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유

하나마나 푸념 2009. 5. 30. 16:40

그저 궁금했다.
인간적인 연민과 슬픔이야 나도 느끼는 것이지만 무작정 미화되는 그의 모든 정치행적에 동감할 순 없었기에 조문은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 그저께밤부터 시청앞엔 나가서 머릿수를 보태야한다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죽음의 정치적 이용이니, 소요사태 우려니 하는 돌머리 인간들의 입바른 말도 나의 삐딱함을 부추겼다. 촛불과 광장 공포증에 걸린 듯한 현정부를 조롱하는 의미에서라도, 그리고 자기 재직시절에 만든 광장이라 제 땅인줄 착각하는지 명바기가 걸핏하면 차벽을 쌓아 막아놓는 시청앞 잔디도 좀 밟아주고 싶었다. 굳이 덕수궁으로 찾아가 꼬박 세시간을 기다려 조문을 하고도 마지막날 밤 아직 조문 못한 지인을 데리고 또 가보겠다는 측근들과 헤어져 홀로 집으로 돌아오며 궁금증이 동하기도 했다. 봉하마을과 덕수궁을 비롯한 빈소를 지키고 찾아가고 일주일 내내 애통해하는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이들이며, 현직때는 그토록 욕하며 낮은 지지율을 보이더니 국민들이 고인의 열혈지지자로 돌변한 이유는 뭘까. 
영결식은 관두고 처음부터 1시 노제를 목표로 했으면서도 뜨거운 햇살아래 나서는 게 망설여질만큼 시큰둥한 참여자였던 내 눈으로는 도무지 까닭을 알 길이 없었다. 광장을 메운 사람들의 면면은  참으로 다양해서 어떻게든 뭉뚱그려 파악할 수 없었고 검은 물결속에 유독 도드라져 보이는 노란 풍선과 노란 모자 때문에 분위기는 숙연하면서도 경쾌하기까지 했다. 노제가 끝나고 눈물로 영구차를 떠나보낼 무렵, 나로선 가족에게도 잘 하지 않는 말인 "사랑합니다"라는 외침을 사람들은 너도나도 크게 따라했다. 다들 울며 잊지 않겠다고도 다짐했다. 그 옆에서 나는 속으로 "정말? 과연 그럴까? 그 다짐들이 얼마나 갈까?"하며 의구심을 되뇌이고 있었다.

추도사를 거부당한 김대중 대통령의 말이 맞는 것도 같다. 국민들이 이토록 슬퍼하는 건 민주주의가 퇴보했기 때문이라고 믿고 싶다. 대중과 국민을 위한 정책과 정치는 사라졌고, 순순히 말 안들으면 잡아 가두고 일터에서 쫓아내 굶겨 죽이겠다는 서슬 퍼런 칼날만 휘두르는 시대로 되돌아가고 있지 않은가. 늙은 엄마와 어린 조카까지 이끌고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시위 촛불을 들러 나갔을 때, 나는 광장에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았다고 생각했었다. 눈앞의 이익에 어두워 사기꾼 정치인을 대통령으로 뽑은 국민들이긴 해도 대중들만 똘똘하게 지조를 지키면 일개 권력자가 나라를 완전히 들어먹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촛불의 물결에 놀랐는지, 반성하겠노라며 겸허히 국민의 뜻을 받아들이겠다고 발표했던 사기꾼 대통령은 손바닥 뒤집듯 이내 태도를 바꾸었고, 군사독재 시절처럼 국민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걸핏하면 잡아가두는 공포정치를 실천하고 있다. 게다가 국민들도 예전과는 다르다. 대의니 정의니 하는 것들은 이제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광우병 우려 때문에 많은 이들이 촛불을 들었던 건, 정치적 대의보다는 유달리 건강에 신경을 쏟는 현대인들의 강박증이 더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자기네 집값 땅값 올라가고 재산 많이 모으는 것이 최고의 가치라, 철거민 세입자들이 길바닥으로 나앉든 말든 시위하다 죽어가든 말든 조금도 관심 없고 주거환경 나빠진다며 주변에 임대아파트 들어서는 걸 반대하는 이기적인 인간들이 요즘 국민의 전형이다. 어차피 연임도 안되는 대통령은 3년만 더 참다가 갈아치우면 된다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수치심 없이 탐욕을 최고 선으로 당연시하는 한 희망은 없으니 그게 더 큰일이다.

어쩌면 어제 나는 수십만명이 운집한 시청앞 광장에서 또 한번 희망을 꿈꾸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수없이 방송에서 되풀이되는 고인의 과거 영상 속에서, 살기 힘들어서 스스로 목숨 끊는 사람들이 더는 없는 공평한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하는, 나도 그를 믿고 지지했던 때의 장면을 보며, 어느 노동자의 분신 자살 사건을 두고 이제는 분신으로 자기 뜻을 관철하는 시대는 지났다고 냉혹하게 말하던 재임 대통령 시절의 그가 떠올랐었다. 그러던 그 역시 스스로 몸을 던져 자신의 뜻을 표했으니, 이 사회는 여전히 수십년 전의 불공평하고 암울한 그림자를 벗어나지 못했음을 몸소 입증했다는 의미다. 파르르 쉽게 들끓었다가 또 단세포 동물처럼 쉽사리 잊기를 잘하는 이 나라 국민들도, 과거엔 억울한 죽음 앞에서 퍽 의미있게 여론을 수렴해 역사와 사회에 변화를 이끌어 왔던 것이 사실이다. 이젠 웬만한 죽음 앞에서도 쉽게 고개를 돌리는 이기심이 팽배하고 있지만, 부디 이번 죽음은 유의미한 국민들의 자각을 오래오래 이끌어주기를 빈다. 아무리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고 하더라도 제 아무리 전직 대통령이었다고 해도, 다른 사람이었다면 이토록 가열된 추모열기를 촉발할 순 없었을 테니까.
내 손으로 투표를 해놓고도 정말 대통령이 됐다는 게 믿어지지 않아 감격했고, 말도 안되는 탄핵 사태때는 연일 광화문으로 달려가 촛불을 들었으되, 그 이후로는 거의 모든 정책에 실망해 계속 욕을 할 수밖에 없었던 그에게 나는 특별히 미안할 것도 없지만, 퇴임 후에도 언론의 무시와 억측 속에 고뇌에 찬 극단의 선택을 한 그의 죽음이 나 역시 안타깝고 서글펐기에 어제 시청앞에 나간건 어쨌거나 잘한 일인 것 같다. 이젠 남겨진 자들의 행보를 지켜보는 것뿐인데, 또 다른 절망의 가능성도 없지 않으므로 섣부른 희망의 여지는 아주 조금만 남겨둘 작정이다. 삼성재벌은 면죄부를 받았고, 시청앞 광장은 다시 빼앗겼고, 고인에 헌화하며 야유를 받았던 명바기는 뜨끔하기 보다는 속으로 이를 갈았을 거다. 
어디 한 번 두고 보자. 
Posted by 입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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