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70년대 유머가 생각나 제목을 저리 적었다. 저게 세상에서 제일 날씬한 일본 사람 이름이었던가? 헛. 답은 생각나는데 질문이 정확하게 떠오르질 않는다. -_-'
암튼 서울경기 지방에 호우경보가 내렸다지만 희한하게도 내가 딱 왕복 100km를 운전해 친구를 만나러 갔다가 오는 동안엔 무서운 폭우가 계속 나를 피해다녔다. 길이 너무 안 막힌 덕분에 약속시간보다 무려 30분이나 일찍 도착해 이리저리 마트를 배회하다 시간 맞춰 커피집엘 가보니 친구는 비옷에 장화까지 신고 앉아 있었다. 내가 주차장으로 들어설 때만해도 환하게 말짱했던 바깥 하늘은 시커멓게 변해 우산으로도 도저히 가릴 수 없는 폭우를 퍼붓는 중이었다. 무섭게 내리던 비는 우리가 커피, 밥, 또 커피를 곁들여 긴긴 수다를 떠는 동안 다시 잦아들어, 느즈막히 집으로 돌아오는 밤길 또한 수월했다. 결국 나는 챙겨간 우산을 단 한번도 펴지 않았고, 세찬 빗줄기에 자동세차 하듯 차체에 떨어진 무궁화 꽃잎 좀 씻겨 내려가길 빌었던 바람은 수포로 돌아갔다. 그러더니 귀가하자마자 다시 천둥치며 쏟아지는 폭우가 새벽까지 그치질 않고 있다. 베란다 지붕에 '빵꾸'라도 낼 것처럼 몹시도 요란하게.
폭우속 밤길 운전이 얼마나 위험한 줄 잘 알기에 이런 날 교묘히 시간차 공격을 해준 비가 고맙긴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오래 벼르다 세차하고 나면 꼭 비오는 징크스가 쌓여 이젠 빗물 자연세차도 못하게 '비사이로 막가' 신공까지 불러온 것인가 싶어 킥킥 웃음이 났다.
하도 오래 된 집인 데다 주변에 나무와 풀이 많아서 온갖 곤충(사마귀, 노린재, 호랑나비 따위 뿐만 아니라 온갖 해충 포함;;)들과 자주 맞닥뜨리기는 하지만 바퀴벌레와 개미는 없다는 것이 나의 자랑이었는데 그 자랑이 무색해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지난 주 엄마네 부엌에 개미가 출현 한 거다! 안경을 끼기는 했으나 작은 물체는 돋보기가 필요한 엄마는 '새까맣고 엄청 빠르고 아주 작은 벌레'가 토스터기 주변에 나타나 그걸 잡느라 땀을 한 바가지는 흘렸다고 말했다. 몇 마리 못잡고 다 도망가버렸다나. 엄마는 그 뒤로 검은 점만 봐도, 하나못해 후추가루 한 알갱이만 봐도 다 움직이는 것 같은 노이로제에 시달렸다. 혹 바퀴벌레 새끼가 나타났나 하고 소스라치게 놀라 진상파악을 해보니, 다행히도 개미였다. (개미가 바퀴벌레보다는 깨끗할 거라는 근거 없는 나의 믿음은 과연 옳을까?) 어쨌거나 아주 작은 불개미는 아니고 길이가 한 3mm쯤 되는 개미 녀석들이 최초 출현 이후 자취를 감추었다가 서너시간 쯤 뒤 이번엔 싱크대에서 헤매고 있었다. 정말 어찌나 몸놀림이 빠른지 몇마리 잡기도 전에 달아났다. 대체 어디서 나타난 놈들인가 추적해보니 뒷베란다로 올라온 모양이었다.
나는 곧장 개미박멸을 위한 '검색'에 돌입했다. 사용후기에 '노벨평화상'이라도 주고 싶다는 말까지 올라와 있는 과립형 '잠자*'와 '개미박*' 제품이 괜찮은 듯했다. 얼른 약국에 가서 두 종류 개미약을 사와 개미 출몰 지역에 붙여놓았다. 원래 개미는 자꾸 죽이면 일개미 개체수가 줄어드는 걸 염려한 여왕개미가 더 많은 개미알을 낳기 때문에 함부로 죽이면 안된단다. 먹이인 척 유인해 과립형 약을 가져가 서로 나눠먹게 하면 여왕개미까지 모두 박멸할 수 있다고 설명서에 써 있었다. 최초 개미가 발견된 식탁 주변과 싱크대 주변, 뒷베란다 문 근처 다섯군데에 개미약을 붙여놓고 다음날 확인했더니, 문에 붙여놓은 약만 몽땅 사라져 빈통이었다! 다른 약은 거의 그대로인데! 해서 같은 자리에 새 약을 더 붙여놓고 계속 개미가 출몰하는지 지켜보았는데 우왕~ 정말 이틀만에 개미가 완전히 사라졌다! (하기야 나타난 것도 순식간에 갑자기 나타났으니 걔네들이 운 나쁘게 길을 잃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먹을 것도 없는 데서 우왕좌왕 방황하는 것 같긴 했음)
안심하고 있으려는 찰나, 아 글쎄 그제는 내 방에서 엄마가 또 개미 한 마리를 발견하곤 말했다. 엄마가 진짜 노이로제에 걸렸나보다. 자꾸 까만 점들이 움직이네.... 하지만 그건 엄마의 착각이 아니라 새로운 종의 개미였다! 다른 집이라서 개미 종류도 다른지 엄마네 집 개미의 절반도 안되는 크기였다. ㅠ.ㅠ 이미 퇴치 경험이 있어서 크게 당황하진 않았지만 하필 개미가 나타나는 곳이 내방 문틈이라 앞으로 잠은 다 잤구나 싶기도 하고, 개미 사라질 때까지 컴퓨터방에서 잘까 고민을 했다. 어쨌거나 또 다시 개미약을 문앞에 붙여놓고 주의 깊게 관찰을 했더니 이놈들은 워낙 몸집이 작아서 그런지 비실비실 움직임도 느리고 벽을 기어오르다간 이내 미끄러져버렸다. 그러니 미끄러운 플라스틱 통안으로 기어오르는 건 언감생심 불가능한 일인 듯했다. 결국 약통 입구를 놈들이 들어가기 좋게 낮추고 각도를 문턱과 똑같이 만들어준 다음 불까지 끄고 지켜보자(불이 환하면 점으로 착각하게 만들려는지 놈들이 안움직이더라!) 드디어 놈들이 한마리씩 약통으로 기어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나서 다음날 투명한 개미 약통을 살피니 조금 과립이 줄어든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애매했다. 여전히 개미는 문턱 아래로 한 마리 기어다니고... 이 종의 개미에겐 약이 효과가 없는 것인가 두려워했던 것도 잠시, 만 하루가 지나자 결국 이번 개미도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캬... 신기하다고 할밖에!
생각해보니 난데없이 개미들이 종별로 인간의 영역을 침범한 건 폭우 때문인 것 같다. 원래도 우리 마당엔 온갖 크기의 개미들이 평화롭게 공존하고 있었다. 앵두도 딱 한번 따고 안따먹어 죄다 바닥에 뒹굴었으니 폭우 내리기 전까지는 아마 먹이도 충분했을 거다. 게다가 벚나무인 줄 알았던 옆집 나무 세 그루 중 하나는 살구나무여서 열매가 꽤 많이 열렸기에 익으면 따먹으려고 별렸더니 나보다 먼저 새들이 죄다 파먹어 그 잔해까지 우리 마당으로 떨어지지 않았던가. 그런데 하도 비가 많이 오니 땅속 개미굴은 다 물바다가 됐을 테고 먹이는 빗물에 쓸려 다 사라지고.. 그러다보니 먹이를 찾아 떠난 일개미 원정대가 벽틈을 타고 이층까지 올라온 게 아니었을지. 그런데 사악한 인간은 약을 쳐서 또 씨를 말려버리려 들었고...
뉴스를 보니 폭우 때문에 전국에 피해가 말이 아니다. 곧 제철이라 오매불망 맛볼 날을 기다렸던 달콤한 복숭아는 출하를 며칠 앞두고 다 썩어버렸대고 물에 잠긴 게 아니라 아예 진흙에 덮여버린 논도 부지기수란다. 가뜩이나 살인적인 물가인데 만만했던 채소값도 하늘까지 치솟을 예정이래고... 이재민들이 또 수백명이라는데 이 마당에 개미타령 하고 있으려니 문득 부끄럽다. 시작하지 말았어야 하는 얘기였나. 암튼 아무리 장마라지만 이제 비 좀 그만 내려서 비 피해도 더는 발생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얘기로 급마무리.
