나 또한 기억력이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만 또 안전거리에 신경쓰고 다닐 뿐, 얼마 지나지 않아 제버릇이 도져 앞차와의 거리 따위는 안중에 없다는 듯 운전할 게 뻔하다. 어쩌면 안전거리는 운전대와 나의 거리를 최대한 띄울 때나 확보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디 애먼 사람들한테까지 피해를 입히는 사고뭉치는 되지 말아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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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울림

투덜일기 2010. 6. 9. 16:23

세상 사람들 누구나 자기가 꼭 원하고 바라는 일을 할 형편은 안되는 것이 현실임을 잘 알지만, 그래도 내가 품고 있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직업을 선택했다고 하면 공연히 속이 상하다. 그 사람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결정을 존중하는 마음을 품으면서도 혼자 속앓이를 하듯 한동안 그런 생각이 든다는 얘기다. 가령, 낯 많이 가리고 사교성이 심히 부족하다고 스스로도 인정하던 친구가 돌연 아는 사람이 하던 호프집을 인수해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처럼. 친구 중에 누구든 하나쯤 술집이든 카페든 주인이 되면 덩달아 나도 참 좋겠다는 막연한 바람을 노상 품었으면서도, 좀 더 씩씩하고 강한 친구라면 모를까 그 친구는 못 해낼 것 같다는 생각부터 앞서는 바람에 친구의 인생에 간섭할 권리도 없는 주제에 뜯어말리려고 했던 적이 있다. 사업자등록증을 내느라 보건소에 가서 기막힌 검진을 받아야 했다며 거의 울것 같은 표정을 하는 친구 앞에서 속으로는 여전히 "너랑 호프집 주인은 정말 안 어울려!"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누누히 말려도 해보겠다는데야 결국 다 잘 될 거라고 위로하는 수밖에 없긴  했지만. 

오래 전부터 나를 아는 친구들은 심지어 지금의 내 직업도 나와 어울리지 않는다고 여기며 내심 아직도 염려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처음 회사 때려치우고 집에 들어앉아 번역을 해보겠다고 나섰을 때, 지인들의 절반쯤은 나를 말렸다. 나처럼 사람들과 어울리며 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홀로 조용히 틀어박혀 심심하게 하는 일을 하겠느냐고. 만날 놀러다니느라 분명 일은 뒷전으로 밀어뒀다가 결국 욕만 잔뜩 먹거나, 심심해서 못 견디고 다시 회사생활을 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16년째 이 일을 하고 있으니 일단은 그들이 틀린 셈이다. 표면상 이 일이 나에게 어울리든 말든.

결국 남들이 생각하는 직업의 어울림은 그저 타인으로서의 느낌일 뿐이라는 얘긴데도, 요번에 공인중개사로 부동산사무실을 개업한다는 어느 친구 소식에 또 한번 나는 가슴이 답답해졌다. 대학 다니던 시절 그 친구는 유치하든 말든 자기가 쓴 글을 빼곡히 실은 문집을 만들었다며 씩 웃으면서 조악하게 인쇄된 그 개인 문집을 내게도 한 부 쥐어줬던 부류였다. 일상적인 안부와 푸념밖엔 없는 내 답장이 민망할 정도로 그 친구의 편지엔 깊은 사색과 주옥같은 글귀가 가득했으므로 나는 부디 그가 글로 밥벌이를 하면 좋겠다는 염원을 계속 품었던 것 같다. 흔한 회사원으로 살더라도 가끔은 글쓰기를 잊지 않기를 말이다. 이 땅에서 글쟁이로 밥벌이를 한다는 게 얼마나 팍팍한 일인지 잘 알지만, 그래도 그게 그 친구와 '어울리는 직업'일 듯한 나만의 착각을 아직도 못 버렸다는 뜻이다. 서비스업에 대한 나의 편견도 문제이긴 하다. 공인중개사라면 모름지기 활달한 사교성과 드넓은 대인관계를 갖춘 사람이어야만 성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은가?  헌데 주변의 얘기를 들어보면 공인중개사로서의 성공 여부는 그런 성격적인 부분보다는 정확한 분석력과 기획력에 달려 있단다. 주절주절 수다떨며 어중이떠중이 고객에게 설레발을 치는 것보다는 매물 분석을 잘해서 계약 성공률을 높여야 한다나 뭐라나.

사람이 변하기란 쉽지 않다고 생각하는 나로서는 사실 아직도 그 친구가 부동산사무소에서 화려한 언변으로 부동산 투자나 주택매매를 중개하는 광경이 상상되질 않는다. 하기야 발상을 바꾸면 나처럼 말 많은 거 싫어하는 고객들이 묵묵히 실속있는 매물과 자료로만 승부하는 공인중개사를 반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나 같은 고객이 몇 명이나 되겠느냐고!
재테크라는 말부터 싫어하는 나와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던 그 친구가 정 반대 성격의 배우자를 만나 세상물정 모른다고 질책을 받으며 따로 열심히 경제서와 실용서 쌓아둔 채 재테크 공부를 한다고 쑥스럽게 웃을 때만 해도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었다. 간만에 얼굴도 볼 겸 개업식에 오라는 친구의 목소리는 확실히 예전과 달리 자신감 넘치고 활기차게 들렸으니, 그의 선택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건 나 혼자만의 착각일지 모르겠다. 그러니 새로 찍은 공인중개사 명함을 건네는 친구의 모습을 앞두고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은 애써 버려볼 작정이다. 의외로 잘 어울릴지 모르잖아, 라면서. 하지만 축하의 자리를 앞두고 자꾸만 기쁨보다 아쉬움이 샘솟는다. 순전히 내 욕심이고 이기심이란 걸 아는데도 나 원 참. 누가 내 인생에 섣불리 간섭하면 애정의 조언이든 아니든 파르르 떨기부터 하는 인간에겐 영 가당찮은 태도다. 그래서 반성이 필요하다는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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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심히

