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보성향의 교육감들이 당선되고 나서도 딴나라당놈들 때문에 발목 잡히는 일이 더러 있으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오세훈 서울시장의 하는 짓거리를 보면 정말 가관이다. 하기야 수억원 들여서 일간지에 그런 되도 않는 광고를 내 자기 '논리'를 펼치는 사람이니 더 말해 무엇하랴 싶지만, 주민투표 운운에 이어 이젠 서명운동을 한다니 나도 반대 서명운동의 일환으 로 몇자 적지 않을 수가 없다. 

이제는 중학교까지도 의무교육이 되었지만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엔 국민학교도 매달 육성회비를 내야했다. 몇달씩 육성회비가 밀려서 교실에 앉은 채로 불명예스러운 호명을 당하거나 방과후 교무실에 불려가는 부류에 속하진 않았지만 나도 가끔은 한두달씩 육성회비를 밀렸다가 내는 축에 속했다. 알림장은 없었어도 선생님이 매일 칠판에 적는 전달사항에 '육성회비' 항목이 빠지질 않던 시절이었다. 엄마가 누런 육성회비 봉투에 돈을 넣어주면, 일찌감치 등교해 학교 건물 현관쪽에 작은 창문만 나 있는 서무창구를 두들겨 육성회비를 내고 봉투에 도장을 받았다. 간혹 두달치를 한꺼번에 내 제 달치 육성회비 도장이 찍힌 봉투를 받아들면 얼마나 뿌듯하고 힘이 나던지.

내가 연년생인 남동생을 두었다는 이유로 제나이보다 1년 먼저 국민학교엘 다니게 된 것도 다 나중에 줄줄이 '입학금' 대기가 어려울지 모른다는 어른들의 염려 때문이었다. 나이는 1살, 3살 터울이어도 삼남매가 2년 간격으로 계속 학교에 들어가야 했는데, 국민학교는 몰라도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의 경우 입학금을 매년 마련하는 건 빠듯한 살림에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벌써부터 짐작했다는 뜻이다.

중학교에 들어가니 등록금을 분기별로 내야 했는데 정말로 상당한 금액이었다. 다행히도 중학교에 다닐 무렵부터는 집안형편이 좀 나아졌던 것 같은데도 분기별로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면 나는 매번 마감기간 끝무렵에나 겨우 턱걸이를 하거나 등록금 납입기간이 지났다는 '전달사항'을 엄마에게 알린 다음에 부랴부랴 낼 수 있었다. 그러다 2학년 때부터인가, 등록금 고지서가 나오자 아버지가 뭔가 복잡한 서류를 떼어다 주시면서 담임에게 제출하라고 했다. 그러면 등록금 대부분의 금액이 면제되고 몇천원 정도의 '육성회비'만 내면 되는 고지서를 다시 발급해줄 것이라고 말이다.

요즘도 그런 제도가 남아 있는지 모르겠는데 사립대학의 교직원이셨던 아버지는 사학연금제도의 일환으로 당시 사립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자녀의 등록금을 면제받을 수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셨던 거다. 하지만 소심한 나는 그 서류를 며칠이나 들고다니면서도 차마 담임에게 그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담임이 못알아들으면 어쩌나, 우리 학교에는 그런 제도가 통하지 않으면 어쩌나 어린 마음에 혼자 고민을 했다. 그러다 어렵사리 담임에게 서류를 내밀었을 때, 역시나 그는 금시초문, 무슨 뜬금없는 소리를 하느냐는 표정이었다. (어쩌면 그 제도가 막 시행되기 시작한 초창기인지도 모르겠다.) 담임이 서무과에 알아보겠다고는 했지만, 며칠이 지나도 '육성회비'만 내라는 새로운 고지서는 발급되지 않았고 급기야 서무과에서도 통 모르는 이야기더라는 말이 담임을 통해 전달되었다. +_+