일년 열두달 가운데 내가 가장 좋아하는 5월이 간다. 찌뿌드드 잔뜩 내려앉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와 함께. 뭔가 아쉽다. 하기야 내눈에 최고로 예쁜 연초록의 시기는 어느 틈에 지나버렸다. 어제 보니 밤마다 유독 그윽하고 달콤한 향기를 뿜던 아카시아꽃이 다 말라 떨어져 부서진 누런 팝콘처럼 땅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마저 이 비에 다 씻겨 사라지겠다. 그러고는 초록이 한층 더 짙어지겠지.
날씨도 초록도 기분도 가장 싱그러워야할 5월은 올해 축 처져 보냈다. 계획은 원래 어기려고 있는 것이라는 쉰소리로 변명을 하기엔 민망할 정도로 하려고 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해야할 것들을 그냥 흘려보냈다. 이렇게 마냥 힘빼는 삶도 가끔은 필요하다, 스스로 속닥이며 충전을 바랐으나 눈금은 오르지 않았다. 조바심 내지 말아야지, 하며 또 그냥 늘어졌더니 한달이 후딱 가버렸다. 이젠 정리가 필요할 때.
마감이 닥쳐야 손발이 움직이는 버릇은 아무래도 평생 가져가야할 악습인 듯하다. 또 다시 돌아온 세금신고의 계절. 해마다 개악되는 게 틀림없는 오리무중 세무신고 프로그램과 홀로 싸우다 결국 어제 세무서에 찾아가 해결 안되는 문제를 직원에게 물어본 다음에야, 마지막날인 오늘 전자신고를 마쳤다. 그래도 마감 안 어긴게 어디냐고 자평. 늘어져 뒹구는 동안 그나마 잘한 일이 있다면 독서. 한달간 7권 읽어, 드디어 올해 월평균 세권을 넘겼다. 영화는 두 편. 전시관람은 전무. 타일깨기 기록은 194점. 일은 당연히 뒷전.
마감 독촉전화가 무서우면서 왜 그게 채찍질은 안되는지 의아한 나날이다. 작업 계획표는 두달째 어긋나고 있다. ㅎㅎㅎ6월의 화두는 다시 심기일전. 일부러 콘서트를 두 개나 가기로 했다. 돌이켜보면 씩씩하게 잘 놀러다닐 때 일도 잘한다. 방구석에 처박혀 노상 컴퓨터 앞에만 앉아있는다고 일을 잘하는 게 아니다 나는. 놀 욕심에 힘이 나는지 어디 두고보자. 어쨌든 이렇게 5월이 간다. 그러니까 꿍얼꿀얼 이 변명은 치열하게 살아야하는 5월을 이렇게 보내서 미안하다는 사과문이다.
토요일에 비가 꽤 온다는 일기예보는 들었지만 요란한 천둥번개를 동반한 비가 내릴 것은 예상하지 못했었다. 밤중부터 뒷베란다 섀시를 두들기는 빗소리가 매우 요란한 비가 내리며 간간이 천둥벼락이 쳐댔다. 천둥을 유독 무서워하는 사람은 아닌데도 공연히 겁이 났다. 번개가 치는 순간 두꺼비집이 내려앉는 건 아닌가, 찌르르 벼락이 전선이나 케이블을 타고 들어와 컴퓨터를 태워버리는 건 아닌가 갖은 상상을 다 하느라 통 집중이 되지 않았다. 멀리서 그르르릉 천둥의 전조가 시작되면 몸이 먼저 긴장을 했다. 그러다가 천둥이 치면서 내리는 비를 뜻하는 말이 뭐였더라, 뭐였더라 생각이 나질 않아 또 한참 정신 끄나불을 한 자락 풀어놓았다가 끝내 방금 떠올렸다. 그렇다. 뇌우(雷雨). 몇시간 만에 생각해낸 주제에도 기뻐하다 보니 빗줄기도 얇아졌는지 소리도 덜 요란하고 천둥번개도 잠잠하다. 그러면 뭐하나 온 새벽을 다 황망히 허비하고 나서 머리는 이미 멍해진 시간인 걸. 파랗게 밝아오는 새벽에 느껴지는 묵직한 피로감은 때로 쾌감일 때가 있다. 몸과 정신을 꽤 잘 쓰고 나서 마땅한 휴식을 취할 준비가 됐을 땐 그러하다. 그럴 때 이부자리에 누워 몽근한 잠에 빠져들면 온 세상이 내 것처럼 뿌듯하고 행복하다. 그러나 오늘은 아직 그런 행복을 느낄 자격이 없다. 멍해진 머리를 다시 바짝 조여야 한다. 어렵사리 뇌우 하나 떠올렸다고 기특해할 게 아니라 그걸 잊은 머리에 꿀밤을 먹여야 하느니라. 아, 입이 방정인가. 빗소리가 다시 굵어졌다.
차두리가 이상하게 엇박으로 몸을 움직이며 "간 때문이야~"라고 노래를 불러대는 CF를 볼 때마다 비싯 웃음이 난다. 그 제약회사는 그 광고에 힘입어 매출이 엄청나게 올랐다니, 확실히 성공한 광고 사례다. 차두리의 매력과 중독성 강한 CF송 덕분이기는 하겠지만, 내 생각엔 어린시절부터 누구나 "@@때문이야!"라고 핑계대는 화법에 익숙해서 광고가 더 친근하게 다가왔던 게 아닐까 싶다. 친구랑 놀다가도 "너 때문에 망쳤잖아!"라거나 "쟤 때문에 안 놀아!", 부모나 동생에게 "엄마(너) 때문에 TV 못 봤잖아!"라고 했던 기억 누구나 있지 않을까.
어제는 종일 비 내린다고 괜히 분위기 잡다가 정말로 호박 부침개 부치면서 빈속에 먼저 캔맥주를 따서 벌컥벌컥 마셨더니 전도 술도 어찌나 맛이 있던지 헬렐레 기분까지 좋아졌다. 거기까진 좋았는데 간만에 마신 술에 적응이 안됐는지 금세 알딸딸, 결국엔 초저녁에 뻗고 말았다. 밀린 일 할당량은 어쩌라고 술을 마셨던고 나중에 후회해봐도 소용없는 일. 벌개진 얼굴로 누워 속으로 외쳤다. 비 때문이야! 호박 부침개 때문이야! 맥주 때문이야!
물론 시작은 나 때문이다. ㅋㅋ
블로그형 인생답게 호박 부침개 인증샷도 남겼다. 애호박 반개와 양파 반개, 작은 감자 한개를 채썰어서 부침가루 넣고 쓱쓱 반죽해, 프라이팬에 노릇노릇 부쳤다. 밖엔 소리없이 비가 내리고, 넉넉히 기름 두른 팬에 호박전이 치지직 익어가는 소리부터 아주 맛이 있었으니 소량의 맥주에도 취한 게 당연한 건가. ^^
광고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차두리의 간 영양제 광고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반대로 요즘 볼 때마다 내가 기분나빠하는 광고가 하나 있으니, 바로 ㅇ사의 브랜드 광고다. 아리따운 아이돌 여가수들이 떼로 몰려나와서 엄마를 하녀 부리듯 "엄마, 시원한 물 한잔 부탁해~!", 세수하고 나서는 "엄마, 수건 좀 부탁해!"라는 식으로 온갖 잔심부름을 시키며 "부탁해~!"라고 외치다가 그럼 엄마는 누구한테 부탁하느냐고 묻는 줄거리다. 엄마는 ㅇ사에 부탁하면 된다나. 악!!! 자주 보는 건 아니지만 볼 때마다 진짜 짜증난다. 신경숙의 소설이 워낙 잘 나가니까 그 제목을 패러디했다는 건 알겠으나, 내 맘에 안드는 건 안드는 거다. 물론 아직도 자식을 하늘 떠받들듯 공주 왕자 모시듯 보필하는 엄마들이 세상엔 많겠지만 이건 뭐, 물 한잔도 엄마에게 시켜먹으라고 대놓고 부추기는 것도 아니고 뭐냐고! 나의 조카들은 대여섯 살만 되면 물은 자기가 알아서 따라먹을 수 있더구만, 왜 다 큰 멀쩡한 지지배들이 겨우 손톱 칠하느라고 엄마를 부려먹는지 원. 혹시라도 그 광고 때문에 애들이 새삼스레 엄마를 더 부려먹게 될까봐 염려하는 건 지나친 생각일까. -_-a
방사능 성분이 섞였네 마네, 외출을 삼가야 하네 어쩌구 언론에선 호들갑을 떨지만 어쨌든 나는 올해도 봄비가 반갑다. 새벽까지 기다려도 내리지 않더니만 어느새 똑똑 옥상에서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잠을 깼다. 자동차가 가끔씩 젖은 골목길을 지나며 내는 소리는 기름 두른 프라이팬에서 지지직 전이 익어가는 소리 같다. 비가 오면 부침개가 떠오르는 이유가 빗소리와 전부치는 소리의 음역대가 비슷하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하는 이야기를 TV에서 본 것 같다. 그 뒤론 비와 부침개와 술한잔을 연결해 생각하는 조건반사가 더욱 심해졌다.