놀잇감 2010. 1. 8. 20:54

번역을 잘 하려면 영어실력도 중요하지만 우리말과 글솜씨가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이 나의 번역관인지라, 탁월한 건망증으로 깜박깜박 생각 안나는 단어 때문에 영어사전을 뒤지는 빈도수 만큼은 아니어도 꽤나 자주 국어사전도 열심히 찾아보는 편이다. 헌데 국어사전을 찾다보면 가끔 내가 잘못 알고 있던 말들을 만나 뒤통수를 맞은 것 같은 작은 충격에 사로잡힌다.

언제부턴가 자주 들려오던 <조심히 다녀오세요>라는 말을 접할 때마다 나는 <조심히>가 틀림없이 <조심해서>의 잘못된 표현이라고 믿어의심치 않았다. <조심>이라는 명사와 <조심하다>라는 동사가 기본형이므로 <조심히>라는 부사형은 존재하지 않을 거라는 나의 확고한 믿음은 무슨 근거였는지 모르겠지만, 암튼 난 사전을 찾아볼 필요조차 느끼지 않은 채 그렇게 믿었고 <조심히>라는 형태를 보거나 들을 때마다 내심 못마땅했다.

헌데, 내가 틀렸더라. +_+ <조심히>는 엄연히 국어사전에 등재된 표준말이다. 최소한 내 주변과 가족들 사이에선 수십년 간 들어본 적 없어 몹시 낯설고 이상하게 들리는 <조심히>라는 말이 표준말이었다니. 나와 가족들은 늘 <조심해서>라는 형태로만 사용했지, <조심히 잘 찾아봐> 따위의 표현은 써본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조심히>가 표준말임을 알게 됐다고 해도 내가 앞으로 이 말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며, 다른 이들이 사용하는 <조심히>라는 말이 유독 거슬려 귀가 쫑긋 서는 버릇도 쉬이 없어지지 않을 듯하다.

짐작컨대 내가 표준말로 알고 있던 단어나 표현이 틀렸음을 깨달을 때마다 공연히 자존심이 상하는 이유는 스스로 내가 쓰는 말이 거의 표준말이라는 맹목적인 고정관념 때문인 것 같다. 조부모님이 평안도 출신이긴 하지만 서울에서 오래 사셨고 외가쪽은 계속 서울 토박이인 덕분에 살아오면서 내가 쓰는 낱말이나 억양을 은근히 올바름의 척도로 삼아왔다는 뜻이다. 아등바등, 어리바리, 복불복, 해쓱하다, 핼쑥하다, 설렘, 쩨쩨하다, 후텁지근하다 등등 그간 틀리게 알았다가 뜨끔했던 말이 꽤나 많은데도 아직 내가 틀렸음을 깨달으면 허걱 놀라우니 인간의 허영심이란 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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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유예

투덜일기 2009. 12. 17. 03:15

대개 책 한권에 두달 정도로(물론 최소 넉달 이상 잡아야 하는 책도 있긴 하다) 번역기간을 정해놓으면 첫 한달은 작업량이 형편없다. 그야말로 워밍업 기간.
그놈의 워밍업이 얼마나 오래 걸리는지 어느 첫달엔 심지어 첫장만 계속 펼쳐놓고 있던 적도 있으니 말해 무엇하리. 그래도 둘째달이 시작되면 남은 날수에 맞춰 일일 작업분량을 정해놓는다. 이번 책은 비소설이고 챕터가 달랑 열개. 하루에 한 챕터씩 하면 열흘이면 초벌 끝내겠네, 싶어 쓸데없이 가소로운 미소를 지으며 한껏 여유를 부렸다. 하지만 크게 방심해선 곤란했다. 연말이랍시고 엠티부터 시작해서 몇몇 모임과 행사까지 있는데, 원고마감 핑계대고 놀 일에 빠질 위인이 아니므로 최소한 일주일은 없는 셈 쳐야 했으니까.
새벽까지 앉아 있어도 일하는 시간보다 노는 시간이 더 많았던 월초를 보내며, 엠티 다녀오면 작업에 박차를 가해 가속도를 높이리라 마음 먹었는데 그놈의 끔찍한 숙취는 후유증을 이틀이나 안겨주었고, 정신 차려보니 허거덕 남은 날은 한달의 반토막이었다.
진도는 아직도 지지부진한 주제에 초인적인 가속도가 붙었을 경우에나 가능한 <하루 한 챕터 번역>의 야망을 버리지 못한 채, <잘하면> 계약 마감일에서 늦어도 일주일 내로 원고를 털어낼 수 있을 거라 상상하던 차였다. 마침 출판사에서 내년 출간 계획을 잡아야 한다며 원고 진행상황을 묻는 메일이 날아왔다. 앗 뜨거라 싶어 하루 종일 고민한 끝에 나의 상상 마감일을 적어보냈더니만, 흐흐흐 원고마감 때문에 연말 연휴에도 일에 매진하는 게 아니나며 한껏 위로하는 글과 함께 원고는 1월 중순까지만 보내면 된다는 낭보가 날아들었다. 아싸~
마침 그 메일을 열어보는 중에 뒤에 서 있던 조카가 한 마디 했다.
"우리 고모는 놀 때 안 놀고 일만 하는 사람 아닌데. 놀 거 다 놀고 또 밤새서 일하는 사람인데..."
너무도 정곡을 찌른 그 말이 칭찬인지 꾸지람인지 언뜻 파악하기가 어려워서 흐흐 웃고 말았다.

