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의 굴레

삶꾸러미 2006. 11. 21. 01:30

경제 자립도가 떨어지는 미혼의 딸이 집에 얹혀 살면서 겪는
미묘한 불편함을 토로한 파피루스의 글에 몹시 공감하며
나도 몇자 적어볼까.

우리 엄마가 수십 년째 수시로 아프긴 했지만
정말이지 나는 가족이 굴레라는 생각을 아주 최근까지는 전혀 해보지 않았더랬다.
오히려 가족은 내가 언제든 기댈 수 있고 돌아가 안길 수 있는 최후의 보루이자
비교적 늦게 꾸기 시작한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날개 같은 존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어려서부터 부모님은 맏딸인 내 의견을 대단히 존중해주셨고
나이차가 그리 크지 않은 두 남동생들도 다른 집과 달리 누나에게 고분고분했다.
유독 의가 좋은 우리 삼남매는 아무래도 어려서부터 병든 엄마를 함께 지켜봐온 동병상련과  이해 때문일 거라고 언젠가 적어놓은 기억이 나는데, 이제는 결혼해 분가한 두 동생들과 올케들, 심지어 조카들까지도 나에겐 분명 큰힘이 되는 재산이다.

내가 하고 싶은 일이나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어차피 부모님과 상의를 하더라도 거의 내쪽에서 부모님을 설득시키는 편이었으므로,
두세 번 직장을 옮길 때도, 결국 아예 월급쟁이 생활을 '때려치우겠다'고 선언했을 때도
마뜩찮아하긴 하셨지만 큰 반대는 하지 않으셨으며
심지어 결혼문제에 대해서도 별다른 강요는 없었던 셈이다.
부모님의 집요한 강요로 몇년 새에 선을 백번쯤 보다가 결국 떠밀리듯 '아무나'하고 결혼을 선택한 지인들도 없지 않으니, 그런 점에서도 우리 부모님에겐 감사할 일이다.

요즘에도 크고작은 집안 대소사엔 어김없이 내 의견이 크게 작용하고 있는 데다
부모님이 연로해지시면서 아직도 경제적으로는 분명 내가 부모님께 얹혀살고 있기도 하지만
정신적으로는 내가 부모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된다.
어느덧 새로운 변화는 무조건 겁부터 내시고, 익숙한 습관이 달라지는 건 용납이 안되며
사소한 소홀함에도 노여움부터 타시는 부모님의 모습을 보면
어느새 이렇게 늙으셨나 가슴이 찡하고 속이 상한데,
또 동시에 나로선 마구 짜증이 나는 걸 어쩔 도리가 없다.
융통성 많고 쿨~하던 젊은 사고방식의 우리 부모님은 어디로 갔나 싶어서.

부모 눈엔 장성한 자식도 늘 어리고 철없고 안쓰럽고 걱정스러운 존재라고는 하지만
특히 우리 부모님은 수입도, 일감도 부정기적이고 밤샘을 밥먹듯 해야 하는 나의 직업을 몹시 안쓰러워하다 못해 별볼일 없다 여기시는 듯하다.
워낙 책과는 거리가 먼 분들이시긴 하지만 ^^;;
책이라는 결과물과 '소정의' 번역료로 주어지는 내 노동에 대한 대가가 마땅찮으신 거다.
하긴.. 이 나라에선 번역으로 밥 벌어먹기가 원래 어려운 일이긴 하다.
좁아터진 출판 시장에서 점점 책을 읽는 인구는 줄어드는 판국이니 번역료가 매년 오르는 건 고사하고, 최소한 물가 수준에 맞춰 인상되길 바라는 것도 어려우니
소박한 성취감과 중뿔난 명예욕이 없다면 동년배 월급쟁이들 연봉과는 비교도 안되는
수입에 만족하며 살 수 없는 직업이 바로 번역이니까.

그렇다보니,
난 늘 가난한 딸로 낙인이 박혀 있는데... ^^;;
사실 욕심을 부려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일을 하면 충분히 가난하지 않은 번역가로 살 수 있는데도 내가 맡고 있는 가족의 짐 때문에 그러지를 못한다는 게 문제다.
올빼미 생활을 탈피해 남들 일할 때 능률 높여 일을 해보겠다는 생각으로 장만한 작업실도
한달에 절반은 거의 비워두어야 하고, 그만큼 일 할 시간을 손해보는 이유는
분명 병든 엄마를 곁에서 지켜야 하는 날들과 내가 몹시 싫어하는 사소한 집안일,
반찬걱정 따위에 드는 소모적인 에너지 때문이다.

언제나 착한 딸노릇을 자처하던 나도 나이는 못 속이는지
이젠 좀 지친다.
일주일에 한 두번은 가사도우미를 들여서 '맛있는 냄새가 나는 지옥'에서 좀 벗어나고 싶고
병든 엄마 걱정 없이 아무 때나 마음 내킬 때 여행도 떠나고 싶고
결혼이 아닌 한 절대 독립은 안된다는 원칙을 고수하시는 부모님을 '배신'하고
독립을 꿈꾸고 싶다.

집에도 컴퓨터가 있는데도 굳이 오후 늦게라도 작업실엘 나가 밤늦도록 일하며,
편히 숨쉴 수 있는 나만의 공간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가 느끼면서도 마음이 늘 편하지만은 않다.
일하는 시간이 자유로운 늙은 딸이 가능하면 당신들과 집에서 많이 '놀아주기를' 바라시는 부모님이 집에서 눈이 빠지도록 기다리는 걸 뻔히 알기 때문이다.
게다가 좀 여유롭게 친구들이라도 만나고 돌아다닐라치면 두 분이 어찌나 섭섭해하시는지!
신데렐라 귀가시간에 더하야 이젠 아예 놀러 나갈 때마다 죄책감을 들게 만드신다.
그렇다고 내가 집에 있다 해도 부루퉁하고 무뚝뚝한 딸답게 딱히 즐겁게 놀아드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얼마 전 만난 친구는 가족 때문에 지친다는 나에게
너무 뒤늦게 깨달았다고 핀잔을 주었다.
남들은 20대에 이미 깨닫는 거라나.

하지만 가족은 나에게 굴레이면서 여전히 날개이기도 한다는 걸 확신한다.
그렇기에 떨치고 떠날 생각과 잡힌 발목의 아픔을 동시에 느끼는 것일 테고.

살아갈수록 참... 가족은 어렵다.

Posted by 입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