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성'에 해당되는 글 33건

  1. 2011.01.07 그놈의 공부 20
  2. 2011.01.02 '-대'와 '-데' 10
  3. 2010.12.31 2010 한해 정리 16
  4. 2010.11.01 11월 13
  5. 2010.10.13 양치기 중년 9
  6. 2010.09.24 유리 6
  7. 2010.09.01 허리와 커피 5
  8. 2010.08.04 심기일전 16
  9. 2010.07.27 장래희망 6
  10. 2010.07.21 방향감각의 한계 9

6년 전, 첫째 조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공주의 부모들 뿐만 아니라 온 가족이 노심초사했다. 유치원엔 무려 세살부터 다녔지만 선행학습 따윈 부질없는 짓이라 여겨 한글도 입학 직전에 3개월 속성으로 겨우 깨친 조카와 달리, 다른 아이들은 책을 줄줄 읽는 정도를 넘어 독후감까지 거침없이 쓴다는 '소문'에 바짝 얼었던 거다. 염려했던 대로 12월 생이라 또래보다 좀 늦된 조카의 초반부 학교생활은 퍽 힘겨웠고 아이는 가엾게도 무책임한 공교육과 매정한 담임에게 마음의 상처를 꽤 입었다. 별달리 문제가 있는 게 아닌데도 단지 개성이 강하고 고집스러운 아이를 교사들이 무조건 '사회적응 장애'로 몰아세운다는 사실을 우리도 비로소 깨달았다. 몰개성하고 유순한 규격품을 만들어내는 것이 교육 목표가 되어선 안된다는 걸 교육자들은 정말로 모르는지 화가 치밀었지만, 별 뾰족한 수는 없었다. 이후 초등학교에 입학한 조카들의 경우엔 어느 정도 미리 '준비'를 하는 것으로 교훈을 삼을밖에. 
 
어쨌거나 여전히 개성 넘치는 성격으로 잘 자라준 조카가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있는 이 시점에서 우리 가족들은 또 다시 불안초조하다. 요즘 중학교는 또 어떤 난관으로 아이를 힘들게 할까 싶어서 말이다. 흔히들 초등학교에서 중학교로 넘어가는 시기를 잘 보내야 '공부 잘하는' 아이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하는데, 그런 건 바라지도 않는다. 공부 재능도 운동신경처럼 타고나는 거라고 굳게 믿기 때문이다. 다만 뭐든 '중간쯤' 하는 평범한 아이였으면 좋겠는데, 워낙 '미친 사교육 열풍'에 휩싸인 사회 분위기에선 그 '중간쯤'도 쉽게 하는 게 아닌 모양이다. 벌써 웬만한 아이들은 중학교 교과 과정을 미리 공부하느라 종합반엘 다니고 있다나 뭐라나.
 
까마득한 옛날 나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상당히 겁을 냈다. 내가 배정된 중학교는 국민학교부터 대학까지 거느리고 있는 '사립학교'였고, 그 사립 국민학교 출신들이 워낙 많아 수준이 상당히 높다는 소문이었다. 아주 뛰어나진 않아도 '나름 우등생'이었던 큰딸의 중학교 진학을 앞두고, 울 엄마도 주변에 조언을 구했는지 당시 진짜로 종로통에 있었던 '종로학원'에 영어와 수학 과목을 등록해놓았으니 새해부터 열심히 다니라고 나에게 말했다. 과외 한번 받아본 적 없는 내가 '학원'이라니 어린 마음에 바짝 긴장을 했던 기억이 있는데, 결과적으로 나의 사교육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 딱 새해부터 과외금지령이 내려졌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중학교 입학 전 겨울방학 내내 '잉글리시 펜맨쉽'이라고 적힌 공책에다 펜촉에 잉크를 찍어(!) 인쇄체와 필기체 대소문자 알파벳을 그려 연습하고 외웠을 뿐, 연일 동생들 데리고 스케이트나 타러 다니면서 팽팽 놀았다.

예전과 시대가 완전히 달라지긴 했지만 마음 같아선, 특목고다 뭐다 해서 어쩔 수 없이 입시광풍에 휩쓸리는 친구들을 목도하게 될 것이 분명한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조카에게도 '마지막으로' 실컷 놀라고 해주고 싶다. '고모로서는' 말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씩 조카의 영어공부를 봐주던 얼치기 과외선생으로선 걱정이 태산이다. 특히 영어과목에 대해선 요즘 부모와 애들이 얼마나 극성을 부리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어에 목숨건 아이들은 이미 방학을 맞아 캐나다다 호주다 필리핀이다 해서 어학연수를 가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영어학원에 다니는 초등학생들도 토익 수준의 단어를 하루에 스무개, 서른개씩 외운다던가. -_-; 그간 조카가 영어단어 외우기를 죽도록 싫어해서 (한글 맞춤법 좀 틀려도 말하는 데는 지장이 없지 않느냐는 것이 공주의 주장;; 애당초 나도 영어 거부증을 면하게 해주려고 철자 달달 안 외워도 된다고 타일렀다가 그만 발등 찍혔다 ㅠ.ㅠ) 그냥 내버려뒀던 나도 요번엔 고삐를 죄었다. 방학동안 초등학교 기본 영어단어라는 800개는 점검하고 넘어가자고 말이다. 이미 다 머릿속에 들어 있는 낱말이니까 잘 꺼내 쓰기만 하면 된다고 살살 달래보지만, 실은 나 역시 조카에서 속성 암기 기계가 될 것을 강요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러면서도 이게 과연 잘하는 짓인지 아닌지는 자신이 없다. 영어단어 외우라고 족치는 대신에 좋은 책이나 좀 읽고 곧 헤어질 친구들이랑 실컷 놀러다니라고 조언하는 것이 옳지 않을까.

