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향'에 해당되는 글 136건

  1. 2014.03.28 호박이 뭐 어디가 어때서 1
  2. 2014.03.01 2월에는 1
  3. 2014.02.06 AI야 가라, 닭고기는 맛있어~ 4
  4. 2013.08.13 뭔짓인지 8
  5. 2013.01.17 사람들 11
  6. 2012.11.14 드디어 안동 9
  7. 2012.09.12 스밀라의 눈에 대한 감각 6
  8. 2012.05.25 버릇 8
  9. 2012.04.06 건축학개론 12
  10. 2012.04.03 삼색볼펜 10

장을 볼 때 지구를 위해선 푸드 마일리지가 적은, 이른바 '로컬 푸드'라는 걸 골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가 않다. 일단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걸 어쩌라고! 그냥 '국내산'이라고만 적혀있지 정확한 재배지까지 표기된 채소도 많지 않지만, 포항초, 제주 무, 제주 당근, 제주 감자... 같은 건 먼데서 왔어도 사고봐야 되는 걸 뭐. 한단 천원짜리 시금치와 그 세배 가격인 포항초 시금치는 맛이 워낙 달라서 비싸도 포항초나 섬초를 사먹게 된다. 게다가 난 또 시커먼 제주 흙이 묻어 있는 당근이나 감자를 보면 또 엄청 맛있을 것 같아서, 혹시 '파주'나 '강원도' 꼬리표를 단 다른 제품이 있더라도 제주도 먹거리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좀 찔려하면서도.

 

단호박도 마찬가지다. 제철음식만 먹고 산다면, 굳이 태평양 건너 날아온 뉴질랜드산 단호박을 사지 않아야 하는데 단호박을 워낙 좋아한 나머지 통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요리랄 것도 없이 쪄서 치즈랑 아몬드만 얹어 먹어도 얼마나 훌륭한 맛이 나는데 ㅠ.ㅠ (물론 쪄서 그냥 먹어도 좋다.) 게다가 단호박을 찌기 전에 긁어낸 호박씨도 좀 말렸다가 까먹으면 얼마나 맛있다규!  일일이 껍질을 까기가 좀 귀찮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앞니로 호박씨를 오독오독 까먹는 재주를 익혀둔 덕분에 크게 성가실 것도 없다. 씨가 좀 덜 여물었을 땐 아쉬워하면서 그냥 버리지만, 단호박을 딱 쪼갰는데 튼실한 씨앗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으면 말렸다가 밤참으로 까먹을 생각에 흐흐흐 므흣해진다.

 

혹 어려서 부르던 이런 노래를 기억하는가? (심지어 학교에서 배웠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호박 같은 내 얼굴 미웁기도 하지요, 눈도 삐뚤 코도 삐뚤 입도 삐뚤삐뚤'

'오이 같은 내얼굴  길기도 하지요, 눈도 길쭉 코도 길쭉 입도 길쭉길쭉'

(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이런 노래는 완전히 사라졌기를 빈다 -_-; 하긴 조카들이 부르는 거 통 못들어봤으니 다행)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배우면서도 호박이 삐뚤삐둘 못생겼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눈엔 호박 예쁜데? 게다가 호박꽃도 못생긴 꽃의 대명사로 통하는데, 내 눈엔 샛노랗고 통통한 것이 이쁘기만 한 걸! 대체 왜? 비슷하게 생긴 나리꽃이나 수선화보다 못할 게 뭔가!

 

할아버지댁에 살 때 마당에서 애호박과 늙은 호박, 화초 호박을 종류별로 키웠기 때문에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탐스러운 샛노란 꽃이 피었다가 꽃이 시들면서 그 끝에 콩알만하게 열매가 맺혀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노끈을 매달아 덩굴손이 뻗어나가 자라도록 기른 애호박은 적당히 크면 뚝 따서 된장찌개도 끓이고, 새우젓 넣고 볶아도 먹고, 송송 썰어 칼국수나 수제비도 해먹었는데, 요즘 마트에서 보는 인큐베이터 애호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단맛이 났었다. 늙은 호박은 어린 내가 들 수도 없을 만큼 크게 자란 걸 광에 쌓아두었다가 '한 놈씩 잡아서' 호박죽도 쑤고, 호박고지로 만들어 시루떡에도 넣고... 또 뭘 해먹었더라.

 

하여간 할머니가 늙은호박에서 긁어낸 굵은 호박씨도 잔뜩 말려놓았다가 간식으로 오독오독 까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땐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말이 생긴 이유도 하도 맛있어서 몰래 먹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정도였다. 진짜로, 이 속담의 유래는 뭘까나. 내숭떨고 앞뒤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텐데 왜 하필 호박씨? 앞니로도 까기가 어려운데, 뒷구멍으로? ㅋㅋㅋ

 

하여간 오늘 저녁에도 단호박을 쪘는데 호박 자체는 단단하고 맛이 있었느나 안타깝게도 씨가 덜 여물어 그냥 긁어버려야했다. 눌러보니 죄다 쭉정이. 단단하고 맛있는 단호박을 고르는 눈은 이제 얼추 익혔는데, 아직도 겉으로 봐서 씨앗의 여물기까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색이 진하게 잘 익었어도 씨앗이 덜 큰 이유는 뭐람. 그나마도 바다건너 오느라 탄소마일리지 팍팍 늘렸을 뉴질랜드 단호박은 다른 수입 농산물에 비해 거부감이 덜하다. 나라에 청정지역이 많다고 그곳 농부들이 농장에서 키우는 수출용 호박에 농약이니 비료니 안 쳤을 리 없지만 그냥 나의 편견. 뉴질랜드 농부들은 어쩐지 먹거리에 심한 장난까지 치지는 않겠지...

 

나무샘 블로그에서 강요배의 호박꽃 그림을 본 순간 포스팅 거리가 생각나서 시작은 했는데 결론은 나의 식탐으로 끝나누만. 째뜬 오늘 밤참은 찐 단호박이고, 호박과 호박꽃은 언제 봐도 예쁘다!! ㅎ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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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놀잇감 2014. 3. 1. 17:04

 

책 3권을 읽고 영화 2편과 뮤지컬 하나를 보았으며 안동에 다녀왔다.

 

콜레라 시대의 사랑 2(가브리엘 마르케스 지음/송병선 옮김/민음사) 

이게 뭐가 지고지순한 사랑이여! 콜레라가 수시로 창궐하던 시대의 사랑은 뭔가 좀 더 고귀하길 바란 내가 잘못된 건가? ㅋㅋ 아니, 책 읽기 전에 얼핏 '주워들은' 책에 대한 정보가 오해였을지도...  시대에 대한 고발은 들어있을지 모르지만 남성중심의 꼰대스러움에 종종 거부감이 들었다. 첫사랑을 53년간 기다린 건 맞지만... 자기 할짓 다 하면서 그것도 기다린 건가? 그냥 세월을 보낸 거겠지... 그 집요한 집착과 자기합리화는 어떻고.. 흥!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 7: 돌 하르방 어디 감수광(유홍준 지음/창비) 

책을 읽는 내내, 그리고 책장을 덮은 이후 줄곧... 제주도 가고 싶다! 특히나 담에 가면 '오름'을 특별 공략해볼 심산이다.