헌데 문제는 어제까지도 그럭저럭 조여졌던 긴장의 끈이 연말유예 메일과 함께 풀어져버렸다는 사실이다. 열흘 쯤 더 여유로워졌다고 당장 이밤에 또 일이 하기 싫어졌으니 원! 다시 조이는 데 한달 반이나 걸린 이 긴장의 끈을 다잡으려면 일단 이렇게 널리 자아비판을 하는 수밖에 없는 듯하여 또 부끄러운 쉰소리 끼적이고 앉았다. 당장 낼모레로 다가온 할아버지 제사부터 간간이 잡힌 <놀 일>을 감안해서 제발 밤을 샐 때는 진지하게 진짜 일을 해보자. 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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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MBC PD수첩을 봤다. 미국산 쇠고기 보도 소송 이후 정신나간 인간들이 폐지운동을 하고 있을 정도로 어떤 이들에겐 눈엣가시 같은 프로그램이겠지만, 방송에서 그런 사회고발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나라라면 정말 실오라기 같은 희망도 없지 않은가. 내가 열심히 봐준다고 시청률 오르는 것도 아니고 광고가 더 붙는 것도 아니지만 시간이 되는 한 찾아보려 애쓰는 중이다.
마침 어제는 한 나라의 희망이랄까 투명성의 한 가지 잣대가 되는 공익제보자들의 현실을 다뤘다. 어마어마한 삼성 비리를 폭로했지만 사건의 본질을 흐리려는 언론과 사회 분위기에 휩쓸려 오히려 탐욕스러운 배신자에 사기꾼으로 내몰린 김용철 변호사를 비롯해서, 공익을 위해 용기를 내어 군부재자투표 비리, 감사원 비리, 건축비리 등을 폭로한 이들의 과거와 현재를 조명했는데, 익히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한숨이 나왔다. 분명 공익을 위한 소신있는 행동이란 점은 똑같은데 한국과 선진국의 차이가 어찌나 극명한지. 비교 대상이 미국에 국한된 점은 아쉬웠지만 어쨌거나 제도적으로 공익을 위한 내부제보를 널리 권유하고 법적으로 보호하고 생계를 보살피는 미국과 달리, 앞에서는 소신 있는 행동이라며 박수 쳐주고는 왕따시키고 업계에 절대 발을 붙이지 못하도록 그 가족까지 사회에서 격리시키는 무서운 사람들이 사는 곳이 바로 한국이다.

정의감과 사회적 투명성을 테스트하는 유명한 설문이 있단다.
1) 친구가 운전하는 차를 타고 단둘이 밤길을 가는 데 친구가 자꾸만 과속을 한다. 나는 친구가 과속중임을 알고 있다.
2) 험악하게 차를 몰던 친구는 그만 길가던 행인을 치어 죽이고 말았다. 사건 현장의 목격자는 친구와 나 뿐이다.
3) 친구의 변호사는 친구의 형량을 줄이기 위해 나에게 거짓으로 친구에게 유리한 증언을 해달라고 부탁한다. 과연 나는 어떤 선택을 내릴까?

OECD 국가 CEO에게 위 설문을 해보았는데, 미국과 영국 CEO의 경우 95-6%가 진실을 말한다고 대답했으며 다른 나라들도 70%이상 거짓증언 대신 진실한 증언을 하겠노라고 대답을 했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인의 대답은?


해서 외국 기업가들 사이에선 한국인 기업가의 말을 100% 믿지 말라는 공공연한 조언이 나돌 정도란다. 호언장담한 약속을 언제든 어길 수 있는 게 한국 사람들이라는 이미지.
이윤추구를 최우선으로 하는 사업가는 어느 나라든 어느 정도 사기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지만, 전세계 사업가 가운데 제일 못믿을 사람은 중국인이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실제로 내가 다니던 회사와 거래하던 영국 회사는 중국과도 기술이전을 조건으로 합작투자 계약을 준비하다 투자금은 한푼도 못받고 주요 도면과 기술자료만 빼앗기고 마는 바람에 한국으로 방향을 돌렸다.),  정말이지 한국인 기업가를 떠올리면 제일 먼저 정관계 로비를 비롯해 뒷구멍으로 많은 비리를 저지르고 있는 탐욕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렇게 끼리끼리 봐주고 덮어주고 함께 부와 권력을 공유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대의를 위해 공익을 위해 본인의 희생을 무릅쓰고 비리를 고백한 제보자들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곱기만 할 리 없다. 현재 그들은 하나같이 기득권 사회와 조직에서 떨려나 무직으로 버티거나 막노동을 하거나 장사를 하거나 10년 넘게 외로이 홀로 소송을 이어가고 있었다. 누군가는 꼭 했어야 할 일이더라도 막상 내부제보자를 접하면 같이 어울리기엔 어쩐지 꺼려지는 모난 인생이자 배신자로 낙인찍어 버리는 대다수의 사람들을 나는 떳떳하게 욕할 수 있을까?