모든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 건 절대 불가능한 일인데, 왜 다들 공부공부 미친 타령을 해대고 있는지 안타까운 노릇이다. 나부터도 공부라면 학을 떼겠는데! (쌘이와 미아를 비롯해 아직 공부에 매진하고 있는 친구들 진심으로 존경스럽다;;)  그 옛날의 나와 똑같이 대체 왜 써먹을 데도 없는 어려운 수학이랑 과학을 공부해야 되느냐고 묻는 조카에게 나 또한 "살아가는데 다 필요하기 때문"이라고 뻔한 대답을 해주며 한숨이 나왔다. 영어권 나라로 여행 가고 싶으면 고모를 데려가거나 영어를 잘하는 친구랑 가면 되고, 어차피 프랑스에선 영어로 해도 안 통한다며? 라고 항변하는 조카에겐 이미 영어공부의 당위성도 없어서 말문이 막힌 내가 "꼴찌는 하면 안 되잖아!"라고 윽박질러놓긴 했으나 과연 조카의 속성 단어암기 프로젝트도 성공리에 마무리될지 모르겠다. 으휴. 꼴찌 좀 하면 또 어떻다고... 그 역시 학창시절의 재미난 추억이 될 거라 여기면 좋을 텐데, 부지불식간에 꼴찌는 곤란하다고 튀어나온 걸 보면 나 역시 학력지상주의에 물든 속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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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와 '-데'

놀잇감 2011. 1. 2. 16:40

2011년 첫 포스팅은 과연 언제, 무슨 수다로 하게 될까 내심 궁금했는데 두둥, 우리말 얘기라니 고무적이다. ㅋㅋㅋ 새해연휴고 뭐고 역자교정에 힘쓰느라 허리가 휠 지경이긴 하나, 블로그질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요번 교정을 보면서 그간 내가 '잘못' 알고 있던 우리말을 또 하나 발견했다. 출판사에 친절하게 오타 지적하는 메일을 보내거나 게시판 글 올리는 독자들 가운데는 본인이 잘못 알고 있으면서 나무라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데, 지금껏 나도 역자교정하면서 틀리게 고쳐 되돌려 보낸 경우가 있을 정도로 찾아보지도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말이다. '-대'와 '-데' 가운데서 나는 말을 전달하는 경우 종결어미가 대부분 '-대'여야만 하고, '-데'는 '~하던데'나 의문형인 '왜 그러는데?'의 형태로만 옳은 용법이라고 '믿고' 있었으나 아니란다. 켁. 그동안 블로그 돌아다니면서 '~~했데'라고 쓴 걸 보면 눈쌀을 찌푸리며 폄하했는데, 내가 틀렸다는 얘기! 

-대: '-다고 해'의 준말. 직접 경험한 사실이 아니라 남이 말한 내용을 간접적으로 전달할 때 쓰인다.
예) 저 사람 아주 똑똑하대.
     철수도 오겠대?

-데: 과거 어느 때 화자가 직접 경험한 사실을 현재의 말하는 장면으로 그대로 옮겨와 보고하듯이 말할 때 쓰이는 말로 '-더라'의 의미다.
예) 걔가 오늘 약속 못 지키겠데!
     그 사람 집이 시골이데. 

사실 예문을 보아도 하도 오래 잘못 알고 있었던 터라 아래 문장들은 눈에 몹시 설다. -_-; 요는 전달하려는 사실이 직접 경험인가 간접 경험인가의 차이다. 이렇게 여기 적어두기까지 했으니 앞으론 헷갈리지 말아야지. 수십년간 책 읽으며 종결어미 '-데'를 오타라고 생각했던 과거 모든 착각의 순간을 또 한번 반성한다. 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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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한해 정리

놀잇감 2010. 12. 31. 17:30

올 한해는 여러모로 정리정돈이 제대로 되지 않은 혼돈의 1년이었다. 그래서 한해의 마지막 날에라도 정리를 잘 하고 넘어가면 내년을 좀 더 쓸모있고 알차게 보내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후다닥 목록을 만들어본다. (실은 2010 베스트 포스팅 하고 싶어서 자꾸 블로그에 쏠리는 마음을 다잡아 보려는 의도다. 한해 마지막 날까지 원고독촉 전화를 받는 진상 떨기는 부디 오늘 날짜로 버리고 가면 안되겠니.)


2010 최고의 영화 3
토이스토리 3
인셉션
하하하

세편 모두 영화보고 와서 후기를 올렸으므로 긴 설명 생략; <토이스토리3>은 보자마다 올해 최고의 영화로 꼽힐 거라고 장담했고, 연이어 본 <인셉션>도 최고다 싶었다. 하반기엔 영화구경도 잘 안다녔던 터라 나머지 한편을 뭘로 꼽나 걱정스러워 나다 프로포즈에서 오늘 4시에 하는 <옥희의 영화>를 보고 나서 베스트 세 편을 뽑을 작정을 열흘쯤 전에 했으나 결국 이렇게 집구석에 있다. 영하 12도에 어딜 나가느냐고! -_-;


2010 최고의 전시 3
앤디 워홀의 위대한 세계
샤갈 전
아시아 리얼리즘 전

올해는 전시회도 그리 많이 안 다녀서 최고의 전시 셋을 간신히 꼽을 정도다. 대체 뭘 하며 산 거냐. 역시나 각 전시후기를 포스팅했으므로 긴말 생략.


