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전히 개인적인 자격지심 때문이지만
한강을 건너 이른바 '강남'엘 가게 되면 마음이 몹시 불편하다.
삼성동, 역삼동 따위에 있던 회사로 매일 출근을 해야 했던 10여년 전에도 강남은 나에게 그리 편한 곳이 아니었다.
회식이라도 있어서 좀 늦어진 날 야간 택시를 한번 타려 해도 워낙 택시잡기도 어려웠을 뿐더러 택시비도 어마어마한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서울 시내 어딜 가나 교묘한 시간엔 집에 오는 택시 잡기가 어려운 걸 보면 우리 집 위치가 후미진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하지만 꼭 거리의 문제가 아니더라도, 얼마전부턴 한강을 건너 서울의 진짜 중심지라고 일컬어지는 동네엘 가는 것이 못내 꺼려진다.

며칠 전 스노우캣 홈피엘 가보니
뉴욕의 길쭉길쭉한 센스쟁이들 틈에서 자기가 물을 흐렸다고 한탄을 했던데
이른바 강남의 잘 나가는 동네엘 가게 되면 나야말로 그 동네 물을 흐리는 강북촌X이 된 것 같다.
-_-;;
강남역 근처 정도면 그나마 바글바글 다양한 인간군상 사이에서 얼렁뚱땅 뒤섞여볼 요령을 피우겠는데, 그 잘나신 청담동이나 압구정동 따위엘 가면 어찌나들 스타일리시하거나 돈으로 온몸을 도배한 인간들이 많은지...
내 눈은 호사를 누리니 좋기는 한데, 무슨 잡지책 구경하듯 한참이나 그들을 구경하다 보면 늘 기분이 씁쓸하다.

어젠 참으로 간만에 '물좋은' 청담동 어느 음식점에서 점심약속이 있었는데...
모델스러운 엉아들과 언니들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그치만 사실 난 가격 대비 양이 몹시 적은 청담동 음식점들에 분노하는 부류다 ㅜ.ㅡ;;), 최고인기인은 아니라도 박상원 같은 연예인도 옆자리에서 구경하는 재미는 있었지만, 너무도 친절해서 몸둘바를 모르게 하는 '과잉'에 가까운 서비스도 그렇고, 제 아무리 대리주차를 해준다지만 그 비용으로 2천원이나(!) 줘야하는 것도 그렇고, 걸어다니는 사람은 거의 없는 명품 거리도 그렇고,
제법 오래 그 동네에 머물면서 줄곧 마음이 불편하고 어색했다.

서울 시내에 전체적으로 외제차가 많아지긴 했지만 정말로 강남엔 두대 건너 한대 꼴로 값비싼 외제차가 돌아다니는 것 같은데, 어제처럼 비와 진눈깨비 때문에 온통 도로가 막힌 날 '너 돈 많으면 어디 한 번 붙어봐라'는 식으로 아무데나 끼어들고 얌체처럼 운전하는 수많은 외제차의 행렬 사이에서 '나에겐 벤츠나 다름없는' 작은 국산차를 몰고 강북으로 향하며 나는 계속해서 욕설을 중얼거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확 받아주고 싶은 차도 여럿 있었지만.. "저 범퍼는 센서까지 있어서 천만원이 넘는다지.. 그래 내가 참자..된장된장..." 뭐 이런 식이었다.

바둑판 식으로 뻗은 도로 때문에 길 잃을 염려도 없고, 길도 널찍널찍하고, 집값도 훨씬 비싸고, 손수레나 카트 따위에 파지나 종이박스 더미 잔뜩 얹고 느릿느릿 바깥 차로를 점유하고 막무가내로 걸어가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를 만나는 일도 전혀 없는 강남에 사는 것이 훨씬 편하고 쾌적하다는 지인들도 꽤 되지만(물론 강남도 강남 나름이겠지만 ^^;; 내 편견 속의 강남은 그렇다는 이야기!)
단순히 30년 가까이 한 동네서 살았기 때문에 무얼 하든 익숙해서 좋은 느낌 이외에도
난 복작복작 재래시장이 더러더러 눈에 띄고, 버스 타고 좀 지나다 보면 고궁의 날렵한 기와지붕과 예쁜 담장을 볼 수 있고, 단돈 2천원에 김떡순(김치전+떡볶이+순대볶음) 세트를 먹을 수 있는 종로 노점상도 가깝고, 옷차림새에 별 신경 안쓰고도 전혀 민망하거나 부끄러워할 필요 없으며, 부동산 폭등과는 전혀 상관없는 언덕배기 낡은 우리 집이 있는 동네가 훨씬 좋다.

남의 동네 같고 불편하니 강 건너 안 다니면 그만이련만
꼭 이렇게 다니러 갈 일이 생기면 비겁하게 마음이 쪼그라드니 그게 더 처량맞고 치사하다.
참으로 부끄러운 강북촌X의 자격지심이여.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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