 

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신경숙 지음/문학동네)

안동 고택에 책이 있길래 밤에 후딱 읽었다. 아주 가벼운 단편집. 소설이 아니고 신변잡기 수필을 읽은 느낌? 시간 떼우기엔 좋았지만 뭐 그닥... -_-; 

 

겨울왕국(Frozen, 2013)

이 영화를 두번이나 보고 수시로 유튜브를 찾아 노래를 따라부르는 조카랑 통 대화가 되지 않아 보긴 했지만, 대체 왜 관객수가 천만까지 넘보는 건지 좀 의아;; 노래가 좋은 건 인정. 그치만 내용도 단순하고, 엘사가 변신 후 허벅지 드러내고 엉덩이 씰룩거리며 걸어나올땐 욕나오던데! 애들 보는 만화에서 그리는 여성의 모습이라는 게 대체 왜 그 모양;;

 

관상(2013, 한재림 감독, 송강호, 이정재, 백윤식, 조정석, 김혜수)

뒷북으로 집에서 봤는데 상영시간이 어찌나 긴지 후반부엔 지루해서 혼났다. 이정재의 수양대군이 매력적인 건 나도 인정하겠는데, 역사가 스포일러다보니 송강호의 열연으로도 어쩔 수가 없더군. 암튼 헐리우드나 충무로나 여배우를 소비하는 방식이 참 짜증난다고 느꼈음.

아 참... 아는 게 병이라고, 진선문(창덕궁) 들어갔는데 경복궁 근정전 나와주시고 ㅋㅋ 근정전 바닥엔 전돌 대신 마루가 깔렸고 (어차피 근정전은 행사 때만 쓰는 공간이지 신하가 왕을 알현하러 들어가는 데도 아니라규!) 과거에 갓 급제한 말단 하급 관리가 감히 편전에서 열린 어전회의에 참석하고(편전에는 3품 이상이던가 당상관만 들어갈 수 있거든!) ㅋㅋㅋ 퓨전사극이니 그려러니 다 넘어가야하는데 거슬리는 게 많았다. ^^;  

 

해를 품은 달(훤-김다현/연우-린아/양명-조휘 출연) 

지인 덕에 스태프 할인으로 엄청 저렴하게 봤기에망정이지 제 돈 주고 봤으면 적잖이 실망하고 열받았을 뻔했다. 원작이 아무리 탄탄해도 창작 뮤지컬의 문제점은 역시나 레퍼토리의 부재. 노래가 하나같이 어쩜;;; 가사도 안 들려, 멜로디도 매력없어, 어쩌라는 건지. 그래도 조각보를 이어붙인 느낌의 무대장치나 한국무용과 판소리 느낌이 돋는 몇몇 연출은 좋았다. 서울 공연 마지막날 마지막회에 객석을 거의 꽉 매운 관객수도 좀 놀라웠고, 휴대폰 꺼내보며 시야 방해하는 관객들도 하나 없더니 계속 기립해 박수치던 그들의 매너도 훌륭. 

 

안동 얘기는 아래 포스팅에 길게~ 적었으니 패스.

한두 달에 한번씩 길든 짧든 여행을 다니면 참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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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을 적고보니 뜬금없이 노인들이 제일 좋아하는 폭포가 '나이야가라'라는 관광버스 유머가 생각났다. -_-; 암튼 인간의 탐욕 때문에 좁고 더럽고 스트레스 심한 환경에서 사육된 조류들의 질병이 더는 생겨나지 않도록 세상이 좀 바뀌면 좋겠다. 읽혀 먹으면 닭고기 오리고기는 아무 문제없다고 언론에서 아무리 떠들어대도 마트나 시장에서 일단 닭과 오리를 사기가 힘들어진 것 같고 (특별 할인 스티커를 붙이고 있지 않으면, 아예 매장에서 제품이 잘 보이지 않는다) AI가 수도권까지 퍼졌으니 죄다 살처분하고 나면 당분간 닭고기 오리고기 값은 고공행진일듯. 이런 악순환은 좀 어떻게 안되겠니!

 

먹거리 포스팅이 뜸하다는 나무샘의 요청에 힘입어, 그리고 AI가 수그러들기를 바라는 닭고기 애호가의 마음으로 그간 먹어댄 닭고기 음식 사진을 모아보았다. 닭고기는 정말이지 어떻게 요리해도 맛없기가 어려운 재료가 아닐지. 내가 다 애정하는 집들인데, AI 때문에 닭수급에 어려움이나 심히 겪지 않기를 바란다.

 

1. 동대문 원조 닭한마리 칼국수

 

내가 동대문 시장 뒷골목에 자리잡은 양푼 닭한마리 칼국수를 처음 접한 건 90년대 초. 같이 졸업한 학교 선배가 동대문 근방 청계천변에 헌책방을 인수했고, 개업 축하 비슷하게 친구들과 몰려갔던 날 선배가 닭고기의 신천지를 소개했다. ^^;

등에 감자를 꽂은 닭 한마리가 통째로 냄비도 아니고 커다란 양푼에 담겨 나오는데, 시커먼 가위도 어마어마하게 커서 어설프게 가위질을 할라치면 손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어우... 근데 겨자와 간장 식초 따위를 넣은 양념장에 찍어먹는 닭고기 맛이 그야말로 신세계! 인근 시장 사람들이 주로 다니는 술집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자주 갈 기회도 없었는데 회사 생활 때려치우고 번역을 한답시고 준백수처럼 대낮엔 학원다니고 나이 어린 친구들과 몰려다니게 되자, 일주일에 한두번은 꼭 닭한마리 칼국수를 먹으러 가기에 이르렀다. 외국인 선생들이 이런 험악한 음식을 더 좋아할줄이야! (국물까지 싹싹 저 양푼을 바닥까지 비우고는 뿌듯해하며 여럿이 양푼 쳐들고 찍은 엽기 관광객 모드 사진도 어딘가 있다) ㅎㅎ 암튼 동대문에 밀리오레, 두타 같은 패션타운이 생겨나면서 야시장 구경을 수시로 다녔던 시기까지 겹쳐, 30대 중반까지 참 많이도 먹으러 다녔다. 그러나 그 뒤로 너무 유명해지고 맛집으로 소문이 나면서 점점 외국 관광객들을 포함해 찾는 사람들도 많아져 줄을 오래 서야하는 게 싫어 이젠 아주 많이 별러야 가는 정도. 정 먹고 싶으면 집에서도 비슷하게 흉내내서 끓여먹기도 하는데, 맛을 똑같이 낼 순 없다. 그러니 노상 그렇게 사람들이 많겠지. 90년대에도 이미 주인 할머니는 여름 내내 하와이 별장에 가서 쉰다는 둥, 빌딩이 수십채라는 둥 갑부설이 나돌았었다. ^^; 저 사진을 찍어온 날은 울 엄니까지 대동하고서 추위를 뚫고 동생네랑 갔었는데, 노인 동반 대가족 프리미엄 덕분에 줄 서 기다리는 남들보다 금방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하이고, 그러고 보니 20년 넘게 다녔다는 얘기다. 중간에 가게에 불도 나고 아들이 분점 내면서 맛이 변했네 어쨌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째뜬 20년 넘게 안 없어지고 건재하는 게 고맙다. 시장통 골목 음식점이라 위생이니 친절이니 꼼꼼하게 따질 순 없지만 묘한 중독성을 지닌 맛인 걸 어쩌겠나. 추릅.... 올 겨울 가기 전에 한번 더 가봐야지. 