어쨌거나 해마다 하는 나의 봄비 타령은 곧 꽃 타령이다. 어제 나가보니 개나리 목련은 죄다 피었고 올해도 가지치기를 건너뛴 앵두나무에도 담장 너머로 가지를 뻗어 우리집 베란다까지 손을 뻗은 이웃집 벚나무에도 꽃눈이 다닥다닥 이제 곧 빵 터트릴 태세를 갖췄다. 지금 두 나무를 그림으로 그린다면 나뭇가지를 분홍색으로 덧칠해야 할 만큼. 봄꽃은 꼭 그렇게 무심한 내 옆구리를 쿡 찌르듯이 갑자기 피어나는 느낌이다. 분명 조금씩 조금씩 꽃눈을 키워왔을 텐데도 눈 뜬 장님이었던 내 탓이긴 하지만, 어쩌면 뚯밖의 횡재처럼 반가운 봄꽃을 보려고 일부러 눈감고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며칠만 더 눈 질끈 감고 있으면 튀밥 같고 솜사탕 같은 앵두꽃, 벚꽃이 요것봐라 하면서 짠 피어 있을 거다. 오늘 내린 봄비에 그날이 좀 더 당겨지려나?
일기예보를 안 봐서 비온다는 소식을 모르고 있었는데 새벽에 난데없이 요란하게 비가 내린다. 아파트도 그렇고 콘크리트로 지은 요즘 집에 살면서 밖에 비오는 소리를 듣기가 쉽지 않은데 내가 유독 빗소리에 민감한 이유는 오래된 우리집 뒷베란다 쪽으로 덧씌운 섀시 때문이다. 알루미늄인지 뭔지 알 수 없는 지붕을 후두두둑 때리는 빗소리가 좀 요란해야지. 빗줄기가 가늘면 제 아무리 예민한 귀를 지녔대도 나 역시 비오는 걸 못 알아차릴 때가 많지만, 지금처럼 빗줄기가 굵을 땐 옛날 '슬레이트' 지붕을 덧댄 기와집에 살 때처럼 반사적으로 창밖을 내다보게 된다. 보안등에 비친 빗줄기가 확연히 보일 정도로 확실히 비가 많이 내리고 있다.
요란한 빗소리를 들으면 어린 시절 다섯식구가 셋방을 전전하며 살 때 가끔 자다말고 물난리를 겪는 경우가 있었던 게 기억난다. 어딘가 깨진 기와 때문에 천장에서 똑똑 떨어진 물이 이불을 흠씬 적신 다음에야 한밤중에 깨어난 부모님이 삼남매를 깨워 이부자리를 한 구석으로 치우고는 물 떨어지는 곳에 대야를 받쳐 놓아야 했다. 어린 우리야 잠자리를 구석으로 옮기고는 곧장 잠이 들었지만나 부모님은 걸레로 물기를 닦고 나서도 대야가 넘칠까봐 밤새 불침번을 서셨을 것이다. 다음날 아침이면 아버지는 곧장 지붕에 올라가 기와 깨진 곳을 확인하셨는데, 그런 일이 워낙 다반사인지 집집마다 마당 한구석엔 기왓장이 몇장씩 쌓여있었다. 어린 눈엔 그냥 쓸모없이 굴러다니는 것 같은 기와를 가져다가 소꼽놀이라도 할라치면 어른들에게 혼이 났다. 그래도 몰래 한장쯤 기와를 훔쳐다가 냅다 깨뜨려서 망까기와 비석치기에 쓸 괜찮은 판판한 돌멩이를 만들어 나눠 갖기도 했지만 말이다.
그 옛날 빗물 떨어지는 천장 아래 대야와 양은 그릇을 받쳐놓으며 부모님은 어두운 얼굴로 한숨을 쉬셨지만 어린 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똑똑 번갈아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가 그저 재미있기만 해서 자꾸 손을 갖다 대며 물놀이를 하려 들었다. 중학생 때부터는 지붕이 새는 집에 살아본 적이 없었지만, 그래도 양은 그릇에 똑똑 떨어지는 빗소리가 재미있는 건 여전해서 처마 밑에 일부러 양동이를 가져다놓은 기억도 있다. 혹시 빗물을 받아서 다른 용도로 쓰기 위함이었던가? 빗물을 받아 며칠 두었다가 어항에 넣어주었던 것도 같고...
아파트에 살면 다달이 관리비 내는 것으로 집안팍의 유지관리와 관련된 모든 수고를 남에게 일임할 수 있으니 그건 제일 편할 것 같다. 하지만 우리집은 몇년에 한번씩 해야 하는 외관 페인트칠도 그렇고 지붕 방수도 그렇고, 매년 해야하는 정화조 청소도 그렇고 일일이 사람을 불러다가 의뢰를 해야한다. 일년에 한번쯤은 사다리 타고 지붕에 올라가서 사방에서 날아온 낙엽이 혹시 배수구를 막고 있지는 않은지도 확인해야 하고. 그 모든 일을 주관하시던 아버지가 안 계시니 이제 그런 것들도 모두 내 책임인데, 과태료 운운하며 구청에서 매년 업체 연락처가 적힌 안내장을 보내오는 정화조 청소 말고는 계속 모르쇠로 일관하고 있던 터라 사실 비만 오면 불안불안하다.
아직은 아래층에서도 어디 비새고 물샌다는 얘기도 없고 방방마다 멀쩡하긴 한데 원래 문제 생기기 전에 올해쯤 미리미리 조치를 취했어야 하는 건 아닌가 모르겠다. 장마철 지나고도 수시로 비가 많이 왔던 지난 여름 내내 지붕에 올라가서 낙엽 치우고 배수구 확인했어야 하는데 어쩌냐고 계속 불안해하시는 왕비마마에게 막내녀석 다니러 오는 날 시키면 된다고 큰소리 뻥뻥 치고는 매번 까먹고 그냥 넘어갔다. 여름도 잘 지났으니 올 겨울은 무사히 넘어가주지 않을까.
갑자기 내린 비는 소나기였나보다. 옛 추억에 골몰해 자판을 두들기는 사이 빗소리가 잦아들었다. 쓸데 없는 생각 그만하고 일이나 더 하라는 배려인가. 흐흐흐. 암튼 이렇게 월요일이 열렸다.
문자 그대로 시궁창에 빠진 건 아니지만 빠진 거나 다름 없다.
조금 전 장대비가 내리는 가운데 조카 배웅하러 버스정류장에 나가 버스를 기다리며 둘이 장난을 치고 있었는데
미친듯이 달려오던 작은 트럭 하나가 도로에 고여 있던 구정물을 나에게 끼얹고는 그대로 달아났다. ㅠ.ㅠ
비오는 날 인도로 물 튀기는 자동차야 가끔 있는 법이라 대강은 예상하고 우산으로 가로막은 적 있지만
우산을 내려 가릴 사이도 없이 빠른 속도로 달려와 그야말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시궁창물을 끼얹고 가는 차는 살다살다 처음이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온몸으로 구정물을 막는 바람에 정민공주는 무사했다는 것 하나.