2010 최고의 드라마 3
파스타
셜록
시크릿 가든

누군가는 주방에서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는 요리사가 정신병자 같다고 혹평했지만 나는 올초 <파스타>를 보며 오글오글 손발을 움켜쥐면서도 유경이랑 세프 때문에 진정 행복했다. 둘의 사랑에, 특히 유경의 솔직한 사랑법에 갈채와 응원을 보냈고 음식 만드는 장면이 나올 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신나게 봤다. ^^; 그 뒤론 오래도록 마음 붙이고 열광하며 볼 드라마가 눈씻고 찾아봐도 잘 없어서 어찌나 한탄스럽던지... 그러다 연말에 겨우 세편의 에피소드로 나의 마음을 빼앗은 영국 드라마 <셜록>과 아직은 끝나지 않았으나 여러가지로 마음 불편해지면서도( (최철원과 김주원을 동일시하지 않으려고 마인드콘트롤이 필요했고, 안하무인 개싸가지 김주원의 몇몇 행동은 확실히 계속 문제다) 중독된 듯 주말마다 본방사수하고 있는 <시크릿 가든> 덕분에 목록이 완성됐다. 생각해보니 이 셋 말고는 꾸준히 본방사수한 드라마가 없는 듯; 

아.. 사진 규격 안맞아서 속상하다. +_+ <파스타>는 공효진이랑 이선균만 나온 예쁜 사진 찾기가 하늘의 별따기라 지쳐서 포기. <셜록>은 크리미널 마인드, CSI, 멘탈리스트를 뭉뚱그려놓은 듯한 천재 탐정 셜록과 왓슨의 명콤비도 일품이지만, 런던 시내 곳곳이 배경으로 나오는 게 참 좋았다. 시즌2를 눈빠지게 기다릴 작정이다. 마지막으로 <시크릿 가든>에서 나는 김주원과 길라임이 눈으로 대화하는 저 장면이 제일 좋았다(아직 완결되지 않았으나 더 좋은 장면이 과연 나올까? @.@). 하지원과 현빈이 아니고서야 이렇게 말도 안되는 스토리로 이렇게 놀라운 인물을 표현해낼 수 있었겠느냐고 볼 때마다 감탄한다.  

2010 최고의 지름 3
1. 일본 온천료칸 체험: 왕비마마 보필은 너무 힘들었지만 파트너를 달리해(이왕이면 친구들과) 또 가고 싶다. 
2. 실내용 자전거: 과거 옷걸이로 전락했다 버려진 전적이 있으나 요번엔 계속 사용중이라는 데서 점수 획득
3. 아이폰: 정액요금과 기기값, 부가세 포함 6만원을 넘는 요금 때문에 (이전엔 3만원 전후였는데!) 아깝고 후회스러운 구석이 있기도 하지만, 지난번 모니터 망가졌을 때 아이폰 없었으면 어쩔 뻔 했나 싶을 정도로 열심히 인터넷 검색에 사용했고 잘 듣지 않던 음악도 아이팟에 넣어놓으니 틈틈이 듣게 된 변화를 생각하면 잘 질렀다고 여길란다. ㅋ

2010 최고의 사건 3
1. 요가강습 1년 달성: 그렇다. 아직도 이 엄동설한에 추위를 뚫고 요가학원엘 다니고 있다. 작년 11월에 시작했는데 맙소사. 내가 1년 넘게 무언가를 꾸준히 한다는 게 정말 놀랍다. 다 조카 덕분이긴 하지만, 내년 중학교 입학을 앞두고 요번 겨울방학이 마지막이 될 거라는 예감이 든다. -_-; 
2. 마감일 어기기 최고 기록 6개월: 한두달도 아니고 서너달도 아니고 무려 6개월이나 마감일을 어긴 건 16년째 번역인생에서 처음이다. 기록깨기 도전은 절대 안될 말이고, 다시는 이 기록에 근접하지도 않기를. 
3. 파랑이랑 친해지기: 아직도 다른 개와 동물에 대한 공포는 사라지지 않았지만 조카네 개 파랑이의 끈질긴 구애와 추근댐 덕분에 이젠 녀석을 쓰다듬어주는 수준을 넘어서 무릎에 올려 안아줄 수도 있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먹을 것을 손바닥에 놓아 먹일 수(!!!)도 있게 되었다. 애완견 혐오자로서 배신의 행위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일대 사건이라고 스스로도 생각한다. 

2010 최고의 업적(?)
올해는 번역서가 네 권(이 가운데 둘은 두권짜리 장편이라 역자교정에만 몇주일이 걸리기도 했다;;) 출간되었고, 번역 작업을 한 책은 무려 6권(물론 지금 이 순간도 마무리 중이지만 ㅠ.ㅠ) 이다. 
공장에서 물건 찍어내는 것도 아니고 평균 두달에 한 권 작업이라니 이 무슨 어이없는 짓인가 싶지만, 다 작년에 게으름을 부린 탓에 밀리고 밀린 작업이 맞물려 돌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 와중에 어떤 책은 계약 마감일을 무려 6개월이나 어기기도 했다. 그러니 이건 업적이 아니라 만행이라고 손가락질 받아 마땅하지만, 스스로 업적이라고 믿어야 내년을 성실히 준비하며 자괴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고도 아직 나를 악덕 번역가로 매장시키지 않은 출판관계자분들에게 감사와 사죄의 인사를 보낸다. (그렇지만 그들이 여기 와보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2010년에도 최고의 공연최고의 음반은 꼽질 못했다. 공연은 아예 보러간 게 없고 (그나마도 예매한 유일한 콘서트였던 플라시보는 공연이 취소됐다. -_-;) 음반은 딱 네 장 샀던데 어쩌라고... 억지로 스팅의 Symphonicities를 꼽아볼까도 생각했지만, 솔직히 나는 신선한 느낌의 Roxanne 말고는 예전 편곡이 대체로 더 좋은 것 같다. 2011년엔 나도 최고 공연과 음반 목록에 넣을 수 있도록 분발했으면...