 

2. 춘천 우성 닭갈비

 

작년 가을 남이섬에 갔을 때 선착장 근처에서 도저히 닭갈비라고 부르기에 화나는 수준의 닭갈비를 먹고는 춘천 원조 닭갈비를 먹어야겠다고 결심했고, 결국 그 다음 달에 다녀왔다. ㅋㅋ

관광객들이 주로 찾는 명동 닭갈비 골목 말고 춘천 시민들이 간다는 바로 그 우성 닭갈비! (파피야 고맙다 ^^;)

삽처럼 커다란 뒤집개가 아주 인상적이지 않은가? ㅎㅎㅎ

원래 닭갈비는 숯불에 구워먹는 거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뭐니뭐니해도 나에게 닭갈비는 저렇게 철판에 볶아먹어야 제맛인 것 같다. 방산 시장 가서 저런 철판을 사다가 한번 해먹어보면 비슷한 맛이 나려나 늘 궁금한데, 그런 수고를 들이느니 그냥 춘천으로 먹으러 다니는 게 낫지, 그러며 참는다. 알싸하고 시원한 동치미까지 곁들여 먹으려면 암.. 가서 먹어야하고 말고.

이날 꽤 아침 일찍 서둘러 갔기에 내 생각 같아선 소양댐도 올라가고 청평사도 가고 그럴까 싶었으나, 동행의 반대로 소소하게 공지천 산책길만 둘러보고 춘천MBC 건물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만 마시고는 휭하니 올라와 좀 아쉬웠다. 순전히 닭갈비 먹으려고 춘천 가는 여자다 나. ㅋㅋ 

 

 

3. 부암동 계열사 치킨

 

부암동 치킨집이 서울 3대 치킨에 든다는 말을 들은 터라, 김환기 미술관 구경갔던 날 꽤나 벼르고 기대해서 찾아간 곳.

요즘 추세처럼 튀김옷에 온갖 양념과 자극적인 맛을 첨가하는 게 아니라 옛날 방식으로 담백하게 튀겨낸 치킨이었다. 치맥은 진리~ 라며 생맥주 한잔을 들이키며 먹으니 맛은 있었지만, 진짜로 이게 서울 3대 치킨이라고? 하는 의아한 마음이 들었음. 물론 치킨과 같이 나오는 큼지막한 감자튀김이 흡족했고 둘이서 배가 터지도록 바구니를 싹 비웠지만, 소문처럼 그렇게 몇시간씩 줄 서서 사먹을 만한 맛인줄은 잘 모르겠다. 다행히 이 날은 춥기도 했고 평일 저녁이라 줄을 서야하는 문제 따윈 없었으나, 우리가 나올 무렵엔 거의 자리가 없었다. 듣자하니 맥주를 제외한 안주메뉴는 추가주문이 안된다고. 골뱅이 세트도 있는데 그런 건 앉자마자 시켜야한다는 뜻. 켁.. 하여간 저 한바구니에 2만원이다.

나중에 부암동 주민께 물어보니, 원주민들은 이집보다 되레 그 골목 안쪽에 있는 다른 치킨 집 맛을 더 쳐준다고... 나중엔 그 집에 가서 한번 먹어보고 비교해야지.

 

 

4. 백숙

 

 

사실 닭고기는 집에서도 일주일에 한두번 이상 해먹는 것 같다. 백숙과 안동찜닭을 번갈아 해먹는 중간중간 닭안심을 사다 얼려두고는 스파게티에도 넣으니까. 하지만 토종닭 백숙은 뭐 딱히 요리랄 것도 없어서 사진을 찍어둘 생각도 하지 않는데, 차례상을 차릴 때마다 서식 안내서를 들고 낑낑대는 동생들을 불쌍히 여겨 언젠가 찍어둔 사진이 생각났다. ^^;

우리집은 제기 설거지를 최대한 피하고 얼른 우리가 상 차려 먹을 수 있도록 기름기 있는 음식은 죄다 접시에 올려 제기로 받치기만 한다는 사실~!

그러고 보니 요번 설날 차례 때는 단감을 사과 왼쪽에 둔 것 같은데 쩝;;; ㅋㅋㅋ 

하여간 차례나 제사때는 어쩔 수 없이 저렇게 껍질째 통닭을 삶지만, 평소 먹을 땐 끓이기 전에 껍질과 꼬리, 온갖 지방을 완전히 제거한 뒤에 담백하게 삶는다. 차례와 제사 때도 통대파와 통마늘 듬뿍 넣고 푹푹 삶아 건져버림. 순전히 산자들이 맛있게 먹기 위한 음식이라규~ 

 

 

5. 단호박 치킨 파스타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마지막 닭안심을 녹여서 바로 어제 해먹었다. 사진 찍을 줄 알았으면 좀 더 예쁘게 담았어야 하는데, 가지런히 담았던 엄마 접시는 이미 시식중이셨고, 마침 모짜렐라 치즈 얹은 파스타 해먹는다는 자랑에 친구가 사진 보내보라고 해서 찍은 거라 민망타. 

냉장고에 있는 채소랑 마늘, 닭고기 대충 볶다가 우유 붓는 걸로 화이트소스 끝. 

닭고기는 정말 어디에 넣어도 어울리는 재료라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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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짓인지

놀잇감 2013. 8. 13. 1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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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

투덜일기 2013. 1. 17. 00:47

언제 어디서든 사람들을 관찰하는 건 즐겁다. 간만에 새로운 사람들이 백명이나 득시글거리는 공간에 자주 출입하면서 뭔가를 배우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사람 구경하는 재미도 만만치가 않다. 물론 얼굴치라서 이제껏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 얼굴은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매번 다른 자리에 앉기도 했었고...

 

첫 수업에서 뒷줄 구석자리에 앉았다가 두시간 반 내내 담배쩐내에 혼줄이 난 뒤로는 비교적 중간 이전 구석을 노리고는 있으나, 나로선 아무리 일찍 가도 넷째 줄 이상은 다가갈 수 없음을 깨달았다. 생각보다 볼일이 일찍 끝나 40분이나 일찍 강당에 가보았는데 맙소사, 맨앞 세줄은 이미 다 차 있었다. 주최측에선 이름표를 달기를 권하고 옆자리 앉은 사람과는 통성명과 인사를 나누라고 하는데, 어우 그런 거 민망하고 싫어서 나는 10분 전쯤 가서 될 수 있는대로 고개를 푹 수그리고 열심히 예습복습하는 척 하며 강의를 기다린다. 때로는 가방만 내려놓고 밖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들어가거나...