너무 놀라고 기막혀서 꺅 비명만 내질렀을 뿐, 빌어먹을 트럭의 번호판을 확인할 겨를도 없었다. 놈이 속도를 늦췄더라도 안경까지 구정물로 뿌얘졌으니 제대로 분간이나 할 수 있었을지 어쩔지 모르겠지만, 비오는 날 행인에게 물 튀기는 건 엄연히 범법행위인데 현행범으로 잡지 못한 게 죽도록 안타깝다! 바로 횡단보도 앞이라 운이 좋았더라면 신호등에 걸린 놈의 앞길을 막아서서 사과와 함께 세탁비를 받아낼 수 있었을 텐데! (실제로 십수년 전 장마철에 회사 동료들과 점심먹으러 가다 지나가는 차가 튀긴 흙탕물 뒤집어 쓰고 세탁비 받은 적 있다)
머리칼에서 구정물이 뚝뚝 떨어지고, 웃도리 아랫도리 할 것 없이 흠씬 젖어 신발 속에도 물이 찔꺽거리는데, 너무 억울하고 화가 나고 기가 막혀서 길바닥에 선 것도 잊은 채 막 눈물이 나려고 했다. 그래도 의연한 척 조카를 버스에 태워 보낸 다음 징징거리며 집에 올라오자마자 빡빡 씻었는데도 어쩐지 온 세상의 더러움과 먼지와 병균이 고여있었을 것 같은 도로의 시궁창물 때문에 조만간 피부라도 부풀어오를 것 같은 불쾌감이 사라지질 않는다.
시궁창에 빠졌다가 기어나온 것 같은 행색의 옷은 세탁기에 돌리는 중이고, 운동화도 빨아 엎어놓았는데 생각은 자꾸만 그 소형트럭으로 향한다. 알고 튀겼든 모르고 튀겼든, 비오는 날 버스정류장 앞을 전속력으로 지나가는 만행을 저지른 그 놈에게 저주 있으라! 앞으로 오만년간 하는 일마다 재수 없을지어다! 다음번 장대비 오는 날 똑같이 시궁창물에 빠질 지어다! ㅠ.ㅠ 그래도 마음이 안풀린다.....
비바람 속에 첫날을 보내느라 제풀에 지친 모녀는 전날 밤 일본 말도 모르면서 TV를 틀어놓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음날 일기예보를 살폈지만 안타깝게도 여전히 일본열도 아래쪽은 죄다 우산 그림이었다. 6시부터 울린 모닝콜에 눈을 떠 커튼을 젖혀보니 당연히 주룩주룩 내리는 비. 아침 먹기 전 온천욕 한판의 욕심은 내리는 비와 함께 꼬리를 감추었다. 비오는 날 뽀송뽀송하고 푹신한 이불에서 뒹굴거리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가 말이다! 고소한 부침개 냄새마저 풍겨준다면 금상첨화겠지만...
4월 12일. 또 다시 길을 떠날 시간은 9시였으므로 우리는 최대한 뭉기적거리며 아침시간을 잠으로 축내다 드디어 아침을 먹으러 로비 식당으로 향했다. 둘쨋날의 첫번째 식사는 부페식. 전날 가이드가 나누어준 식권을 내자 기모노를 입은 아주머니 종업원이 빈 접시와 나무 젓가락이 놓인 쟁반을 내밀었다.
우선 자리부터 잡아놓고 한바퀴 휘 둘러보니, 대부분은 일본식 밑반찬과 각종 생선구이류가 대다수였고 식당에 드글드글한 료칸 숙박객도 우리 일행을 제외하면 모두 일본인이었다. 내가 먹을 수 있겠구나 싶은 건 약간의 샐러드와 토마토, 빵, 오렌지 주스, 우유 정도. 원래 아침을 안 먹는 인간이지만 강행군 여행을 떠났을 땐 반드시 잘 챙겨먹는 것이 원칙인데, 아침부터 맥이 빠졌다. 그나마 왕비마마는 먹을만 하다며 하얀 밥 한공기에, 샐러드, 생선구이, 미소시루 한 그릇으로 요기를 했다. 쓴 커피까지 대충 먹고난 나는 방에 올라가서 슈크림이 든 빵으로 배를 채웠고...
숙소를 한군데 정해두고 돌아다니는 여행이 더 좋지만 아쉽게도 이번은 명탕 <순례>라 료칸을 하루씩만 묵어야 했으므로 얼른 짐을 꾸려 내려간 나는 왕비마마를 로비에 앉혀놓고 재빨리 료칸 주변을 살폈다. 대나무와 삼나무가 빽빽하게 둘러싸고 있는 1300년 역사를 간직한 온천 마을에서 그냥 목욕 한 번 한 것으로 만족해야 하다니.. ㅠ.ㅠ 역시 패키지 여행은 내 취향이 아니다.
료칸 앞은 바로 개울이었고 개울을 따라 나무판자가 깔린 산책로 같은 게 조성되어 있었다. 종일 비가 내려 물이 많아진 것인지 찰랑찰랑 흘러가는 개울이 위험해 보이는 듯도 했는데, 못내려가게 하는 표지판도 없는 걸 보면 수심이 깊지 않은 모양이다.
역시나 군데군데 피어있는 벚꽃은 죄다 떨어져 아쉬움을 더했다. 휘날리는 벚꽃 비 대신에 진짜 비를 맞아야 하는 여행이라니 우쒸!
기모노에 노란 우산을 받쳐들고 료칸 앞 다리까지 나와 양쪽에 줄지어 서서 떠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던 직원들의 배웅을 받으며 찾아간 우리의 첫 행선지는 시마네현 마쓰에 시에 있는 마쓰에 성. 우리나라로 치면 행주산성쯤 되려나? 벚나무가 8천그루나 있어서 일본 벚꽃 명소 100선에 드는 곳이라던데 뭥미 싶을 정도로 벚나무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에 이런 엄청난 장수목들이 더 눈에 띄었다. 일본말을 모르니 무슨 나무인줄은 모르겠고 수령이 350년이라고 적혀 있었다.
어쩐지 뿌리 드러난 모습이랑 생김새가 토토로 같은 데서 많이 봤음직하지 않은가?
이런 나무들보다 더 인상적이었던 건 비가 꽤 많이 내리는데도 공원 곳곳에서 위아래 비옷을 입은 사람들이 쉼없이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환경미화원들은 비가 와도 서울 거리를 청소하는 모습을 본 적이 있지만, 공원이나 고궁에선 비오면 아무도 일 안하던데... 주로 갈쿠리 같은 걸로 자잘한 돌이 깔린 성 마당을 고르게 다듬는 사람들이었는데, 계속해서 관람객이 드나들어 발자국이 찍히는 걸 어쩔 수가 없을 텐데도 그러거나 말거나 끊임없이 갈쿠리질을 해댔다. 우리가 지나가서 또 발자국을 만드는 게 민망해질 정도로...
비질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정원수를 관리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가까이 가서 얼굴을 확인하면 대부분 할머니이거나 할아버지였다. 다들 날씬하고 자세가 꼿꼿해서 언뜻 보아서는 노인임을 알 수가 없었는데, 정말로 일본에서 지내는 사흘동안 울 엄마처럼 뚱뚱한 할머니는 단 한명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왕비마마는 더욱 민망해하셨던 것 같다. 그들과 비교되어 걸음도 잘 못걷는 뚱뚱한 노인이 무슨 관광이랍시고 일본을 휘젓고 다니느냐고... 휠체어를 타고서도 구경 다니는 일본 노인들과 맞닥뜨린 적도 있으므로 그들을 가리키며 용기를 북돋아드리려 해보았지만, 그들은 일본 사람이니까 괜찮단다. ㅜㅜ
왕비마마 특별출연 ^
암튼 마쓰에성 천수각은 이렇게 생겼고 5, 6층 높이인 제일 꼭대기까지 가려면 저 가운데 검은 입구로 들어가자마자 신발을 벗어 신발장에 넣어두고, 맨발로 계단을 걸어 올라야 한다. 왕비마마는 절대 올라갈 수 없는 계단이라는 경고에, 입구 들어가자 마자 놓여 있는 관리인 의자에 앉아 우리를 기다렸고 한국 같았으면 절대 안올라가봤을지 모를 성 꼭대기에 엄마를 대신해 오르기 시작했다.
왕비마마의 눈빛은 당신도 올라가보고 싶다는 열망과 좌절을 내비쳤기 때문이다.