2010년을 한 마디로 말한다면
침몰 (또는 방황)
계속 이렇게 살면 정말 곤란하다. 자신감을 되찾을 것.

2011년 계획
삶의 '낙'을 좀 더 열심히 찾아보자.  _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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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투덜일기 2010. 11. 1. 12:14

변기에서 물이 샌다는 걸 처음 발견한 게 언제더라. 최소한 다섯달은 된 것 같다. 두달에 한번씩 나오는 상하수도 고지서의 금액을 두세번이나 예년과 비교하며 고민했으니 말이다. 처음엔 전달보다 만원쯤 더 많아진 금액을 보고도 여름이라 물을 많이 썼을 거라고 위로하며 넘겨버렸다. 그러다 급기야 두배를 넘어선 고지서를 받아들고도 계속 변기 수리를 미루기만 했던 데는 나름 핑계가 있었다.

우선은 동네 어귀에 있던 수리점이 문을 닫았다. 작년에 엄마네 화장실 수리하면서 받아둔 명함으로 곧장 전화를 걸었더니만 그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어디에다 연락해서 사람을 불러야 하나, 난감해진 나는 에라 모르겠다 잠시 잊어버리는 쪽을 택했다. 고요한 밤에 유독 크게 들리는 졸졸 새는 물소리를 들으면 양심에 가책을 느끼고 (물부족으로 먹는 물도 없어 병에 걸리는 사람들이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은데!) 퍼뜩 인터넷으로 변기 출장수리 회사를 알아보긴 했지만, 너무 거창한 느낌이 들어 꼬리가 내려갔다.

그러고 또 그간 너무 바빴다. 대체 마감중이 아닐 때가 언제 있었느냐고 주변에서 퉁박을 주기는 하지만 밀린 일들이 차곡차곡 쌓여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는 상황이라 심적으로 어찌나 부담이 됐던지 화장실 변기 수리 따위는 우선순위에서 멀찌감치 밀려나고 말았다. 차라리 변기로 이어지는 수도를 잠가놓고 물을 받아 붓는 쪽을 택하거나 엄마네 화장실을 다닐망정, 사람을 불러 견적을 받고 수리를 맡기는 번거로운 절차를 회피했던 거다.

그러다 문득 오늘 우편물 꺼내러 현관에 내려갔더니 문앞에 명함이 한장 떨어져 있었다. "@@누수탐지수리공사. 출장문의 환영." 유레카! 곧바로 명함을 집어와 전화를 거니 20분 만에 올 수 있다고 했고, 한시간도 지나지 않아 단돈 6만원과 커피 한잔 서비스로 모든 문제가 말끔히 해결되었다. ㅠ.ㅠ 이렇게 쉽게 해결될 일을 대체 난 몇달 간 끙끙댔던 것인가. 몇달 간 수리비보다 훨씬 더 많이 하수구에 흘려보낸 수돗물 값은 또 어떻고. 친절한 아저씨는 영수증을 끊어주며 수도사업소에 연락해서 팩스로 수리내역을 보내면 그간 더 낸 상하수도비를 얼마간 돌려받을 수도 있다고 권했지만, 내가 그런 어려운 일을 시도할 리가 만무하다. 그저 문제상황이 종료되었음이 기쁘고 감격스러울 뿐.

하나를 보면 열을 안다고 했는데, 요즘 나의 행태를 보면 매사가 이런 식이다. 뭐든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고민만 하다가 결국엔 계속 미루고 또 미루다 실행에 옮기는 건 하나도 없어 늘 쫓기는 사람처럼 전전긍긍. 머리맡이며 탁자에 읽다가 말고 (내가 지금 한가롭게 책이나 읽을 때냐!) 던져둔 책이 몇권이며, 이 블로그에도 쓰다가 말고 (시답잖은 신변잡기로 블로그질 할 시간에 일 한 줄이라도 더 하지!)  비공개로 남겨둔 글이 몇개던가. 한숨.

이렇게 어영부영 11월. 올해도 겨우 두달 남았다. 여름부터 질질 새던 변기 문제를 하루아침에 뚝딱 해결해주고 돌아간, 내게는 슈퍼맨 같았던 누수탐지수리공사 아저씨처럼, 어디론가 전화만 걸면 질질질 흘리고만 사는 내 인생을 바로잡아주는 해결사의 도움이 절실한 게 아닐까. 하기야 변기수리 하나도 어디에 전화를 걸어야 할지 몰라 헤맨 기간이 다섯 달이니 그마저도 요원하긴 하다. 우선은 어디로든 전화를 걸 마음부터 다잡아야 하는데, 이놈의 전화공포증이 어딜 가나 문제다. 난 왜 어디든 전화 거는 게 이리도 싫은지 원. 이것 봐라, 또 전화 핑계를 대고 앉았다. 온갖 핑계와 변명으로 점철된 이놈의 마감인생, 아침부터 얼굴이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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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치기 중년

투덜일기 2010. 10. 13. 16:08

몇달 전 가요계의 폐단을 지적하며 이하늘이 쓴 말인데, 유독 귀에 콕 박힌다. 물론 이하늘은 자기를 거짓말쟁이로 몰아넣은 방송국과 PD를 비난하는 맥락으로 사용한 반면, 내 경우는 스스로 민망한 거짓말쟁이가 되어 가시방석에 앉은 상황이다. 마감일을 질질 끄는 것이 이 업계 사람들의 고질병이라고는 하지만, 계약 마감일에서 무려 두세 달이 지난 뒤에도 일주일씩 계속 약속을 어기고 있는 내 모습을 보노라면, 정말로 막판엔 아무도 믿어주질 않아서 늑대에게 잡혀먹힌 양치기 소년이 떠오른다. 

