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을 볼 때 지구를 위해선 푸드 마일리지가 적은, 이른바 '로컬 푸드'라는 걸 골라야 한다는 건 알지만 실천에 옮기기란 쉽지가 않다. 일단 선택의 여지가 없는 걸 어쩌라고! 그냥 '국내산'이라고만 적혀있지 정확한 재배지까지 표기된 채소도 많지 않지만, 포항초, 제주 무, 제주 당근, 제주 감자... 같은 건 먼데서 왔어도 사고봐야 되는 걸 뭐. 한단 천원짜리 시금치와 그 세배 가격인 포항초 시금치는 맛이 워낙 달라서 비싸도 포항초나 섬초를 사먹게 된다. 게다가 난 또 시커먼 제주 흙이 묻어 있는 당근이나 감자를 보면 또 엄청 맛있을 것 같아서, 혹시 '파주'나 '강원도' 꼬리표를 단 다른 제품이 있더라도 제주도 먹거리를 사고 싶은 마음이 든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왔을 텐데... 하는 생각에 좀 찔려하면서도.

 

단호박도 마찬가지다. 제철음식만 먹고 산다면, 굳이 태평양 건너 날아온 뉴질랜드산 단호박을 사지 않아야 하는데 단호박을 워낙 좋아한 나머지 통 그냥 지나치질 못한다. 요리랄 것도 없이 쪄서 치즈랑 아몬드만 얹어 먹어도 얼마나 훌륭한 맛이 나는데 ㅠ.ㅠ (물론 쪄서 그냥 먹어도 좋다.) 게다가 단호박을 찌기 전에 긁어낸 호박씨도 좀 말렸다가 까먹으면 얼마나 맛있다규!  일일이 껍질을 까기가 좀 귀찮기는 하지만, 어려서부터 앞니로 호박씨를 오독오독 까먹는 재주를 익혀둔 덕분에 크게 성가실 것도 없다. 씨가 좀 덜 여물었을 땐 아쉬워하면서 그냥 버리지만, 단호박을 딱 쪼갰는데 튼실한 씨앗이 다닥다닥 매달려 있으면 말렸다가 밤참으로 까먹을 생각에 흐흐흐 므흣해진다.

 

혹 어려서 부르던 이런 노래를 기억하는가? (심지어 학교에서 배웠다!)

'사과 같은 내 얼굴 예쁘기도 하지요, 눈도 반짝 코도 반짝 입도 반짝반짝'

'호박 같은 내 얼굴 미웁기도 하지요, 눈도 삐뚤 코도 삐뚤 입도 삐뚤삐뚤'

'오이 같은 내얼굴  길기도 하지요, 눈도 길쭉 코도 길쭉 입도 길쭉길쭉'

(미모 지상주의를 부추기는 이런 노래는 완전히 사라졌기를 빈다 -_-; 하긴 조카들이 부르는 거 통 못들어봤으니 다행)

그런데 나는 이 노래를 배우면서도 호박이 삐뚤삐둘 못생겼다는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내눈엔 호박 예쁜데? 게다가 호박꽃도 못생긴 꽃의 대명사로 통하는데, 내 눈엔 샛노랗고 통통한 것이 이쁘기만 한 걸! 대체 왜? 비슷하게 생긴 나리꽃이나 수선화보다 못할 게 뭔가!

 

할아버지댁에 살 때 마당에서 애호박과 늙은 호박, 화초 호박을 종류별로 키웠기 때문에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탐스러운 샛노란 꽃이 피었다가 꽃이 시들면서 그 끝에 콩알만하게 열매가 맺혀서 하루가 다르게 자라는 모습이 얼마나 예쁜지 모른다. 노끈을 매달아 덩굴손이 뻗어나가 자라도록 기른 애호박은 적당히 크면 뚝 따서 된장찌개도 끓이고, 새우젓 넣고 볶아도 먹고, 송송 썰어 칼국수나 수제비도 해먹었는데, 요즘 마트에서 보는 인큐베이터 애호박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단맛이 났었다. 늙은 호박은 어린 내가 들 수도 없을 만큼 크게 자란 걸 광에 쌓아두었다가 '한 놈씩 잡아서' 호박죽도 쑤고, 호박고지로 만들어 시루떡에도 넣고... 또 뭘 해먹었더라.

 

하여간 할머니가 늙은호박에서 긁어낸 굵은 호박씨도 잔뜩 말려놓았다가 간식으로 오독오독 까먹으면 그렇게 맛있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땐 '뒷구멍으로 호박씨 깐다'는 말이 생긴 이유도 하도 맛있어서 몰래 먹는다는 의미로 이해될 정도였다. 진짜로, 이 속담의 유래는 뭘까나. 내숭떨고 앞뒤가 다른 사람을 가리키는 말일텐데 왜 하필 호박씨? 앞니로도 까기가 어려운데, 뒷구멍으로? ㅋㅋㅋ

 

하여간 오늘 저녁에도 단호박을 쪘는데 호박 자체는 단단하고 맛이 있었느나 안타깝게도 씨가 덜 여물어 그냥 긁어버려야했다. 눌러보니 죄다 쭉정이. 단단하고 맛있는 단호박을 고르는 눈은 이제 얼추 익혔는데, 아직도 겉으로 봐서 씨앗의 여물기까지는 장담할 수가 없다. 색이 진하게 잘 익었어도 씨앗이 덜 큰 이유는 뭐람. 그나마도 바다건너 오느라 탄소마일리지 팍팍 늘렸을 뉴질랜드 단호박은 다른 수입 농산물에 비해 거부감이 덜하다. 나라에 청정지역이 많다고 그곳 농부들이 농장에서 키우는 수출용 호박에 농약이니 비료니 안 쳤을 리 없지만 그냥 나의 편견. 뉴질랜드 농부들은 어쩐지 먹거리에 심한 장난까지 치지는 않겠지...

 

나무샘 블로그에서 강요배의 호박꽃 그림을 본 순간 포스팅 거리가 생각나서 시작은 했는데 결론은 나의 식탐으로 끝나누만. 째뜬 오늘 밤참은 찐 단호박이고, 호박과 호박꽃은 언제 봐도 예쁘다!! ㅎㅎㅎ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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