나는 무조건 너무도 창피해서 아버지가 뭔가를 잘못 알았을 거라고 짐작했고 그냥 억지 부리지 말고 어서 등록금을 내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하루하루 우울하게 학교를 다녔다. 물론 그런 사실을 친구들에게도 이야기하지 못했고, 난데없이 교무실에 자꾸 불려가는 상황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끔찍하기만 했다. 결국 상황이 정리되긴 했다. 아버지가 대학 총무과에 전화를 걸고, 그곳에서 다시 우리 학교 서무과에 연락을 하고, 사학연금 재단에 여러번 문의전화가 오가고 난 뒤의 일이긴 했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그 학교에서 전례없이 '사립교원 등록금 면제자'라는 지위를 얻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그 자격을 유지하기 위해 매년 학기초에 똑같이 '금시초문'이라며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내가 내미는 서류를 뜨악하게 쳐다보는 담임을 맞닥뜨려야 했으며, 분기마다 똑같이 나눠준 일반 등록금 고지서를 들고 다시 서무과에 찾아가 재발급 받아야 했다. 같은 재단의 고등학교를 다녔으므로 매번 같은 서무과에서 등록금을 처리했음에도 졸업할 때까지 내내!

고등학생이 되었을 즈음엔 그런 선생들의 태도에 의연할 수 있었지만, 청소당번에 걸렸을 때를 제외하곤 교무실에 가는 걸 몹시 실어했던 내가 학기초마다 교무실에서 무지한 담임에게 낯선 서류를 들이밀며 장황한 설명을 해야하는 그 현실이 정말이지 괴로웠다. 내심 등록금 밀려서 불려간 아이들과 뭐가 다른가 싶었던 모양이다. 당연히 친구들에겐 설명하기 어려운 등록금 면제의 이유를 발설하지 못했다. 어쩐지 그까짓 등록금 얼마나 한다고 그걸 안내려고 발버둥치느냐는 비아냥거림이 날아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난데없는 교복 자율화 때문에 고2때부턴 사복을 입고 다녔는데, 나이키 아니면 프로스펙스 운동화에다, 우산 그림이 선명한 옷과 양말, 조다쉬니 서지오바렌테니 하는 고가의 청바지를 매일 떨쳐입고 다니는 몇몇 부잣집 아이들이 이름없는 시장표 옷을 입고 다니는 대부분의 아이들을 깔보던 시절이기도 했다. 나 또한 기죽지 않으려고 세뱃돈 모아서 유명브랜드 운동화 정도는 신고 다녔고, 고가의 브랜드는 아니어도 백화점 기획상품 정도는 사줄 수 있는 집안 형편에 감사했지만 어쨌거나 '등록금 면제자'의 신분은 굳이 드러낼 이유가 없다며 영영 비밀에 부쳤다. 또래 집단에서 남들과 다르다는 게 얼마나 치명적인지 그저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던 것 같다.

무상급식 문제가 대두되자마자 나는 조카에게 의견을 물었었다. 대체 누구의 의견에 물든 것인지 모르겠지만 열두살짜리 조카는 대번에 자긴 반대라고 했다. 지금도 학교 급식이 가끔 토나올 것처럼 부실한데, 공짜밥이 되면 더 끔찍하게 나올 거라는 게 어린아이들 사이의 여론이라고 했다. 켁. 나는 얼른 설득에 나섰다. 무상급식이 된다고 해서 급식의 질이 떨어지는 일은 없다. 너희들이 급식비로 내는 돈만큼 똑같이 정부에서 자금을 지원해주는 것이고, 지금은 어떤지 모르지만 전부 친환경 급식으로 바꿔 먹으면 건강에도 이롭다. 외삼촌 할아버지댁에서 농약 안뿌리고 직접 키운 토마토랑 상추는 맛부터 다르지 않니.... 그랬더니 그럼 상관없다며 조카는 금세 찬성으로 의견을 바꾸었다. 나는 다시 물었다. 너희 반에서 가정형편 때문에 무상으로 급식을 먹는 아이들이 누군지 아느냐고.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당연히 다 알지. 걔네들 왕따야.