편집 담당자들이 번역하는 사람들한테 연락해서 가장 흔히 듣는 거짓말이 "마무리중"이라는 변명이란다. 맞다. 최근들어 나도 몇번이나 써먹었다. 정말로 대강 초벌 번역은 끝났는데 골치아픈 퇴고를 앞두고 그런 말을 했다면 거짓말이 아니지만, 번역분량이 아직 엄청 남았어도 미안해서 차마 사실대로 털어놓을 수가 없으면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흘러나온다. 마무리 중이긴 한데... 어쩌고 저쩌고. 편집 일을 하고 있는 지인의 말을 들으면, 저런 구차한 변명을 그들도 다 알아차린단다. 이 인간 또 거짓말 하고 있구나, 하고. 하기야 거짓말이 아니라면 일주일, 이주일 차일피일 원고를 지연시킬 이유가 없겠지.

번역의 질은 둘째치고라도 마감일에 관한 한 '비교적 신용 있는' 사람으로 분류되었던 과거의 나는 이제 사라지고 없다. 조만간 고질적인 마감 어기기 대장이라는 악명을 뒤집어 쓰고 매장당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다. 이런 두려움이 없지도 않으면서 왜 도대체 매번 마감일을 못 지키고 악순환의 구렁텅이에서 허덕거리는지!? 나도 그게 궁금하다. 그렇다고 만날 팽팽 놀러다니기만 하는 건 아닌데 말이다. 발등에 불이 떨어져도 근거없이 느긋해져 배째라고 여기는 태도, 이것도 일종의 병인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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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리

투덜일기 2010. 9. 24. 03:19

부실한 왕비마마 덕분에 본격적으로 무수리의 삶을 산지 꽤 됐지만, 정말이지 가사노동은 '정'이 들지 않는다. 드물기는 해도 간혹 살림살이에 취미를 붙이고 호사스러운 그릇 사재기부터 집안 꾸미기를 즐기는 이도 없지는 않는 듯한데, 나로선 도무지 재미가 없는 게 살림이다. 특히 제일 싫은 건 뭐니뭐니해도 청소! 그 다음으로 요리, 설거지, 빨래의 순인 것 같다. 정리정돈도 뭐 잘하는 건 아니고...

암튼 먹고 살려면 어쩔 수 없이 해야하는 것이니 하기는 하는데, 나의 무의식이 끊임없이 가사노동을 거부하는지 어느 시점에 이르면 한계에 다다라서는 몇달에 한번은 꼭 사고를 친다. 청소를 하다가 뭔가를 망가뜨린다거나, 그릇을 깨는 정도의 사고이긴 하지만, 지나고 보면 늘 깨닫는다. 하기 싫은 일에 성질 부리다가 애먼 살림살이만 아작냈구나, 하고.

일주일 전에도 냉장고에서 반찬 꺼내다가 유리 밀폐용기를 떨어뜨렸는데, 오늘 또 설거지를 하다가 유리 그릇을 놓쳐 바닥으로 투하시키고 말았다. 지난번엔 내용물까지 있었어도 깨진 유리조각 치우기를 사고 없이 마쳤건만, 오늘은 역시나 조심하느라고 했는데도 두 군데나 손을 벴고 조금 전 밤참 챙기러 부엌에 갔다가 또 덜 치운 유리조각에 발가락도 살짝 찔렸다. 깨진 유리를 치우다 다치는 건 종이에 베는 것만큼이나 내가 미리부터 두려워하는 일이라 퍽 조심을 하는데도, 오늘은 심히 부주의했다는 의미다.

유리란 놈이 참 교활해서 깨지며 튀긴 범위가 빤한 것 같지만, 파편조각을 치우다 보면 그렇지가 않다. 도저히 날아갔을 것 같지 않은 곳까지 버젓이 반짝거리는 유리파편이 숨어 있는 경우가 많다. 해서 구석구석 죄다 치운다고 하느라 했는데 마지막에 방심해서 키친타월을 너무 세게 잡았던 것이 문제였고, 그러다 보니 또 빠뜨린 유리조각이 남아 발가락까지 공격당하고 만 것. 다행히 발가락은 무딘 놈이라 찔리고도 피 한방울 닦고 나니 멀쩡한데, 엄지와 검지는 움직일 때마다 불편해서 작은 밴드를 붙여야 했다.

워낙에도 좀 덜렁거리는 인간형이지만 일주일 만에 유리그릇을 또 깨뜨렸다는 건 마감을 핑계로 나의 가사노동 혐오증이 극에 달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므로, 손까지 벤 건 그에 대한 반성이 필요한 시점이라는 하늘의 뜻인가? 미신 따위는 코웃음치면서도 막상 심통 부리다 퉁박을 맞듯 작은 사고를 내고 나면 뜨끔하다(특히 엄마한테 버럭 소리지르고 나면 꼭 뭔일이 생긴다 -_-;). 어쩌면 못난 자신에 대한 무의식적 응징이거나 제발이 저려 발생하는 실수일지도? 유리에 베긴 했어도 아주 슬쩍 보일듯 말듯한 상처로 그쳤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오늘의 반성일기 끝.