 

그렇게 사전차단을 하는데도 며칠 전 옆자리에 앉은, 사교성 뛰어난 아주머니 한분은 자기 원칙이라며(옆에 앉은 사람 얼굴 익히고 연락처 받아내는 게;;) 굳이 내 이름과 전화번호를 '따갔다'. 교육 끝나도 주최측에서 주소록이나 명단 같은 거 만들어주지도 않는다니 나중에 수업 내용 물어볼 거 있으면 연락하겠다고... 헐... ㅠ.ㅠ . 째뜬 이 아주머니 말에 따르면, 앞자리에 좀 앉아보려고 자기가 1시간 일찍 온 적도 있었다는데 그 때도 겨우 셋째줄에 자리를 잡았다고 했다. 나머지 사람들은 대부분 15분 전부터 슬슬 나타나는데 20여명의 열혈 학생들이 앞자리 다툼을 엄청 한다는 얘기다.

 

좀 일찍 가방으로 자리만 맡아놓고 사람이 오래 나타나지 않으면, 과감하게 가방을 치우고 앉는 대신 자리를 차지하는 사람도 있는 듯하다. 자기 가방을 분명 몇째 줄에 놓았는데 엉뚱한 데 가 있다고 씩씩대는 사람을 여럿 보았다. 놀라운 친화력으로 벌써 뭉친(혹은 원래도 서로 아는 사이였거나;;) 몇몇 아주머니들은 서로 자리도 잡아주고 그러는 모양이어서, 그러지 말라고 핀잔 주는 사람도 보았다. ㅎㅎㅎ 시험기간에 피튀기며 도서관 자리잡던 때와 별 다를 바가 없다.

 

맨앞 세줄에 앉은 이들은 대부분 중년이상이고, 그들 중엔 매번 휴대폰으로 강의내용을 동영상으로 촬영하는 사람도 있다. 과연 집에 가서 그걸 매번 다시 볼까? 녹화된 화질과 강의 내용은 쓸만할까? 챙겨보니까 계속 촬영하겠지만서도... 나로선 참 신기하다. 모르긴 해도 아마 크게 티 안나게 녹음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놀라운 학구열;; 중간에 쉬는 시간에도 강사를 가만 내버려두지 않고 꼬치꼬치 질문을 해 괴롭히는(?) 사람이 있다. 수업시간 끝날 무렵 괜히 질문해서 강의시간 넘기게 하는 애들 진짜 미워했었는데, 그나마 수업 끝나고 공개질문하는 사람은 아직 없었다. 천만다행. ^^; 

 

반면에 평일엔 강의시간이 7시부터다보니 꾸벅꾸벅 졸거나 곤하게 자는 사람도 보인다. 지난주엔 내 바로 뒤에 앉으신 어느 밍크코트족 아주머니께서 드르렁 드르렁 코를 골며 주무셨다. 아직 친한 사이들이 아니다보니 누가 깨우기도 뭣하고 아주머니 스스로 놀라 깨어나 잠시 소리가 멎었다 싶으면 이내 다시 드르렁 드르렁... 신경에 거슬려 짜증나기도 하면서 또 어찌나 웃기던지. ㅋㅋㅋ 옛날 요가 다닐 때도 느낀 거지만 젊으나 나이드나 여자들 중에도 코 고는 사람이 많은 것 같다. 요가 마무리 때 송장자세 하고 있으면 시간이 몇분 되지 않는데도 드르렁 드르렁 코골며 자는 사람이 두셋은 꼭 있었다. 요가원도 그렇고 이곳 강당도 그렇고 워낙 따뜻하고 어두컴컴하니까 까무룩 잠드는 거야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코 까지 골며 숙면을 취하다니. ㅎㅎ

 

이십대로보이는 젊은 사람들은 대부분 강의 직전에 나타나 뒷자리에 앉는 경우가 많다. 어르신들의 열기를 못 따라가거나 양보하거나 둘 중 하나겠지. 강의 내용에 대한 리액션도 아주머니들이 가장 열정적이다. 한번은 강의 끝나고 그날 담당 교수가 안식년이라 다음주에 외국으로 연구 여행을 떠나므로 문의사항이 있으면 이메일로 해달라고 했더니, 대뜸 아쉬움의 '어우~~~' 소리가(순간 방청석인가 착각할 뻔했다 ㅋ) 크게 일었다. 아니 언제 봤다고???? *_* 어차피 모든 강사진이 맡은 부분을 딱 한번씩 강의하는 체계라 두번 볼 사람도 없구만...

 

강의를 듣는 사람들 뿐만 아니라 강의를 하는 교수, 강사들도 스타일이 다채롭다. TV 특강에서도 본 적 있는 엔터네이너형 강사가 있는가 하면, 두서없이 어려운 건축용어만 잔뜩 주워섬기다 만 사람도 있었다. 연구를 잘하는 학자가 다 강의를 잘하는 건 아니지만, 몇년째 거의 같은 교재로 거의 같은 수업을 하면서 횡설수설하는 건 좀 심했다. 같은 한옥 건축 이야기라도 재미있는 예를 들어가며 귀에 쏙쏙 들어오게 가르치는 사람도 있더구만...  강의는 횡설수설하면서 대뜸 자기 책 참고하라고 광고한 이도 있었다. 그런 책이라면 절대 안 산다 안 사!  반면에 강의 교재도 그렇고 설명도 짜임새 있어서 책을 사보고 싶은 사람도 있다. 대뜸 사들이지 말고 일단 서점에 가서 들춰보고 결정할 작정이긴 하다만.

 

아참, 요즘 사람들은 낯선 사람에게 가장 궁금한 사항이 '어디에서' 사는 것인가 보다. 내 전화번호를 따갔던 아주머니도 그렇고 지난번 수업에서 옆자리에 앉은 사람도 목례 후에 잠시 머뭇거리며 말을 걸까말까 하는 듯하더니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사는 동네 같으면 같이 가자고 할 리는 없겠지만, 동네 이름 말해주면서 기분이 묘했다. 뭐냐, 요샌 소개팅 나가서도 첫 질문이 어디 사느냐는 거라던데, 사는 동네로 사람을 판단하겠다는 건가? 그러더니 둘 다 자기네는 OO구에서 왔다고 대답했다. 나도 다음에 똑같은 질문을 들으면 OOO구에서 왔다고 대답해야지. 대개 옆자리엔 시선도 안주기 때문에 같은 사람이 앉아도 몰라보기 십상이지만 이제까지는 한번도 같은 사람들과 나란히 앉은 적이 없는 것 같다. 최소한 공책이나 수첩 정도는 본다규. 과연 내일 수업 땐 또 어떤 사람이 내 옆에 앉을지, 어색한 대화 없이 무사히 넘어갈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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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안동

여행담 2012. 11. 14. 16:18

드디어 안동 얘기까지 왔으니 여행자의 삶 후기도 얼마 안남았다. 쓰고 보니 많이 다니지도 않았구만 왜 그렇게 노상 쏘다닌 것처럼 느껴졌는지 원. 아무튼... 이웃 주민들 영향으로 통영과 함께 선망의 여행지였던 안동에 결국 다녀왔다. 먹을거리를 중심으로 짰던 시간표와 동선은 완전히 무너져 허망했고, 얼마 다니지도 못했음이 안타깝지만 그래도 마구 찍어댄 풍경사진을 '소장'하게 되었다는 것만으로도 흐뭇하고 뿌듯하며, 그곳을 30년지기와 함께 거닐었다는데 의미가 있으니 됐구나 싶다.

