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5월 23일.
막내 조카가 만 세돌을 맞는 날이었다. 막내동생네 집으로 축하하러 가기 전에 조카가 좋아하는 약식을 만들 작정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데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웠다.
이어지는 뉴스 속보를 계속 보면서도 멍한 느낌일 뿐 믿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화면과 원고 읽기가 되풀이되다가 한시간쯤 지나면 새로운 속보가 이어지는 TV를 계속 틀어놓고 나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약식을 만들어 잣으로 하트를 그려넣었고, 조카에게 줄 생일카드를 적었고, 짤막한 유서 내용이 공개될 즈음 조카들과 놀아주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으려니 큰동생이 물었다. "누나는 조문하러 봉화마을에 안 가냐?"
"나 노사모 아냐! FTA이후로 나 노무현 버렸잖아!" 나는 버럭 화를 내듯 말했다. 왜 화가 나는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꽤 오래 담배를 끊었다가 몇해 전부터 다시 골초가 되어버린 큰동생은, 그 순간 만약에 경호원에게 담배가 있었고 그래서 그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문득 나는 2년전 아버지의 죽음 뒤 수없이 <만약에>를 상상하며 자책했던 모녀를 떠올렸다.
만약에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을까.
만약에 몸살 기운 있는 아버지의 전날 등산을 못가게 말렸더라면.
만약에 응급실 의사가 엉뚱한 말라리아로 의심하는 대신 뇌수막염을 먼저 의심해 척수검사를 했더라면.
만약에 아버지가 숨겼던 건강진단 결과서류를 진즉에 내가 빼앗아 읽었더라면...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조카들의 재롱에 깔깔 웃고 있던 저녁 무렵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마음이 아파서 혼자 술 한잔 하고 있는데 전화 할 데가 없더라..."
2002년 대선에서 선거 전날밤 정몽준이 전격적으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를 발표했을 때, 마침 메신저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 녀석이 손수 만든 전단지를 들고 나가 동네에라도 뿌려야겠다고 울분에 떨며 접속을 끊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시답잖은 위로랍시고 몇 마디를 떠든 뒤 이내 전화를 끊었고, 다시 조카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며 웃어댔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계속되는 뉴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도 가슴 깊은 곳의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나 말고도 화와 분을 삭이지 못한 이들이 더러 뉴스에 비쳤지만 그들의 분노와 내 화가 같은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화는 묵직한 응어리로 내 팔다리에 매달려 나를 자꾸 끌어내리고 있는 듯하더니, 이제야 비로소 영정사진이며 생전 영상을 볼 때 눈물이 난다. 이제는 편한 곳에 계시길 빈다는 말, 명복을 빈다는 말을 하거나 쓰는 것도 구차하게 느껴지는 내 기분은 아직도 슬픔보다 분노에 훨씬 더 가깝다. 안과 밖을 동시에 향한 나의 분노가 속으로 곪을까봐 결국 배설하고 있는 이 행위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또 화는 꼬리를 문다. 그래도 이건 오래 담아두고 기억하고 끝까지 지켜보리라는 결심의 기록이라는 것으로 위안할 작정이다.
막내 조카가 만 세돌을 맞는 날이었다. 막내동생네 집으로 축하하러 가기 전에 조카가 좋아하는 약식을 만들 작정이라 다른 날보다 일찍 알람을 맞춰놓고 자는데 아침에 엄마가 나를 깨웠다.
이어지는 뉴스 속보를 계속 보면서도 멍한 느낌일 뿐 믿어지지 않았다.
똑같은 화면과 원고 읽기가 되풀이되다가 한시간쯤 지나면 새로운 속보가 이어지는 TV를 계속 틀어놓고 나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약식을 만들어 잣으로 하트를 그려넣었고, 조카에게 줄 생일카드를 적었고, 짤막한 유서 내용이 공개될 즈음 조카들과 놀아주려고 일찌감치 집을 나섰다.
조카들에게 책을 읽어주고 있으려니 큰동생이 물었다. "누나는 조문하러 봉화마을에 안 가냐?"
"나 노사모 아냐! FTA이후로 나 노무현 버렸잖아!" 나는 버럭 화를 내듯 말했다. 왜 화가 나는지 누구한테 화를 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저도 꽤 오래 담배를 끊었다가 몇해 전부터 다시 골초가 되어버린 큰동생은, 그 순간 만약에 경호원에게 담배가 있었고 그래서 그가 담배를 피울 수 있었다면 세상을 떠나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고 중얼거렸다.
"글쎄 그건 모르는 일이지..."
문득 나는 2년전 아버지의 죽음 뒤 수없이 <만약에>를 상상하며 자책했던 모녀를 떠올렸다.
만약에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그냥 집에 있었더라면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지 않을까.
만약에 몸살 기운 있는 아버지의 전날 등산을 못가게 말렸더라면.
만약에 응급실 의사가 엉뚱한 말라리아로 의심하는 대신 뇌수막염을 먼저 의심해 척수검사를 했더라면.
만약에 아버지가 숨겼던 건강진단 결과서류를 진즉에 내가 빼앗아 읽었더라면...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불리고 조카들의 재롱에 깔깔 웃고 있던 저녁 무렵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마음이 아파서 혼자 술 한잔 하고 있는데 전화 할 데가 없더라..."
2002년 대선에서 선거 전날밤 정몽준이 전격적으로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철회를 발표했을 때, 마침 메신저로 나와 이야기를 나누던 친구 녀석이 손수 만든 전단지를 들고 나가 동네에라도 뿌려야겠다고 울분에 떨며 접속을 끊던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나는 가벼운 목소리로 시답잖은 위로랍시고 몇 마디를 떠든 뒤 이내 전화를 끊었고, 다시 조카들과 애니메이션을 보며 웃어댔다.
늦은 밤 집에 돌아와 계속되는 뉴스를 이리저리 돌려보면서도 가슴 깊은 곳의 화가 가라앉지 않았다. 나 말고도 화와 분을 삭이지 못한 이들이 더러 뉴스에 비쳤지만 그들의 분노와 내 화가 같은 종류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틀이 지난 지금 화는 묵직한 응어리로 내 팔다리에 매달려 나를 자꾸 끌어내리고 있는 듯하더니, 이제야 비로소 영정사진이며 생전 영상을 볼 때 눈물이 난다. 이제는 편한 곳에 계시길 빈다는 말, 명복을 빈다는 말을 하거나 쓰는 것도 구차하게 느껴지는 내 기분은 아직도 슬픔보다 분노에 훨씬 더 가깝다. 안과 밖을 동시에 향한 나의 분노가 속으로 곪을까봐 결국 배설하고 있는 이 행위도 이기적이라는 생각에 또 화는 꼬리를 문다. 그래도 이건 오래 담아두고 기억하고 끝까지 지켜보리라는 결심의 기록이라는 것으로 위안할 작정이다.