많은 고민이 뒤따르겠지만 나 역시 친구를 위한 거짓증언의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 같다. 어차피 죽은 사람은 죽은 사람이고.. 라는 핑계를 대면서. 물론 옆집에서 아이가 좀 오래 울거나 아내가 얻어맞는 듯한 기미만 보여도 즉각 경찰에 신고부터 하는 탁월한 신고정신을 지닌 국민과 그 뒤처리가 합리적인(아동학대와 배우자 학대에 대한 처벌이 즉각적인) 선진국과는 이미 국민성도 다르고 제도와 정서도 엄청 다르지만, 옳고 그름의 판단은 어디서도 달라져선 안되는 게 아닌가. 
내부공익제보자를 뜻하는 영어 단어는 <whistleblower>, 즉 호루라기부는사람이다. 내부인으로서 잘못과 비리를 맞닥뜨렸을 때 위험을 알려 사람들을 대비시키듯 호루라기를 분다는 뉘앙스는 다분히 호의적인 반면에 여러단어가 조합된 <내부공익제보자>엔 확실히 긍정적인 의미가 느껴지지 않는다. <공익>이라는 말부터 거부반응이 드는 건 나뿐인가. 그간 <공익>이라면서 얼마나 많은 이들이 <사리사욕>을 채웠는지 알기 때문일 것이다. 하다못해 <공익근무요원>마저도 군대비리의 또 다른 이름처럼 들리는 판국이니.

다행스러운 것은 뒤늦게라도 <내부공익제보자>를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법안이 마련되는 중이라는 점이다. 다시는 그들이 억울한 손해와 구조적 따돌림의 폐악을 입지 않도록 당장에 정말로 현실적인 법안과 제도가 마련될 것이라고는 선뜻 믿기 어렵다. 하지만 그래도 앞으로는 달라져야 하기에 용감하게 <호루라기부는사람>이 많아지기를, 그리고 지금과는 달리 내부자로서 비리를 고발했더라도 그들의 권익이 철저하게 박탈되는 일은 차츰 없어지기를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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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서도 뭐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프다. 헌데 생각만 그럴 뿐 현실의 나는 혼자선 못하는 게 많은 의지박약 인생이다. 요가강습 한달이 지났다. 일단 시험삼아 다녀본 결과 열두살 공주는 죄다 어른들인 틈바구니 속에서도 꽤 열심히 자세를 익혔고 체중이 1.5킬로그램쯤 내렸으며 깡말랐던 유아시절과 달리 토실하게 살이 올랐던 허리가 살짝 오목해지는 쾌거를 이루었다. 반면에 뻣뻣 무수리는 체중이 오히려 늘었고 특별히 몸이 유연해졌다거나 어딘가 선이 날렵진 느낌 따위는 전혀 없으나 다만 늘 동그랗게 뭉쳐있던 승모근의 통증이 사라졌고 몸을 웅크릴 때의 엉성함이 좀 덜한 정도로 만족하고 있다.
해서 고모와 조카 커플은 일단 요가를 계속해보기로 했다. 매달 강습료는 8만원이지만 3개월을 한꺼번에 끊으면 17만원이므로 무려 3개월이라는 장기(?) 프로젝트에 돌입하기로 한 것이다. 다만 공주는 다음주 기말고사 준비를 위해 일주일 간 쉬었다 재등록을 하고, 나는 그나마 풀리기 시작한(?) 몸이 다시 굳지 않도록 계속 강습을 이어가야 한다는 것이 모두의 의견이었다. 근래 들어 꾸준한 운동이라곤 처음이라 나도 그럴 작정이었다.
헌데 막상 어제 홀로 가서 재등록을 하려니 어찌나 귀찮은지... 어제 저녁엔 오늘 2시 수업에 맞춰 가면 된다고 자위하며 핑계를 댔다. 하지만 막상 오늘이 되자 아침 늦게 겨우 잠들어 정오에 맞춰놓은 알람에 눈을 뜨고 보니 요가고 나발이고 우선은 더 자야 살것 같았다.
만일 공주와 함께 강습을 받고 있었다면 단 한 시간을 잤더라도 당연히 벌떡 일어나 달려나갔을 것이다. 아니, 벌써 전화가 몇번 걸려오는 바람에 자고 있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제 오늘 이틀째 홀로 외출을 감행하지 못하고 있노라니 참 한심하다. 요가수업뿐만이 아니다. 바람도 쏘일 겸 혼자 영화를 보러 나가려고, 덕수궁으로 배병우 사진전을 보러 가려고, 그 참에 서점에도 좀 들르려고 몇번이나 마음을 먹었지만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간 약속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어차피 외출 약속이 있는 날 조금 일찍 나가서 영화를 보든 전시를 보든 서점엘 들르든 해야겠단 결심도 해보았지만 허사였다. 약속시간에 맞춰 나간 게 용할 정도.
흉보면서 닮아간다더니만 너무 의존적이라 옆사람 피곤하게 한다고 만날 왕비마마를 구박하면서, 어느새 나도 의존적인 인간이 되어가고 있나 싶어 난감하다.

오늘은 이미 너무 늦었고, 내일은 슬그머니 나가 영화 한편 보고 서점에도 들러야지. 그리고 월요일엔 기필코 혼자서라도 요가학원엘 가야지. 대외적으로 떠벌임으로써 생겨나는 무게감이라도 필요한 것 같아 또 이렇게 끼적끼적 자아반성을 하고 있다. 혼자서도 잘해야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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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고르기

책보따리 2009. 11. 30. 06:12
책을 읽고 나서 꼼꼼한 후기를 블로그에 올리시는 분들을 보면 존경스럽다. 책으로 밥 벌어 먹고 살면서 민망하게도 그리 책을 많이 읽지도 않지만, 그나마 드물게 읽는 책의 경우도 내가 좀체 후기를 쓰지 못하는 건 직업병과도 관련이 있다.

