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스정류장엘 나가보니 인근 파출소에서 붙여놓은 안내문이 코팅까지 된 채 매달려 있었다.
택배기사를 가장하여 오토바이를 탄 사람이 접근해, 휴대폰 배터리가 떨어져 그런다며 휴대폰을 빌려달라고 한 뒤 그대로 달아나는 사건이 빈번하므로 택배기사 복장을 한 사람이 그런 부탁을 하더라도 절대 빌려주지 말라는 내용이었다. 더불어 오토바이를 타지 않았더라도 휴대폰을 빌려달라는 낯선 사람, 특히 청소년은 경계하라고도 적혀 있었다.
고가의 스마트폰을 중국에 다량 팔아넘긴 사람들이 잡혔느니, 택시에 두고 내린 휴대폰은 이제 절대로 찾을 수가 없다느니 하는 소리는 들어본 것 같은데 요샌 휴대폰 날치기도 기승을 부리는 모양이었다. 어휴 뭐 이런 세상이 다 있나. 요즘 정신이 깜빡깜빡하는 일이 잦아서 휴대폰을 놓고 나가는 일이 종종 있다. 워낙에도 숫기 없어서 남들에게 휴대폰 빌려달라고 하는 대신 나야 길에 잘 보이지도 않는 공중전화를 찾아헤맬 확률이 100퍼센트지만 (그나마도 귀찮아서 그냥 전화를 안하고 만다;;) 얼마 전까지 나는 아주 가끔씩 휴대폰을 남에게 빌려준 적이 있었다. 주로 청소년과 아이들, 착해 보이는 젊은 여자들이었고, 남자가 내게 그런 부탁을 한 적은 한번도 없었던 것 같다. 역시나 정신 없는 친구가 남의 휴대폰을 빌려 약속장소를 다시 묻는 전화를 받은 적도 있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해졌다는 의미다.
휴대폰을 이용한 보이스피싱도 듣자하니 수법이 정말 다양하다. 후배 하나는 엄마에게 길에서 넘어져 크게 다쳤다며 병원 검사비 30만원을 급히 계좌로 송금하라는 문자를 받았다고 했다. 문제는 송금 계좌가 낯선 사람의 것이라는 점. 길에서 자기를 부축해 데려온 고마운 사람의 계좌라나. 후배는 놀란 마음에 얼른 엄마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통 받질 않았다. 곧이어 언니가 놀란 목소리로 엄마 문자 받았느냐고 전화를 했더란다. 엄마에게 똑같은 문자를 받았던 것. 놀란 마음을 달래고 보니 아무래도 수상쩍다 여긴 두 사람은 의논 끝에 의문의 계좌 대신 엄마 은행계좌로 각자 30만원씩 송금을 하고는 문자로 그 내용을 알렸단다. 이후 상황을 몰라 전전긍긍 엄마 휴대폰으로 마냥 전화만 걸던 자매는 오후 늦게야 집 전화로 엄마랑 통화를 할 수 있었는데, 당연히 엄마는 다친 데 없이 멀쩡하셨고 휴대폰을 어디에서 잃어버린 건지도 모르고 있었단다. 그 사연을 듣고 내가 말했다. 울 엄마는 문자 못 보내는 할머니라서 정말 다행이다. -_-;
얼마 전엔 엄마가 절에 갔다가 보이스피싱 전화를 목격했다고도 했다. 마침 예불이 끝나 점심을 먹으려고 다들 식당방으로 이동하려는데, 띠리리리 누군가에게 전화가 왔고 그 보살님이 통화를 하더니 허둥지둥 울먹이며 우리 아들 교통사고 났다는데 어쩌느냐고 부들부들 떨더라나. "엄마! 접촉사고 나서 지금 경찰서 왔는데 당장 합의금 필요하니깐 @@만원 보내주세요. 계좌번호 문자로 찍어보낼게."라는 식으로 다급하게 말을 했다는데, 목소리가 딱 자기 아들이었다고. 하지만 누군가 보이스피싱 같으니 아들한테 먼저 확인해보라고 했고, 하필 점심시간이라 자리를 비운 아들과 연결이 안 돼 한참 피를 말리던 그 아주머니는 발을 동동 굴렀단다. 만약 집에 혼자 있다가 그런 전화를 받았다면 대뜸 은행으로 달려갔겠으나, 주변에서 사람들이 안심 시키고 혹시 정말 사고가 난 거라면 좀 있다 은행까지 차로 데려다주겠다는 스님의 다짐에 힘입어 아주머니는 차분히 계속 아들과 통화를 시도했고, 결국 사기극 전화였음이 판명됐다고. 울 엄마도 우체국 사칭, 경찰청 사칭, 법원 사칭, 카드회사 사칭 보이스 피싱의 존재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교통사고 핑계대는 자식 노릇까지 하는 사기꾼들의 대담성에 퍽 놀란 눈치였다.