 

그래도 왠지 억울해서 적어보자면 나의 계획은 이러했다.

고속버스편으로 아침 일찍 출발.

안동에 도착해 점심으론 <헛제삿밥>을 먹는다.

오후에 하회마을과 병산서원을 돌아본 뒤 저녁은 안동 구시장 찜닭골목에서 <안동찜닭>을 먹어줘야지.

숙소인 고택으로 가기 전에 필히 맘모스 제과에 들러 안동사과를 넣어 구웠다는 30년 전통의<사과파이>와 <맘모스빵>을 산다.

이걸로 다음날 아침 커피와 함께 요기.

이틑날 오전에는 도산서원을 돌아본 뒤 다시 안동시내로 돌아와 역앞에 있다는 간재비 아저씨네 식당에서 고등어조림과 구이로 거하게 점심. 

커피 한잔 마시며 여유 부리다 오후 늦게 부산으로 출발.

 

그러나... ㅠ.ㅠ 야무진 계획은 그저 계획일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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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회 지음/박현주 옮김/마음산책

작년 가을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산 책을 요번 여름 지산밸리 록페스티벌에 가면서 챙겨가 읽었다. 이웃 주민들의 지산 지참서가 작년엔 조르주 심농이었음을 알기에, 나도 더운 여름날 시간 떼우기로 읽기에 적당한 책을 선정하느라 잠시 고민하다 내린 선택이었다. 결과적으로 탁월한 안목이었다.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칭찬하는 것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책 훌륭하단 말을 더러 들었었는데, 나도 그 매력을 실감했다. 출판사와 번역자를 달리해 판권 계약까지 갱신해가며 나올만한 가치가 있는 책은 확실. 그래서 또 좀체 안쓰던 독후감도 쓰기 시작했는데... 계속 비공개로 두었다가 마무리하기까지 한달이 넘게 걸렸다. 젠장. 이러면서 책에 기대 밥벌어먹겠다는 건 좀 양심불량 같다. ㅎ

 

그간 나는 전 세계적으로 열풍이 일고 있는 북유럽 추리소설을 한번도 읽어보지 않았다. TV 시리즈나 영화로 만들어질 만큼 유명한 <월랜더>니 <밀레니엄> 시리즈도 그저 명성만 들어보았을 뿐 서점 갈 일 있을 때 몇 장 들춰보고서도 선뜻 읽고픈 마음은 들지 않았다. 시리즈로 죄다 읽어야한다는 부담감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고, 범죄소설 장르가 좀 불편하다는 느낌도 있다. 셜록, CSI, 크리미널 마인드, 로앤오더 같은 범죄 수사 드라마는 흥미롭게 보면서 책으로 보는 건 왜 꺼려지는지 잘 모르겠다. 혹시 이해력과 지력이 딸려서? ㅎㅎ

 

'하얀 감방'이라고 불리는 조립식 콘크리트 서민주택에 살던 그린란드 출신 소년 이사야가 지붕에서 떨어져 죽는다. 경찰은 소년이 홀로 눈 덮인 지붕에 올라가 놀다 사고를 당했다고 짐작해 사건을 종결짓지만, 이웃에 살며 이사야와 각별한 우정을 쌓았던 스밀라는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고 직감한다. 고소공포증이 있는 이사야가 괜히 지붕에 올라갔을 리가 없다.  게다가 그린란드 이누이트족 사냥꾼 어머니와 덴마크인 의사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스밀라 카비아크 야스페르센은 그 누구보다 눈과 얼음에 대한 감각이 뛰어나다. 눈밭 위로 누군가 풀쩍 뛰고 나면 공기의 흔적으로 좀 전에 뛴 자세까지 보지 않고 재현할 수 있을 정도여서, 한동안 각종 북극 개발 연구팀 소속으로 활동한 적도 있다. 처음 만난 1년 반 전부터 술주정뱅이인 이사야의 엄마 대신 이사야를 보호해야 한다고 결심했던 스밀라는 진실을 파헤치기 시작한다. 이사야가 비밀 장소에 남긴 녹음테이프, 북극개발 파견 근무중 사망한 이사야의 아버지를 둘러싼 의문, 자원 개발회사가 오래전부터 벌여온 알 수 없는 연구 프로젝트, 이사야를 부검한 로옌 박사의 정체... 실마리가 풀려나갈수록 새로운 의문은 꼬리를 무는데, 스밀라는 목숨이 위태로운 지경에도 고집을 꺾지 않는다. 특수하게 개조한 쇄빙선을 타고 찾아가는 북극해의 작은 섬에는 대체 무엇이 감추어져 있었는지...

 

이렇게 줄거리로 적어놓으니 단순한 내용 같지만 이 책엔 간단히 설명할 수 없는 뭔가 심오한 느낌이 있다. 아웃사이더인 스밀라의 존재론적인 고민이 깊이 깔려 있기 때문일까?  번역자 말로는 일종의 학술소설로 볼 수도 있다고 할 만큼 수의 원리며 얼음, 빙하에 대한 언급이 많지만, 그 또한 보기 드물게 매혹적인 주인공 스밀라의 놀라운 지적 능력과 본능을 강조하는 장치일 뿐 그리 학술적이라 느껴지진 않았던 것 같다. 책의 뒤표지엔 스밀라가 이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라고 찬양하는 소설가 김연수의 감상이 적혀 있는데, 나 역시 그 평에 동감했다. 외톨이를 자처하는데 고독하지 않고 당당하며 누구보다 강하고 아름답다. 딱 내 취향이다 싶은 선망의 여인상이라고 하면 좀 웃긴가? 인물의 매력뿐만 아니라 작품의 서사와 표현도 마음에 든다. 심오하고 진지하면서 따분하지 않기란 원래 어려운 거라 생각한다. 근데 이건 그런 축에 드는 책이다. 지산에서 마지막 날 뙤약볕을 피해 시간을 보내며 읽다 만 이 책을 가져가지 않은 걸 엄청나게 후회했다. 덮어두고 나온 책의 뒷 이야기가 어찌나 궁금하던지. 분량(627쪽)이 길어서 결국 집에 돌아와 마저 다 읽을 수 있었는데, 여운이 꽤나 한참 가서 며칠간 되풀이해 뒤적이며 읽었다. 겨울과 북극해가 배경인지라 여름에 읽으며 서늘한 느낌이 들어 더욱 좋았던 듯하다.

 

베껴 적어놓은 글귀가 엄청 많지는 않은데, 아예 통째로 좋은 페이지가 꽤 있었기 때문이었다. 페터 회의 다른 책도 좀 궁금해졌다.