전에도 푸념을 한 적이 있지만 번역을 맡아 일을 하는 과정 중에서 내가 제일 싫어하는 부분은 <책 검토와 검토서 작성>이다. 순수한 독자로서 책을 읽으면 좋다 싫다 별로다 괜찮다 정도로 뭉뚱그려 판단할 수도 있고 중간에 집어던졌다가 맘 내킬 때 다시 읽거나, 아예 끝내 포기해도 뭐라 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하지만 책의 재미와 가치 여부는 물론이고 상업성은 있겠는지, 독자층은 어떤지, 기존의 책들과는 어떻게 차별화되거나 유사한지, 내용 요약과 책을 조목조목 분석해서 판단하는 의견까지 내놓으라는 출판사의 요구를 받노라면 시작도 하기 전에 나는 책멀미를 느낀다. 논리와 분석력이 떨어지는 인간에게 책 한권을 읽고 객관적인 검토 소견을 제시하는 일이란 몹시 어려운 숙제가 아닐 수 없다.

해서 바쁜 일정을 핑계삼아 책 검토는 애써 사양하고 있지만 완벽하게 피할 수는 없는 법이라, 어쩔 수 없이 원서를 읽고 검토서를 만들어야 할 때면 나는 가장 안전한 방법을 선택한다. 그냥 독자로서 책을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거다. 다행히 재미있게 책장이 넘어가면 호감어린 검토서가 나올 가능성이 높아지고, 시작도 전에 느꼈던 책멀미가 계속 이어진다면 비판적으로 헐뜯는 의견을 적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늘 두려운 건 독자로서 나의 객관성이 얼마나 합리적일까 하는 점이다. 단순히 독서할 책을 추천하는 것이라면야 누군가 읽고나서 투덜대며 별로였다고 던져버려도 상관없지만, 원서에 지불해야하는 저작권 로열티부터 제작비까지 큰 돈과 시간을 들여 만들 <가치>가 있는 책인지 판단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골치가 지끈지끈 아파지기 시작한다. 

번역만으로는 당연히 먹고 살기가 어려웠던 번역 초창기 시절 나는 월급을 받으며 비상근으로 어느 출판사의 기획일을 도운 적이 있었다. 말이 그럴듯해 출판 기획이지, 내가 하는 일은 저작권 중개 사무소를 돌아다니며 책을 추천받고 꼼꼼히 검토해 <대박>날 책을 찾아내는 것이 목표였다. 경제경영서 같은 무지한 분야의 책들을 고르는 건 괴로운 작업이었지만, 그래도 온갖 종류의 책을 접하고 읽는 게 좋아서 처음엔 꿩먹고 알먹는 일이라고 기뻐했었다. 요것조것 책을 골라 읽으면서 정기적인 수입도 생겼으니까.
하지만 머지않아 문제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출판 경력도 전혀 없는 내가 어떻게 개인적인 취향이나 재미 여부로 독자들에게 사랑받을 <잘 팔릴> 책을 골라낸단 말인가! 출판사에서 원하는 건 <베스트셀러>가 될 책 90% + <출판인으로서 의미 있는 책> 10% 정도의 비율이었으나,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책은 얼마든지 추천 가능해도 <잘 팔릴 책>을 찝어내는 건 로또 번호 찍기처럼 막연하기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저작권 중개사무소에서 소개받은 <유망한> 책들을 다 읽고 검토서를 만들어 기획회의를 거쳐 높으신 분들이 결정하도록 책임을 회피하는 쪽을 선택했다.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놓친 고기는 늘 커보이는 법이라고, 내가 보기에 괜찮은 책 같아서 열심히 추천하다가 막판에 꼬리를 내려 출간을 포기했는데 그 책이 다른 출판사 베스트셀러로 등극하면 난 곧 지탄을 받았다. 워낙 좋으신 분들이라 심한 얘긴 하지 않았지만, 그때 내가 좀 더 강력하게 출간을 주장했으면 안 놓쳤을 거라며 안타까워하는 식이었다. 심지어 내가 완전 별로라며 소개만 하는 수준에서 그쳤던 원서가 그럴싸한 포장으로 날개돋친듯 팔려나갈 땐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베스트셀러가 다 좋은 책은 아니란 건 누구나 알지만, 아무리 문화산업의 자긍심을 품은 출판사라고 해도 우선은 매출이 높아 돈을 많이 벌어야 그 여력으로 <많이 팔리진 않더라도 좋은 책>을 만들 수 있지 않은가. 어쨌거나 최종 결정은 다 같이 했더라도, 비싼 저작권료 지불해가며 공들여 출간한 책이 맥을 못추고 안팔려도 애당초 맨 처음 그 책을 집어왔던 장본인인 나는 쥐구멍을 찾고 싶었다. 대체 출판이 도박과 다른 점은 뭐란 말인가!

책 때문에 만나는 사람들도 좋았고 책 자체를 읽는 재미는 충분했지만 나는 3년만에 결국 <책 고르기>의 스트레스를 이기지 못해 이런저런 핑계를 대다 아예 외서 기획일에서 손을 떼고 말았다. 내게 그 일을 맡겼던 출판사 사장님의 깊은 뜻은 번역가로서 책 고르는 안목을 높여 주어지는 일만 하는 게 아니라 직접 책을 선정하고 기획해 출판을 주도하는 역할까지 하라는 것이었지만, 나는 그런 재목이 되지 못함을 깨달았을 뿐이었다. 지금도 가끔 아마존이나 뉴욕타임스 북리뷰 같은 사이트에서 좋은 책을 찾아 추천해달라고 부탁하는 출판인들이 계시지만, 나는 머쓱하게 뒷머리만 긁적이는 수밖에 없다. "죄송하지만 게을러서 그럴 시간이 잘 없네요..."라고 말꼬리를 흐리며.