착하게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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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리와 커피

투덜일기 2010. 9. 1. 18:13

이틀 전 아무 이유 없이 허리를 비끗했다. 무거운 걸 든 것도 아니고 갑자기 몸을 깊이 수그린 것도 아니다. 그냥 외출하려고 손을 뻗어 소파에 있던 가방을 집어들려던 것 뿐인데, 순간적으로 몸이 좀 이상했다. 과거에 허리를 삐끗하거나 어깨 같은데 담이 들릴 때는 외부로 들릴 만큼은 아니라도 몸 어딘가에 무리가 갔음을 직감할 수 있는 '우드득' 또는 '휘청' 하는 소리가 나에게만은 들렸던 것 같다. 그런데 이번엔 그렇지가 않았다. 아무 소리도 느낌도 없이 손을 뻗었을 때와 손을 거두었을 때의 몸 느낌이 달랐을 뿐이다. 심한 이상은 아니라 앉아 있거나 누워있거나 할 땐 거의 멀쩡하지만 자세를 바꿀 때가 문제다. 특히 엉거주춤 구부리는 동작은 코미디가 따로 없다. 가장 괴로운 건 볼일 볼 때. -_-'' 주변에선 빨리 병원엘 가든지 한의원엘 가라고, 하다못해 파스라도 붙이라고 성화지만 내가 어디 그런 사람인가. 며칠 지나면 나아질 거라면서 그냥 버티는 중이다. 확실히 상태가 어제 다르고 오늘 달라서 화장실 다닐 때와 잠자리에 누울 때 많이 수월해졌음을 느낀다. 앉아서 일할 때는 거의 불편함을 모르겠고... 어쨌거나 또 요가수업 빼먹을 핑계가 생겨서 기뻤다. 이젠 요가를 빼먹어도 돈도 아깝지 않은 단계에 접어들었다. 조카한테 민망할 뿐.

원두커피가 떨어져서 이번에도 같은 원두를 살까 하다가, 마음을 바꿔 공정무역 커피를 주문했다. 그간 양심에 찔리면서도 가격이 두배가 넘는 데다 입맛에 맞는 걸 찾으려면 또 몇번 시행착오를 겪어야 하기 때문에 망설였다. 원두는 금방 볶은 걸 조금씩 사다가 일주일 내로 먹어야 제격이지만, 방구석 붙박이로 사는 나로서는 그냥 대용량을 사서 며칠 간 신선한 원두커피를 즐기다 남은 원두는 얼른 냉동보관했다가 조금씩 꺼내 갈아먹는 수밖에 없었다. 그간 주문해 먹던 원두는 1kg에 3만6천원. 이것저것 사먹어 보니 내 입맛엔 풀시티로스트로 좀 진하게 로스팅한 남미산 커피가 맞는다는 걸 깨달았고, 가격대비 만족도도 몹시 높았다. 주문한 뒤에 로스팅해 보내주는 원두를 이틀 쯤 뒤에 받아 에스프레소를 추출하면 정말로 향기가 온 집안 가득 그윽하게 퍼진다.

어쨌든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곳도 주문 하면 그제야 볶아서 배송해준다니 원두만 잘 고르면 될 듯했는데, 똑같이 콜럼비아산 아라비카 커피를 두 종류로 시켰는데도 오늘 도착한 원두를 설레는 맘으로 갈아서 커피를 만들어 보니 맛이 없다. -_-;; 개인적으로 나는 신맛이 강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데 향도 그윽함이 덜하고 맛은 전체적으로 시큼털털하다. 공정무역 커피를 파는 곳도 여러군데이니 계속 양심적인 커피를 마시려면 로스팅을 좀 더 잘하는 곳을 찾아봐야한다는 뜻이다. 구매자 후기 읽어보니 다들 '맛'보다 '공정무역'에 방점을 두고 산 듯했는데 그걸 간과한 내 잘못이다. 227g에 만오천원씩, 두 봉지 다 맛이 없다니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다. 하나는 성공할 줄 알았건만... 솔직한 마음으론 공정무역이고 양심이고 다 관두고 그냥 예전에 주문하던 데다 다시 원두를 주문하고 싶다. -_-; 변변한 낙도 없는 삶에서 커피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데... 결국엔 커피 업체를 잘못 고른 나의 잘못인데도, 공정무역 커피는 별로 맛이 없다는 쪽으로 자꾸 편견이 자리를 잡으려 하기에 이렇게 또 끼적이고 있다. 자꾸 마셔보면 신맛에도 길들여지려나... 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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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기일전

투덜일기 2010. 8. 4. 20:15

덥고 습하고 불쾌지수는 하늘을 찌르고 몸은 쳐지면서 일은 몹시 바쁜 궁극의 구렁텅이에서 헤매느라 너무 짜증만 부렸다는 생각에 심기일전 용으로 그간 좋은 일을 꼽아본다.

7월 중순 즈음 번역 인생 50권째 책이 나왔다. 출간된 번역서가 100권 되는 날부터 옮긴이 약력에 '100여권의 책을 우리말로 옮겼다'는 문구를 넣으려고 작심하고 있었으나, 이 추세로는 어쩌면 100권 이전에 이 일을 작파하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번역서 50권 기념'을 홀로 자축했다. 15년전 첫해엔 딱 한권이 나왔고 중간에 2, 3년은 늦은 공부한답시고 일을 거의 못했으니 15년간 50권이면 게으름뱅이라고 심히 자책할만 한 수준은 아니라는 자평을 내렸다. 엎어진 책들과 앞으로 나오게 될 책까지 감안하면 심지어 칭찬해줄 만 하다.