 

다른 사람들이 교회의 축복을 느끼는 방식으로 나는 고독을 느낀다. 고독은 내게 있어서 은혜의 불빛이다. 나는 내 방문을 닫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자비를 베풀고 있다는 것을 자각한다. (22)

 

나는 일생동안 지속될 것이라 여겨지는 그런 현상들에는 능하지 않다. 종신형, 결혼서약, 종신직. 그런 것들은 삶의 단편들을 고정시켜 시간의 흐름에서 면제시키려는 시도다.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고 여겨지는 일들은 더 심각하다. (376)

 

여행은 모든 인간의 감정을 극대화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가 사냥을 하러, 방문을 하러, 혹은 케케르타트를 향해 카니크를 떠날 때마다 잠복해 있던 사랑, 우정, 적의의 감정이 모두 폭발하고는 했다. (394)

 

죽음이 나쁜 것은 미래를 바꿔놓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를 기억과 함께 외로이 남겨놓기 때문이다. (415)

 

사랑에 빠진다는 것은 대단히 과장된 얘기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상대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으리라는 두려움 45퍼센트와 이번에는 그 두려움이 무색하게 되리라는 광적인 희망 45퍼센트, 거기에 소박하게 사랑의 가능성에 대한 여린 감각 10퍼센트를 더하여 이루어진다.

나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지지 않는다. 내가 더 이상 볼거리에 걸리지 않는 것처럼. (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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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릇

투덜일기 2012. 5. 25. 18:39

이웃 주민의 꿈의 미용사 포스팅을 읽기도 했겠다 나도 머리 얘기 잠깐 해야겠다. 전에도 그런 얘기를 쓴 적 있지만 내가 바라는 '꿈의 미용실 & 꿈의 미용사'의 조건은 늘 똑같다.

- 파마나 두피케어, 영양손질 등 값비싼 시술을 강요하지 말 것.

- 호구조사 나온 사람처럼 꼬치꼬지 질문을 던지거나 말을 너무 많이 걸지 말 것.

- 커트 실력이 좋을 것.

- 가격이 적당할 것.

- 소요시간이 짧을 것.

하지만 이런 나의 취향에 똑 떨어지는 꿈의 미용실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암튼 나름 적정선에서 신촌 일대의 미용실을 이곳저곳 기웃대다 결국엔 동네 미용실 하나를 뚫었다. 나 정도의 반곱슬이면 굳이 롤스트레이트 파마를 하지 않아도 된다며 파마하러 간 손님을 커트만 해서 보내는 원장을 만나 살짝 감동했던 이 동네 ㅂ미용실에 꽤 다녔으나, 결정적으로 재작년 겨울이었나 그곳 실장이 내 머리를 완전히 쥐뜯어먹은 것마냥 잘라놓은 이후 두번다시 발길을 하지 않았다. 그러고는 다시 찾아낸 곳이 두 정거장 정도 걸어가야 하는 ㄲ미용실. 시험삼아 처음 미용실에 딱 들어갔을 때 나는 미용사의 머리모양으로 신뢰도를 일차로 판단한다. '헤어디자이너'라는 사람이 자리 머리를 촌스럽거나 엉망으로 하고 있다면 말이 되냐고! 꽤 세련된 머리모양을 한 그 미용사는 비교적 빠른 손놀림으로 최대한 내 바람에 맞추어 머리를 잘라주었고, 나는 내심 퍽 만족했다. 게다가 가격도 무척 저렴해!

 

그러나 지난 3월 머리를 자르러 가보니 아리땁고 적당히 친절했던 그 미용사가 보이질 않았고, 그 사람보다 나이가 많은 미용사가 새로 와 있었다. 머리 자르러 왔다는 나를 의자에 앉히고 미용덮개를 씌우더니 호들갑을 떨기 시작했다. 두피가 엄청 약한가보다고, 각질 관리도 엉망이고 (머리로 열이 올라오는 체질이라나 뭐라나 스트레스 때문인지 머리에 노상 뭐가 많이 난지 오래;;) 머리카락도 가늘고 탈모증세도 있다고 완전 난리... ㅠ.ㅠ 커트하는 손길이 매우 재빠르긴 했는데, 나중에 집에 와보니 재빠른 게 아니라 성의없고 덜렁거린 탓인지 뒷덜미 머리칼 한 줌이 길게 그대로 남아 있어 내가 잘라야 했고, 들쭉날쭉 앞머리는 사람들이 왜 머리를 자르다 말았느냐고, 혹시 니가 잘랐냐고 묻기에 이르렀다(내가 앞머리를 얼마나 잘 자르는데!). 아우 정말! 암튼 그 미용사는 당장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하루아침에 대머리라도 된다는 듯이 나를 구박했고, 시간이 없고 바빠서 다음 기회로 미루고 싶다고 웅얼거리던 나를 결국 굴복시키고 말았다. 그나마 20분이면 끝나고 가격도 저렴한 두피케어를 받기로 한 것. 시간도 2시간쯤 걸리고 가격도 두배로 뛰는 영양두피케어를 일주일에 한번씩 세번은 받아야 하는 상태라고 극구 주장하는 미용사 앞에서 나는 머리감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는 무식하고 게으른 여자로 전락했다. ㅠ.ㅠ

 

하여간에 커트가 끝나자마자 뭔가 두어 종류의 액체를 면봉으로 두피에 발라 온 머리통이 화끈거리게 만들어놓고 나서야 그 미용사는 뿌듯해했고, 다음번 머리 자르러 올 땐 꼭 영양두피케어를 받으라고 충고했다. 과거엔 머리를 자르고 싶다고 마음 먹으면 원래 그날로 잘라야 직성이 풀리는 편이었으나, 마음에 꼭드는 미용실을 잃은 이후 내게 머리 자르기는 이제 벼르고 별러 마뜩찮게 실천하는 일이 되고 말았다. 그런 마당에 또 그 막무가내 아줌마 미용사를 대면할 생각을 하니 마음이 무거워 선뜻 나설 수가 없었다. 지난번 그 간단한 두피관리를 받고도 일주일 넘게 두피가 따갑고 가렵고 괴로워 다시는 그런 짓거리 안 할 생각이건만, 내 의지를 관철시킬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바로 내일모레 사촌동생 결혼식도 있고, 가뜩이나 성의없이 들쭉날쭉 자른 머리를 대책없이 두달 가까이 기른 내 모습을 보고 친구들이 '삼손 같다'고 할 지경이라 어제 드디어 그 미용실을 찾았다. 아무리 강권해도 딱 머리만 자르고 나와야 한다고 마음을 다잡고 들어섰는데, 우왕~ 그 미용사가 없다! 그 사람 뿐만 아니라 그새 미용사 둘이 다 새로운 인물로 대체됐고 원장은 아예 부재중. 아싸! 나는 새로운 미용사들의 실력도 모르는 채 그냥 쾌재를 불렀다. 다듬기만 할 건데 뭐 망쳐봤자지.