과장 안하고 경사가 6, 70도쯤 되는 나무 계단들은 확실히 노인들에게 무리였고, 층마다 무사들의 갑옷이며 투구, 옛날 지도, 무기류, 우물이 전시되어 있는 걸 보는둥마는둥 뛰다시피 가파른 사다리처럼 생긴 계단을 층층이 올라가 증명용 사진을 찍었다.
왕비마마에게 사진으로라도 보여드려야하니까... 멀리 보이는 건 신지코 호수라는 것도 같고.. 어쨌든 마쓰에 시내 전경이 내려다보이기는 하더라. 사진에 보이는 저 분홍자줏빛 나무들이 벚나무라는 얘긴데, 8천그루는 다들 어디에 숨은 건지 사방팔방 둘러봐도 잘 안보이기에 내심 벚꽃이 만개했을 때도 별볼일 없었겠구라며 괜히 심술을 부렸다. ㅋ
다음으로 이동한 곳은 마쓰에성 바로 옆에 자리잡은 사무라이들의 고택. 해자로 둘러싸인 성안에는 오로지 성주와 식솔들만 살고, 무사들은 성밖에 따로 집을 마련해 살았단다. 암살당할까봐 그랬겠지 뭐. 사무라이들의 집을 복원한 건지 보존해 놓은 집들은 딱 남산 한옥마을이 떠올랐다. 소박하게 기와를 얹고 나무로 지은 집들이며 우물, 부엌에 놓인 그릇, 대청마루 다다미방 한 가운데 앉혀놓은 사무라이 마네킹까지! ㅎㅎ
수수한 집들은 뭐 그리 예쁘다는 생각이 안들었는데, 굵은 모래인지 자잘한 자갈인지 암튼 신발에 닿는 감촉이 좋은 정갈한 마당은 부러운 마음이 들었다. 구석구석 쏘다니는 대신 툇마루 비슷한 데 앉아 쉬고 있다가 문득 발견한 것은 나무에서 느릿느릿 기어가는 달팽이 한마리! 크기가 엄청 컸다. 집에서 쌈채소 씻다가 작은 민달팽이를 더러 발견한 적은 있어도 실제 집 매달고 기어가는 달팽이를 목격한 건 최소한 20년은 넘은 것 같아 더 반가웠다.
일본 달팽이!
무사의 집에서 나오면 길 건너편에 바로 강물 같은 해자가 흐르는데, 우리도 저 배를 타고 해자를 한바퀴 돌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해자를 가로지르는 다리가 총 몇개라던가, 그런 설명은 당연히 까먹었는데 암튼 저 배(저래 뵈도 이름은 호리카와 유람선!)를 타고 나즈막한 나무다리를 지나려면 위에 씌운 지붕이 내려와 더욱 납작해지고 안에 탄 승객들은 잔뜩 고개와 상체를 수그려야 한다. 추울 땐 코다츠도 마련되어 있다고 해서 내가 드디어 코다츠를 경험해보는가 기뻐했더니만, 그래도 봄이랍시고 코다츠는 없고 이불만 놓여있었다.
사실 이날은 전날만큼 비바람도 심하지 않고 기온도 그리 낮지 않아서 나는 크게 추운 걸 몰랐지만, 왕비마마는 50분간 배를 타는 사이 춥다고 덜덜 떨으셨다. 이불이라도 있으니 어찌나 다행인지!
뱃사공 할머니, 허락받고 사진찍었다. 막판엔 노래도 불러주심^^
이불 뒤집어쓴 왕비마마 또 출현
한국 관광객이 꽤 많이 오는지, 뱃사공 할머니는 지붕이 내려오면 숙이는 연습을 처음에 한두번 시키더니 이내 한국말 안내방송을 틀어주었다. 물가에 서 있는 집들을 보노라니 가보지도 않은 베네치아가 잠깐 떠올라 이 무슨 엉뚱한 비약인가 싶기도 했는데, 아주 낮은 다리를 지나는 동안 네다섯 번 정도 지붕이 내려와 다 함께 찌그러져야 하는 경험이 예상외로 꽤나 재미있었다.
배타고 지나다 보니 좀 전에 가본 사무라이 저택 앞으로 빨간 버스도 지나가고...
저 멀리 천수각도 올려다보이고....
다리마다 난간 조각도 달라서 아주 짧은 다리도 있고 아래쪽은 콘크리트로 된 다리도 있는데, 주로 사람들만 건너다닐 수 있는 좁은 다리들이 훨씬 예쁘더라.
유람선을 끝으로 오전일정은 끝이 났으니 기다리던 점심시간. 시마네현 특선음식인 이즈모 소바정식에다 신지코 호수에서 잡힌 빙어 튀김도 나온다고 해서 살짝 기대를 했는데... 했는데...
메밀 소바는 한 젓가락씩 작은 찬합에 세 단이나 들어 있으되 한국에서 먹는 메밀국수처럼 갈은 무와 파를 듬뿍 넣은 국물에 푹 담가 먹는 게 아니고 그냥 작은 주전자에 든 국물을 살짝 부어 <비벼> 먹어야 하는 수준이다. 국물이 워낙 짜서... 거기다 밥 한그릇이 나왔는데 그냥 쌀밥이면 좋겠구만 버섯과 재첩(역시나 신지코 호수 특산물이란다)을 넣어 간장으로 간을 해 지은 거무스름한 밥이었다. 근데 왜 밥맛이 비리냐고!? 빙어튀김은 새끼손가락 만한 거 딱 두 조각. 그나마도 차갑고...
해서 우리 일행은 다들 점심을 먹는둥 마는둥 얼른 아래로 내려가 핫바 같은 걸로 빈 속을 채웠다. 핫바 값은 한국이랑 비슷하게 200엔. 대신 크기는 훨씬 작더라. ㅠ.ㅠ
다음 행선지는 아다치 미술관. 미술작품보다는 정원으로 더 유명한 곳이란다. 일본식 정원의 최고봉이라나 뭐라나 세계적으로 유명하다는데, 나는 금시초문이었고.. ㅋㅋ 그래도 정원이며 마당 예쁜 건 좋아라 하니 기대했는데, 나가볼 수가 없다는 단점이 있다. 아래 사진은 다 거대한 통유리 밖으로 보이는 정원을 찍은 거다. 미술관의 자랑인 살아있는 그림이라고. 미술관 1, 2층을 돌아다니며 통유리창 밖으로 보이는 저런 정원 사진을 매번 찍고보니, 죄다 비슷해보였다. 정원마다 이름도 다 다르더구만...
경치 좋은 산자락 아래 같은 데를 일부러 배경으로 골라서 이렇게 인공미 넘치는 정원수로 꾸미는 게 일본식 정원 가운데서도 무슨 형식이라고 하던데, 한치의 오차도 없이 동글동글 깎아놓은 정원수를 보노라니 나는 어디선가 텔레토비가 튀어나올 것 같아서 슬몃 웃음도 났고, 공원묘지에 가면 수없이 볼 수 있는 봉분 생각도 떠올라 그렇게 아름답기만 하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저렇게 숨막히는 정교함으로 꾸며놓고 사람 발길 못닿게 한 채 구경만 하는 것보다는 조금 흐트러졌더라도 들어가서 거닐고 숨쉬고 어루만지는 쪽이 나는 더 좋단 말이지...
주로 일본 근현대 화가들의 작품을 모아놓았다는 미술관은 그야말로 <왜색> 짙은 그림과 글씨 투성이라 건성으로 지나다녔다. 얼마 전 동화 원화 전시회에서 본 제비랑 아기
그림이 눈에 띄여서 반갑긴 했어도, 마음에 든 작품은 딱 이거 하나였음. 아저씨가 연주하는 바이올린 소리 나도 듣고 싶다고 불현듯 생각...
둘쨋날 여정의 마지막은 역시나 인공미의 최고봉이랄 수 있는 하나카이로 정원. 나는 식물원 같은데 별로 안 좋아하지만, 흐드러진 꽃구경은 왕비마마가 특히 좋아하시는 거라 상품 검색하면서 은근 기대했고, 역시나 전 일정 가운데 왕비마마가 가장 큰 관심을 기울이며 흡족해했던 듯하다. 워낙 넓은 곳이고 시간도 촉박해 산책 대신 코끼리열차 비슷하게 생긴 빨간 기차를 타고 한바퀴 휘휘 돌아본 것도 다리를 쉬기에 좋았고.