블로그 이웃 가운데 동종업계에서 번역에 힘쓰고 계신 두 분은 놀랍게도 번역과 함께 그 어려운 <책 고르기>를 병행하고 계신다. 재미 있으면서 가치도 있는 책을 골라 어렵사리 출간을 권유하고, 또 번역을 맡아 그 책이 세상에 선을 보였을 땐 성취감과 뿌듯함이 몇배는 더 클 것이다. 더욱이 그 책이 독자들에게도 호응을 얻어 <잘 팔리는 책>으로까지 인정을 받는다면 얼마나 기쁠까!

하지만 막연히 그걸 짐작하면서도 겁쟁이에 게으름뱅이이자 소심증 환자인 나는 의식 있는 번역가의 책무라고 하는 그 길을 갈 수가 없다. <책 골라 권하기>는 고사하고 출판사에서 골라준 원서 읽고 검토서 하나 만들라고 하는데도 어깨가 무거워 한숨을 쉬는 위인임에야 어쩌겠는가.

마뜩찮게 도맡은 책 검토를 할 때도 그나마 위안을 삼는 건, 번역작업을 맡을 욕심에 재미없는 책을 재미있다고 의견을 내거나 가치없는 책을 가치 있다고 추켜세운 적은 없다는 점이다. 사실 사적으로 싫은 분야가 아닌 한 웬만한 책은 소소하게 읽는 재미를 찾는 게 어렵지 않다. 이미 다른 언어로 세상에 선을 보인 책은 누군가 출간할 가치를 인정했다는 의미이므로, 그 분위기에 얼렁뚱땅 편승하는 것도 가능하다. 하지만 또 다시 수천만원 이상의 돈과 노력을 들여 나무 없애가며 다시 우리말로 책을 펴낼 의미가 있을지 곱씹어보자면 나는 웬만하면 회의적인 태도로 기울게 된다. 어쩌면 출간 결정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는 술수일지도 모르겠다. 나중에 책이 안팔려도 최초 검토자로서 덜 민망하도록. 물론 검토자에게 추후 책 판매 여부의 책임을 묻는 출판사는 없다. 검토자가 아무리 칭찬을 하거나 혹평을 해도, 결국 최종 결정은 출판 기획자의 몫이니 말이다.

번역서든 창작서든 이 땅에 나오는 수많은 책들은 하나같이 여러 사람의 고민과 염려와 손길을 거쳐 탄생한다. 얼마 전 본 기사엔 3만개도 넘는 국내 출판사 가운데 작년에 한 권 이상 책을 낸 곳이 10%에 불과하며, 나머지 90%는 단 한 권도 책을 펴내지 못했을 정도로 출판시장이 열악했다고 한다. 서점에 나가보면 지천으로 깔려있고 쌓여있고 꽂혀 있는 게 신간이던데, 그게 겨우 10%였다니.

올해 상황은 어떠했을지 지나봐야 알겠지만, 이 나라 사람들의 먹고 사는 형편이 극적으로 나아지지 않는 한 없어도 사는 데 지장이 없는 책 산업이 돌연 호황을 누릴 리 만무하다. 그 틈바구니 속에서 어렵디 어려운 <책 고르기>와 <책 만들기>에 종사하는 수많은 출판인들이 보람을 느끼려면 그래도 누군가 꾸준히 책을 읽어주는 수밖에 없다. 게다가 골치아프게 만들어 내놓는 입장보다야 선뜻 집어 읽는 입장은 얼마나 더 수월한가. 확실히 나는 독자쪽을 더 선호하는 것 같은데, 그런데도 막상 읽기를 소홀히 하는 걸 보면 책으로 밥 벌어먹을 자격이 부족한 것도 같다. 2009년 정리할 때 덜 부끄럽도록 마지막 남은 한달 동안 몇권이나 더 읽을 수 있으려나 마음이 조급하다. 검토서 멀미증의 영향으로 독자로서 읽은 책의 후기를 쓰는 것 또한 못할 노릇으로 여겨지긴 하지만, 그래도 이웃 애서가들에게 자극을 받아 올해는 읽은 책을 기록하는 독서노트를 마련했다는 데 의의를 두기로 했다. 정리에 젬병인 위인에겐 큰 발전인데, 이러다 보면 시답잖은 감상이라도 언젠가는 두려움을 극복하고 꼬박꼬박 독서후기를 쓸 날도 오게 되려나 어쩌려나 두고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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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렵다

투덜일기 2009. 11. 6. 16:45

어제 친구 아버님의 부음을 듣고 밤에 문상을 다녀왔다. 작년에 엄마를 여의고 1년 반만에 다시 아버지를 여읜 그 친구에겐 언니오빠가 다섯이나 되는데도 부음을 전하는 전화를 끊으며 퍼뜩 든 생각은 <고아>라는 말이었다. 엄마아빠 다 돌아가셨고 비혼이니 아이는 아니어도 고아인 셈이라는 생각이 든 거다.
여러가지 병치레로 요즘 특히 고통을 겪고 있는 왕비마마가 걸핏하면 빨랑 아버지 따라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부를 때 내가 버럭 소리치는 말도 비슷하다. <엄마도 없으면 나더러 고아로 살란 말이야?!>
나이 사십이 넘어서도 부모가 없으면 고아로 느껴지는 유아적 사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는 자책감에 새삼 네이버 국어사전을 뒤져보니, <부모가 없는 아이> 말고도 두번째 뜻에 <북한어] 예전에 어버이를 잃은 상제가 스스로를 이르던 말>이라고 돼 있다. 
나 혼자만의 생각은 아니었다니 한편으로 위로가 되지만, 그래도 역시나 <고아>라는 말은 너무 외롭고 쓸쓸하다. 어젯밤엔 문상을 다녀와 잠든 엄마의 어깨 위로 이불을 올려주며, 성질 좀 죽이고 좀 더 다정한 딸이 되어야지 결심했는데, 만 하루도 못돼서 오늘 계속 왕비마마랑 티격태격했다. 종종 정적속에 입다물고 혼자 있는 걸 즐기는 딸과, 온종일 틀어놓은 TV소음을 배경으로 치덕치덕 붙어서 만지고 얘기하길 원하는 엄마의 조합은 늘 어렵다. 
원래부터 오늘 약속이 있어서 외출해야 하는데, 왕비마마는 또 화난 딸의 임시 가출로 여길 게 뻔하다. 특별히 잘못한 것 없는데도 서로에게 뾰족한 말을 날리게 되는 이런 날엔 그냥 침묵의 시간이 약이란 걸 왕비마마는 왜 모르실까. 이럴 때마다 좀머씨가 생각난다. 나를 좀 제발 그냥 내버려두란 말이야!!
그 딸 참 못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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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지