 

새로운 미용사도 역시나 롤스트레이트 파마기가 다 풀려 머리칼에 히마리가 없다며 은근히 파마를 종용하는 기세였다. 허나 이미 나는 '이 정도의 반곱슬머리면 롤스트레이트 파마가 필요없다'는 전문가의 의견을 받아놓은 터, 그 정도 공격은 물리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무튼 어딜 가나 머리를 자를 때마다 반복되는 '약한 두피' 타령은 어김없이 이어졌는데, 그 뒷 이야기가 의외였다. 두피가 약해서 여기저기 올라온 뾰루지를 내가 긁어서 상처를 내놓았다는 것! 나는 지난번에 두피케어를 받고 나서 일주일 넘게 따갑고 가려운 증상에 힘들었다고 얘기했더니, 이런 상태에선 두피케어를 할 게 아니라 두피를 진정시키는 것이 우선이란다. 지난번 미용사는 뭐냐! 각질관리라면서 면봉으로 아플 만큼 엄청 두피를 문질러대두만. 그래서 그렇게 따갑다가 나중엔 가려웠구나야. 암튼 이번 미용사는 나더러 절대 뾰루지에 손대지 말고(내가 긁은 적 없다고 했더니 자면서 자기도 모르게 긁었을 것이라고;;;) 머리 감기 전에 브러시 빗으로 두들겨 혈액순환을 시켜주라고, 불가능하겠지만 스트레스를 받지 말라고, 게다가 왼쪽 머리만 심히 바깥으로 뻗치는 이유는 내가 왼쪽 머리만 무의식적으로 자꾸 만지기 때문일 것이라고 지적했다. 헐... 맞다,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책 읽을 때라든지 뭔가 생각할 때 왼손으로 머리칼을 비비 꼬는 게 내 버릇이다. 해서 과거 자율학습 시간 선생님한테 '이잡느냐'는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러더니 마지막에 드라이를 해주며, 아니 이렇게 드라이가 잘 먹는 머리를 왜 손질 안하고 다니느냐고 또 한마디 했다. 파마 굳이 안하셔도 되겠네요, 라면서. ㅡ.,ㅡ;; 휴우,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앞으로도 당분간 두피케어와 파마를 강권하는 일은 없겠군. 다시 양심적인 미용사를 만난 것 같아 기쁘기도 했다. 그러나 자면서 무의식적으로 긁는 머리를 어찌 중단할까 그건 불가능한 일이다 싶었다. 하지만 마지막에 또 반전. 오늘 종일 '두피에 난 뾰루지'와 왼쪽 머리칼에 좀 신경을 쓰며 있어보았더니, 머릿속 상처는 내가 자다 긁은 게 아니고 깬 상태에서 긁어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집에 있을 땐 앞머리도 신경쓰여서 핀으로 질끈 올려꽂고 있는데도 나도 모르게 손이 자꾸 머리로 올라가 여기저기 쑤시며 뾰루지 부분을 찾고 있는 게 아닌가! 아, 예리한 전문가의 관찰력. ㅠ.ㅠ 빌어먹을 이놈의 손버릇, 이참에 좀 고쳐야할 터인데 가능하려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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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학개론

놀잇감 2012. 4. 6. 13:07

*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에 대해서 들었을 때 나는 한가인/엄태웅 조합보다도 배수지/이 제훈 조합에 훨씬 더 관심이 갔다. 나 역시 <파수꾼>에서 기태 이제훈을 보며 앞으로 주목할 만한 괜찮은 배우 하나를 얻었군 하며 흐뭇했었고, 수많은 아이돌 걸그룹에 대해선 이름도 얼굴도 잘 모르면서 유일하게 알고 예뻐하는 아이가 '수지'다. 엄청 공들여 만져놓은 듯한 인공미 소녀들의 물결 속에서 수지양은  자연스러운데도 맑갛게 빛나며 예쁜 느낌! 한가인의 미모도 인정하는 바이지만, 열아홉살 수지와 비교하니 확실히 광채가 다른 것 같았다. 물론 빛나는 청춘을 그려난 과거의 화면이 현실에 찌든 현실의 모습보다 당연히 환하고 아름다웠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멜로 영화는 여주인공이 예뻐야 보기 뿌듯한 이 불편한 진실.. -_-;

영화를 보기 전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다"는 포스터의 저 카피 대신 "우리 모두는 누군가의 쌍년/놈이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는 이웃 어느분의 의견에 빵 터져 킥킥댔는데, 영화를 보고 나니 역시 그 말이 진리였다. 감정에 서툴고 사소한 것으로 오해하고 자격지심과 자존심 앞세우다 상처 받지 않기 위해 찌질하게 먼저 상처 주는 쪽을 택했던 청춘 한때를 그 말만큼 잘 찝어낸 말이 또 있을라고! 누군가의 첫사랑이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누군가에게 나도 분명 '쌍년' 짓을 했다는 건 잘 안다. 영화처럼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재회는 아니었지만 세월이 흐른 뒤 만났을 때 진짜로 왜 그랬냐고 나더러 따지더라. ㅋㅋㅋ  

수지와 이제훈에 대해선 이유없이 무한한 애정을 갖고 있었던 반면, 엄태웅과 한가인에겐 우려의 시선을 품고 있었는데 퍽 괜찮았다. CF속의 한가인이 그간 예뻐서 좋긴 해도 연기하는 걸 제대로 본적이 한번도 없다가 <해를 품은 달>에서 보며 얼마나 아쉬웠는지. "연우 역할을 문근영이 했으면 얼마나 좋아!"라는 탄식을 수도없이 내뱉을 만큼 김수현과 별로 어울리지도 않고 연기도 참 못했다(상대적으로 김수현과 아역 김유정 양이 사극 연기를 너무 잘한 걸수도 ^^;). 역시나 어울리는 옷은 따로 있는지, '제주도 학원출신' 음대생이지만 피아노는 지긋지긋하고 아나운서가 돼 돈을 잘 버는 게 꿈이었으나 결국엔 의사 부인이었다가 술마시고 쌍욕도 마구 하는 이혼녀가 된 서연의 옷은 한가인에게 퍽 잘 어울렸다. 세상풍파는 혼자 다 겪은 듯 외모도 성격도 확~ 변해버린 승민(이제훈이 나이든다고 어떻게 엄태웅이 되느냐고!)을 수긍하는 건 약간 더 힘들었지만 어느 정도는 뭐 그랬다 치고! 보는 것이 극의 묘미이니 꼬치꼬치 따질 수야 없다.

감독이 꽤나 오래 준비하고 다듬은 대본이라더니 가끔 가슴을 툭 떨어뜨리거나, 참 기발하다고 킥킥대게 만드는 대사가 꽤 많았다. 알탕, 대구탕과 달리 정체를 알 수 없는 이름 '매운탕'도 그렇고, '싱숭이생숭이', '우루사'도 그렇고... (그런데 일주일도 안 돼서 벌써 다 까먹었으니 원;;) 하여간 근래 보기 드문 최고의 조연 캐릭터 '납뜩이' 조정석이 한 말과 행동들은 죄다 인상적이었다. 말도 안되는 상상이지만, 이제훈한테서 <파수꾼>의 기태 그림자를 아직 떨쳐버리지 못한 나는 (특히 택시기사한테 대신 화풀이하는 장면 ㅠ.ㅠ) 그에게 납뜩이 같은 솔직하고 좋은 친구가 있어서 참 다행이라고까지 여겼다. 물론 여기서 이제훈의 연기는 흠잡을 데 없는 건축학과 새내기 승민이었는데, 미련한 내가 그렇게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는 뜻이다. -_-;