상반기를 마무리하며 전에 없이 맥이 빠졌던 이유는 '유사이래 최대불황'이라는 출판계 넋두리가 새삼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원숭이 줄타기 원칙이 무색하게도 예년과 달리 번역 의뢰 전화와 계약건수가 엄청나게 줄어 밀린 일 말고는 7월 초까지도 하반기에 새로 잡힌 일이 하나도 없어 위기감을 느껴야 했다. 가뜩이나 일도 하기 싫던 차에 '이 길이 아닌가벼' 하며 다른 일을 모색해야 하나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마감에 허덕이는 사이 새로운 일감이 밀려들었고 어느새 하반기 작업 스케줄이 모두 채워졌다. 믿을 수 있을지는 지내봐야 알겠지만 구두상으로는 내년 초까지도. 목구멍이 포도청이라고, 위기감에 허덕이다 고비를 넘기자 감사하는 마음이 생겨나며 열심히 자신을 채찍질해 게으름을 쫓아내고 있다.

0.1퍼센트의 가능성도 없다고 확신하지만, 얼결에 모 번역문학상 심사를 신청했다는 출판사의 이야기를 들었고 (사실 아무나 다 신청할 수 있는 것 같다) 내가 보기엔 그럴만한 책이 전혀 아님에도 일단은 그런 논의에 끼어들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 놀랍고 흡족하다. 번역기계가 된 느낌으로 안일하게 작업하던 와중에 그 소식을 들으니 한동안은 시시한 문장 하나도 허투루 넘기지 못하고 끙끙대며 고민했다. '상' 여부와 상관없이(오히려 나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거 싫다)  남은 번역인생에서도 좀 더 치열한 자기검열의 동기가 되겠다 싶다. 

음.. 억지로 꼽으려니 좋은 일이 또 뭐가 있는지 잘 떠오르질 않는다. 다음달로 약정이 끝나는 휴대폰이 드디어 맛이 가고 있다는 건(확인과 취소 버튼이 잘 안눌러지고, 아무때나 수시로 꺼진다 -_-;;) 좋은 일인가 나쁜일인가. 나 또한 스마트폰의 대열로 접어들 것인지 말것인지, 그렇다면 기종은 뭘로 할 것인지, 스마트폰은 관두고 그냥 예쁘기만 하고 기능이 단순한 휴대폰으로 바꿀 것인지 행복한 고민중이다. 휴대폰 추천 환영. ^^; 

쓰고 보니 다 재수없는 자기 자랑인 듯 하여 민망함이 밀려들긴 하지만, 어차피 심기일전을 위해선 나에게도 필요한 부분이다. 앞으로는 더 좋은 일 신나는 일만 생겨나서 계속 이 목록을 늘려나갈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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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래희망

하나마나 푸념 2010. 7. 27. 22:24

넌 꿈이 뭐니?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니?
어른들이 습관적으로, 그리고 요즘은 강박적으로 아이들에게 던지는 저 질문은 내가 어린 시절에도 종종 들었던 말이다. 그때마다 나 역시 생각나는 대로, 선생님, 외교관 정도의 '모범적인' 대답을 하긴 했지만 질문을 던지는 어른이나 대답하는 나나 특별히 진지하게 생각하고 고민해서 나눈 대화는 아니었다. 처음 만난 어른들이 괜히 할 말 없을 때 날씨 얘기, 시사 얘기 꺼내듯이 허투루  꺼내는 화제와 별 다를 게 없었다는 뜻이다. 20대 후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하고 싶은 일, 되고 싶은 직업이 뭔지 찾았다고 생각해 지금까지 달려오긴 했지만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의 꿈은 아마도 내가 남은 평생 선망을 품을 하나의 가능성이 아닌가 싶다.

헌데 가엾게도 요즘 아이들은 상황이 다르다. 자기 꿈이 뭔지, 뭐가 되고 싶은지 빠르게는 초등학생 때, 늦어도 중고등학생 시절엔 이미 목표를 정해 그 준비에 매진하지 않으면 '경쟁'에서 떨려난다고 믿는 어른들 때문이다. 뭐가 되고 싶은지 확고한 주장이 없으면 꿈도 야망도 없는 하찮은 아이로 손가락질 받기 일쑤다. 대학시절을 돌이켜볼 때 나는 지금도 그 때가 인생 최고의 황금기라고 여기며 4년 내내 거의 줄창 놀면서 새로운 것을 경험하며 보낸 추억을 곱씹는 반면, 요즘 대학생들은 신입생 때 이미 취업준비에 매달려 학점따기에 여념이 없다. 조교시절 내가 혹시 출석 확인 잘못하는 바람에 성적에 지장 있을까봐(지정좌석제라 2시간 내내 맨 뒷자리에 앉아 학생들 출결을 확인했었다) 수업 때마다 출석표를 일일이 확인하며 따져대던 학부생들한테 혼쭐이 난 적도 있다. 정말 무서운 세상이로구나 싶었다.

그렇다고 요즘 아이들 꿈이 대단히 구체적이고 훌륭한가 하면 절대 아니다. 초등학생들부터 중고등학생들까지 우선은 꿈이 죄다 좋은 학교 진학인 모양이다. 국제중학교, 특목고, 명문대 따위로 이어지는 숨막히는 목표의 반복 속에서 부모들은 정말 자식의 꿈이 바람직하다고 여기는 것일까? 나와 달리 학부모의 고충을 심히 겪고 있는 친구에게 엊그제 들으니 요즘 중산층 부모가 자식을 명문대에 보내려면 필수조건이 네 가지가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의 경제력,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 그리고 동생의 희생.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기가 막혀 코웃음이 나오면서도 씁쓸했다. 그래서, 자식 하나 명문대 보내서 그 다음엔 어쩔건데???