삶꾸러미 2009. 5. 10. 16:23

이 제목을 보고 사람들은 제일 먼저 어떤 뜻을 생각할까?
대부분은 <진지하다>의 어간인 진지를 떠올릴 것 같고, 군대와 관련된 직업인이나 갓 제대한 이는 부대에 꾸려놓은 진지를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지금 하려는 얘기는 <밥>의 높임말인 순우리말 <진지>다.
숫기가 없던 나는 어렸을 때 <진지 잡수세요>, <진지 잡수시래요>라는 말이 그렇게 하기 어려울 수가 없었다.
끼니 때가 되었는데 마침 할아버지가 마당에서 나무를 손보시거나 집 한켠에 비닐로 덮어 마련한 새장에서 새들을 거두고 계시면 할머니나 작은엄마, 우리 엄마는 꼭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가서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라고 해라."
그러면 당연히 큰딸인 내가 할아버지를 불러와야하는 것처럼 동생들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는데, 퍽 자주 있는 일임에도 나는 저 말이 좀체 입에서 떨어지질 않았다. 하지만 웅얼웅얼 쭈뼛거렸다간 할아버지한테 혼쭐이 날 수도 있기 때문에 여러번 심호흡을 한 다음 눈을 질끈감고 어렵사리 말하곤 했다.
"할아버지, 진지 잡수시래요."
그러고는 그 어려운 말을 혹시라도 잘못 발음한 건 아닐까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른 후다닥 집안으로 도망치듯 들어오기 일쑤였다. 나중에 좀 머리가 굵어지고 나서는 나름대로 머리를 써서 <진지 드시래요>로 좀 바꾸기도 했다. <진지>도 어렵지만 <잡수시다>라는 존칭어가 더 어려웠던 모양이다. 그러다 대학생쯤 되고 나선 더 영악해져 <진지>라는 말을 아예 빼버리고 <할아버지, 점심 드세요> <저녁 드세요> 그렇게 내 마음대로 바꾸어 썼다. 어른 공경에 관해서는 몹시 엄하셨던 터라 어른에겐 뭐든 먹을 것을 권할 때 <잡수세요>라고 해야한다고 어려서부터 귀에 못이박히게 잔소리를 하셨던 할아버지도 그 즈음엔 기력이 쇠하셨던지 별 타박없이 "알았다"고만 대답하셨다.

늘 지나고 나서 후회하는 인간이긴 하지만, 나조차 쓰기 어렵다고 바꿔쓰고 외면했던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요즘은 더욱 듣기 어렵다는 생각에 자꾸 안타깝다. 마흔이 넘어서까지도 아버지에 대한 호칭을 유아어인 <아빠>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집안에선 거의 반말을 썼던 내가 아버지 생전에 직접 진지 잡수시라고 제대로 된 높임말을 썼을 리 없다. 그나마 나도 끼니때 조카들에게 심부름을 시킬 때 <할아버지 진지 드시라고 해라>고 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생각은 해보지만 영 자신이 없다. 늘 하던대로 <저녁 드시라고 해라>고 말했을 가능성이 너무 높으니까.
요샌 너도나도 <식사하다>라는 말을 아무때나 쓰고 있긴 한데, 난 또 그 말이 왜 그리 싫은지 모르겠다.
호감이 갔던 사람이라도 그 입에서 "식사했어요?" "식사하셨어요?" "식사하셔야죠?"라는 말이 흘러나오면 난 순간적으로 오만정이 다 떨어짐을 느낀다. 더불어 <식사시간>이란 말도 싫다. 그냥 점심시간, 저녁시간, 이라고 하면 좀 좋은가. 서류로 만든 일정표 따위엔 어쩔 수 없이 <식사시간>이라는 말을 쓴다고 하더라도 흔히 쓰는 말로는 어울리지 않는다는 게 나의 편견이다. 