계절마다 다양한 꽃이 피어나는 곳이라는데, 봄이라 주로 보이는 건 튜울립과 히야신스였고, 동산 가득 양귀비가 피어나는 중이기도 했다. 입구부터 꽃향기가 진동하여 눈과 코가 잠시 즐거웠음.
이 정도 튤립이야 에버랜드에도 있지 않나..
돔안으로 들어가면 어지러울 정도의 양란 천국
돔에서 사방으로 이어지는 구름다리? 난 꽃보다 이런 조형물이 더 좋다
관광을 모두 마치고 료칸으로 가기 전에 일본의 이마트라는 자스코에 잠시 들르기는 했다. 혹시나 예쁜 장화가 있으면 사오려는 욕심을 품고 갔으므로 확인해보았지만, 지방 소도시 마트에 예쁜 장화가 있을리 없잖아! 해서 슈퍼에 들러 그날 저녁 목을 축일 캔맥주 세 개랑 찝찔한 과자부스러기만 사가지고 나와 버스에서 마냥 일행을 기다렸다.
둘쨋날 간 온천 이름은 카이케 온천이고 일왕이 묵었다고 해서 유명하다는 료칸은 토고엔이었다. 일본 전역에 체인망을 갖고 있는 호시노야 리조트 계열의 료칸이라더라. 전날 묵은 료칸처럼 기모노를 입은 종업원이 안내하는 곳이 아니라 현대식 호텔처럼 검정색 유니폼을 입은 직원들이 여전한 친절함으로 우릴 맞이했다. 여행 일정을 계속 바꾸고 조정하느라 우리가 제일 마지막에 합류한 탓인지,전날 방배정에서 하필 제일 먼 끝방에 묵느라 왕비마마가 고생하셨기 때문에 미리 가이드에게 많이 걷지 않아도 되는 방을 부탁하였더니, 료칸에선 다른 일행과 달리 우리만 1층에 방을 내주었다. 그것도 지하에 있는 온천과 2층 식당으로 갈 수 있는 별관 엘리베이터 바로 옆방으로. 그 정도 배려는 그러려니 할 수도 있겠는데, 짐을 풀자마자 다시 저녁을 먹으러 올라간 식당에서 우린 또 한 번 놀라고 말았다.
가이드는 다리가 불편한 분이 있다는 말로 방 배정에 편의를 부탁한 것뿐인데, 식당에 가보니 울 엄마 자리에만 테이블과 의자를 놓고 음식을 차려놓은 것이 아닌가. 바닥에 쪼그리고 앉는 게 불편하긴 해도 남들이 다 올려다보는 높은 자리에 홀로 앉아 식사를 해야하는 상황에 왕비마마는 난색을 표하며 민망함에 밥도 제대로 못드셨지만 (그래서 고맙지만 담날 아침 식사는 그냥 남들과 똑같이 밥상에 차려달라고 부탁했다.) 나로선 료칸 측의 배려가 정말 인상 깊었다.
오른쪽에 살짝 비치는 테이블 다리가 왕비마마의 개인 식탁이다
료칸의 규모도 훨씬 크고 웅장한 데다 울 엄마에 대한 배려로 선입견이 작용한 때문인지 카이세키 요리도 전날보다는 입에 맞는 편이었다. 전날엔 식당에 내려가니 이미 티라이트에 불을 붙여놓아 스키야키와 스테이크가 제멋대로 익어가고 있었지만, 여기선 일일이 사람이 자리에 앉은 뒤에야 불을 붙여주었고, 찹쌀떡이 이상한 국물에 담겨있는 걸 비롯해 밥과 미소시루 이외에도 여기 보이지 않는 코스가 서너 가지 더 나왔다. 물론 오른쪽 위에 있는 소바는 점심에 먹은 소바를 떠올리게 했고, 회접시에 있는 가운데 생선은 방어로 짐작되는데 역시나 비렸다. 그나마 오징어(한치일수도..) 회와 나머지 회는 악착같이 다 먹어주었다. 저기 맨위 왼쪽 뚜껑 덮여 있는
이름하여, 딸기 치즈 무스
스끼야끼 국물이 맛있어서 밥 한공기를 다 먹을 수 있었음. 게다가 마지막에 나온 디저트가 흡족하다보니 전체적으로 꽤 괜찮은 식사를 한 느낌이 들더군. ^^
다시 방에 올라가 배가 좀 꺼지기를 기다리던 모녀는 아마도 잠시 까무룩 잠이 들었던 것 같다. 거의 6층이나 되던 마쓰에성 천수각 사다리를 무슨 경주하는 사람처럼 뛰어오르고 내려온 탓에 나도 다리가 욱신거렸고, 여행오기 사나흘 전부터 홍제천변 산책길에서 사전준비를 하긴 했지만 역시나 운동 총량으로 볼 때 무리를 한 셈인 왕비마마도 녹초가 된 터였다.
하지만 뜨거운 몸을 담가 피로를 풀 수 있을 거라며 모녀는 묵직한 몸을 이끌고 다시 온천으로 향했다.
그러고 보니 온천 료칸 여행에서 빠지지 않는 유카타 기념촬영을 하지 않은 것 같아, 얼른 왕비마마를 앉혀놓고 기념사진도 찍어주시고...
피로에 지쳤는지 이미 엄니 표정은 별로 좋지않다.
처음 방으로 안내 받을 때 방에 준비되어 있는 유카타는 두벌 다 s 사이즈라면서, m사이즈를 친히 가져다준 직원의 친절도 왕비마마에겐 민망함이었다. 아 왜 일본 사람들은 그리도 날씬한 거냐고! 쳇...
전날 묵은 마츠노유 료칸 온천은 딱 우리나라 목욕탕 분위기가 강했는데, 그 이유는 대중탕에서 흔히 보는 하얀색 플라스틱 의자와 플라스틱 대야 때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토고엔 료칸 온천에는 옻칠한 나무 의자와 나무로된 대야가 놓여있는 게 아닌가!
ㅎㅎㅎ
온천탕엔 당연히 디카를 가져가지 않았으므로 그 생김새를 보여줄 순 없지만, 우리방 욕실에 놓여있던 나무 의자와 대야로 느낌이나마 전하려고 찍어왔다. 둘다 진한 옻칠을 해서 빤질빤질한 느낌을 살리고, 의자 높이를 두배로 높이면 딱 온천탕에 놓여 있던 의자와 대야다. 한국 일식집에 가보니 저런 나무통에다 밥을 섞어서 요리를 만들어주던데.... 설마... 그들이 용도를 헷갈린 게 아니라 저런 나무 용기가 일본에서도 다방면으로 쓰이는 것이겠지?
온천탕엔 8시반쯤 내려갔는데 우리 일행들은 벌써 다 온천욕을 끝내고 나오는 길이었고 월요일 밤이라 그런지 다른 손님은 아무도 없어서, 온천은 그야말로 왕비마마와 나의 독탕이었다. 2천엔 쯤 내면 별도로 가족탕을 사용할 수도 있다던데, 2천엔 번 셈이다. 온천 료칸에서 보내는 마지막 밤이기도 하고 (벌써?) 또 언제 와보겠나 싶은 나는 왕비마마를 살살 꼬드겨 노천탕에도 나가보자고 설득했다. 전날밤보다는 확실히 덜 춥기도 하고, 낯선 데 홀로 있는 걸 겁내는 왕비마마를 두고 혼자 나갈 수도 없으니 어쩌겠나. 다행히도 왕비마마는 엉거주춤 나를 따라 노천탕으로 나가주셨고, 일부는 빨간색 뾰족 지붕을 덮어 물이 식는 것을 막았지만 가장자리에선 소나무에서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을 맞으며 온천물에 몸을 담그는 진기한 경험을 해볼 수 있었다. 별빛이라도 볼 수 있으면 금상첨화였겠으나, 새까만 하늘을 배경으로 선 소나무 아래로 가끔씩 똑똑 떨어지는 빗방울로 땀을 식히며 즐기는 노천탕도 꽤나 운치가 있었다.