세상이 하도 거지같다보니, 그저 행복하고 씩씩하게만 자라주었으면 싶은 사랑스러운 나의 조카들도 벌써부터 나중에 커서 뭐가 되고 싶은지, 자기가 뭘 잘하는지 장래희망에 대한 스트레스가 이만저만이 아닌 것 같다. 왜 아니겠나. 요리사가 되고 싶다고 하면 '코르동 블루' 같은 유명 요리학교에 진학해야 '성공'할 수 있으니까 외국어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어른들의 채근이 이어지고, '화가'가 되고 싶다고 하면 하찮은 그림 하나 그릴 때마다 창의력을 더 키워야 하네 마네 잔소리를 들어야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지금 무슨 꿈을 이야기하더라도, 어른들의 결론은 하나다.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는 것. 하지만 어떻게 온 세상의 아이들이 다 공부를 잘할 수 있나! 공부 잘하는 것이야말로 그 무엇보다 타고난 재능이던데...
 
100점짜리 시험지나 최우수상 상장을 자랑하며 한껏 어깨를 으쓱거리는 조카들을 무한히 칭찬해주기는 하지만, 그와 동시에 마음이 답답해진다. 잘난 척 해도 나 역시 성적지상주의에 갈채를 보내고 있는 게 아닌가 말이다. 초등학생이 시험을 앞두고 2, 3주 전부터 밤늦게까지 시험준비를 해야하는 세상은 과연 앞으로 어떻게 돌아갈까. 혹시라도 학년이 올라가면서 90점, 80점으로 점수가 점점 떨어져 성적표에 '노력요함'이 적힌 과목이 차츰 늘어나면 아이들은 또 어떤 상처를 받게될까.

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잇달아 당선되긴 했지만 학력중심의 사회구조와 행복은 반드시 성적순이라 믿는 부모들의 맹신이 사라지지 않는 한 이 나라 교육에 희망은 없어 보인다. 교육정책을 만들어내는 공무원이나 교육을 책임지는 교사들도 과거 어린 시절 죄다 우등생이었을 텐데, 공부 하기 싫고 잘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까지 과연 헤아릴 수나 있겠나. 공부를 못하면, 고가의 사교육을 체계적으로 받지 못하면, 웬만한 꿈도 제대로 이룰 수 없는 사회가 되었기 때문에 요즘 아이들 절반 이상의 장래 희망이 하나같이 '연예인'인지도 모르겠다. 최소한 그 꿈은 지긋지긋한 학교공부와는 멀어질 수 있으니까.

아장아장 걸어다니며 재롱만 피우던 조카들의 머리가 굵어지는 걸 바라보며 그 녀석들이 장차 과연 어떤 인물로 자라날지 어떤 인생을 선택할지 몹시 궁금해서, 나도 모르게 자꾸만 녀석들에게 뭐가 되고 싶으냐는 귀찮은 질문을 던져댄다. 부모의 책임에서 자유로운 고모로선 그저 행복한 사람, 올바른 사람, 된 사람이 되라고 조언하는 것으로 충분할 텐데 자꾸 속물근성이 튀어나온다. 스스로 올바른 사람, 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라도 장래희망을 나 역시 행복한 사람, 올바른 사람, 된 사람으로 바꾸어야 할 모양이다. 이미 너무 늦어버린 지도 모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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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의 전당에 갈 일이 있었다.
약속시간보다 딱 1시간 10분(과거 경험으로 나름 예상한 시간이었다) 먼저 집을 나서며 약속시간보다 훨씬 일찍 도착하겠군 싶었다. 퇴근시간을 교묘히 피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헌데 오산이었다.
늘 가던 대로 내부순환도로 - 강북강변도로 - 반포대교 - 반포로로 이어지는 길을 택할 작정이었는데
강변도로가 주차장이었다. 반포대교까지 전광판에 뜬 예상시간(지체 돼서 28분)대로라면 10분쯤 되레 지각을 하게 생긴 반면 한강 건너 올림픽 대로를 보니 거긴 그나마 좀 차가 움직이는 추세였다.

그야말로 삽질의 시작.
강을 건너 여의도에서 올림픽대로로 접어들려고 했지만, 노들길 진입로로 얌체 끼어들기를 하려던 걸 실패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요리조리 인간 내비게이션으로 머리를 최대한 굴려 이리저리 차를 돌려봤지만 결국엔 미친듯이 막히는 남부순환도로에서 약속시간을 맞고 말았다. +_+ (대체 얼마나 돌아간 것이냐!)
하필 약속시간보다 더 일찍 도착했던 친구를 50분이나 기다리게 한 끝에 도착하기까지 얼마나 자책을 했는지 모른다. 그냥 가던 대로 갔으면 10분 지각할 길을 휘발유 없애가며 돌고돌아 (안막히는 길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착각했는데, 5시반 전후로 서울시내에 안 막히는 길이 어디 있다고!) 조바심에 자꾸 차선바꾸느라 욕이란 욕은 죄다 먹어가며 뭐하는 짓이었는지.

늦은 밤이라 30분만에 주파한 귀가길로도 도저히 만회가 되지 않는 오늘 삽질의 교훈은 이렇다.
잠깐잠깐 더워도 러시아워땐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게 좋겠다. (하지만 오늘은 너무 더웠다고! ㅠ.ㅠ)
이왕 차를 몰고 나섰으면 그냥 아는 길로나 가라. 내비게이션도 없이 방향감각만 믿고 모르는 길 개척하지 말고. (아니 그냥 뒷북으로라도 내비게이션을 살까? -_-;;)
약속시간에 딱 맞춰서 가려고 꼼지락거리는 버릇을 없애자. 좀 일찍가서 기다리면 어떠리. 
진짜로 명심해라. 오늘 보니 니 방향감각은 별로 훌륭하지 않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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