물론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 저렇다는 것이고, 현실에서 나의 언어생활은 여전히 상스럽다. 엄마에게 툭툭 던지는 반말은 친근함의 표현이라 극구 주장하며, 화난 거 티 낼때만 엄마에게 존댓말을 쓴다. 평소엔 아무 생각없이 "엄마 밥 먹어!"와 "엄마 저녁 드셔!"를 거의 반반씩 쓰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이럴진대 조카들이 <진지 잡수시다>라는 말을 연습할 가능성은 더욱 낮아질 수밖에 없다. 그 옛날 거의 매일 그 어려운 말을 입에올려야했던 나도 좀체 입이 떨어지지 않았거늘 우리 조카들은 오죽할까. 그래서 얼마 전부터 의도적으로 우리 집에서나마 <진지>와 <잡수시다>라는 말이 사장되지 않도록 써보리라 마음은 먹었는데, 열두살이 된 큰조카는 단 1초도 고민없이 이미 내가 예전에 했던 말바꾸기를 실천한다. 가령 내가 "할머니 과일 잡수시라고 해라"고 하면 공주는 "할머니 과일 먹어!"라고 외친다는 얘기다. -_-;;
나 역시 애써 생각하고 노력하지 않으면 예전처럼 지금도 그 말들이 좀체 입에서 나오질 않으니, 무작정 조카를 나무랄 수도 잔소리를 할 수도 없다. 이제부터라도 내가 먼저 상스러운 반말을 줄여나가는 수밖에. 이따 저녁때는 기필코 엄마에게 이렇게 말해볼 작정이다. "엄마 저녁 진지 잡수셔." 반말과 높임말의 어중간한 형태라 요상해도 어쩔 수 없다. 갑작스레 극존칭 어미를 쓰면 왕비마마는 늙은 딸이 또 화난 줄 오해할지도 모르니까. 흐흐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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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

투덜일기 2009. 5. 4. 16:52

집주변에 장서량이 훌륭하고 시설도 좋은 도서관이 있다는 말을 들으면 몹시 부럽다.
그나마도 근방에 도서관이 아예 없는 이들도 있겠지만, 원래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이니까.
원래 빌리고 빌려주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더욱이 빌린 책은 괜스레 남는 게 더 없는 느낌이라 읽기 전부터 허기가 든다. 이미 뇌조직이 느슨해진 것인지 뭐든 읽고 나면 책장을 덮는 순간부터 아스라이 잊혀지는 마당이라 더욱 그럴 것이다. 책등에 적힌 제목이라도 가끔 보면 아하 저런 책을 읽었던 적이 있었지, 기억을 되살릴 수 있지만 빌려 읽고 난 책은 흔적도 없으니 도무지 내것이라 챙겨 놓을 방도가 없다. 꼼꼼히 다이어리나 독서노트, 독서후기 따위를 쓰는 기록형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아직도 예전에 사놓고 안읽은 책들엔 먼지만 쌓이는데 새로운 책을 사고싶은 마음이 들어 또 몇권 사들이고도 얇은 귀를 팔랑이며 누가 인상깊게 읽었다고 하는 책은 또 욕심이 나니 하는 수 없이 이젠 도서관에서 좀 더 많이 책을 빌려 읽기로 마음을 먹었다. 좋아서 읽고 싶은 책 말고 일 때문에 필요한 자료 책들은 예전부터 빌려보았기 때문에 대출카드도 만들어둔 지 오래다. 그래도 여전히 빌려 읽는 책들은 새책이어야 읽을 마음이 생긴다. 대체 어떤 인간들이 만졌을지 모를 흔적들이 그다지 깨끗하지 않게 남아 있는 책에 내 손길을 보태기가 영 꺼려지기 때문이다. 공부 때문에 학교 도서관에서 빌리는 책들엔 짜증스럽게 줄까지 쳐 있어도 그다지 더럽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는데, 좀 이상한 강박증이다. 그땐 저작권 문제에 아무 거리낌 없이 복사나 제본을 해서 봤기 때문일까? 그냥 읽어보기만 한 책도 더러 있었는데... 아무튼 헌책방에서 구한 오래된 책은 이제 내것이란 소유의 심리 때문인지 누렇게 변했어도 꺼림칙한 생각이 들지 않으면서 도서관 책은 좀체 적응하기가 어렵다. 뭐든 새것만 추구하고 좋아하는 마음을 버려야 할 텐데, 난 아직도 멀었다는 얘기다.
반성은 반성이고 아무래도 찜찜한 마음을 버릴 수가 없던 차에 좋은 방법을 찾아냈다. 아직 도서관에 들어오지 않은 책을 신청하는 것! 그러면 책이 들어오자마자 제일 먼저 빌려가라고 문자메시지가 온다. 책에 바코드를 붙이고 도장을 찍은 도서관 직원들 말고는 아직 그 책을 주물럭거린 사람들이 드물다는 얘기니까 거의 새책이다. 문자 메시지가 오면 이틀 안에 찾으러 가야하는 번거로움을 이기는 것이 나 같은 게으름뱅이에겐 꽤나 큰 도전(?)인데 그래도 도서관 책이면서 내가 처음 책장들을 펼친다는 착각에 훨씬 마음이 놓인다. 어쩌면 빌린 책으로도 구멍 뚫린 두뇌에 좀 더 깊은 인상을 새길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도 생겼다.

오늘은 그렇게 빌렸던 책을 반납해야 하는 날이라고 또 문자메시지가 오는 바람에 도서관엘 갔는데 2주 전 비오는 날엔 초록 잎도 제대로 눈에 안들어 왔던 등나무에 연보랏빛 꽃이 잔뜩 매달려 있었다. 그 등나무꽃 아래엔 흡연자들을 위한 벤치 한두 개밖에 없었지만, 옛날 학교의 등나무 아래 벤치가 떠오르며 그리움으로 가슴이 잔뜩 부풀었다. 바야흐로 5월, 축제의 계절이겠구나 싶어서.
시설은 노후했고 책도 별로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동네 산기슭에 자리잡은 터라 위치는 좋은 편이니 다음엔 아카시아 꽃 향기 그윽할 무렵 또 도서관엘 가봐야겠다. 아직 도서관에 들여놓지 않은 주옥같은 책이 뭐가 있을까 열심히 찾아 신청도 해놓고.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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