초등학생이라 당번을 정해 교실로 식판과 배식통을 가져와 급식을 하는 모양인데 가끔 못된 아이들은 무상급식을 받는 아이들에게 유독 인기없는 반찬을 잔뜩 올려주며 "너는 남기지 말고 꼭 다 먹어라."라며 은근히 놀린다고도 했다. 아... 어쩌면 어린아이들도 그런 상처 주는 짓을 서슴지 않는지. 무상급식을 반대하는 자들의 논리는 '부자'들에게도 공짜밥을 줄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현재 무상급식 혜택을 받고 있는 저소득층 자녀들의 신분이 절차상 학교에서 노출될 이유가 없으며, 무상급식에 드는 엄청난 비용으로 차라리 공교육의 질을 높이는 힘써야 한다는 것이다. 도대체가 말이 되지 않는 논리다. 그럼 애당초 초중등학교 의무교육은 왜 실시했는데? 등록금을 낼 수 있는 부자들에게까지 뭣하러 무상교육을 실시하기로 했을까? 등록금은 급식비와는 비교되 되지 않을 만큼 어마어마한 재원인데? 무상급식에 필요한 재원이 부족하다는 서울시장의 주장에는 물론 코웃음만 나온다. 디자인 서울이니 뭐니 해서 온 시내에 돈지랄을 떨어놓고 재원이 없다니, 교육이 백년지대계라는 건 깡그리 잊어먹고 몇년 지나면 죄다 또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보수하고 (청계천을 보라!) 뜯어고쳐야 할 외양으로만 생색내는 건 왜 그리 좋아하느냐고! 

무상급식은 엄연히 평등한 교육의 시각에서 접근해야 할 아이들의 기본권이다. 어차피 아이들 사이에도 빈부의 격차로 형성된 계급과 차별이 존재하는 교실에서 (무슨 동네 사니? 아파트 몇평이니? 아빠 차 뭐니? 따위의 질문은 더 이상 속물 어른들 사이에만 오가는 게 아니다) 밥 하나도 눈치보며 먹어야 하는 아이들을 만드는 현실은 너무 잔인하다. 사실 내 경우 등록금을 면제 받을 수 있다는 건 생각하기에 따라 특권의 일종이었음에도, 감수성 예민한 사춘기 시절 나는 그 '비밀'이 드러나 반아이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쳐다볼까봐 등록금 납입기간마다 조마조마했다. 하물며 급식비 면제 대상자였음을 감추어야 했다면 과연 나는 어땠을까. 아니, 그 사실을 꼬리표처럼 학창시절 내내 달고 다녀야 한다면.

어차피 파탄난 공교육은 특목고다, 자율형사립고다, 일부 대안학교다 해서 고가의 학비 부담을 전제로 하는 차별적인 제도 때문에 이미 평등한 교육의 원칙조차 무너져가고 있다. 그나마 아이들이 최대한 동등한 대우를 받는 시기는 초중등학교까지로 제한된다는 뜻이다. 부모의 경제력도 부족해 조부모의 경제력이 뒷받침 되어야만 따라갈 수 있다는 엄청난 사교육비를 부담하지 못하는 저소득층 가정의 아이들은 어차피 특목고니 자사고니 하는 특권층으로의 편입이 애당초 불가능하다. 알량하게 입학정원에 저소득층 학생들의 비율을 정해놓았다고는 하나, 더는 개천에서 용이 나올 수 없는 구조의 이 사회에서 그런 제도는 빛좋은 개살구일 뿐이다.

서울시장은 여전히 예산 700억이 없어서 부자급식은 할 수 없다고 버티는 중이다. 볼썽사나운 건 수십년에 걸쳐 한강변에 무식하게 네모나게 지어댄 아파트들인데 자꾸 한강둔치에 별 쓸모도 없는 시설만 늘리며 한강 르네상스 타령만 안했어도 서울시 예산은 확보됐을 거라는 거 이젠 모르는 사람 없을 거다. 제발 애들 밥좀 편히 먹이자는데 그렇게 유치하게 버티지 말자. 급식비 면제 대상자로 선정되며 알게 모르게 상처받는 아이들을 더는 만들지 말자. 속물 어른들을 따라서 가난이 죄이고 잘못인 것처럼 여기게 된 대다수의 아이들이 적어도 학교와 학교에서 먹는 밥 앞에선 모두 평등하다는 걸 알게 해야 한다.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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