지난 번 인사동에 나갔을 때는 돌아오는 길에 종로2가 버스 정류장 근처에서 두 여자가 내게 접근해 물었다. 종로3가 전철역이 어느쪽이냐고. 나는 이쪽으로 쭉 직진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방향을 가르쳐 주었다. 그랬더니 그들은 머냐고 다시 물었다. 나는 잘난척 그리 멀지 않다고 (왜냐하면 나도 나갈 땐 전철타고 종로3가 역에서 내렸기에 잘 아니까;;) 5, 600미터만 가면 된다고 콕 찝어 말해주었다. 두 여자는 고맙다고 말을 하면서도 금방 안 가고 미적미적 뭔가 더 말을 붙이려는 눈치였다. 거기서 전철을 타면... 어쩌구 그들이 또 뭔가를 묻고 있는 가운데 문득 의심이 치솟았다. 이 사람들 '도를 아십니까' 아냐?! 십수년전 종로통에 매일 다닐 때도 그 구역은 '도를 아십니까' 집단의 잦은 출몰지였다. 그 생각이 든 순간 나는 인상을 팍 쓰며 뒷말을 듣지도 않고 홱 돌아서서 내 갈길을 갔다. 애당초 그들의 질문엔 분명 친절히 대답해 줬으니 내 소임은 다 한 거라규! 하지만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내내 궁금했다. 그들은 실제로 길을 더 물으려는 것이었을까, 정말로 '도를 아십니까'였을까.
세상이 하도 험악해지다보니 요즘엔 택배 왔다고 소리쳐 문을 열게 해놓고 강도로 돌변하는 사람도 있다는 말에, 택배상자 받기를 취미삼아 하는 나로선 '택배입니다'라고 하는 외침에 마냥 반가워만 해선 안되는 게 아닌가 자책이 든다. 다행히 택배업체에서도 그런 점을 잘 아는지 "택배 왔습니다!"라고 외치는 대신 수신인 이름을 먼저 외치는 경우가 더 많아졌다. 또한 주소와 전화번호 때문에 택배상자를 함부로 버리면 범죄의 표적이 될 수도 있다는 보도에 이젠 택배상자 주소 택에도 전화번호는 가상 번호로 적혀 오거나 뒷번호가 ****으로 가려져 있다. 진화화는 범죄에 대응책도 자꾸 변화하고는 있지만 과연 비상한 범죄 두뇌를 우리가 따라갈 순 있는 걸까. 방송도 언론도 못 믿겠고,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꾸는 정치인들도 못 믿겠고, 법도 못 믿겠고, 국내산이니 한우니 유기농이니 적어놓은 표기도 못 믿겠고, 도대체 믿을 수 있는 게 하나도 없는 사회가 되고 말았다.
옛날부터 할아버지랑 아버지가 쓰시던 농담 중에 <뙤놈 빤스를 빌려 입었나? 왜 그렇게 의심이 많아?>라는 말이 있었다. 주로 조롱하는 말투로 쓰였으므로 중국인을 비하하는 말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으나, 반면에 일단 의심부터 하고 보는 신중한 태도가 크게 나쁠 것도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물론 콩으로 메주를 쓴다고 해도 절대로 믿지 않는 불신의 병에 걸렸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만, 못 미더운 사회를 살아가려면 무턱대고 믿다 큰 코 다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을 은폐하고 왜곡하고 포장하고 거짓말을 서로 맞추고, 저 너머 어딘가에 있는 진실이 도무지 드러나지 않는 경우를 좀 많이 보았는가. 요즘 고등학생들의 설문조사에서 권력과 경제력이 법보다 우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비율이 90%라는 보도를 보고, 그들의 현실감각에 씁쓸했다. <법대로 하라>는 말은 변호사를 대고 오랜 기간 버틸 수 있는 여유로운 사람들이나 할 수 있는 말이라는 걸 고등학생 쯤 되면 다들 아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헌데 그와는 별도로 중고등학생들이 골목 같은데 서넛 이상 모여 있으면 지나며 무슨 일을 당하지나 않을까 겁부터 난다. 어느 틈엔가 제일 무서운 범죄집단으로 보이기 시작한 그 아이들을 그 지경으로 몰고 간 원인을 생각해보면 또 다 어른들의 잘못, 사회 탓이다. 사회의 투명성이며 공정성 평가에서 늘 OECD 국가중 꼴찌에 가깝네 마네 하는 말이 괜히 나올 리 없다. 앞으로 점점 나아져야 할 텐데 별로 그럴 기미는 보이지 않으니 '뙤놈 빤스' 운운하며 자조하는 나의 의심도 계속될 것이다. 서글프지만 어쩔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