서울이란 도시는 고향이라 여기기 좀 뭣한 공간이지만 그래도 나고 자란 곳이다보니 서울에서도 낯익은 지명이 영화 배경으로 등장하면 엄청 반갑고 정겹다. 전도연 하정우 나왔던 <멋진 하루>도 그래서 더 좋은 영화로 기억된 듯한데, 이 영화에서도 '정릉' 때문에 호감이 배가됐다. 살아본 적은 없어도 그 동네 사는 친구들이 엄청 많아 나 역시 개포동-정릉간 그 버스를 갈아 타고서 자주 놀러다녔고, 누구의 묘인지 아직도 헷갈리는 '정릉'엔 중1때 소풍을 갔었다. 소풍 장소가 발표되자 당시 정릉 친구들은 아우성을 쳐댔다. 국민학교 6년 내내 정릉으로 소풍 다녔는데 중학교에 와서도 또 거길 소풍으로 가야하느냐고! 그리고 건축학개론 첫 시간엔가 서연과 승민이가 지도에 빨간펜으로 그리던 길 위에 현재 내가 사는 집도 있다. 아니, 내부순환로가 개통된지 오래지만 북악터널을 지나 구불구불 신촌으로 이어지는 그 옛길은 요새도 내가 걸핏하면 지나다니는 길이다. 나와 별 상관도 없는 그 설정에 괜스레 흐뭇했던 이유는 역시나 강북인의 정서였을까?   

내가 건축을 해볼 생각은 꿈에도 없었지만(건축과는 이과잖아! 난 수학 못해! 뭐 이런 원초적인 한계;;) 건축하는 사람에 대한 로망은 항상 있었던 것 같다. 막상 그들 일하는 얘기 들어보면 처음엔 엄청난 박봉에 노상 밤샘에, 건축주와의 신경전에 끔찍한 직업이 따로 없다 싶지만 그래도 '집'과 '건물'을 어느틈에 뚝딱(은 결코 아니겠으나;;) 만들어내는 일이란 얼마나 경이롭고 멋진가! 게다가 영화에 그 과정이 나오는 건축의 배경은 심지어 제주도다. 한옥열망과 더불어 제주도에 내려가 살고 싶다는 열망 또한 여전히 꺼지지 않고 있기 때문에 영화 보는 내내 막 부럽다가 막판엔 심술이 났다. 그러니깐, 제주도에 저 정도 집 짓고 살려면 예쁜 외모로 의사랑 결혼했다가 위자료 엄청 받고 이혼해야 되는 건가? 아니지, 그 전에 일단 제주도에 물려받을 땅과 집이 있어야 하는 거네! 흑... 비뚤어진 심보로 투덜거리긴 했지만, 어쨌든 제주도 바닷가에 옛집과 추억을 최대한 살려 지은 집은 참 아름답고 마음에 들었다. 확 터를 갈아엎고 새로 지은 집이 아니라서 더 애틋했던 것 같다. 인생 역시 깡그리 갈아엎고 새로운 시작을 하는 것이 불가능지만, 서연과 승민 역시 과거의 기억을 가지런히 잘 정돈했으니 그 집처럼 낯익으면서도 새로운 삶을 잘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납뜩이 때문에 대체로 깔깔 웃다가 영화관을 나왔는데 김동률의 <기억의 습작> 때문인지 덩달아 환기된 청춘에 대한 아쉬움 때문인지 조용히 빗속을 걸으며 조금 슬펐다. 절대 돌아가고 싶지는 않지만 '그때가 좋았지' 싶었던 부분도 확실히 더러 있긴 하다. 엄청 잘 만든 수작이 아님에도 이렇게 인기몰이를 하는 건 다들 영화의 틈을 각자의 추억으로 메우기 때문인 듯. 암튼 이 영화 때문에 새삼 봄을 앓는 주변의 중년들이 몇몇 보여서 슬며시 웃음이 난다. 그들에겐 이 영화가 싱숭이생숭이다. ㅋ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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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색볼펜

투덜일기 2012. 4. 3. 11:08

서랍에서 오래된 삼색볼펜을 찾아냈다. 빨간펜이 필요해서 뒤지다 발견하고 쾌재를 불렀지만, 정작 빨간색은 나오지 않았다. 알공달공 더러운 자태로 보아 대체 언제 것인지 알 수 없고, 누가 다 쓴 것을 잘못 넣어두었나 열어보았더니 뜻밖에 심이 모두 새것이다. 왠지 최소한 15년은 넘은 물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정색은 써보니 금세 나왔고, 파란색도 용수철무늬를 서너개 그리고 나니 잉크가 솔솔 잘나왔다. 하지만 빨간색은 며칠째 심심하면 이면지 뒤에다 용수철을 그려대고 있는데도 잘 안나온다. 검정색과 파란색은 흐리게 나오다 이내 진하게 나왔는데, 빨간색은 신기하게도 한참 뒀다 쓰면 진하게 나오다 곧이어 흐려진다. 이유가 뭘까. 원래 빨간펜이 필요했던 일은 하는 수 없이 색연필 심을 가늘게 깎아 대체했기에 꼭 필요가 없는데도 계속 집착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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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삼색펜을 싫어했다. 회사다닐 때 빨간색과 검정색 모나미 볼펜을 테이프로 묶어 한꺼번에 쓰는 사람도 본 적 있고, 그런 사람들의 수요가 있기에 삼색펜이 출현했겠지만 나는 괜스레 마음에 들지 않았다. 뚱뚱한 볼펜자루 모양새부터 싫다고 여겼으나, 비슷한 굵기의 뚱뚱한 만년필은 손에 잡히는 느낌을 좋아했으니 굵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냥, 한꺼번에 다재다능한 느낌, 약삭빠른 쓰임새의 느낌이 싫었던 것 같다. 뭔가 꾸준하고 지긋하지 못하달까. 빨간색, 파란색, 검정색 펜이 다 필요하더라도 나는 굳이 세 자루를 다 갖고 다닐망정, 삼색펜은 체신머리 없다며 쓰지 않았다. 한 가지 색을 쓰다가 다른 색 뒤꼭지를 눌러 심을 집어넣을 때 나는 찰칵 소리도 싫었다. 유독 볼펜똥이 많이 나왔던 것도 같다. 싫어서 안 썼다며 이토록 단점을 많이 알고 있는 건 실제로 꽤나 많이 써봤다는 뜻인가? ㅋㅋ 암튼 어떻게 된 사연으로 내 책상서랍에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보니 엄청 대단한 발명품이라 특허도 당연히 받았을 것 같은 물건이다. 사람으로 치자면 다방면에 재주 있는 사람, 멀티플레이어다. 그러니 걸핏하면 열등감에 시달리는 내가 싫어할만도 하다. 새삼 나는 물건에까지 질투를 했던 인간인가 싶어져 좀 웃기다. 어쨌든 이제는 멀티플레이어 팔방미인에 대한 시기심보다 존경심을 품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니 삼색펜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겠다 싶어진다. 쓸 일도 없으면서 빨간색도 어떻게든 나오게 하려고 집착하는 시도가 그 마음의 표현일까.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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