전날 료칸은 온천 운영시간이 자정이면 끝났지만, 이곳은 24시간 운영이라고 했다. 1시반 부터 2시반 사이에청소를 하고, 새벽 청소가 끝나면 남탕과 여탕이 서로 바뀐단다. 양기와 음기를 섞기 위함이라는 얘기를 진즉에 들었는데 진짜로 그런 료칸 온천엘 왔구나 싶었다. 모녀는 또 다시 새벽에 탕이 바뀐 뒤 한번 더 온천을 하고 가겠다는 말도 안되는 염원을 다지며 방으로 올라왔다.
이번에도 방에 돌아온 우릴 반겨준 건 푹신한 이부자리. 심지어 들어가기 쉽게 이불도 저렇게 젖혀놨더라. ㅎㅎㅎ
몸은 젖은 솜 같았지만 마지막 밤을 좀 더 불태워(?)야 한다는 생각에 냉장고에 넣어두었던 캔맥주(산토리, 기린, 예츠비)를 꺼내 왕비마마는 한모금만 따라드리고 혼자서 기분을 냈다. 온천 내려갈 때 싸가지고 가서 노천탕에서 마실 걸, 하는 뒤늦은 회한이 들었지만 다 쓸모없는 짓... '다음번(과연?)엔 기필코!' 라고 생각하며 겨우 캔 하나에 얼굴이 벌게져가지고 잠을 청했다.
여행후기를 더 미루면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을 거라는 조바심에 틈틈이 적어놓는 쪽으로 마음을 정했다. 이러다 또 발동 걸리면 일 미뤄두고 포스팅에 열을 올리겠지만서도, 사진 크기 일일이 줄이고 올리는 게 번거로워서라도 하루씩 정리하는 게 좋겠다. 겨우 사흘간의 여행이 심리적으로는 일주일 이상 길게 느껴졌으니, 아마 후기도 쓸데없이 투덜투덜 주절주절 길어질 가능성이 높다. 간만의 여행이었기도 하니까.
양심의 가책 때문에 (마감중에 여행이라니!) 예상했던 대로 한시간이나 눈을 붙였을까 서둘러 일어나 세면도구를 마저 챙기고는 인천공항으로 향했다. 비행기는 12시반 출발인데 공항 집결 시간은 10시까지. 집에서 공항까지 리무진 버스로 한시간이면 충분하지만, 30분에 가까운 배차시간을 감안하면 아침 일찍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인천공항 고속도로 이용료 7500원이 아까워서 늘 당연히 집앞 정류장에 서는 리무진버스를 이용하는데, 두 사람의 왕복 버스비 3만 6천원을 감안하면 동생 말마따나 차라리 차를 가져가서 주차대행 서비스를 이용하는 편이 왕비마마의 편의를 위해서도 낫겠다는 걸 요번에 처음 깨달았다. 과연 앞으로 또 두 모녀가 해외여행을 할 날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_-;;
비행기 승무원으로 일하던 지인에게 일본 노선이 제일 싫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한시간 남짓한 비행 시간동안 음료수도 나눠주고 식사도 나눠주고 기내 면세품까지 팔아야해서 번개불에 콩 볶듯 쉴틈없이 서둘러부쳐야 하기 때문이란다. 우리의 목적지인 돗토리현 요나고까지 예상시간은 겨우 1시간 10분. 당연히 기내식도 간단하고 부실한 도시락이었다. 기내식이 부실하니 미리 공항에서 요기를 해두라는 가이드의 조언을 들었던 터라, 나는 기내식을 먹는둥 마는둥 짧은 시간에 몇 개 안되는 일본말 외우기에 돌입했다. 아는 일본말이라곤 <스미마생>,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밖에 없는데, 왕비마마 간식이라도 사드리려면 <이꾸라데스까-얼마입니까> 같은 정도는 알아두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해 몇 마디 수첩에 적어간 터였다.
나쁜 머리로 내가 열심히 외운 일본말은 다음과 같았다.
이꾸라데스까? (얼마입니까)
고레오 구다사이 (이것 주세요)
오미즈/오차 구다사이 (찬물/녹차 주세요)
오이시이데스네 (맛있네요)
와까리마시다 (알겠습니다)
~와 도꼬데스까? (~는 어디입니까?)
그밖에도 몇 개 더 적어갔지만 짧은 비행시간 동안 외우는 건 무리였는데, 다 외웠더라면 억울할 뻔했다. 결과적으로 사흘간 저말은 한번도 쓰지 못했으니까. 얼마라고 물어서 대답해 주면 알아는 먹을 거냐고! 게다가 맛있다고 감탄할 만한 음식은 사흘간 6끼니 동안 딱 한번뿐이었으니... ㅠ.ㅠ
여행상품 검색하면서 난생 처음 들어본 요나고는 정말 작은 도시인듯 공항 규모가 정말 작았다. 오래 전에 가본 속초 공항에 비할까. 타고간 비행기도 작은 편이었는데, 외국인은 인솔 가이드 포함하여 우리 일행 14명이 유일했다. ㅋㅋ 덕분에 지문과 사진을 찍어 입력해야 하는 입국수속은 금세 끝났고, 옛날에 주민등록증 만들 때처럼 양손가락에 시커먼 롤러로 잉크를 발라 지문날인을 해야하는 것으로 상상하며 막연히 일본에 대한 거부감을 키웠던 외국인 지문입력은 그냥 손가락 스캐너에 양손 검지를 대는 것으로 끝이라 오히려 좀 의아했다.
예상은 했지만 일본 기상청도 구라청이기를 바랐던 마음도 무상하게 요나고 공항 밖엔 비바람이 몰아치고 있었다. 한국이랑 기온 비슷하다더니만 엄청 더 춥고! .ㅠ.ㅠ 비교적 따뜻하게 처덕처덕 입은 터라 인천공항과 기내에선 겉옷을 벗어 들고다녀야했는데도 덜덜 떨 수밖에 없었다. 날씨는 하늘이 하는 일이니 너무 속상해하지 말라는 가이드의 위로를 들으며 버스에 올라탄 뒤 드디어 조촐한 관광이 시작되었다.
첫 행선지는 사카이미나토. 사카이미나토에 조성되어 있다는 미즈키(엥? 미즈키 님?) 시게루의 요괴 거리를 구경하기 위해서 미니버스에서 내려 기차를 타야했다. 만화 주인공들로 꾸며진 요괴기차를 타고 사카이미나토에서 내려 요괴 거리 곳곳에 서 있는 청동상이며 캐릭터를 살려 꾸민 가게를 구경하는 게 관광의 목적이었으니, 비까지 내리는 와중에 울 엄니가 그런 구경을 반길 리 없었고 일행 중 결혼 21주년을 맞아 여행왔다던 중년 부부도 울 왕비마마와 함께 버스를 지켰다. 그나마 젊은 축에 드는 사람들만 후다다닥 수박 겉핥기 식으로 구경하고 돌아와야 했는데, 나야 미즈키 시게루도 모르고 주인공 기타로도 모르지만 시간 들여 꼼꼼이 구경하고 싶은 거리여서 좀 안타까웠다.
이름 모를 역의 풍경, 나무가 신기하게 생겼다
마침 기타로 열차가 지나갔다
우리가 탄 열차? 전철?
천장에도 온통 요괴 캐릭터 그림
역 광장 초입에 있는 청동상 - 가운데 할아버지가 미즈키 상일까?
공원 가로등은 물론이고 택시에도 눈알요괴가 달려있더라 ㅋ
미즈키 로드 인증샷 - 미즈키 니의 거리가 있다니!
우산은 포기하고 후드 티 뒤집어 쓰고 돌아본 거리에서 발견한 벛꽃은 죄다 이런 수준이었다. 일주일만 더 일찍 갔더라면 좋았을 것을 ㅠ.ㅠ
후회하면 무슨 소용이겠나.
어쨌거나 구석구석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상점과 요괴상을 찾아보는 재미가 뭐 그리 쏠쏠할까 싶었던 처음 생각과 달리, 요괴 캐릭터 모양으로 빵을 구워 파는 빵집이 없나 (3종류 사먹었는데 맛도 좋았다!) 정원 예쁜 찻집이 없나, 캐릭터 상품점이야 별로라고 쳐도 반나절쯤 돌아다녀도 좋겠다 싶은 곳이었다. 만화내용을 알고 왔더라면 더욱 금상첨화였겠지만...
주인공을 안찍을 수야 없지. 얘가 기타로다
젤 귀엽던데 얘 이름은 까먹었다 ㅠ.ㅠ
[#M_요괴 빵?|접기|
우리가 타고갔던 기차 캐릭터 모양의 빵 - 좀 뭉개졌는데..담날 아침에 먹었다 ^^
뭐니뭐니해도 패키지 여행상품으로 따라가서 제일 싫은 건, 내 마음대로 구경하지 못하고 가이드가 정해준 시간에 맞춰 헐떡거리며 다녀야 한다는 점이다. 여기도 일부러 꾸며놓은 거리 안쪽으로 그냥 동네 구멍가게 같은 잡화 식료품점에서 나 어릴 때 '미깡'이라며 사먹던 옛날식 밀감도 발견했고, 시골스러운 쌀집도 구경하며 신기했는데, 별로 내키지 않는 다음 코스를 위해 억지로 버스에 올라야 했다. 으휴.
동해에 인접해 일몰이 절경이라는 신지코 호수가 다음 행선지였으나, 비바람치는 오후에 일몰은 무슨 일몰. 가운데 소나무섬을 만들어놓았으니 그거라도 구경하라는 말에 버스에서 내려 한 다섯발자국 가다가 사진 한방 찍고는 그냥 돌아섰다. 그래도 이 사진속의 두 연인은 젊어서 비바람 무릅쓰고 한참이나 다녀오더라마는...
동해바다 내려다보러 올라간 그 다음 전망대도 당연히 나는 시큰둥했고, 어서 온천료칸에 가서 푹 쉬고싶은 마음 뿐이었다. 말로만 듣던 코스정식 카이세키 요리에 대한 기대도 허기와 함께 부풀어올랐고... 대체로 요번 일행들의 목적은 온천료칸 체험인듯 했으므로, 시답잖은 관광 코스는 한둘 정도 빼고 푹 쉬자는 의견도 나왔지만 혹시라도 불만을 품은 사람이 나중에 여행사에 항의하면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그 바람을 실천에 옮길 수는 없었다. 괜찮은 온천 료칸 골라서 푹 쉬는 여행을 계획하려면 그저 호텔팩이나 자유여행밖에는 방법이 없는듯.
<명탕순례>랍시고 우리가 첫날 간 곳은 타마즈쿠리 온천. 돗토리현 공항에 내리긴 했어도 이미 어느 시점엔가 시마네현으로 넘어가 그곳 주소는 시마네현이라고 했다. 온천 역사가 1300년이나 된다고 해서 저녁이나 아침에 짬 내서 온천마을 산책도 할 작정을 품고 떠났으나, 여행 가서 내가 그런 부지런을 떨어본 역사가 없으니 당연히 패스~. 게다가 반나절 만에 이미 에너지가 모두 방전된 듯한 왕비마마를 모시고선 그저 온천욕이나 할밖에 아무것도 계획할 수가 없었다.
첫번째 숙소인 마츠노유 료칸
료칸 안뜰 - 건너편으로 보이는 건물이 온천욕탕이다
원래 내가 꿈꾸었던 온천료칸 체험은 역사가 몇백년씩 되는 소규모 전통 료칸에서 기모노를 차려입은 오카미상의 깍듯한 시중을 받아보는 것이었으나 ㅠ.ㅠ 그런 곳은 단체손님을 받지 않는 듯, 패키지 상품으론 찾아볼 수가 없었다. 항공권과 숙박 예약만 대행해주는 자유여행 상품은 더러 있었으나, 일본말도 못하면서 왕비마마를 모시고 대중교통수단을 이용하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 진즉에 포기한 뒤, 그나마 좀 괜찮은 온천료칸 상품을 검색해본 터였다. 숙소 건물에 들어가자 마자 풀냄새 같은 다다미 냄새가 느껴지더니 방에 들어가자 확실히 다다미방의 향취가 느껴졌다. 바로 이거야, 싶은. 온천료칸에 가면 저녁 먹기 전에 먼저 온천욕부터 하는 거라는데, 우리는 체크인 시간이 늦어 곧장 저녁을 먹어야 했다. 내가 꿈꾸었던 카이세키 요리 또한 다다미방으로 가져와서 차려주는 것이었으나, 식당으로 내려가야 했으니 또 한번 실망...
이것이 카이세키 요리
그렇다고 대규모 식당에서 객실손님 전체가 와글와글 밥을 먹는 것이 아니라, 우리 일행을 위해 따로 마련된 소규모 연회실 같은 곳에서 각자 한 상씩 차려진 저녁밥을 먹는 식이었고, 기모노를 차려입은 여종업원들이 깍듯하게 시중을 들기는 했다. 열심히 외운 오미즈(찬물)이며 오차(녹차)를 달라고 입도 떼기 전에 눈치 빠르게 따라주시고... 일본인들의 친절함이야 워낙 유명하지만 매번 납작 엎드리듯 무릎 꿇고 시중드는 건 어째 영 불편하더라.
암튼 지역특산물인 게요리, 쇠고기 스테이크, 스키야키, 사시미, 소바... 온갖 진미가 나오는 것으로 기대했던 코스정식의 겉모습은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꽤 그럴듯하다. 그런데 맛이!!
우리나라 활어회와 달리 일본 사시미는 약간 숙성한 맛을 최고로 친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바닷가에 가까워서 특선요리가 생선이란 것쯤은 짐작했음에도, 첫날 저녁을 다 먹고 나서 나는 허기를 빵과 과일로 달래야했다.
나말고도 열심히 큼지막한 카메라를 가는 데마다 들이대는 여학생이 있기는 했지만, 괜스레 자꾸 사진찍는 게 민망해서 얼른 한장 누르고 마느라 저 사시미 위에 덮인 종이도 걷지 않아 좀 민망하다. 아무려나 네다섯 점 올려 있던 생선회는 비려서 먹다 남겼고, 게다리는 차가웠으며 특히 제일 위 가운데 놓여있는 정체불명의 요리는 생선과 가지, 두부를 연잎 같은 데 싸서 찐 거였는데 어찌나 비린지 단박에 비위가 상할 정도였다. ㅠ.ㅠ 왼쪽 위 뚜껑 덮여 있는 스키야키는 어찌나 짠지 아래 있던 날 달걀을 풀어 넣어도 간이 맞질 않고 나머지 밑반찬은 차거나 비리거나 밍밍해서, 첫날 저녁 제대로 먹은 건 하얀밥과 미소시루와 쇠고기 몇점이 다였다. 카이세키 요리 엄청 맛있다고 들었는데 이곳만 실망스러운 걸까? 우쒸...
식탐녀의 상한 마음을 그나마 달래준 건 방으로 돌아와 발견한 푹신한 이불 두 채였다. 다녀와서 알아보니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소규모 료칸도 식당은 별채에 마련해두고, 아침 저녁 밥 먹으러 다녀오는 사이 이불을 개고 펴주는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듯하다.
이불을 보니 하루만에 너무 피곤해서 온천이고 뭐고 한숨 먼저 자고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애써 몸과 마음을 추스려 유카타로 갈아입은 뒤 온천으로 내려갔다. 굳이 목욕탕에 귀중품을 가져갈 이유가 없겠지만, 어쨌든 일본 온천에는 열쇠로 잠그는 라커 없이 그냥 바구니 아니면 나무로 짜놓은 칸막이에 옷을 벗어놓는다. 들어갈 때 자기 번호만 눈여겨 보면 그만이다.
온천 성분 같은 거 전혀 모르긴 하지만, 완전히 말간 물은 적당히 따뜻했고 대강 씻었는데도 머리칼과 살결이 매끈거리는 느낌이었다. 료칸에 딸린 온천탕이므로 규모는 당연히 그리 크지 않고, 탕이 종류별로 마련되어 있는 일반 목욕탕 정도를 상상하면 될듯하다. 까마득한 옛날에 온양온천이랑 강화도 해수온천에 가본 적 있는데, 거기나 여기나 느낌은 다 비슷했다. 노천탕도 있었지만, 춥고 피곤해서 우린 나가볼 엄두도 내지 못해 그건 좀 아쉬웠다. 물이 다르다고 칭찬을 거듭하며 모녀는 다음날 새벽에도 한번 더 온천욕을 하자고 작심했지만 ㅋㅋㅋ 막상 다음날 아침이 되자 당연히 온천욕 대신 잠을 더 욕심냈다. 아무렴, 잠이 더 중요하고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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